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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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항상 꽃뱀이 된다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창비, 2017-08-30.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어느 시인의 성폭력 이야기를 들었다. 오히려 지금 이야기되는 것보다 더욱 충격적이고 경악스러워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물론 그 이야기를 전한 사람의 ‘권위’에 힘입어 이야기의 타당도와 신뢰성도 높았다. 그 시인의 시는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기에 시와 시인이 분리되지 않았다. 어느날 갑자기 성향을 바꾸어 진보문학의 대가이자 더없이 능력있는 시인이자 문학활동가가 되었는지, 그와 관련한 이야기에 흥미가 솟기도 했다. 어쨌든 그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이다.

  그 시인의 이야기가 수면으로 올라왔을 때 ‘우와, 드디어’라고 안타깝게도 기뻐했다. 잘못을 시인하는 듯이 행동했던 시인은 외신에서 자신의 행동을 적극 해명하고 시간이 흐른 후 형사소송이 아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10억7000만원짜리 재판이 얼마전 시작되어 인터넷엔 여성 시인 이름만 실시간으로 올랐다. 호텔룸 제안 이후의 성폭력 폭로가 이어졌기에 무언가를 ‘노리는’ 폭로라는 부정적 시선도 있었다. ‘미투 권력’이라는 비아냥도 있었다. 재판 진행 중인 사건을 둘러싼 거대한 구름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다 싶었는데, 내가 시인의 성폭력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편해질 수 없는 마음이 리베카 솔닛의 『모든 질문의 어머니』, 침묵의 강요를 생각나게 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공격당한 경우라면 거의 모든 상황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여자를 비난하는데, 그것은 남자를 비난하지 않으려는 방편이다.


  참 이상한 것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 남성의 ‘성폭력’은 당연하며 이해해줘야 하는 것으로 여성은 절대로 당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얘기된다. 이런 모순적 인식의 기저에는 오로지 ‘남자를 비난하지 않기 위한’ 이유만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리베카 솔닛이 말처럼 페미니즘은 남자들 일이어야 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 여자들 일인 것은 그저 그 일이 여자들에게 저질러지기 때문이다. 그 일을 저지르는 건 대부분 남자들이니 어쩌면 페미니즘은 줄곧 남자들 일이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한국판 제목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의 원제는 『모든 질문의 어머니』. 리베카 솔닛은 경험의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유머가 깃든 언어로 감각적으로 이야기한다. 지금도 여전히 여성혐오, 데이트 폭력, 디지털 성범죄가 만연하고 “물어뜯는 질문, 질문 속에 이미 답이 포함되어 있으며 실은 우리를 강제하고 처벌하는 것이 목적인 질문”만이 가득한 세상이다. 강요된 정답과 강요된 침묵을 ‘추구’받는 현실에서 여성이 침묵에서 벗어나 이야기해야 함을, 그러한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세상의 언어는, 이야기는 달랐다. 여성들은 항상 ‘어머니됨’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여성의 삶의 방식은 아기를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이라는 인식 속에서 여성의 세상은 가부장제 속에서 차별과 편견과 멸시의 언어의 대상이 되어왔다. 모든 이야기들은 남성의 시각에서 이루어졌다. 심지어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리베카가 제시하는 「여자가 읽지 말아야 할 책 80권」 목록은 의미심장하다. <에스콰이어>지가 소개한 ‘남자가 읽어야 할 최고의 책 80권’의 책목록을 비튼 것이다. 리베카 솔닛이 우려하는 것은 이 목록을 좇는 독자가 이들 책을 통해 여성을 배우게 될 텐데 그들은 “여자를 배우고 싶을 때 찾아가야 할 전문가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는 남자들”이라는 점이다. 즉 이들 책은 여성혐오적인 시선이 가득한 책들로 익히 아는 작가들의 이름이 끝도 없이 등장한다. 탐정류의 소설에서 강간은 어떤가. 강간은 강간범이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옷이, 여성이 먹은 것이, 여성이 간 장소가 저지르는 것처럼 묘사된다. 

“남자들은 일종의 날씨처럼, 주변에 감도는 자연력처럼, 우리가 다스리거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불가피한 무언가처럼 추상화 된다. 이런 이야기에서 남자들 개개인은 사라지고, 강간과 폭행과 임신은 여자들이 적응할 수밖에 딴 도리가 없는 날씨가 된다.”


이 나라에는 이런 식의 이야기가 많다. 믿는 사람이 바보가 되는 이야기, 가난의 원인이나 인종차별의 결과와 같은 현상을 드러내기보다 덮어 감추는 이야기. 결과에서 원인을 떼어내고, 의미를 멀찍이 치워버리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에 명확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새로운 인식이다. 오래도록 배제되었고 있음에도 그것을 명할 언어가 없었다면 이제는 개개인이 겪고 있는 경험을 묘사할 단어를 만들고 여성들의 이야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사물을 보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인식을 위한 새로운 언어를 만드는 일, 여성은 이야기가 필요했다. 침묵하거나 답정녀의 세상을 살지 않기 위해서, 나아가 더 자유롭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차별과 편견의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갖는 일은 그렇기에 필요하다. 결국 리베카 솔닛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그 진정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 힘닿는 데까지 진실을 말하는 일, 어떻게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지를 아는 일, 특히 과거에 침묵당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일, 수많은 이야기가 서로 들어맞거나 갈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 혹시 우리가 가진 특권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해서 특권을 없애거나 그 범위를 넓히는 일. 이 모든 일이 우리가 각자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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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합격, 계급 - 장강명 르포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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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라서 서평


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 민음사, 2018.


  공채제도가 한국사회에만 있는 제도였나? 아무튼 이 책은 한국사회에 있는 수많은 공채제도 중에서 특히 문학공모전에 관한 르포다. 저자는 ‘공채라는 특이한 제도, ‘간판’에 대한 집착, 서열 문화, 그리고 기회를 주기 위해 기획된 시스템이 어떻게 좌절을 낳게 됐는지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문학공모전에 중점을 두고 공채제도가 가지는 현실의 문제와 대안에 대해 다루고 있다. 관련 종사자들의 인터뷰와 자료를 풍부하게 조사하여 다양한 사례를 든 취재 형태로 작가가 전직 기자라는 점이 소설보다 확실히 느끼게 한다.

  장강명은 문학계 공채제도의 혜택을 많이 받은 작가다. 많은 문학상 수상작가라는 타이틀과 기자전력 사회현실을 다루는 소재들을 글로 녹여냄으로써 스타작가가 되었다. 그래서 또한 그런 작가가 기본적으로 문학 공채제도에 대하여 부정적인 전제를 두고서 다루는 취재기는 어떤 흥미진진함과 통찰이 있을까, 기대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책을 통해 공채라는 시스템이 누군가에게는 희망이기도 했음을 좀더 느끼게 되었다는 아이러니.


미국의 사회학자 토비 허프는 서양에서 근대 과학이 발전하고 동양에서는 그러지 못한 것을 인재 평가 방식의 차이에서 찾는다. 동양에서는 국가나 스승이 젊은이들의 능력을 평가했다. 그런 사회에서는 젊은이들이 선배들이 세운 기준을 충실히 다르게 된다. 반면 유럽의 대학에서는 일찍부터 논쟁과 토론이 발전했고 이는 체계적인 회의론으로 이어졌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한국식 공개채용 제도가 과연 불합리한 제도일까. 세상에 완벽한 시스템은 없으니 어떤 시스템이라도 문제가 존재한다. 생각해보면 공개채용은 한국에서 가장 비리가 없는 제도라고 인식된다. 문제은행식 시험이든 어쨌든 공평하게 문제를 풀고 맞은 개수에 의해 합격이 가려지는 이 방법에 대해 특별히 불편부당한 제도라고 하지 않고 오랜 세월 흘러왔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이 개입되는 모든 것을 믿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문화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 한국 문화 자체가 공채제도 이외의 다른 평가방식을 감당할 여건이 미흡한 것도 같다. 미국 사회학자 토비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다.

  저자는 공채제도가 사회적 계급을 형성한다고 지적한다. 공채제도의 지나친 경쟁은 합격은 곧 간판을 얻는 것, 권력을 얻는 것과 같게 된다. 합격자간 군대와 같은 기수문화 형성으로 수직적이고 폐쇄적인 구조가 형성됨은 물론이다. 반대로 불합격한 이들은 열등감과 패배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공채제도가 아닌 다른 형태의 채용 시스템은, 어떤 장단점이 있는가에 관한 진지한 취재가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서양에서 주로 이루는 심층면접과 추천에 의한 채용제도의 한국 적용이 공채제도를 뛰어넘는 대안이 되리란 보장은 없다. 오히려 이러한 제도가 더욱 암울해 보인다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시스템을 보면 알 수 있다.

  주로 다루는 것이 문학상이니 문학상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문학상 출신 저자는 이 문학상제도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또한 많은 문학상 지망자들이 문학상 제도에 대한 신뢰가 없는 것으로, 그러면서도 다른 길이 없기에 문학상에 도전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른 길이 없다는 의미는 자기 책을 낼 기회를 말한다. 가장 쉽고 빠르게 자신의 책을 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장편문학상 공모전에서 수상하는 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장강명처럼 여러 공모전에 도전하는 기출간 작가들이 늘었고 거대 상금을 내건 공모전 또한 폐지되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공모전 제도에 대한 대안으로 다른 형태의 책출간 방식을 이야기한다. 몇 개월 사이 5권의 책을 출간한 인기작가, 김동식 작가의 예를 든다.


김민섭 작가는 김동식 작가가 왜 잘 돼야 하는지를 설명했다고 한다.

“소수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어 ○○문학상이라는 간판을 달고 작가가 되는 일, 그러한 제도권의 선택이 아닌 독자들이 만들어 낸 작가라는 것‘도’ 가능한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고, 여러분은 거기에 동참했고 그 증거가 지금 여기 앉아 있다고, 했다.”


  ‘왜 잘 돼야 하는지’에 대한 김민섭 작가의 김동식 작가의 사례에 대한 의견은 참고할 만하지만 한편에서 바라보면 ‘소수의 권력자’에 의해 간판을 달고 작가가 된 사례에 다름 아니다. 단지 특정 커뮤니티 게시판에 글을 올리며 게시판 이용자들과 교감하며 쓴 글들을 책으로 엮은 줄 알았더니, 거기엔 김민섭 작가의 적극적인 역할과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명한 간판을 단 이의 적극적인 마케팅에 힘입은 바와 심사위원의 심사를 통한 문학상과 차이는 있지만 또한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런 의문이 든다. 소수라고 하지만 심사위원은 차라리 복수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나는 젊은 한국 신인 소설가 두 사람이 책을 내고 독자를 만난 과정에 의미시장한 공통점,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공통의 결핍 지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독서 공동체다. 김동식, 또는 이진이라는 신인 작가의 신간 한국 소설이 나왔는데 읽어보니 준수하더라, 또는 보통이더라, 또는 시원찮더라는 이야기가 오가는 공간. ‘우리 작가’라며 무조건적으로 열광하지도, 미등단 작가(또는 문단 작가)라며 외면하지도 않는 공간. 두 작가의 작품을 비교하면 어떤지, 지난달, 지난해에 나온 다른 신인 작가의 작품에 비하면 어떤지 토론하는 공간. 그러다 적절한 맥락에서 호시 신이치와 프레드릭 브라운과 역대 수림문학상 수상자들의 이름과 작품이 언급되는 공간. 그런 대화와 평판이 계속해서 쌓여 가는 공간. 그래서 예비 독자에게 정보를 주고, 독서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공간.


  취향없이 흥미와 재미를 느끼기도 전에 공부로 길들여진 독서, 읽어야 할 책 목록을 보며 읽는 책, 누군가 유명한 이가 읽거나 추천하는 책들을 읽는데 적극적인 독서 시장과, 독자들. 길들여진 한국사회의 ‘독서’의 세계인데 저자는 독자의 몫이라 말한다. 어떤 형태로든 서평을 쓰라고 말한다. 독자들이 더 많이 책을 읽고 책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와 수준을 가져야 한다는 것, 책을 읽고 이야기할 수 있는 문화적 공간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 맞는 말인 듯한데 몹시도 허무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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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8-08-18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내용이었군요. 르포형 작가라는 인식이 강해 그닥 취향이 아니어서 스킵했는데, 읽어봐야겠어요. 이 소설은 특히 작가가 직접 소속되어 있는 분야라 거의 사실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모시빛 2018-08-20 08:10   좋아요 1 | URL
그 분야 관계자의 얘기를 듣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그 세계가 그렇구나, 나름 정보를 얻기도 하구요.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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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참 불쌍타의 시절을 지나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문학동네, 2018.


  그러고 보니 영미소설의 대다수, 수많은 작가의 책을 정영목 작가의 번역으로 읽었다.   저자는 27년간 200여 권을 번역했다고 하니 놀랍고도 가늠되지 않는다. 이 책은 어떤 작가보다도 기억에 남는 번역가 정영목의 번역의 방법과 번역에 대한 생각이 녹아 있다. 독자들이 말하는 ‘번역투’ 문장에 대한 생각, 번역의 역할과 번역가로서의 자세, 번역과 글쓰기 등에 관한 저자의 고민과 생각 등은 번역 작가들 덕분에 여러 나라의 저작을 편하게 읽어왔으면서도 쉽게 ‘아, 번역투’라고 하던, 책이 흥미롭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으면 쉬이 ‘번역탓’으로 돌리던 것을 쑥스럽게 한다.

  레미제라블이 처음 번역되었을 때, “너 참 불쌍타”라고 번역되었다고 김영하 작가의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이윤기 작가의 신화관련 책에서 도대체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고 영어 원문을 기재하지도 않은 ‘육준강대의’의 정확한 뜻을 찾아 원서찾기 전쟁을 벌였던 일이 생각난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은 가장 머리를 아프게 했던 번역서였고 배수아 작가가 독일에서 유학하고 로베르트 발저, 페르난두 페소아와 같은 작가들이 국내에 소개·번역되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난다.

  작가의 맛, 느낌을 알고 싶어 원문을 애타게 읽어보고자 했던 적도 있고 영미권이 아니라 동구권, 아랍권, 제3세계 작가들의 작품에 끌리는데 번역되어 있지 않아 읽지 못하고 있을 때의 기분은 답답함을 넘어선다. 그나마 영어로 번역된 것을 재번역하여 나온다면 환호하게 되는데 여러 면에서 우리나라 번역의 세계는 가야할 길이 멀고 고달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 작가들의 좋은 작품들이 제대로 번역되지 않아 세계에 알릴 기회가 적다는 것, 또한 노벨상 후보로서의 위상을 얻는 일이 힘들다는 것,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의 오역 논란 등이 지속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마냥 안타깝기 그지없다.


서류 양식의 번역이라면 모르지만 소설의 번역은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배우처럼 불가분의 육체성이 번역에 붙어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를 교환하고 이해하는 영역에서는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 개입하거든요. 아닌 척하고 싶지만, 투명한 체하고 싶지만, 번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 번역가의 무엇인가가 책 속에 남을 겁니다. 


  AI가 바둑 세계 제패에 이어 번역과 창작에까지 진출한다는 건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저자는 기계의 번역에 대해, 특히 소설 번역은 ‘사람의 일’이라고 말한다. AI가 멋진 번역가가 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말에 안심했던 사람으로서 번역이 사람의 일이라는 저자의 말이 와 닿는다. 계속 사람의 일이었으면 한다.


기계에게는 인간처럼 읽는다는 것, 즉 해석을 통하여 창의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오히려 읽지 않는 쪽이 효율이 좋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고, 따라서 기계는 텍스트를 읽는 길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그 나름의 우회로를 거쳐 인간번역과 같은 수준, 혹은 더 나은 수준에 이를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 우회로는 인간의 길과는 다를 것이다.


   저자는 번역가의 과제는 완전한 ‘번역’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언어’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문체를 우리말로 잘 옮기는 것을 중시하는 저자의 생각이 책 한권 한권을 번역하는 동안 번역의 원칙과 방법이 되었다. 이 책은 번역가가 되려는 이들에게 유용한 책이겠다. 번역이란 무엇인지 번역하면서 부딪치게 되는 고민들, 나만의 원칙과 방법을 찾아가기까지의 저자의 노하우와 깊은 생각들이 같은 직업을 선택하려는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생각할 때는 자기 학대적인 면과 과대망상적인 면이 공존하는 듯하다”는 저자의 말이 확, 와닿는다. 그래서 일이란 언제나 힘들다. 내가 하는 일에서 원칙과 방법을 세워 나가는 일이 비록 자기학대를 부추기는 일일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함으로 일을 대한다면 때론 과대망상쯤은 허용될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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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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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지 오래됐다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교양인, 2018-02-14.


  내 인생의 영화라고 꼽을 만한 것이 없다. 딱히 영화를 즐기지 않으니. 이 폭염 속 극장에서 음료를 마시며 시원함을 즐기는 영화에 대한 환상도 없다. 가기까지가 귀찮아진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은 연례행사가 되기 일쑤다. 아니, 영화관에 가는 일이라고 해야 하나. 갑자기 ‘혼자서 보는’ 이라는 말이 낯설어진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과연 혼자서 하는 일인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보는 아는 누군가가 없이 영화를 본다는 말이다. 영화관은 사람으로 넘쳐나니까. 그럼 이건 혼자서 하는 게 맞나?! 그렇게 보면 철저하게 혼자서 하는 건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책을 읽는 시간은 철저히 ‘혼자’라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영화보다는 책이 혼자서 하기에 알맞은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해본다. 당연, 작가는 이런 질문을 예상했듯이 이렇게 말한다.


‘혼자서 본 영화’가 ‘나 홀로 극장에’라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영화와 나만의 대면, 나만의 느낌, 나만의 해석이다. 나만의 해석. 여기에 방점이 찍힌다. 나의 세계에 영화가 들어온 것이다.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같은 몸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 몸(뇌)에 자극을 준 영화에 대한 해석은 모두 다를 것이다. 한 작품을 천만 명이 본다면 그 영화는 천만 개의 영화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하는 것에 대한 매력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여 이야기를 들어본다. 하지만 이 책은 혼자서 보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혼자서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인생 문제를 해결해주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에 타인이 필요치 않고,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외로움을 원한다고 말한다. 인생문제가 대부분이라도 해결된다는 이 뻔뻔스러운 고백에 28편의 영화를 보는 저자의 시선을 따라간다. 영화에 대한 감상보다 ‘혼자서’에 더 꽂혀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픈 마음이 더 크지만, 영화마다 시선을 녹여내는 작가를 따라가다 나도, 여러 생각에 잠기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자는 가족과 사회에서의 사랑과 상처, 젠더와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관한 평소의 시선을 그대로 녹아 낸다. 다양한 영화들 그 에피소드들에서 저자가 생각하고 주장하는 바에 관해 더욱 세밀한 시선을 채집하며 사회에서 수동적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여성에 대해, 그렇게 만드는 사회의 시선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희진 작가의 책을 읽었다면 젠더에 대한 저자의 시선을 알기에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강철비> <의형제> <용의자> <공조> 영화를 관통하는 시선은 재밌게 봐진다.


당대 남한 여성들의 낭만적 사랑의 욕구가 반영된 ‘남북’ 영화는 역설적으로 북한 여성이나 남한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성애 제도에서 보는 사람(관객)이 여성일 때, 대상(화된 인물)은 남성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사라졌다. 그래서 이런 영화들을 남북 화해와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영화라고 평가하는 것은 사실이 아닐뿐더러 위험하다.


  한때 북한은 ‘나쁘고 악하고 아름답지 않은‘이 총체적으로 형상화되었다. 그러던 것이 공공경비구역 JSA 즈음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최근 잇따른 북한이 소재로 등장하는 영화에서 북한에 대한 묘사는 확연히 달라진다. 북한 남성들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기본으로 멋진 외모까지 갖춘 남성으로 등장한다. 저자는 그런 변화에 영화의 주소비층인 젊은 여성들의 욕망, 북한 남성 판타지가 숨어 있다고 말한다. 젠더의식이든 이데올로기든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늘 자본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자본주의가 강자다. 이데올로기를 전환시키는 그 탁월함.

  

우리가 본 영화는 우리의 인생과 붙어 있다. 몸으로 영화를 본다. 영화의 내용은 감독의 ‘연출 의도’가 아니라 관객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누구나 자기의 삶만큼 보는 것이다.


  영화에서 저자가 집어내는 상처와 문제들은 대부분 젠더 문제로 귀결된다. 저자의 말처럼 영화를 보는 내내 저자가 살아온 삶이 어디에 머무는가를 보여준다. 타이타닉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장면이 화로에 끊임없이 석탄을 넣고 있는 노동자라고 말했던 운동권 선배의 시선을 떠올린다. 나는 책이든 영화든 이 사회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때그때 달라요… 그래도 책을 읽고 생각을 주절거리는 것이 인식 확장을 위한 노력의 한방편이라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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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히샴 마타르 지음, 김병순 옮김 / 돌베개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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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버지의 부재에 대처하는 자


귀환, 히샴 마타르, 돌베개, 2018-03-30.


  소설이라 여기고 읽던 책이 퓰리처상 논픽션 부분 수상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등장인물 한명 한명의 현재가 어떤지 알고 싶어졌다. 그렇게 찾은 한 명의 기사에선 익숙한 냄새가 흘러 넘쳤다.

  “독재자 카다피의 차남, 올해 리비아 대선 출마”

  

   이 책은 작가인 히샴 마타르가 실종된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여정이다. 그의 아버지 자발라 마타르는 어디에 있는가. 카이로, 뉴욕, 런던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는 히샴이 여덟살에 떠나온 나라는 리비아는 지금도 내전으로 정권이 안정되지 않고 난민이 속출하고 있다. 이런 불안정한 나라를 만드는데 커다란 공을 세운 이는 1969년 군사 쿠데타로 리비아를 장악해 독재자로 군림한 무아마르 카다피다. 작가 히샴의 아버지 자발라는 카다피 정권에 반대하며 이집트 카이로로 망명했지만 영향력있는 자발라는 1990년 3월 12일 카이로에서 이집트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어 리비아의 아부살림 교도소에 수감된다. 히샴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히샴의 삼촌과 사촌도 많은 이들이 카다피 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수감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1996년 6월 29일 아부살림에서 1270명의 정치범들이 학살당했고 이후 아버지의 소식은 끊어졌다. 그러나 이날 이후로도 아버지를 보았다는 증언이 있었기에 히샴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은 리비아의 역사이자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꿈꾸는 이들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히샴의 할아버지 하메드 마타르 또한 이탈리아 식민 통치에 투쟁했으니 리비아의 국민들은 오래도록 주권을 찾고 독재에 맞서는 투쟁의 역사를 지속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마침내 40년 독재집권자인 카다피는 이들 국민들의 저항과 투쟁으로 2011년 카다피는 축출된다. 그렇게 아랍의 봄이 왔고, 수감되어 있던 히샴의 삼촌과 사촌은 석방되었지만 아버지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1996년의 그 아부살림 교도소의 학살 현장에 아버지가 있었으리라는 것이 확실하고 사실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장면처럼 히샴에게 스며들기도 했다. 아부살림 교도소의 처형이 있던 그날 히샴이 6년 동안이나 감상했던 그림 대신에 마네가 그린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이라는 그림을 오래도록 보고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운명을 느낀 어떤 힘의 작용을 믿게 한다. 무척 슬픈 장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계시리라는 희망을 가지던 가족들은 이제 명확한 언어로 그날의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려 한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히샴 또한 반정부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투쟁에 힘썼고 그또한 독재에 저항했다. 이 요구에 협상자로 만나게 된 독재자 카다피의 차남 세이프 알 이슬람은 지연작전을 쓰며 방해하더니 그의 포지션을 아주 잘 정하여 실천했다.


세이프의 측근들은 그를 비롯해서 삼촌들과 살레에게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석방 소식을 전했다. (…) 의례적인 인사말과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이 모든 것이 끝나자, 그들은 석방을 위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위대한 지도자에 대해 지금까지 반대했던 것을 공식적으로 사과한다는 서류에 서명하는 것.”


  세이프는 시위에서 정부 당국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의 가족에게 어떤 사과나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2011년 민주화 시위가 확산되었고 카다피는 은신처에서 시민군에게 체포되는 중 사망했다. 아랍의 봄이 없었다면 강력한 카다피의 후계자로 군림하였을 세이프는 카다피 집권 당시 대량학살 혐의 등으로 기소돼 2015년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곧 사면되었고 복역한 지 6년 만인 2017년 출소했다. 그리고는 곧 정계 복귀, 대통령 출마 선언까지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 익숙한 행보…리비아는 지난날의 고통을 잊었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선보인 그 앞날을 보지 못한 건가.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아들이 다시 정권을 잡는 미래는 어떻게 될까. 학살과 사치의 독재자의 아들이 반성도 없이 사과도 없이 당당히 제 존재를 과시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 태어날 때부터 독재자의 아들로 권력을 쥐었던 자의 ‘나라를 위해서’라는 말이 헛헛하게 들린다. 그의 무개념과 나라를 제 것으로 여기는 몸에 밴 갑질적 사고가 불쾌를 넘어 치가 떨린다.   

  세이프가 독재자의 아들이라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세이프의 행보가 그가 제시하는 리비아의 미래를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비전과 신념은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 대한민국의 독재자의 딸과 닮아 있다. 단지 그 딸이 독재자의 딸이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딸이 가지는 가치와 신념이 ‘독재자의 가치’를 우러르고 칭송하고 있기에 반대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간 대한민국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일들이 널려 있다. 2대에 걸친 독재정권에 의해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고, 가족들은 ‘죽음’을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들을 히샴처럼 찾고 있을 것이다.

  갈 곳없는 반독재 활동가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주던 히샴 어머니의 말없는 희생을 기억하는 누군가처럼 수많은 이들이 독재에 맞서 투쟁했고 희생했다.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이들, 그들은 히샴의 아버지처럼 억압의 시절들 속에서도 “어떡하든 살아남아라, 어떡하든 살아남아라”라는 메시지를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히샴이 이미 돌아가셨음을 인지하는 아버지의 행적을 찾는 것, 그가 이 험악한 독재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메시지를 다져가기 위한 길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히샴은 오디세우스와 텔레마코스를 그의 아버지와 자신으로 치환시켜 이런 생각을 전한다.


오랜 세월 동안 내 마음 한구석을 늘 차지했던 이 친숙한 시구가 처음으로 그 의미가 달라지고 확장되었다. 그 말들은 이제 텔레마코스에 대한 것만큼이나 오디세우스에 대한 것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것은 자기 아버지가 여생을 고향 집에서 편안하고 위엄 있게 살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은 아들의 바람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래서 마침내 아버지가 편안하게 집을 떠나 고개를 돌리고 정면을 바라보며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해드리고 싶은 아들의 소망에 관한 이야기다. 오디세우스가 길을 잃고 헤매는 한 텔레마코스는 집을 떠날 수 없다. 오디세우스가 집에 없는 한, 아무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는 모든 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

   

“걱정 마라. 난 잘 있어. 난 잠시 지나가는 폭풍에 흔들리지도, 약해지지도 않는 산과 같은 사람이야.” 

  “깊은 미로 같은 동굴 안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극도의 절망 속에 유폐된 느낌”을 받았던 히샴의 생각의 전환은 아버지의 여정을 찾는 과정이 있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아버지와의 헤어짐이 방향감각을 잃고 길을 잃기 쉽게 한다는 그의 속내가 오랜 여정의 끝에 길을 찾음을 보게 될 때, 아버지의 부재는 부재가 아니었음을 느끼게 한다. 아니 올바른 방향을 나아가는 아버지의 부재는, 결코 부재로 남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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