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의 유령들 - 제2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황여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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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기억

알제리의 유령들, 황여정, 문학동네.


  마르크스가 독일 화폐 모델이 되었다. 통용되기 위해선 가격이 있어야 하지만 0유로. 자본과 적대적이었던 마르크스를 충실히 대변하는 기념 지폐다. 이 세상에서 참 불편한 이름의 대표격이기도 한 마르크스의 얼굴이 10만원권 지폐에 그려진다면 마르크스에게 가지는 불편한 시선들이 거두어질까 궁금해진다. 안타깝게도 마르크스가 한국 지폐 모델이 될 리가 없다. 특정 정당이 거품 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쨌든 마르크스는 수많은 이들의 경외의 대상이기도 하면서 삶을 힘겹게 만든 탁월한 존재였다. 히틀러와는 차원이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현재진행형이면서 히틀러급으로 반응하기도 하다. 그리고 소설『알제리의 유령들』에서도 사람들을 힘겨운 삶으로 이끄는 존재감을 보여준다. 연애소설처럼 그려진 징과 율의 이야기가 어떻게 마르크스에게 가 닿는가. 가볍게 단문으로 쳐내는 글들은 마르크스가 지닌 존재감처럼 묵직한 이야기를 전한다. 과연 이 이야기를 믿어도 좋은가,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연극이 끝난다. 마르크스가 쓴 유일한 희곡의 막이 오른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이야기는 유령을 마주한 듯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린다. 몇 번이나 반복재생된 희곡 <알제리의 유령들>이 마르크스 저작이란 이름을 달고서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아니, 마르크스란 이름만 보면 부르르 떠는 권력이 존재하는 건가. 시절의 음률을 함께 나눈 관계들이 고통받고 상처받으며 서로에게 파괴된 음들을 던진다.


시대는 운명을 다한 것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흔적을 추슬러 그것들을 잊지 않게 만드는 건 언제나 몇몇의 개인들이며, 그들조차도 기력이 다할 때가 온다. 비단 연극판의 일만은 아닐 것이었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현실은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적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기적을 만드는 건 언제나 사람이며, 그래서 결국엔 헷갈리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는 운명을 다했나. 다해가는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더욱 민감하게 이 단어들에 반응하는 나라로 대한민국만한 데가 있을까. 대학생들의 연극적 상상력이 만든 연극을 놓고 진실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권력이 원하는 이념의 잣대로 존엄을 말살하고 생명을 파괴하던 시대는 소멸되었나. 새로운 흐름들이 분명 이어지고 있으니 달뜨는 마음이야 당연하지만 좀처럼 편하게 받아들이기엔 여전한 이념용 말들이 곳곳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도 듣고 있어야 한다. 종북과 좌파라는 단어만 붙이면 진실은 상관없는 이들이 있으니 세상은 얼마나 살기 좋은가. 진실에 눈감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사는 이들의 세상은 얼마나 좋으려나.


모든 이야기에는 사실과 거짓이 섞여 있네. 같은 장소에서 같은 걸 보고 들어도 각자에게 들어보면 다들 다른 이야기를 하지. 내가 보고 듣고 겪은 일도 어떤 땐 사실이 아닐 때도 있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 채 겪었거나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거짓이 사실이 되는 경우도 있지. 누군가 그걸 사실로 믿을 때. 속았을 수도 있고 그냥 믿었을 수도 있고 속아준 것일 수도 있고 속고 싶었을 수도 있고. 한마디로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애초에 자네가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거야. 그렇다면 애초에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니 판단을 안 할 건가?


  실제인지 허구인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헤아리는 동안 거짓이 진실을 파괴하고 진실이 필요치 않은 형태를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소설은 보여준다.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것도 사람 진실에 상관없이 구는 것도 사람. 그리하여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은 사람. 그 잔인하고 처절한 유린에 유령처럼 생을 배회하는 일들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음 세대에게도 이어져 생에 긴 파국을 남기고 쓸쓸함을 남긴다.


기억으로 인해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이 변해도 계속해서 자기를 일관된 자기로 느낄 수 있고, 따라서 인간의 가장 큰 피로감은 바로 그 자기감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는 데서 오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들은 알제리에 갇힌 것이 아니라 자기라는 폐쇄된 시간 속에서 빠져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는 아니었다. 자유는 역설적이게도 다시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얻어질 수 있는 것, 자기가 이전의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자기로 존재했던 기억을 가지고 다시 이전의 자기로 합류할 때 비로소 자기와 비자기에 폐쇄되었던 자기가 자기이기도 하고 자기가 아니기도 한 자기가 될 수 있고, 그때 경험되는 것이 자유였다.


  부모들이 겪은 일들로 어릴 적부터 잘 지내온 징과 율이 오랜 시간을 서로 그리움을 간직한 채 서로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이 회복되지 않은 상처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도 그토록 세상을 서로를 배회하고만 있는 것은 물음을 갖게 했지만 생이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니까. 부모들처럼 징과 율은 자기라는 폐쇄된 시간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인지도. 시대가 겪은 기억이 세대에게 전해질 때에 그것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무한한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종북과 좌파라는 두 단어로 진실과 거짓에 공간에 빠지는 이들이 다음 세대들의 자유를 왜곡시키고 말살시킬 때마다 청춘의 세대들의 정신이 회복되는데 무한한 시간이 필요로 된다는 아는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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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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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방은 없다

서른의 반격, 손원평, 은행나무, 2017-10-23.


  1988년은 88올림픽으로 규정되는 해이다. 다른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은 채 올림픽이 그 해를 잡아먹었다. 언제부턴가 특정 해에 태어난 이들이 그들만의 하소연, 푸념, 체념, 분노들을 쏟고 있다. 그 해에 일어난 어떤 특정한 사건들로 인해 삶이 더욱 어려워졌다고. 그들에게 따라다니는 재난들이 있다고. 그래, 그래, 그 해에는 그런 일이 있었구나, 힘들었겠구나 싶지만 어떤 사건들이 일어난 해 특정 세대만이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기에 사건만이 다를 뿐 그들의 외침은 같다. 한줄로 줄여, 살기 힘들다는 외침이니까.

  4.3평화문학상 수상작인 이 책 서른의 반격에선 88년에 태어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들 88년생이 서른인 2017년의 현재에 그들의 삶은 힘겹고 그렇기에 그들의 연대는 싹튼다. 서른의 그들은 가벼운 한탄에서 진중한 분노로 현재를 말한다.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현실, 이상은 높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엄마의 힘겨운 투쟁으로 ‘추봉’이 아니라 김지혜라는 이름을 호적에 올린 김지혜의 현재 직업은 아카데미의 인턴이다. 인턴 역할이란 복사와 강의용 의자를 정리하는 일과 같은 잡무다. 엄마의 한방같은 강렬한 투쟁없이 김지혜는 언제나 속으로만 들끓는다. 업무를 지시하는 상관의 부당함에 대해. 작고 작은 일들 하나하나에서도 설움과 불편함, 부당함을 느끼는 일상을 견디고 있을 때 자신과는 다르게 항변하는 이의 목소리를 듣고, 보는 것은 충격을 준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질걸요? 억울함에 대해 뒷얘기만 하지 말고 뭐라도 해야죠. 내가 말하는 전복은 그런 겁니다. 내가 세상 전체는 못 바꾸더라도, 작은 부당함 하나에 일침을 놓을 수는 있다고 믿는 것. 그런 가치의 전복이요.


  한사람의 시작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아카데미에서 만난 네명은 '을‘의 삶을 분개하며 점차 굴복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부당한 권위를 이용해 세상을 뻣뻣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고 면박을 주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그들은 움직인다. 서른살 동갑 규옥의 힘찬 의지에 힘입은 네명의 행동은,   퍼포먼스 같이 보이기도 하는 그들의 반격은

반기일까 반항일까. 놀이인가?


세상은 경직돼 있고 모두가 무기력증에 빠져 있죠. 난 반기를 들어보고 싶어요. 치기 어리다고 욕 들어도 좋으니 적어도 반항을 해보고 싶다고요. 역사가 말해줬듯 급진적인 혁명은 실패할 겁니다. 세상은 점점 팍팍하고 딱딱해지고 있어서 겉으로 보이는 움직임은 통제되거나 검열되니까요. 난 통제나 검열이 불가능한 일들을 해보고 싶은 겁니다. 재미있게, 놀이처럼 말이죠.


  이런 행동을 통해 그들은 재미와 통쾌함을 느낀다. 부당함에 속만 끓이며 무력하게 대꾸한번 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함께 하기에 힘을 낼 수 있었고 반란을 행하는 하나하나에서 활력을 얻는다. 다만, 이런 그들을 지켜보는 난 활력을 얻지도 재미를 느끼지도 못했다. 이런 행동들로 구치소에서 밤을 지세우고 난 후 “하찮아서 다행”이라 말하는 지혜의 목소리가, 처음부터 반란을 꿈꾸며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세웠던 규옥의 목소리가, 그 목소리에 이끌려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동했던 지혜의 목소리가 헛웃음 짓게 했다. 반란의 방식이, 이렇게도 허무해져도 되는가 싶은 기분이었다. 그들이 재미처럼 반항을 하는 것과 부당함에 항의하는 것이 별개의 일인 것처럼 되는 것이 안타까이 느껴졌다. 또한 일상에서 겪는 작은 부당함에 정녕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현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서, ‘젊은’ 세대의 합리성이, 규율에 대한 거부가 젊은 세대를 규정하던 것이었음을 생각하면서 씁쓸했다.

  부당함과 불합리함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갑’과 ‘을’의 문제라고 하기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고 하기엔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내는 자의 위치를 규옥으로 정했을 때 지혜가 느끼는 것처럼 일종의 배신감과 허탈함이 들 수밖에 없다. 마치 다른 존재인양 지혜와의 동일선상에 있던 규옥의 위치는 달라지게 되고 부당함에 대한 반격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규옥의 의견은 ‘합리성’ ‘올바름’의 승리가 아니라 태생적 갑의 위치가 있음을, 그것이 개인의 주장을 더욱 힘있게 낼 수 있는 위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거기에다가 규옥의 의견을 동조했던 것에 ‘이성적 끌림’을 더할 때 사실상 그것이 가져올 결말에 대해 예상이 가능하게끔 여겨지게도 된다. 결국 지혜의 스스로의 통렬한 자아반성과 의식을 촉구하는 결말로 나아가는 이야기의 결론도 충분히 예측가능하다. 지혜가 또다른 지혜에게 뒤늦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던 것은 규옥에게서 얻은 용기의 힘일까, 인턴에서 ‘정규직’이 된 힘일까.

  반전과 반란이 있던가. 현실을 생각할 때 서른의 반격에 박수를 보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너무나 큰일들을 겪기에 소설속에 나온 이 정도를 너무 무심하게 별일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것이 통쾌함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고, 이러한 구조를 그대로 흘러가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는 걸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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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리커버 특별판)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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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가 외로울 때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문학동네, 2018-03-08.


  출간된 책은 너무도 많고 그중에서는 읽었다고 생각되는 책이 있다. ‘괴물‘ 소설에 영향을 미친  <프랑켄슈타인> 도 그중 하나다. 어릴적 문고판으로 읽었다거나 다른 책들을 통해 수없이 언급되어 굳이 읽지 않아도 그 줄거리와 내용을 잘 안다고 생각한 <프랑켄슈타인>인데, 새롭게 특별판이 나왔다한들 내용이 다를 리 없을 터인데 왜 이번에는 <프랑켄슈타인>에 끌렸을까. 하얀바탕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청록색 커다란 바위덩어리 같은 표지가 눈길이 갔다.

  결론적으로 안다고 생각했던 <프랑켄슈타인>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괴물이 등장한다는 것 말고. 그러니 괴물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는 것도 유혈이 낭자하며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가며 날뛰는 괴물 이미지와 거리가 멀다는 것도 알았으니, 나는 이 소설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몰랐던 것을 보상하는 것마냥 여러 갈래의 생각이 들었고 1818년에 씌어진만큼 고전적인 느낌이 가득했지만 그 고즈넉함이 오래남았다. 이 소설은 프랑켄슈타인과 그가 창조한 피조물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독백하는 듯이 펼쳐낸다.

  어쩌면 프랑켄슈타인이라 이름 붙여졌을지 모르는 이 존재와 작가에 대한 연민이 먹먹함을 자아내는 이유일지 몰랐다. 책이 등장한 순간부터 오랜 세월, 최고의 괴물로 상징된 이 존재에 대한 변명도 해주고 싶었다. 커트 보니컷은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에서 ‘독가스, 탱크와 비행기, 화염방사기와 지뢰, 가시철조망’같은 발명품이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어째서 <프랑켄슈타인> 은 끔찍한 괴물, 악마의 대명사가 되었나. 그것은 이름도 부여하지 않은 창조가가 그렇게 명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화학기술을 통해 새로운 창조물을 만드리라 고무되었던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열정에 힘입어 피조물을 만든다. 그가 죽음과 시체에서 뽑아내어 창조한 피조물은 바로보기 끔찍할 정도의 모습으로 등장했고 곧, 프랑켄슈타인은 이 피조물을 외면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이 피조물이 탄생한 순간부터 참혹하고 끔찍스럽게 여겼다. 그가 생각한만큼의 “아름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을 동원하여 끔찍스럽고 무시무시한 얼굴을 상상해보려 한다. 존재의 본질은 외형이 되는 것일까.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과학적 지식에 대해 회의하며 끔찍스러운 괴물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제 피조물을 버리고 살지만 그가 창조한 피조물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외형을 창조했지만 이 이름없는 피조물은 추위와 허기를 견디며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식과 언어를 습득한다. 또한 인간의 정, 따스함, 온기, 애정이라는 감정을 알아가고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받기를 갈구한다. 인간적인 교감에 대한 욕구는 극지방을 탐험하는 로버트 월턴 선장이 보낸 편지를 볼수록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 느꼈을 외로움의 크기가 얼마큼인지 느낄 수 있다.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채워지질 않는군요. 지금 이 순간 그 부재는 무엇보다 혹독한 불행으로 느껴지네요. 저는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마거릿 누님. 성공에 대한 열의로 뜨겁게 달아오를 때 환희에 동참해줄 이도 없고, 실망감에 시달릴 때 쓰러지지 않게 붙들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물론 제 생각들을 종이에 적을 수야 없지요. 하지만 그것이 감정을 소통하는 데는 썩 훌륭한 매체가 아니지 않습니까. 공감해줄 사람이 동행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바라보면 눈빛으로 화답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프랑켄슈타인에게 괴물로 지칭된 이 괴물은, 어떤 악의도 가지지 않은 채 스스로 학습한 지식을 통해 인간 삶에서 살아가야 할 것을 알아간다. 적어도 어떤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악한 행동을 하지 않은 존재였다. 스스로 악한 존재일 수 없다. 하지만 존재 자체만으로, 아니 외형적인 이유로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 존재가 된다. 피조물이 눈먼 노인으로부터 어떤 배척도 당하지 않고 지식과 진실한 감정으로 공감과 소통을 얻는 모습은 외형을 보자마자 ‘악’으로 규정하는 사람들과 대비된다.

  슬픔과 괴로움 가득한 이 생명체의 절규를 프랑켄슈타인은 끝끝내 외면했다. 오직 외모가 끔찍스럽다는 이유로 악마로 규정하고 그 행동의 결과를 두고서 ‘악마’의 당연한 행태라 수긍한다. 끔찍한 생명체를 만들었다는 죄의식에 가득 차 방황하는 프랑켄슈타인은 자기연민에서 더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룰 없는 과학기술을 활용해 생명체를 창조하였지만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다. 파괴하려 하지도 보살피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많은 나날 죄책감과 자기연민만을 끌어 안은채 외면하고 도망다니는 것이 프랑켄슈티인이 하는 일이다. ‘외롭다’는 말을 끝끝내 외면한다.

  그 생명체는 먹을 것을 달라 하지 않았다. 옷을 만들어 달라 하지 않았다. 집을 달라 하지 않았다. 금전적이고 물질적인 그 무엇도 원하지 않았다. 영혼에 온기를, 자신을 바라보는 눈에 좀더 따스함을 주기를 원했을 뿐이다. 피조물이 프랑켄슈타인에게서만이라도 외면받지 않았다면 의지를 가지고 살인을 할 수 있었을까.

  처음부터 프랑켄슈타인에게 피조물은 악마 그 자체였기에 그 존재가 하려는 모든 일들은 악의 행동이 된다. 존재 자체가 악이기에 절대로 믿을 수 없다. 피조물은 모두가 자신을 외면하고 끔찍해 하는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오로지 자신과 같은 생명체와 함께 하는 것만을 바란다. 이들의 교환조건, 거래는 성사되지 않는다. 프랑켄슈타인은 끊임없이 인류애, 인류의 구원이라는 대의를 강조한다. 인류를 위해 프랑켄슈타인은 피조물이 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없다. 피조물이 계속적으로 피조물을 낳을 것을 생각할 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인류애, 그가 생각하는 책임감이란 피아의 구분이 명확한 것이었다.

  악의 본질이 무엇일까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켄슈타인에 의하면 피조물은 처음부터 악이었는데, 어째서 피조물은 삶의 규율과 인간적인 감정을 형성할 수 있었을까. 결국 악한 행동이란 상대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들. 자신을 향한 수많은 사람들의 혐오는 피조물에게 외로움과 고독만을 안겨주지 않았다. 분노와 절망을 더불어 주었다. 애정을 갈구하고 주려 했던 것만큼의 애정을 피조물이 받을 수 있었다면 그가 홀로이 깨달은 지식과 선한 감정의 기운 속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메리 셜리는 열여덟에 이 책을 썼고, 자신의 아이를 잃었고, 그해에는 인도네시아 자바 군도의 탐보라 화산이 폭발했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고 화산재로 인한 기근에 시달렸다. 이때에 구상하고 생각했던 이 괴물 이야기의 내용을 가만히 보면 모든 것이 메리 셜리의 삶과 오버랩된다. 괴물과 광기는 이상하게도 이 화산 폭발과 같은 열기를 준다. 뭔가 덥고 습하고 끈쩍끈적함을. 그러나 이 소설은 극지방에서 시작되어 극지방에서 끝이 난다. 해빙속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피조물과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은 얼음의 촉감과도 같은 차분함속에 있다. 광기와 흥분과는 다른 느낌을 계속 갖게 되는 것이 그 이미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얼음과 시리게 차가운 북극의 이미지가 이 비극적 생명체들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끔찍스럽게도 외로워하는 이름없는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물이 지식을 습득하지 않고 언어를 익히지 않았다면 덜 연민했을까. 그런 지식과 감정들이 살아감에 쓸모없었음이, 효용되지 않았음이 안타까운 것일까. 아예 처음부터 야성의 동물적인 형태로만 존재했다면 쉬이 괴물이라고 악마라고 생각하기가 쉬웠을까. 문득 내 안의 편견과 얕은 지식으로 내가 바라보는 ‘누군가’를, 많은 타인들을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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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너 하우스
안젤라 플루노이 지음, 문동식.엄성은 옮김 / 시그니처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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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중독


터너 하우스, 안젤라 플루노이, 시그니처, 2017-08-09.


  미국의 공업도시 디트로이트에 정착하며 살아가는 터너 가족의 이야기는 새삼 가족이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2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해 돈을 벌기 위해 작은 시골마을 아칸소로부터 대도시 디트로이트로 건너온 프란시스 터너와 비올라 터너 부부에게는 열 세명의 자녀가 있다.

  열세명의 아이가 있는 가정의 이야기는 한권의 책에 그들의 이야기가 다 못 실렸을 정도이다. 그들이 자라온 이야기, 그리고 과거의 이야기, 한 명 한명의 현재 살아가는 이야기를 제대로 쓰려면 끝이 없을 것만 같은 터너 하우스엔 이제 누구도 살지 않고 텅 비어있다. 이 텅 빈 집마저도 처분해야 할 상황에 놓인 열세명의 형제들은 집을 처분하는 방법을 두고 서로 다른 의견으로 대립한다. 집은 시세가 고작 4천 달러지만 걸린 빚은 4만 달러이니 의견은 분분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이 그 집에서 성장하면서 추억하는 정도에도 차이가 있기에…. 

  심리학자 아들러는 출생순서별 특징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했다. 그런 아들러가 살아 있다면 이 열 세명 아이의 성격을 분석해달라 하고 싶지만 아들러의 논문에도 열세명까지는 분석되어 있지 않을 것이다. 대체로 첫째에 관해서는 책임감을 이야기하는데 터너가의 장남 프란시스 터너, 찰스 또는 차차로 불리는 첫째 역시도 모든 일을 도맡아 하려한다. 이런 책임 중독을 가지고 있지만 차차가 보기에 터너가의 사람들은 빠짐없이 ‘중독’증상을 가지고 있다. 둘째 프란시스는 음식과 영양과 건강, 부엌 도구에 중독되어 있고, 로니는 오십이 넘어서도 헤로인에 중독되어 있다. 트로이는 성공, 쌍둥이 말린과 비올라는 일, 막내 레일라는 도박 중독이다. 차차의 아내 티나는 어떤가. 그녀는 종교 중독이다.

  이렇듯 다양한 상황에 있는 열세명의 장남은 여전히, 환갑이 된 나이에도 책임감을 떨치지 못한다. 그것은 차차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유령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어린 시절 창문으로 들어온 유령에게 펀치를 날리던 차차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여전히 나타난 유령 때문에 의사 앨리스에게 치료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차차가 과도한 장남의 무게에 짓눌려 있음을 알게 된다.


프란시스 같은 소년이 유령을 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죄로 너무 젊은 나이에 아버지를 땅에 묻었고 어머니는 떠나 계셨다. 두 분 다 잃고 얼마 되지 않아 유령이 보이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에 바지를 끌어올려 입고 맨발인 유령이. 프란시스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었고 사진도 없었기 때문에, 이 유령이 아버지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갈망이 한없이 깊었던 그였기에 어떻게 다시 찾아왔냐고 물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만일 유령을 간청해서 저세상에서 불러올 수 있다면, 어린 프란시스는 그것을 해낸 것이다.


  차차가 가족 모두가 중독되어 있다고 보는 것처럼 터너가의 자녀들은 모두 삶의 어려움 속에서 가치를 상실한 채 위안을 받고자 하고 있었다. 레일라가 이혼하며 홀로이 사는데 대한 외로움과 힘겨움 속에서 도박을 하며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고 위안을 받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각자 삶의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할때 차차는 유령에 매여 있었다. 어린 시절 딱 한번 본 그 유령에게 말이다. 유령을 보고 싸우기까지 한 차차는 가족에게 존경을 받았고 그 존경을 받기 위해 또한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았다. 그렇기에 그 자신의 개성이나 특별함을 누리지 못한 상실감이 뒤늦게 생긴다. 다시 유령을 봤다는 것은 일종의 두려움이기도 했지만 사실, 이러한 상실감 속에서도 유령을 보았다는 경험이 자신을 특별하게 해주는 것이었음도 안다.

  프란시스 터너 가족이 전쟁을 넘어 시골마을에서 공업도시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겪은 일들은 우리나라의 전쟁 전후, 일자리를 위해 도시로 이주하는 과정들을 떠올리게 한다. 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몰락이 지속되는 환경 속에서 터너가의 가족들 모두 살아가기 위해 움켜 쥔 것과 버린 것들이 있다. 스스로 버리게 된 것들과 타인에 의해 상황에 의해 뺏긴 것들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욕망이나 꿈이다.


흑인들의 문제가 뭔지 아세요? 손해를 볼까 봐 그냥 포기하는 거예요. 그리고는 우리가 사는 도시에 대해서 백인들이 알아서 뭔가를 하겠거니 믿는 거죠.


  ‘적당히’를 모르는 터너집안 사람들 속에서 차차는 ‘중독이 자신을 망가뜨리게 두진 않겠다’ 다짐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매달리지 않겠노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그 자신은 “유령의 존재를 빌어 삶의 목적을 정의할 만큼 불쌍한 인간이 아니다.”

  삶에서 목적의식을 잃고 방황하는 터너집안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같은 상실감을 내내 겪는 듯했다. 현재의 상황을 만들어낸 과거의 이야기에서부터 쓸쓸한 느낌이 줄곧 따라오는데 그것은 그렇게 처음부터 부여되어 있던 잃어버린, 놓쳐버릴 수밖에 없던 나 자신을 위한 꿈과 희망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마냥 가족을 위한 ‘희생’을 추켜세울 수는 없음을. 세월이 변해가면서 당연하게 맞닥뜨리는 세대 차이와 삶에 대한 관점이 가져다주는 가치의 차이. 무엇보다 자신 스스로가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 어느 순간에라도 자아를 잃게 되는 일이 생겨나리라는 것을 터너 하우스에서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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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 2018년 제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홍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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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문학사상사, 2018-01-18.


  나이가 들어가면서 발랄한 문장보다 무심히 파고드는 묵직한 문장에 마음이 오래 머문다. 패스트푸드를 맛깔나게 먹다가도 된장찌개나 김치찌개를 기어이 찾아서 먹는 날 같은. 단편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 수상작은 저녁쯤이면 찾게 되는 찌개 같다. 이야기나 배경의 색다름이 아니라 익숙함이 주는 묵직함에 빠지게 된다.

  각각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수록되었는데 동일한 주제로 글을 쓴 것만 같았다. 각 작품마다 특정한 기억에 사로잡힌 존재들을 보는 듯했다. 기억에 잡히어 갇힌. 그 기억은 마냥 행복하고 좋은 감정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고달픈 현실의 회피로서 자리하는 기억쯤으로 여겨진다. 기억이란 언제나 현재의 일도 미래의 일도 아니니 지난 시간을 돌아볼 땐 언제나 해결치 못한 마음을 건들일 것이다.

  대상 수상작 손홍규의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는 “청년의 어깨에 내려앉았던 늦은 오후의 설핏한 햇살 한 줌”이라거나 “저녁이 기지개를 켰다”는 문자이 주는 해질 무렵의 나른함과 쓸쓸함이 한껏 어리어져 있다. 한껏 지난 시절을 생각하는 불한당 무리들의 현재는 그 과거가 차곡차곡 쌓이어 만든 현실이다. 지금 그들은 기억 어딘가를 돌며 되돌릴 수 없는 그순간의 기억에 빠진다. 되돌아보는 삶은 어찌 후회가 붙지 않는 것이 없는지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울부짖는 마음과 같다.


누군가를 상실한 사람들이 가장 비참하게 돌이켜보는 건, 그이를 상실할 줄 몰랐기 때문에 무심코 떠나보내던 순간의 자신이었다. 갔다 올게 하는 목소리에 응 하고 무심히 대답했던 자신에게 왜 그때 직접 배웅을 해주지 않았는지, 손 한 번 잡아보지 않았는지, 미소를 지어보이지 않았는지,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주지 않았는지, 그토록 사소하기 짝이 없는 행위를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하지 않았는지를 무섭게 따져보기 마련이었다. 청년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후회가 잡초처럼 자라나 무성했을 테고 마음에 드리워진 빽빽한 그늘이 빠져나와 주위에 그림자로 드리워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한때는 꿈이 없다라는 말이 그렇게나 쓸쓸하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꿈을 꾸었다는 말이 더 쓸쓸하게 느껴진다. 꿈이 없음은 달라질 수 있음을 내포하지만 꿈을 꾸었다는 그렇지 않음을 이미 종결된 느낌을 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을 지나니 어느 순간 꿈을 포기하기 위해 애쓰게 되어버렸다.”


  정지아의 <존재의 증명>은 기억상실증인 남자가 등장한다. 기억을 상실한 사람이라면 당연하듯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하기 마련이다. 도대체 낯설기만 한 자신이기에 행동 하나도 자연스러울 수 없다. 나에 대한 타인의 기억과 그들의 말 한마디에 나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그들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 그럼에도 무엇이든 의심스럽기만한 그때에 취향이 자신의 본질을 알려주리라 믿는 남자를 보며 이상하게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정찬의 <새의 시선>과 조해진의 <파종하는 밤>은 각각 용산 참사 사건과 산업화의 폐해인 수은중독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사건의 진실을 새로이 기억하는데 카메라가 사용된다. 각각 사진과 다큐멘터리로 그날을 구성하고 기억한다.


정주는 문득 러시아워에 어깨를 부딪치거나 서로 발을 밟고 밟히는 사이였던, 다시 스쳐 갈 일 없으며 형상이 떠오르지 않는 수천수만의 얼굴들이 그리워졌다. 누구도 정주를 알지 못하며 정주 또한 그들을 모르는 세계에서의 불안과, 서로에 대해 잘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나 실상은 아는 것이 없는 세계에서의 안식 가운데 선택을 요하는 문제에 불과했다. 환멸과 친밀은 언제라도 뒤집을 수 있는 값싼 동전의 앙면이었고, 이쪽의 패를 까거나 내장을 꺼내 보이지 않은 채 타인에게서 절대적 믿음과 존경과 호감을 얻어 낼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구병모의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의 문장을 생각하면서 기억이란 마냥 편치 않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했다. 기억이란 기억하고픈 대로 기억하려 해도 명백한 사실을 떠올리게 하기에, 기억 속에서 나의 존재를, 내 삶을 절대적으로 호감으로 구성하려 해도 절대로 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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