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

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작품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마음에 들어왔다. 이야기도, 문체도, 구성 방식도 하염없이 좋구나를 외칠 만큼 7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은 기억에 남는 작품이 많았다. 대상작인 「너무 한낮의 연애」는 작가의 단편집과 함께 출간되어 한참을 베스트셀러에 머무른 것으로 안다. 양희가 주는 그 신선하고 아릿한 연애의 이야기가 드라마화 된다는 기사를 보았다. 양희를 다시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을 읽고 내가 형상화한 이미지가 영상으로 만들어졌을 때 내가 느낀 느낌과의 유사점과 차이점이 어떤 것이 될까, 궁금해진다.


어쩌면 그의 삶은 오해되고 왜곡되었는지 모른다. 아니,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지. 솜씨 좋은 작가처럼 거짓을 진짜처럼 혹은 진실을 가짜처럼. 영혼은 편하게 침대에 눕혀놓고 하루종일 내 손을 잡고 유령처럼 산책하다 집에 돌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아닌가.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모르는 일이니까. 말을 안 하는데 알 수가 있나. 뒷모습으로 남은 얼굴. 아름답게 움직이던 위빙. 오리나무와 자귀나무를 구분할 수 있는 이상한 지식. 오늘 만난 한두운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나.


  정용준의 「선릉산책」도 곱씹을수록 기억에 남는다. 선릉을 산책해 보지 않았다면 느낌이 덜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선릉을 산책한 기억이 소설의 이야기를 머릿속에서 재현해 내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발달장애를 가진 한두운을 보면서 발달장애센터에서 만난 아이들을 떠올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잠깐 아이들을 보고 있는 것과 지속적으로 아이를 돌보아야 하는 것의 차이를, 선릉 산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아니, 타인을 이해하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그 이해는 내가 수용할 수 있는 한도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하물며 장애인이라면, 그 이해의 시선은 처음부터 평행선이 아니라 사선이 아니라 우위에 서 있던 것은 아닐까.

  올 봄 비가 거세게 내리고 난 뒤 건강하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사망한 장애인이 동네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스물이 넘었는데 석달이 다 되어 가는데 자꾸 묻는다고 했다.

  “우리 아빠 어디 갔어요?”

  사람들은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아버지가 사망한 것을 모를까,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아들을 바라본다. 아버지가 없는 나날, 이 장성했지만 장성하지 않은 상태의 아들은 어떤 하루하루를 보낼까. 아버지와 함께 했던 동선으로 다니면서 아들은 계속 묻는다.

  “우리 아빠 왜 안와요?”

  처음의 안쓰러워하던 마음은 항상 같지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감정은 옅어지고 아들을 향한 안타까움에는 다른 감정들이 섞인다. 답답함이 쌓이고 자꾸 무언가를 사달라고 하는 행동을 언제까지 받아줘야 할지 난감해한다. 한없이 갑작스레 홀로 남은 아들의 삶을 걱정하고 도와주리라 생각했던 마음이란 저 아들의 장애 상태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도대체 얼마만큼의 상태인지, 저렇게 혼자 두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옮겨간다. 기꺼이 한두운을 돌보고 한두운을 이해하려던 마음이 시간이 연장되자마자 삐걱거린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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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네치를 위하여 - 제2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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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이라서 슬프다

고마네치를 위하여 ,조남주, 은행나무, 2016.


  “어쩐지 나는 이 해피엔딩마저도 슬프게 느껴졌다.”

  그랬다. 난 이들의 삶이 슬펐다. 아니 그렇게 말하기 위해선 소설의 엔딩을 제대로 정의해야 한다. 서울에서 가난하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달동네 S동에서 살던 고마니 가족, 재건축, 재개발을 꿈꾸며 서른해를 넘기도록 버티던 그곳의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난다. 이것은, 해피엔딩일까.

  그토록 가난하고 힘겨운 S동살이가 마냥 칙칙하고 힘겹지 않은 것은 무겁게 이야기를 이끌지 않은 작가의 힘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다 지나간 일’이기 때문이다. 추억이란 그런 것이다. 기억은 그때를 아름다웠노라고 낭만적이라고 끊임없이 외친다. 그것은 지금 현재의 삶이 그닥 유쾌하지만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서른 여섯, 미혼이며 실직 상태의 더 이상 꿈꾸기도 없는 ‘고마니’는 유년 시절 자신이 꿈을 가지고 있던 시절을 회상한다. 그 시절이 환상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었다면 아홉 살 소녀, 고마니가 꿈꾸고 노력하기 때문이었다.   

  서른 여섯 고마니가 일찌감치 깨달은 바, 모든 어른은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도 마찬가지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실패 이후의 삶을 살아낸다는 뜻이라 생각하는 고마니 인생의 첫 실패이자 꿈은 고마네치처럼 되는 것이다. 1988년 그해에 서울올림픽이 소녀에게 안겨준 체조 선수의 꿈은 동네 아이들과 체조 연습을 하는 것에서 시작해 체조 학원을 다니고 체조 학교를 다니는 것까지 이르게 된다. 희망이라곤 부동산 재개발뿐인 생활에서 고마니의 엄마는 딸의 꿈을 위해 S동살이와는 맞지 않는 지원을 해준다. 그래도 딸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었던 그때를 행복하게 여기는 엄마의 모습은 애잔하다.

  이름의 유사성으로 자신이 고마네치의 환생임을 주장하며 왕따 상황에서도 자존감을 높이기도 했지만 고마네치는 고마니의 인생에서 졸고 있는 뇌를 깨우는 것처럼 인생의 발자취를 확인하고 자신을 점검하도록 하는 위치이기도 했다. 그런 고마네치는 차우셰스코의 독재정권 아래서 힘겹게 살다가 망명했고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나 결혼해 안정된 상태가 되었다. 이런 고마네치의 해피엔딩을 슬프게 느끼는 건 루마니아 국민영웅, 체조선수 고마네치는 고마니에게는 닿을 수 없는 환상이었기 때문이다.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현실적 존재로 인식되기에 느껴지는 슬픔과 애틋함은 체조 선수가 되리라는 꿈이 결국 환상에서 현실적인 이유로 무너지는 것을 겪어야 하는 슬픔과도 맞닿아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성장해가는 소녀 고마니가 꿈을 포기하게 된 계기가 성장의 징후라는 아이러니는 애잔하다. 아무리 체조선수가 되기 위한 재능이 부족했다고 할지라도, 준비하기엔 늦은 나이였다고 해도.

  이제 다시 고마니는 꿈꾸지 않는가. 진정 고마니 부모의 희망은 부동산뿐인가. 우리가 꿈꿀 수 있는 환경이란 결국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는 건 실패한 경험보다도 더 쓰다. 성실과 정직으로도 녹록치 않은, 힘겹고 비루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건 얼마나 모순인가. 꿈꾸는 것조차 쉽지 않은 삶, 거듭거듭 실패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의 슬픔은 그 속에서 아름다운 삶의 태도를 잊어버리게 하기에 슬프고 아프다.


사실 고생스럽게 살아온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마음보가 더 못된 법이다. 이리저리 부딪히고 깨졌으니 둥글둥글한 게 아니라 뾰족뾰족 모가 나는 게 당연하다. 불법과 탈법과 비도덕을 동원해서라도 고생문에서 나오겠다는 게 정상이지 가시밭길이라도 바르고 착하게 가겠다는 건, 미친 거다.


  미친 세상. ‘너무 더럽고, 사람들이 구질구질하다며 그걸 가릴 수 있게’ 하라는 지시를 하면서 너무 더럽고 구질구질한 형태의 구조적 세상을 만들어가는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다. 세상은 그들로 인해 상식이 비상식이 되고 때론 모난 사람들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도 지속되는 삶에서 한없이 모가 난 순간마다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게 삶이라고 고마니는 말한다. 다섯 아들이 전쟁터로 넘어가 돌아오지 않은 ‘넘어가면 고만인’ 고마니 고개에서 이름을 딴 고마니는 말한다. 거듭된 실패에도 특별히 우울하지 않은, 겨울에 해고당한 건 불행 중 다행이라고 고마니는 말한다. 십년을 일한 직장에서 해고되어 또다시 진로를 고민하는 중이지만 지금 이순간도 그저 열심히 살고 있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지만 누구도 우울하지 않게 그들의 시간을 열심히 살고 있을 고마니의 해피엔딩이 한없이 슬프게 느껴진다. 차우셰스코의 독재정권에서 경제적·정신적으로 핍박받으며 살다가 망명한 고마네치의 삶을 떠오르게 한다. 힘겨운 사람들을 더 힘겹게 만드는 ‘힘’ 속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고마니는 내게는 전혀 환상적인 존재가 아니라서, 고마니는 ‘나’라서 이 해피엔딩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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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08: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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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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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문학동네, 2018.


  정미경 작가의 소설은 대체로 도회적인 느낌이 그윽했기에 『당신의 아주 먼 섬』의 다른 느낌에 사뭇 서글펐다. 작가의 마지막 소설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유작이니까. 남편이 아내가 떠난 빈방에서 찾아 책으로 펴냈다. 어쩌면 더 수정되었을지도 모를 원고는 발견된 순간의 글로 출판되었고 이전과는 너무 다른 느낌이라서 이것이 병마의 작가에게 생긴 시선의 변화인가 싶기도 했다. 먼 섬의 풍경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이 세상에 없는 작가의 이미지는 작가가 마지막 남긴 글로 채워진다.

  섬은 계절을 품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곳으로 그려졌다가 점점 뉴스에 등장하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좀처럼 아름다움이 되살아나지 않기도 했다. 특히나 염전이 가득한 섬이라면 노예와 성폭력 사건이 먼저 자리잡아 버려서, ‘섬’을 잃어버린 기분이다. 당신의 아주 먼 섬이 아니라면 다시 섬의 이미지를 되돌릴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그 섬에서 떠나고 싶어하지만 늘 상처를 받거나 삶의 실패를 경험하고 나면 다시금 섬을 찾는다. 그때 그들이 섬을 찾는 것은 위로와 치유를 위한 걸음이었을까, 도피를 위한 것일까. 떠난 사람들이 되돌아오지 않았다면 여기, 이 섬은 어떤 이야기를 품으며 섬의 이미지를 만들어 갔을까. 영도. 영도로 기록하고 영도가 기록하는 세계로 그려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섬은 영도를 걷어내고서야 다른 이미지를 갖는다.

  시력을 잃어가는 정모, 청각을 잃은 판도, 친구를 잃은 이우. 아들 셋을 모두 바다에 잃은 이삐 할미. 이들은 ‘잃어’버렸기에 상실의 감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해도 그 감정을 서로에게 토로하면서 위로를 받는다. 정모는 세상을 볼 수 없는 감각을, 죽음을, 그 불가해한 세계를 잊기 위해서 섬의 소금 창고에 도서관을 꾸미는데 열심이다. 이우와 판도는 정모가 만든 그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풍경을 읽고 마음을 읽는다.  


판도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우의 손바닥에 썼다.

알, 았, 는, 데, 묻, 는, 순, 간, 잃, 어, 버, 렸, 어.

이번엔 이우가 판도 손바닥을 펼쳤다.

잊. 어.

판도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시 썼다.

잃, 어.


  이 소설에선 ‘슬픔이라는 그릇에 담긴 따뜻함’이 느껴진다. 마음에 두었던 연수의 딸 이우를 돌보게 된 정모가 제 시력 상실에 대해 얘기하게 되는 사람이 이우이게 되는 것도 그 둘 사이의 유대가 있었기에 이뤄질 수 있다. 누군가에게 간절히 말하고 싶었을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하면서 어른 정모가 느끼는 이 감정이 소설속 전반에 깊게 깔려 있다. 서러운 가운데 슬픈 가운데 아픈 가운데 타인으로부터 받는 따뜻함이 ‘태양과 바람, 밀물과 썰물의 틈새에서 고운 결을 만든다.’ 아니 애당초 이들 자체가 고운결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결이 상처를 걷어내고 다시, 생과 마주할 힘을 얻어가는 것. 그것은 그들이 서로에게 내미는 슬픔에 깃든 따스한 말들과 표정과 진심어린 애정에 힘입어서다.

  그런 결을 잃어버린 이우의 엄마 연수는 섬을 떠나 성공적인 일에 집착하고 힘겨운 딸을 고향의 정모에게 보내지만 이우가 가진 슬픔과 아픔보다 ‘보여지는 것’에 집착한다. 결국 열아홉살 임신한 이우를 보기 위해 섬으로 오지만 딸과의 갈등만 확인하며 쫓기듯 떠나가게 되는 연수다. 정모에게 소금창고를 빌려준 태원의 아버지 영도 역시 그러한 존재다. 단지 영도는 섬을 떠나지 않고 섬에 머무르며 섬을 장악한다. 오로지 수익에 집착하는 영도는 다 꾸려진 도서관을 못마땅해하며 도서관 사업을 저지하려 한다. 부를 쌓기 위해 타고난 교활함과 타고난 사악함을 가진 영도라는 인물이 사람들과의 관계나 섬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섬을 일구어가는 방식이 섬의 모습이 된다. 그가 가진 섬에서의 영향력이 섬을 좌지우지한다. 연수와 영도가 섬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마다 섬은 따스한 온기를 잃고 비극적이고 불쾌한 기운들이 솟아오른다. 그들이 가진 결이 섬을 장악하지 않으려면 그들은, 사라져야 한다.

   

“아저씨, 내가 올게. 당장은 아니어도, 돌아와서 책을 읽어줄게.”


  그리고 고운결을 가진 이들이 남아, 고운결을 갖고픈 이들이 찾아와 섬을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한다. 그렇게 섬의 풍경이 가슴에 남는다.


누군가 거대한 입을 벌리고 검은 구름을 토해내는 것 같다. 그 틈 사이로 붉은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어디선가 커다란 나무이파리가 휙휙 날아왔다. 창고 지붕들이 들썩거렸다. 갯벌의 풀들이 바닥을 쓸 듯 엎드렸다가 가볍게 일어나곤 했다. 바람의 머리카락이 보이는 것 같았다. 갯둑에 서 있는데 몸이 주춤주춤 뒤로 밀려났다. 입고 있는 옷이 파닥파닥 소리를 내며 나부꼈다. 바다가 하얗게 일어섰다. 내가, 마지막으로 담아두고 싶은 풍경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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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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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띄우는 말의 무게


히가시노 게이고, 현대문학, 2012.


  갑자기 마구 점을 보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생년월일만 알려주면 과거의 내 삶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내 삶이 어떠할지를 ‘알려주는’ 영험함을 경험하며 내 미래의 불안을 날려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 그날에 태어난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모두 같은 운명일 리가 생각하면서도 신년운세를 클릭하며 난해하고 다의적인 점의 언어를 타로의 언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선택에 처한 고민을 이리저리 대입하는 재미. 운명은 정해져 있기를 바라는 것인지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지 헷갈리지만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희망을 담은 마음은 분명할 거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속 나미야 잡화점은 그렇게 일종의 ‘점’집 같은 공간이다. 혼자 힘들어하고 있던 이야기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여지는 결정의 순간들. 불안과 우울과 걱정에 시달릴 때 누군가로부터 듣는 한마디 위로. 그러기에 보내는 편지, 그렇기에 말하는 내 사연들. 사람들 누구나 고민을 안고 있기에 타인에게 고민을 토로하며 위안을 얻으려 하고 내가 고민을 안고 있으면서도 타인에게 그 고민에 대한 의견을 전하기도 한다. 해결이 되었을지 내 말로 위로가 되었을지 아닌지 모를 말들. 그래서 또 궁금한 내 말에 대한 결과들. 미래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만큼이나 타인에게 한 조언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그것은 그의 생애에 어떤 영향을 알고 싶은지 궁금한 것은 당연하다.

  판타지와 추리가 가득한 이 이야기의 힘은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만 있지 않다. 어째서 나미야 잡화점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도 나미야 잡화점을 그대로 두었는지 왜 먼훗날 나미야 잡화점의 상담창구를 부활시켰는지 타인의 고민을 듣는 이들로 청년 백수들이 등장했는지가 눈여겨봐진다. 왜,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어 있는지를. 내가 한 말에 대한 파장을 알고픈, 그것이 가장 큰 이유 아닐까.

  많은 사연들이 이 책 속에 있지만 내가 타인에게 건넨 위로의 말이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을까 걱정되는 마음이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같은 시간을 만들어 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그때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걸이라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내가 농담처럼 건넨 말에 누군가 상처받지 않았기를. 내가 조금 더 타인에게 그의 삶에 관해 이야기할 때 심드렁함이 아니라 장난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좀더 조심스러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끔 한다.


9월 13일 오전 0시부터 새벽까지 나미야 잡화점의 상담 창구가 부활합니다. 예전에 나미야 잡화점에서 상담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으셨던 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그 편지는 당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도움이 되었을까요. 아니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을까요. 기탄없는 의견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때처럼 가게의 셔터 우편함에 편지를 넣어주십시오. 꼭 부탁드립니다.


  오랜 동안 비어 있던 가게. 사람들의 고민편지에 상담을 해주던 잡화점에 또다시 옛날처럼 고민이 담긴 편지들이 오기 시작한다. 세명의 청년이 그 가게로 숨어든 그날 밤에. 나미야 잡화점은 시간의 흐름이 바깥과 다르게 흘러가 그 편지들은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기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되는 일 없이 꼬이기만 하고 배운 것도 없고 어릴 적부터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온 세 명은 나미야 잡화점에서 다른 이들의 고민편지에 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인생 또한 돌아보게 된다. 


다른 사람의 고민을 상담해준 거,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없었던 일이야.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이라도, 어쩌다 결과가 잘 나온 것이라도 우리한테 상담하기를 잘했다고 하니까 정말 기분 좋다.

 

  추리 소설 작가답게 퍼즐조각처럼 얽힌 인연의 고리들과 과거와 미래의 연결이 내용에 더욱 몰입하게끔 한다. 소설속에 쓰여진 것처럼 많은 이들이 답을 알면서 이미 결정을 지어놓고서도 상담을 한다. 누군가의 충고가 내게 와 닿기까지는 여러 번의 반박을 맞닥뜨리고 의견을 조율하면서 의지를, 결심을 확인하는 것이 필요한 모양이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잡화점의 할아버지는 편지를 보낸 이의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렇게 오래 상담편지를 받고 고민하며 답을 해준 결과 이제는 백지 한 장에 담긴 고민의 글씨까지도 꿰뚫어 본다. 백지 한 장. 인생이란 가끔 이렇게 백지 한 장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사람들이 있기에 사람을 믿어도 좋을, 얘기 나눠도 좋을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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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아름다움 - 스물아홉 번의 탱고로 쓴 허구의 에세이
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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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 증후군

남편의 아름다움, 앤 카슨, , 한겨레출판, 2016.


  존 키츠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남편의 아름다움』의 서사를 채운 앤 카슨의 글은 강렬한 이미지 위에 수려한 시어가 펼쳐진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고 배신당하고 이혼하는 ‘아내’의 내면의 감정들이 격렬하게 휘몰아친다. 더할나위없는 격렬한 감정은 ‘스물아홉 번의 탱고로 쓴 허구의 에세이’라는 부제로 인해 탱고 리듬이 얹어져 더욱 강해진다. 운문 형태의 산문 호흡은 각을 세우면서도 유연한 파트너와 함께 한 탱고처럼 숨막히는 떨림을 준다. 이 떨림과 강렬함으로 몰고 간 것은 그저 남편의 ‘아름다움’. 그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허우적이는 아내의 토로는 미치도록 답답하기 그지없지만 그에 대한 아내의 언어만큼은 치명적이도록 아름답다.

  열다섯에 만난 아름다운 그 남자. 어머니의 반대에도 결혼하게 된 남자. 그 무엇에도 충실하지 못했던 그 남자. 모든 것에 대해 거짓말 한 남자. 꼭 거짓말을 해야 할 필요가 없을 때도 거짓말을 하는 남자. 거짓말을 하는 게 편리하지 않을 때조차도 거짓말을 하는 남자.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사람들이 안다는 걸 알 때도 거짓말을 하는 남자. 결혼한지 1년 남짓했을 무렵 수줍으면서도 자랑스럽게 정부가 있다며 아내에게 사진을 내밀던 남자. 많은 정부들을 두고 수시로 어딘지 모르게 증발해 버린 남자. 그 중에서도 꼬박꼬박 아내를 찾아 온 남자. 우편으로 이혼 판결을 전한 남자. 그 편지를 받은 중년의 나이까지 그 남자, 남편을 사랑한 여자. 남편을 사랑하게 한 그 ‘아름다움’. 그 모든 부정과 사기와 위선에 고통과 슬픔과 분노를 격렬하게 품고서도 끝까지 아내가 하는 말, “아름다움을 붙잡아라”.

  탐미주의 시인으로 유명한 존 키츠, 그의 시,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송가」 의 마지막 구절은 “아름다움은 진리고, 진리는 아름다움이다. 이는 그대가 지상에서 아는 모든 것이고, 알아야 할 모든 것이다.” 이 말을 절절하게 외치는 아내에게 ‘아름다움’이라는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게끔 한다. 왜 ‘아름다움’이 진리가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끔 한다.


나는 많은 아내들처럼 남편을 신의 위치까지 끌어올리고 거기에 붙들어 두었다.

힘이란 어떤 것인가?

친구들이나 가족의 반대는 그걸 더 강하게 할 뿐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에게 지배력을 갖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아내는 알고 있다. 그것은 아름다움이다. 그 어떤 행동에도 아내는 아름다움을 지닌 남편의 지배력을, 힘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아내는 진다. 기껏해야 그들의 행복(했을지 아닐지 전혀 아닐 듯한)한 결혼 생활은 1년 남짓. 아내의 감정은 그 시간 동안 이미 맹목적으로 세뇌되어 있었던가. 그 어떤 글귀에도 남편의 아름다움을 구구절절 묘사하지 않았지만 남편의 아름다움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사람 자체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이 여자, 아내에 대한 환멸이 느껴진다. 참을 수 없도록. 미(美)에 대한 기준은 다른 것이니,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개별적이니 아내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가 설사 나와는 다를지라 해도 내가 뭐, 어쩌겠는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는 중년의 나이에도 그 추억을 안고서 여전히 남편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여전히 그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주장하는 아내에게 남편의 아름다움이란 그와 함께 보낸 그 모든 시절일까, 그를 향한 자신의 감정일까. 처연한 스물 아홉 번의 탱고를 듣는 동안 붙잡고 싶은 아름다움이 이토록 답답함을 동반하는 것이라면 내게는 결단코 아름다움일 수 없게 해야지 생각했다. 남편의 아름다움에 맹렬히 지배당한 여자의 이야기에서 실비아 플라스가 연상되었다. 아니, 이 부정한 남편에게서 실비아 플라스의 남편 테드 휴스가 생각났다는 것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아, 부정한 남편에게 분노해야 할지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분노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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