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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평점 :
저널리스트의 근자감은 샤덴프로이데 정신?!
제0호, 움베르토 에코, 열린책들, 2018.
잠에서 깨어나 수도꼭지에서 물이 흐르지 않는 걸 알게 되면 당연 당황할 수밖에 없지만 꽤 기민하게 반응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한때는 무언가를 꿈꾸기도 했을 테지만 이제는 변변찮은 글을 쓰며 살아가는 콜론나. 간밤 폴터가이스터 현상이 일어났을 가능성까지 가늠하는 이 남자가 4개월 전, 모든 일의 시작점을 회상하고서야 모든 행동이 이해된다. 차라리 유령출몰, 폴터가이스터 현상이 낫다. 두려움 가운데 재미라고 있으니까.
1992년의 이탈리아에 대해 알고 있다면 소설을 이해하는데 더 좋겠다. 모른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다. 소설은 현재에도 익숙한 대한민국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기에 언제든 소환해 낼 사건, 이야기가 넘친다. 최근 더 극심한, 그 본질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는 언론의 이야기라고 하면 될까. 발행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발행되지 않을 기사를 대비하여 예비로 만들고 있는 기사. 그러므로 제0호. 제목이 가진 뜻이 이렇게 풀린다. 창간호 이전의 제호.
「그래요, 책을 한 권 낼 겁니다. 한 저널리스트의 회상록입니다. 우리 신문은 창간하기로 해놓고 끝내 창간되지 않을 신문이지만, 그 신문을 내기 위해 1년 동안 준비하면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는 책이죠.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그 신문의 제호는 <도마니>, 즉 내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부의 슬로건처럼 보이긴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내일 얘기하기로 해요. 아무튼 내가 내려는 책의 제목은 <내일을 알려면 어제를 보라>가 될 것입니다. 멋있지 않아요?」
끝내 창간하지 않을 신문을 기획하는 의도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언론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닌 건가. 그러다보면 언론이 되고픈 이유는 또 뭔가라는 물음이 함께 한다.
어디서부터가 시작되어야 하나. 발단은 마니 풀리테가 되나? 마니 플리테(Mani Pulite)는 깨끗한 손이라는 뜻으로 1992년 2월 17일 당 간부 집에서 거금을 압수수색한 계기로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진 부정부패 척결 작업을 말한다. 대대적인 부정부패의 척결이란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본이 정권을 쥐는 데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을 거라는 기대는 불필요하다는 점이다. 이 당시에 막대한 재력가가 승리했고 언론을 장악했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소설은 신문을 창간하려는 막대한 재력가 콤멘다토르 비메르카테의 뜻에 따라 실무를 담당하는 편집부의 신문사 제작과정을 다룬다.
제0-1호, 제0-2호하는 식으로 12호에 걸쳐 창간 예비 판을 낼 예정입니다. 그 발행 부수는 소수로 제한하되, 기사 내용은 콤멘다토레가 직접 검토합니다. 그런 다음 콤멘다토레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몇몇 인사들에게 그 기사들을 읽어 보라고 권할 겁니다. 그럼으로써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금융계와 정계의 이른바 성역에 있는 거물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죠. 그러면 그 거물들은 신문 창간 계획을 중단하라고 콤멘다토레에게 요청하겠지요. 그 요청에 응하여 콤멘다토레는 『도마니』라는 신문을 포기하고, 그 대가로 거물들의 성역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될 겁니다.
이를 테면 신문 『도마니』는 볼모다. 재력가 콤멘다토레의 세력 강화를 위한 협박용이다. 그렇다면 제0호는 발행되지 않을 『도마니』를 예견한 협박용이다. 이런 제안을 받아들인 시메이 주필로부터 콜론나는 고문으로서 <제0호>를 위해 일한다. 기사가 협박용이 되려면 그 색깔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황색으로 도배될 수밖에 없는. 그러므로 회의에서 논의되는 것은 어떻게 특종을 ‘만들어 내는가’에 중점을 둔 자극적이고 허접한 기사 작성법에 할애된다.
<샤덴프로이데>, 즉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마음이죠. 모름지기 신문은 그런 감정을 존중하고 북돋워야 해요. 그러나 현재 우리는 그런 비참한 사건에 관심을 가질 의무가 없어요. 불의에 분개하는 것은 좌파 신문에 맡깁시다. 그게 그들의 전문이니까요.
요즘은 그런 것만도 아니네요, 라고 말해 주고 싶다. ‘불의에 분개하는 것’은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지나치게 우쪽에 붙어 있는 자들에게는 모두가 좌쪽에 있어 보이는 것일 뿐이며, ‘좌파’가 불의에 분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 제대로 정의되지 않은 불의와 사명감(?)에 따라 좌파 언론이 취하는 기막힌 역할 또한 황색 저널리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정의는 기계적 중립이 아닐뿐더러 불의에 참고 무력했던 자들의 뒤늦은 코스프레는 어제와 오늘의 논조가 다르기에 지속적으로 진정성을 의심하게끔 한다.
어쨌든 소설 속 브라가도초 기자가 실종됐고 마침내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그가 취재하고 있던 기사는 기자 자신의 ‘가설’이다. 무솔리니가 로마 교황청의 도움으로 탈출했다는 것이며 이에 따라 무솔리니의 흔적을 추적한다. 브라가도초가 만나야 할 이들은 교황, 많은 정치가, 마피아, 테러리스트, 프리메이슨, CIA 등등, 무수하다. 그러나 브리가도초는 매춘업계를 취재하다 포주에게 공격받아 살해되었다는 기사가 등장했으니 콜론나로서는 물이 나오지 않는 수도꼭지에도 놀라는 것이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그 자신이 언론계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느니만큼 말이다. 콜론나는 도피했고 결심한다.
“1인칭으로 말하는 것을 포기했고, 이제 남들이 말하도록 그냥 버려두고자 한다.”
어차피 황색 저널리즘을 준비했던 기자로서 그런 종류의 것들을 그만두는 것은 아쉬울 데가 없다. 그러나 조금은 반성하는 자라면, 진실한 보도를 갈구하는 마음이 있는 자라면 이 말이 주는 허탈함은 알려나.
새해가 되었고 올해도 가짜뉴스는 넘쳐날 것이다. 개인방송이 넘쳐나고 있지만 자신이 퍼뜨리는 말의 무게에 대한 자각이 없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럴 의도로 이뤄지는 경우도 많음에도 이것을 언론이 그대로 받아쓰기 하고 있으니 ‘언론인’이라는 명명이 어디에다 정착되어야 할 지 모를 일이다.
<도마니 신문>이자 <제0호>와 같은 기사·뉴스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때때로 가장 보기 싫은 기사·뉴스는 <단독>이 붙은 것일 때도 있다. 어쨌든 오늘은 신년기자회견이 있었고 수많은 기자들을 보는데 웃음이 났다. 올 한해 그들이 작성한 기사의 면면에 대해 자부심을 가질까. 눈감고 귀막고 쓰는 기사에 대한 자괴감을 느낀 적은 없을까. 언론사를 손에 쥐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콤멘다토레 같은 인물의 현실 등장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제법의 재벌이 언론사를 소유하고 있는 나라이긴 하지만 표면적으로라도 정의와 올바름을 추구하지 않은 채 노골적인 황색 저널리즘을 당당히 주장하는 언론사의 존재 이유를 소설을 통해 보면서 왜 이탈리아가 아직도 마니 풀리테가 진행 중인지 알겠다. 우리에게 마니 풀리테와 같은 이름은 적폐청산이 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