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라는 소설 1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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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혼의 이유

결혼이라는 소설, 제프리 유제니디스, 민음사, 2017.


  “결혼해줘”

  “싫은데?”

  밤새 결혼하기 싫다고 외쳐대다 깨어났을 때 뭐 이런 어이없는 꿈에 시달리나 했다. 머리맡에 놓인 책을 보고서야 알았다. 『결혼이라는 소설』속 청혼하던 장면이 꿈으로 들어왔다는 걸. 꼼 속의 내 외침은 매들린에게 가 닿지 않아 매들린은 끝끝내 결혼하고야 말았다.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미들섹스』와 『처녀들, 자살하다』를 재밌게 읽었기에 집어든 책은 두 권만큼의 흥미는 덜했음에도 꿈에까지 찾아들 만큼의 인상을 남기긴 한 건가.

  1980년대 대학생 매들린, 레너드, 미첼의 ‘결혼’에 관한 관점과 그들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주된 줄거리다. 각자의 전공에 맞추어 공부를 하고 졸업을 앞두고선 진로를 고민하며 사회에 발을 내딛는 이들 세 청춘의 인생은 생각해야 할 것이 많다. 그 많은 생각거리, 고민 중 주요하게 차지하는 것엔 사랑과 결혼이다. 특히 매들린은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책속에서 결혼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고 현실에 대입한다. 하지만 매들린이 진중하게 읽은 책들에서 과연 그녀가 삶의 방향을 잘 찾아나갔는지는 모르겠다. 애당초 ‘영문학은 무엇을 전공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전공하는 학과’라고 생각한 매들린이 취업대신 선택한 대학원 진학 실패는 당연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독자의 입장에선 매들린이 영문과를 선택함으로써 읽게 된 결혼과 사랑에 관한 책과 문장들이 각인된다. 

  낭만적 사랑과 결혼을 꿈꾸는 매들린의 애정 대상은 레너드와 미첼이다. 능력 많은 레너드는 또한 많은 매력을 가진 남자로 보이지만 비관적이고 피해의식을 가지고 우울증으로 힘들어하고 있다. 미첼은 다소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한 인물로 부각된다. 그런 그이기에 현실에서 부닥친 수많은 경험을 통해서 생각들을 다져나가게 되는 것이 그의 성장을 돕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그가 겪은 일들은 당황스러운 것도 많지만 스스로 선택한 여행에서의 깨달음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미첼에게 현실적인 용기를 주는데 주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확고한 매력을 가진 레너드의 저 끊임없는 우울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자신의 길을 잘 알고 진취적으로 행동하는 듯해 보인 레너드의 정신적인 방황은 그래서 안타까이 여겨진다. 미첼과 매들린의 약간의 생각없음은 현실과 맞부딪치면서 강단있게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한 인간의 마음 속 깊이 자리한 상처, 그 우울의 깊이가 메꿔지는 것은 현실적인 맞부딪침으로써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그것이 마냥 ‘사랑의 힘’으로 극복된다는 것 또한 환상일 것이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매들린은 한 사람을 선택해서 사랑과 결혼으로 이른다. ‘모든 문장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사랑에 빠지는 것에 관한 책’을 몹시도 사랑했던 매들린의 사랑은, 결혼은 마냥 문장이었을지 모른다.

  결혼이라는 플롯은 어떻게 현성되었는지에 관한 생각을 하게끔 하는 데서 이 결혼이라는 소설에서 내가 눈길이 간 것은 내 자신의 결혼에 관한 ‘부모’의 영향력이다. 매들린도 레너드도 미첼도 그들 인생에서 결혼관을 형성하는데 부모의 개입에서 놓여난다는 게 쉽지 않다. 결혼이 두 사람만의 결합이 아니라 두 가족의 결합이라는 우리나라의 결혼문화처럼 1980년대의 미국에도 적용되는 부모의 중요성 아니 영향력에 대해 실감했다. 세 명의 인물들마다 그들의 부모는 각각의 방식으로 자녀들의 삶을 살아가는데 개입하고 있다.

  부유한 매들린의 부모는 재력으로 매들린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주었고 그녀의 사랑과 결혼에 대해 끊임없이 충고한다. 레너드가 아닌 미첼을 선택하라고 하거나 사회생활을 원한다면 결혼하지 말라고 얘기한다. 매들린의 선택에 한번도 기꺼이 여기지 않은 부모에게 반항처럼 생각의 방향을 달리하며 움직이는 것 또한 부모의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레너드는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고 지속적인 경제적인 어려움이 그의 우울과 관계있다. 이민자 출신 가정이라는 생각을 달고 있는 미첼까지, 대학생에서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이들 세 사람의 불안과 방황 속에는 이처럼 가정, 부모의 영향 또한 잠재하고 있다.


사랑받지 못하는 집에서 성장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안이 있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불행을 자녀에게 전가하는 경향이 있는, 정서적으로 발육이 정지된 부모 밑에서 자란다면 그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만약 아버지가 가족을 떠나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차차 나이를 먹어 갈수록 아버지와 같은 성별을 지녔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자신을 몹시 싫어하는 것 같다면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불안과 방황에 있는 이들이 ‘안정’을 위해 선택한 것이 결혼이다. 결혼이란 두 사람의 결합이니 필연적으로 한명은 남게 되고 결혼을 통한 ‘안정’에서 탈락된 그는 전공인 종교에 힘입어 탈락의 아픔을 달랜다. 그러나 그또한 결혼을 통해 구원받고 싶은 감정을 억누르지는 못했다.


소설이라는 장르는 결혼 플롯과 함께 그 절정에 도달했으며, 결혼 플롯이 사라지면서 다시는 원래의 위치를 되찾지 못했다는 것이 손더스의 견해였다. 인생의 성공이 결혼에 달려 있고 결혼은 돈에 달려 있던 시대에 소설가들은 글을 쓸 만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있던 셈이다. 장대한 서사시는 전쟁을, 소설은 결혼을 찬미했다. 남녀평등은 여성에게는 이롭지만 소설 장르에는 해로웠다. 게다가 이혼은 소설을 완전히 망쳐놓았다.


  지금은 어떤 시대일까. 인생의 성공이 결혼에 달려 있는 시대,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다. 제인 오스틴이 소설이 쓰던 빅토리아 시대에도 매들린과 두 남자가 캠퍼스를 누비던 1980년대에도 지금 2018년에도 여전히 ‘결혼’이란 인생에서 성공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 다만 소설의 주제가 달라졌다. 더 이상 소설은 결혼을 찬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들이 읽는 소설은 현실보다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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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마리암 마지디 지음, 김도연.이선화 옮김 / 달콤한책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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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에는.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마리암 마지디, 달콤한책, 2018.


  이 세계는 1980년에 무슨 일이 있던 건가. 1980년의 테헤란에서도 1980년의 광주에서도.

  소설은 임신 칠개월의 여자가 몽둥이를 든 남자들을 피해 삼 층으로 뛰어내리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이는 그 뱃속에 있던 아기, 마리암이다.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이란혁명을 겪은 마리암은 소용돌이의 이란을 떠나 프랑스로 망명한다. 여섯 살에 새로운 곳에서 적응하며 살아야 하는 마리암이 두 문화에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정체성의 혼란이 수필처럼 현실을 머금고 소설처럼 환상의 이야기를 머금고 펼쳐진다. 망명한 이들의 겪는 이민자의 설움, 정체성의 혼란을 줌파 라히리는 소설에 담았다. 나라가 달라서인지 같으면서도 다른 결을 보이는 이 소설은 이란이라는 나라를 페르시아로 생각하면 떠올려지는 느낌처럼 조금은 환상문학에 가깝게 느껴진다.

  알라딘과 천일야화를 연결지으며 양탄자가 하늘을 나르고 램프의 요정이 등장하는 이미지속에 늘 신비로운, 동화같은 이라고 생각해버리게 하는 단어, 페르시아. 하지만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다른 나라들이, 특히 서양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페르시아는 이란이고 이란 정부는 1935년부터 국호를 이란이라 부르도록 요청하고 있다.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바꾸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신비와 환상은 사라지고 당장 이스라엘과 전쟁 중인 이란을 미사일을 떠올리게 된다.

  오랜 시간 동안 밤마다 식은땀 흘리며 깨어난 마리암의 아버지가 떠올리는 것처럼, 망자들을 떠올리는 마리암처럼. 마리암의 가족이 떠나온 조국은 그때에도 죽음과 공포가 고통과 상처가 가득한 곳이었기에 상처가 아물지 않았기에 프랑스에서는 페르시아어를 쓰지 않기에 마리암은 머릿속에서 페르시아어를 지웠다. 마리암의 성장기를 채운 것은 상상의 이야기를 짓는 것이고 그것이 세상과 소통하는 길이었다. 허나, 내면과 소통하는 길은 전혀 아니었다.

 

나는 이국적인 이야기에 굶주린 청중들 앞에서 이야기꾼이 되어 일화에 살을 붙이고 내 목소리에 가락을 싣는다. 집중하는 작은 눈들이 보인다. 침묵이 홀을 덮는다. 감수성이 풍부한 어떤 이들은 눈물을 흘린다. 내가 이겼다.

한편으로는 이국적인 나만의 작은 세계에 취해 살면서 자부심을 느끼고 행복해한다. 자부심의 정체는 남들과 다르다는 우월감이다. 하지만 그건 진짜 내 모습이 아니다. 나는 다만 낭만저긴 망명자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을 뿐.  


  페르시아에서 떠올리는 이미지에 맞게 가면을 쓴 마리암은 이란인도 프랑스인도 아닌 채로 살아온 시절을, 그렇게 살아가야 할 삶을 힘겨워한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이란의 이미지는 혁명의 순간마저도 환상의 이미지이듯 소비된다. 자신의 조국을 거부하는 마리암에 의해서 잘 다져진 영화처럼 상영된다.  


“마리암, 네가 가진 두 문화를 이제 받아들이렴. 마음을 편히 가져.”

“그게 싫다는 게 아니에요. 남의 상처를 보고 환상을 품는 위선자들에게 화가 난 거예요. 호의를 베푸는 척하면서 정중하게 내 상처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위선적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이라고요.”


  마리암 역시 스스로 위선적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을 부추겼고 스스로도 그렇게 하고 있었음을 알까. 할머니는 마리암에게 내면을, 고통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마리이 ‘진짜 프랑스인’이 되어 다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자 할 때 그때 마리암은 다시 이란을 찾고 페르시아어를 찾는다. 망명자, 이민자의 2세들이 겪는 혼란은 매우 현실적이지만 대체로 이들을 다룬 소설들은 혼란의 최고 해결은 부모님의 조국과의 화해이며 그곳으로 발디딤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와는 다른 지점이 있다. 마리암의 할머니가 마리암에게 하는 말들은 이런 상황에 놓인 ‘할머니’들의 말들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명징하게 현실인식을 하게 된다. 


‘독재자에게 죽음을’ ‘호메이니는 살인자다’ ‘샤 다음에 호메이니라니! 우리의 혁명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는 삐라를 서랍들 속에 넣었다. 아버지는 반정부 활동을 했다.


  아마도 이런 것과 관련이 있을까. 소설의 원제는 마르크스와 인형이다.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이란 제목으로는 이미지와 내용을 전혀 다르게 예상했기에 작가의 원제목을 곱씹게 된다. 왜 우리나라는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여전히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금기적인 시각이 있어서는 아니겠지 가장 알맞은 상품성을 위한 선택이겠지 생각하면서 제목으로 인해 책에 대한 무게가 확연히 달라짐을 느낀다.


넌 오랜 세월 끝에 이곳에 돌아와서 근원이라는 바다에 푹 빠져버렸어. 예상했어야 하는 건데. 물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네 인생을 망치게 내버려둘 수는 없구나. 네 부모는 네가 거기에서 자랄 수 있도록 큰 대가를 치렀어.


  페르시아어를 찾으러 가는 마음의 길은 혼란스러웠지만 마리암은 자유롭다. 그녀는 그녀 세대에서 치뤄야 할 고통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아니 이란 전체의 흔적을 담고 있다. 정치지도자들로 인해 망가진 이란이라는 상징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상징을 낳기 위해 그들의 부모들은 더 큰 고통을 치뤘다. 이것을 인식하는 한 마리암은 어느 곳에 있더라도 마리암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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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저택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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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르다

시월의 저택, 레이 브래드버리, 2018-01-22.


  환상적이고 서정적이다. 시각적 이미지로 구현된 소설의 풍경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 버튼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지면 어떨까 싶은 기이한 매혹이 있다. 오랜 시간 씌여진 연작소설이라지만 『시월의 저택』이란 제목 아래 일렬로 모이기에 어색함은 없었다. 워낙 기이한 인물들이 드나들기에 이야기의 전개가 느슨하거나 건너뛰더라도 상상력으로 메꾸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게 된다. 다만, 상상의 나래가 작가가 제시하는 것에 비해 모자랄 뿐.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시월의 저택으로 모이는 것은 가족들의 파티를 위한 것이지만 그들이 ‘기록’되기 위함이다. 무수한 시간을 사는 이들, 그들은 그러니까 유령이고 오랜 시간 살아 있어 결코 끝나지 않을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이야기가 기록되려면 하나의 마침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유령들이 머문 공간, 시월의 저택이 존재했다가 사라지고 그 모든 것을 그려낼 존재로 유한한 인간인 티모시가 등장하는 것이 그래서 필연적으로 느껴진다.


넌 찾아온 게 아니란다. 우리가 너를 찾아냈지. 셰익스피어로 발을 싸고, 포의 어셔 가를 베개 삼아 바구니 안에 들어 있었단다. 네 윗도리에는 ‘역사가’라는 쪽지가 핀으로 꽂혀 있었지. 너는 우리에 대해 적으라고, 목록을 만들라고, 태양에서 날아 내려오는 모습과 달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록하라고 보낸 거란다. 하지만 어쩌면 너도 저택이 불렀다고 할 수도 있겠구나. 너는 글을 쓰고 싶어 조바심치며 작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으니 말이다.


  신성한 빛과 생명의 언약에 대해 말하던 성인 티모시의 이름을 부여받은 필멸의 존재인 티모시가 시월의 저택의 가족들에게 스며들어 어떻게 시월의 저택이 생겨나게 되었는지 가족들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기록한다. 마음으로의 가족뿐만이 아니라 신비한 능력을 지닌 그들처럼 되고 싶은 티모시는 유한한 존재인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며 내내 불멸과 필멸, 삶과 죽음이라는 고뇌를 생각하게 이끈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이기에 티모시에 동화되어 자유롭게 날거나 타인의 생각속을 넘나들거나 벽을 뚫고 들어오거나 나무 위에 살거나 땅속에 살다가 17년 만에 비가 내리면 물을 타고 흘러나오기도 하고 무리를 지어 뛰어나오기도 하는, 먼 옛날 이미 죽었거나 어떻게 해도 죽을 수 없는 이 유령가족들을 신비롭게 바라보며 동경한다. 결국엔 죽지 않는 삶에 대한 동경일지도 모르겠지만 유령 가족들은 말한다. ‘삶을 서두르라‘고. 죽음은 신비로운 것이라고.

 

“삶은 방문일 뿐이며, 잠으로 완결되나니. 나는 죽음이라는 잠에서 찾아왔으니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거야. 생명이라는 잠 속에서 쉬기 위해 바삐 달려가는 거지. 내년 봄이 오면 나는 누군지 모를 아가씨나 부인의 벌집 속에 깃들인 씨앗이 되어, 생명을 받아 영글기를 기다리게 될 거야.”  


  그들은 분명 떠나갈 것이니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위로처럼 삶에 대해 말한다. 현실과 환상 속을 넘나드는 이야기에서 유령의 시선으로 보면 죽음을 아는 것이 환상이 되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고, 유한한 삶을 즐기라고 말하는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인지도 모른다.


“천국의 문에 들어가기 위해 도착한 죽은 이들에게, ‘살아 있는 동안 그대는 열정을 알았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작은 목소리라고 적어라. 만약 답이 ‘그렇다’라면 그는 천상에 들어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답하면 지옥에서 불타오르게 될 것이니.”


   그 삶이 행복한가. 영원한 그 삶, 그에 대한 대답은 ‘기억’이란 측면에서 대답된다. 그들은 시간은 무거운 짐이라고 말한다.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수한 전화의 현장을 분노와 파괴와 공포의 시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이야기와도 같다. 또한 이미 죽어 있는 세계일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신비하거나 기괴한 능력을 가지고 사는 그들은 이미 삶과 죽음의 세상을 넘나들은 그들은 끊임없이 티모시에게 살아 있기를, 죽더라도 살아 있는 삶을 주문한다. 워낙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처럼 펼쳐져 유령가족들, 일족들의 삶에 혹하지만 신비롭다는 것 속에 왜인지 모를 슬픔이라 느낌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아주 먼 뒷날 방문한 오래 묵은 집을 바라보는 것처럼 진한 향수와 서글픔이 공존하는 시월의 저택에서 시간이 주는 쓸쓸함을 곱씹게 된다. 이상하게도 책을 덮고 나면 한번의 삶이 훅, 지나가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지난 사진첩을 들춰보고 있었던 듯이. 아직 남은 삶을 향해 행복의 시선을 돌리고 싶지만 아직 남은 사진첩이 남아 나를 끌어당기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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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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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스토너, 존 윌리엄스, 2015-01-02.


  “평온 속에 숨을 거뒀다.”

  그렇다 고개를 끄덕였다 곧,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생각에 빠졌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평온’하다고 말하는 건 ‘보기에’ 평온함을 말하는 건가, 당사자의 언어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저 말은 안락사 기관 창립자의 말이었다. 말한 이의 직업을 연계해서 생각하니 수술 후 의사들이 항상 먼저 하는 말, “수술은 잘 됐습니다”가 떠올랐다.

  한 과학자가 안락사를 선택한다는 기사를 스치듯 보고 인터넷에 구달 박사가 오르내릴 때  침팬지 박사 제인 구달의 이야기인줄만 알았다. 사진이 나온 기사를 보면서도 제인 구달 박사의 안락사를 도와준 사람인가 생각할 정도로 오로지 제인 구달만 떠올라서 『희망의 이유』에서 밀림생활 속 영성을 얘기하던 구달 박사의 선택에 생이란 그런 것인가, 노령이란 그런 것인가, 의아함과 쓸쓸함이 고조되었다. 기사를 제대로 읽고 나서야 제인 구달이 아닌 104세 데이비드 구달 박사의 ‘선택’을 알게 되었고 역시 아는 대로만 생각하게 되는 오류를 반성했다. 하지만 제인 구달에서 데이비드 구달로 바뀌었다고 한들 기사를 보며 느꼈던 생각과 감정이 바뀔 리는 없었다. 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파고속으로 출렁이며 20년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며 삶을 끝낼 기회를 얻게 돼 기쁘다는 안락사를 실행한 생태학자의 말, “내 나이가 되면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점심때까지 앉아 있다. 그러고 나서 점심을 약간 먹고 다시 앉아 있다.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느냐”, 을 뚫어져라 보며 소설 속 인물 스토너와 현실 속 인물 할머니를 떠올렸다.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자신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을 조용하게 뒤따르는 시선은 담담해서, 그의 생은 너무 우직해서 보는 이의 마음의 무거움을 길게 가져간다. 스토너의 생을 평범하다고 실패한 생이라고들 말하기에 ‘평범한 스토너의 삶’이란 말에 이의를 제기하며 평범과 실패를 가늠하는 시선이 무얼까 싶었다. 농업을 배우던 그가 영문학개론 수업에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알게 되고 문학을 사랑하는 학자로 삶의 길이 바뀌게 되는 일이 소설이라 ‘평범’치 않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순간은 우리 삶에서 사실 비일비재함에도 판타지처럼 여겨졌다. 무언가에 대해서 강렬함을 느끼고 그것을 선택하고 매진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판타지이고 스토너의 성격 자체가 비현실적인 요소가 가득한 게 아닌가. 그의 생이 평범한 것이라면 스토너의 성격 자체가, 사람 자체가 평범하지 않다. 그의 친구가 말하지 않았던가. 스토너를 향해 “몽상가이자 광인”이라고.

  항상 스토너는 돌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그를 둘러싼 상황들만 휘이휘이 돌아간다. 한 여자를 사랑하고 결혼하지만 1년도 안돼 아내는 떠나가고 교수가 되고 학문에만 열중하지만 학교에서는 늘 밀려나는 신세가 된다. 그것도 친구에 의해서. 그가 한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 세상은 전쟁과 대공황이라는 혼란을 보냈고 그는 홀로 아이를 키우며 세상에서 고립되며 병에 걸리며 또다른 사랑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 삶에서 스토너가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던가. 자신을 위해서, 분노를 쏟아낸 적이 있던가. 아닌 듯해도 스토너는 표면적으로는 늘 일정한 음을 내고 있었다.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결국 “세상에서 실제로는 있지 않은 것, 세상이 원한 적 없는 것을 기대”하는 스토너였으니 미치게 흘러가는 세상에 억울한 일에 대해서도 크게 분노치 않았다. 그리고 그가 분노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의 심리를 알아가는 독자는 더 연민하고 더 아파하게 된다. 끝이 없이 조용히 죄어오는 이 감정이 판타지가 끝났음을 알리는 현실로 돌아가기 싫은 공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詩)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 생의 모든 순간 살아 있었던 스토너의 인생이 이쯤되면 부러워진다. 그리고 스토너는 마지막 순간 ‘이기적’이기까지 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회한에 대해서도 초연한 스토너는 죽음의 순간 홀로였다. 그의 생의 대부분이 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죽음은 이기적이며 죽어가는 사람은 혼자만의 순간을 원한다라고 생각했으니 끝끝내 이기적이었던 그의 마지막 순간을 굳이 위로하지는 않으련다. 위로는 오히려 내게 필요하다. 그럼에도 슬픔과 쓸쓸함을 느끼는 내게. 돌아볼 내 인생의 나날들에 스토너처럼 생각되지 않을 내 생애들에.

  104세. 마지막까지 말짱했던 구달 박사의 정신과 ‘안락사’라는 선택을 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과 의지를 가질 수 있었던 그의 생애에 대해서도 부러움을 가진다. 어쩌면 이것은 구달 박사와 같은 신체 상태를 지닌 채이지만 한순간 놓아버린 정신 상태를 지닌 할머니의 모습으로 인해 느껴지는 감정일지 모른다. 어느날이던가, 지극히 평범한 할머니의 삶이 아니었던가 생각했다가 이 나라 근 100년의 역사가 결코 순탄치 않았을진대 그 속에서 살아야 했을 삶이 어찌 평범할 수 있으랴 싶었다. 할머니의 삶 속에서 순간순간의 열정은 어떤 형태였을까. 좋은 것을 느끼고 ‘선택’하기보다 주어진 상황속에서 살아내야 했을 삶이라 여겨져 마음아린 삶. 비록 신체는 노쇠하더라도 생을 마감하는 단 며칠전까지 정신만은 온전하기를 바라건만 그것도 허락되지 않은 삶.

  할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회한을 느낄 새도 없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남기지도 못하고,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하거나 선택할 상황도 맞지 못한 채로 있다. 가슴에 쌓인 한도 제대로 풀어볼 시간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치매로 가누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를 모르는 것이 더 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누구를 향하 위로일까. 어버이날을 맞아 먼 곳에서 온 자식들은 치매노인의 마른 몸을 보며 눈물바다지만 이틀에 한번 보는 입장에선 어제보다 괜찮은데요라는 말만, 눈물 흘리지 않은 지는 오래됐다.

  분명 스토너를 처음 읽었을 때 오래도록 마음 아렸고 그 여운이 길게 남아있는데 지금은 스토너의 삶에서 느껴지는 슬픔이, 그 여운이 환상이었다 여겨진다.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인 한 인간 스토너의 생을 본 것이 아니라 인생이 어떻게 판타지일 수 있는지를 본 듯하여 현실로 넘어오고 싶지가 않다. 스토너의 인생을 쓸쓸히 여기면서 부러워하고 그의 태도를 동경하면서도 연민한다. 스토너와 내 생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보니, 훗날 나는 내 생을 돌아볼 때 스토너처럼 생각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현실이라서 거기에서 오는 슬픔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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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 - 서울 하늘 아래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송기정 옮김 / 서울셀렉션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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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서울, 평양냉면

빛나-서울 하늘 아래, J.M.G. 르 클레지오, 서울셀렉션, 2017.


  왜 서울일까가 가장 궁금했다. 르 클레지오가 친한(?) 작가라는 이야기는 접했기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작가가 서울을 배경으로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썼을 때는 그렇게 써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한때 알던 이의 이름인 ‘빛나’라는 소녀가 등장하는 이 소설이 ‘서울’이어야 하는 ‘빛나’여야 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 책장을 넘겼다.

  소설에서 르 클레지오가 저자라는 사실을 지운다면 외국 작가가 썼다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거리 풍경과 사람들의 묘사는 익숙하다. 다르게 얘기한다면 굳이 ‘서울’이어야 하는 이유나 ‘빛나’여야 하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배경을 뉴욕으로 바꾸고 소녀를 ‘제인’이라 불러도 이 이야기가 가진 차별성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굳이 노벨상 수상작가가 ‘서울’을 배경으로 썼다는 이 소설에서 ‘서울’이 가지는 의미는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익숙해서 그 배경에 대한 묘사에 무뎠을지도 모르겠다.

  하나, 어쩌면 한국이란 나라, 서울이라는 배경이 필요했던 이유가 있다면 비둘기를 키우는 ‘조한수 아저씨’가 아닐까. 그의 어머니는 전쟁때 할아버지가 키우던 비둘기 한쌍을 데리고 38선을 넘어왔다. 어머니는 언젠가 그 새들이 고향으로 날아가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키우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다. 조씨는 비둘기가 임무를 완성할 수 있도록 수위로 일하는 아파트 건물 Good Luck! 옥상에서 북에서 온 비둘기 자손을 키운다.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을 가진 한국. 당연 외국인들에겐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들의 사연들이 남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이 이야기는 현재의 한국이 가진 서사이니까. 클레지오는 한국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속에 분단국가의 상황을,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의 이야기를 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고향의 가족을 향해 날리는 메신저 비둘기들의 여행은 환상적이면서도 마음졸이게 된다. 마침내 그 이야기들이 희망을 전하는 이야기로 대체되면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인데 생각하게 된다.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진 날이라서가 아니라 평화의 상징은 이제 비둘기가 아니라 ‘평양냉면’이라는 글들이 뭔가 벅차오름을 느끼게 하는 날. 이러한 일들이 이어지면 이제 한국에 대해서 서울에 대해서 또다른 이야기가 만들어 질 것이다. 향수에 젖은 그리움 가득한 분위기만을 담지 않은. 비둘기가 날아가며 느껴지는 꿈과 희망을 생각하게 하며 동화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형태의 그런 빛깔로.

  조씨의 이야기는 빛나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의 하나다. 빛나는 전라도 어촌에서 살다 교육은 서울에서 받으라는 부모님으로 인해 서울 고모댁에서 자란다. 고모와 사촌에게서 갖은 구박을 받으며 산다. 우연히 복합부위통증증후군을 앓는 살로메, 김세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는데 빛나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들으며 살로메는 바깥세상을 보고, 상상의 여행을 한다. 소설은 빛나가 들려주는 다섯 개의 이야기로 펼쳐진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나도 그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훨씬 명확해 보인다.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서로 연결된다. 지하철 같은 칸에 탔던 사람들이 언젠가는 서울이라는 대도시 어디에선가 다시 만날 운명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살로메를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그에 따른 수당을 받는 이야기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하는  듯했지만, 이 가상의 이야기들은 빛나가 말하듯 연결되어 있다. Good Luck!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연결이 되기도 하겠지만 이야기들을 가만 들여다보면 삶과 죽음과 함께 윤회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 대도시 서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만큼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처하고 있는 상황도 그들 면면도 다르지만 도시 속에서 겪을 수 있는 익숙한 이야기가 현실과 환상의 교차로 진행된다. 빛나는, 이 소설은, 빛나기보다 쓸쓸하고 슬프다.


그녀는 내가 가진 욕망과 이야기에 좌우되면서 구불구불한 상상의 세계를 따라 맹목적으로 나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이제 나는 그녀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면서 죽음의 시간을 늦추게 하는 에너지가 계속 흐르게 할 수도, 그 흐름을 멈추게 할 수도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삶과 죽음과 고통과 희망들이 교차하는 살이. 애정이 교차하고 만남과 헤어짐이 이어지는 살이. 살로메의 죽음 후에 더 이상 빛나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게 됐지만 빛나는 “해방될 것 같다”라고 말한다. “현재만 중요하고 산 사람만 중요한 이 큰 도시에서,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빛나에게 이야기는 살로메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빛나 자신의 세상살이를 견뎌내는 힘이기도 했다.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빛나가 찾아낸 이야기들은 죽음을 앞둔 살로메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얘기이기도 하고 현재를 살아가기 힘들었던 스스로를 먼 미래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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