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이마고 - 이미지로 생각하는 인간
우성주 지음 / 한언출판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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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의 이미지


호모 이마고-이미지로 생각하는 인간, 우성주, 한언, 2013.


  세계 최대 ‘항손둥 동굴’(Hang Son Doong Cave)을 보다보니 역시 여행과 탐험에 대한, 베트남 여행에 대한 의지가 생겼다. 동굴을 보기 위해서인데 제한적 허용이라고 하니 기분을 스르륵 가라앉히지만, 생각해보니 동굴 탐험에 대한 의지와 욕구는 항손동 동굴 이전에도 가지고 있었다. 그때의 의지도 가라앉혔으니 동굴탐험은 시간이 지나면 무뎌졌다가 다시 피어올랐다가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동굴에 대한 관심으로 읽은 책이 ‘호모 이마고’다.

  『호모 이마고Homo Imago』는 ‘이미지로 생각하는 인간’이란 부제를 가지고 동굴을 탐험하고 있다. 항손둥 동굴과 호모 이마고 속에서 다루는 동굴들은 느낌이 다르다. 항손동 동굴이 자연이 동굴 속에 있는 것이라면 호모 이마고속 알타미라 동굴, 라스코 동굴은 저자의 말대로 갤러리같다. 동굴을 이야기하지만 이 책은 동굴탐험이라기보다는 동굴 속 이미지를 다룬다. 호모 이마고는 ‘이미지’에 관한 이야기다. 저자는 왜 이미지에 관심을 두고 있을까.


인간은 이미지를 통해 삶의 본질 면면을 사유하고, 소유하며, 소통하는 존재이다. 이런 특징은 인류가 문화를 만들고 문명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하는 창조적 동력이며, 인간의 본질적인 독창성이라 할 수 있다. 이미지로 생각하는 인간은 내면에 오롯이 떠오르는 생각을 개인가 사회가 가진 문화와 예술적 코드가 내포된 이미지로 탄생시킨다. 따라서 이미지는 앞으로도 인류의 문명을 지속해나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저자는 문화원형을 탐색하기 위해 문화가 속한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을 추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동일 시공간에서 인간이 만든 메시지를 ‘이미지 코드’로 추출·분석해서 ‘인류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탐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문화원형을 탐색하기 위해 저자가 추출한 이미지코드는 문자, 그림 등등 다양하다. 이것을 신화와 종교,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을 적용해 분석한다. 저자가 대표적인 ‘이미지’ 분석으로 사용한 것이 ‘라스코 동굴벽화’다. 구석기인들이 쇼베 동굴, 알타미라 동굴, 라스코 동굴 등등에 그린 많은 벽화를 분석한다. 특히 저자는 라스코 동굴벽화는 다섯 개의 갤러리로 나누어 생생하게 라스코 동굴벽화를 현재 탐험하듯이 보여준다. 이러한 이미지 코드 분석을 통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후기구석기인들이 남긴 동일한 동물 이미지를 통해, 지역은 달라도 그들이 가진 감성의 소산에 의해 공동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라스코 동굴의 들소 그림은 알타미라 동굴벽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것으로, 실제로 그 부근에서 주로 서식했던 들소를 그린 것이다.


  후기구석기인들은 벽화를 ‘신성한 곳’ ‘신성한 구조’에 그리고 있다. 후기구석기를 대표하는 동굴의 구조가 여성의 자궁과 같은 구조이며 동굴은 여러 중요한 의식, 사냥꾼이 될 청년의 입문식의 장소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의 사냥꾼은 샤먼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로서 입문식과 같은 통과의례를 통해 샤먼이 되는 것이 고대 그리스의 영웅인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과업 완수와 연결되는 측면이 있다. 인류가 문명으로 나아가는 시대, 그리스와 이집트 문명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비교하고 그 속에 나타난 건축과 의식에서 여성의 이미지를 찾아내면서 동일성과 유사성을 발견한다.  


문화적 현상에 대한 동일한 이미지는 비단 제한된 특정 장소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차별성을 초월하여 동일한 하고를 하였다는 점은 인간이 가진 사고의 보편성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어떤 민족이든 어느 시대에 어느 곳에서 태어나 어떻게 살고 가더라도 이 지구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결국 지구에 형성된 자연환경과 그 안에서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회환경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류가 이미지를 통해서 구현해낸 생각의 결을 읽고 있으면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에 생각할 수 있고 필요한 것은 어쩌면 한정적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창조라고는 하지만 필요에 의해서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은 정해진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시공간을 초월한 동일하고 유사한 ‘사고’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기 위한, 인간의 삶을 위해 추구하는 형태가 세밀화되어 다르게 보이는 것일 뿐. 지금보다 더 머언 미래의 인류가 지금 현재의 인류가 남긴 이미지를 추출해내서 비교분석하면서 그들은 뭐라고 해석을 할지가 궁금해진다. 살기 위해서 이토록 무식하게 버둥거린 인류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려나. 외경심을 가지려나. 그 이전의 인류가 해온 행위들을 통해 살아갈 미래를 위한 방법을 학습한다고 할 때 어느쪽에 무게를 더 두게 될지, 쓸데없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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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 이강훈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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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행복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커트 보네거트 저, 문학동네, 2011.


  잭 키보키언은 ‘죽음의 의사’로 불린다. 실존인물로 1999년 2급 살인혐의로 8년 2개월간 복역 중 2007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존엄사를 더 이상 방조하지 않겠다”가 가석방 조건이었다. 박사는 1987년 디트로이트 지역 신문에 ‘죽음 상담가’ 광고를 내고 1990∼1998년 약 130명의 존엄사를 도우며 환자와의 상담 장면을 촬영했다. 커트 보니컷은 이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책으로 엮었다. 기자가 된 커트 보니컷이 잭 키보키언 박사의 도움으로 사후세계 경험을 한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내용의 이야기다.

  인도주의자로서 작가는 인도주의를 “훌륭한 시민정신과 보편적 품위”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인도주의 실천의 한 방법으로 글을 쓰며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사후에 어떻게 되든 우리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기자 커트 보니것이 누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기에 이러한 결론으로 가는가. 커트 보니것은 셰익스피어, 아돌프 히틀러,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 아이작 뉴턴, 공상과학 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  등 유명인들과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만난다. 애견을 지키려다 심장발작으로 사망한 건설 노동자 살바토레 비아지니를 만나서는 개를 위해 죽은 기분을 묻는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베트남전쟁에서 개죽음 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나는 오늘 천국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역대 최고의 예지력과 영향력을 갖춘 공상과학 소설 [프랑켄슈타인, 근대의 프로메테우스]를 썼습니다. 그때가 1818년이었으니, 1차 대전이 그로부터 딱 일 세기 후에 일어났군요. 그건 독가스, 탱크와 비행기, 화염방사기와 지뢰, 가시철조망처럼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키는 온갖 발명품이 사용된 전쟁이었습니다.

 나는 메리 셸리가 우리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민간인과 어린이에게 투하한―그리고 또다시 그러겠다고 약속한―원자폭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그녀는 부모인 윌리엄과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고드윈, 남편 퍼시 비시 셸리, 그리고 그와 그녀의 친구인 존 키츠와 바이런 경에 대해서만 열광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단순히 질문만을 할 커트 보니것이 아니다. 비비언 핼리넌이라는 “화려한 태평양 연안 가문의 여주인”이라 불리는 죽은 여자와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작가는 화려하다는 뜻을 알아낸다.


이젠 암호가 풀렸습니다. <뉴욕 타임스>의 “화려하다”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외모가 아름답고 품위있고 부유하지만, 사회주의자라는 뜻입니다.

과연 그들은 얼마나 “화려”했을까요? 비비언의 변호사 남편인 고 빈센트 핼리넌은 부동산 투자에서 번 돈을 짊어지고 1952년에 진보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사람이란, 심지어 캘리포니아에서도 얼마나 익살맞고 귀여워해질 수 있는지요?

이렇게까지 익살맞고 귀여워질 수 있습니다. 빈센트는 노동운동 지도자 해리 브리지스를 목청 높여 변호했다는 이유로 육 개월 형을 살았습니다. 해리 브리지스는 매카시즘 시대에 공산주의자라는 죄목으로 기소된 사람이었지요. 비비언은 1964년 인권을 옹호하는 시위에서 숙녀답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삼십 일 동안 감방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셰익스피어에게는 작품을 직접 쓴 게 맞느냐는 질문을 하는 등 삶과 죽음의 경계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그저, 궁금한 것을 묻고 그들이 살아 새전에 한 일들과 현재의 상황을 연결시켜 묻는다. 단지 그들이 지금 현재 살아 있지 않다 뿐이지 누군가를 인터뷰할 때면 할 수 있는 질문들을 한다. 그러니까 그들이 지금 죽어서 내세에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지도 모른다. 여전히 아이러니와 유머가 가득한 짧은 인터뷰를 보면 작가가 선택한 인터뷰이가 성인이나 영웅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히틀러나 마틴 루서 킹 목사를 죽인 제임스 얼 레이, 전혀 모르는 두 사람을 곡괭이로 죽인 칼라 페이 터커도 있다. 이렇게 스무명이 넘는 인터뷰이들과 인터뷰하면서 위트와 유머들을 동원해 작가는 사회의 모순을 꼬집는다.

 

알렉스 삼촌이 특히 인간 일반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한 점은, 사람들이 행복할 때 행복하다는 걸 도통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삼촌 자신은 즐거울 때 즐겁다는 걸 인정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무더운 여름철에 우리는 사과나무 그늘에서 레모네이드를 마시곤 했다. 알렉스 삼촌은 하던 말을 멈추고 불쑥 이렇게 말했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뭐가 행복이지?”

나 역시 느긋하고 자연스러운 기쁨이 밀려올 때면 큰 소리로 외친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뭐가 행복이지?”


  그러나 역시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다. 현재의 삶에서 행복이나 만족감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순간순간의 작은 행복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인터뷰 과정에서의 위트와 유머들이 유쾌하게 다가온다. 때론 책을 읽는 순간,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인가라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한바탕 웃고 또 한바탕 사회모순에 대해 인간들의 행동에 대해 생각하는 사후세계로 간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안타깝게도 사후세계로 간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도와준 닥터 잭 키보키언도 훌륭한 인터뷰어 커트 보니컷도 현재에 없다. 사후세계에 있다. 이들을 만나서는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떤 말들을 듣게 될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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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이의 포트폴리오
커트 보니것 지음, 이영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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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청한 새해!


멍청이의 포트폴리오, 커트 보니것, 2017.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가는구나! 쓰레기 날의 다음날이다!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음에도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2018년엔 너무도 미안하게도 말이다. 그래서 소설 속 작가의 “쓰레기 날의 다음날이다”는 말은 빼고 싶었지만, 새해라고 다를리 없는 어제의 지속이기에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가는구나! 쓰레기 날의 다음날이다!”를 외친다. 더구나 책 제목은 『멍청이의 포트폴리오』다. 새해 인생의 포트폴리오를 잘 정리해보려는 생각은 이제까지 경험한 바 부질없다로 귀결되기에 작심삼일조차도 하지 않는 새해를 맞았다. 그냥 살아야지. 새삼스럽게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지 못해 씁쓸하고 자괴감에 빠지지 말고. 시니컬과 아이러니, 유머에 특출난 작가의 책을 보면 좀더 새해가 주는 무게감을 덜어낼 수 있을까.

  『멍청이의 포트폴리오』는 커트 보니것의 미발표작을 모은 책이다. 그동안 커트 보니것의 책속 인물들을 만날 수 있어 반갑기까지 했다. 생전에 발표하지 않은 책들이 세상에 나온 것을 보면 작가는 뭐라고 했을지 궁금하다. 시니컬하고 유머러스한 말들을 내뱉었을 듯하지만 그건 뭐 알 수 없으므로.

  일곱 개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단편소설과 에세이다. 미발표작이라는 것이 너무 확연히 드러난 것은 마지막 SF소설로 접속사가 쓰여진 채 이어지지 않고 있다. 더 이상 그 말 뒤에 다른 말을 접속하지 않을 커트 보니것은 벌써 11년 전인 2007년에 사망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책을 읽을 때마다 이 작가는 아직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후세계에 관한 키보키언 박사의 이야기들을 많이 봐서 그런가. 단편 하나하나마다 아이러니가 가득 담겨 있다. 사망한 작가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건 그렇지만 왜인지 자살시도와 화재 사고 사망에 이르게 된 계단의 사고가 우연한 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닥터 키보키언 박사보다도 나이 든 데이비드 힌든이 생각나기도 하고.

 

시간에 사로잡히는 것은 거의 미친 짓이고 허우적대는 꼴이며 비극에 대한 반응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고요한 이 순간, 행복했던 시절로 가고 싶다는 소망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  「‘소심한’과 ‘멀리 떨어진 곳 사이에서」


  경험이니 시간에 관해서는 항상 과거에 집착하게 된다. 그러니 딱히 행복한 2017년이 아님에도 이미 경험했다는 이유로 2017년이 2018년보다 더 행복하게 느껴진다. 이런 비극이라니. 미래를 희망하는 일에 주저한다는 것만큼 서글픈 일이 있을까. 처음의 한탄은 결국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을 지 모르겠다. 젊은 화가 데이비드 힌든의 이유는 보다 확실하다. 2주전 사망한 아내와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리고 또한 제 눈앞에서 고기를 낚아 올리던 어부의 실족사를 경험하게 되는 순간 그는 완전한 분노에 휩싸일 정도다. 그렇게 시간이 인간을 가져가버린 것에 대해. 다행히 찰나의 순간 닥터 키보키언 박사의 도움으로 어부는 살아나고 죽음의 순간에 지난 시간을 경험했다는 말에 데이비드 힌든은 시간탐험을 하기로 결심한다. 어떻게? 키보키언 박사가 오는 순간에 맞추어, 잠시 숨을 넘어가는 순간을 만들어서, 그러니까 임사체험을 통해서 말이다.


그는 아주 잠깐 죽어서 영원을 탐험한 뒤 다시 살아나, 산 자들에게 그들이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가장 거대한 성운만큼이나 영원한 우주의 일부라고 말할 것이다. 시간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더 이상 살인자가 아니다.

 -  「‘소심한’과 ‘멀리 떨어진 곳 사이에서」


  그의 이 탐험은 위와 같은 말을 하기 위한 중대한 목적을 갖고 있다. 그는 이 시간여행, 참험을 위한 시간을, 타이밍을 만든다. 그러나 아니러니의 작가가 만든 결말은….

  「멍청이의 포트폴리오」는 양부모가 물려준 유산을 사기꾼들에게 뺏겨 탕진할 것 같은 청년을 쫓아다니며 가족과 명예를 위해서는 돈의 소중함을 알고 계획에 맞게 활용해야 한다며 가르치는 주식 포트폴리오 매니저의 이야기를 담았다. 다만 이 매니저는 그가 그토록 청년에게 돈을 소중히 투자해야 한다고 위치는 이유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청년은 매니저의 말에 따라 돈보다도 더 가족을 소중히 하고 있는 모습을 실천하고 있다. 주식 매니저가 실제로 원한 것은, 그것이 아닐 텐데도.


 “나의 행복을 이렇게 순순히 보내버릴 거라고 생각했나요?”

 “내가 당신의 행복이라고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뭐죠?” 

- 「스노우, 당신은 해고예요」


  참, 해고도 쉽고 사랑도 쉽다. 「스노우, 당신은 해고예요」에는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일관하는 두 남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예쁜 여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를 거라는 빠진 남자, 젊고 예쁜 여자라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집착하는 중년의 남자, 아내가 있는. 정말이지 예쁜 외모를 지녔기에 자신의 행복이라고 따를 것을 종용하는 남자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세상의 온갖 짜증을 끌어모아도 모자랄 듯하다. 이 편견 속에 휘둘리지 않은 알린 스노우에게 박수를!

  중년, 노년, 신혼의 미국인 세 커플이 파리를 여행하는 「프랑스 파리」 역시도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각각의 커플들이 마주치는 상황과 그들이 생각하는 삶의 순간들과 사랑이 펼쳐지는데 웃음과 페이소스가 묻어난다.

  이 감정은 아마도 작품마다마다 등장하는 어리숙한 멍청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분노와 적의보다 웃픈 느낌이 이 책 전체에서 느껴진다. 지독하게도 처참해 보이는 순간에도 연민, 페이소스를 느끼게 하니 적의와 악의가 가득한 사람들보다도 이들 소심하고 나약한 멍청이들이 있는 세상이 좀더 살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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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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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인간답다

혐오와 수치심-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제목으로는 단순히 혐오와 수치심의 연관관계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혐오를 하다보면 수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니까 어떤 식으로 이야기의 연결성이 있는가, 혐오를 받은 경우 혐오에 대해 같은 반응을 하고 난 뒤 찾아오는 자괴감과 수치감을 경험하였기에 이에 대한 감정의 기제를 생각했다.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이라는 부제에서 보듯이 혐오와 수치심에 대한 긍정적인 관점은 아닐 것이라 생각되는데 저자는 법철학자, 정치철학자, 윤리학자였다. 저자는 감정이 법으로 작동하는 기제를 보여주며 흥미를 유도한다.   

  법을 판결하는 이에게는 감정이 있을지언정 ‘법률’에는 감정이 배제되어 있다고 이성이 가득하다 생각하기 쉬운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상당부분 법률은 이 감정적인 반응을 담고 있다. 하지만 “감정은 분별없는 정서적 격앙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개인이 지닌 중요한 가치와 목적에 맞게 조율된 지적 반응”이다.


감정에 대한 평가는 구체적인 사례에 초점을 맞춰, 어떠한 사람이 특정한 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리고 그 속에 담긴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다만 그 평가에 대해서는 개별 사례별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으며 무엇보다 수치와 혐오심에서 발현된 법의 경우 타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데 이용될 수 있기에 이 두 감정에서 나아간 법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혐오와 수치심은 “인간의 근원적인 나약함을 숨기려는 욕구를 수반”하며 이것을 숨기기 위해 타인의 공격과 배제로 이어진다. 이때 이 감정은 대체로 강자들을 위한 논리로 확대 재생산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치심은 완전해지고 완전한 통제력을 지니려는 원초적 욕구에서 기원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폄하와 어떤 형태의 공격성(자아의 나르시시즘적 계획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격렬하게 비난하는)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올바르게 유발된 수치심의 경우에도 한 구석에는 나르시시즘과 이와 연관된 공격성이 항상 잠재해 있기 마련이다.


  인간은 왜 부끄럽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혐오하고 수치스럽게 느끼는가. 이에 관하여 고대철학과 문학, 정치철학, 정신분석학 등등의 논의를 가져와 전개하는데 흥미로움과 더불어 다양한 관점에서 들여다보게 된다. 나약함을 숨기려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가는 인간의 감정속엔 완전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열망과 나르시시즘이 숨어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들은 타인의 권리와 필요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고 말한다. 완전함에 대한 열망,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이란 부제가 결국 인간의 신적인 존재가 되고픈 갈망과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되면 늘 당하는 존재는 인간들 중에서도 더 약하고 약한 이들이 된다. 타인의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같이 하는 것보다 내 것을 더욱 확고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갈급한 일이 된다. 이렇게 세상은 늘 사회적 약자를 만들어 내고 또한 그들로 인해 힘을 얻는 존재들이 있다. 


혐오는 우리가 될 수 없는 어떤 존재, 즉 동물성을 갖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되려는 소망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혐오에 담긴] 오염에 대한 사고는 우리 자신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들려는 야망을 드러내며, 이러한 야망은(어느 곳이나 존재한다 할지라도) 자기기만과 헛된 열망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으며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약함을 숨기려 외부에 대한 공격성을 강화한다는, 타인을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어 자신의 우월감을 강화하려는 이 감정들을 “정한론”으로 이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제 나라가 흔들릴 때마다, 서구에게 뺨맞을 때마다 그 실패와 좌절과 불만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조선침공을 주장한 일본인의 주장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저자가 주장하는 바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지만 사실 세부적인 몇몇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동감입니다라고 표방하지는 못하겠다. 성범죄자에 대한 신상공개와 같은 수치심을 주는 처벌을 저자는 반대하지만 저자의 논리에 따라 당연하죠!라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사고의 정리가 더 필요하다. 이래서 이상과 현실, 이론과 실천은 다른가 싶다.


정치적 자유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관념과, 호혜성과 상호 존중으로 대변되는 사회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 질서에 대한 사고다. 이때 상호 존중이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궁극적인 선에 대한 다양한 관념을 존중하는 것을 포함한다. 감정에 대한 분석과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개념은 서로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정치적 자유주의라는 사고방식에 내재된 이상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혐오와 수치심이 법의 토대로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게 될 때 직면할 수 있는 위험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감정이 법적 규제의 근거로 사용되면, 서로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상호 존중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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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사회 - 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지음, 정지인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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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방위를 고민하며


혐오사회-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카롤린 엠케, 2017-07-18.


  생각해보니까 2017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정도로 후딱 지났다. 극도의 긴장감이 떠나지 않았던 한해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이 되니 길었다보다는 역시 짧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지나갈 해에 대한 아쉬움이려니 싶다. 더구나 한해동안 맑고 밝은 긍정적인 단어보다 칙칙하고 어둡고 부정적인 단어 속에서 살아왔으니 해결치 못한 찝찝함이 가득하다.

  올 한해도 여전히 혐오의 프레임 속에서 살았다. 삶이 힘겨워서인지 가치가 실종되어서인지 타자에 대한 혐오는 끊이지 않았다. 문제는 이런 혐오의 프레임은 대중에게서 퍼져나가기도 했겠지만 정치권에서 끊임없이 조장하고 이용했다는 점이다. 혐오와 증오의 감정이 확대되고 구조화되어 타인에 대한 멸시와 폭력을 당연시하고 나의 편을 가르는 이 과정을 너무도 좋아하기에 정치권은 이 혐오를 계속 이어갈 것이다.

  카롤린 엠케는 「혐오사회」에서 이 점을 이야기한다. 혐오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형성된 감정”이라 얘기한다. “혐오와 증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고 훈련되고 양성된다.” 그렇기에 이것을 자발적이고 개인적이라 간주하는 한 이 감정을 양성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기본적으로 이 주장에 동감하기 때문인지 이 책은 책장이 쉽게 넘어갔다. 현학적이지 않아서 저자의 글을 현실과 대입해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도 있다. 저자 카롤린 엠케는 오랜 시간 동안 세계 분쟁지역을 취재한 저널리스트이고 성소수자라고 한다. 저자의 경험이 구조화된 혐오와 증오의 현상을 분석하는데 바탕이 되었기에 그 시선을 포착해내는 것이 달랐으리라 본다. 그렇기에 좀더 생생한 사례들과 그에 대한 명민한 생각들이 기술될 수 있었다고 본다.

  혐오에 대한 현상은 비슷비슷하고 분석도 비슷하다. 결국 같은 것을 겪으면서 이유를 알지만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 생각하게 된다. 해결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해결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습관이란 늘 생각도 변화도 하기 싫은 법이니까. 올 한해도 반복된 혐오의 뉴스는 지역과 대상만을 달리해서 내년에도 이어질 것이다. 더구나 당장 크나큰 선거가 눈앞에 있으니 얼마나 이 치열하고 저열한 혐오의 언어들을 맞닥뜨리게 될지,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어떠한 혐오의 언어에는 휩쓸려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생겨난다.


증오는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폭력 또한 단순히 거기 있는 게 아니다. 준비되는 것이다. 증오와 폭력이 어느 방향으로 분출되는지, 누구를 표적으로 삼는지, 또 그러기 위해 먼저 어떤 장벽과 장해물을 제거하려 하는지, 이 모든 것은 우연하거나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된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혐오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확산되고 상대적으로 인종에 대한 혐오는 덜한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사회 역시 다문화가정과 새터민에 대한 멸시와 차별을 진행해왔다. 상대적으로 노출이 덜 되었을 뿐. 세계적인 인종차별과 혐오에서만큼은 한국은 비켜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만큼 순수혈통, 단일민족에 대해 자부심을 치켜세우는 민족이 또 있을까. 가시적으로 보게 될 혐오의 언어를 미리부터 걱정하고 있는 것도 참 미련스럽게 보이지만 혐오가 가지는 힘을 무시할 수 없기에 그렇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순수성’ ‘표준’에서 벗어난 것은 예외없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 개입되어서다. 한번 잘못된 이 인식을 돌리는 것은 어마어마한 폭력이 지나간 후에도 이뤄질까 말까하다. 지난 대선 토론에서도 성소수자 논쟁이 곧 무시할 수 없는 혐오확산으로 이어지는 현장을 봤다. 동성애자가 에이즈를 확산한다는 그 인식과 더불어 다른 사람이 싫어하니까 맹목적으로 혐오에 동조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누군가 지속적으로 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참으라고 한다. 그 폭력에 맞대응하면 쌍방폭력이 된다. 정당방위가 아니라 쌍방폭력이 되고 마는 현실 때문에 혐오와 증오에 관한 개인적인 감정이 아닌 구조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해결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혐오에 혐오로 대응하는 것이 한순간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봤더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욕설에 욕설로서라도 맞대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일방적이 되고 만다. 특별한 일이 되지 않은 채 넘어가는 일상적인 일로 치부되고 만다. 맞대응해야 보는 사람도 흥미롭게 관전한다. 세상이 그렇다.


증오와 순수의 광신주의에 맞서려면 시민사회와 시민들이 나서서 배제와 포함의 기술들에, 어떤 사람은 보이게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인식의 틀에, 개인을 집단을 대표하는 표본으로만 보는 시선의 체제들에 저항해야 한다. 모든 사소하고 저열한 형태의 멸시와 굴욕에 용기 있게 이의를 제기해야 할 뿐 아니라, 배제된 이들을 지원하고 연대할 수 있는 법률과 실천도 필요하다. 그밖에 다른 관점들과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인식시킬 수 있는 다른 서사들도 필요하다. 증오의 틀을 무너뜨려야만, “전에는 서로 다른 것들만 보였던 곳에서 비슷한 것들을 발견할” 때에만 공감이 생겨날 수 있다.


  「혐오사회」에 대한 이 맞대응 방식에 대해 저자는 모두가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제도적 차원에서 이 혐오와 증오의 구조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사회문제를 바라보고 그에 대한 대안을 얘기할 땐 항상 이렇게 끝이 난다. 인식과 구조의 변화. 그래서 어떻게라고 그 세세한 방법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더 큰 고민의 장으로 넘겨버린다. 책을 읽을 땐 그 현상에 대한 분석자체에 힘이 실리며 만족스러움을 느끼다가도 현실로 넘어오면 뭔가 아득하다. 실천과 변화를 너무나 어렵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하게도 된다. 어쨌든 문제인식을 명확히 하고 난 후에 대안을 찾아 나가는 것이기는 하지만 혐오의 상황은 너무 깊고 넓으니까. 그럼에도 혐오와 증오가 형성되고 확산되는 일련의 매커니즘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혐오사회」를 읽는 내내 카타르시스는 최고조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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