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을 나온 암탉 (양장)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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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죽음

마당을 나온 암탉, 황선미, 2000-12-20.


  작가가 방송에서 나오는 프로그램을 봤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소설과 영화 모두 세계 여러 나라에도 번역·상영되었다. 해외 번역과 상영의 뒷얘기에서 소설의 결말이 삭제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진 양 놀랐다.

  이 책 첫 출간이 2000년이니 18년된 작품이다. 청둥오리 수명이 30년이라 하니 어린 초록머리가 중년을 지나고 있을 시기다. 2000년의 아이들에 비해 2010년의 아이들은, 2018년의 아이들이 특별히 동화의 결말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진 않은데, 독일에선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동화의 고전, 인어공주의 결말도 우리는 잘 감당하며 커 왔는데…

  동화로서 이 책은 인어공주가 물거품 된 것만큼의 슬픔을 준다. 단지 결말만이 아니라 읽는 내내 단조의 느낌이다. 자연이란 것이 삶과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정해놓았더라도 수없이 생각하고 겪게 되는 생과 사, 그러니만큼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아이들에게도 일찌감치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약하지 않기도 하다. 동화를 보며 아이들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슬픔이라는 감정, 죽음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왜 그랬을까.

  이 책의 부제가 ‘꿈과 자유를 향한 여정'인 줄 몰랐다. 해외 번역본 제목도 이에 맞추었다. 그래서 ’꿈과 자유‘를 주제로 했을 때 그 결말은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폐계가 꾸는 꿈, 갇힌 공장식 닭장을 벗어나 마당으로 나가는 것에서 꿈꾸기 시작한 잎싹의 삶에서 죽음이 꿈과 자유를 이루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없건만, 실패라 할 수 없건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마침표 이후 보여주지 않는 익숙한 동화의 결말로 끝맺음하려 했던 것인가 싶어 의아하다. 아니, 그림형제의 나라 아니던가. 각종 설화와 민담을 채록하며 잔혹한 부분을 수정한 그림형제였으니 독일은 그림형제가 되어 결말을 삭제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결말이 그렇게 잔혹한 동화로 느껴졌을까.

  작가는 “길들여진 오리는 자기 알을 품지 않는다.”라는 만화에서 본 문구에서 영감을 얻어 개인적인 경험을 덧대 이 작품을 썼다고 했다. 잎싹은 길들여진 자가 자기 알을 품는 것을 보여준다. 아니, 길들여진 자가 품는 꿈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길들여져 있었기에 꿈에 다가가는 여정은 더욱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성취해가는 꿈이 얼마만한 희열을 가져다주는지를, 생을 더 아름답고 가치있게 느끼게 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때로 우리는 너무나 ‘죽음’에 대해 금기를 씌운다. 자연스럽게 그에 대해 생각하고 느낄 수 있게끔 하지 않은 채 피하고 보는. 죽음에 대해 우리는 길들여진 생각만을 갖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많은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잎싹의 죽음에 슬퍼하며 울었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죽음을 인식할 수 있음에도 삭제된 죽음이 그것을 방해하는 것 같아서, 길들이는 것 같아서 책의 마지막을 오래도록 다시 읽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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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사회학 - 당신은 대한민국 몇 %입니까?
정태석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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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행복의 지분

행복의 사회학-당신은 대한민국 몇 %입니까?, 정태석, 2014.


  지난달 한창 뉴스를 달군 건 통계청장 교체에 관해서다. 삶의 지표를 가늠하는 통계, 그 중 가계동향조사 표본 선정에 관한 논쟁에서 촉발되어 통계의 신뢰성 문제로 정치권은 대립했다. 이 책에서는 권력이 숨기고자 하는 숫자와 불평등, 자본이 반복해서 말하는 프레임이 삶의 행복을 어떻게 방해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책의 출간이 2014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행복은 얼마나 멀어져 있었을지 가늠하게 된다.    

  『안나 카레니나』속 유명한 첫 문장처럼 행복한 가정이 모두 비슷한 모습이라면 행복한 사회도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행복에 대해 세상은 어느 정도 규격화시켜놓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유엔은 매해 국가별 행복지수를 발표한다. 2018년도에는 행복지수의 지표는 국내총생산(GDP), 기대수명, 사회적 지원, 선택의 자유, 부패에 대한 인식, 사회의 너그러움 등을 기준으로 했다고 한다.


타인 지향형 사회에서 인간은 특정한 가치관을 갖지 않고 타인이나 세상의 흐름에 자기를 맞추며 살아간다.


  대한민국은 얼마나 타인 지향형 사회인가. 타인을 위한 배려가 넘치는 사회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삶. 언제던가 나라별 중산층 기준에 관한 비교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은 다를 줄 악기가 있는지,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지,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지는지,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는가였는데 대한민국은 은행잔고와 월급여가 얼마 이상 되는가, 자동차와 아파트를 일정급 이상을 보유하였는가였다. 지금이라도 달라졌을까, 대한민국에서 행복하게 산다는 건 이런 ‘급’에 선을 맞추어야 행복할까 말까한 삶이다.

  그렇지만 이런 기준이 아니라 서양의 기준이나 유엔의 기준을 들이댄대도 행복할까 말까하다. 이 나라의 부패는 생각했던 것보다 끈끈해서 도통 깔끔하게 떨어질 줄 모른다. 부정과 불법을 자행하고 그것을 지켜가려는 소위 노블레스의 노력은 2014년을 보내고 2016년을 보내고 행복을 기다리던 수많은 국민들을 위협하고 여전히 분노케 한다. 기대했던 새로운 나날들을 만들어가는 건 그런 이들에 의해 이토록 버겁다.  

  그들이 외치는 경제 민주화의 다른 이름은 재벌가의 지속적인 성장이며 이를 위해 당연 지속적인 착취구조를 공고히 하려고 한다. 이를 위한 무수한 노력들을 위해 그들은 서로 뭉치고 결속하며 단결하고 있다. 한 목소리로 외친다. 복지는 안돼! 분배는 안돼!

  

부유층일수록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더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세금을 낮추고 복지 지출을 줄이고 또 부유층에 대한 증세에 반대하는 보수 정당에 대해 확고한 지지를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보수정당이라 할 때 ‘보수’가 표방하는 것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냐가 핵심이 될 것이다. 그 정당이 주장하고 지향하는 바가 많은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것인지를 말이다. 상식적이고 논리적이고 사실에 근거한 ‘말’만을 들어도 행복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러므로 아직도 나는 행복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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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코리 스탬퍼 지음, 박다솜 옮김 / 윌북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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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만드는 일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코리 스탬퍼, 2018.


  “세상에, 그렇게 재미없는 일도 있군요.”

   책 속 10대인 딸 친구가 말했듯이 매일 단어를 만드는 일이란 재미없는 일이고 기대를 크게 가져서인지 단어를 만드는 일은, 아니 단어를 만드는 일에 관한 코리 스탬퍼의 이야기는 재미있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이 일이 매우 재미있고 이 일에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무려 20년을 웹스터 사전 편집자로 살아온 코리 스탬퍼가 차근히 보여주는 사전 편집자로서의 일상은 아, 막연하게 상상하는 이미지는 사라져버리고 그냥 직장인의 모습으로 남았다. 직업적인 면보다 단어에 관해 더 알고자 했으니 말이다. 사전 편집자의 일을 기술하고 있으니 그 세계에 관해 잘 알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그 일은 고체로 분류될 만큼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고 새뮤얼 존슨에 의하면 “무해한 노역자”다.

   그렇다. 단어를 찾는 일도 역시 재미있지 않다. 나이듦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강하고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새롭게 등장하는 단어를 찾는 일이 재미없는 건, 그렇게 사용된 단어의 의미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요즘은 대체로 차이를 두기 위해, 그리고 차별하기 위해, 혐오하기 위해 생산된 말이 많아지니까 더욱 단어를 찾는 일은 재미없는 일이 되어버린 듯하다. 

  어떤 단어는 사전에 올라가지만 어떤 단어는 찾을 수 없다. 인터넷 세상이 되어 종이 사전을 쓸 때보다 사전을 검색하는 일은 훨씬 쉽고 빠르게 되었다. 물론 그때보다 사전을 찾을 일도 무진장 많아졌지만 찾지 못하는 단어가 훨씬 더 많아졌다. 새롭게 등장하는 단어들을 감으로 맞추기도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어쩌면 그 이유를 사전편집자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단어는 빠르게 변하고 무수히 생성되지만 사전 속으로 들어가는 건 쉽지 않다. 한달, 심지어는 아홉달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한 단어의 의미만을 담는 것이 아니라 문법과 쓰임들에 관해서도 꼼꼼히 기록해야 한다. 어원에 관해서도 기록한다. 어원을 안다는 것은 단어가 만들어지던 시기와 문화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단어’를 만드는 일은 단지 세상에 생성된 말을 사전이라 불리는 곳에 옮겨다 놓는, 모아 놓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이 무해한 노역자들은 칸막이 책상에 하루종일 틀어박혀 가장 적확한 단어와 쓰임을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매일 이 일을 반복하고 있다.


사전의 목표는 사람들에게 단어가 뜻하는 바와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냉정하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스릴과 로맨스를 기대하며 사전을 펼치지 않는다.


  그러나 사전편집자들은 단어와 사전과 사랑에 빠지고 인해 스릴과 서스펜스를 느끼며 일한다. 심지어 천국의 직업이라 느끼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어떤 면에선 이 일에 관해서만큼은 전류가 통하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단지 직업적으로만 회사원으로서 사전편집자로서의 역할을 진행할 수 있을까.

 

사랑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에 관한 귀하의 질문은 저희가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사전 편찬자들이 할 줄 아는 일은 단어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깊은 인간적 감정의 속성과 영구성에 관한 질문은 저희가 다루는 범위를 약간 벗어납니다. 더 큰 도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독자의 편지에 답에서 사전편집자들에게 단어를 정의할 뿐 단어가 지닌 ‘깊은 인간적 감정의 속성’에 관해서는 멀리 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미 인간적 감정을 담은 단어들이 수없이 생성되고 있고 그 단어의 의미를 기재하기 위해 의미를 찾고 어원을 찾고 쓰임을 찾고 있지 않나. 사전에 등재되는 단어는 모든 단어가 아니라 깊은 고뇌와 논의 끝에 편집자들에 의해 걸러지고 합의된 단어라는 점, 그 행위에 감정적 속성이 개입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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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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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길로 전진하다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정영목, 2018.


   한 나라의 정상이 갈라진 국경을 넘는 방법은 발자국 한번 떼면 되는 일이었고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일은 발자국 한번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는 세 번의 남북정상회담에서 뚜렷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서로간 교류가 없이 흘러간다면 그 차이는 더더욱 커지며 의사소통을 위한 통역가와 전문번역가가 필요하게 될 지도 모른다. 육십여년의 단절은 반만년 역사의 언어를 갈라놓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언어가 국경을 넘는 일은 어렵고 더디게 흐른다. 여전히 우리 국경을 넘지 못한 언어가 있고 언제 올 지 기약도 없다.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은 정영목 번역가가 국경 너머의 글들을 불러낸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세계,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읽고 생각하고 느낀 세상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

  작가들과 작품세계는 책 뒷페이지 역자의 말에서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작가와 작품세계에 관해 자세히 알려주었던 글을 생각나게 한다.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했지만 저자에게 인상깊은 작가와 작품을 선별하여―필립 로스, 주제 사라마구, 헤밍웨이, 존 업다이크, 이창래, 알랭 드 보통, 오스카 와일드, 존 밴빌, 코맥 매카시, 윌리엄 트레버, 커트 보니것,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작가들의 생애와 글쓰기 특징들,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작가들과 그들의 평가, 저자 자신의 평가가 더해져 이들 작가들의 작품을 다시 읽고프게 만든다.

  특히 낯설지 않으면서 낯선 작가 이창래의 이름을 보고선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오래 전 미국으로 이민간 한국인이 위안부의 삶을 다룬 글을 썼다는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기억의 주인공이 바로 이창래 작가임을 알았다. 매해 노벨상 유력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다는데 번역본으로 읽어야 하는 한국인이었던 작가. 저자는 인종은 한국인이지만 국적은 미국인이며 영어로 글쓰는 이 작가의 글을 번역하면서 느낀 소회를 이렇게 말한다.


억측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 독자들은 이창래 같은 작가―영어를 사용하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를 다른 외국의 작가들보다 더 거북해하는 것 같다. 아주 얕은 수준에서 보자면, 미국 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한국과 관련된 사항―상황이든 등장인물이든 간판이든- 이 나왔을 때 받는 왠지 편치 않은 느낌(미국에 사는 한국인들은 다르게 느낄 수도 있지만)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번역된 ‘외국’ 소설에서 기대하는 상황과는 다른 상황이 벌어지는 것에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설사 준비가 되어 있다 해도, 외국 언론에서 한국 상황을 보도하는 기사를 읽을 때처럼 그 묘한 객관성이 가지는 시원치 않은 느낌, 남이 머리를 감겨주는 것 같은 느낌에 대한 우려가 남을 수도 있겠다.


  생각해보니 내가 이런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입술의 움직임과 말의 부조화로 20%는 생각을 곁으로 흘려보내며 보게 되는 더빙 영화처럼. 이제는 이런 기분을 멀리 던지고 이창래 작가의 책을 편케 읽을 수 있을까. 

  정영목 작가는 알랭 드 보통의 책을 번역하면서 보통의 까칠한 성격을 매끈한 성격으로 바꾸어 번역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토로한다. 번역을 하게 되면 그들의 음영을 그대로 드러내려고 노력한다고 하니, 나 또한 정역목 작가의 글이 자신의 음영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정영목 작가의 글을 읽다보면 이 분의 결이 섬세하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정갈하고 맑게 느껴진다. 그래서 작가에 대한 인상도 그렇다. 갑자기 정역목 작가의 책이 연달아 출간되었을 때 잠시 놀랐다. 어떤 신변의 변화가 있어서 책을 낸 것은 아닐까 싶어서였다. 그러니까, 어딘가 아프다거나 더 이상 번역일을 하지 않겠다거나 뭐 그런. 그것이 아닌 것을 알아서 편하게 책장을 넘기게 되었다. 인생의 한부분에 대한 정리이자 자신의 일에 더 전진하리라는 다짐이리라 생각하며 나도 ‘전진하다’가 자동사라 여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세상을 겪을수록 개인에게든 집단에게든 전진이냐 퇴행이냐 하는 흐름의 결정은 평지가 아니라 비탈에서 이루어진다는 느낌이 든다. 전진이란 늘 비탈을 올라가는 행동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루어낸 모든 인간적 성취도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함께 안간힘을 써서 밀어올린 것이어서 사실 그 자리에서 간신히 지탱하는 것만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전진하다’가 자동사라고 믿고 두 손을 내려놓는 순간 그간의 성취는 내리막길로 데굴데굴 굴러 내려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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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식탁 오늘의 젊은 작가 19
구병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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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없는 식탁

네 이웃의 식탁, 구병모, 2018.


  제목을 본 순간부터 ‘네 이웃’의 ‘네’는 자동적으로 인칭대명사로 인지됐다. 소설을 읽으면서 식탁을 둘러싼 네 가족의 이야기임을 알았으니 ‘네 이웃’은 숫자 4의 의미도 있다. 내 이웃이 넷이라는 건 축복일지 악몽일지 모를 일이다. 살아보지 않는다면, 겪어보지 않는다면.

  EBS 한국기행은 한국의 자연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다룬다. 이런 이야기에는 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로 정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웃과 더불어 함께 행복한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모습을 이상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럴 때면 그 모습에 현혹되어 그 삶속으로 뛰어들고 싶어진다. 그것은 좋은 것 이면에도 그냥 사람으로서의 삶이 있다는 것은 잊어버리고픈 꿈꾸고픈 아름다운 꿈, 삶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의 역할이 있음을 간과한 채로 그저 모든 것이 아름답게 꾸며놓아진 식탁일 거라고 기대하는.

  이 소설을 통해서 그 식탁에 대해 좀 더 현실적인 생각을 더했고 꿈꾸기가 다소 파괴되었다. 그러나 분명 내 가정의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지역의 공동체 또한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격하게 깨닫게 된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건 웬만한 소음은 배경음악으로, 어수선한 광경은 손닿지 않는 액자 속 풍경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꿈미래공동실험주택.” 어딘가에서 이뤄지고 있을 것 같은 이 공동주택은 저출산 국가에서 세 명 출산을 조건으로 입주가 가능한 곳이다. 저출산 사회이기에 TV에서는 연일 다자녀 가족의 삶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로 아이 세 명은 굳건한 결심이 있지 않고서야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또한 이 나라는 내 집 하나 마련키 어려운 곳이니, 안정된 주거를 갖춘다면 행복은 덤이 될 것만 같은 내 집 없는 설움과 고통에 놓여 있으니, 어떤 방법이라도 깨끗하게 새로 지은 내 집을 가질 수만 있다면 아이 셋쯤이야, 하며 아직은 교통이며 제반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도심에서 벗어난 이 주택에 입주를 꿈꾸는 이들이 있다.

  요진과 은오, 단희와 재강, 효내와 상낙, 교원과 여산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 네 가족이 그랬다. 각각의 생활방식이 다르지만 공동주택에 놓인 커다란 식탁 위에서 그들은 연신 ‘함께’ ‘같이’를 외치며 공동체 생활의 첫 활동과제로 공동 육아를 시행한다. 공동 육아의 현장에서의 역할만큼 각자의 삶을 채워야 하는 이들은 일터로 나간다. 네 가족 중 세 명의 아빠와 한 명의 엄마가 일터를 향하고 식탁엔 세 명의 엄마와 한 명의 아빠가 앉는다. 한 명의 엄마 효내는 어린 아이를 돌보고 며칠을 밤새워 하는 일로 인해 공동육아 시간에 딱 맞게 참석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 한 명의 엄마 요진은 멀리 일을 하러 가기 전 공동 육아에서 해야 할 일을 담당하느라 힘들고 지친다. 남편 은오는 집에 있지만, 가사일을 도맡아 하지 않는다. 공동 육아에 찬성한 은오는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할 공동체 생활의 일이고 빠질 수 없노라 얘기하지만 자신의 역할을 찾아서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단희는 은오에게 기대하는 바는 낮고 이해하는 듯 보이지만 효내에게는 못마땅함을 감추지 않는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사이에서 여섯 살 시율이가 동생들을 챙기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모습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길들여진 것일지도, 기대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함께, 같이의 역할에서도 아이를 돌보는 일에는 성역할이 명확히 구분되는 것일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관절과 같은 것이라 활액이 없이는 삐걱거리며, 그에 따른 통증과 불편을 실제로 느끼고 감당하는 쪽이 으레 따로 있다는 게 단희의 주된 불만이었다. 어디까지나 뭔가 인사를 못 얻어서가 아니라 공동주택에 살면서 그 정도가 최소한의 상식과 도리라고 단희는 믿었다.


  각자의 가족이 지닌 생활의 무게, 그것이 각자의 문지방을 넘어 식탁으로 오르는 일은 순식간이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잘 해나가려 하지만 요진도, 단희도, 효내도, 교원도 타인의 행동이 내 마음과 같지 않을 때,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공동체라는 이름하에 각자가 행해야 하는 “최소한의 상식과 도리”는 무엇이고 얼마만큼일까. 각각의 사람을 대하는 스타일과 타인에게 느끼는 친밀감의 속도와 정도가 다를 진대 우리는 이 간극을 어떻게 좁혀갈 것인가.


요진이 불편하고 불쾌하면 곧 그것이 선을 넘는 일이었다. 그러나 요진은 가능한 한 ‘누가 봐도 이상하며 그럴듯하지 않은’ 일에 반응하고 싶었다. 해석의 방식과 범위에 따라 불쾌지수가 널뛰는 일에 낱낱이 발끈함으로써 서로에게 개운치 않은 뒷맛을 초래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피곤한 여자로,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예민한 이웃으로 간주되기 싫었다. 좋은 게 좋은 줄 알며, 사소한 농담에 호응해 주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회인이 되는 게 바람직했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이 가족들의 공동체에 대한 열의는 공동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리고 공동체에서의 최소한의 상식과 도리에 대한 인식만큼이나 가정에서의 최소한의 상식과 도리를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가정은 공동체라는 보이는 식탁을 장식하기 위한 꽃이 아닐진대 보여지는 면에 의식을 두다 보면 정작 잘 가꾸어야 하는 가정은 조용히 이지러지게 된다. 내 가정의 안락한 삶을 무시한 채 타인의 가족과 어우러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내 가족에게 배려가 부족한데 타인에 대한 무한 배려와 이해가 가능할 수 있을까.


기중기를 동원하지 않고는 어려워 보였을 뿐더러 왠지는 몰라도 이 공간은 이렇게 활용해야 마땅한 곳 같았다. 어떤 효용이나 합리보다는 철저한 당위가 지배하는 장소.


  우리는 공동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천에 대한 의지없이 ‘공동체’라는 단어 자체에 함몰되어 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저 그것 자체로서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을 이루어가는 각각의 주체들을 배제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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