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자와 비판자


나는 왜 눈치를 보는가- 나를 발견하는 심리학, 가토 다이조저, 고즈윈.


  눈치를 본다는 건 흔히들 말하는 한가지만이 아니라 행동에 대한 여러 의미를 말해 준다. 나약하고 부족한 자아를 눈치의 표상으로 보통 얘기하지만 세심하고 배려심이 많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또한 눈치없다는 말은 타박으로 주로 사용되느니만큼 센스있음을 위한 전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눈치를 본다’는 건 그리 유쾌한 상황과 느낌을 주지 않는다는 점은 확실하다.

  ‘나를 발견하는 심리학’이란 부제가 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발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저자는 항상 불안하고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한 처방전처럼 이야기를 펼친다. 인간관계는 누구나 어려운 것이며 그 이유에 대해 찾고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저자는 불안과 인간관계의 어려움은 ‘유아적 의존욕구’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렇기에 그 해결책은 내재된 의존욕구를 파악하며 자신과 자신의 삶의 태도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자주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나를 사랑하는 일, 그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방안이라면 결국 나를 사랑하는 일은 나를 잘 아는 데서 시작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60개의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가령, 작은 일에도 상처를 받는 것이나 타인에게 헌신적으로 대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존감이 낮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이 하는 말이 ‘불만투성이’로 느껴진다면 그것은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유아적 욕구를 억누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많은 애로사항은 결국 내면아이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융의 심리학의 일정 부분들이 이 책을 지탱하는 기본이다.

  결국 유아기 때 제대로 충족되지 못한 욕구들이 성인이 되어서 ‘자아’를 뚫고 나와서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인데, 심술궂고 미성숙한 어린 나의 모습들이 지금 불완전한 생각들 때문에 힘겨워하는 나의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거듭 말한다. 얼핏 인지는 하면서도 실제 생활을 하면서는 늘 까먹게 되는 마음속 깊은 유아적 의존 행동들. 뒤돌아서는 후회하고 답답해하면서도 사실, 쉽게 그 마음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심리학책을 백번 읽은들 머릿속에서는 알고 있지만 마음에서 아이가 튀어나와 버리는 일이 빠를 때도 있으니까. 어쩌면 더 깊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진정 떨쳐내지 못했을 지 모를 일이고. 인간의 마음이 성장하는데 필요한 이해자와 비판자가 순서를 무시해서일지도. 이해자와 비판자가 적절하게 나오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나의 마음속을 잘, 들여다보고 알아가는 일이라는 것은 변할 수 없는 핵심요소이다.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는 ‘부끄럼을 잘 타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최악의 비평가’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의 마음이 성장하는 데는 순서가 있다. 자상한 이해자가 존재하고 그 다음 단계에서 비판자가 등장하는 것은 별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자상한 이해자가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비판자를 만나게 되면 마음이 파괴되고 만다. 이렇게 되면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감을 잃게 되고 스스로를 비판하게 되어 모든 일에 지나치게 부끄럼을 타게 된다.


  이런 저런 상황에 대해 심리학적 접근은 항상 재미있다. 이 책 역시 쉽고 간편하게 설명하고 있다. 미용실에 가득한 잡지에서 자주 보는 심리학테스트 같은 느낌이 들어서인지 사실,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을 일깨우고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들인데도 가볍게 여겨지고 가뿐하게 읽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게 거짓말을 해봐!


거짓말의 심리학 - CIA 거짓말 수사 베테랑이 전수하는 거짓말 간파하는 법


필립 휴스턴, 마이클 플로이드, 수잔 카니세로, 돈 테넌트 지음/박인균 옮김, 추수밭, 2013..


   상대방의 몸짓에서 거짓말을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상의 대화는 상대방을 예의 주시하면서 이뤄지지는 않는 까닭에 행동에서 나타나는 메지시를 간과하기 쉽다. 자주 보는 사람이라면 평소와는 다른 행동이 눈에 띌 수 있겠지만 다르다는 것을 알아낼지언정 그 세세한 의미를 간파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호기심은 알고 싶다고 계속 신호를 보낼지도 모른다.

  이 책은 전직 CIA 거짓말 탐지 조사관들이 조사와 심문경험을 바탕으로 한 거짓말 탐지 방법을 소개한다.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그들의 경험과 경력에 기대어 증폭하는데, 여러 현장에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조사의 방법들이 결국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이니만큼 일상생활에서도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다. 요즘은 원체 거짓과 사기가 판치는 세상이라는 점에서, 몇가지 방법들을 작 숙지하고 있다면 사기꾼들의 거짓에 속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뉴스들은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은 황당한 사기와 술수들이 넘쳐나는데 그렇기에 속인 자들보다 ‘어떻게 속아 넘어가는가’ 하면서 속은 자들에 더욱 놀랄 때가 있다. 심리학자들은 충분히 그럴 요인들에 대해서도 속속 설명하며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당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심리학을 안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재밌고 유용하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론과 적용이 따로 놀아서 그렇지…. 정권에서 국민세금을 동원하며 인력을 동원하며 했다는 활동, 인터넷상에서 판치는 댓글부대들은 ‘심리전단’이다. 앞선 정권이 공권력으로 기가 찰 수준으로 활동해 왔음이 증거로 속속 드러나고 있는 가운데 전직 대통령을 수사하면서 행한 일들도 드러나고 있다. “논두렁 시계’…국정원, 더 치명적 프레임 위해 심리학자들 동원”. 가장 모멸감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강행하기 위해 심리학자들을 동원해 다양한 시나리오를 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히틀러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레니 리펜슈탈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괴벨스를 통해 선전 또한 극대화하는데 몰두한 히틀러 역시 온갖 선전전을 동원했고 그 선전술에 심리학을 동원했다.

 

악한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거짓말을 더 능숙하게 하는 방법을 배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접어둬도 좋다. 거짓을 탐지하는 우리의 방법론은 인간이 자극에 반응하는 방식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반응을 통해 나타나는 특정 행동을 최소화하거나 없앨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행동들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이런 마음을 아는 듯 저자는 다음과 같이 우려를 안다는 듯 쓰고 있다. 이 문장에 웃음이 났다. 동원되지 않고 이용당하지 않을 심리에 관해서도 물론 분석되고 있다. 어쨌든 ‘거짓말’을 알아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인해 타인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결국 이러한 노하우를 안다는 것은 사물을 생각하고 판단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당장은 대화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알아서 뭐해 할 지 모르지만 생각을 확장시키는데도 필요한 일이다. 마냥 무언가에 휩쓸리지 않게 될지도. 인터넷은 하루가 멀다 하고 ‘진실공방’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정보를 생산하고 있지만 그 진실을 알아내는 것은 결국 그 글을 읽는 사람의 몫이 되어버리는 일도 다반사이니까. 언제든 내 판단력을 조금 믿을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 일도 좋을 수도.

  한편으론 이렇게 거짓말을 판별하는 법까지 배워야 하나 싶다. 산다는 건 참으로 복잡하고 씁쓸한 일 가득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름을 안다는 것


바다생물 이름 풀이사전-생명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이름들 

박수현, 지성사, 2008-04-25.


  “집채보다도 더 큰 고래가 헤엄쳐 다닌다는 바다”

  『요람기』속 아이처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바다엔 거대한 생물들이 살고 있고 고래가 뭍으로 올라와 소원을 가져다주는 구슬을 내밀거라고. 용의 아들 포뢰처럼 고래를 보고 놀라 울지 않고 고래입으로 걸어 들어가 뱃속을 탐험할 거라고 말이다. 물에 빠져 떠밀려간 기억에 깊은 물이면 공포를 느끼면서도 바다 깊은 곳에 대한 환상과 신비는 여전했다. 바다 세계를 탐험하고픈 꿈을 늘 가진 채 아이는 어른이 되어 뭍으로 떠밀려온 거대한 고래나 심해어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거봐, 엄청나게 크잖아! 나를 만나려고 왔나 봐.”

  아니다. 이건 어린 아이의 말이다. 이제 커버린 나는 해안에서 죽거나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심해어나 고래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우와, 저 밍크고래 발견한 사람 좋겠다. 저게 얼마라고?” 그때, 입안에 회를 자근자근 씹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횟집에서 무심하게 메뉴판을 고르는 어른의 나를 아이의 모습으로 돌려주었다. 식탁에 놓인 ‘모듬회’ 접시가 아니라 바다를 유영하는 생물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이름을 불러보고 싶게 만들어 주었다.『바다생물 이름 풀이 사전』. 친구의 이름을 알고 싶어하듯 펼친 이 책은 그저 바다생물에 관한 정보와 지식만이 아니라 이름에 가득한 신화와 동화적 상상력까지 되살려 주었다. 아이가 꿈꾸었던 바다속 환상을 눈앞에 펼쳐주었다. 고래뱃속을 탐험하고 팠던 것처럼 물을 무서워하지 않고 언젠간 스킨 스쿠버를 해보리라는 꿈을 갖게 해주었다.

  이 책에선 108개의 부를 수 있는 이름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어류, 연체동물, 절지동물, 자포동물, 극피동물, 포유동물, 해조류, 파충류 등으로 나누어 바다 생물들의 이름과 어원, 생태적 특성 뿐 아니라 신화와 전설을 소개하며 낯선 생물들을 친숙하게 만들어 준다. 선조들이 남긴 어류도감뿐 아니라 많은 문헌에서 어류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내어 지식과 이야기를 함께 담고 있는 것이다. 바다세계를 1,900번이 넘게 탐험했다는 저자의 사진을 통해 한번도 본적 없는 화려한 바다생물의 모습을 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어떤 생선은 ‘어’자가 어떤 생선은 ‘치’자가 붙는 것이 비늘 유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말미잘, 산호, 해파리, 히드라 같은 생물들을 가시가 있는 세포란 의미의 ‘자포’동물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자주 먹던 홍합이 먼 바다로 나간 배에 딸려 왔던 외래종 진주담치에 밀려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조들은 해삼과 굴을 바다의 삼, 바다의 우유라고 했는데 현대 과학자들이 실제 그 성분을 추출해낸 것을 보면서 다시금 선조들의 지식과 통찰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재밌는 이름도 있다. 나폴레옹 피시와 말미잘이 그렇다. 이 물고기는 농어목 놀래기과에 속하는데 2미터에 200킬로그램이 넘을 정도로 크다. 그런데 어쩌다가 나폴레옹이란 이름을 획득했을까. 절대 물고기 전쟁의 강자여서가 아니라 외양 때문이라고 한다. 이 물고기가 성장하면서 이마에 혹이 튀어나오는데 이 모양이 나폴레옹의 ‘모자’를 닮아서라나. 나폴레옹이 아니라 나폴레옹 모자를 닮은 이 물고기는 태평양 지방 원주민들에겐 의식의 제물로 사용되어 왔다고도 한다. 말미잘은 정약용의『자산어보』에 따르면 항문을 닮아 미주알이라 표기하고 있다.

  미주알은 ‘구멍을 이루는 창자의 끝부분’이라는 뜻이다. 우리 선조들은 사람에 비유하기 곤란하거나 다소 큰 것을 가리킬 때 ‘말’이라는 접사를 붙였다. 항문을 뜻하는 미주알과 말이 합쳐져 말미주알에서 말미잘로 전해졌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말미잘을 본 적은 없지만 이 어원을 떠올리며 항문을 생각하게 될 텐데 그런데 서양사람들은 다르다. 서양에서는 이 말미잘을 시아네모네(Sea Anemone)라고 부른단다. 바다의 아네모네라는 뜻이다. 같은 생물을 보면서도 누군가는 항문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봄에 잠깐 피었다 바람에 지는 아네모네’를 생각했다니 얼마나 사물을 바라보는 생각과 눈이 다른가. 단지 말미잘뿐만이 아니라 바다생물의 이름에는 각 나라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각 나라가 처한 상황과 생물의 유용성에 따라 생물의 이름뿐 아니라 그 생물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것을 볼 수 있다.

  자연과 생물에 인간은 ‘인간’의 시각에서 이름을 붙이고 있다. 하지만 생물의 특성을 잘 관찰하여 그 특성을 잘 가려내어 생활에 유용하게 활용하면서도 공존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수많은 포획으로 멸종이 되어가는 생물은 협정을 통해 보호종으로 지정하여 포획하지 않는 방법으로 말이다. 생태계를 보호하는 것이 인간 역시도 생존의 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 인류가 지속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 가고 있다. 절대로 ‘창꼬치 증후군’으로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기존의 규칙이나 관습을 고수하는 경향을 창꼬치 증후군이라 한다. 창꼬치가 수족관 유리벽이 있는 줄 모르고 작은 물고기를 공격하다 실패하자 유리벽을 치워도 변화를 알지 못한 채 물고기를 바라만 보는 데서 붙인 말이라고 한다. 기후변화와 지각변동으로 점점 생태계가 위협받고 있는 이 변화 속에서 생태계 보존을 위해 노력하는 방법의 하나가 다양한 생물들에 관한 이름을 알아가는 일이 아닐까 한다. 이름을 안다는 것, 그것은 그 생물의 특성을 안다는 것이기도 하다. 생물의 특성을 안다는 것은 고유한 특성을 해치지 않고 보호·유지하며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충성(蟲性)스런 나라


저스티스맨 - 2017년 제13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도선우, 나무옆의자, 2017-06-07.


   이마 위 두 개의 탄알 구멍이 난 채로 발견된 피살자. 이야기는 살인 현장과 피살자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연쇄’살인이라는 말이 붙으니 적어도 한건 이상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과연 끝은 있을까. 몇 명의 살인에 ‘성공’하게 되는가. 살인의 동기는 무엇이고, 살인자는 누구이며, 살인자는 잡히는가. 살인이 일어날수록 범인이 누군가에 대한 궁금증은 증가될 수밖에 없지만, 이 책은 범인이 누구인가보다 왜 그 일이 일어났는가에 집중되는 책이다.

  살인의 동기는 범인의 입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 피살자가 사망한 이유는 범인이 드러났을 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된 이후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에 관해 자료를 찾고 분석하고 추측하는 일들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닉네임 저스티스맨의 추리가 가장 설득력을 얻으며 폭발적 인기를 얻는다. 저스티스맨의 까페는 가입자수 증가와 함께 저스티스맨의 추종자들로 넘쳐난다. 사건이 이어지는 동안 전혀 용의자를 특정치 못하는 경찰들로 인해 저스티스맨의 인기는 더욱 높아가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저스티스맨이 바로 범인이 아닌가라는 의심 또한 얻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 사건이 벌어지고 저스티스맨이 살인 사건의 벌어지게 된 ‘이면’의 사건들을 추리하면 네티즌들이 그에 대해 설전을 벌이는 패턴이 반복된다. 연쇄살인의 동기는 대체로 누군가를 ‘마녀사냥’ 당하게 한 가해자라는 특징을 보인다. 술 취해 노상에서 구토와 배면을 한 직장인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이, 성폭력 동영상을 유포한 이,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린 이 등등. 사건들은 독립적인 듯 하면서 맞물려 흘러간다. 연쇄살인의 피해자가 인터넷 폭력의 가해자로 추정하는 만큼, 사람들은 왜 인터넷상에서 이토록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고 무책임하게 타인의 신상을 게시하는가에 대한 저스티스맨의 분석 또한 유의미하다. 소설은 연쇄살인의 범인을 찾는 것보다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이 무분별한 폭력, 마녀사냥이 되어 가는 인터넷 게시글의 세계를 더욱 조명하고 싶어하는 듯 보인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이 살아온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혐오하며 자괴감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러한 자의식 과잉이 뒤틀린 욕망으로 발현되는 순간이 바로 부당함으로 피해를 본 타인의 삶을 목격했을 때라고 저스티스맨은 주장했다.

그것은 피해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타자의 처지에 밑도 끝도 없이 분개하여 정의감처럼 느껴지는 감정을 불사르고, 그 감정의 정체를 미처 분간하기도 전에 일방적인 옹호를 칼날처럼 내세우며, 가해자의 원인일 것으로 추축되는 대상을 무차별적으로 질타함으로써 자신의 자괴감을 희석하려는 자구책의 전형일 따름이라고, 비열함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라고 그는 모질게 평가했다.


  그렇기에 저스티스맨은 최근 순식간에 인터넷 세상을 뒤흔든 ‘204번 버스’ 또는 ‘맘충’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첫 번째 연쇄살인의 피해자가 이른바 ‘오물충’ 사건을 일으킨 자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오물충의 만행’이라는 게시물로부터 촉발되어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를 달구고 언론에 나오고 신상이 공개되어 직장을 잃고 가족들에게도 외면당한 ‘오물충’. ‘204번 버스 또는 맘충’은 또 어떤가. 버스기사가 아이만 내렸다며 울부짖는 엄마를 무시하고 내려주지 않고 내달렸다는 게시물 하나로 촉발된 204번 버스기사에서 맘충 사건으로 번져버린 사건. 며칠째 난리부르스였던 이 사건은 마치 누군가에게 화를 전가하는 형태로 이어져 처음엔 버스기사를 향한 날선 분노에서 다음에는 아이 엄마에게로 그 다음에는 허위·과장된 글을 게시한 목격자에게로 옮겨갔다.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벌어진 이 사건 후에 기억되는 것이라곤 냄비처럼 끓어오르는 사람들의 ‘화’를 쏟을 대상을 찾아가는 모습과 어디든 ‘충충’거리는 글들이었다. “피해자일 것으로 추정되는 타자의 처지에 밑도 끝도 없이 분개하여 정의감처럼 느껴지는 감정”이라는 저스티스맨의 분석이 적확하게 느껴진다.

  인터넷을 하지 않는다면 이런 것들도 모를 테지만 현대 사회에서 인터넷을 보지 않고서 무언가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어떤 형태로든 인터넷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접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인터넷상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모르는 말들이 더 많아졌고 아무리 뜻을 유추하려 해도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온갖 비하와 조롱의 언어, 충(蟲).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명조사에 따르면 가장 불쾌한 신조어로 ○○충을 꼽았다. 가장 싫어하면서도 가장 빈번하고 가장 널리 쓰이는 이 단어. 왜 우리는 이토록 인간들에게, 인간들의 행동 하나에 혐오와 멸시 가득한 말들을 붙이고 있는 걸까. 아름답고 살기좋은 나라에서 살고자 하는 희망을 좀먹으며 이 나라는, 참으로 충성(蟲性)스러운 나라가 되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길리아드
마릴린 로빈슨 지음, 공경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 에임스들

길리아드, 메릴린 로빈슨, 마로니에북스, 2013.


  길리아드를 길+일리아드의 합성어로 생각하며 길에서의 이야기로 느꼈는데 책을 읽고 나서 이 느낌과 생각이 다르지 않음을, 그 생각을 이어가도 될 것이라 생각했다.

  길르앗(Gilead)은 요르단 북서부를 가리키고 선지자 엘리야의 고향이다. 구약성서 <창세기> 31장에 ‘길르앗의 향유’와 함께 나온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이 종교적인 색채를 띠리라   짐작하게 된다. 이 책에선 화자가 살고 있는 지명이기도 하다. 책의 화자는 제임스 목사이며 그는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편지를 쓴다. 일흔 일곱의 제임스 목사가 자신이 죽고 나면 그 오랜 시간 동안을 아버지가 없이 살아갈 일곱 살 아들에게 남기는 이 편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차로 인해 서글픈 감정이 들게 만든다. 아들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이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이 편지는 아주 길고 오래 이어진다. 자신이 살아온 나날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아들이 살아갈 나날들을 위한 이야기이기에 진중하다. 작가의 문체 역시 담백하고 마치 시골길을 걷는 듯한 느낌이다. 집을 떠나 길에서 사망한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는 길에 동행한 어린 존 에임스 목사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자신의 생을 덤덤하게 얘기한다.

  존 에임스들의 이야기라고도 붙일 수 있을 만큼 길리아드에는 존 에임스가 많이 등장한다. 먼저 존 에임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역시 존 에임스이며 목사이다. 존 에임스 목사의 친구인 보턴 목사는 친구 이름을 붙여 아들의 이름을 존 에임스 보턴이라 짓는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존 에임스들의 생과 갈등이 등장한다. 존 에임스 목사는 아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가계를 전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그 시대의 역사의 흐름이기도 하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출산 중에, 딸은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존 에임스 목사는 오랫동안 홀로 살아오다 노년에 나이 차이가 많은 아내와 결혼하고 아들을 둔다. 삶이 좀더 건강하게 이어진다면 좋으련만 존 에임스 목사는 점점 기력이 약해져 갈 수 없다.

  존 에임스 목사가 다소 정적으로 느껴진다면 목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좀더 동적이다. 두 사람의 갈등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대로 목사인 집안에 신자와 무신론자와의 갈등, 종교 노선의 갈등이 있다. 존 에임스의 할아버지는 쇠사슬에 묶인 예수의 환상을 보고 노예해방을 위해 투쟁한다. 조부는 남북전쟁 참여를 권하는 설교를 하고 북군 소속 군목으로 참전하며 전쟁에서 한쪽 눈을 실명한다. 이런 조부와는 달리 아버지는 평화주의자라서 갈등이 반복되고 존 에임스의 형은 독일 유학을 하면서 무신론자가 되어 돌아와 아버지와 갈등을 빚는다.

  길리아드는 존 에임스들의 터전이다. 존 에임스 목사의 동료이자 친구인 보턴은 아들의 이름을 존 에임스 보턴이라 짓는다. 존 에임스 목사에게는 이것이 달갑지 않은데 존 에임스 보턴이 마을에서는 알아주는 문제아로 낙인된 때문이다. 보턴 집안 역시 목사인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지속된다. 존 에임스 목사가 이 보턴 부자의 갈등에 개입해 중재하지만 망나니같은 보턴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내적인 갈등과 편견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존 에임스 목사의 이 마음을 무색하게 보턴은 가족에 대한 책임과 난관을 헤쳐 나갈 방법과 용기를 얻고자 하는 진지한 가장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갈등이 ‘노예해방’에 대한 관점과 이어진다면 존 에임스 보턴이 표면적으로 드러낸 갈등 역시 인종차별, 흑인에 대한 차별을 드러낸다.


목사로 산다는 것은 인생에서 매우 특별한 일이지. 사람들은 목사가 다가가는 걸 보면 얼른 화제를 바꾼단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서재에 찾아와서는 아주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지. 삶의 겉모습 속에는 많은 것이 있어. 모두 그걸 알지. 많은 악과 두려움, 죄책감이 있고, 도저히 외로움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 큰 외로움이 있기도 하단다.


  존 에임스가 목사인 만큼 사람들은 그에게 종교적인 믿음과 영혼의 평안을 얻고 싶어하는 모양이다. 그가 목사가 묵직하게 앉아 갈등들을 지켜보고 있거나 자신을 찾아와 내면을 털어놓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것이 활동적인 모습과 대비되면서 잘 어울린다. 그 나지막한 영향력이 좀더 단단하게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가리라 여겨진다. 이 책은 존 에임스 목사님의 설교도 함께 한다. 곳곳에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아들의 삶에 길잡이가 되고픈 목사의 마음도 갈등을 지켜보며 갖는 생각도 일찍 생을 마감한 아내와 아이에 대한 그리움도 남겨질 아내와 아들에 대한 마음도 편지에는 담겨 있다.


물론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살아오면서 쓸쓸해서 책을 읽은 시기와 나쁜 친구라도 친구가 없는 것보다는 나은 시기가 묘하게 번갈아 나타난 데 감사하지. 살면서 늘 두 감정이 번갈아 나타나지. 인간적인 것들에 굶주리게 되면 책이 들려주는 불운함이나 화려함, 뻔뻔스러움에 끌릴 수도 있단다. 네게 그런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만.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잠언27:7).” 생각지 않은 엉뚱한 곳에서 쾌감이 발견되기도 하지. 그것은 아비로서의 지혜다만, 신의 진실이자 내 오랜 경험에서 알게 된 것이기도 하단다.

  

  이 편지는, 아니 소설은 썩 잘 썼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퓰리처상을 받은 작품이지만 문체에서 느껴지는 강렬함은 없다. 하지만 목사의 설교를 계속 듣고 있는 느낌보다는 할아버지에게 듣는 인생사로 더 다가왔다. 이리저리 생각나는 대로 쓴 편지는 격정적인 토로보다는 조용히 뒤따르는 느낌이 들고 잠깐 딴 생각이 들게끔 해서 글을 놓치는 지루함을 선사하기도 한다. 1880년에서 1950년대의 조용한 시골마을의 정경이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그때의 사회 역시도 마냥 조용하게 흘러가지 않았겠지만 종교, 신과 믿음에 의지하며 그 가르침대로 살려 했던 목사의 삶의 노력들이 느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