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의 모든 것 - 2017년 제62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김금희 외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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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메팅


체스의 모든 것, 현대문학, 2016-12-07.


  한때 체스두기를 좋아했다. 체크메팅! 외쳐대며 즐기던 때가 있었는데 세월 오래 흘렀다고 규칙이 가물가물하다. 장기와 비슷한 룰을 가지고 있는 체스 규칙을 놓고 제법 옥신각신 했는데 누구와 두었는지 어디에서 두었는지 정말 내가 체스를 두기나 했던 건지 그런 체스 장난감을 어떻게 가지고 있었던 건지… 오래되고 묵직한 장기판이 여전히 집에 있는 것을 보면, 장기에 대해서는 생각나는 것이 많은 것을 보면, 장기를 두지 않은지 꽤나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장기룰은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체스는 한순간 잠시 머물다가 사라진 신기루 같기만 하다. 오로지 체크메팅이란 단어만을 남긴. 체크메팅은 나의 말이었을까. 상대방의 말이었을까.

  ‘이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설 속 금화처럼 나는 체스를 두는 순간 오로지 이기기에 몰두했던가. 기껏해야 초등학생이었을 그때 놀이를 즐기지 않고 승리에 집착하고 있었을까. 이십대 국화가 되고픈 이기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이기는 사람’ ‘부끄러운 상태로 그걸 넘어서는 사람’이다. 금화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듯이 행동한다고 여겨지기도 하는 것을 보면 금화는 진정 이기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금화를 바라보는 영지는 “정말 대단히 무심한 애라고 저 무심함은 어딘가 공격적인 데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아리 선후배 사이인 세 남녀의 관계를 영지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 소설에서 이 셋의 관계는 참 미묘하다.

  

선배는 정말 이해가 안 가요. 아니, 감자는 같이 먹으려고 그렇게 해놓은 것인데 어떻게 감자를 혼자 다 먹을 수가 있나고요. 감자는 그런 게 아니고요, 선배 혼자 맛있게 먹고 말라는 것이 아니고 감자는 우리가 다 먹어야 하고 그렇게 같이 먹으면 좋은 건데 왜 감자를, 그러니까 왜 감자를 그렇게 많이 먹느냐고요!


  감자를 두고 울분을 터뜨리는 금화를 볼 때 분명 무심함이 아닌 ‘공격성’이 느껴진다. 묘하게도 이러한 금화의 모습은 ‘노아 선배’를 향할 때가 많다. 자칫 이성적인 호감에 대한 반어적인 행동인 듯이 여겨질 수도 있을 만큼 금화는 노아 선배와 ‘함께’ 하면서 선배에게만  무심하지 않다. 어쩌면 노아 선배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영지의 시선에서는 금화의 ‘무심하지 않음’을 ‘이성적인 관심’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영지는 둘 사이에서 조정자인 듯 보이지만 없어도 무방한 위치다. 영지는 한번도 체스 게임에 등판하지 못하고 체스를 두는 둘을 지켜보는 존재다.


둘은 여전히 체스에 대해 얘기했지만 체스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았고 체스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의지 같은 것만 남아 있는 듯했다. 나는 그 대화를 들으면서 무슨 대화가 저렇듯 열띠면서도 무시무시하게 공허한가 생각했다. 대체 체스가 뭐라고, 저렇게 싸우는가. 우리 사는 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영지의 공허함은 둘의 대화내용이 아니라, 영지가 체스룰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둘 사이에 ‘함께’하지 못함에서 오는 것 같다. 체스가 중요하지 않아 보여도 체스 규칙을 아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체스가 아닌 대화에도 영지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이들에게서 과연 ‘규칙’이란 건 중요한 문제였을까. 금화는 체스협회 표준 규칙처럼 “퍼블릭한 게 아니라 프라이빗한” 저만의 규칙을 내세운다. 표준적인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아 선배는 늘 ‘특정한 힘’에 굴복한다.

  영지의 생각처럼 체스는 우리 사는 거랑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체스가 뭐라고 이토록 상관있나 싶었다. 아닌듯해도 피할 수 없는 규율이 삶을 붙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어떤 형태로도 체스판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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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당한 사람들
토머스 컬리넌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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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상식 때문에…


매혹당한 사람들, 토머스 컬리넌, 비채, 2017.


  이 소설이 주는 매력이 크기에 몇 번이나 영화화되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난 매혹당하지 않았다. 소설 도입부에서부터 시작되는 긴장감이 존 맥버니의 등장에서 시작되었기에 이미 그를 ‘문제적’으로 낙인찍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소설은 전개될 내용을 친절히 알려주었다. 다가올 미래를 알지 못할 때에야 갈팡질팡하게 되는데 그때만 해도 ‘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은 ‘존’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전하는 대신 다른 등장인물의 시선으로, 목소리로 존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존에 대해 잘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하지 못하겠다. 적어도 안됐다라는 생각은 갖기로 했다. 스무살 청년인데다 시작은 전쟁에서의 부상이니까.


그때만 해도 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악이 존재하는지 알지 못했다. 우리 안에서 악이 어떻게 쌓여가는지 우리 중 누구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어떻게 작은 사악한 생각이 다른 사악한 생각 위에 쌓이고, 마침내 우리 안에 얼마나 엄청난 양의 악이 쌓여가는지……. 그러다가 한순간 뱉은 단 한 마디의 고약한 말이 어떻게 우리 마음속의 방아쇠를 당기는지를.


  소설은 1864년 남북전쟁 시기의 미국 버지니아에 위치한 판스워스 여자 신학교를 보여준다. 교장과 교사인 두 명의 자매, 나이가 각각 다른 다섯명의 학생들, 한명의 흑인 노예가 지내고 있는 이곳으로 부상당한 북부 연방군 소속 존 맥버니 상병이 기거하게 된다. 노예해방을 둘러싸고 찬반 입장으로 나뉜 전쟁에서 적지에 낙오된 존은 판스워스 신학교의 구성원들에게 ‘기꺼이’ 도움 받을 자격을 얻는다. 부상당한 다리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지만 구성원들 모두가 존의 회복을 도우며 존에게 관심을 기울인다. 소설은 신학교 구성원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회복해가는 존의 상태를 들려준다.  


“선생님은 아주 행복했던 적이 있나요?”

“있었지. 아주 오래전에……. 하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단다.”

“무엇 때문에 끝났어요?” 어밀리아가 궁금해했다.

“이성과 상식 때문에.”


  행복이 끝난 것이 “이성과 상식을 차렸을 때”일까, “이성과 상식을 버렸을 때”일까. 신학교의 모두가, 한때 존 상병과 함께 하는 시간에서 행복했다면 그들의 이성과 상식은 ‘어떠한 상태’였던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등장인물 모두에게 이성과 상식이 있는가를 묻게 된다. 전쟁은 어떤 형태로든 피폐한 상황 속으로 인간의 사고를 물고 가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이성과 상식은 욕망에 맞추어 존을 해석하고 대한다.

  소설을 덮은 후에 이 책의 제목은 ‘매혹하는’ 사람들이 어울린다 생각했다. “돈과 정조와 목숨까지 그에게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모두는 단 한사람도 수동적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언제든지 존에게 무엇이든 바칠 준비를 ‘철회’할 수도 있었다. 매혹은 당할지언정 사랑은 하지 않았던 판스워스 학교의 여자들은 각각의 결핍과 상처에 대한 위로를 함께 살고 있는 서로에게서 얻지 못한다. 얻으려 하지 않는다. 내면에 가득한 그 결핍은 공공연한 비밀인 채로 그들 각자를 위치지우고 경계지우는 요인이 된다. 그들은 전쟁 중의 판스워스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노력을 ‘존’에게만, ‘존’을 통해서 얻으려 한다. 각자의 필요와 욕망이 존에게 전해지는 순간 적지에서 부상당한 존에게 그것은 권력과도 같은 힘이었을까. 벗어날 수 없는 덫이었을까.  


침입자가 지는 경우도 많아. 한 번은 애벌레가 붉은 개미의 보금자리를 공격했는데 애벌레가 개미한테 매혹당한 건지 아니면 잠깐 방심했던 건지, 개미들이 산산조각나고 말았어. 조그만 개미들이 촉수로 그를 어루만지는 듯했는데 얼마 안 있어 애벌레 꼬리 쪽에서 액체 같은 게 몇 방울 나왔고, 개미들이 그 액체를 아주 맛있게 나누어 먹는 것처럼 보였거든. 그렇게 애벌레 진액을 다 빨아먹고 나서 개미들이 힘을 합쳐 애벌레를 바닥에 파묻어버렸어. 내 눈에는 나중에 먹으려고 그러는 것 같았어.


  폭풍이 치고 난 후의 고요가 뭔 일이 있었던가 싶게 일상을 들이미는 고요가 떠오른다. 소설이 끝난 후에 그렇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 어제와 별스럽지 않은 일상이 되어갈 하루하루가 다시금 비밀과 경계가득한 일상이 흘러갈 것이다. 한때나마 행복한 순간은 있었던가? 이 소설에서 다른 무엇보다 행복에 관한 물음이, 인간의 이성과 상식에 관한 질문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불행을 알게 된 순간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게 불가능해“진다는, 그것은 ”오직 순수한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해리엇의 말을 떠올리며 결코 판스워스 학교에서 행복을 느끼는 존재는 없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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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 제22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강화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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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나’

다른 사람, 강화길, 한겨레출판, 2017-08-29.


  왜, ‘다른’ 사람이어야 할까. 그저 ‘나’이기만 하면 안되는 걸까.

  다른 사람이기를 강렬하게 열망하는 『다른 사람』은 읽지 말까 싶을 정도로 짜증스러웠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오를 대로 오른 짜증이라는 감정이 불편함임을 알았다. 소설속 상황은 마냥 현실같아서 지겨우리만치 그 상황에 ‘또’, 어김없이 ‘또’ 있다는 현실이 불편하고 감정적으로 피폐함을 느끼게 했다. 그러니 책을 덮고 싶을 수밖에.『82년생 김지영』과 마찬가지로 익숙한 상황을 글로 보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소설『다른 사람』. 문득 이 소설을 보면서 환상소설로 빠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나는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걸까.

  단편집『괜찮은 사람』이 확장된 이 소설은 반복적 폭력에 놓인 ‘여성’의 상황과 내면의 목소리를 들춘다. 내면의 목소리는 절대 들리지 않는다. 그들 내면에서만 맴돌기에 절대 타인은 알 수 없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내 감정에 우선하여 의미를 부여하기에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각자 가지는 내면의 목소리는 항상 한사람의 것처럼 같기만 하다.

  소설을 읽다 보면 으레 특정한 누군가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되고 그의 시선을 따라 상황을 보게 된다. 대체로 주인공, 화자의 시선을 따라 상황을 보게 되고 그렇기에 주인공은, 화자는 절대적으로 ‘선’이기를, 되도록 막말을 하지도 않고 타인을 이해하는 언행을 하기를 바라게 된다. 당연한 응원을 주기 위해서. 그러나 진아를 피해자로만 바라보던 시선은 한순간 무너진다. 그것은 진아와 수진이 피해자인 동시에 같은 상처를 받는 이에게는 가해자였기에 그렇다. 진아와 수진 그리고 유리가 겪는 고통은 분노할 수 없을 만큼의 무력함이 흘러 참으로 비참하고 애절하다. 이들은 현재의 고통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는데 어김없이 어머니로부터 전해진 무력화되고 일상화된 폭력에 놓였던 것을 보여준다.


할머니가 옆에 있는 한 수진은 영원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그렇게 열망하고 노력했던 ‘다른 사람’.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우습게 볼 수 없는 사람. 절대 강간당하지 않는 사람. 수진은 단 한 번도 할머니를 원망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수진은 사실 늘 원망했다. 사람들이 그녀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밖에 대접받지 못하는 이유를 원망했다. 어쩌면 바로 그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 바로 그것 때문이다. 사실 수진은 누가 어떻게 해도 상관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술 먹고 한 번쯤 건드려도 상관없다고. 왜냐하면 어차피 쟤는 춘자 딸이니까. 바로 세상의 빚을 모두 짊어지고 있는 애니까!


  피해자들에게 사회가 ‘어떻게’ 했는지를 목격한 이들이 현재의 폭력에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은 오로지 감추고, 감추고, 감추는 것이다. 진아도 수진도 그들 상황에서 오로지 서로에 대한 견제와 미움으로 삶을 버티어내는 모습은 아프게 다가온다. 같은 고통과 상처를 받는 피해자들이 가해자가 아니라 서로를 고통의 근원, 원인으로 돌리며 스스로의 피해를 지우려는, 감추려는 모습은 왜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렀나를 깨닫게 한다.


나도 유리를 그렇게 험담했었지. 그때는 몰랐어.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누군가 나를 학대하도록 내버려두는 마음과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 이 소설은 미투 운동을 생각나게 한다. 마침내 진아가 각성한 것처럼 같은 일을 겪는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야 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해야 함을. ‘다른’ 사람일 필요없이 그저 ‘나’이기만 하면 되는 세상, 그러한 인식들이 사회에 머물기를.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우습게 볼 수 없는, 절대 강간당하지 않는 그런 “다른 사람”일 필요가 없는 그저 “나”이기만 하면 되는 그런 세상이 되기 위해선 필요한 일들을 한창 사회가 시작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보여준 불편한 현실이 피해자들의 각성을 계기로 달라질 현실을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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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소파
조영주 지음 / 해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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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에 대한 반응

붉은 소파, 조영주 저, 해냄, 2016.05.24.


  가끔 생각한다. 싸이코, 연쇄살인, 실종, 미제 사건…이런 단어에 반응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일까. 그 광기에 자극되기 때문일까. 정보가 신속하고 빠르게 전달되면서 전세계의 잔인한 살인사건을 자주 접한다. 뉴스를 통해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 참혹하고 끔찍스러워 하면서 굳이 이런 장르의 ‘이야기’를 찾아 읽으며 즐겁지 않은 그 상황에 빠지는 것. 현실에서는 비극으로 끝난 사건을 애도하면서 범인이 잡히고 살인의 이유가 드러나고 악인은 처벌받는 결말을 기대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고 온전히 범인을 쫓는 추리에 스릴을 느끼는 면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연쇄살인범의 살해 이유와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은 변함없는 클리셰를 보인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탁월한 문체와 구성으로 휘어잡는 이야기가 있고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고 그 범인을 쫓고 있음에도 긴장감이 없거나 무덤덤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자극’의 극대화에만 반응하며 내 몸속에서 잔혹하고 끔찍할수록 반응을 보이는 인자가 있나 섬뜩해지기도 한다. 이 책에서 맞닥뜨린 연쇄살인에 나는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 


  명망있는 스타 사진작가 정석주의 딸이 연쇄살인의 피해자가 된다. 사건은 모두 붉은 소파 위에서 일어났기에 정석주는 붉은 소파를 알아볼 범인을 찾기 위해 붉은 소파를 놓고 기다린다. 붉은 쇼파 위에 앉는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촬영하며 15년 동안 살인범을 쫓는 삶에 올인하던 중 사건현장 사체 촬영을 제안받게 된다. 현장 사진을 찍는 과정에 참여하면서 사진과 카메라를 매개로 사건을 추리·해결해 나가며 15년 전 연쇄살인사건의 진실을 알아내간다.

  사진작가 정석주가 사건을 추리해가는 결정적인 단서는 붉은 소파가 아니라 사진이다. 사진을 찍는 행위, 사진을 찍는 과정, 촬영 사진 등 사진에 관계된 활동을 통해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억과 기억하고 싶은 추억과 마주하고 사건의 진실을 조합한다. 사진은 찰나의 한 순간을 포착한 것이고 찰나의 순간이 지나간 순간에는 그 상황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기도 왜곡되기도 하고, 또한 선명해지기도 한다. 찰나의 순간들.

  정석주에게는 사진이란 인생이다. 사진에 희노애락이 펼쳐진다. 정석주에게 사진은 외면이자 집착, 거짓이자 진실이 된다. 추억과 그리움, 아픔과 상처의 표상이지만 또한 치유의 표상이기도 하다. 사진이라는 매개를 통해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에서 새삼스럽게 ‘전문가’라는 말이 가지는 위엄을 느끼기도 한다. 특정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그것으로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능력이란.

  등장인물은 몇 되지 않는데 모두 의뭉스러워 보였다. 그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드러나고 범인이 드러나는 순간의 느낌은 사실 놀랍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연쇄살인사건이었으니 범인은 역시 사이코일 것이라 짐작했고 사이코가 행한 살인의 이유는 놀랍지 않았다. 카메라는 어떤 물체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기도 하지만 잘 가리기도 한다. 렌즈를 통해 보게 되는 사물, 인물은 맨눈으로 볼 때에 비해 ‘다르게’ 보인다.

  어떻든 소설 속 연쇄살인범에 대해 덜 놀란 것이 그의 행위가 잔혹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정도에 무뎌지고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해서가 아니라 조금 식상해서다. 소설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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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도리 2018-03-24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지고 있는데 아직 못 읽고 있어요...

모시빛 2018-03-26 20:30   좋아요 0 | URL
가지고 있는 책을 다 읽고 나서 읽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특히 추리,스릴러 장르를 좋아한다면 더욱...저는 그렇더라구요..
 
당신의 신
김숨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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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 뮌하우젠증후군을 앓는 당신


당신의 신, 김숨, 문학동네, 2017.


  『당신의 신』에는 「이혼」「읍산요금소」「새의 장례식」세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각각의 단편을 관통하는 공통의 주제는 이혼과 폭력이다. 소설 속 여자들은 모두 이혼을 겪었다. 이혼이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니 여자의 남편들도 이혼을 겪었다. 이혼이란 부부가 겪는 일이지만 남자보다 더 힘겨운 이혼 전후의 여자의 트라우마가 세밀하게 담겨 있다. 그것은 이혼의 원인이 남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혼한 남녀를 대할 때 사람들이 가치중립적이지 않고 ‘이혼녀’에게 더 큰 시선을 두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의 딸들이 이혼을 생각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으로 결과로 만들었다면 그들의 어머니는 끊임없이 이혼을 생각만 할 뿐 실행하지 못한다. 모두에게 이혼의 이유는 어김없이 ‘남편의 폭력’이고 도망치지도, 이혼하지도 못하는 이유는 ‘자식’이다. 한사람에 의해 폭력은 자행되고 그 폭력은 반복되어 되물림된다. 자식을 위해서 이혼하지 못하지만 자식들은 그 상황 자체가 지옥일 뿐이다. 한 사람이 참는 것으로 가정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아이는 자신의 가정을 꾸려서도 그 폭력성을 보인다.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의 도식화는 우스울 정도로 여자는 폭력적인 남편을 만나는 것으로 남자는 그 스스로 폭력적인 남편이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객관적 통계로도 드러난 ‘어머니’들의 모습이자 ‘여성’의 모습이기도 하다. 조금 달라진 세상이라고, 묘사가 있다고 한다면 여성들이 이혼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이제는 이혼함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전자의 상황에서 참고 감당해야 하는 여성의 삶은 이제 이혼 후 감당해야 삶에 대해 세세하게 끄집어내고 있다.

  『당신의 신』속 남편들은 그들이 자식일 때 당한 폭력을 아내들에게 행함으로써 피해자에서 가해자의 위치로 이동한다. 남편의 폭력 때문에 이혼하고 그후에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다 보면 정녕 여성에게 결혼이란 ‘맞아 죽기 위한 계약서’를 작성하는 일만 같다. 결혼은 ‘아내’라 불리며 남편에게 폭력당하는 여성의 존재를 만든다. 이혼한 후에는  이혼녀라는 명명으로 남성들에게 폭력당하는 여성을 만든다. 이혼녀에겐 성희롱과 추행이 당연하다는 듯 성폭력이 뒤따르고 이혼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늘 따갑다.

  최초의 폭력은 어디서 기원한 걸까. 아버지의 폭력을 두려워하고 혐오하던 아들들은 왜 같은 아버지가 되고 마는 것일까. 아버지의 폭력에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어머니를 연민하고 혐오하던 딸들은 왜 폭력당한 채 살아가는 것일까. 왜 이혼을 하고서도 삶을 온전히 버티어내는 것에 힘겨워할까. 제 폭력에 힘겨워 하는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자 「이혼」속 남편은 시를 쓰는 아내를 향해 말한다.


“네가 날 버리는 건 한 인간의 영혼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 가지야. 그러므로 앞으로 네가 쓰는 시는 거짓이고, 쓰레기야.”


  새장 속 십자매를 향해 ‘죽어’라고 말하는 폭력당한 소년의 한마디 말은 십자매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이 폭력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음을 곁에 두고 영혼이 파괴된 채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게 한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 자들이 하는 저런 말에 어떤 대꾸를 해야 할지 좋을 런지…. 여성을 ‘모성’이라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신처럼 받드는 그들의 이율배반적인 행태들은 환멸스럽다. 그들이 정의하는 ‘모성’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모성(母性)이 어머니의 것이라면 남편들은 왜 아내에게 어머니의 것을 보이기를 강요하는가.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고 받아내는 제 어머니의 모습을 아내에게 요구하는 그들, 나약함을 가장하며 더할 수 없는 영혼 파괴자의 신인 그들이 제 영혼의 안전을 염려한다. 제 영혼의 안전을 그들이 파괴한 것에 대고 찾는다. 이에 대해 아내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만 남편의 말 속에 갇히고 만다.


“나는 당신의 신이 아니야.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온 신이 아니야. 당신의 신이 되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 게 아니야.”


  결혼은 누군가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이루기 위한 선택이다. 그래서 작가는 행복하지 않은 결혼에 맞서 “이혼이 불행이 아니기를 바라”고 바란다. ‘이혼’이 불행인 것이 아니라 이혼을 하게 된 원인 속에 이미 불행이 있다. 가정폭력이라는 이름, 그 떨치지 못한 폭력과 불행의 트라우마가 ‘결혼’을 통해 재생산되는 현실이다. 그런데 명쾌하게 ‘이혼’이 결혼으로 인한 불행을 단절시키는 것을 끝나지 못함이 얼마나 크나큰 비극인가. 아내는 남편들을 위한 신이 아니다. 아내는 남편들의 ‘어머니’도 아니다. 그들의 ‘폭력’은 아내가 ‘신’이 되어 어루만져주고 ‘신’이 되어 참아줘야 하는 것이 아니다.

 

  루게릭병으로 인한 신체장애를 가지고 살았던 스티븐 호킹이 사망했다. 천재 물리학자로 칭송받은 스티븐 호킹의 사망 소식에 문득 소설 속의 저 말이 떠올랐다. 25년간의 결혼생활이 이혼으로 끝난 후 스티븐 호킹이 재혼한 사람은 그를 돌봐주던 간호사 일레인이였다. 신체적 고통과 함께 이혼으로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호킹 박사를 간호하고 돌봐주며 호킹 박사의 영혼을 구원하는 존재처럼 행동하던 일레인. 그러나 일레인은 호킹 박사에게 지속적으로 폭력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을 앓는 일레인은 호킹 박사에게 ‘신’이 되기 위해 결혼한 것일까. 그 자신은 그렇다고 생각했을까. 일레인처럼 『당신의 신』속 남편들이 대리 뮌하우젠 증후군을 앓는 환자들 마냥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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