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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감 - 대중문화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
김성윤 지음 / 북인더갭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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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후’의 세계에 들어가려는 이들에게



  우선, 덕후감이라니. 언젠가부터 폭발하고 있는 덕후의 세계에 관한 책일까. 이와 같이 생각한 사람들이 있다면 저자에게 제대로 낚였다. 저자는 제목인 덕후감에 대해 ‘독후감’의 고의적 오기이며 ‘덕후의 감'의 줄임말이라 말한다. 조금 늘여 말한다면 덕이 후한 감상문이다. 덕이 후한 감상문이라고 말랑말랑한 글을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저자는 대중문화에 관해서도 거기에서 드러나는 역사적 쟁점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의 덕후감이란 오타쿠 비평이 아니라, 대중문화 속에 투영된 현실의 모습과 소망을 정치경제적적 맥락과 역사적 의미를 더해 분석한 책이다.

  이를 테면 걸그룹의 출현과 함께 튀어나온 삼촌팬의 등장에 소비적으로 보거나 롤리타로 퇴행으로 보는 상황에서 왜 ‘삼촌’인가에 주목한다. 이 삼촌이란 지칭에는 걸그룹 스타에 대한 이성애적 욕망의 금기를 은연중 상기시키고 있는데 실제로 삼촌팬들 중에서는 걸그룹의 노랫말에서처럼 ‘오빠’에 더 열광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럼에도 ‘삼촌’이라는 지칭은 걸그룹에 대한 성적관계와 거리를 유지하려는 가족적 친밀성을 더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전략이 패권주의적 남성성의 사회에서 벗어난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남성성으로까지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을 비하했다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식으로까지 번졌던 박재범 사태가 있다. 명명백백하고 급박하게 여기에 전개된 시선은, 애국주의였다. 한국에 대한 비평에 관대하지 못하며 다시금 대한민국 국민의 애국심과 애국주의가 얼마나 깊고 강한지를 표하는 것으로서 이 모든 것은 논의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과연 애국주의였을까에 의구심을 표한다. 이 사건은 적확하게 보건대 문화적인 차이나 오역의 문제, 또다른 이해가 대립된 사건이었고 애국주의 이전에 ‘평등주의에 대한 요구’가 있다고 말한다. 디워, 유승준, 황우석 등등도 애국주의로 대표되는 사건들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들릴 것이다.

   “지배권력으로부터 핍박받는 가상의 마이너리티에 대한 동일시와 ‘다 해 처먹는 꼴불견’에 대한 박탈감과 분노 등은 분명 평등주의적 정서와 일맥상통한다(p139)”라고.

  애국주의와 뗄 수 없는 민족주의에 대해서도 한번 보자. 저자는 숭례문 방화 사건을 예로 든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서 “민족적 자존심의 붕괴를 투영시켰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사건 전에 민족적 동질성은 붕괴되었고 그것은 관념적이고 상상적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파악해야 할 것은 국가, 행정당국의 무능력이다. 그리고 이 무능력이 민족-국가라는 신화를 종결시켰다고 말한다. 숭례문 방화 사건은 일견 한 개인의 행동으로 분노와 증오범죄라 하지만 개인의 증오와 분노의 대상을 민족적 상징물로 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배제에 대한 테러이며 소멸되지 않는 이데올로기를 드러내 준다고 말한다.

  혼혈인 하인스 워드의 한국 방문과 이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는 결국 일회적인 것처럼 보인다. 분명 그것을 계기로 다문화주의와 사회통합 논리가 확산되었지만 지금, 많은 사람들이 다문화주의에 대해 피로감과 적대적 감정을 노출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논리는 제대로 ‘먹히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간과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 내재하고 있는 것일 지도.

 대중문화가 우리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저자의 대중문화를 읽는 코드는 분명하다. 그는 대중문화를 해리포터의 ‘소망의 거울’에 비유하는데 거울이 주는 환희에서 벗어나 거울과 나의 관계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며 이를 바라본다. 여기에 분명 정답은 없다. 옳고 그름도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무언가에 대해 논의하는 장이 적다는 것은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다양한 시각이 공존하고 그 시각이 논의 속에서 자유롭게 전개되고 개진될 때 세상은 더욱 발전해 갈 것이다. 문제를 파악하는 눈이 더욱 많아지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정보사회의 발달과 개인 블로그 등의 활성화로 논의의 장은 늘어난 것 같지만 논의다운 논의의 '장'은 옅어진 것 같다. 분명 어떤 방향으로의 이야기, 어떤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통제되고 억압되고 있기도 하고 또한 너무 격해져서 부러 논의를 회피하기도 한다. 오히려 이야기가 생각이 줄어들고 있는 세상이 되고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만, 대체로 언론이겠다 싶지만, 계속 들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우리는 너무나 통제에 짓눌려 있고 소위 '전문가'라는 권위에 짓눌려 있기(물론 전문가에 대한 존중때문이기도 하다만) 때문에 내 '시각'을 떨치지 못한다.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하지만 한번씩 이건 왜 이렇지? 저건 왜 그렇지? 이런 의문을 가지고 궁금해 하고 생각해 보았던 면들을 저자의 글에서 맞닥뜨릴 것이다. 단지 그 의문에서 깊게 들어가지 않았을 뿐일 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세상이 너무나 한편으로만 몰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에 ‘피로감’을 느끼는 경우이다. 어떤 현상이 나타날 때 그것에 대해 분석하고 해석하고 이유를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특정한 이데올로기로, 특정한 이익을 대변하여, 특정한 권력에 의해 한쪽으로만 치우지고 당연 그래야 한다고 논의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에 지극한 피로감과 답답함을 느끼는 이들이여. 누구는 음모론이라 할 지 모르나 어쩌면 명확한 예리함일 수도 있다. 마녀사냥처럼 일순간 특정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논의들 속에 의문을 느낀다면, '어 저건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든다면, 전문가가 그렇다고 다수가 그렇다고 얘기함에도 모호함이 느껴진다면, 한번쯤 만들어보자. 내 식으로의 사회를, 대중문화를 바라보는 방식을. 그리고 어떻게 발을 떼야 할 지 모르겠다면, 한번 덕후의 감을 느껴봐라. 분명 내가 느꼈던 거야라는 생각에 반가움이 느껴질 것이다. 곧 또다른 이들의 덕후감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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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 우주와 과학의 미래를 이해하는 출발점 사이언스 클래식 25
리사 랜들 지음, 이강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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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기에 문학적인 ‘천국’의 의미를 생각했던 난 우주와 과학의 미래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라는 소제목을 보고서야 이 책이 과학분야임을 알았다. 안타깝게도 일찍이 제물포(제 때문에 물리 포기했다) 출신인 나에겐 이해하고픈 욕구와는 별개로 이런 종류의 책을 읽기전에 내가 아는 과학상식과 물리이론이 뭐가 있지가 선행하는 까닭에 별빛이 반짝이는 파아란 표지의 책을 보고서도 읽을 타이밍을 두고 고민했다. 물리학 이론에 대해 먼저 공부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공식을 구하라는 책은 아닐테니 최대한 정신사납지 않은 날을 골라 이 책을 읽어야 하지 않으리라고.

 때론, 선입견이 좋은 결과를 낳는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그랬다. 제물포로서 책을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생각, 과학 분야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재미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사라졌다.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을 아주 편안하고 재미있게 읽었다. 이것은 작가의 힘인가.

 일단, 이 책은 현재의 이론 및 실험 물리학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하는 독자들과 건전한 과학적 사고의 원칙 및 현대 과학의 본질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한 것이고, 과학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를 바로잡고, 과학이 현재 이해되고 적용되는 방식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저자의 불만을 배출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씌어졌다(p10).고 저자는 말한다. 이런 불만을 가진 저자 덕분에 내가 가졌던 불만이 겹쳐지며 흥미가 유발되고 고조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 우주는 여러 면에서 숭고하다. 우리 우주는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복잡함 때문에 우리를 주춤하게, 심지어는 두렵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부분들은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서로 어울린다. 예술, 과학, 그리고 종교는 모두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우리 이해의 최전선으로 우리를 밀어붙여서 우리를 계몽한다. 이것들은 모두, 각각 다른 방법으로 개인의 경험이라는 좁은 제한을 초월하도록 도울 것이고, 우리가 숭고함의 영역에 들어가도록, 그리고 이해하도록 허용된다(p81).


 우주든 과학이든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그것 자체에 대한 중요성 이외에도 이 사회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적용되느냐로 연결된다. 과학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될 때 가끔은 과학은 독립적인 영역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것의 접근 방식이 과학적 사고라 명명되며 기술적이고 체계적인 부분이 주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과학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 역시도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더 잘 살아가기 위한 이해를 갈구한다는 점에서 과학은 단순히 ‘과학자’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세계와 맞물린 사고의 영역을 넓히는 우리 모두에게 과학은 필요하다. 역사적으로 과학은 끊임없이 종교와 대립, 갈등을 유지하였지만 종교를 종교로서 이해하게 되는 바탕에 역시 과학의 역할은 중요했다.

  이 책을 통해 물리학 이론이나 우주를 탐구하는 것이 발견의 차원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과학자들이 그들의 탐구를 어떻게 이해하고 다루는지에 대한 방식을 이 책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다만 과학자이자 물리학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물리학이론, 과학적 질서의 본질, 진실보다 사회에 어떻게 적용되느냐의 방식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과학적 사고로서 세상을 설명할 것이고 그들의 탐구의 결과를 토대로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영역에서 그들의 탐구의 결과를 각자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적용할 것이다. 과학자들이 우주를 접근하는 방식과 그로 인해 나타난 이론의 변화에 따라 어느덧 사람들의 사고도 관점도 변화해가고 있음을 보면서 과학적 접근과 이론들이 일상 곳곳에 잘 스며들어 있는지도 느껴지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은 많은 이론들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과학이론을 통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한 책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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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업 사회 -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의 미래
구도 게이.니시다 료스케 지음, 곽유나.오오쿠사 미노루 옮김 / 펜타그램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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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누구나 무업 상태가 될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무업 상태에 처하게 되면 그로부터 빠져나오기가 힘든 사회를 ‘무업사회’(p26)라고 정의한다. 무업 상태에 빠지게 되면 인간관계나 사회적 관계 자본 및 의욕까지도 함께 잃어버리기가 쉽고 인간관계를 상실하면 충고나 응원을 받는 것도 어렵게 되고, 자기 긍정감이나 동기부여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쉽다(p30). 일본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하지만 영 낯설지가 않다. 그렇다. 이런 청년들의 습은 우리에게도 단지 명명만 달리한 채 일상화되고 논의되고 있다. 일찌감치 삼포세대, 칠포세대를 넘어 헬조선이라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업사회는 한 부분의 모습이다.

  무업사회의 핵심은 ‘그로부터 빠져나오기 힘들다’라는데 있다. 개인이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고려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것이 능력의 모자람이라는 이유로 여러 재능을 업그레이드 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상황이다. 능력과 적성이라는 문제는 차치하고 ‘일자리’를 ‘잡아야’하는 게 현실이다. 그러니까 무업사회의 현실, 무업자가 증가하는 상황은 경기 침체나 노동환경 악화와 같은 사회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청년’에 온갖 수사여구를 들이대며 청년들에게 ‘열정’을 강요한다. 불합리의 요소에 힘들어하고 반박하는 이들에게 ‘철없음’과 ‘어리석음’과 ‘고난을 극복할 의지가 없는’ 애들이라는 낙인을 찍으며 그들이 부여한 ‘청년’ 앞에 놓인 수식어와의 괴리를 슬퍼한다. 자신들이 살아간 가난한 사회에서의 그 열정이 왜 요즈음의 청년들에게는 없는지를 비교하며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놓았더니 한없이 나약한 낙오자를 만들어놓았다며 한탄한다.

  이러한 프레임 속에서 다양한 청년 무업자들이 세상과는 단절된 채 살고 있다. 저자는 고도 성장기에 구축된 ‘일본형 시스템’과 ‘사회 안전망’의 부실이 변화된 노동조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청년 무업자들을 양산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청년들은 나라의 미래이므로 청년 무업사회를 그대로 두면 사회의 지속가능성이 위협받는다며 이에 대한 정책과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저자가 주장하는 무업사회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 일단, 저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청년들에게 가해진 수식어의 문제를 지적한다. 청년들에게 씌어진 부정적인 인식, 나약하고 게으르다, 그래서 일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오로지 개인의 성격의 문제로 치부되면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개인이 문제라고 한다면 속출하고 있는 수많은 청년 무업자라는 ‘개인’의 상황이 당혹스럽게 여겨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한 인식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장애가 된다면 그 인식을 바꾸는 것이 당연, 필요한 일이다.

  결국 이러한 개인이 늘어간다는 것은 누구나 무업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꼭 새겨봐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일하지 않는 것과 일할 수 없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저자는 일단, 10여 년 동안 현장에서 NPO 활동을 하며 만난 수만 명의 무업자에 대한 정성조사와 2,300건의 정량조사를 통해 분석한 자료를 토대로 사회경제적인 이유를 무업사회의 원인이라 보면서 무업상태인 청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한다.

  저자들의 조사 결과 ‘청년 무업자’의 75.5%가 취업 경험이 있었으며, 한 번도 일한 적이 없는 사람은 24.5%로 나타났다. 이러한 통계적인 결과들을 보더라도 청년 무업자들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하고 싶은데 일할 수 없는 상태’,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질병·부상’으로 일을 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것은 일을 하면서 무리한 업무와 작업 환경의 문제로 질병을 얻은 경우이다. 청년 무업자들을 일을 하기 싫어하지 않는 게으르고 무능한 청년들이라는 상태로만 바라본다면 이와 같은 형태의 청년 무업자들의 문제를 해결할 길은 없다.

  이 책이 실제로 청년 무업자들의 상태를 수치로 나타냄으로써 청년무업상태의 깊은 내용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객관적인 수치를 바탕으로 이들이 더 깊은 무업의 수렁으로 빠지게 되는 이유를 면담을 통해 알아가는 것은 이미 오해와 편견 속에 갇힌 사고로 문제를 바라보는 이들의 잘못된 방법이 문제를 더욱 양상하고 있었음을 실감하게 한다.

  어떤 형태로든 무업 상태가 길게 이어지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지속된다. 심리적인 위축에 빠지며 지속적인 악순환에 처한다. 게으르고 무능하여 무업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무업 상태가 이들에게 심리적인 위축을 가져다주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저자는 무업 상태의 청년들에게 취업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이것의 성과가 없는 것은 오로지 이 무업 상태의 문제를 ‘취업’에 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경우도 실업률을 높이기 위한 단순한 일자리 창출을 만들어 취업률 높이기에 혈안이 된 정책들이 양산되고 있다. 하지만 평생을 위한 일자리가 단순한 생색내기형태의 정책으로 급속히 창출된다 한들, 지속되는 문제 해결의 방안이 되겠는가.

  사회는 일하는 청년세대가 고령의 세대를 돌보는 형태의 시스템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청년들이 GDP 생산에 앞장서며 사회보장의 책임을 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에 책임을 담당할 세대가 없다는 것은 사회 전체의 어두움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당장의 정당지지율이나 선거의 표를 의식한 정책이 아니라 실질적이고 안전한 정책이 마련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절실한 이유이다.

  고도 성장기에 만들어진 ‘일본형 시스템’과 ‘사회 안전망’이 청년 무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면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 ‘일본형 시스템’은 ‘일본적 경영’, ‘일본적 복지사회’, ‘중앙집권적 재분배 시스템’으로 구성된다, 특히 ‘일본적 경영’은 ‘신규 졸업자 일괄 채용’, ‘종신 고용’, ‘연공서열형 임금’, ‘기업별 노동조합’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 제도에 맞추어 청년들은 취업준비를 하고 교육기관은 이에 맞추어 취업지도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탈락하면 새롭게 이 사회에 진입할 수 없으며 직장생활이 사회생활과 직계되기 때문에 그 어떤 사회참여가 어려운 상태를 만든다. 또한 일본은 최소한의 복지, 잔여적 복지만을 시행함으로 사회복지가 필요한 이들에게 전달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문제를 양산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 못하다.

  우리나라 역시, 어느 순간 선진국형의 사회보장제도가 아니라 일본형의 사회복지를 선호하고 있다. 그러니까 보편적 복지가 아니라, ‘삼성 회장 손자에게도 무상급식이 필요하냐’와 같은 말로 선별적인 복지를 주장하는 것이다. 정부에서 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복지만을 주장하며 사회안전망을 축소하려 한다.

  청년 무업자가 양상되는 상황과 그에 대한 해결방안은 우리사회와 너무 닮아 있다. 무엇보다 ‘인식’이, 그들에게 가해지는 오해와 편견들이 문제해결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그래서 같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도 객관적인 통계자료로 편견의 시각을 반박해 주고 선거로 인해 회심성의 정책이 양상되지 않기만을 이 책을 통해 일본이 전해주는 미래사회의 암울함을 제발 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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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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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텍스트의 해석과 실천


 라캉, 푸코. 그리고 르장드르.

 명확성, 명료함과는 상관없이 라캉과 푸코에 빠져든 때가 있다. 이해하지 못함에서 오는 집착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줄곧 내 스스로 이해하는 것으로 텍스트를 읽어가라고. 이해되지 못하면 반복하고 그럼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들을 들여다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위안하며 독려하면서 놓지 못하던 텍스트들. 그리하여 타인에게 라캉이나 푸코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해 줄 깜냥과는 별개로 오로지 끌림으로서 글을 읽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번 사사키 이타루의 야전과 영원도 그 연속선상에 있다.

  그 때문일까, 생각보다 가벼운 맘으로 텍스트를 읽을 수 있었다. 사실 그 어떤 텍스트에 대한 해석, 그에 따른 논쟁들은 항상 재밌는 요소이니까. 나의 이해와 타인의 이해를 이리저리 비교해가며 책을 읽는 맛은 또다른 난해함에 허덕이는 결과를 낳지만, 그 자체만으로 행복하기 그지없다. 내가 이해한 텍스트를 다른 이가 어떻게 이야기를 하는지는 눈앞에 상대를 앉혀 놓고 토론하는 듯이 여겨지며 그래서 더 끙끙 앓기도 하게 되는.

  서문을 읽으면서부터 이 책은 밤새 쌓인 눈을 처음 밝는 듯한, 사각이는 촉각과 사각하는 청각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문체의 영향이 큰 듯하다. 대부분의 철학서, 사상서들이 지적용어를 곁들인 채 만연체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면 이 책은 매우 간결하다. 그래서인지 읽는 순간에는 이상하리만치 명료함을 느낀다. 무언가 이해를 하고 넘어가는 듯이 책장의 넘김이 자연스러워진다. 덧붙여 시적인 느낌까지. 거듭 밤사이 쌓인 눈을 처음 밟는 듯한 느낌으로 읽어가게 되는 책이다. 책의 제목마저도 야전과 영원이라니. "영원“한 ”밤“의 ”투쟁“에 바치는 책.

  

시계는 어둡고 도통 믿음직스럽지 않다. 그것의 승부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쓰는 일의 우연성이야말로, 쓰는 행위가 본질적으로 도박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야전과 영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책의 중심에 있는 개념이다. “영원한 야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통일된 시점 따위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영원한 야전”이다.(p17)


 야전과 영원은 푸코, 라캉, 르장드르의 텍스트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다. 저자의 텍스트 해석은 이렇게 이야기된다. “통일된 시점”이라거나 “필연성” “전체성”을 보장하는 “끝(종언)”을 무슨 이이 있어도 부정한다고. 텍스트의 존재 방식을 갱신해야 한다고. 거기에 끝도 없고 새로운 시대도 없으며 단지 “다른 형식의 요청”에 답할 필요가 있다고.

  

우리는 고안해내야 한다. <준거>와의 다른 관계를. 어떻게 쓰면 될까? 어떻게 춤추면 될까? 어떻게 노래하면 될까? 어떻게 그리면 될까? 어떻게 낳으면 될까? 어떻게 이야기하면 될까? 어떻게 먹으면 될까? 갖가지 고안이 혁명의 긴 도정을 위해, 그 자체가 혁명인 도정을 위해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중세 해석자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이 직전까지 유스티니아누스와 트리보니아누스의 가공할 서적 50권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무엇인가 잊고 있을지도 모른다. (p434)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단순히 활자에 대한 탐욕을 넘어서 내가 글을 읽는다는 행위가 종국에는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단순한 지적욕망과 자기만족, 그리고 덧붙여진 습관을 통해 책을 읽으며 결국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끊임없이 이해하고자 하는 텍스트에 매달리는 것은 그 자체에만 의미부여를 하는 것일까.

 책을 읽는다는 것이 내 삶과 같이 움직이는 것이라면 그것이 내 삶의 양분으로 지속되어 나를 키우는 것이라면 나 또한 저자가 말하듯이 단순히 텍스트를 읽는 것에서 더 나아가야 하리라. 개념에 대한 문장에 대한 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을 넘어선 실천에 대한 의지까지를. 라캉이 푸코가 르장드르가 소쉬르가 한 말에 대한 텍스트의 이해를 저자의 생각과 비교하고 비교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진 함의에 대한 현실적인 적용을 어떻게 이루어낼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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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불감증]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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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분리와 도덕적 감수성



 어쩌면, 행복한 삶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박제된 감정으로 시선을 두고 있다면 헬지옥 사회에서 적어도, 행복이란 말이 적절치 않더라도, 분노와 우울의 감정으로 힘들진 않을 테니까.

  감정은 이성의 반대가 아니다. 감정은 이성과의 연결과 유대 속에서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이성’을 막아 놓은 상태에서는 당연 감정도 막힐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그래서 저자들이 얘기하는 ‘도덕적 불감증’은 당연하고 보편타당한 생각의 흐름을 통제당한 박제당한, 그래서 나도 모르게 억제시킨 결과일 것이다. 이성과 감정의 자연스러운 교류의 차단은 합리적 사고를, 합리적 감정의 분출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성조차하지 못하게 한다.

  삶을 둘러싸고 있는 그 공간자체가 차지하는 전방위적인 공포인 정치, 국가권력이 개인의 삶 하나하나를 철두철미하게 조롱하는 상황은 의식과 감성으로 완벽히 무장해도 깨지지 않은 채 이어진다. 표면적으로는 자유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자유를 자유화할 상황이 주어지지 않는 철저한 공포의 정치. 여기에 각 개인은 무지와 무기력, 굴욕감으로 대응된다. 그것이 가져온 결과가 감수성의 결여가 되고 악으로 귀결되는 것이 끊임없이 이어져 온 현실사회의 모습이다. 그래서 알베르 카뮈가 말했다고 하잖은가. 더 큰 선 등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범죄가 인간의 범죄 가운데 가장 극악하다고. 카뮈에 말에 언뜻 드라마 펀치의 대사가 생각난다. ‘선’의 편으로 여겨지던 최명길이 어쩌면 악의 편으로 대변되는 조재현의 악행을 끊임없이 막기 위해 대응하는 논리는 ‘그것만은 막고 싶다’였다. 그것, 악인이 행하는 ‘악’으로 인해 ‘선’이 좌절되고 파괴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점진적으로 보다 강한 ‘악’을 잘못된 것인지 모른 채 행하던.

 공포의 사회에서 마음속에 자라난 무지와 무기력, 굴욕감은 이렇듯 선과 악의 경계마저도 허물어 버린다. 타당한 이성이 압도되어 극악의 감정으로 침몰되는 이 깨져버리는 균형은 필연코 이성과 그에 따른 자연스런 감정을 잃게 한다. 폭력을 매일 보면 그것은 더 이상 경악이나 혐오를 불러일으키지 않고 우리에게서 자라나기(p93) 때문이다. 그리고 종국에는 망각하고 만다. 기억하지 않음이 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므로. 그러고 보면 오래도록 기억보다 망각이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어왔다. 끊임없는 혼란과 공포와 거짓 속에서 기억이 힘이 되리라 기대하던 오랜 시간들은 점점 망각이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까지를 안정시키는 일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현재의 삶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추구하기에 이미 우린, 욕망을 껴안고 있는 존재들이니까.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은 일견 수긍이 되기도 하면서 이해를 거부하고픈 말이다. 욕망이란 다양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욕망의 종착역이 같다는 전제를 부여하니까. 마치 욕망은 한정되어 있기에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욕망을 쟁취하지 않으면 나의 욕망이 충족되지 못함이 당연한 듯한 귀결로. 같은 욕망덩어리를 배분하는데 누구든 최종적인 승자가 되기를 원하므로. 타자의 욕망이 나의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한 언제든 빼앗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불안과 두려움, 공포를 조장하며 순응화시키는 것이 공고히 권력화된 정치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몰고 가는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것일까. 우리의 굴욕감도 무지도 무기력도 전복될 수 없는, 변혁될 수 없는 것일까.

 욕망의 분리가 필요한 것은 그래서다. 타자의 욕망을 내 것화 하지 않을 때, 각각의 욕망을 지닌 개개의 인간으로 분리할 때 비로소 나와 너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각각의 욕망이 충족될 수 있는 방법은 타인의 욕망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욕망들이 숨쉬는 환경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그 모든 욕망들이 실현될 수 있음을 이해하고 갈구할 수 있는 방법적인 것을 이룰 수 있는 것. 물론 욕망이란 바람직한 것이어야 할 테고. 욕망들이 타인의 것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도덕적 감수성의 문은 열리게 되지 않으려나. 누르는 대로 억압하는 대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에 갇혀서 늘 대립하고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욕망을 채워나가는 것이 함께 굴욕감을 던져버리는 것임을. 함께 경직했던 이성을 부여잡고 그에 따른 감정도 채우는 일임을 알아간다면.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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