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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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400달러에 팔렸습니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The Underground Railroad    


  “400달러에 팔렸습니다.”

  그냥 생각해도 많지 않은 돈인데 싶어 현재 환율을 확인해본다. 43만4,800원. 유럽으로 가려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리비아 노예시장에서 팔려 나간다는 CNN 뉴스 보도는 우리나라의 염전노예, 축사노예, 장애인 착취 사건과는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인종’ 때문이다. 염전 노예, 축사 노예 같은 일들이 잊을 만하면 나타나긴 했다. 그때마다 착취한 ‘인간’들의 잔인성과 무개념, 형언할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해 비난했고 그들의 죄에 대한 처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종이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거기엔 “왜 뭐가 잘못됐는데”란 버팅김과 그것을 타당하게 받아들이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하긴, 세계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국가의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인종차별을 조장하고 지지하는 상황 아니던가.

  이런 기막힌 인식을 한번에 설명해주는 말이 콜슨 화이트헤드의 소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속에 있다.

  

“어딘지 모르겠는데, 사람을 훔쳐다가 파는 사람은 죽음에 처해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코라가 말했다. “그런데 뒤에서는 노예는 뭐든지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그리고 그걸 만족스러워해야 한다고요.” 다른 사람을 재산으로 갖고 있는 것은 죄이기도, 혹은 하느님의 축복이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만족스러워하기까지 해야 한다고? 노예 상인이 인쇄소로 숨어들어 가 그 구절을 쓴 게 틀림없었다.


“그 말 뜻 그대로다.” 에설이 말했다. “히브리인은 히브리인을 노예로 쓸 수 없다는 뜻이야. 그러나 함족의 자손은 해당되지 않지. 그들은 검은 피부와 꼬리로 저주를 받았어. 성경이 노예제를 비난하는 부분은 니그로 노예제를 말하는 게 전혀 아니다.”


“저는 피부가 검지만, 꼬리는 없어요. 제가 아는 바로는요―확인해볼 생각은 못했네요.” 코라가 말했다. “노예제가 저주이긴 하네요. 그건 맞네요.” 노예제는 백인들이 그 멍에를 메고 있을 때나 죄이지, 아프리카인들일 때에는 죄가 아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람이 아니라고 규정하지 않는 이상.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노예소녀 코라의 탈출기다. 19세기 미국은 노예제를 두고 남북간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지하철도’라는 흑인 노예 탈출 비밀 조직이 존재했고 작가는 이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여 지하를 운행하는 지하철도의 모습을 그려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잡혀온 할머니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대대로 노예가 된 코라가 어떤 계기로 탈출을 결심하고 탈출과정은 어떻게 전개되는지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한 사람의 필사적인 탈출기에 ‘흥미진진’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민망스럽지만, 코라의 탈출을 응원하는 입장에서 떨리는 심장을 좀더 객관화시킨다면 그말이 적당할 듯하다.

  레미제라블에서처럼 탈출자에 대한 긴장감을 촉발시키는 것은 뒤를 쫓는 자이다. 그가 얼마나 집착적이며 악랄한가가 얘기의 방향을 달리한다. 수많은 악랄한 인간들이 있음에도 20년 가까이 장발장만을 쫓는 자베르 경감 역할은 이 책속에서 노예사냥꾼 리지웨이로 나타난다. 이 노예사냥꾼은 노예사냥을 통해 ‘돈을 얻는다’라는 것 외에도 업무에 대한 신념을 품고 있다. 도망간 노예를 끝까지 쫓아 제 위신을 세우는 것과 절대로 탈출이라는 마음을 먹지 않는 공고함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신념이란 인생을 살아가는데 방향을 설정해주는 소중한 것이긴 하지만, 신념의 ‘내용’이 중요함을 자베르와 리지웨이를 통해서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노예사냥꾼 리지웨이의 신념은 농장에서 유일하게 탈출한 노예인 메이블, 코라의 엄마를 잡는 것이다. 당연히 메이블의 딸이 또다시 노예 농장을 탈출하여 자유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 

  자유의 땅인 북부 또는 캐나다로 가는 여정은 험난한 과정이다. 정착하는 역, 도시는 노예제에 대한 그 도시의 찬성여부에 따라 코라에 대한, 노예에 대한 다른 분위기를 전한다. 그렇기에 어느 도시에서든 코라는 자신의 의지 외에 타인,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백인들이 모두 노예제에 찬성하지는 않는 것처럼 흑인이라서 모두 노예제를 반대하고 탈출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노예가 처한 위험한 상황에 손을 내밀고 연대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고, 노예제에 찬성하거나 우호적인 행동을 보인 백인에게 잔인하게 대하는 백인도 있다. 이런 백인의 행동은 개개인의 인식에 따라 나타나겠지만 그 인식을 타당하게 만드는 것은 그 도시의 분위기이다. 집단이 정의하는 당연함과 타당함의 정도가 인간에 대한 잔인한 행동을 허용하는 근거가 된다. 

  자유와 생존, 인간 존엄을 찾아 농장을 탈출한 코라와 메이블, 그리고 수많은 노예들의 치열한 탈출기도 탈출할 꿈조차 꾸지 못한 채 비참한 생애를 사는데 머물렀어야 하는 수많은 노예들도 이 책속에 있다. 노예제를 다룬 무수한 이야기속의 내용과 같은데도 무엇이 이 책을 특별하게 만드는 걸까. 많지 않은 페이지 속에 작가는 이 모든 이야기를 녹여냈는데 속도감과 문장과 캐릭터가 그 시대를 풍부하게 상상해낼 수 있도록 해준다. 물론 코라에 대한 연민과 응원까지. 코라만큼 마음을 휘어잡는 메이블까지.

  실제로 미국의 지하를 달리는 지하철도는 없었지만 목숨을 걸고서 노예들의 탈출을 돕는 지하철도는 존재했다. 그 지하철도를 운행하는 이들은 모든 인간존엄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었다. 아니 신념까지는 아닐 지도 모른다. 당연한 인식에 대해서 특별한 신념으로 행해야 하는 시대라니, 생각할 지도. 어쨌든 그 시대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노예사냥꾼으로 살아간 리지웨이의 신념과 지하철도 요원들의 신념은 얼마나 다른가.

  “400달러에 팔렸습니다.”

  19세기에 일어난 일이 현재에 재현되는 이 상황, 개인의 잘못된 신념이 아니라 시대와 그 도시, 나라가 그것을 타당하게 만들어버리고 있다. 성경에서 따라야 할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가치는 눈감고 한문장, 한구절을 제 이기심과 제 이익에 맞추어 해석하는 것처럼, 누가 무엇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 가치를 제 본위로 해석하고 퍼뜨리고 있는지 참으로 경악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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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공감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민음사, 2016.


  이 책이 보통의 베스트셀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도 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응원에 힘입어 문학상의 수상까지 이뤄낸 82년생 김지영은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책으로 또한 82년생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김지영이라는 이름이 신문에 인용되는 현상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내내 82년생 김지영의 돌풍이 이어져 웬만한 이들은 모두 이 책을 읽었으리라 의심치 않고 있었는데 얼마 전 알라딘에서 이 책에 대한 1000명 읽기였는지 구매였는지 그런 이벤트가 게재된 것을 봤다. 수많은 사람들이 읽어서 이제 더 이상 읽을 사람도 책을 구매할 사람도 없을 만큼 무수히 읽고 무수히 구매를 했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의 구매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어쨌든 좀 놀랐다.

  이 책이 한창 돌풍을 일으켰지만 이 책에 대한 나의 감상은 꽤나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열풍은 책 자체에서 기인한 저력 외에 외적인 요소가 상당 부분 작용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나 역시 기대만큼의 만족감이 없었기에 그 실망의 강도가 강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통해서 페미니즘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공감이라거나 82년생뿐만 아니라 여성 보편의 삶에 대한 인식을 달리한 것도 없고 무엇보다 소설에, 문학에 기대하는 문학적 요소를 느끼지 못해서 그냥 그랬는데, 그런 내 감상 때문인지 이 책에 대한 또한번의 이벤트라고 해야 할까, 아니 ‘주목해서 읽으세요’라는 어떤 강요의 느낌이 마뜩치 않았다. 이보다 더, 읽어야 할 책이 많은데. 아니 이것말고 다른 것을 더 읽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했다. 뭐,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베스트셀러라서 부러워서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책이 안 팔리는 시대에,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베스트셀러인 것이 마냥 부러워서.

  나는 왜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공감하지 못했나를 생각했다. 책이 쉽게 읽힌다는 점은 장점인데 내게는 그 점이 단점으로 작용했나 보다. 나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자 했다. 그러나 이 책은 내게는 소설이 아니라 인터넷 까페나 게시판에 올라오는 사연으로 읽혀졌다. 그런 사연에 대해서는 위로나 공감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할 뿐이지 내 문학적 감수성이 특별히 더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면서도 82년생 김지영이 겪는 일들은 너무도 특별할 게 없어서 별 감흥이 없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정도를 가지고, 뭘. 아마도 그런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더 자극적인 삶을 기대했나 싶기도 하다. 82년생 김지영의 삶의 여건은 확실히 평균 이상으로 느껴졌다. 나는 어쩌면 82년생 김지영이 삶이 지금보다는 특별한 층에 속하는 여성의 삶이라고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게시판에 올려진 사연같은 이 글이 처음엔 ‘너무 문학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다가 ‘문학적’인 것이었으면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겠나 하는 쪽으로 다소 옮겨갔다. 이런 형태로 작가가 글을 쓰면서 사람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게 사람들로부터 ‘김지영’에 대한 공감을 할 수 있도록 설계를 한 것이구나, 그런 생각으로. 82년에 태어났든 70년에 태어났든 90년에 태어났든 지금 현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같기에 김지영을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어쨌든 이 삶들은 왜 이토록 달라지지를 않았니, 그런 거였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갔고 여전히 경제적인 여건이 힘겨운 여성이 아님에도 그 삶이 자아를 상실할 정도로 치닫는 다는 건 얼마나 모순적이고 얼마나 문제적인가. 그렇다면 작가가 전달하고픈 의도는 내게도 잘 전달된 것이구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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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로 가기 위하여




청춘시대 - 박연선 대본집, 박연선, 2017-09-11.


 꽤 오래 길을 잃어버린듯했다. 그래서 지치고 가라앉고 우울하고 아프기까지 했던 건가. 이런 마음의 상태가 몸의 상태를 힘들게 이끈 모양이다. 그리고 서로가 앞서거니 하면서 몸과 마음이 엎치락뒤치락 가라앉고만 있다. 이런 침체 상태가 몇 개월을 지속되다 보니 이 상태에 익숙해진 듯, 습관화되어 버린 것도 같다. 도대체 시작이 언제였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를 슬프고 아픈 소식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는데, 무엇 때문인지 언제인지를 명확히 알면서 이러한 상태가 종료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득 생각했다.

  이야기하다가 ‘우리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지’란 말을 자주 하는 걸 알았는데 이 모든 것에 청춘의 시절을 보낸 안타까움이 있던 건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정말 늙어서, 하루하루 늙어가서 그런가. 어쨌든 이유를 찾으려는 생각이 그 속에 더 머물기 위함이 아니라 빠져나오기 위해서라는 쪽으로 1% 더 두기로 했다.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할 때이기도 하고 이렇게 방황하는 동안 달력은 올해를 한달만 남겨두었으니까.


어딘가를 가려고 하니까 길을 잃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목표 같은 걸 세우니까 힘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오래 같은 자리에 있어도 길을 잃나 보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그 물속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계속계속 가라앉으면서….


  아니다. 생각해보니까 JSA 귀순 병사의 달리기 영상 때문인 거 같다.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 분명한 저 몸짓. 현실감이 없는듯하면서도 현실감있는 영상에 붙들려서인 모양이다. 태어날 때부터 분단국가임을 알았으면서도 새삼 분단국가임이 어떤 것인지 뚜렷이 느껴지는 현장의 모습. 자신도 모르게 넘어버린 북한 병사처럼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군사경계선의 이미지. 스물다섯의 병사가 40여발의 총알속을 달리고 여러발을 맞고 쓰러져 마침내 의식을 찾은 열흘을 담고 있는 저 찰나의 순간. 영상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가 묘하게 느껴졌다. 아주 묘한.   

  허무를 끌어안고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지 돌림노래에 빠져 있었던 건지. 점심은 저녁은 무엇을 먹을지 그런 것을 생각하기 귀찮았던 건지. 공과금, 청구서, 일…이런 것들을 매달고 사는 것이 싫어서인지, 무엇을 하고 싶어서인지, 무엇을 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그저 모르게 흘러가 우울에 처박혀 버린 시간들을 불러내보니 고민인 것도 같고 그냥 그저 그런 귀차니즘인 것도 같고, 때론 심각해 보이기도 하다가 너무 가벼운 걱정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한.


평범하다는 것은 흔한 것, 평범하다는 것은 지루하다는 의미였다. 그때의 나에게 평범하다는 것은 모욕이었다.


  정말, 내가 이런 상태였던가. 지루한 일상에 스스로 지쳐서 방황했던 건가. 생과 사의 선을 넘은 병사의 달리기 영상을 보았다고 당장 달라질 내 몸과 마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작은 돌멩이 하나 맞은 만큼이라도 각성은 하게 될까. 이젠 나이를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이든 하려고 하기보다 어떻게든 안하려 용을 쓰는 게 하루의 일과인 듯하다.

  작년 여름이던가. 청춘시대가 방영됐고 올해에 시즌2도 방영됐다. 방송됐던 드라마를 대본집으로 읽어보는 것은 처음인데 확실히 소설을 읽는 것과는 달랐다. 청춘시대를 보며 나또한 청춘시대의 등장인물들처럼 버티고 견뎌내는 청춘의 시대를 겪었다 생각했는데, 그 시절을 겪으며 느끼고 생각하고 결심한 것은 어디로 다 소멸해 버렸을까. 그때에는 견뎌냈는데 왜 지금은 오기도 객기도 없어진 걸까.

  이 선을 넘어와서는 안돼.

  누군가는 넘었고 누군가는 넘지 않았고 누군가는 넘어서 놀라 되돌아갔다. 가상의 선 하나가 주는 의미와 그 선을 바라보는 이들의 의미가 어떤 상황을, 변화를,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았다. 내가 둘러놓은 선이 너무 많구나 싶었다. 달리기까지는 아니라도 몇 발자욱 떼야 하리란 걸, 생각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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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 제155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김난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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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세월이 가면 다 잊혀지겠죠.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오기와라 히로시, 2017-05-19.


  수채화같은 표지가 예뻤다. 이런 느낌의 책표지가 대체로 일본 소설이나 에세이에 자주 쓰이는 터라 예쁘네하고 오래도록 그냥 넘겼는데, 바다가 보고 싶을 때가 있고 바다에 가고 싶을 때가 있는 것처럼 이 책을 읽고 싶을 때였나 생각해본다.

  마침 이 그림이 가을이 들어서는 길목에 바라본 풍경과 닮아보였다. 그곳은 바다는 아니었고 강이었지만, 쌀랑한 가을풍경의 잔상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바다가, 강이 보이는 언덕, 그런 장소에 그런 공간에 아직 머물러 있고 싶은 마음 탓이다.

  단편집인 이 책엔 여섯 개의 이야기가 있다. 여섯 개의 이야기는 가벼웁게 잔잔히 흐르는 물처럼 흘렀다. 크게 출렁이지도 다른 것이 끼어들지도 않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그 물이 나를 흘러갔구나 싶은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가족과 상실, 그리고 시간이란 단어도 흘러갔다.

  첫 번째 단편 「성인식」은 딸의 죽음으로 깊은 우울 속에서 살다가 딸의 성인식에 참가하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억 속의 딸은 잊을 수 없어서 잊지 못해 방황하는 두 부부의 성인식에 참가하기 위한 고군분투가 참으로 애잔하게 다가오며 그들을 응원하게 된다.


지금 돌아가면 또 한탄과 회한의 날들이 시작될 것이다. 오늘로 끝내고 싶었다. 스즈네를 위해서기보다 자신들을 위해서였다. 우리는 늘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슬픔을 어느 시점에서는 과감하게 떨쳐내야 한다. 나와 미에코에게도 성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언젠가 왔던 길」은 어릴 적부터 엄마의 억압에 갑갑해 하던 딸이 취업하면서 엄마로부터 독립해 살다가 16년이나 지나서 치매에 걸린 도움이 필요한 엄마를 만나는 이야기다. 지난날 자신을 힘들게 하던 엄마가 아니라 기억도 없이 아픈 엄마를 보면서 마음이 변화해 가는 딸의 이야기, 어쩌면 예상가능한 방향으로 흐르는 이야기다.  「멀리서 온 편지」는 일만 하는 남편 때문에 친정에 갔다가 남편이 보내는 거라 생각한 메일을 받으면서 점차로 남편과 그리고 조부모의 삶에 대해 이해해 가는 내용을 담았다. 「하늘은 오늘도 스카이」는 집을 나와 바다를 찾아 가는 소녀의 이야기다. 이럴 때면 늘 길에서 누군가를 동행하게 되는데 소녀의 동행인은 비닐봉투를 쓴 소년이다. 둘의 대화가, 재미있다. 「때가 없는 시계」는 아버지의 유품인 손목시계를 수리맡기면서 시계방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버지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책의 표제작인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한때는 아주 ‘잘 나갔던’ 이발소 주인. 유명인들이 드나들던 이발소는 망해서, 바다가 보이는 한적한 곳에서 운영된다. 멀리까지 찾아온 손님에게 이런 저런 자신의 삶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발소 주인. 오랜 전문가의 손길은 그리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은데, 그의 이야기는 길고 여운도 길다.

 단편 하나하나가 가만 보면 가족 관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의 가족. 인생이란 가족이 기본적인 관계이고 또한 가장 큰 애증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이 속에서 겪는 갈등과 상처와 그리고 애정들이 작가의 담백한 문체로 흩어져 있다.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에서 떠올리는 것은 한편으로는 ‘바다가 보이는’이라는 구절이다. ‘바다가 보이는, 바다가 보이는’ 이라는 이 말은 오래도록 다른 의미로 기억될 것 같다. 오랫동안 바다가 보이는 곳을 바라볼 사람들이 생각나는 말이다. 딸을 잃은 부부의 말에 누군가에게 위로랍시고 건네는 저 말 하나가 위로일 수 있는지 거듭 생각하게 된다.


마음의 아픔은 시간이 해결해준다. 흔히들 하는 말이다.

    그 말이 맞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으로 몇 년이 지나야 해결될 수 있을까. - 성인식 中


  2017년 11월 16일, 3년 7개월이 흘렀고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온 지 8개월이 흘렀다. 미수습자 5명의 가족이 목포 신항을 떠나기로 발표했다. 이제는 정말로 미수습자 수색이 종료될 모양이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3년 7개월이라니. 목포를 떠나기로 하면서 미수습자 가족 중 어느 분이 이렇게 말을 했다.


“세월이 가면 다 잊혀져요. 온 국민이 다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이 세월호를.

 세월이 가면 다 잊혀지겠죠.”

  

  쓰러지며 오열하는 다섯 가족을 보는 것도 아렸지만 저 말을 하는 분의 표정과 말이, 거듭 거듭 떠올려졌다. 성인식 속에서 딸을 잃은 부모의 말과 오버랩됐다.

  가족. 삶이란 그런 것일 게다. 서로 다툼이 있더라도 그리워하고 결국은 그들에게서 위안을 얻으며 살아가는. 세월호 그 많은 이들이 가족들과 싸우며 화해하며 애증을 반복하면서, 자기들만의 삶을 흘러갔을 텐데. 잊지 말아주십시오는 당부이고 다 잊혀질 것이라는 건 체념일까. 이렇듯 기사, 뉴스 한줄 접하면 마음 아리더라도 소식없으면 잊어먹을 나일 것이다. 가족이 아니기에. 세월이 가면 다 잊혀질 것이다. 언젠가는. 그런데 아직까지는, 몇 년은 더 걸릴 것 같다. 잊혀지는데 몇 년은 걸릴 것 같다. 바다가 보이는, 바다가 보이는 그곳에 서면 계속 생각날 것이다. 

  내게도 성인식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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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계절
구효서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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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로 남은 이야기


아닌 계절, 구효서, 문학동네, 2017-04-03.


  많은 작품을 쓴, 수많은 문학상 수상작가 구효서의 소설집 「아닌 계절」은 아닌 계절 겨울, 여름, 봄, 가을에 관해 이야기한다. 통상적으로 사계절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말하나 작가는 아니다. 통상적인 말의 수순을 버리고 아닌, 특정한, 사계절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이야기, 이야기는 계절을 배경으로 그러나 계절을 주인공으로 불러낸다. 그 계절에, 그 겨울과 여름과 가을과 봄에 겪었던 이야기들은 그 계절이 ‘아닌’ 계절을 떠올리기 아려울 만큼 그 계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아닌 계절은 그 계절을 느끼느라 그 계절에 갇혀 있느라 더디게 읽힌다. 작가가 전하는 말의 리듬은 터벅터벅, 고독을 아픔을 짊어진채 느리게 느리게 나아간다. 그럼에도, 읽은 문장을 다시 읽는 일이 반복되어도, 그래서 문장들과 이미지는 반복해서 마음에 쌓이는 모양이다. 모호한, 부정칭 같은 인물들의 이름이 멀게 느껴져 거리를 두고 이들을 보다가도 한발자국씩 가까이 가게 만든다.  적당히 떨어진 채로 말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누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하고 중얼거렸다. 알 수 없는 일이므로 누구든 어디든 상관없었다. 분명한 건 각막을 에는 듯한 추위뿐이었다.


  주위 누군가 사라져도, 온통 낙서로 뒤덮인 벽이 늘어가도, 세상이 어떤 일이 벌어져도 기억하는 것은 오직 겨울, 춥다는 느낌과 생각인 「세한도」의 [세한도]의 여자처럼. 아이가 물에 빠져도, 양식장 주인이 아이를 죽이는 것을 보아도, 어느 어머니에게서 촌지를 받아 다른 어머니에게 부치는「바다, 夏日」의 ‘미음’처럼. 세상을 보고 있지만 보고만 있는 그러한인물들의 모습이다. 이것은 「봄나무의 말」속 회화나무의 역할이 아닌가. 오히려 이 회화나무가 감정을 가지고 이야기를 건넨다. 다른 인물들이 그들이 겪는, 그들이 보고 있는 상황을 익숙한 거리감으로 그저 ‘보고만 있는’데, 회화나무만이 마을의 일꾼 닷근이와 꽃서방과 새악시의 이야기를 전한다. 화자의 목소리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이렇듯 다른 인물들이 아니라 ‘회화나무’인 것이 우연일까.


찌고 숨 막히는 듯하다가 더위는 고스란히 살을 에는 통증이 되었다. 어떤 느낌도 여자에게 이토록 명징했던 적이 없었다. 혹독했으며 처음이며 마지막일 것 같았다.


  「여름은 지나간다」의 인물은 전쟁통에 헤어져 육십년이 지나 재회한 노부부이다. 이들은 서로에게 묻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이 있음에도 그 말들을 하지 않는다. 그들 부부의 이름을 기억하려 해도 그들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아 기억하기 어려울 지경인데 이름마저도 ‘파’와 ‘하’다. 감탄사이거나 혹은 의미없는 소리일 뿐이 이 단어가 이름이 되면서, 이 노부부의 이미지는 그 주위를 둘러싼 배경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그러니, 선명하게 부각되는 계절. 이들이 만난 그 계절, 지나갈 여름, 아닌 여름이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모호한 이름이나 모호한 시공간적 배경을 의도했다고 했다. 이 의도가 문학적 익숙함은 아닐지언정 일상적 공간에서는 익숙하다는 것, 아닌 계절을 덮은 후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말이 회화처럼 번지는 통에 한참을 이미지에 갇혀 있게 하는 맛이 있었다. 요즘처럼 스토리를 부각하는 소설이 인기임을 생각한다면 이 책을 잡는 손길은 더뎌지겠구나 싶었다. 한편으론 이 책에서 추리와 미스터리를 읽을 때와 같은 장르적 느낌을 짙게 받았다. 단편소설에서 ‘문학’이란 느낌이 가득한, 문장 때문에 더디게 읽게 되는 글들을 만나는 즐거운 일이 계속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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