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울었던가


아주, 조금 울었다 - 비로소 혼자가 된 시간, 

권미선, 허밍버드, 2017-07-15.


      아예 울지 않는다면 모를까.

  조금 운다는 건 힘들어져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렇다. 혼자 울 장소를 찾는 일도 어렵다. 울지 않아야 할 일을 찾는 것도 어렵다. 울자고 들면 한없이 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우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 된다는 건 누구 말마따나 바빠서, 일까. 바빠서 울 틈이 없다는 자조적인 말을 들었던가, 했던가. 울음이 허락되지 않는 시간에 살고 있다는 건 시선이 직선이어서일지 모른다. 그러면 울 일도 없다가 더 적절한 말이 되려나. 울음을 우는 일보다 냉소나 분노하는 일이 더 잦아져간다.

  조금, 울었던가. 그래서 조금만 울 수밖에 없었던가. 안구건조증과 눈물 흘리는 일은 상관없는데도 눈물없음을 안구건조증 탓으로 돌리며 건조한 일상을 받아들인다. 사실은 우는 것은 하고픈 일이 아닌 것인지도.

  15년 꼬박 글을 써왔다는 라디오 작가의 에세이집은 내일로 가는 새벽녘, 덜컹거리는 창문이 전하는 바람과 함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같다. 운문 형태의 책은 그 여백을 감성으로 채운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도 내렸고 쌀쌀해지는데 감성을 함빡 머금어도 좋을 듯하다. 저자가 써내려간 다섯 장의 혼자가 된 시간의 이야기는 한번이라도 품었을 이야기라 공감의 여지가 있다. 다만 연인과의 이별 후의 감정쪽에 무게가 실려 있는 듯하다. 그래서 언뜻 보면 이별후의 감성이 책 전반을 채우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립고, 미안하고, 외롭고, 보고 싶은 날들의 이야기. 더불어 시를 쓰고 싶어지게 한다. 감성이란 온갖 건조함을 뚫을 수 있는 힘일 수 있겠다. 그것이 글이든, 글을 통한 지난날 회상이든 우리는 모두 삶에서 위로받고 싶은 순간이 있기에.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있어.

엇비슷한 경험도 해 본 적이 없는 일들.

그래서 짐작은 하지만 완전히 공감할 수 없을 일들.

얼마나 슬플까, 얼마나 아플까, 느끼려고 노력할 뿐이지,

본인이 겪어 보기 전까지는 전혀, 똑같이 알 수 없는 일들.


우리는 우리가 겪어 본 만큼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아파하고, 더 많이 슬퍼하게 되니까.


그래서 아무 말 없이 오래 같이 우는 사람은

아마도 비슷한 아픔이 있는 사람들일 거야.

- 오래 우는 사람

  

  그래서 오래 울 수 있을까. 비로소 지난 경험을 그 마음을 기억하며 여전히 사그라지지 못한 그 감정들을 다 뽑아내기 위해 새로 뜯은 휴지가 모자랄 정도로 울 수 있을까. 어느 것에도 무엇에도 무뎌져 내가 너무 악해졌나, 너무 신경질적이 되었나 생각지 않을 수 있도록 물기를 내뿜을 수 있을까. 밤이 지나 아침이면 지난밤의 글이 마음을 어지럽게, 쑥스럽게 할지라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모래시계는 마모되어 시간을 삐끗한다. 급격히 변해가는 세상에서 한번쯤 삐끗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 일인 것처럼 살아간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로 인해 오는 힘겨움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가는 시간. 더없이 마모되는 것이 사람들과 관계하는 일의 흔적이라는 것을, 시간의 마찰을 이겨내는 일이 살아감이라는 것을. 마냥 주절주절거리는 기분이 드는 혼자 있고 싶은 시간이다.


그거 마찰 때문이야.

모래 알갱이들이 서로 부딪쳐서 깎인 거지.

시간이 갈수록 알갱이는 작아지고, 통로는 넓어지고,

그래서 빨리 떨어지는 거야.


난 모래시계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우리 인생의 시간들도

모래시계 속의 모래 알갱이 같다는 생각을 했지.

점점 빨리 떨어져 내리는 것 같거든.

-모래시계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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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0-14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많이 울지는 마세요...아주, 조금만 우세요.

모시빛 2017-10-15 23:50   좋아요 1 | URL
밤이 지나 아침이 되면 지난밤 왜 그랬던가, 진짜 좀 울게 되네요 ㅎㅎㅎ

sprenown 2017-10-16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래 울지는 마세요..한 방울만.ㅎㅎ, 힘찬 한주 되시길...
 


내 영혼의 장소


12.jpg RED BOOK - 나를 찾아 떠나는 영혼의 여행

칼 구스타프 융, 김세용 옮김, 부글북스, 2012년 05월 10일.


   『RED BOOK』은 융의 유작이다. 융이 직접 쓰고 삽화를    그려 묶은 이 책을 라틴어로 새로운 책이라는 뜻의 ‘Liber Novus’라 붙였다 한다. 하지만 미완으로 남겨졌고 오랜 시   간이 흘러 2001년에야 세상에 나왔고 2009년에 책으로 출   간되었다. 융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쓰기 시작해 융의 핵심적인 이론이 다 담겨있는 바다가로 흘러가는 물줄기가 시작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융 자신의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서라고 할 수 있는데 융이 그린 그림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물론 무의식의 측면을 상징하는 그림이겠지만 그림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부족하게 이해되었지만, 색감을 비롯해 그림 자체는 잘 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복잡미묘한 세계 속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는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융이 펼쳐보이는 환상과 내면에 대한 무의식은 이해의 차원과 별개로 계속 끌림으로 이끈다. 좀더 명확히 이 아저씨...좀 끌린다. 아니, 그가 살고 있는 집이 더욱 끌린다. 살고 있는 집, 그가 작업하는 공간인 탑. 호숫가에 자리한 집, 미로같고 문명의 기구들을 들이지 않은 그 탑. 거기서 생활하는 그의 삶을 통째 훔치고 싶다.

  융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친구가 보덴호숫가에 성을 가지고 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때의 호숫가에서 놀던 시절을 생각하면 그 호소의 광활함을 즐거움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 호수 근처에 갈아야겠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깊이 박혔다고 했다. 그 어린 날의 기억이, 그를 호숫가로 이끈 것일까. 이곳이 융이 말하는 장소일 것이다.


사람마다 자신이 영혼 안에 조용한 장소를 두고 있다. 거기서는 모든 것이 자명하고 쉽게 설명된다. 사람이 삶의 혼란에 직면하게 될 때 물러나고 싶어 하는 곳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선 모든 것이 단순하고 명쾌하고, 목적도 분명하고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미국 유학을 한 어느 분이 번역서를 출간하기로 하고 번역하면서 책 속에 나오는 Jung이라는 이 명칭을 계속 정이라고 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때 ‘융님을 모르다니’하며 속으로 놀랬지만, Jung를 융으로 읽는다는 것 빼고 내가 융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이 있었나. 거듭 책을 읽어도 융에 대해서 그의 꿈에 대해서 무의식에 대해서 이론에 대해서 안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래도 이해가 되는 대로 또는 되지 않는 대로 문득 문득 융의 무의식의 세계에 빠지고 싶은 날들이 있다. 어쩜 내 깊은 무의식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을 우회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내면에 있는 이 시대의 정신은 궁극적 의미의 위대함과 그 광대함에 대해서는 인정하려 하지만 궁극적 의미의 사소함에 대해서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깊은 곳의 정신이 이러한 오만을 정복했다. 나는 나의 내면에 있는 불멸성을 치유하는 수단으로 궁극적 의미의 사소함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 사소함이 나의 내면을 온통 들쑤셔놓았다. 그 이유는 그것이 영광스럽지도 않고 영웅적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은 곳의 정신의 집게가 나를 꼼짝 못하게 잡았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쓰디쓴 약을 삼켜야만 했다.


  융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며 ‘꿈’을 발견했다. 꿈에 관한 기억을 글로 적으며 정신, 영혼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펼친다. 영혼의 본질과 의식과 무의식, 신과 악과 남성성과 여성성 등 때로는 경구처럼 글들을 기록하고 있다. 융은 자유가 외면에 있지 않고 내면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내면을 탐구하며 영혼의 본질을 찾아가는 것은 자유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는 일이다. 융은 강력한 행동을 통해서 외적 자유를 성취할 수 있지만 내면적 자유를 창조하는 것은 상상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융의 대표적인 개념인 아니마와 아니무스, 즉 우리의 내면엔 남성 속의 여성과 여성 속의 남성이 있기에 어느 한쪽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할 때에야 완전한 영혼을 갖출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음이 없다면, 생명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영원성이 다시 일어나면서 생명 자체의 의미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 그리고 당신의 존재를 즐기기 위해 당신은 죽음을 필요로 하고, 한계는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의 존재를 성취할 수 있도록 만든다.


  영혼이라거나 내면을 찾는다는 것은 재미있는 놀이처럼 때론 뜬금없는 놀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실체를 잡을 수 없는 이 영혼의 목소리를 쫓으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꿈의 기록에서 비롯한 상징들을 당연한듯 수용하며 내면을 해석하게 되는 까닭은 무얼까. 자고나면 사라지는 것이 훨씬 많지만 더러 생생하게 기억되는 꿈, 그 이미지에서 내 영혼의 본질을 찾아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밤이다.


부디, 생각하길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쾌락을 받아들이고 느끼길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고를 받아들이길. 그것이 곧 사람을 제 길로 안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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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삶의 문제


나쁜 페미니스트-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최근 상당히 의아함을 자아내는 두 일을 언론을 통해 접했다. 갑작스레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실시간에 올랐다. 사람들이 이 단어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검색하는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누군가 관련된 발언을 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대한 명확한 의미를 얼마만큼 알까. 이때의 단어는 사전상의 의미일까, 인터넷에 회자되며 부정적 의미를 가득 담은 의미일까. 이런 궁금증이 페미니즘이 이슈가 될 때마다 궁금해졌다.

  실시간 검색어는 한 연예인이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한 일과 관계가 있다. 누군가의 페미니스트 선언이 놀랄 일인가 싶기도 하지만 ‘뜬금없는’ 선언이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가 대마초를 피웠다는 것은 이 선언에서 중요한 요인은 아니라고 보았기에 나름 대단한 걸이란 생각도 했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 사람의 언어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담배피는 사진을 올리며 페미니스트 선언을 했기에 그 이유와 연관성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을 다해야 하는 성격”이라며 자신으로 인해 “페미니스트임을 당당히 밝히는 여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에선 사실, 경악했다. 논란이 일자 “'여성스럽게 입는다”, “남성적이게 운전을 한다”라는 말을 한 것과 페미니스트 발언에 대해 경솔하다고 사과를 했다고 하는데, 적어도 페미니즘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을 주창하지 않는다는 것만 봐도 그의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은 확실히 부족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요즘 한창 떠들썩한 김광석 부인의 발언이다. “이런 나라에요? 여자를 보호하지 않는 나라입니까?” 흔히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대표가 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저런 ‘불리할 때만 여자냐’라는 말이다.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난 저 발언에 또한 경악했다.

  여성이며 페미니즘에 일정 부분 동의하면서도 페미니스트라 ‘당당히’ 말하지 못하는 나로선 이로 인해 생겨날 페미니스트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염려했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인식의 문제이거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행동력, 실천력과 관계된다. 페미니즘 또한 하나의 운동이기에 이를 위한 직접적인 행동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길을 가다 쓰러진 사람을 봤을 때 ‘저 사람을 일으켜 줘야 할 텐데’라고 생각은 했지만 행동하지 못했다면 ‘길가다 다친 사람을 도와줬어’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적어도 내 부족을 자각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때론 소극적 저항에 머물며 스스로의 인식전환에만 만족하는 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는 나와 같은 사람에겐 상당히 의미있는 생각을 하게끔 하는 책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한때 ‘나쁜’을 붙여볼까 생각하긴 했지만 그것도 뜬금없어 보이긴 할 것이고 어쩌면 “새삼스럽긴”이나 “당연한걸”이란 반응이 튀어나올 것도 같다.


나는 페미니즘을 되도록 단순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페미니즘이 어렵고 복잡한 개념이고 지금도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으며 빈틈도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저 이렇게 생각할 뿐이다. 페미니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도 못하고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를 믿는다. 여성에게는 자신의 몸을 지킬 자유가 있고 필요할 때는 복잡한 절차 없이 의료 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남녀가 같은 일을 했을 때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선택이기도 하다. 어떤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 역시 그녀의 권리이기에 존중한다. 하지만 그녀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 또한 나의 의무이며, 나라면 하지 않을 법한 선택을 하는 여성들을 지지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근본 원칙이라고 믿는다.


  나도 페미니즘을 단순하게 해석하면 좋을 것을, 너무 이론에 매몰되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록산 게이의 글을 읽다 보면 페미니즘이 뭐 별건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그만큼 부담감이나 거부감없이 이 책은 읽힌다. 저자 자신의 경험과 함께 서술되어 그의 경험을 함께 나누며 그가 말하는 것에 대해 공감하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그리고, 재미있다. 대체로 페미니즘 관련 책들이 용어의 낯섦과 어려움이 가득하다는 걸 생각하면 몇 년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한 페미니즘 서적 중에서 이 책만큼 편안하게 다가오는 책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외국인의 저서인데도 말이다. 그런 점에서 페미니즘은 이론의 언어가 아니라 공감의 언어가 필요하지 않는가 생각하게 된다. 좀더 대중적이도록 운동으로 한정된 느낌이 들지 않는 그들만의 세계가 되지 않는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십대 후반과 이십대에서는 페미니즘을 지지하면 매사에 일관적이고 논리정연한 사람으로만 살아야 할까봐 거부했던 것도 같다. 왜냐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그런 사람이 될 리가 없으니까. (…) 페미니즘이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임을 안 순간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건 놀라울 정도로 쉬워졌다. 페미니즘은 우리 사이 교집합을 찾기 위해, 우리가 누구이고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하는지 알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편이다.


  얼마 전 지구촌 뉴스에서는 도로를 단속하던 경찰이 이유없이 흑인 여성을 세워 신분증을 요구하는 장면을 보도했다. 경찰은 조롱조의 태도로 일관하다 흑인 여성이 ‘검사’임을 보증하는 신분증을 받아들고 무척 당황해 허둥지둥했다. ‘흑인+여성’에 대한 차별을 보여주었는데 록산 게이 역시 흑인 여성이다. 그 역시 미국 사회에서 수없이 많은 차별과 편견을 겪고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또한 대중문화에 나타난 다양하고 많은 여성혐오와 여성폭력 언어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여전히 많은 페미니스트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페미니즘이 백인 여성 위주로 흘러가고 있음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록산 게이가 지적하듯 아직 페미니즘이 헤쳐 가야 할 길은 멀다. 또한 페미니즘 역시 생물로서 존재하기에 시대에 맞게 변화되어 가야 한다. 그리고 분명 함께 노력해야 할 일이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불리기를 주저하거나 특정한 이가 페미니스트라 자처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면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 아니, 변화는 있겠으나 발전은 없겠다. 변화하되 발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겠다. 록산 게이는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것이 ‘인신공격’ 같았다 고백했다. 그리고 차츰 록산 게이가 알아간 세상에서 어쩌면 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을 경험해야 했다. 어쩜 필연적인 것 아니었을까 싶다.

  “확실한 건 나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개똥같은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자기만의 언어를 정립한 록산 게이는 이제, 스스로를 ‘나쁜 페미니스트’라 자처한다. 이때의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스트를 비난하는 이에 대항해 전혀 흠잡히지 않으려 스스로를 옥죄는 그런 페미니스트이지 않겠다는 말이 아닐까 한다. 어쩌면 주류로서의 페미니즘과는 다를 지라도, 그 실천방식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여성이기에 개똥같은 취급을 받지 않겠다는 전제에서 행동하겠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말이 흑인 여성으로서 당해온 록산 게이의 경험을 생각나게 한다. 그렇기에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여성에게 인식의 문제이기보다 삶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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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인생 - 조지프 캠벨 선집
조지프 캠벨 지음, 다이앤 K. 오스본 엮음, 박중서 옮김 / 갈라파고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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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신화와 인생, 조지프 캠벨 저, 갈라파고스, 2009.


  말장난에 혹하지 않으려 했는데, 캠벨, 캠벨을 되뇌며 어느새 나는 포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신맛과 향기가 강한 이 포도를 삼키며 캠벨 또한 그의 생에서 ‘신화’라는 강한 맛과 향기를 좇았고 살아내었구나 싶어 놀랍고 놀라웠다. ‘신화’에 관한한 대표적인 학자인 그의 생애가 신화로 흘러가고 집약되기까지 그가 주장한 영웅의 여정과, 천복을 좇는 삶이 그의 생에 드러나 있었다.   

  뉴욕에서 태어난 캠벨의 유년 시절은 나쁘지 않았다. 상위 중산층에 가톨릭 가정이었고 아버지는 그를 늘 믿었고 자랑스러워한 듯하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난 어린 캠벨은 아버지와 함께 미국자연사박물관을 구경갔다가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해 매료된다. 이후 인디언에 관한 신화와 민담들을 섭렵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신화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던 그는 14세 때에는 병으로 집안에 머물며 자연과학을 공부하였고 대학에서도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하였다.

 그의 인디언에 대한 매혹은 어쩌고 이과계 공부를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즈음, 그가 대학 2학년에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서 중세 영문학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어릴 적 그토록 인디언에 매료되었던 그의 공부의 방향이 다르게 흘러가는 듯 보였으나 그는 그의 천복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가 학사와 석사 공부를 하는 동안 어릴 적 읽던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담과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많은 주제들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이에 대한 공부를 지속한 것이다. 그리고 콜롬비아 대학을 비롯한 파리 및 뮌헨의 대학에서 세계 전역의 신화를 섭렵하고 중세 프랑스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다. 그리고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배에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게 되면서 힌두교와 인도 신화에도 깊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에 의견에 따르자면 그가 천복을 좇자 자연스레 그에게도 천복의 삶이 맞닥뜨려 지는 것이다.

 콜롬비아 대학의 지원으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캠벨은 영문학 대신 인도 철학과 미술 쪽으로 공부를 계속하고자 하나, 대학 측의 반대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난다. 1929년, 대공황의 시기였고 사회 전체가 경제적 불황으로 침체된 그 때, 캠벨은 우드스톡의 오두막집에 칩거하며 5년 동안을 독서와 사색, 습작에 몰두한다. 물론, 이 시기 많은 이들과 교류하기도 한다. 이 시기에 캠벨은 소설가 존 스타인벡을 만났고 해양생물학자 에드워드 플랜더스 로브 리케츠와 교류하였다.

 우드스톡의 시기를 보내게 되는 캠벨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다시 저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야만 할까?”였다. 그가 여행을 하며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힌두교, 융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의 그 느낌은 강렬하였던 모양이다. 그는 대학으로 가서 유리병 속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고, 학위 취득을 위한 필수과목을 모두 이수한 상태였고 논문만 쓰면 끝이었지만 학교는 다른 곳으로 옮겨 공부를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는 ‘이까짓 것 개나 줘 버리자’라고 생각하며 우드스톡으로 들어갔다고. 그리고 박사학위를 얻지 못했지만 덕분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고 아무런 책임질 일도 없이 경이로운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책만 읽었다. 그리고 돈은 없었지만 당시 뉴욕의 큰 서점에서 책을 주문해 있었고 책값을 지불하지 않았다 한다. 대공황의 시기에는 다 그랬다고 하니, 뭐 특별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서점은 그에게 돈을 재촉하지 않고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고 캠벨은 일자리를 구하고 나서 책값을 냈다고 한다. 우리나라 IMF 시기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를 한번 생각해본다. 자연스레 부정적인 답이 뒤따른다. 아, 캠벨은 배짱도 운도 좋았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는 정말로 어찌할 수 없다. 내겐 아무런 철학도 없었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영문인지 우리는 함께 존 듀이를 공부했다. 카멜 도서관에서 나는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두 권짜리 『서구의 몰락』을 꺼내 들었는데, 이런, 세상에! 거기 적힌 내용은 벼락과도 같았다. 슈펭글러는 말했다. “젊은이여, 만약 그대가 미래의 세계에 있고 싶다면, 자신의 그림붓과 시 쓰는 펜일랑 선반 위에 얹어 두고, 멍키 스패너나 법전을 집어 들어라.” 나는 스타인벡에게 말했다. “저기요, 이것 좀 한번 읽어 보세요.” 나는 책의 제1권을 다 읽은 다음에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잠시 후에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아, 나는 이 책 절대 못 보겠는걸. 아, 내 예술은 어쩌나.” 그는 거의 2주 동안이나 한방 먹은 사람처럼 넋이 나가 좀처럼 글을 쓰지 못했다.


 우드스톡의 칩거는 세라 로런스 대학의 교수가 되면서 끝이 났다. 그는 1934년 이 학교에서 문학 담당 교수로 임용된 후 38년 동안을 재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학교에서 교직 제안이 들어왔을 때에도 일자리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일자리를 원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것이 그의 독서에 방해만 될 뿐이라고. 그러나 그 학교에 가서 ‘예쁜 여학생들이 와글거리는 것을 보자, 이것도 나쁘진 않겠다’라고 생각했다 한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이 학교에서 제자였던 현대 무용가 진 해드먼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캠벨이 그의 강연과 저서에서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듯 그는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무언가 들떠 있는 느낌, 이끌림을 받았다고 했는데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난 후 캠벨이 졸업선물로 그녀에게 슈펭클러의 <서구의 몰락>을 전하며 그의 마음을 표시하였다고 한다. 캠벨의 아내 진 해드먼은 그의 사후에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조셉 캠벨 재단을 설립하고, 캠벨의 유고와 대담, 그리고 강의록 등을 정리, 출간하고 있다. 

 캠벨에 대해 그가 신화에 관한 책을 썼고 대공황의 시기에 실업자로서 우드스톡에 들어가 칩거하며 살던 시절만을 알았을 땐, 나는 그의 성정이 조금은 우울적 기질이 다분한 조용한 학자로서니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조금 알아가는 과정에서 그는 오히려 미국식 사고방식이 다분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미국식 사고방식이라 말하면서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약간은 난감하지만 쿨함과 유쾌함이 조합된 코믹적 느낌이 조금씩 들고 있다. 게다가 그는 색소폰을 연주했고 육상 선수로 달리기를 한다고 하지 않는가. 샌님같은 학자 스타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더 많이 알게 되면 달라질까. 어쨌든 경제적인 좌절감으로 인한 칩거가 아니라 오로지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에서 오는 칩거임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의지대로 신념대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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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운그레이드 또는 리셋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유발 하라리, 김영사, 2017-05-15.


  그런 것도 같다.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데우스가 되려 한다. 스스로 창조해낸 ‘신’이 되고자 한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신이 만들어낸 세상의 규율을 쫓으며 ‘영원’히 살아갈 세상을 꿈꾸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 담고 있다.

   이야기를 창조하고 허구와 신화를 창조하며 협력한 호모 사피엔스가 과학기술로 기아, 역병, 전쟁까지 해결한 이후에는 이제 정복할 것은 신의 창조영역이다. 신은 창조되었는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인지, 무엇을 믿든 간에 불멸, 행복, 신성을 갖고자 하는 인간을 유발 하라리는 신이 된 인간, 호모 데우스라 명명했다. 그리고 신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했다.


신성을 획득한다는 것이 비과학적인 말 또는 매우 엉뚱한 말로 들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흔히 신성의 의미를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성은 모호한 형이상학적 성질이 아니다. 그리고 전능함과 똑같은 말도 아니다. 인간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한다고 말할 때 그 신은 성경에 나오는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보다는 그리스 신들 또는 힌두교의 천신들을 말한다. 우리의 후손들은 제우스와 인타라처럼 약점, 꼬인 구속, 한계를 가질 테지만 우리보다 훨씬 더 큰 차원에서 사랑하고 증오하고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신과 그리스 신들 또는 힌두교의 신은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인간성’이 아닐까. ‘신성’을 염원하면서 ‘인간성’ 가득한 신의 능력을 얻고자 한다는 말은 뭔가 어불성설인 듯하지만, 적어도 내게 이 두 신들의 차이를 말하라면 그렇다. 하긴 하나는 종교화되었고 하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도 차이이긴 하겠다. 종교혁명이 신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은 얻은 것이라는 말은 의미있게 들리긴 한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종교적인 지배가 절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지배 때문에도 고통받는 존재들이 있다. 신의 사랑은, 그들에게는 가닿지 않는 모양이다. 인간이 신이 된다면 달라질까.

  유발 하라리의 글은 요즘의 트렌드에 맞게 감각적으로 기술된다. 비슷한 분야의 제레미 다이아몬드와는 또다른 느낌인데, 둘 다 술술 읽히긴 하는데 왜인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글에 더 재미를 느낀다. 아마도 문화인류학자로서 직접 경험한 사례를 펼쳐놓는 다이아몬드의 글에 더 흥미를 느끼는 것이기도 하고, 하라리가 그리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상을 상상하기 싫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후반부로 갈수록 하라리의 글에 대한 집중도 약해진다. 힘있게 서술하던 처음과는 달리 그의 글 또한 뭔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도 같다. 그가 그리는 ‘될 것이다’의 세계는 부분 이뤄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니 인류의 미래를 위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중점을 잡아야 할 인류의 미래는 무엇일까. 필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저자의 의견일 것이다. 어쩌면 정보가 너무 넘쳐나서, 어쩌면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우리는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때론 과학문명이 여기서 멈추었으면 싶을 때도 있다. 업그레이드 했다가 오류를 발견하면 다운그레이드 하건 리셋하는 것처럼 이 문명의 행운이 더 이상 운이 아니라고 느껴진다면 말이다. 과학이 제시하는 미래가 암울한 것이 아니라 그 과학을 이용, 활용하는 이의 결정에 미래가 놓여 있다는 것이 암울한 것이다.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호모 사피엔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집단의 협력으로 종을 유지해 왔다. 절대적인 믿음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왔지만 각각의 다른 믿음들을 이끌어 온 존재가 있었다. 여전히 인간 존재에 대한 가치부여도 인간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기에 인간을 믿으면서도 믿지 못하게 된다.

  “가능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런 가능성이 실현되지 않도록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

  인간 개개인이 생각하는 새로운 방식과 행동들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궁금하다. 내 생각과 행동이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급격히 심각해진다. 창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괴하기 위해 신이 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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