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스피드
김봉곤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평점 :
품절


오토픽션을 읽을 때의 곤란함

여름, 스피드, 김봉곤, 2018.


  여섯 편의 중단편은 전체적인 틀에서 연결되게 느껴졌다. 소설에서 반복되는 단어는 사랑과 글쓰기였는데 사랑을 해서 글쓰기가 된 것인지 글쓰기를 하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인지 애매할 정도로 둘은 분리되기 어려웠다. 누구나 사랑을 하면 시인이 되고 작가가 된다고 했다. 사랑을 하면 세세한 것 하나라도 기억되고, 잊히지 않고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모든 사랑하는 자의 심리가 아닐까. 또한, 사랑하다 헤어진 이들의 마음도. 사랑과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글쓰기, ‘글을 쓰고 그를 쓰는’ 이야기라서 독립적인 서사가 애매한 모든 ‘그와 나’에 관한 이야기는 '나'를 제외한 등장인물 모두에게 몰개성이 느껴지게 했다. 

  또 이런 말들이 있다. 모든 사랑하는 연인들은 진지하고 심각하지만 보는 이들에게는 유치하고 그저 그런 연애사라고. 그래서 여기, 소설속 사랑이야기가 그저 그런 연애사로 보인다. 그 연애사를 절절하게 묘사하지 않기에 작가의 심리에 다가가지 못함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작가의 의도라고 봐야하는 걸까.

  이 소설은 제목만큼이나 스피드하게, 그리고 가벼이 읽혔다. 공부중인 '나'의 현재 고뇌는 ‘그와의 사랑'에 집중되어 있고 ‘그’와 사랑하기 전에도 사랑 중에도 사랑 후에도 '나'는 허세가득한 글에 매몰되어 있다. 섬세한 사랑의 결은 어디로 흘러가고 자의식의 과잉으로 보이는 일기 같은 기록이 남는다.


그는 나의 거짓 과제를 보고서도 나의 글쓰기에 대해 비난했다. 넌 이런 식으로밖에 쓰지 못해. 그건 너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길이야. 헛웃음이 나왔다. 미니멀리즘에 대한 신물나는 애정, 그가 말하는 글쓰기의 기본인 행동하기, 보여주기, 외화(外化).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글쓰기가 선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강요했고, 아니, 그 이전에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결코 굽히지 않았으며, 그것이 결국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다. 보여주기보다 말하는, 행동하기보다 의식을 좇는 나의 글은 그의 눈엔 그저 멋부림에 불과했다. 교수 자신은 거리낌없었던 전위나 실험을 내가 하는 것은 객기였다. 그럴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가 무릅쓴 것에 대해 그렇게 쓰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것은 분명한 오만이며 강요라고 생각했다.


  나도 일종의 ‘교수’가 되려나. 이 전위와 실험의 글쓰기를 객기로 보는. 그러나 나와 같은 ‘교수’만 있었다면 작가는 신춘문예에 당선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신춘문예 등단작 「Auto」의 심사평―“퀴어의 사랑과 이별, 기억, 시간, 장소, 글쓰기 등의 다양한 무늬를 점프 컷과 소격효과 등의 기법을 통해 노스탤지어라는 캔버스에 개성 있게 그려낸 작품”―은 여전히 이해가 쉽지 않으며, 홀로 이 소설에 대한 이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건가 싶은 생각에 두리번거리게 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내 스탈이 아냐”를, “문장과 서사들이 나에게는 맛깔스럽지 않았어”, 이런 말을 충분히 할 수 있을 텐데 이 문장 하나를 쓰기 전에 변명같은 말들을 먼저 꺼내게 되는 이유에 대해.

  소설의 차별점이 무언가를 생각한다. 사랑과 글쓰기가 소설 전반의 내용이라 했지만 그보다 이 여섯편의 소설을 지배하는 건 퀴어, 라는 단어 아닐까. 시작부터 끝까지 ‘보편적이지 않은’ 퀴어의 사랑이야기가 작가 자신의 이야기, 그리하여 자전적 체험을 소설화한 것이 차별화되는 지점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소재의 차별화라고 할 수 있지만 소설의 매력이나 색다름과는 구별되는 것이고 소재를 어떻게 ‘소설적 형상화’ 하여 독자의 마음에 와 닿는가는 다른 문제이니, 내게는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어떤 면에선 남동생의 일기장을 들여다본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오토픽션을 쓸 때의 부끄러움은 사생활이라 여겨지는 나의 내밀한 삶과 생각을 밝히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 진실된 문장과 이야기인지, 어떠한 감정을 추출하고 획득해내기 위한 작위가 없었는지―나와 독자에게 모두―에 대한 경계심에서 비롯되는 감정으로, 꾸밈을 유혹받는 데서 오는, 혹은 필연적인 착오를 무릅써야 한다는 한계에서 생기는 부끄러움이다. 또 언제나 문학과 남자로 수렴되고 마는 나의 편협함에서 생기는 가벼운 수치심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글 읽기/쓰기와 남자, 절대 끊을 수 없는 것.)


  이 소설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아라는 말을 하기에 왜 이다지 껄끄러운 느낌이 드는가 했는데 거듭 소설에서 작가를 분리하기가 어려워서인지도 모르겠다. 전혀 아는 바 없는 작가인데도 ‘오토픽션을 쓸 때의 부끄러움과 곤란함’을 느끼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오토픽션을 들여다볼 때의 곤란함이 솟구쳐서인지도. 그리하여 나는 이것이 소설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자칫 작가에 대한, 평가로 비쳐지는 건 아닌가 우려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타인의 삶을 천천히 음미할 수 없을 것이란 불안과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누군가를 한입 가득 집어넣고 게걸스럽게 해치우는 짓은 그만하고 싶었다. 그것이 쓰든 달든 아주아주 천천히, 이번에는 꼭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첫 소설집이니 다음에 작가의 소설에서는 이러한 ‘불안과 강박에서 벗어나’, ‘스피디하게 읽어 해치우는 것’이 아니라 ‘쓰든 달든 아주아주 천천히’ 읽을 수 있을까. 다음번에는 꼭,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네밀기 

경애의 마음, 김금희, 창비, 2018.


  양희와 필용이 다시 등장한 듯했다. ‘반도미싱’ 팀장과 팀원, 공상수와 박경애. 양희같고 필용같은 경애와 상수의 너무한 남의 연애사. 옆에 이들이 있으면 참 재미있겠다, 생각들만큼 그들의 그네밀기를 보고 있으면 미소가 지어진다. 

  소설의 필연이 주인공들의 운명적 연결고리이기에 경애와 상수도 과거부터 이 줄을 서로 쥐고 있었다. 그러나 소설은 사건보다는 사건의 이후의 감정과 생각들을 풀어내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랄까. 누군가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조금만 열어보면 어떤 일들에 대해서 같은 마음으로 아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행복해하고 그리워하고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호프집 화재사건에서 친구들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경애와 그 사건으로 친구를 잃은 상수에게는 이때부터 이미 ‘같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경애 엄마는 경애가 씻는 것, 머리를 감고 이를 닦고 세수를 하는, 누구나 하루에 한번쯤은 귀찮아도 후다닥 해내는 그런 일마저도 너무 무거운,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남들에게는 자신을 방치하는 일이고 자신에게는 최선인 그런.


  상실에 상실이 더해진 경애가, 그러니까 오랜 연인과 이별하고 무력감에 빠진 경애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건 페이스북에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었고 형의 학대와 일찍 어머니를 잃은 상수의 상처, 직장에서의 냉대와 배제, 낙하산이라는 굴욕이 더해진 상수가 하는 일은 ‘언니’로서 페이스북에 상담 솔루션을 해주는 일이었다.

  7~80년대의 공장과 오버랩되는 ‘반도미싱’은 그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부당한 운영들을 일삼고 이에 맞서 파업하는 이들 속에 경애가 있다. 부당하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처럼 연애와 사랑, 관계에 관해서도 경애는 부당함을 말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움직이고 행동할 수 있을까.

  경애의 흘러가고 복잡하게 오가는 이 마음들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상실의 기억에서 같은 마음으로 절절해진다. 내면의 섬세한 감정들이 작가의 독특한 문체의 결에 얹어져 『경애의 마음』은 명쾌해지지는 않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포근해진다. “아무리 꽉 엎드려 있어도 경애가 만들 수 있는 어둠에는 한계가 있는” 경애의 힘인가.


그러자 세상은 어느 맥락에서 그렇게 순해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영은 복날이 되면 야산의 개들도 그때쯤 사람들이 자기를 잡으러 다니는 걸 알아서 더 깊은 산속으로, 도시의 외곽으로 달아난다고 했다. 그러다가 여름의 고비가 지나면 도로 밑으로 내려와 무리를 지어 달리면서 일영 같은 외부인들을 경계하면서 쫓고 그사이 또다른 개들을 낳기도 하다가 문득 일영이 건네는 먹이로 배를 채우기도 한다는 것. 그렇게 해서 개들도 순해지고 수도검침원도 순해지는 시간. 누구도 상처받지 않은 채 순하게 살 수 있는 순간은 삶에서 언제 찾아올까.


  한계 경애의 힘이 그런 시간을 찾아낼 것이다. 본질적으로 내재한 경애의 힘이 순하게 살 수 있는 순간으로 접목하고자 하니까. 흐르는 경애의 마음이 常數로서의 존재, 질서가 있는 상수에게로 수렴하는 시간이면 더 이상 “남들에게는 자신을 방치하는 일이고 자신에게는 최선”인 시간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남들에게도 최선인 생각과 행동으로 그들의 마음결을 찾아갈 것이다. 사는 건 시소가 아니라 그네밀기라고, 그저 각자 발을 굴려 공중을 느끼다 서서히 내려오는 것이라 말하지만 이들은 결국 서로의 그네를 밀어주며 오를 수 있는 최대의 공중을 자주 느껴가는 것이 그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갈 것이다. 그것이 언제나 ‘언니’의 마음으로 살뜰히 상처받은 이들을 챙기던 상수의 마음이 가닿는 순간일 것이다.


결국 상수는 마치 추처럼 어떤 것과 어떤 것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는데 경애는 그가 그렇듯 갈등하는 것에 고유한 윤리가 있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상수는 막무가내의 이기주의자나 꼴통, 심지어 고문관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마음의 질서가 있는 사람이었고 다만 그런 자기윤리를 외부와 공유하는 데 서툰 것뿐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관계없는 사람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문학동네, 2018.


  『내게 무해한 사람』속 일곱 개의 이야기는 누군가와의 관계가 끝나버린 시점을 찾는 이야기 같다. 각각의 이야기마다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훅 지나가는 것, 지금은 내 곁에 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없는 그 사람에 대한 회상은 좋았던, 아름답게 지냈던 날들을 기억하게 한다.

  소설이 작가의 분신이라고 하는 만큼 작품마다 작가의 분위기가 비슷하게 녹여 나오겠지만 인물들이 뚜렷한 개성없이 그가, 그녀가 다 같게 느껴진다. 모두, 같은 한자리에 모여 한가지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끝나버린 관계들에서 헤어나지 못한. 그러한 관계들이 단지 한명이 아닌 것처럼. 누군가가 의미있게 다가왔다기보다 누군가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마음을 나누었을 날들이 점차 사그라지는 건 어떻게 일어나는지, 마음속 자그마한 균열이 어떻게 크게 상처로 대체되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모래로 지은 집」


  「그 여름」은 학창시절 만난 수이와 이경의 동성애를 보여주고 있지만 소설 전반에서 작가는 여성과 여성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고 있다. 연인만이 아니라 가족, 친구 등 삶에서 의미있는 존재와의 우정, 사랑, 연대와 같은 감정들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심하게 서술되어 아픔과 상처도 더욱 깊고 길게 울린다. 


여자는 어쩌면 자신에게 삶의 무거움을 미리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그저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손길」


  하지만 세상과 인간에 대해 미리 겁을 먹은 이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하여 움츠리고 움츠려 있을 뿐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상처와 고통을 외면하거나 느끼는 대로의 진실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포장하기도 한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한다”는 건 관계의 진전을 이룰 수 있는 감정일까, 생각하게 된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고백」

 

 과거를 회상하는 자의 쓸쓸한 목소리가 전반에 울리는 소설에서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제목이 가진 맛깔이 좋다. 이 제목만으로 이 책이 따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르게 읽힌다. 내게 무해한 사람이란 상처를 줄 수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에서 말하고 있지만 내게 무해한 사람이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혀 그들의 말과 행동이 내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사람들. 세상을 살다보면 힘들고 어려웠던 그 순간들이, 가장 미워하는 누군가가 가장 보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시간이 흐른 후 지난 관계들을 되돌려 굳이 상처받았던 순간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을 사랑했던 나를 돌아보는 일이자 감정들을 회복하기 위한 일이다. 결코 그 순간을 잊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일이다. 상처받았던 그 순간들을 복기해 그날의 원인들을 찾아내어 자신을 반성하는 소설의 ‘나’가 단련된다면 그들은 타인의 눈빛에도 의연해 질것이다.  


그 난장판 속에서도 미주를 바라보던 무당의 표정은 슬퍼 보였었다. 아마 미주는 자신을 안타까이 보는 무당의 그 눈빛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타인의 얼굴 앞에서 거스를 수 없는 슬픔을 느끼니까. 너의 이야기에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이 너에게 또다른 수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지음, 최필원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빌라는 죽고 싶다고 했다


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2018.


   이야기의 구성 때문에 타임슬립처럼 느껴지는 소설이다. 동화로 유명한 상을 수상한 작가의 이력이 동화느낌도 나게 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주연으로 영화 제작이 확정되었다고 하니 이런 이야기가 소위 ‘먹히는’ 이야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임슬립 이야기가 계속 등장하는 것만 봐도. 이 소설은 시간여행자의 이야기라기보다 그저, 너무 오래 사는 사람의 이야기다. 너무 오래, 한 천년 정도? 그런 이가 절대 해서는 안되는 한가지가 ‘사랑에 빠지는 것’이란 규칙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절대 해서는 안된다라고 할 때 목적어는 무엇일까. 무엇을 위해 절대 해서는 안되는 것을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하는지 그것은 ‘너무 오래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일까.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먹고 자고 사랑하고 그런 일들일텐데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 삶이란 일상의 삶을 살지 말라는 말과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삶처럼 살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 왜 그토록 오래 살아가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든다.

  보통 사람보다 15배 느린 성장속도를 가진 1581년생 톰 해저드는 다른 이들에게 40대로 보인다. 톰 해저드가 전하는 이력서를 검토해보자. 과연 무슨 일들을 했는지. 21세기 현재 그는 런던의 중고등학교 역사 선생이다. 오래 살아온 그의 이력을 볼 때 직접 경험한 역사를 전할 수 있으니 탁월한 직업선택이 아닐까 한다. 역사에는 전쟁이 있고 중세의 마녀사냥이 있다. 마녀사냥이라는 큰 타이틀로 묶일 이야기 속에 톰의 이야기가 있다. 아들보다 늙어 보이는 엄마는 당연하지만 그 아들과 나이차가 너무 나 보인다면 아들이 늙지 않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 엄마는 마녀다. 늙지 않은 아들이 악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마녀가 된다. 엄마가 아들을 늙지 않게 마법을 걸었으니까. 왜? 엄마는 마녀니까.

  “살아남으라.” 물속에 던져진 엄마의 유언이었다. 살아남은 톰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여지없이 늙지 않는 남편이 된 톰은 또다시 고통을 겪는다. 딸이 자신과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 톰의 딸을 찾기 위한 여정에는 다양한 시대와 나라를 오가는 톰의 삶이 이어진다. 딸과 자신처럼 늙지 않는 병을 가진 사람들, ‘소사이어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8년마다 완전히 정체를 바꾸며 사는 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 딸을 찾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바를 함께 하는 톰. 소사이어티의 두려움은 과거의 마녀사냥처럼 현대에서 생체실험 대상자가 되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를 지배하는 엄청난 무언가의 존재를 믿게 돼. 우리 마음속에 갇혀 사는 무언가를. 그건 우리를 도울 수도 있고, 망쳐 놓을 수도 있어.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조차 수수께끼로 남아 있잖아. 과학조차도 그걸 인정하고.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우린 아직도 모르고 있어.


  소사이어티가 금지하는 규칙. 사랑에 빠지지 말라. 사랑과 죽음에 대한 생각,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삶, 시간이란 무엇인지 산다는 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고뇌를 거듭함에도 톰은 다시 사랑에 빠지려 하고 있다.


나처럼 오래 살다 보면 세상에 변치 않는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래 살면 모두가 난민이 되어 버린다. 국적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뿐 아니라 오랫동안 고수해 온 자신의 세계관이 틀렸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을 정의하는 건 오로지 인간으로 사는 것뿐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고.


  시간을 오래 살아가는 톰의 고뇌는 사람들이 살면서 행하는 생각과 전혀 다르지 않다. 단지 그 생각이 15배쯤 더 길고 오래 한다고 봐야할까. 결국 시간이란 굴레에서 인간의 해답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삶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현재는 매 순간 속에서 영원히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직 살아야 할 현재가 많이 남아 있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시간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면 비로소 시간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나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두려워하지도 않을 거고.


  영화는 어떻게 표현될지 모르겠지만 소설속 고뇌는 익숙하고 결말은 식상하다. 시간에 대한 인식은 새로운 무언가를 제시하기엔 ‘현재’를 소중히 하라는 말 외엔 없는 모양이다. 그리스신화에서 시빌라는 아폴론이 한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손으로 모래한줌 움켜쥐고 그만큼 살게 해달라고 했다. 젊게 해달라는 것을 잊었기에 늙고 쪼그라들며 천년을 살아간 시빌라에게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냐 물었다. 지칠대로 지친 시빌라는 “죽고 싶어”라고 대답했다. 톰이 시빌라에게 자신의 고뇌를 전해주었다면 시빌라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톰은 늙지 않고 웬만한 병은 걸리지 않는 신체를 지녔으니 시간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는 시빌라에 비해 여유롭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걸까.


시간이란 그런 거야. 늘 한결같지 않지. 살다 보면 공허하게 느껴지는 날들도 있잖아. 그게 몇 년이나 몇 십 년 동안 지속될 때도 있고. 괴어 있는 물처럼 무의미한 시간들. 그러다가 아주 특별한 해를 맞게 되지. 그건 딱 하루일 수도 있고, 오후의 짧은 순간일 수도 있어. 모든 게 갖춰진 완벽한 시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아흐메드 사다위 지음, 조영학 옮김 / 더봄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당신은 나의 얼굴을 갖고 있다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아흐메드 사다위, 2018.


  아랍의 카프카로 불리는 작가의 이 소설은 메리 셜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비교되는데 등장하는 괴물 역시도 무명이다. 무명씨의 활약을 보는 것만큼이나 탄생이 흥미롭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판타지 분위기는 이라크, 바그다드라는 도시와 연결되며 현실처럼 여겨진다.

  폭발이 끊이지 않는 미군 점령하의 바그다드에는 파편이, 시체가 넘쳐난다. 때로는 팔 하나, 다리 하나, 몸통이 하늘로 솟구쳤다 모일 곳을 찾지 못하고 흩어진다. 죽은 영혼은 흩어진 제 몸을 찾아 떠돈다. 그곳으로 사람들은 걸어 다니고, 밥을 먹고, 이라크와 이란 전쟁에서 죽은 아들을 기다리고, 어떤 이들은 누군가를 등쳐먹으려 안달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동네 깡패같기도 한 폐품업자 하디가 폭발로 흩어진 시체의 부위를 하나씩 주워 모으는 장면은 뭉클하다. 그렇게 모아진 시신의 형태를 꿰매는 건 그렇게 해두면 누군가가 장례를 치러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난폭하고 도둑놈 심보를 보이는 하디를 사람들은 한때, 누구도 상대하지 않은 적도 있었는데, 나헴의 죽음 이후로 성격이 변했다고 했으니 하디의 심성은 처음부터 공격적이진 않았던 모양이다. 폭발이 일상화된 곳에서 살지만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함께 하던 동료 나헴의 죽음에서, 어느 살점인지 분간할 수 없게 폭발해 버린 나헴이 죽던 그날의 충격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하디의 마음이 무명씨를 낳았다.

  세상에 온갖 죽음의 현장이 된 곳엔 갖가지 유령들의 소문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 바그다드의 골목골목엔 폭발로 죽을 때 온전한 제 시신에 안착하지 못한 영혼들이 떠다닌다. 호텔 경비원 자파르도 자살폭탄 테러로 죽어 제 몸을 잃은 영혼이다. 그런 자파르의 영혼이 꿰맨 시신으로 쏘옥 빨려 들어가 자리잡을 때, 이 시신은 자파르일까. 각 부위의 주인일까, 새로운 인물일까. 무명씨, 그렇게 지칭된 이 시신이 살아 움직이면서 바그다드에는 폭탄 발생 빈도만큼이나 기이한 죽음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온 생애를 바탕으로 한 산 사람들의 평가. 


죽음은 죽은 자에게 존엄의 아우라를 선물한다. 산사람들은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 미안한 마음에 죽은 자를 용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한 사람만은 절대 아부 자이둔을 용서하지 않았다. 유보된 정의된 개소리에 불과하다. 정의는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한다. 나중에는 오로지 복수의 시간뿐이다. 정의로운 신이 행하는 고문, 영원의 고문이 있을 뿐이다. 복수란 바로 그런 것이다. 반면에 정의는 이곳 지상에서, 그것도 증인 앞에서 이루어질 때만이 의미가 있다.


  분명 죽음은, 더구나 전쟁에서 폭탄이 난무하는 나라에서의 죽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에 의한 죽음이라면 죽은 것이 내가 아니라는 이유로, ‘내가’ 살아있다는 이유로 미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의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정의일까. 괴물은 정의의 다른 이름이 되는 건가.

  분명 무명씨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자신은 살해용의자가 아니라 ‘정의’라고. 이 땅은 이미 탐욕, 야망, 과대망상, 무참한 폭력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대신한 복수, 그를 통해 정의를 이루려 한다고. 아부 자이둔에 의해 억울하게 전쟁터로 끌려가 죽음을 당했을지 모르는 아들을 수십년 동안 기다리는, 아부 자이둔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 엘시바에게는 이 괴물의 정의가 닿을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 무명씨에게 조각난 시신의 살점을 계속 가져다주는 추종자들에게도.

  법의 판결에 만족하지 못할 때가 많다. 턱없이 낮은 형량, 온갖 이유로 감형되거나 가석방되는 일 등은 정의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마음이 들지 않게 한다. 차라리 분노만큼이나 자력구제하고파 지는 일이 너무 많은데 무명씨는 그런 분노를 스스로 해결하고 있는 존재다. 정의의 이름으로 복수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기워진 신체의 주인들의 죽음의 원인을 찾아 살인하는 무명씨에 의해 자살테러범이 죽고, 모집책이 죽고, 트럭 폭탄의 알카에다 지도자 등이 죽어 나가니 어쩌면 그래도 정의가 흐른다고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무명씨가 행하는 일들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할지라도.  


무명씨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신체부위에 해당하는 사람의 복수를 하지 못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부위가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수를 완수한다 해도 피해자의 부위는 어쨌거나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뜻이겠지?  


  무명씨가 알게 된 사실에 의하면 온전한 시신의 모습을 하기 위해선 결국 복수와 정의는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이야기다. 죽지 않을 사람은 없다. 테러가 진행되는 이 나라에서 어떻게 복수할 대상이 멈춰질 수 있단 말인가. 개개인에게 원한을 사지 않고 사사로운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은 과연 있는가. 무명씨의 살인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묻게 된다. 그런데 무명씨는 왜 온전한 시신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거지?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괴물의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러니만큼 괴물 이야기를 쫒는 기자의 등장이 현실성을 부여잡기 위한 장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부당국이 등장하고 점성술사가 등장하고 온갖 미신들이 난무하며 거짓말쟁이가 목격자가 되어 이야기를 전하는 이 소설의 분위기는 무엇을 믿어야 좋을지도 모른 채 이라크에서라면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착각이 들게 된다.

  끊임없이 누군가의 살점을 받아 생을 이어가는 무명씨. 각기 다른 이들의 신체부위로 형성되는 무명씨의 정체성은 어떻게 되나. 매일 바뀌는 얼굴이 무명씨일까. 신체 부위가 무명씨일까. 결국 무명씨는 모든 죄를 진 자의 얼굴을 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 범죄자가 행하는 복수는 과연 정의인가.

  이 책은 2018년 한강 작가가 수상한 맨부터 인터내셔널상 최종후보작이었다고 한다. 또한 영국 영화사에서 영화화된다고 하니 시각적으로 표현된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이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