홧김에


아주 친밀한 폭력 - 여성주의와 가정 폭력

정희진, 교양인, 2016-10-24.



  “아내 목 조른 남편 “징역 4년”… 납득 되나요?“

 기사를 보자 자동적으로 클릭한다. 몇몇 사건 판결을 두고 형량이 적당한지 설문조사한 결과에 관한 기사다. 대표적 보기 네 개를 본 순간, 제목에서부터 불편함을 느낀다.

 ①홧김에 아내 목 조른 A씨(징역 4년)

 ②함께 도박하던 이를 흉기로 찌른 B씨(징역 7년)

 ③내연녀의 남편을 살해한 C씨(징역 12년)

 ④한밤중 주거 침입 강도살인 D씨(징역 30년)


 ①번에 생략된 것은 “아내를 죽였다”, 첨가된 것은 “홧김에”.

  다른 사건들이 객관적인 사건을 서술했다면 ①번은 중요한 사항은 누락하고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심되는 ‘홧김’이라는 단어를 추가했다. 기사가 제대로 전달되려면 이 사건에 대한 것은, “아내 목 졸라 살해한”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다른 사건은 제쳐두고 ①번에 눈이 갔는데, 물론 법정 판결이 4년인데 그 이유가 홧김이니까 저렇게 썼다고 본다. 그런데 홧김이 과연 이유인가, 홧김은 살인자의 주장이 아닌가. 이 사건을 지배하는 것이 “홧김에”라는 사실에 분노를 느낀다.

  상습적인 구타와 폭력에 남편을 살해한 ‘아내들’ 사건의 경우 “계획적”이라는 말로 10년 이상이 확정된 사건을 너무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그래, 그 순간엔 홧김일 수도 있겠다. 지극히 남편 혼자 주장하는 ‘홧김’. 그러나 ‘남편’ 자주, 상습적으로 ‘홧김’이 된다. 그렇다면 이 상습적인 ‘홧김’은 의도적인 것이 아닌가.

  “10대 딸 차로 치고, 별거 아내 강제 추행 `폭력남`...징역 3년”

  며칠 전 기사 때문에도 내재된 분노가 단지 이 폭력 남편때문만은 아님은 명백하다. 마침 그날의 기사는 딸을 성추행한 상담교사를 살해한 엄마에게 징역 10년이 선고되었다는 거였고, 그 살인은 계획적이라는 판단이 내려졌고, 무엇보다 법이라는 제도가 있음에도 ‘사적 복수’를 행하는 것이 용서할 수 없는 죄임을 명백히 했다. 

  그런데… 이 나라 법이 아내 폭력에 대해 안전망인 적이 있던가. 4년 넘게 별거한 아내도 이혼한 아내도 제 것인양 강간하고 죽일 권리를 행하는 이 사적인 화풀이의 행태는 수십년이 지나도 법적인 제제를 받지 않는가. 법의 권위는, 아내 폭력 사건에 관해서는 제 스스로 차버려도 좋은가. 그것이 또다른 체제를 위함인가.

  여기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은 현실에서 늘상 경험하는 일로 분노와 학습된 무력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또다시 현실을 깨우고, 이론적인 무장을 더해주는 책이다. 왜 ‘홧김’이라고 말하는지, 그럼에도 그것이 무방한 이유를 알려준다. 별거한 아내, 이혼한 아내에 대한 상습적이고 변태적인 행위를 해도 된다고 하는 남편의 이유를 알려준다.  

  놀라운 건, 이 책이 작가의 대학원 논문이었다는 글을 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 책은 수십년 전의 사례라는 것이다. 사례자들이 30~40대 초반이 많았다. 남편의 나이도 그 또래라 생각하면 가해자들 역시 여전히 이 현실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수십년 전의 그 가해자들이 오늘날 사건의 또다른 주인공일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이 사례자들의 일들이 어제, 오늘, 지금 당장 벌어진 일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 주위를 둘러싼 공적 영역이나 사적 관계의 생각과 느낌들 모두가, 전혀, 옛날과 이어져 있듯이 그대로다. 페미니즘 때문에 여성인권이 높아졌느니 하며 불편한 시선을 던지다 못해 여혐이 확산되고 있는데, ‘아내’는 여성이 아닌가.

  아내 폭력이 당연시되는 여전한 현실을 접하며 작가는 이 아내 폭력의 문제는 당연하게도 사회가 부여하는 남편의 권리, 가부장제도가 당연시하는 권력의 문제라고 말한다.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관점에서 아내 폭력의 문제도 해결하는 형태로 접근하기에 폭력의 피해자인 ‘아내’에 대한 것이 전혀 없다. 폭력의 희생자를 가해자의 집안으로 고스란히 돌려보내는 이 관대한 법의 처사는 그 둘레에 “가부장제”가 내두르고 있는 힘이다. 가족유지. 왜 가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되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끔 한다. 그 가족은 누구를 위한 가족인지가 명백하다는 점, 오랜 동안 길들여진 이 가족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타당함, 아이들을 위해서, 아이 교육을 위해서 참는다는 아내들의 말, 그러나 가정폭력이 교육에 나쁘다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작가의 말은 왜곡된 가족주의가 아내를 얼마나 억압하는가를 보여준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간단하다. 가정폭력이 아니라 ‘아내 폭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폭력의 해결 방안은 결코 ‘가족주의’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가족주의라는 개념에 ‘아내’의 인권은 없고 아내의 권리도 없고 오로지 타당하게 희생당할 요인들을 만들어 준다. 아주 기본에서 시작해야 한다.


 인간이 모든 공동체에는 권력 관계와 갈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 공동체는 없을 것이다. 가족을 인간이 만든 사회적 제도라고 인정한다면, 가족이라고 해서 권력 관계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며 그것은 다른 사회 조직도 마찬가지다. p250~251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쇼코 2017-08-0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요즘 뉴스에 여성혐오범죄가 심심찮게 보도되더라고요. 그래서 페미니즘 관련 도서를 찾아 보고 있는데 왜 진작 관심을 두지 않았을까 반성하고 있습니다. 아직 이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는데 모시빛님의 리뷰를 보니 당장 읽고 싶어 지네요.

모시빛 2017-08-09 23:54   좋아요 0 | URL
정희진님의 글은 이론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쉽게 이해되는데 특히 이 책은 폭력을 다루고 있어서 더욱 절절하게 다가왔던 것 같네요. 우리나라의 정서와 상황에서 얘기되니까 좋구요. 물론 읽다 보면 사례들 때문에 마음이 무겁고 화나긴 하지만요...
 


1989.12.6=2016.5.17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 외롭지 않은 페미니즘

이민경, 봄알람, 2016-09-30.


  몇 년 전 찰나 언니가 여성사에 대한 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얼른 여성운동사에 관한 책이 나오면 좋겠다고 했다. 필요하다고 해야 하는 일 아니냐고 했다. 2014년이었다. 그때만 해도 여성운동사에 관한 책은 있는데라는 생각만 했다. 이 책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를 읽고 나서야 그때, 찰나 언니가 말한 맥락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나는 불청객 취급을 받으며 외롭고 공허하게 외치다가 어느 결엔가 묻혀버렸을 내 조상의 목소리를 찾아 헤맨다. 나와 닮은 얼굴을 한 그들이 원했을, 여전히 한탄스럽지만 제법 나아진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고 자신의 후세에게 금세 부정당할 이는 결국 누구인가? p145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는 여성운동사의 계보를 이은 여성들의 이야기다. 일반적인 위인전과는 다른, 그러나 여성운동에 있어서, 차별받는 여성의 삶의 변화와 전환점을 가져오도록 노력한 이들의 이야기다. 결과만 기억하고 결과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은 깡그리 잊어버리거나, 알려 하지 않거나, 무심했던 사건에 새로운 기억을 새기는 작업이고 그렇게 잊혀지지 않을 여성들의 이름이 채워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변호사이자 호주제 폐지운동을 시작한 인물, 이태영 변호사. 함께 일한 스승인 유명한 임신 전문 한의사를 찾는 사람들이 전부 아들 낳는 처방만 바라는 것을 보고 남아 선호와 여아 낙태를 비판하며 호주제 폐지제를 위해 애쓴 고은광순 한의사. 강간과 성폭력 사건에서 여성에 씌어진 모멸적이고 부당한 법률을 개정하도록 노력했던 이들과 피해자들. 이들의 지난한 희생과 노력으로 변화를 위한 법률이 제·개정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진행되지 않는 법률도 있고 그렇기에 노력하고 있는 이들이 또한 있다.

 계보를 살펴보면 느끼듯이 단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나긴 기간 동안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으로 인한 무수한 피해자가 있었다. 그 피해의 터 위에서, 더 이상 피해를 당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노력한 순간과 세월들이었다.

  

이번 살인 사건에서 여성이 사망한 것은 우연한 일이지 여성을 일부러 범죄의 타깃으로 삼은 게 아니다. 또한 살인범도 사회구조의 희생자였고 정신병 때문에 일을 저지른 것이다. 이 일을 정치적으로 끌고 가서는 안 된다.“ p140 


  위 단락은 작년 벌어진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논평이다. 그런가? 그렇게 보인다. 당연히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똑같다.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살인 사건이 벌어진 후 나왔던 말과 너무나 똑같다. 이 말은 1989년에 벌어진 캐나다 몬트리올 총기난사 당시에 나왔다. 캐나다 몬트리올 총기난사 사건은 1989년 12월 6일 캐나다 공과대학에서 여학생들만을 강의실로 몰아넣고 “페미니스트들을 증오 한다” 27명에게 총기를 난사한 사건이다. 14명의 여성이 사망했다. 여전히 캐나다 시민들은 이 사건이 발생한 날 추모식을 진행하고 있다. 그런 만큼 사건이 벌어진 당시에도 이 사건 이후의 파장은 거셌다. 총기규제 검토뿐만 아니라 여성폭력과 여성혐오에 대한 이슈가 확산되었다. 이때,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라 규정하기 꺼리던 이들이 내세운 주장”이 바로 위 단락과 같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강남역 사건이 발생한 후 일단, “절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는 목소리를 내기에 급급했다. 무엇이 그토록 강남역 사건이 “절대로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저 “묻지마 범죄”이고 그저 “정신병자의 실수”라는 주장이 단순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공식적인 형태로 규정되어 쾅쾅쾅 도장받듯이, 그러니 끝났다는 듯이 언론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개인 단위가 아니라 특정 단체, 정부, 언론 등을 통해 사건의 본질 규정과 이로 인해 벌어진 분위기에 대한 타당하고 명확한 추론과 분석은 차치하고 그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결론”냈으니 더 이상 그 말은 말라는 듯한 분위기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오히려 그러한 분위기로 인해 여성혐오 분위기가 확산되었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그토록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어야 한다는 성마른 논평과 주장들 때문에.

  이처럼 이 책은 비단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에만 주목하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들도 주목한다. 그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여성문제에 관한 한 같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성차별에 관해 개혁적이고 차별이 덜하다는 나라들, 그냥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조차도 성평등과 관련해서는 여전히 개별 사안에 대해 먼저 관련 법개정을 이루거나 먼저 그 상황에 대한 변화를 이루었다 뿐이다. 어떤 부분에 관해서는 진보적이다 싶다가도 다른 사안에 관해서는 여전히 구시대의 관습을 따르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어떤 계기가 마련되지 않으면, 어떤 ‘사건’이 벌어진 후에라야 그 일을 다르게, 바르게 볼 시선과 의지를 가지는 것이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공간의 차이만 있을 뿐 여성과 관련한 사건들에 대한 반응은 어찌 이토록 시공간을 초월해 같을까.

  그러한 ‘사건’ 속에 있던 피해자들에게 위로를 ‘사건’을 통해 잘못된 점에 대해 온갖 모멸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바로 잡으려 노력했던 이들에게는 박수를 보낸다. 이러한 인물들이 계보가 아직 더 있으리라 본다. 계보는 계속되어야 한다.

  이 책과 전작 <우리에게도 언어가 필요하다>의 아쉬운 점이라면 이야기를 담는 형식에 대한 것이다. 편집이 매끄럽지 않다. 맛있는 음식을 돋보여주는 그릇의 역할을 생각할 때 교정과 편집에도 신경을 쓴다면 좀더 내용을 충실하게, 편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들쭉날쭉한 글자크기, 의미없이 느껴지는 문장정렬 등이 사실 지나치게 급하게 인쇄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특히 이런 주제의 책에 대해 일단 반감부터 가지고 보는 독자들도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나올 다음의 책들은 조금 더 짜임새 있는 편집형태로 책이 나왔으면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트롱맨에겐 의식 정화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봄알람, 2016-08-02.


  “집에서는 안 그래요. 부드러운 남자에요.”

  집에서 부드럽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집에서는 안 그런데 왜 밖에서는 그렇게 행동하는가. 어떤 행동은 집에서 하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밖에서 해서는 안되는 말과 행동이라는 것은 있다.

  여러 가지로 두 부부의 발언에 적잖이 놀라고 있다. 나랏일을 하겠다고, 큰일을 할 사람이라 자청하며 목소리 높이고 있는 누군가의 ‘언어’는 개인의 언어로서도 부적절하다. 하물며 한 나라를 이끌어갈 대통령 후보의 언어라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투표일을 앞두고 뱉은 말들을 주워 담기 위해 ‘이해시키려’ 쏟아내는 말들은 오히려 앞의 언어가 ‘한번 삐끗’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 언어가 빠져 나온 통 속에는 동종의 언어가 가득함을, 언어통을 지배하는 ‘인식세계’의 수준이 어떠함을 드러낸다. 이 인식체계에서 주워 담은 언어통 속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같은 의미의 무한재생일 뿐이다. 그들이 이해를 시키려 노력하면 할수록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이다. 이 책 작가의 말대로 이해란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니까.


생각해 보면 ‘이해를 시키려 노력한다’는 말, 묘하게 모순입니다. 이해란, 원래 시키는 게 아니라 하는 겁니다. 대화를 마치고 ‘이해시키느라 힘들었다’는 소리가 나온다면, 상대가 해야 할 이해를 도와주는 노력을 했는데 그게 힘에 부쳤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럼 힘을 키우면 될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계속 말하겠으나 당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잠깐, 이해가 누구 몫이어야 하는지는 짚어둡시다. ‘이해’가 성립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누가하고 있는지도 봅시다. p21


  “설거지를 어떻게…. 남자가 하는 일이 있고, 여자가 하는 일이 있다.

 남녀 일은 하늘이 정해준 것이다”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여성 비하, 성차별 발언이라며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자 아들은 “아버지는 집에서는 설거지, 청소, 빨래도 자주 하시고 라면도 잘 끓이시는 자상한 분”, 부인은 “빨래도 잘하고 설거지도 잘한다”라며 아버지를 두둔했다, 가 아니라 아버지가, 남편이 말한 것이 거짓말임을 밝혔다. 거짓말하는 대통령은 안된다면서 참 쉽게도 거짓말 하는 대통령 후보를 만난다.

  이 발언이 ‘여성혐오적 발언’이라고 사과하라는 요구를 받자 후보는 “스트롱맨이라서 웃자고 한 소리다” “센척할려고 한 소리다” 라고 변명했다. 웃자고 한 소리라는 말에 정작 웃을 수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하는 건가. 더 정색할 말이 이어진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말도 자당 후보를 향한 비판에 유권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언어’를 구사한다. 아니 수습의 언어라고 해야 하나. 같은 통에서 꺼낸 말로 당 대변인은 한마디 덧붙였다. “설거지 발언은 이 시대 남성 심경을 대변한 것이다.”

  이 말이 여성혐오의 표현만이겠는가. 남성차별의 언어이기도 하다. “강한” “멋진”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여성을 폄하”하는 데 기대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강함의 진정성은 있는 것인가. 그 강함은 자립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여성을 비하하고서야, 여성을 깔아뭉개고서야 비로소 제 위치를 형성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여성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또한 그 속에는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성혐오”의 표현을, 행동을 감행하는 이율배반적인 행태도 분명 포함되어 있다. 이 잘못된 언어의 중심에는 결국 잘못된 전제와 잘못된 인식이 바탕에 있는 것이다.

  이 “강한”남성들의 세계관은 여성비하, 폄하 못지않게 남성 자신들의 비하와 폄하를 일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강한 남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여성혐오를 하용하면서 “남성적이지 않은 남자들”을 지적하고 걸러내 또한 차별하고 있음을 정녕 모르고 있는 건가. 아니,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러기 위해 행하는 행동이라는 데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다.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행하는 행동, 절대 바꾸고 싶지 않아 외면하는 행동 패턴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원히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 하는 그 인식세계다. 굳이 가부장제를 끌어 오고 싶지 않지만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얻어낸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스트레스와 공포를 주는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여성집단”을 차별함으로써 이 무한 경쟁 사회에서 경쟁 대상을 줄이고 싶은. 정의와 평등의 언어가 아니라 혐오의 언어로 제 존재적 증명을 펴려는 그들만의 언어의 세계. 이 혐오의 언어가 ‘개인’의 언어가 아니라 점점 집단화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배제하려는 이유는 결국 제 것을 더 갖기 위한 발악이다. 한편으로 이 여성혐오의 언어는 물론 주욱 이 나라에서 이어져오고 잘 써먹어 온 말이다. 그러나 변화하지 못하는 소멸되는 언어로 만들지 못하는 건 헬조선 사회가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며, 특정한 권력이 그것을 더욱 부추기는 이유 아닐까.

  

 이 책 <우리에게도 언어가 필요하다>는 사실, 다른 페미니즘 책보다 그렇게 흥미를 당기진 않았다. 최근 페미니즘 관련 책들이 너무 쏟아져 나와서 비슷한 경험과 이야기들을 반복해서 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분명, 환호할 정도의 공감이나 끄덕거림보다 뭔가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오늘 문득, 한 대선 후보의 발언에 반응하는 내 언어가 이 책에서 말하는 바와 별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르침이 필요한 사람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창비, 2015.


폭력은 타인을 침묵시키고, 타인의 목소리와 신뢰성을 부정하고, 내게 타인이 존재할 권리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한 방법이다. p18~19


  성차별과 인종에 대한 편견이 크게 문제로 부각된다. 충격적인 일들과 함께 접하기도 하지만 coincidence와 같이 황당한 상황과 함께 전해지면 이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어두운 밤 외국 여성에게 다가가 coincidence의 발음을 어떻게 하는지 요청했다는 이 남학생에게 외국 여성은 밤9시에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낯선 이에게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거절한다. 이에 남학생은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한다. 물리적 위협까지 느낀 이 여성은 경비원을 부르고 큰길로 나갔다. 마침 지나던 여학생들이 달려와 괜찮냐며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상황을 진정시킨다. 이 와중에도 남학생은 “영화를 보면 다 그렇다고, 외국인들은 다들 잡담을 한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비상식적이고 이기적인 남학생의 행태만큼이나 나를 비탄에 빠지게 한 것은 두 여학생에 관한 것이다. 이 외국인 여성의 눈에는 남성이 마구잡이로 화를 내는 상황에서 두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거듭 사과를 하는 듯이 보였다는 것이다.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보였다고 했으니까. 이 상황에서 남학생이 자신을 ‘성추행범’ 혹은 그 이상으로 오해하는 듯해 격분했다라고 말을 했다면 차라리 이해가 더 쉬웠을 것이다. 저런 황당한 말을 하면서 잘못을 외국인 여성에게로 돌리며 제가 화를 계속 내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찰뿐이고, 그런 남학생에게 여학생들이 사과를 하는 맥락은 도대체 뭐인가? 이것은 너무나 익숙한, 자주 보아야만 했던 모습 아닌가.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남자친구에게 빌고 있는 풍경. 아무런 안면없이도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


 남자는 욕망과 그 욕망이 퇴짜 맞을지도 모른다는 노여운 전망을 함께 품고서 여자에게 접근한다. 분노와 욕망은 늘 함께 존재하며, 두 가지가 마구 뒤엉켜 한덩어리가 된 상태에서는 언제든 에로스가 타나토스로, 사랑이 죽음으로 바뀔지 모르는 위험이 존재한다. 가끔은 정말 말 그대로 된다. p46 


 남자들이 자신의 감정적,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분노로 반응하는 것은 너무나 흔한 현상이다. 다른 여자들이 자신에게 했거나 하지 않은 일을 갚아주기 위해서 엉뚱한 여자를 강간하거나 처벌해도 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p193~194


  한국의 대학교에서 일어난 이 ‘coincidence’ 사건에서, 외국인 여성은 러시아 출신, 이 학교 외국인 교수였다. 남학생은 이 여성이 교수임을 알았으면 달리 행동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하라고 조언하였지만 이 교수는 학생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기로 했다. 이 학생의 행동이 “왜 용납할 수 없는 것인지를 교육하는 것”은 교수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며.


 나는 학생의 행동이 성차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밤 9시에 외진 곳에서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면서 낯선 백인 남성에게 접근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성차별적이라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일은 대중 매체에 보도된 사건들을–한국에서, 그러나 한국 외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남성의 불쾌한 접근을 여성이 거절했을 때, 그 여성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여성을 괴롭히거나, 여성을 폭행하는 사건들 말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강간 문화”라고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즉,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리 주장과 폭력을 제도화하는 사회 안에 배태된 여성혐오적인 문화인 것이죠. 

        -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페도렌코 올가 조교수의 공개서한 중(中)


   이 공개서한에 남학생이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는 아직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교수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은 것은 매우 감탄스러운데 남학생 역시 그 감탄을 안다면, 제 잘못을 깊이 깨닫는다면, 다시는 이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까. 의식 깊이 쟁여놓은 이 여성에 대한 편견과 정형과 폭력성을 완전히 소거시킬 수 있을까. 올가 교수가 지적한대로 외국인 남성이었으면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아가 남학생이 올가가 ‘교수’인 것을 알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올가 교수가 말하는 바대로 좀더 예의를 갖추어 질문을 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남학생의 의도는 정말 저 단어의 발음을 궁금해 했을까를 의심케 한다. 그의 이어진 반응이 그것을 보여주고 일단, 올가 교수가 이 학생의 접근에 불쾌함과 공포감을 함께 느꼈다는 점이다.

   이 기사를 보고 이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가 떠오른 것은 “가르침을 받아야 할 남자에게 가르치는” 상황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리베카 솔닛의 이 책은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겪는 이런 차별적인 상황을 먼저 이야기하며 흥미와 공감을 이끌어 낸다. 그리하여 이 유사한 상황들에 웃음까지 나온다. 전세계적으로 같은 이 상황들, 현상들을 어쩌랴.

  수없이 세상은 변했고 수많은 이들이 사고방식이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도대체 그 ‘수많은’은 어느 정도를 이야기하는가. 이 남학생처럼 자기만의 사고방식에 갇혀 제 행동의 정당성을 폭력적으로 주장하는 상황을 반복해 맞닥뜨리게 되니, 이 세상의 페미니즘은 아직도 멀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성차별의식이 높아졌다고 말하는 동시에 반작용인지 여성혐오는 확산되고 있지 않은가.

 페미니즘을 여전히 여성도서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도 변화를 더디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다. 페미니즘이 포함하고 있는 양성적인 개념을 외면하고 ‘여성’에 한정지어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고의 전환은 인식의 전환은 이런 책을 외면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마치 금기의 도서를 보는 듯이 하지만,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다. 그것이 리베카 솔닛의 장점이다. 유쾌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통찰력있게 상황을 간파한다. 수전 손택과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신화 속 등장인물 카산드라의 이야기에서도 보다 생각할 거리들을 전개시킨다.

  그리고, 이 책은 짧다. 페미니즘의 개념 설명도 상당히 쉽다. 그녀가 주창하는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에서 보듯, 리베카는 설명을 아주 잘한다.


남성권리운동과 대중적으로 퍼진 숱한 오보들 때문에, 사람들은 요즘 성폭행 무고가 만연했다고 여기곤 한다. 집단으로서 여성은 신뢰할 만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된 강간 고발이 진짜 문제라는 암시는 개별 여성을 침묵시키고, 성폭행에 관한 토론을 회피하게 만들고, 남성을 주된 피해자로 부각하는 도구로 쓰인다. p169~170


   물론 이 모든 이야기들의 중심이 여성의 억압적인 상황과 여성성을 비하시키는 상황과 침묵의 세계에서 허덕이는 여성을 향한 정체성 정립이 주가 되고 있기에 흥미 유발이 안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페미니즘은 다 거기서 거기이니까,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새로운 담론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왜 거기서 거기인 이야기를 수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지, 그럼에도 수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 만큼 아는데도 왜 여전히 현실은 이 모양인지 말해 줄 수 있지 않는가. 계속 들으면서도 무시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리베카가 이야기하는 이 여성혐오와 폭력의 구조들에 대한 전개에 반론이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을 ‘가르쳐주지’ 않겠는가. 충분히 들을 의향이 있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른 체한 여자


  

   이 책은 대표적인 페미니즘 사상가들의 ‘페미니즘 테제’에 대해 다룬다. 이들을 페미니스트라 불러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 이들 여덟 명의 작가이자 사상가들이 당대 사회에서 펼친 페미니즘 논쟁은 그 자체로 페미니즘 이론의 역사를 보여준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고 외쳤던 시몬 드 보부아르, 남녀의 성적 차이를 주목한 뤼스 이리가레, 페미니즘에 관해 과학적 시선을 도입한 샌드라 하딩, 페미니즘적 도덕심리 이론을 주장한 캐롤 길리건, 여성적 글쓰기를 제기한 엘렌 식수,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로서 페미니즘적 차이의 정치를 옹호한 아이리스 영, 급진적 페미니스트라 불리며 ‘퀴어’이론으로까지 확장시킨 주디스 버틀러,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정치경제학 담론을 제기한 줄리 그레이엄과 캐서린 깁슨.

  우리나라 여덟명의 학자와 교수들이 이들 페미니스트이자 사상가들 주장의 핵심과 문제, 비판, 대안을 이들 생애와 더불어 기술한 책이다. 이론이란 어떻게든 쉽게 이해하려 해도 지끈거리는데 각 사상가들의 사상을 잘 정리해서 보여주고 있고 이들 사상의 문제점과 다른 이들의 비판, 그리고 대안을 잘 설명하고 여러 생각거리를 잘 짚어주고 있다.

  결국 이 모든 핵심 테제들은 여전히 핵심적인 사항이다. 이들 페미니즘 사상가들의 치열한 논쟁으로 젠더 논쟁이 더 활발하게 확산되고는 있지만 그들 시대에 고민했던 문제들이 여전히 주요한 논쟁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뭐라 말할 수 없이 답답한 일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차별과 여성혐오를 뛰어넘어 함께 공존하는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노력, 성적 차이가 차별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믿음과 생각들이 이들이 이러한 테제를 생각하게끔 했을 것이다.


  끊이지 않는 논쟁. 더 나은 대안을 찾을 수도 없이 과거의 어느 시점에 맹목적으로 종속되어 논의가 전개되고 그 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로 ‘여성의 존재’만한 것이 또 있을까.

  당혹, 분노, 좌절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을 항해케 하는 일련의 사태 속에서 중구난방 확장되는 이야기 중에 제법 불편한 이야기들이 들린다. 쉽게 건너뛰지 못하고 시선이 머무름은 일차적으로 내 탓이긴 하지만 본질과는 다른 접근에 내 분노의 수위가 분산된다. 더 힘을 쏟고 모으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난제 앞에서 누군가 자꾸 문제를 희석시키는지. 이와중에도 어의없는 편가르기와 ‘어그로짓’에 재미들려 걸신들린 듯 하는 이들의 행태가 여당의 모습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대통령이 저질러 놓은 일이 하루하루 흘러 넘쳐 폭발할 지경에 이른 2016년 현재, 분명 지금 한국인의 관심은 대통령과 최순실에게로 집중되어 있다. 사건이 폭발한 시점부터 여러 날이 지나 감각에 무뎌질 때도 됐을지 모른다. 어디까지 해쳐 먹었니라고 할 건들은 반복적으로 종류만 다르게 해서 나타날 것이고 불통, 악랄함, 공감능력 결여를 넘어 무능과 멍청이, 칠푼이, 꼭두각시 대통령의 이야기는 더욱 축적되어 가고 알면서도 모른체한 인간들에게 또 속아 저런 것들에게 정권을 맡겨 아름답고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 달라 한 반푼이 국민이 된 상처가 결코 아물지 못할 트라우마로 남을 이 판국에.

  이 모든 것은 ‘여자’들이 설쳐서라니! 그래서 앞으로는 여자 대통령은 뽑아서는 안된다라니! 역시 여자는 안된다라니! 정권에 아부하고 또는 조종하고 권력을 행사하고 이권에 매달린 국회의원과 장관들이 수두룩하게 많은데, 왜 유독 특정한 ‘여성’ 정치인들만을 골라 잡아 여자라서 저 모양이고 여성가족부가 문제라는 말이 기승전-결로 이어질까. 대단하게도 이 세계를 뒤흔들고 말아먹는 역할을 담당한 건 남자들이었음에도 특정한 몇몇의 ‘악녀’들을 선정해 잘 굴러가는 나라와 남자를 망하게 했다는 오물은 ‘여성’에게만 지워진다.

  명백히 남성과 여성의 성차이는 있다. ‘여성성’, ‘남성성’이라는 이 고정된 이미지와 성차는 극복해야 할 문제가 되어왔으며 차별이 아닌 차이, 다름으로 인정하자고 흘러 왔다. 이 차이는 다름이지 능력의 차이가 아니기 때문에. 남성성으로 상징되는 ‘힘’의 사회에서 ‘여성성’으로 상징되는 ‘공감’의 사회변화에 따라 여성적 특성을 요구하는 분야가 자본주의 사회에 더 요구되고 있기도 하다. 어쨌든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게서 ‘여성적 특성’을 요구하였나? 애당초 ‘여성’에 방점을 둔 것이 아니라 ‘누구의 딸’에 더 방점을 둔 선택이었고 호도였다. 아마도 아들이었으면 추종세력들에겐 더 좋았을 것이다.

  지금의 여성 대통령 박근혜는 그 자신이 가진 성별 특성의 능력을 요구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무성적 존재에 더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미혼이기에 여성적인 역할에 대해서도 기대한 바 없었다. 만약 그녀가 박정희의 딸이 아니었다면 오히려 미혼이라는 점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데 장애로 작용했을 것이다. 왜냐, 한국사회는 ‘미혼 여성’은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로 더 정확한 말로 아직 ‘애’라고 생각하는 나라니까. 남자의 보살핌 속에서 그 역할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팽배하니까. 그랬던 시절이 뻔한데 왜 새삼 ‘여자’란 탓을 하는가. 애당초 여자란 것을 알았음에도 ‘모른 체’ 했던 일들을 잊어버리고 말이다. 종로에서 빰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하듯 ‘여성’임에 대해서는 부차적으로 여기다가 왜 ‘여성’이라고 화를 내는 것인지. 문제를 일으켰으면 잘못된 행태에 대해 비난하고 비판해야 하는데 그저 여자라는 이유로 모든 일들이 설명된다는 듯한 말과 비아냥에 오히려 그동안 대통령이 저지른 짓이 묻힐까 안타까울 정도다.

  먼 나라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들었다. 거기에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나오려는 시점이니까. 하지만 국정수행을 잘못했을 경우 나올 말은 여전히 ‘여자’라서 안 된다에서 ‘역시 여자라서 그것밖에’ ‘여자는 안돼’라는 말일 것이다. 국정수행을 잘못한 무수한 남성 대통령에게 ‘오, 남자라서 안 돼“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개별적 존재로 보지 않고 여성 전체로 매도하는 이 습관적 여성 차별은 뼛속 깊이 DNA에 박혀 있는 것일까, 문화적으로 길들여진 것일까.

  ’현대 여성 페미니즘의 테제들‘은 지금의 여성에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똑같은 이야기가 몇백년, 몇천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현대 여성 페미니즘의 테제들‘이란 주제 하에서 논의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끔찍스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