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 2009 용산참사 헌정문집 실천과 사람들 2
작가선언 6·9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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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게 세우고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작가선언 6·9, 200.


   비정한 나라에 무정한 세월이 흐른다.

   이 세월을 끝내야 한다.

   사람의 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09년 출간된 이 책을 2014년의 어느 날 들춰보다가 첫 페이지 이 단락에 너무 놀랐다. 처음에는 은유로 보았을 그 글귀가 다른 의미로 다가와서 더 아프게 다가왔다. 모든 것이 제대로 해결치 않았고 이제 진도 팽목항 분향소는 철거되고 경찰청 인권침해 진상조사위원회의 용산참사 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그때 제기된 여러 문제들을 입닫고 있던 언론은 마치 처음 드러난 일인 양 정부가 한 일을 보도했고 책임자들은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곳곳에서 건물이, 담이, 무너지고, 토사가 유실되고 또 곳곳에서는 건물을 세우겠다고 아우성이다. 무너지고 세우고, 무너지게 세우고….  


끊임없이 무엇인가 세워지는 곳에 사는 일은, 폐허에 사는 일보다, 더 고통스럽다.


  이 책은 192명의 문화예술인의 ‘용산참사’를 겪으며 기고한 작품 모음집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철거민들의 어려움과 아픔, 용산참사에 희생된 이들에 대한 애도, 용산참사 사건을 일으킨 가해자들과 정의를 모르는 정권에 대한 분노와 비판 등이 시와 산문, 사진과 그림, 판화로 표출되고 있다.

  나희덕 시인의 「신정 6-1지구에서 용산 4지구까지」의 위 문장처럼 아파트공화국, 건물주의 나라에서 사는 일은 고통스럽다. 새소리를 들으려 하면 여지없이 들리는 망치질소리에 하늘을 보려 하면 여지없이 가려버리는 건물을 보며, 그럼에도 살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실감할 때면 말이다. 일년에 3일 자기도 힘든  123채를 가진 전직 검사는 여전히 집이 123채일까, 1234채일까. 가진 거라곤 집 한 채가 전부라는 죄인이 그 한 채의 집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가슴을 무너뜨렸는지, 그 집에 수많은 이들에게서 강탈한 것을 채워놓았는지 모르지 않는데 뻔뻔함을 세우고 있다.

  오랜 동안 이 나라가 정의와 행복을 세우는 일보다는 무너뜨리는데 힘쓰며 오로지 건물 세우기에 혈안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건물을 세우는 일이 가능한 것을 보면, 무너뜨릴 것이 아직 많다는 이야기같다.

  한지혜 작가는 「누가 망루에 불을 붙였는가」라는 글에서 문예창작 전공 시절의 이야기를 적었다. 학기마다 써내는 글의 주제가 ‘철거’였다고. 그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고, “다 지나간 시대를 붙잡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했다. 현실을 외면 혹은 왜곡한 감상주의라는 비판까지 받았다는데, 나도 작가처럼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알면서도 자꾸 눈물이 났다. 나는 하루 종일 강의실 복도에 앉아 울었다. 억울했다. 내가 쓴 글이 다 지나간 시대요, 왜곡된 감상이라니 방학 내내 쿵쿵 울리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내가 다 허상같았다. 그리고 당황스러웠다. 무너지는 집에 앉아서도 무섭지 않았는데. 내가 처한 현실과 전혀 다른 동시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내 현실의 고통이나 분노는 가상세계와 마찬가지일 수도 있는 사실을 깨닫자 비로소 두려웠다.


  그런 시대를 살아왔다. 지워지지 않을 시대의 일들이 묻히고 덮일까봐 걱정스럽다. 아직도 철거라는 게 현실에서 보이는 일인데, 그것이 ‘시대를 벗어난 이야기’라는 생각 자체가 현실을 왜곡한 감상주의라는 비판 자체가 얼마나 끔찍한 시대를 살았는지를 더욱 각인하게 한다.    

  비정한 나라에 무정한 세월이 흐른다. 이 세월을 끝내야 한다.

  용산참사의 일을 가해자와 언론이 모르쇠 하는 동안 사건의 진상조사도 처벌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그렇게 비정한 나라가 계속되어 세월이, 되었다. 많은 것이 감춰지는 나라에서 그것을 들추어 소리높이던 이들도 블랙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달라질 세상에 기대와 희망을 가졌지만 모르쇠의 무리들은 그들의 세를 쌓아올리며 승자의 기록이라고 외치고 있다. 백무산 작가의 말처럼 ‘승자의 담론 개발윤리’로 이 세상을 일구고 일궈온 이들이 그동안 ‘무너지게 세운 것‘이 나올 때마다 달라질 세상을 보기 위해선 더 달려야 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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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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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의 주장


베어타운, 프레드릭 배크만, 2018.


  베어타운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 베어타운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굳이 베어타운을 설정할 필요가 없다. 사건도 마을도 모두 베어타운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이 세상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아이스하키의 명성만이 존재하는 소도시, 베어타운은 그저 세상을 조금 축소해 놓았을 뿐이다.


모두들 문화를 운운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모든 조직이 다들 자기들은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가 진심으로 원하는 건 오직 하나, 승리하는 문화뿐이다. 수네도 알다시피 모든 세상이 마찬가지지만 소규모 공동체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는 승자를 사랑한다. 딱히 호감이 가는 부류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승자들은 대개 강박적이고 이기적이며 배려심이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용서한다. 이기기만 하면 그들은 좋아한다.


  작은 마을일수록 공동체가 강하다고 하지만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가에 따라  결속의 양과 질이 차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공동체 구성원 하나하나의 삶이 곧 공동체와 동일시될 때 구성원이 아니라 공동체 자체를 고수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한 마을을 옮겨다 놓은 만큼 베어타운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생생한 캐릭터의 향연이 맛깔스럽게 펼쳐지며 마을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전한다. 베어타운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니 각종 사회문제들이 산재하고 사람들 사이 우정과 사랑, 음모와 배신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성폭력도.       


가해자에게 성폭행은 몇 분이면 끝나는 행위다. 피해자에게는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이다.


그녀는 열다섯 살이니 부모의 동의 없이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나이라고 하고, 그는 열일곱 살이지만 다들 ‘어린애’라고 표현한다. 그녀는 ‘젊은 아가씨’다.


  가해자와 피해자인 청소년들을 대신해 부모와 마을 어른들의 대리전으로 이루어진 싸움은 ‘어른’의 정의와 상식으로 문제를 바라본다. 왜 공동체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지, 정의와 윤리와 상식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권력과 이익의 관점으로 보는지. 가해자가 공동체의 지지에 힘입어 어떻게 당당하게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아니 아예 죄를 짓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지의 반대편에 피해자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절대적인 악을 본 것처럼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여자아이들이 ‘기분 전환용’이라거나 오로지 ‘떡치기’를 위해 존재한다고 학습하게 함으로써 잠재적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 이렇게까지 묻는다면 글쎄, 집단사이에 갈등이 벌어졌으니 더욱 집단을 똘똘 뭉치게 하기 위해서라고,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면 될까. 그것을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사랑이 아니라 증오라고 베어타운은 보여준다. 아이스하키의 마을 베어타운은 아이스하키 우승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적이라 간주하고 그에 맞추어 사고한다. 마을의 변화와 성공이 아이스하키 우승이라면 아이스하키를 가장 잘 하는 선수는 마을을 구제할 영웅이므로 영웅은 절대로 가해자여서는 안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의리‘처럼 설명하기 힘든 단어도 없을 것이다. 의리는 항상 좋은 걸로 간주된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수많은 호의가 의리에서 비롯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가장 나쁜 짓도 바로 그 의리에서 비롯된다는 거다.


  베어타운이 아니더라도 마을에서 집단적으로 행해진 성폭행이 얼마나 많았는가는, 그것을 어떻게 은폐하는가는, 한국에서 일어난 실제사건들이 보여주었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그 결과들을 가늠케 한다. 그렇다면 베어타운은, 베어타운에서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상마을 베어타운처럼 결과 또한 가상 아니 환상이 아닐까. 삼월 말의 어느 날 야밤에 한 십대 청소년이 쌍발 산탄총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일에서 시작한, 베어타운의 이야기….


나중에 검은 재킷의 사나이는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왜 그는 진실을 얘기하는 사람이 케빈인지 아니면 아맛인지 고민했을까. 왜 마야의 주장으로는 부족했을까.


  베어타운을 통틀어 이 문장에 이르러서야 감정이 폭발하게 된다. 베어타운이 아무리 마을 전체의 사람들 한명 한명에 서사를 부여하며 길게 이야기를 이어간대도 정체모를 검은 재킷의 사나이의 말이 의미하는 것만큼의 명료함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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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장화
헤닝 만켈 지음, 이수연 옮김 / 뮤진트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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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자화상

스웨덴 장화, 헤닝 만켈, 2018.


  스웨덴의 한 섬에서 살고 있는 일흔살 프레드리크 벨린의 집은 어느 가을 밤 불타버린다. 이웃 섬과 본토에서 한밤중에 불을 끄러 왔지만 제대로 된 고무장화 하나 건지지 못한 채 모든 것이 불타고 그는 겨우 목숨을 건진다. 외과의사로 의료사고를 낸 후 오랜 시간 홀로 살고 있던 그는 자신의 집 방화범으로까지 의심받는 신세가 된다. 의사이던 시절에도 인생의 무상함과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던 벨린에게 화재로 모든 것을 잃은 상황은 상실감과 인생의 회한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그의 삶은 환자의 엉뚱한 팔을 자르고 난 후 도망치듯 섬으로 들어와 섬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이 전부였다. 오래도록 교류한 섬사람들은 특별히 그와 잘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고 벨린의 삶에 크게 영향을 끼칠 만큼의 성향도 아니었다. 하지만 화재와 함께 찾아온 딸 루이제와 취재차 온 어린 여기자 리사 모딘은 그의 삶을 결코 평온케 만들지 않는다.

  그는 리사 모딘에게 이성적으로 끌리며 사랑을 꿈꾸고 존재조차 몰랐던 딸의 황당한 행동에 힘겨워하면서도 딸 루이제를 챙기고 보살피려 애쓰며 섬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화재의 용의자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애를 쓴다. 그는 이렇게 화재 후 살아나던 상실감과 인생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감정 위에 애정과 분노, 희망 등을 섞으며 섬에서만 살던 삶의 패턴을 바꾸기도 하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노년이란 생물학적 나이는 그를 욕망에 충실하게끔 놔두지 않는다. 노년이란 죽음에 관한 빈도와 깊이를 더하게끔 하니까.


그렇게 곧 죽게 될, 그리고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렘브란트의 그림들을 보고 싶은 소망을 가진 중환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그 미술관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죠. … 그 사람들 대부분이 꼭 보고 싶어 하는 게 렘브란트의 자화상이에요, 그중에서도 특히 늙었을 때의 자화상. 눈과 눈이 마주하는 그 만남이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길을 좀 덜 고통스럽게 만들어주죠.


  마을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감정들 또한 쌓아간다. 외딴 폐가에서 수집벽을 갖고 살거나,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거나,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거나, 그들 또한 섬에 찾아든 자신처럼 고독과 두려움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음을 이해해 간다. 벨린에게는 마을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보고싶은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같았다. 


그 사람들에게서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역시 내게서 그들 자신을 보아왔다는 사실을 이해 봄과 여름 동안 깨달았다.


어두운 현관복도에 가만히 서 보았다. 혼자 사는 사람의 고독에 항상 따라붙는 어떤 떫은 냄새가 분명히 느껴졌다. 불이 나기 전의 내 집에서도 같은 냄새가 났었을까?


  스웨덴 장화는 뭔가 다른, 독특한 특징이 있는 줄 알았다. 장화가 스웨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거나 장화의 최대 생산국이 스웨덴이라거나 그런 이야기라도. 하지만 스웨덴 장화에 대한 주목할 만한 특징을 찾지 못했고 작가와 소설 배경이 스웨덴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냥 평범하기 그지없는 장화. 노년이란 그냥 장화같은 것 아닐까.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고 가지고 있을 장화처럼 곁에 있는 것. 그런 장화지만 화재가 난 이후로 제대로 장화를 구할 수 없었던 벨린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이지만, 항상 그것을 맞을 준비는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때로는 거부하고 싶기도 한 것이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잘 몰랐던 마을 사람들처럼 오랜 인생을 살아본 뒤에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제때 구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는 것 역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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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로니 프로젝트
김솔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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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소스페소(caffe sospeso)

마카로니 프로젝트, 김솔, 문학동네, 2018.


  이탈리아 피렌체, 그곳에서 생활하지 않는 나에게 그 도시는 낭만적 공간이다. 관광객의 눈으로 바라보며 실생활을 잊는다. 100년 전통의 카페 소스페소(caffe sospes) 문화 또한 환상과 낭만의 분위기를 주는 요인이 된다. 주문해놓고 마시지 않은 커피, 맡겨둔 커피. 이 문화가 경제위기를 타고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커피를 마신 손님이 여분의 커피값을 미리 지불해놓으면 카페의 주인은 입구에 그 숫자를 표시해둔다. 그러면 누구라도 주인에게 무료 커피를 요구할 수 있는데 보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커피 없이는 하루를 시작하거나 끝낼 수 없는 나폴리에서 시작된 전통이다.


  이 카페 소스페스 문화를 전세계적으로 확산시킨 이탈리아 피렌체에 미국 본사를 둔 다국적 무기회사의 공장이 있다. 이 무기회사는 이탈리아에 어떤 문화를 심겨놓을까. 카페 소스페소는 여전히, 진행될까.

  본사는 피렌체 공장 폐쇄를 결정한다. 영업 실적이 부진하니까 더 돌아볼 필요 없는 결정이다. 진행해야 한다. 모든 직원을 해고해야 하니 저항하지 않게 잘해야 한다. 본사가 생각하는 ‘저항하지 않게’는 해고될 수밖에 없는 모든 직원들을 위한 최대한의 보상과 안정 협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본부장, 공장장, 부서 팀장들을 중심으로 한 ‘마카로니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들과 생존을 박탈당할 위기에 놓인 일반 직원들의 갈등 속에 본사는 관망하며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팀장들은 함께 일한 동료에 대한 안쓰러움과 배신한다는 죄책감 사이에서 힘겨워하고 직원들은 저항, 시위, 호소, 약탈 등등을 벌이며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이뤄진다. 이 소설은 공장폐쇄 과정에서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들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연대도 부르짖지만 미묘하게 파고드는 이간질에 넘어가며 나와 내 가족의 불안한 미래로 인해 당장의 이익을 더 생각하게 되고, 동료는 타인이 되어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마음들이 ‘이기심, 본성’이라는 이름으로 집결된다. 진창에 빠진 인간이 해야 할 생각과 행동, 마냥 선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할까.

  

인간에 대한 깊은 절망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어떤 절망도 극복할 수 있다는 확고한 논거가 될 수 있었다. 특히 누군가의 시체를 뜯어먹으면서도 여전히 불평하고 있는 자들의 이기심은 니코에게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의무들을 극명하게 주입해주었다. 돼지우리의 진창 속에 하루종일 코를 박고 살면서 정신적 순결과 우주적 이상을 갈망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우리 밖으로 나오려면 돼지의 삶과 돼지라는 인식에서부터 해방되는 게 급선무였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공개되는 정부의 비밀문건에 비장하기도 또한 우습기도 한 작전명이 여럿 있었다. 한국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국민을 위한 중요하고 엄중한 것들도 있었지만 국가권력 유지를 위한 작전들이 수두룩했다. 비둘기를 위한 파티도 있었고 계엄령문건이나 사법부의 재판개입, 댓글공작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엄중한 작전명을 달고 진행되어 왔다. 김솔의 마카로니 프로젝트의 주체는 기업이지만, 뭐 다를 리 있을까. 사람의 삶을 진창으로 몰아넣고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무리들에 맞서야 하는 힘없는 자들의 노력은 늘 연대, 연대, 연대. 쉬이 연대를 무너뜨릴 힘을 가진 무리에게 패배하고 마는 이들이 가져야 할 높은 수준의 합리성과 순수한 선, 이 불합리한 균형. 절대적 선에 이르지 못했기에 절대적 악이 이기는 게임.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나약해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나약해진 인간은 오로지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서만 그들을 둘러싼 위험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데도, 더 많은 이익과 더 안락한 조건을 편취하려는 욕망에 이성이 마비되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인간이 늘어가고 있다. 실업과 파산과 가난의 대물림이 이어지는 세태에서 노동은 더 이상 자본가들에게 재갈을 물릴 수 없다. 교육조차도 혁명의 무기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소비가 혁명을 야기한다.


  이 책을 보며 생각했다. 프로젝트는 얼마나 많았을까, 라고. 지금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프레임들도 언론의 논조들도 따지고 보면 마카로니 프로젝트의 진행 아니던가. 목표를 위해 인간들의 연대와 선한 마음 사이를 파고드는 갈등 조장에서 믿을 만한 것이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은 모순이다. 결국 이뤄지는 것은 인간의 파멸인데, 단지 문학적으로 이상적인 표현으로서 인간 모두 파멸했다고 말한들 무슨 소용인가. 삶의 명백한 현실에서 패배는 또렷이 나타나는데.


인간이 파멸해가는 과정을 덤덤하게 적어 내려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기록하는 일이 훨씬 어렵다. 왜냐하면 파멸의 과정은 명징하고 짧지만 치유의 그것은 불분명한데다가 너무 길고 더디기 때문이다.


  그렇다. 어쨌든 그 과정은 다를 리 없을 것이다. 무너진 인간이 어떻게 치유되고 회복되어가는가는 중요하다. 그것은 어렵고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직원들뿐만 아니라 공장이 있던 인근 식당이 문을 닫고 지역경제가 영향을 받는 상황이 묘사된다. 실제로 해고노동자들의 연이은 자살 소식은 해고라는 사건이 있은 지 오래 시간이 지난 후에도 들려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가에게 권력가에게 카페 소스페소(caffe sospes) 문화의 순수한 정신을 기대하는 일은 어려운데,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자들에게 절대적 선을 기대하는 일은 당연처럼 되는 것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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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하는 페미니즘 - 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정희진 서문 / 민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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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 그리고 건조기


빨래하는 페미니즘-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스테퍼니 스탈 저, 2014.


  쨍쨍한 하늘 그리고 폭염, 빨래가 잘 마르겠구나.

  찌뿌둥한 하늘 그리고 폭우, 빨래가 안 마르겠구나.

  날씨가 좋을 때나 좋지 않을 때나 팔할의 빨래 생각은 지극히 현실적인 반응일 게다. 내일을 위한 옷과 양말 유무는 밖으로 나가는 데 최소로 필요로 되는 것이니까. 또한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빨래 담당자’의 역할에 세뇌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나와 같이 빨래에 민감한 여성이 있으니 남편의 빨랫감을 집어던진 여자, 스테파니 스탈이다. 최근 페미니즘 경향과 변화의 움직임을 위해선 신간을 읽는 것이 적절할 텐데도 신간들에는 관심과 흥미가 떨어진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의 고전이랄 수 있는 책엔 여전히 관심이 간다. 실천적, 운동적인 접근보다 이론적이고 논쟁적인 책들에 대한 관심일까. 아무튼 그렇기에 페미니즘의 대표적 고전 도서를 ‘다시 읽기’하는 이 책은 다시 또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스테파니 스탈식으로 재세탁된 고전들은 저자의 경험과 버무려져 쉽게 다가온다. 원제보다도 한국판 제목이, 그리고 책표지가 아주 맘에 든다.

  장하준은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고 이야기한다. 인류를 바꾼, 가장 혁명적 발명품으로 세탁기가 상위를 차지하곤 하는데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켜 사회로 진출할 수 있게끔 했기 때문이다. 분명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의 발명으로 인한 가사노동시간의 단축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제는 날씨까지 극복하는 건조기, 건조기능이 부가된 세탁기도 등장하였으니 ‘여성’의 일이 얼마나 줄어들었는가. 그렇다. 여성의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을 뿐’이다. 여전히 빨래를 비롯한 가사일은 여성의 일일 뿐이다. 그것만은 세탁기가 발명되든 건조기가 발명되든 변하지 않았다.

  스테파니 스탈은 결혼, 임신, 출산, 육아를 겪으면서 페미니즘이란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문을 갖는다. 일을 가진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던 그녀의 ‘여성’의 자각은 꿈을 비롯한 많은 것을 포기하게끔 되는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현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었을 이야기다. 이 혼란과 절망에서 사랑, 죄책감, 좌절이라는 어려움에 맞서기 위해서 스테파니 스탈이 선택한 것은 페미니즘 고전 읽기이다. 그녀의 이 선택은 그녀 자신을 혼란에서 나오게 해줄까. 같은 상황에 처해 같은 감정에 휩싸인 또다른 여성들의 삶의 변화를 이끌어 줄까. 페미니즘 고전이 등장할 때마다 그 책은 여성에게, 세상에 용기를 북돋워주고 모순된 것들을 일깨워주었을까. 페미니즘은 세상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자조에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스테파니 스탈이 들여다본 페미니즘 고전의 목록은 메리 울스턴그래프, 버지니아 울프, 시몬 드 보부아르, 베티 프리단, 게이트 밀렛,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개럴 길리건, 주디스 버틀러 등 초기 페미니즘, 급진적 페미니즘, 프랑스 페미니즘 등 다양하다. 이 책들을 개괄하고 요약하면서 스페파니 스탈이 처한 개인적 상황에서 느낀 감정을 이야기하기에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셜리의 어머니인 메리 울스턴그래프트와 시몬느 드 보봐르의 개인적인 생애에 쏠리는 관심은 그들이 주장한 페미니즘의 이론과 연계해서 더욱 생각거리를 안겨다 준다. 그들 작가들도 완벽한 생활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이론을 쓰윽 그려낸 건 아니었다. 한계에 부딪치면서 생각하고 깨치고 생각한 고민의 흔적이 담겨 있다.


한때 육아와 가사 노동은 여자들을 연대하게 만들어 주는 주제였습니다. 2세대 페미니즘은 그러한 연대의 힘을 바탕으로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가사 노동은 인종과 계급을 나누고 이민자와 비이민자를 가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남자들의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 여자들을 진정으로 해방시켜 주고 있는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공통의 어려움을 가지고 연대했던 여성들이 같은 문제로 서로가 대립하는 상황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같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면 이제는 같이 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애쓴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에서 비켜난 지엽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며 그렇게 연대의 틀은 무너져간다. 이러한 역할을 누가, 하고 있는 것인가.

 

일과 양육이 주는 만족도가 얼마나 큰지, 두 가지가 자아실현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비교해 보려는 시도는 허울만 그럴듯할 뿐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두 가지가 서로 다른 종류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언론은 ‘직장 맘 대 전업 맘 전쟁’ 같은 자극적 기사들을 내보내면서 그런 중요한 차이를 언급하지 않은 채 오만하게 넘어가 버린다. 


  스테퍼니 스탈을 힘들게 했던 이 세상에서의 여성이라는 자각, 여성 성역할로 인한 스트레스와 히스테리와 함께 찾아왔던 가족과의 불화는 페미니즘 고전을 다시 읽으면서 화해 무드로 나아간다. 상황의 변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저자의 생각의 변화, 인식의 변화가 동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스테파니 스탈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경험이었고, 이 경험의 이야기를 저자는 세상에 들려주어 다른 이들로 하여금 혼란의 극복방법을 제시하게 한다.


정체성은 지식의 주체가 되는 경험에서 나옵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존재란 과정, 이야기, 대화입니다. 항상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노력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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