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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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MB의 뒷담화론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아침을 먹기 전에 불가능한 일을 여섯 가지나 믿어버릴 수 있다는 데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진정 탁월한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임을 증명하는 MB부대들이 연이어 검찰 출두하는 모습을 본다. 새삼, ‘인간도 아닌’이라는 욕들이 무색해진다. 이렇게 MB를 호모 사피엔스로 등극하게 한(?) 이론을 펼친 유발 하라리는 얼마 전 TV 강연에도 등장했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인간 종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세상을 지배하는 이유를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류가 동일종의 직선계보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유발 하라리는 사람들의 이런 오류에 대해 지적한다. 적어도 여섯 종 이상의 인간 종이 존재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한 종만이 살아남아 있는가. 저자는 이것은 우리 종의 ‘범죄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움직여간 모든 곳에 ‘멸종’이 있었다. 그렇다. 호모 사피엔스가 홀로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잘못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MB가 벌인 행태와 유사하다.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많은 숫자가 모여 협동을 하려면 사실상 반드시 필요하다. (…)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사피엔스가 더욱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로 이야기다. 허구를 만드는 능력. 상상력. 저자는 사피엔스가 가진 특별한 무언가가 바로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확산시킬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주장한다. 허구적인 이야기를 동일하게 믿는 한 사람들은 그 관행과 규칙을 따르게 되고 설득당하기 쉽다. 이를 통해 유연한 협력을 함으로써 인류가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한다.

  상상력은 그 자체로 좋고 나쁨을 가지지 않는다. 아니, 그것을 나쁜 쪽으로 활용할 때 나쁜 것이 되고 좋은 것으로 사용한다면 좋은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 중 누군가는 이것을 좀더 나쁜 쪽으로 활용했고 그런 무리들이 되어 그들만의 사회를 유지시켰다. 이런 활용이 지속적인 세상의 지배자로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가고 있는 중이고 여전히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좋은 상상력을 활용해나가고 있다. 인류 문명의 진화로 제시한 세 가지 혁명, 인지혁명과 농업혁명을 거쳐 과학혁명을 맞이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단계를 거치며 인간은 행복해지고 있는가.

  홀로 살아남은 호모 사피엔스의 문명기는 흥미롭게 전개된다. 과거의 모습들을 마치 직접 겪은듯 향수에 젖어 돌아보게도 되는데 수렵채집인 시대를 그리워하는 이 마음이라니! 정착하며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인구, 노동시간, 전염병이 급격히 증가해 간다. 오늘날의 삶이 이 농업혁명기의 삶이 모태인듯 보이며 수렵채집인의 삶이 ‘이상적’으로 보인다. 진정 꿈꾸는 삶인 것마냥 느껴지는데 저자는 바로, 지적한다. 그 시대라고 풍요사회일 수만은 없노라고. 하지만 인간이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 밀이 인간을 길들였다는 관점은 오늘날의 현실을 개탄하는 입장에선 참 자조적으로 들리는 말이기도 했다.


행복의 관건은 의미에 대한 개인의 환상을 폭넓게 퍼진 집단적 환상에 맞추는 데 있을지 모른다. 내 개인적 내러티브가 주변 사람들의 내러티브와 일치하는 한 나는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며, 그 확신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꽤 우울한 결론이다. 행복은 정말로 자기기만에 달려 있는 것일까?


  어디 그뿐인가. 미래도 마냥 낙관적이진 않다. 과학기술은 질병을 치료하고 인간 수명을 연장하게끔 해왔지만 과연 이런 기술의 진보는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내려앉을 것인가. 오랫동안 혁명의 혜택이란 항상 권력자들, 가진 자들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한번도 변하지 않은 사실이다. 그러니 발전된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은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뿐. 또한 무한히 뻗어 나가는 유전공학의 세계는 경이롭기도 하지만 무서움을 준다. 역시나 그것 자체로는 어떤 선악을 판단할 순 없을 것이다. 그것을 이용하는, 이용할 수 있는 누군가의 ‘욕망’과 ‘의도’에 인류 전체의 행복 또한 달려 있을지 모른다. 뒷담화론과 이 과학기술혁명에 필수적으로 윤리가 요구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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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환상문학전집 4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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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소유물


시녀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황금가지,.


  “너는 내 소유물”

  여기 소유물인 여자들의 세상이 있다. 남자의 소유물로 이름마저도 삭제당한 ‘of‘의 세계. 1985년 마거릿 애트우드는 이런 여성들이 살고 있는 길리아드 공화국 속 이들 여성을 일컬어 ’시녀‘라고 했다. 소설은 시녀 중 하나인 오브프레드가 전하는 이야기로 펼쳐지는데 그녀의 바람처럼 ’꾸며낸 이야기‘가 되지 않은 채 2017년에도 어김없이 되살아나고 있다.

  소유물. 성추행으로 고소당한 칠십 넘은 그룹 회장의 말이다. 회장은 ‘튄’ 것인지 외국에 있다 한다. 피해 여성이 합의금으로 100억을 요구했다는 얘기에 여성을 꽃뱀이라는 댓글들도 있다. 수사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어쨌든 저 문장이 눈에 띄어 “시녀이야기”속 남자들의 소유물이 된 무수한 시녀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미국 드라마 부문 에미상 최우수작품상과 여우주연상 등 5개 부문을 석권했다는 기사까지 있다. 얼마 전엔 마거릿 애트우드가 올해도 역시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이쯤되면 오늘은 자동적으로 ‘시녀이야기’를 떠올리도록 잘 설계된 날인 듯하다.

  소유물이라. 어쩌면 저런 인식이 팽배하다는 것이 이 소설이 쓰여지고 지금에도 인기를 구가할 수 있는 배경이 아닐까.

  길리아드 공화국을 잘 살펴보자.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라 굳이 미래사회라거나 가상사회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이야기는 오히려 고전적인 느낌이 드는데 그것은 그 배경이 아주 먼 옛날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성병과 생화학무기, 원자로 사고, 각종 환경오염으로 인한 불임의 시대, 인구가 급감하자 쿠데타 세력이 집권하여 길리아드 공화국을 건설했다. 성경과 가부장제에 따른 통치를 중시하는 이 시대의 목표는 인구증가로 출산을 국가에서 통제한다. 그런 출산의 역할을 ‘시녀’들이 맡는다. 먼 나라라니, 불과 얼마 전에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출산지도를 작성했다. 지역별 가임여성수를 작성하여 게시하며 저출산의 원인이 여성들인 양, 그것이 저출산 극복의 해결책인 양 한 것이 1년이 되지 않았다. 쿠데타로 정권을 집권한 이들이 여전히 잘 살고 있는 전력도 있느니만큼 왜인지 이 이야기가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어제, 오늘 페미니즘과 젠더폭력도 실시간에 얼마나 오르내렸는가.

  출산의 도구로 전락한 여성의 존재는 그 기능이 작동되지 않으면 ‘콜로니’라 불리는 독극물, 핵폐기물 처리장으로 폐기된다. 빨간 옷을 입고 하얀 두건을 쓰고 자궁이라는 도구를 쓰기 위해 사령관이라 불리는 고위층 부부에게 할당된다. 이들 시녀들을 감시하는 것은 같은 여성집단이고 그들 역시 ‘자궁’의 활용 여부에 따라 역할을 맡는다. 그러니 ‘시녀’를 동경하는 ‘하녀’들이나 ‘폐기대상’들도 존재한다. 오브프레드가 추구하는 ‘사랑’은 간과되는 나라를 통치하는 이들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지배사상인 성경과 가부장제. 과연 통치방법을 고안하고 실행한 그들 또한 이 세계에 만족하는가. 우습게도 딱히 그렇지도 않아 보인다. 통제와 감시속에서 규칙을 어기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보면.

  성경과 가부장제의 이념을 고스란히 반영한 길리아드의 한 부분을 들여다보다. 시녀 재닌이 열 네 살 때 집단 강간당하고 낙태를 해야 했던 경험을 간증하는 현장이다.


하지만 그게 누구의 잘못이었지요? 헬레나 ‘아주머니’가 통통한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며 말한다.

그녀의 잘못입니다. 그녀의 잘못입니다. 그녀의 잘못입니다. 우리는 제창한다.

그들을 부추긴 게 누구지요? 헬레나 ‘아주머니’는 우리가 대견하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그녀가 그랬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걸 하느님께서 허락하는 걸까요?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끔찍하다. 성폭력 피해자들을 향한 어떤 이들의 논리가 저렇지 않던가. 지금 바로 여기에서 말이다.

  오브프레드와 이전의 오브프레드와 또 그 이전의 오브프레드가 있다. 있었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오브프레드가 오브글렌이 오브워렌이 존재하는 길리아드 공화국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너는 내 소유물”이라 말하는 수많은 프레드와 글렌과 워렌이 존재하는 사회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이들은 그들의 통치방식을 과거에서 배워 사용하는 것이고 앞으로도 누군가는 이전의 통치방식들을 모방할 것이다. 독재, 전체주의란 늘 그런 것들에 심취하는 경향이 강한 것이, 뭔가 그런 것에만 강하게 반응하는 화학물질을 투여한 것만 같다.

  이 소설 속 세계가 전혀 놀랍지 않다는 것이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이의 반응이란 말인가. 어느 지역에선가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해도 믿을 이야기다. 시녀로 살아가는 오브프레드에가 겪은 일들은 무수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 사건들이 ‘극적’인 느낌이 덜한 건 이미 이 세계 자체가 극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브프레드가 과거 회상으로 덤덤하게 그 이야기들을 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나라에 당연 혁명 세력이 없을 리가. 오브프레드는 열성적인 혁명세력이라기보다 오히려 이 체제에 순응해가는 인물이 되어 간다.

  가상과 과학과 페미니즘과 디스토피아를 다룬 이 소설은 어슐러 K.르귄과 마지 피어시의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를 생각나게 한다. 이들 소설들 모두 가상의 미래를 다루고 있는데도 어쩜 이토록 현실적일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그 답은 정해져 있다. 이 소설에서 눈에 띄는 것은 화자인 오브프레드의 수동성과 여성연대이다. 문제에 대한 ‘자각’과 함께 변혁을 위해 활동하는 여성상이 아니라 체제 순응적인 여성. 그 시대를 기록했다는 것으로 오브프레드의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생각해보긴 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외치는 ‘사랑’이 상당히 이질적이게 느껴진다. 그렇게 볼 때 여성연대, 그들간의 결속력이 약한 것도 여성들 스스로를 감시하게끔, 서로를 질투하게끔 한 체제에 순응한 오브프레드와 같은 여성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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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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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곤


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돌베개.


  아르곤, 원소 주기율표의 가장 첫 번째에 있는?

  아르곤이 검색어에 오르락내릴 때 내 반응이었다. 화학 선생님의 탁월한 지도로 주기율표를 완벽히 외웠던 시절은 까마득해지고 마치 알파벳 순서에 따라 ‘A’가 첫 번째인 것이 맞는 양 아르곤이 첫 번째인 것이 당연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잠시 생각해보니 이건 다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 때문이다. 그 책의 목차 첫 번째에 아르곤이 자리하고 있다. 내 기억은 이렇게 퇴화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의미없이 외웠던 기억은 희미해져 가고 주기율표는 앞으로도 딱히 인생에서 활용될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각인하며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의 전공과 관련된 이야기인 줄 알고 프리모 레비의『주기율표』는 일찌감치 제껴두었던 책이다. 하지만 아유슈비츠에서의 경험을 얘기하는 프리모 레비의 저작 중에서 『주기율표』는 형식적인 면에서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이 책에서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인생을 원소 주기율표의 원소에 대입해 이야기한다. 내겐 낯선 원소의 특징이 그의 삶과 맞물려 이야기되는데 단순히 옛시절을 회상하고 있지만은 않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그의 삶은 화학자로서, 과학자로서 이루어졌겠구나 생각할 수 있을 만큼 과학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열정적이었던 모습들이 나타나고, 역사와 철학에 관한 성찰도 담겨 있다. 원소의 성질에 대해 잘 모르지만 원소의 성질에 대입한 철학적인 사유는 상당히 아름답게 느껴졌으며 프리모 레비가 얘기하는 대로 원소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우리가 숨쉬는 공기 속에는 이른바 비활성 기체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박식하게도 그리스어에서 따온 진기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각각 '새로운 것'(네온), '숨겨진 것'(크립톤), '움직임 없는 것'(아르곤), 그리고 '낯선 것'(제논)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들은 정말로 활성이 없어서, 그러니까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하고 있어서 어떤 화학 반응에도 개입하지 않고 다른 원소와 결합하지도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비활성 기체는 수세기 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아르곤은 비활성기체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다고 한다. 전구, 진공관, 금속의 생산과 제조, 반도체 분야 등에서 널리 쓰이는 이유일 것이다.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선조들(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지방에 정착한 유대인)이 이런 비활성 기체와 비슷하다고 얘기한다.

  “물질적으로 활발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이 그들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주기율표의 많은 원소들 중에서 아르곤을 첫 번째에 놓고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는 이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가 겪은 일은 혼자만의, 개인적인 경험이 아니라 한 족(族, group)이 겪은 일이라고 말이다. 그가 줄곧 전쟁과 아우슈비츠에 관한 기록을 남기는 이유도 잊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아르곤으로 시작되는 첫 이야기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비활성 기체가 “희유(稀有) 가스”라고 불린다는 점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레비는 또 말한다. “그 양은 이 지구상에서 생명체의 흔적이 유지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이산화탄소보다 스무배 또는 서른 배나 더 많은 양이다.”라고.

  인종법이 공포되었고 프리모 레비는 외톨이가 되었다. 유대인에 대한 정체성을 확고히 가지고 있지 않았어도, 한세기 전부터 이탈리아에 정착한 조상의 후손으로 이탈리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무도 적대적인 말과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불신과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를 느낄 수 있었다고 레비는 회상한다. 그런 레비에게 주기율표가 가지는 의미는 무언가.

  

인간의 고귀함, 수만 년 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얻은 그 고귀함은 물질을 정복하는 데 있으며, 내가 화학을 전공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 고귀함에 충실하기 위함이다. 물질을 정복한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이며, 물질을 이해하는 것은 우주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가 요 몇 주 동안 힘들게 풀이법을 배워온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는 한 편의 시이며,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소화해온 그 어떤 시보다도 고귀하고 경건하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주기율표는 압운까지도 들어맞는다. 지도 위의 세계와 실재 세계 사이의 잃어버린 고리, 다리를 찾는 사람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 아우텐리트 교본 속에, 연기로 가득 찬 실험실 안에, 우리 미래의 직업 속에 있다.


  『주기율표』는 화학자인 레비에게 단순히 원소의 특징을 알려준다는 의미 이상이었다. 레비는 이 화학과 물리학을 통해서 당시 휩쓸고 있던 그 파시즘의 광폭을 이겨내려 힘쓰고 있던 것이었다. 학문적 순수성으로 이 파시즘의 허위를 잔혹함을 찾아가며 인간에 대한 고귀함을 인식하는 방법이었다.

  레비는 증류는 아름답다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느리고 철학적이며 조용한 작업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문장에서 당연 떠올리고 연관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증류. 순수한 것을 분리해내는 작업. 만족스러운 순도를 얻는 이 증류는 신성시되어왔고 종교적 행동으로도 여겨진다. 하지만 물질의 증류는 아름다웠을지언정 히틀러의 인종분리는 아름답지 않았다. 순수한 인종을 분리해내는 히틀러의 사고는 결코 철학적이지도 조용하지도 않았다. 무개념이었고 난폭한 광기로 행해졌다. 증류가 가지는 신성하고 종교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다.

  레비가 겪은 일이 한 개인의 경험이 아닌 것처럼 인종주의자 히틀러라는 범죄인이 개인적으로 저지른 일만도 아니다. 레비는 수용소생활에서 만난 독일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그에게 편지를 띄운다. 하지만 그 독일인은 아우슈비츠에서의 사건들을 전 인류의 탓으로 돌렸다. 이에 대해 레비는 단연코 주장한다. 그들이 아우슈비츠를 만들었으며, 그러니 아우슈비츠에 대해서는 모든 독일인이 대답해야만 한다고.

  역사의 청산이란 말이 적확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히틀러와 나치로 대변되는 독일인들은 이 문제에 관해 열의를 보이고 있다. 인종학살에 대해 참회하며 전범자 처벌을 국가가 나서서 행하고 있고 피해자들 역시도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런 경험들로 나타난 수많은 자료들을 토대로 전인류가 나치의 인종학살에 대해 기억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독일의 행동들을 지켜보고 있다. 하지만 같은 경험에서 피해자인 한국은 어떤가. 국가가 나서서 피해자들을 억압하거나 외면하고 가해자를 옹호하고 있다. 가해자의 반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이에게 계속 용서한다고 용서를 받아 달라고 구걸하고 있는 형국이다. 가해자의 편에 서서 피해자를 바라보며, 가해자들이 승승장구하는 나라. 생각해보면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과 일본인의 만행이 다른 것이 무엇이 있는가. 유대인 학살과 생체실험처럼 일본 역시 731부대와 마루타, 위안부 학살의 만행을 자행했다. 이 역사적 사실이 전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되지 못하는 이유 역시 일본인이 반성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전에 피해자인 한국이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인 해결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대학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지식인’이라는 ‘사회지도층’이라는 한 인간의 막말은 이어졌다. “위안부는 끼가 있어서 따라간 것”이라는 말이 이 한 ‘개인’의 그릇된 사고방식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 끔찍하다. 제 한몸 잘 살기 위해, 권력을 갖고 돈을 갈취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제게 맞게끔 퍼뜨리는 한국의 지배자들이 있는 한 한국은 이 상태로 계속 비활성기체로, 아르곤으로 머물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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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막다


항상 나를 가로막는 나에게  

- 왜 우리는 언제나 같은 곳에서 넘어지는가?  


알프레드 아들러,  카시오페아, 2014.  


  심리학, 정신분석뿐 아니라 많은 영역에서 늘 프로이트와 융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특히 프로이트는 모든 인간행동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이론가였고 아들러의 이름은 늘 책 한구석에 차지하고 있었다. 때로, 이들이 동시대를 살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 먹고 있다가 이들 셋이 같은 학회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동시대 사람이었음을 다시 또 새겼다. 그렇게 늘 프로이트와 융의 뒤에 있던 아들러가 몇 년 전 서점가를 휩쓸었다. 갑작스럽게 아들러가 돌풍을 일으킬 때 그 아들러가 프로이트와 융의 이름 뒤에 있던 그 아들러가 맞는가 재확인하면서 아들러 열풍을 지켜봤다.

  중요한 것은 프로이트와 융에 치우쳐 잘 드러나지 않았던 아들러 심리학에 관한 책이 해석되고 쏟아져 나왔다는 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어쨌든 그에 관한 책이 없었다면 읽을 수도 관심 가질 수도 없었을 테니까. 타이밍이라는 요소도 중요하지만 아들러 심리학 열풍이 일본 작가의 미움받을 용기에서 출발했다는 것과 여타의 상황을 보니, 출판계가 일본시장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일본관련 책은 만화시장이 휩쓰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와 추리소설 작가 몇이 이끄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일본 서적보다 우리나라의 책들이 경쟁력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개별적인 작가의 영향뿐만 아니라 출판시장에서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특히 에세이류는 일본 내 출판 분위기를 따라가고 있다는 출판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뭔가 씁쓸해졌다. 우리의 출판시장이 엄청 작다는 것,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다는 것, 권위있는 누군가의 권해주거나 입시에 유용한 책만이 경쟁력이 있다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까. 출판시장을 두고도 일본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으니 아들러 책의 인기를 이해할 만도 하다. 

  그림책, 시와 같은 구성과 내용의 이 책을 보면서 나를 가로막는 것이 무언지 생각하고 그것을 알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나를 가로막는 건 똑같다. 처음 이 책을 읽은 후로부터의 내가 나를 가로막는 것에 대한 분석과 깨달음을 얻었을지언정 달라진 건 딱히 없었다. 난 여전히 나를 가로막는 것이 무언지는 알고 있으면서도 그 가로막음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필요한 건 역시, 행동인가.


    모든 개인의 문제는 사회적인 문제이다.

    사회적 관계를 회복할 때 개인은 진정 치유될 수 있다.

    우울하고 신경질적이며 무기력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가 당신을 필요로 한다, 당신을 원한다.”는 메시지이다.


     개인의 심리는 집단의 정서를 만들고, 집단의 정서는 개인의 심리에 영향을 끼친다.

     개인이 겪는 문제의 구조를, 그리고 그 문제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짐이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개인의 심리 상태를 추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시 내가 이 책을 좋아했던 것은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동일선에서 보는 생각때문이었다. 나의 주장은 언제나 이것을 전제로 했지만 그러면 사람들은 사회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를 늘 묻는다. 그러면 또 쉽고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들러는 이러한 심리적 문제의 해결책으로 “직접 참여와 연대 의지”를 강조했다. 나는 이 직접 참여와 연대에 대한 의지가 약해져 가고 있다.


사회적 관심이란 사회에 대한 흥미나 호기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참여하는 행위이며 연대 의지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정신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보는 관점과 태도, 그리고 사회 안에서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고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과 태도가 나를 항상 가로막았다. 늘 넘어지는 지점을 알면서도 그곳에서 당연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음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타인들이 해주기를 더욱 기대하고 있음이고 그 안에 나 역시 내가 하기엔 부족하다는 열등감이 켜켜이 쌓여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음도 사실이다. 여하튼 이 소화되지 못하는 이 불편함과 추욱 쳐지고 마는 감정이 반복되다 보니 세상 모든 심리학의 사례를 실행하고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환절기의 일시적인 감정일까. 새로운 날이 밝기를 기대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날을 맞기 위해 무엇을 할까를 생각해야 하는가가 치유일텐데 원인을 파악하는 행동력과 문제를 해결하는 행동력 사이의 이 간극은 참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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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기대의 심리학 - 잘못된 기대로 힘들어하는 12가지 이유 

선안남, 2010. 

  


  결론이란 생각하기에 지친 지점이다.

                                    - 마틴 피셔

 

  그러고보니, 어떤 회의에서는 지쳐서 ‘이만 결론내자’고 외친 적이 있다. 더 이상 생각할 거리가 없이 지친 지점에 이르러 결론이 난다. 이렇게 해서 결정된 결론에 대한 만족감이란, 그리 높지 않다. 처음 시작할 땐 분명 최고의 결론을 이끌어 내리라 생각했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대란, 기대하고 있는 그 순간의 만족감은 높을지언정 기대하는 바가 추구하는 종착역에서 늘 만족감을 최대로 높여주진 않는다. 그럼에도 희망없는 나날을 견딤에 기대가 이끄는 공이 있음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기대란, 나에게나 타인에게나 같은 무게를 달고 오는 것이 아닐까.

  기대의 심리학은 자신에 대한 스스로와 타인의 기대가 심리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익숙하게 얘기되는 것처럼 그 기대로 인한 긍정적,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다룬다. 피그말리온 효과나 아틀라스증후군, 피터팬 증후군이 이 기대와 연결되어 있음 또한 설명한다.


피그말리온 효과가 담고 있는 메시지는 희망적이고 교훈적이다. 이 메시지는 발전을 거듭해 개인적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불안과 절망의 시대에 좋은 것을 기대함으로써,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희망과 확신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기대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리리’는 메시지는 지금의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의지와 에너지를 심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효과에도 맹점은 있다. 주변의 관심과 기대가 그들의 성취에 압박을 주고, 기대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를 넘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로 발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현상들은 긍정과 부정을 안고 있다. 그것이 발현되는 방식에 따라 긍정이냐 부정이냐의 결과가 나타나겠지만 사람들은 부정적 효과를 더 염려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처럼 바라는 대로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기도 하고, 결과에 따라 그 효용성이 가려질 것만 같은 기대가 그 과정에도 부정성을 한껏 안고 있다는 것도 안다. 타인의 기대에 의해 더욱 더 가해지는 부담감이 그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가족 또는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기에 느끼는 부담은 크다. 이 모든 것들이 현실적이지 않은 기대에서 비롯된다. 꿈꾸는 것은 좋지만 마구 달려나가는 비현실적인 기대 하나가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어 버린다.

  저자는 그렇기에 기대에 합리와 현실을 주문한다. 타인이 던지는 기대에 부합하려 발버둥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힘겨움의 이유 속에 들어찬 기대에 대해 잘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친 기대라는 것을, 비현실적인 것임을 안다한들 “오우, 그건 이뤄질 가능성이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더, 더, 더 노력해보겠습니다”가 해야 할 말이고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이 사회는 보여준다. 생각보다 오로지 나 자신을 인식하고 산다는 건, 어렵다. 그럴 수 있었다면 애당초 타인의 기대 때문에 힘들 일이 무엇 있었겠는가.

  이 책에서 할애하는 많은 부분은 타인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느라 힘들어하는 나에 대한 것이 주다. 그로 인한 다양한 문제점들과 빠져버리게 되는 오류들을 실제 사례와 임상 실험을 통해 보여준다. 그에 관한 이야기들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겪고 있는 모습들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못함에서, 인식이 재빨리 전환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 이론이든 경험이든 이런 글들을 통해 더더 깨우치고 느끼면서 변화할 수 있기를 노력해봐야 하는 것인지도.

  그런데 타인의 기대로 인해 힘든 것과 더불어 이 사회를 살아가다 보면 타인에게 기대하는 것이 충족되지 못해 힘든 경우도 많다. 사회는 더불어 사는 것이니까. 이때의 기대란 사회가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되는 마땅한 상식과 정의에 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공동체적 질서와 가치,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인간존중을 지켜 가리라는 기대 말이다. 그래서 지난 겨울엔 이런 기대로 희망에 부풀었을 테고 여전히 기대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나날이 사그라진다는 것은 또 얼마만큼의 좌절을 안겨줄까. 이런 기대로 인한 힘겨움 역시 이 책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수용하면 되는 것일까. 묻혀두었던 일들이 하나씩 끄집어 나오는데도 도로 들어가버리는 분위기가, 그것들만을 공고하게 묶으며 감싸는 분위가가 얼마나 강했고, 얼마나 강한지를 새삼 느끼며 이것은 과연 잘못된 기대인가를 묻게 된다. 좀더 현실적인 기대로 합리적인 수준으로 그 기대를 정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도대체 그 수준은, 그 기준은 얼마만큼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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