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친절함

보건교사 안은영, 정세랑 저, 민음사, 2015.12.07.


  특별히 유쾌할 일 없는데 웃음이 났다. 처음 몇 장을 넘기면서는 스릴러인가 했는데 판타지, 코믹 장르였다. 열편의 연작 소설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인공 보건교사 안은영을 비롯하여 모두가 명랑만화에서 봄직한 캐릭터들이다. 당연 이런 캐릭터의 열전은 명랑만화스럽게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주인공이 가진 남다른 능력 또한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일찌감치 학교는 온갖 귀신이야기가 출몰하는 전설의 장소다. 안은영이 일하는 M고 역시 예외는 아니라서 명확치 않은 생물들이 학생들을 위협하고 있다. 안은영은 이런 기운을 에로에로 에너지라 칭한다. 이런 것, 액토플라즘을 ‘보는’ 능력자 안은영은 이것을 퇴치하기 위해서도 애쓴다. 그녀가 가진 ‘능력’ 때문에 언제든 마주할 수 있는 유령, 귀신 등, 나쁜 기운을 뿜는 물질들을 퇴치하기 위해서 보건교사인 안은영은 비비탄과 플라스틱 장난감 칼을 소지하고 산다. 이런 에로에로 에너지를 내뿜는 물질이 학생들을 위협하는 순간 저 멀리서 달려와 무지개 색 늘어나는 깔때기형 장난감 칼을 휘두르거나 비비탄 총을 쏘는 선생님이라니. 학생들이야 나사가 빠지거나 풀린 듯이 보건선생님을 보지만 안은영은 제 능력을 단지 ‘보는’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나쁜 에너지를 뿜는 공포스럽고 위험한 물질에 언제든 맞설 준비가 되어 있고 적극적으로 나쁜 에너지를 차단하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다 끌어모은다.


폭력적인 죽음의 흔적들은 너무나 오래 남았다. 어린 은영은 살아간다는 것이 결국 지독하게 폭력적인 세계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피할 수 없이 다치는 일이란 걸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열편의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귀신들이 갖는 기운은 이전의 생애에서 해결하지 못한 일에서 연유한다. 이루지 못한 욕망과 욕구, 억울함을 한가득 지고서 몇 배의 파장을 이승에서 내뿜는다. 살아있을 때부터 얻게 된 불온한 감정의 덩어리는 그것을 얻게 된 곳으로 늘 되돌아온다. 남겨둔 것이 있다면, 풀지 못한 것이 있다면 얻은 그곳에서 해결되어야만 한다면 이 세상을 떠돌고 있는 혼들은 얼마나 무한할까. 이 무한하고 폭력적인 세계에서 안은영이 선택한 것은 자신이 가진 친절함을 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죽음과 폭력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무한으로 샘솟아도 충전과 방전을 오가며 끝까지 나쁜 기운이 세상을 휘두르지 않도록 애쓰는 것이다. 


은영은 다른 종류의 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어느 새부터 인가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버렸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친절한’ 안은영의 기질이 전체적인 이야기를 명랑스럽게 이끄는 힘이기도 하고 단조롭게 만들기도 한다. 온갖 복수와 악행의 화려한 마침은 인과응보, 권선징악이기에 안은영이 휘두르는 총과 칼은 장난감이지만 ‘선’이라는 초강력 기능을 탑재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안은영은 ‘인지’하고 있다. 이 직진하는 친절함이 가진 단점을.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사연많은 귀신들이 출현할 때마다 힘을 써야 하는 안은영은 방전되지만 다행히도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충전기를 찾았으니 그것은 같은 학교의 선생님과의 스킨십이다. 두 사람의 티격태격한 대화와 활약상을 보다 보면 이런 고전적인 설정이 주는 안정감을 알게 된다. 무한한 긍정은 다소의 불안을 포함한다. 불안하기에 긍정의 힘으로 잊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 ‘나쁜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친절함’이란 말이 명랑만화에서 뛰쳐나와 서글픈 기분을 돋운다. 친절이란 상대의 친절 정도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거란 생각을 하게 된다. 절대적 친절함에 세상이 어떤 식으로 대했는가를 생각해본다면. 폭력의 상황에서 언젠가는 질 지 모르는 상황이 올 거라는 걱정에도 힘을 돋궈줄 함께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에서 위로가 되고 힘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물구나무로 버티는 세상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문학동네, 2018.


  난 실격당하지 않았다. 공연을 끝까지 지켜보았고 결코 웃지 않았다. 아니, 웃지 않았으니 관객으로선 제대로 ‘실격’인가. 스탠드업 코미디언 도발레의 공연이 펼쳐지는 동안 웃지 않았음을 빼고 나면 도발레와 나 사이에 감정의 공유라는 건 없다. 그럼에도 자리를 뜨지 않은 건, 뜨지 못한 건, 당혹과 불편함이다.

  준비되지 않은 채 들어오는 훅. 이야기, 이야기. 제 생애를 고백해 오는 이에게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감정적 폭력. 당신은 왜 나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는가, 내게서 무엇을 바라는가, 왜 내 감정을 볼모로 잡는가. 나는 너를 모르기에 고개를 숙여 이야기를 듣기도, 몸을 뒤로 빼어 적당한 때 달아나기도 어정쩡한 몸놀림으로 있어야 한다. 자칫 동정하거나 판단하려 할 지 모르는 자세로 있는 나를, 그런 상태로 몰아가는 너를 이해하기 위해, 편해지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마침을 알아야 하기에 그저 듣고 있다.

  스탠드업 코미디의 속성이 조롱과 유머와 음담패설의 극대화라 해도 시작부터 시시때때로 그 대상이 되는 건 늘 여성이다. 158cm의 작고 마른 쉰일곱의 도발레가 그런 공연을 펼치는 동안 익숙한 사람들은 적당히 웃고 즐기고 박수를 보낸다. 그런데 순식간에 열네살의 도발레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폭력에서 폭력이 전이된 것처럼 시온주의자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당하는, 또래들에게도 놀림받고 왕따당하는 어린 도발레가 등장한다.

  작고 마르고 안경을 낀 도발레는 무수한 이들의 발길질과 따귀를 피해 물구나무서서 걷고, 달린다. 그래서 또 아빠에게 폭력을 당하지만 물구나무서기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엄마를 위한 도발레의 공연이다. 도발레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애정의 대상인 엄마가 웃기를, 우울증으로 자살을 반복하는 엄마에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기를, 엄마가 다른 생각을 잊을 수 있기를 바라는 도발레의 노력이다.

  군사캠프에 가기 전까지 도발레는 아버지의 학대와 어머니와의 유대 속에서 살고 있었다.  열네 살 아이가 군사캠프에서 생활하는 이곳은 이스라엘. 홀로코스트를 겪은 민족의 팔레스타인을 향한 끊임없는 공격은 이렇게 일찍부터 어린 아이들을 착실히 준비시킨 덕분으로  가능했다. 여전히 또래들에게 놀림의 대상인 도발레가 그곳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생애 처음으로 가야하는 장례식 때문이었다. 군용차를 타고 운전병과 집으로 오는 오랜 시간 동안 장례식이 무언지 모르는 도발레가 겪는 궁금증, 기시감, 불안감, 그리고 엄마와 아빠에 대한 기억들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런 도발레를 장례식장으로 데려가는 동안 개그 경연대회 준비랍시고 마구잡이로 유머를 던지는 운전병이 있다.   

  도발레는 인생이야기가 가장 훌륭한 것이라 말하며 그냥 말뿐이나 한쪽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라고 말하지만 클럽에 있던 사람들은 끝까지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지 않고 떠나간다. 하지만 40년 동안이나 만난 적 없는 옛 친구, 아비샤이 라자르를 찾아내어 공연을 봐 달라고 한 것을 보면 제 이야기를 쉬이 여기지 말라는 도발레의 당부가 느껴진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에 빠져 있는 전직판사 아비샤이가 도발레의 초대에 응해 이야기를 듣는 반응은 마치 나의 반응과도 같아서 놀란다. 작가가, 도발레가 아비샤이가 되어 이야기를 듣도록 이끈다. 과거의 삶 속에 등장했던 아비샤이로 인해 도발레의 이야기는 허황된 코미디의 소재가 아니라 실체적 진실을 가진 인간의 삶의 이야기가 된다.

  아비샤이는 도발레가 공연을 펼치는 동안 한때 그들이 우정을 나누었던 사이임을 기억하며 또한 캠프에서 왕따당하는 도발레를 외면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슬픔과 고통속에 살고 있던 도발레로부터 받은 성숙한 위로와 배려, 캠프를 떠나는 도발레에게 닥친 상황을 모른체하던 그 시절, 자신의 현재의 상황과 대비하며 내면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펼치는 아비샤이는 무대 위 도발레와 대비된다. 마침내 아비샤이는 깨닫는다. 도발레의 ‘광적인 수다와 신경질적인 개그’에서 자신이 잊어버렸던 것을 찾았음을. 누구도, 무엇에게도 받지 못한 위로를 도발레를 통해 받았음을.

  

개성의 광채, 나는 생각했다. 내적인 빛. 아니면 내적인 어둠. 비밀, 진동처럼 전해지는 고유성. 어떤 사람을 묘사하는 말 너머,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그 사람에게서 잘못되고 뒤틀린 것들 너머에 놓인 모든 것. 오래전, 내가 판사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순진하게도 피고인이건 증인이건 내 앞에 선 모든 사람에게서 찾겠다고 맹세했던 것. 절대 무관심하지 않겠다고, 나의 판결의 출발점이 될 거라고 맹세했던 것.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비로소 도발레와 ‘나’ 사이에도 감정의 공유가 있음을 알게 된다. 불편함과 당혹함은 그것보다 더 큰 감정으로 인해 구석으로 밀려난다. 역사의 흐름 속, 어찌할 수 없는 구조적 시스템에서 파괴되는 개인의 삶이 물구나무서기를 하면서, 슬픔을 생각하지 않도록 유머를 건네는 이들로 인해서 버티어 올 수 있었구나 싶은.


저 사람한테 잘해줘, 엄마가 다시 내 귀에 대고 말했어. 모든 사람이 짧은 시간만 살다 간다는 걸 기억하고, 그 사람들이 그 시간을 유쾌하게 보낼 수 있게 해줘야해.


  도발레의 직업 선택에 분명 엄마의 말과 운전병의 개그가 영향을 미쳤음엔 틀림없다. 그렇다 해도 타인이 유쾌하게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일은 잠시 멈추어도 좋지 않을까. 도발레가 유쾌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기 위해선 그가 마음속에 가두었던 감정의 토로가 필요할 것이다. 이야기를 들을 사람을 만든 도발레 자신이 기획한 아비샤이를 초대한 그 공연처럼. 도발레가 진정 슬픔을 나누고 위로할 수 있는 존재를 만나 기꺼이 슬퍼할 수 있는, 화를 낼 수 있는 길로 들어서기를. 존재로 인한 슬픔이 존재로 인해 웃는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6-18 0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가 없는 밤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 나쓰카와 소스케, 아르테, 2018.


  “책 값 비싸도 너무 비싸…성인독서율 역대 최저”

  글쎄,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좀처럼 수긍이 쉽지 않다. 아시아경제 5.28일자 기사는 문화체육관광부가 2월 발표한 '2017 국민독서실태조사' 결과를 인용, 일반도서(교과서,수험서,잡지,만화 등을 제외)를 한 권이라도 읽은 성인 비율 59.9%로 성인 10명 중 4명은 1년 동안 단 한권도 읽지 않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나아가 소비자의 59.2%가 책값이 비싸다고 인식하고 있어 낮은 독서율로 이어진다고 하고 있다. 최근 도서정가제 폐지청원도 있었는데, 도서정가제가 독서를 막는다는 이유였다.

  책값이 비싸기 때문에 독서하지 않는다는 게 정말일까. 책의 종류와 페이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12,000원 정도의 책값. 영화 한편 값이다. 이렇게만 생각할 땐 내게 영화비는 너무나 비싸다. 그럼에도 영화는 몇십만, 몇백만, 몇천만 영화가 생겨나고 한달에 수십편의 영화를 보거나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는 이들도 있다. 이들에게 영화비는 비싸지 않을까. 물론 영화비는 통신할인 등등의 할인가를 적용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물론 어떤 책은 비싸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상하게 책에 대한 인식 자체가 오래 전부터 늘 ‘비싸다’고 인식되는 분위기인 것 같다. 어떤 식으로든 책값에 관해서는 인색하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것은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듯 당연하게 이루어진다. 기꺼이 6~8천원의 커피값을 지불한다. 그보다 저렴한 커피도 있지만 비싼 커피를 선택하는 이들이 전혀 줄지 않는다는 점, 커피는 어쩌다 먹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하루에도 몇 잔을 소비하고 있다. 하지만 오래도록 책값은 그런 대우를 받은 것 같지 않다. 늘 과한 가격이라는 멍에를 뒤집어썼다. 과도한 교육열에 비해 책을 대하는 태도는 항상 뜨뜨미지근, 탐탁치않은 것을 마주하는 형태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한 나라의 위대한 작가의 탄생은 그 작가를 알아보는 독자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우리나라의 독서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정녕 책값 때문인가. 책을 읽어야 한다, 독서의 중요성, 이런 학습은 있었겠지만 사람들 마음에 자연스럽게 가 닿도록 이루어지는 일이 과연 있었나 싶다. 일찌감치 강요로 이루어진 ‘책 읽어라’. 그러면서도 책을 사서 주는 일이 없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접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았다면 아이는 어떻게 책을 읽는 습관을 형성할 수 있을까.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이며 책을 좋아할 수 있게 될 것인가. 독서가 학교 진학을 위한 도구로 인식되는 행태에서 책, 책, 책, 독서, 독서, 독서라는 외침이 공허하게 들린다.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고, 읽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고, 좋은 이유를 말하는데 너무 천편일률적인 대답들이 나온다. 바로 정답이네 하면서도 아쉽다.

  심지어 신비하게도 말을 하는 고양이조차도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랄까, 그것에 대해 특별하고 신비한 것을 들려주지 않는다. 책을 지키려는 고양이는 책을 지키려는 강아지보다 더 어울리는 모델이긴 하지만 그 고양이가 이끄는 미궁에 들어갔다 나왔지만 속이 시원하지는 않았다. 엄청 유명한 일본작가로 이름이 각인되어 있었는데 이 책은 동화책 느낌이 들긴 했지만, 만족스럽진 않았다. 책값이 비싼지 싼지에 대한 논쟁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인가. 정말로 책이 사람의 인생을 구하는 것이라면 이 정도의 책값을 과연 ‘비싸다’ 할 수 있을까. 왜 하필 나는 하고많은 취미 중에 ‘이토록 비싼’ 취미를 가지게 되었는지. 취미의 영역이라서인지 책값이 비싸서 책을 읽지 않는다는 이 조사에 굳이 민감해질 것은 또 무언지. 아니, 아는 이들의 책이 안 팔려서인가. 책이 잘 팔리지 않는 시대, 책값이 비싸서 안 읽는다는 소리를 듣는 시대에 책이라는 주위에 머물고 있다는 자괴감인가. 어쨌거나 자본주의 사회, 팔리는 상품이 되어야 하는 시대에 팔리지 않는 상품을 붙잡고 있어서 기분이 가라앉는다.

  이 책 속의 말하는 고양이 얼룩과 책방 소년 린타로는 책을 가두는 자, 책을 자르는 자, 책을 팔아치우는 자를 만난다. 그저 책을 소유하려 하고 읽은 권수로 포장하려는 지식인, 책을 음미하기보다 줄거리만 대충 훑어보는 학자,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책에 집착하며 책을 팔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출판인을 만난다. 이들을 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경계해야 할 유형으로 꼽는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런 사람들로 인해 책의 판매는 늘어가겠지.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주는가를 생각하게끔 하는 계기가 되긴 하지만, 더불어 이 할 일 많은 시대에 왜 책을 읽고 있나, 싶은 생각도 하게끔 한다. 뜬금 한량없는 자조가 일어나는 밤. 나를 데려갈 고양이 한 마리 없고. 나는 나홀로 이 미궁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선

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작품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마음에 들어왔다. 이야기도, 문체도, 구성 방식도 하염없이 좋구나를 외칠 만큼 7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은 기억에 남는 작품이 많았다. 대상작인 「너무 한낮의 연애」는 작가의 단편집과 함께 출간되어 한참을 베스트셀러에 머무른 것으로 안다. 양희가 주는 그 신선하고 아릿한 연애의 이야기가 드라마화 된다는 기사를 보았다. 양희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을 읽고 내가 형상화한 이미지가 영상으로 만들어졌을 때 내가 느낀 느낌과의 유사점과 차이점이 어떤 것이 될까, 궁금해진다.


어쩌면 그의 삶은 오해되고 왜곡되었는지 모른다. 아니,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지. 솜씨 좋은 작가처럼 거짓을 진짜처럼 혹은 진실을 가짜처럼. 영혼은 편하게 침대에 눕혀놓고 하루종일 내 손을 잡고 유령처럼 산책하다 집에 돌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아닌가.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모르는 일이니까. 말을 안 하는데 알 수가 있나. 뒷모습으로 남은 얼굴. 아름답게 움직이던 위빙. 오리나무와 자귀나무를 구분할 수 있는 이상한 지식. 오늘 만난 한두운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나.


  정용준의 「선릉산책」도 곱씹을수록 기억에 남는다. 선릉을 산책해 보지 않았다면 느낌이 덜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선릉을 산책한 기억이 소설의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재현해 내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발달장애를 가진 한두운을 보면서 발달장애센터에서 만난 아이들을 떠올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잠깐 아이들을 보고 있는 것과 지속적으로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것의 차이를, 선릉 산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아니, 타인을 이해하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그 이해는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한도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하물며 장애인이라면, 그 이해의 시선은 처음부터 평행선이 아니라 사선이 아니라 우위에 서 있던 것은 아닐까.

  올 봄 비가 거세게 내리고 난 뒤 건강하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사망한 장애인이 동네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스물이 넘었는데 석달이 다 되어 가는데 자꾸 묻는다고 했다.

  “우리 아빠 어디 갔어요?”

  사람들은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아버지가 사망한 것을 모를까,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아들을 바라본다. 아버지가 없는 나날, 이 장성했지만 장성하지 않은 상태의 아들은 어떤 하루하루를 보낼까. 아버지와 함께 했던 동선으로 다니면서 아들은 계속 묻는다.

  “우리 아빠 왜 안와요?”

  처음의 안쓰러워하던 마음은 항상 같지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감정은 옅어지고 아들을 향한 안타까움에는 다른 감정들이 섞인다. 답답함이 쌓이고 자꾸 무언가를 사달라고 하는 행동을 언제까지 받아줘야 할지 난감해한다. 한없이 갑작스레 홀로 남은 아들의 삶을 걱정하고 도와주리라 생각했던 마음이란 저 아들의 장애 상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도대체 얼마만큼의 상태인지, 저렇게 혼자 두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옮겨간다. 기꺼이 한두운을 돌보고 한두운을 이해하려던 마음이 시간이 연장되자마자 삐걱거린 ‘나’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거룩할지어다

라틴어 수업-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2017.


  이탈리아 정치 혼란으로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하는데 투자할 금융도 없고, 남의 나라라서인지 그 혼란과 불안이 와닿지 않는다. 그동안 외국인은 한국에 전쟁위협과 정국불안정 소식에 얼마나 불안했을까. 휴전된 나라이니만큼 전쟁 조짐·위협에 매우 민감했는데 정작 한국인들만은 불안을 모르고 무심한 반응이라 의아해 한다는 얘기 또한 수없이 들었다. 전쟁 위협에 덜 민감했더라도 평화 분위기에 벅차오른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역시 ‘조국’ ‘민족’ 이런 것을 무시할 수 없음을 실감하게 된다. 한 나라가 어떤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는지, 그것이 현재와 미래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가지며 ‘나’를 형성해 가는데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임을.

  그러다 문득 이탈리아하면 무솔리니와 파시즘만을 떠올렸는데, 이탈리아의 역사에 로마제국이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늘 두 나라를 분리해서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많은 변화와 재편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별개로 인식하고 있던 것은 여전히 ‘다른 나라’의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로마 제국의 문화적 유산은 전세계에 산재하며 그 중심에 이탈리아가 있다. 심지어 사어가 되어버린 라틴어조차도. 나라만큼은 멸하여 사라졌지만 문화와 언어만은 뿌리를 깊게 두고서 영원히 소멸하지 않았다. 철학, 문학, 과학 등등 모든 학문에도 라틴어가 생생해서 책을 읽다 보면 항상 ‘라틴어’를 배우고 싶다는, 배워야 할까 생각하게끔 한다. 그렇다면 『라틴어 수업』이 매우 효용성 있는 책 아니겠는가.

  실제 수업의 강의안이 책으로 엮어졌다는 이 책은 라틴어를 읽히는 단순 어학 강좌가 아니라 로마와 이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학생들에게 인기있는 강의였다고 하는데 한국인이자 동아시아 최초 바티칸 재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인 작가의 경험과 통찰이 재미와 흥미를 주었기도 했을 것이고 무엇보다 학생들은 학점 이수를 떠나서 인생에 대한 성찰을 하게끔 한 강좌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라틴어를 배우는 수업에서 삶에 대해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한두 시간의 이야기로 이루어질 것이 아니다. 언어 속에 깃든 삶의 이야기가 쉴새없이 쏟아지는 강좌에서는 낭만이 지식이 풍겨져 나온다. 익숙히 알고 있던 단어의 어원과 파생된 단어들, 그 속에 깊게 담긴 뜻들을 살펴보다 보면 분명 새로운 ‘인식의 전환’이 생기게 된다.

   

어원학을 바탕으로 할 때 ‘거룩한’이란 말은 분리의 개념, 의식의 순결에 해당하는, 특별 조건이 아니면 다가설 수 없는 불가촉의 어떤 것이라는 개념을 말합니다. 라틴어 ‘사체르sacer'는 ’거룩한‘이란 뜻도 있지만 ’저주받은‘이란 뜻도 있는, 양가감정이 함께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거룩할지어다sacer esto”라는 말로 저주를 나타냈고, 이 문구는 로마인들의 단죄 양식이 되었어요.


  이 책을 읽지 않았던들 ‘거룩할지어다’가 저주의 표현임을, 로마인의 욕설은 세련되고 섬세하여 마치 욕설인지 모르듯 하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었을까. 라틴어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여 ‘거룩’한 느낌 또한 지워지지 않았는데, ‘거룩할지어다’가 이토록 저주의 말로서 단연 으뜸이란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나온다. ‘거룩할지어다’.

  그렇다. 이 책은 거룩하다. 지극히 경건하고 담백하다. 그리하여 정화의 느낌이 있지만 그에 못지않은 불편함도 있다. 말씀을 고이 따르지 않는, 못하는, 불건전한 사람임을 자꾸 느끼게 하니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