챈들리스크


레이먼드 챈들러 - 밀고자 외 8편, 레이먼드 챈들러, 현대문학, 2016-04-08.


  새정부 들어 공인탐정제에 대한 논의가 있다. 탐정은 어린 시절부터 읽은 셜록 홈스 덕분에 익숙하고 열광적인 직업으로 여겨진다. 아니, 직업으로서의 탐정을 생각해보진 않았기에 왠지 로망이 현실가 맞물려 어떤 형태가 될지 궁금해지긴 한다. 실제 존재한다면, 실생활에서 적용한다고 생각하면 소설 속에서 보던 그 낭만적인 느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탐정’의 형태가 흥신소의 고급 버전이니까. 흥신소가 갖는 그 불법적이고 불쾌하고 음침한 이미지가 ‘탐정’에 드리워질까 염려되는 점이 있다. 그래도 나날이 범죄가 증가하고 CCTV 보관기일의 한계로 단서를 놓치는 경우도 많으니 이 제도가 도입이 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범죄수사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단점도 있을 테고 그 장단점이 잘 맞물려 해결되기를 희망할 뿐이다.

  범죄가 증가하는 것은 싫지만 범인을 잡고 사건의 해결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은 분명 짜릿함 쾌감이 있다. 탐정소설, 추리와 미스터리 소설이 인기있는 이유일 것이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이 탐정소설을 ‘문학’으로 이끈 작가로 유명하다. 또한 헤밍웨이체로 유명한 ‘하드보일드’를 장르화시킨 장본인이자 여타의 작가들-무라카미 하루키, 로스 맥도널드, 마이클 코넬리, 하라 료-이 그의 영향을 받았음을 얘기하고 있다. 1930~40년대의 미국의 분위기를 흠씬 드러내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은 영화계에서도 크게 호응해서 그의 작품은 영화화된 것이 많다. 그리고 그가 남긴 것이 바로 탐정 필립 말로이다. 유명한 캐릭터를 창조한 것이다.

  “하드보일드.” 이 말의 본뜻은 삶은 계란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푸욱 삶은 계란이다. 반숙이 아닌 완숙으로 팍팍하고 물기 없는 건조한 계란을 가리키는데 이 말이 소설과 영화로 넘어가면서 새로운 의미가 더해졌다. 바로 건조한 문체다. 수식이나 감정은 배제한 사실주의적인 표현을 쓰는 걸 가리킨다. 폭력의 잔인성 때문일까, 폭력적이니 주제에 주로 사용되어 오히려 더 공포감을 배가시키기도 한다. 당연, 탐정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고 레이먼드 챈들러가 이런 스타일로 탐정소설을 가볍게 읽고 넘기는 글이 아니라, 문학적인 경지로까지 이끌었다고.

  작가의 생애 또한 흥미롭다. 1932년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고 대중소설 잡지를 읽으며 지내다가 소설을 쓰고 마흔이 넘어서 작가로 데뷔한다. 하지만 대공황 이전에도 그는 특별히 ‘일’에 대한 애착이 있었던 것 같진 않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지만 6개월만에 그만두고 몇 번의 일자리를 얻었지만 그때마도 불성실한 근무태도를 보였다. 전쟁에 참전하였고 18세 연상의 여인과 연애를 했고 어머니의 반대로 어머니의 사망 후에 결혼했다. 다른 여성들과의 염문 이야기도 흘러나오는데 아내의 죽음 이후에는 과음과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건강악화로 입퇴원을 반복했다. 그가 사망하던 해엔 비서에게 병원에서 청혼했다고 한다. 70평생의 그의 삶을 보건대, 어쨌든 자유로운 영혼이었다고 느껴진다.

  고전적인 느낌이 드는 그의 소설은 탐정소설임에도 그 건조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낭만성이 풍긴다. 시대적인 분위기가 가미되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확실히 ‘흥신소’에 일을 맡긴 것이 아니라 고급 탐정에게 일을 맡긴 기분이 든다. 잔인하고 악랄한 느낌보다 쓸쓸한 느낌이 먼저 다가온다. 어쩌면  사건보다 인물, 탐정 필립 말로에 중점이 두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날 밤 사막바람이 불었다. 고온 건조한 샌타애나의 전형적인 열풍이었다. 이 바람이 산 고개를 넘어 내려오면 머리카락이 곱슬곱슬 말리고 피부가 가려워지고 괜히 초조해진다. 그런 밤이면 어느 술판이든 한바탕 싸움으로 끝난다. 유순하고 가냘픈 아낙네들은 식칼의 날을 만지며 남편의 목을 노려본다. 어떤 일이든 가능하다. 칵테일 바에서 거나하게 맥주를 걸칠 수도 있다.

  

  사건이 있었고 문제가 발생했고 그것을 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사건’보다 저런 묘사가 기억에 남는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이야기, 스토리를 이해하며 쫓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표현방식에도 눈길을 주고 있다는 걸 다시금 알았다. ‘챈들리스크Chandleresque’라 불리는 작가의 문체가 갖는 힘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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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중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 은유, 서해문집, 2016.12.26.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제목을 보면서 감정의 분출로 인해 그 순간의 속시끄러움이 조금은 해소가 되었다는 그런 의미를 생각했다. 싸웠다는 자체로 뒤늦은 후회가 밀려오긴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카타르시스가 작용할 테니. 물론, 일방적으로 깨지는 싸움이라면, 아무런 말도 못하는 거라면 전혀 카타르시스를 느끼진 못하겠지만. 어쨌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그렇기라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제목이 좋다 생각했다.

  작가는 필명만큼이나 은유를 잘 다루는 것 같다. 수유너머에서 활동하고 있느니만큼 “수유너머향”이 글에도 풍긴다. 철학과 인문학의 접합, 니체향이 좀더 더해지고 일상의 행위와 사유에서 존재를 생각하는 것. 아무튼 글쓰는 일이 힘들다 하지만 삶의 희로애락을 다루는 방식이 글쓰기인 작가에게 부러움을 느낀다. 


사는 일이 힘에 부치고 싱숭생숭이 극에 달하는 날이면 글을 썼다. 오직 노릇과 역할로 한 사람을 정의하고 성과와 목표로 한 생에를 평가하는 가부장제 언어로는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몸에 돌아다니는 말들을 어디다 꺼내놓고 싶었다. 꺼내놓고 싶은 만큼 꺼내놓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고유한 슬픔일지라도 언어화하는 순간 구차한 슬픔으로 일반화되는 게 싫었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말하고 싶음과 말할 수 없음, 말의 욕망과 말의 장애가 충돌하던 어느 봄날, 나는 이미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여자, 존재, 사랑, 일. 책속에서 다루는 네 가지 주제다.

  이 땅에서 여성이란 존재로 살아가는 일이란 특히 피곤한 일이라 말하고 싶진 않지만 언제나 그렇게 되어 버린다. 본질적인 자아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지만 여성이란 명명에 타인의 시선과 제도와 관습으로 인해 전진하지 못하는 일들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 땅의 여성들의 이야기는 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 같다. 여자라서 엄마의 삶으로 더 살아가야 하는 것, 육아와 가사와 삶, 직장일을 공존시키며 행복하고 평화로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의 힘겨움, 남편과 아이에 종속된 삶의 존재로서의 ‘나’, 사랑하는 일과 노동하는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생각들.

 수많은 개인들을 만나 이야기하면 그들의 경험과 거기에서 느낀 감정은 너무나 같다. 그러니 특별히 공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단지 너무 같은 이야기의 돌림이라 지겨울 때도 있다. 그럼에도 왜 여성들의 글쓰기를, 페미니즘이란 책을 계속 읽고 읽는 것일까. 명백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데도 왜.

  말하는 사람이 다르니까. ‘누가’ 이야기하느냐라는 점에서 접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누구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 각각에 대한 공감과 위로를 건네기 위함이 아닐까. 같은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이야기를 하는 각각의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너의 생각이 이렇구나, 너의 경험에 네가 힘들었구나, 잘 버티어 주었다. 앞으로도 잘 버티어 나가자, 라고 말하기 위한 것 아닐까.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한결 수월한 게 삶이라는 것을,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을, 시는 귀띔해주었다.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면 그 절망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나는 시를 통해 이해했다.


  매번 이런 책을 찾아서 아픔의 지점을 확인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결 수월하게 살아가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자 발버둥. 이러한 책들이 많아진다는 건, 아픈 이들이 많다는 얘기인가. 발버둥치는 이들이 더 많다는 이야기인가. 사는 일에 부칠 때마다 글쓰기라도 된다면 좋으련만. 글쓰기로도 무엇으로도 위로되지 않는 시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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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념


가만한 당신 - 뜨겁게 우리를 흔든, 가만한 서른다섯 명의 부고, 

최윤필, 마음산책, 2016-06-30.


  신문 속 단 몇 칸. 이름만 적힌 부고란을 보면서도 먹먹할 때가 있다. 누군지 전혀 모르는 이들의 이름이 사망자 명단에 있다는 것이 주는 느낌,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강한가. 그런데 이름 몇 글자에서 더 나아가 그들의 한 생애까지 알고 나면 그들이 보낸 한 생에 대한 연민이 더해진다. 이 책은 그렇게, 이 세상의 보다 나은 변화를 위해 한발짝 더 멀리, 깊이, 높이 움직인 이들의 ‘부고’와 함께 그들의 생을 담담히 요약하여 전하고 있다.

  그래서 아쉽다. 타인의 생에 대한 서술에 드라마틱함을 요구한다는 것이 송구하지만 ‘책’이라는 점으로 접근하면 담백함이 자칫 단순·지루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객관적인 생애에 대한 서술은 좋지만, 전반적으로 단조롭게 느껴졌다. 이들의 생애 자체가 드라마틱한 것이지 구성과 서술은 아니었다. 저자는 특별히 이들 삶에 자신의 의견을 더하는 걸 자제했다. 여러 자료들을 더해 ‘보여주는 것’을 중점으로 했다. 평전이 아니라 ‘부고’라는 점을 다시 상기해야 했다. “뜨겁게 우리를 흔든” 그러나 “가만한” 서른 다섯에 대한 부고라는 점을.


낯선 이의 가만한 미소 혹은 가만히 건네는 손의 온기가 값진 위안이 될 때가 있다. 힘겨운 자리에 혼자 섰거나 그런 기분에 지친 이에게는 마주 서는 것보다 나란히 서서 가만히 같은 곳을 바라봐 주는 게 고마운 일일지 모른다.


  저자는 “가만한 당신”이란 제목을 붙였다. 가만하다는 말은 조용하다는 말이다. 사전은 “(움직임이)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차분하다”라고 정의한다. 이들의 삶은 결코 “가만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삶의 경험을 “투쟁화”하며 불의와 억압에 맞서려던 그들의 정신은 같은 경험을 공유한 이들의 아픔을 위로하며 감싸안고 차분히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낯선 이의 행동 하나가 오늘날 내가 누리고 있는 현실을 만들었다는 것을 요약된 그들의 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아직도 여전히 변화는 필요하고, 또 필요하지만 그들이 시작점을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페미니스트로, 인권운동가로, 장애인운동가로 거짓을 폭로하고 진실을 추구하는 자로, 차별과 억압을 철폐하는 것에 자유를 누릴 권리에 대해 온 힘으로 외치고 외쳤다. 저자가 어떤 기준으로 서른 다섯 명의 부고를 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른 다섯 명 중에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많았고 대체로 여성이기에 폭력과 차별을 경험한 이들이기도 했다.

  하요 마이어라는 유대인 강제수용소 생존자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는데 ‘시오니즘’에 대한 나의 관심 때문이었다. ‘시오니즘’이 갈수록 불편하게 느껴져 같은 지점의 생각을 만나서, 유대인의 시오니즘 비판이라 눈여겨봐졌다. 하요 마이어는 분명 강제수용소가 유대인을 비인간화하는 공간이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아우슈비츠의 경험을 시온주의자들의 행태에 비교하면서 생각한다. “이스라엘이 시오니즘적 야심과 범죄를 감추기 위해 아우슈비츠의 의미를 왜곡하고 있다”고. 시오니스트들이 “아이들에게(영토 확장과 팔레스타인인 축출의) 편집증을 주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홀로 코스트를 이용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1970년대 초 여성 최초로 뉴욕 중심부에 섹스토이숍을 연 델 윌리엄스의 이야기도 놀라웠다. 언뜻 “사업수완”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는데 델 월리엄스의 동기는 “여성의 주체성 성 의식의 자유와 권리”였다.

  호주의 백호주의 정책에 따라 수용소에 갇혀 살아야 했던, 그러나 두 어린 동생을 이끌고 수용소를 탈출해 9주 동안 맨발로 1600킬로가 넘는 거리를 걸어 고향으로 돌아온 원주민 몰리 캘리의 삶도 잊지 못할 것이다. 또다시 끌려가고, 탈출하고, 아이들을 빼앗긴.

  돌아보면 역사 속에서 인간은 참으로 가증스럽고 극악무도하게 등장한다. 결코 가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이끌어 간 것은, 역사가 정의롭게 흘러가도록 이끈 것은 안타까이 부고를 전한 이들처럼, 끝끝내 ‘가만하게’ 미소를 짓고 손은 건넨 이들이었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시 삶이란 이러한 이들을 만나는 희망에 의지해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이런 생각도 든다. 그래서 이들의 부고에 깊이 머리 숙여 묵념한다. 이들의 삶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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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풍경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교양인, 2013-02-12.


더욱 중요한 시사점은 평화시 남성 중심적인 놀이 문화가 바로 전쟁시에 집단 강간이나 대략 학살과 같은 폭력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집단 강간, 고문 등 전시 폭력은 ‘광기’ 때문에 급작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상 문화의 연장선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남성들의 폭력적인 일상 문화를 성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납치살인사건 납치 목격자, 부부싸움하는 줄 알고 지나쳤다 

 ∙내연녀 말다툼 후 목졸라 살해, 시신 유기…지난 남자 만난 얘기에 홧김에

 ∙동거녀 목졸라 살해 교회 베란다 유기… “끝내겠다” 범행 암시

 ∙‘예전에’ 식당주인과 다퉜다고, 여친 창밖 던지려한 30대, 흉기도 휘둘렀으나…감형

 ∙하동 대안학교 40대男 교사 여중생 3명 강간·성추행, 현재 잠적. 교장, 교사 3명, 행정실장, 교직원 2명 같은 혐의로 입건


  지난 한주의 ‘흔한’ 기사다. 익숙한 사건에 놀람이 현저히 줄어든다. 다섯 개의 기사에서 세명의 여성이 ‘목졸라’ 살해됐고 버려졌다. 한명은 수없이 폭행당했고 죽을 뻔했다. 몇 명일지 모르는 중학생 아이들이 폭행당했고 어떤 아이들은 성폭행당했다. 한명이 아니라 몇 명일지 모르는 이들로부터 일 수 있다.

  내연녀가 “지난 남자를 만난 얘기를 해서” 홧김에 목을 졸랐다는 남편 있는 여자를 만나는 남자,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끝내겠다”며 친구와 통화하고 실행한 남자, 관계를 끝내는 방법이 목졸라 화단에 버리는 것인가? 떡볶이를 먹는데 ‘전에’ 식당 주인과 말다툼을 했다는 이유로 격분해 여자친구의 머리채를 잡고 베란다로 끌고 가 창밖으로 던지려하고 흉기로 죽여버린다 위협하고 폭행했고, 이전에도 10여 차례 폭행하거나 상해를 가했으나 감형된 남자. 부부싸움을 하는 줄 알고 관여를 하지 않았다는 납치가 벌어진 장소에서 일하는 직원….

  떡볶이를 먹다가 여자친구가 ‘옛날에’ 식당 주인과 말다툼을 했다고 “격분”하는 이도 있는데 이런 뉴스를 보면서 “격분”하지도 못하는 난 뭔가. 다음 주에도 이런 기사들은 또 나타날 거라는 걸 아는 이의 반응이다. 인터넷에 파주에서 벌어진 최근 사건인 ‘파주 내연녀’만 검색해도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듯 연도별로 파주에서 벌어진 내연녀 살인·폭행 사건 기사가 쏟아진다. 성폭행, 강간 사건 역시 넘쳐나는데 단순히 ‘폭력’만 행사한 사건은 수두룩하다.

  개인의 비윤리성이라 성토한다 하더라도 반복된 이 ‘구조’를 들여다보면 역시 지친다. 정말 이 모든 기사들 속 가해자들의 인성과 윤리의 부족이거나 정신병의 문제일까. 기사는 A, B, C, 혹은 김모씨, 이모씨로 나타나니 넘치는 기사들 속에서 어떤 사건이 ‘나’에 대한 기사인지 쉽게 파악하기 힘들 정도다. 납치사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는 이, 어쩌면 가까운 사람이 가해자이다. 부부 싸움의 경우 큰 폭력으로 번지기도 하고 이때 대체로 남성이 가해자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생명이 오가는 상황일지라도 부부싸움을 말리기 위해 접근·관여하지 못하는 사회분위기가 여전히 있다. 아무리 사회가 변했다 해도, 아니라고 해도 이런 기사들을 반복적으로 접하다보면 정말로 남성들에겐 폭력의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정희진이 지적했듯이 말이다.


남성은 여성을 때릴 권리를 타고났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폭력 그 자체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폭력은 당연하거나 폭력이 아니다. 따라서 쟁점은 폭력이 아니라, 어느 정도인가, 왜 언제인가 따위다. 그래서 여성들은 “당신 미쳤어? 너도 나한테 맞을래?”가 아니라 “왜 이러세요?(지금이 그 때인가요?)”라고 가해자에게 묻는 것이다.


  벌써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간다. 세상이 보다 민주적으로 변화되기를 갈망한 지난 겨울과 봄의 경험이 여전히 ‘대통령’만 바뀌고 다른 것은 바뀌지 않았다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는 것처럼 남녀를 둘러싼 환경과 구조 역시 바뀐 듯 보일 뿐, 바뀌지 않았다. 인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이야기 중에 몇 번이라도 ‘여성’이 들어가면 당장 페미니즘이니 메갈이니 하며 성토하는 목소리가, ‘격분’하는 목소리가 있는 게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한다. 슬픔과 분노와 비통함 등등의 감정이 마구 휘몰아친다.


폭력은 원래 이유가 없다. 권력 행동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폭력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사회 운동은 그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파악해 그것을 ‘제거’하고 제약하는 것이다.


  최근 모임 뒤풀이에서 후배가 여자 선배에게 선배를 보는 순간 자신의 시누와 너무 닮아서 지금까지 아무 말을 건네지 못했다라고 고백했다. 여전히 자신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는 걸 알았다며 오래도록 감정을 토로한 일이 없었는데, 시누와의 관계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생애 ‘처음으로’ 털어 놓았다. 개인의 경험을 얘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들이 뒷담화로 시댁을 “까는” 그런 것과는 다른 형태의 진솔한 성찰이었다. 그런데…얘기를 듣던 남자 선배가 “공통의 주제로 얘기를 하자”했다. 다른 남자들이 불편해 하는 것이 보이지 않냐며.

  이 말에 격분까지 갈 뻔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공통의 주제라는 말도 그러했고 남자와 여자의 선을 긋는 태도에 불쾌함, 실망감, 섭섭함이 솟았다. 한 사람으로서, 선배로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남편’에 이입하여 이야기를 듣는구나 싶으면서도 개인의 무의식과 성찰을 주제로 한 이야기 끝의 그 말은, 배움이라는 것의 소용없음까지도 느껴졌다. 삐딱한 마음에 그 선배 앞에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이야기만 줄창 꺼내볼까 싶기도 했다.

  정희진은 페미니즘이니 여성주의니 하는 용어에 많은 이들이, 특히 남성들이 거부감을 느끼고 있고 “여성의 경험과 인식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남성의 생각이 곧 인간의 생각으로 간주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질문에, “당연하지요. 세상에 그것밖에 없으니까요.”라고 답한 프랑스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의 말대로,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 한가지 목소리마저도 알기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여성의 목소리도 높아 가는 듯한데 여전히 하나의 목소리만이 힘을 뻗어가는 기분은 왜일까. 존중, 존중하면서도 뒤에서는 비난하며 ‘결정적인’ 상황에 수용되는 목소리가 따로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일상화된 폭력, 폭력을 견인하는 이 권력의 힘. 여전히 페미니즘은 도전받고 있고, 도전해야 하고 갈 길이 멀다. 그나마 정희진처럼 풍부하고 쉬운 언어로 페미니즘에 대해 일상의 성정치학에 대해 글을 쓰는 이가 있어 감정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많이 배우게 되어 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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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작은 친구들 세트 - 전2권
도나 타트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미시시피의 아이들


작은 친구들, 도나 타트, 은행나무, 2017-02-28.


  사람들로 하여금 ‘천재’라는 평을 받는 작가의 기분은 어떨까. 왜인지 이 평의 당사자인 도나 타트는 전혀 괴이치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전진할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그 스타일이 소설을 ‘적게’ 쓴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소설을 자주 발표하는 대신 한번에 ‘길게’ 쓰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삼십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세 편의 장품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작은 친구들」이 「비밀의 계절」과 「황금방울새」에 이은 신간인줄 알았더니 그동안 국내 번역 출간이 되지 않은 2002년 출간작이다. 앞의 두 작품은 상당히 흥미있게 읽었다. 그렇기에 도다 타트의 작품을 기억하고 책을 선택함에 주저함이 없었는데 최근작이 아니라는 점에서 조금 아쉬웠다. 10년에 한번 책을 내는 과작 작가라고 하는데 2013년도에 책을 출간했으니 그럼 2023년도에는 신간이 나오려나.

  세밀한 묘사와 서사가 작가의 특징이다. 이것이 작품의 양으로 연결되는 것도 같다. 세 작품 모두 국내 출간에 2권짜리였다. 그렇기에 어느 지점에 가면 약간의 지루함이 생길 때도 있다. 이전 출간된 두 작품에 비해선 조금 지루함이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결말이 해결되지 않았기에 가지는 느낌일지 모르겠다.

  결말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은 이상하다. 이 작품은 1960년대 미시시피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아홉 살 소년 로빈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12년 후, 여전히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는 로빈의 죽음에 대해 로빈의 동생 해리엇이 그날의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소설을 읽는 동안 누가, 로빈을 죽였는가에 대해 풀리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데…. 이 소설에서 이 궁금증을 풀어주던가? 추리와 미스터리 소설인가 생각하게끔 시작한 소설은 따지고 보면 로빈의 살인자를 찾는 방향으로 흐르긴 한다. 단지, 일반적으로 보아온 추리소설의 스타일을 뛰어넘어 조용히, 그리고 아이의 시선으로 사건의 실마리를 밟아가고 있다.

  그렇다. 이 소설은 그냥 일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범인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해리엇의 노력과는 별개로. 어쩌면 이 소설에서 해리엇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장식같기도 하다. 해리엇만이 뚜렷하게 양각으로 부각되고 다른 이들은 정적이다. 이 정적인 흐름에 홀로이 급류를 타고 있는 해리엇이 안쓰러워 보이는 것은 어린아이다운 호기심으로 그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으며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가족들은 침체되어 있다. 그들은 로빈이 자신의 집 마당에서 사망한 이후로 마치 생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정적으로 변해 버렸다. 그들은 과거에 더 머물러 있었다.


가족 중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앨리슨이 설명하려 했어도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 항상 추억에 포위되어 현재와 미래가 오로지 과거의 반복이라는 도식으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앨리슨처럼 세상을 보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기억―연약하고 흐릿하지만 찬란하고 기적 같은 기억―이란 삶의 불꽃 그 자체였고, 그들은 모든 말을 과거로 시작했다.


  해리엇의 엄마는 그날 이후 약에 취해 늘 잠들어 있었다. 해리엇의 언니 앨리슨도 잠들어 있는 시간이 많고 항상 약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 수다스러운 클리브가의 자매들, 그러니까 해리엇의 할머니와 이모할머니들도 슬픔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그 사건 이후로 해리엇의 아빠는 다른 지역에서 가족은 방관한 채 생을 즐기고 있다. 해리엇의 가족은 12년 전 그날 이후로 항상 음지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똑똑하고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해리엇은 이런 음지같은 분위기를 형성하는 그날의 해결되지 않은 사건을 파헤치려는 결심을 한다. 이른바 탐문과 수사를 시작하며 첫 번째 용의자를 알아냈다. 이제 사건은 어린 날 로빈과 같은 나이였던,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문젯거리’인 래틀리프가의 형제들을 쫓는 것으로 나아간다.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기심과 열정으로 해리엇은 자신을 추종하는 친구 할리와 함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지만, 그것은 당연 험난하고 위험을 동반한다. 톰 소여, 허클베리 핀의 모험처럼 위험한 모험을 즐기는 개구쟁이들의 여정이 아니라 가족에게 드리운 그늘을 걷어내고픈 어린 아이의 조용하고 담백한 전진이 이 소설 전체에 흐르는 핵심으로 보인다. 긴, 호흡에서 1960~1970년대의 미국 미시시피의 분위기를 볼 수 있는데 흑인에 대한 차별과 빈부 격차의 상황을 주된 이야기의 흐름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해리엇 가족들의 상황에 무관했다고도 말할 수 없기도 하다. 시간의 변화만큼 해리엇을 둘러싼 가족들과 일상의 변화도 일어난다. 이모 할머니 리비의 죽음이나, 해리엇이 엄마의 애정을 갈구하며 애착을 가졌던 가정부 흑인 아이다와의 헤어짐, 자신이 뒤쫓던 범인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들. 이 여정에서 해리엇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변해가는가는 주요한 부분이다.

  

해리엇은 <보물섬>에서 히스파니올라호 옆 피로 따뜻해진 바다에서 떠다니던 해적 이스라엘 핸스를 생각했다. 그 대단한 여울은 악몽 같으면서도 아주 멋졌다. 공포, 가짜 하늘, 엄청난 환각 배를 잃었다. 해리엇은 그 모든 것을 혼자서 되찾으려 노력했다. 해리엇은 거의 영웅이 될 뻔했다. 하지만 이제 해리엇은 자신이 영웅이 아닐까 봐, 전혀 다른 것일까 봐 두려웠다. 


해리엇이 원하는 게 처음부터 불가능했다고 해도, 해리엇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도 나서서 노력했다는 사실에 쓸쓸한 위안이 있었다.


 역시 미국이란 나라의 분위기인가 싶게 12살 해리엇이 총기를 다루는 장면은 놀랍게 다가왔다. 범인을 찾기 위한 그 여정들을 가족들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마치 한여름 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당사자인 해리엇에게도 마치 환각의 일처럼 여겨지는 이 여정은 해리엇 스스로에게 영웅의 길이었느냐 아니었느냐는 물음을 갖게 한다. 그것은 해리엇이 한가지 목표에만 취중하며 쉽게 생각하고 간과한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게끔 하게 한다.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을, 이 여정 속의 모든 것들을 해리엇은 차곡차곡 되새겨 볼 것이다. 똑똑한 아이니까. 슬픔을 알고 그 슬픔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 아이니까. 아무리 조숙하다 한들 열두 살의 가족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의 참 아픈 성장통. 아이를 둘러싼 환경, 관계들의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물론 할머니는 나쁜 의도가 전혀 없었다. 검은 평생 죽어라 일만 하다가 망가진 불쌍한 노인일 뿐이었다. 평생 아무것도 갖지 못했고, 어떤 기회도 없었으며, 기회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왜 손자들에게도 기회가 없다는 뜻이 되는지 유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소설 속에서 대립적으로 등장한 클리브가와 래틀리프가를 보다 눈에 띄는 점이 클리브가는 모두 여성들, 래틀리프가는 남자들의 세계였다. 물론 래틀리프가에는 할머니, 검의 존재가 있긴 하지만. 클리브가는 부유층의 특성과 시끌벅적함이 사그라진 상태로 래틀리프가는 가난한 백인층으로 약물에 빠져 시종일관 환각 상태인 형제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가정의 로빈과 대니는 어린 시절 우정을 나누며 잘 지낸 친구인데, 세월은 ‘가정’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모습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음울의 분위기 속에서 해리엇은 스스로 영웅이 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고…. 변해갈 수밖에 없는 대니의 모습이나 래틀리프가 유진의 저 말이 참 안타깝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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