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그레이드 또는 리셋


호모 데우스- 미래의 역사, 유발 하라리, 김영사, 2017-05-15.


  그런 것도 같다.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데우스가 되려 한다. 스스로 창조해낸 ‘신’이 되고자 한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한 세계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신이 만들어낸 세상의 규율을 쫓으며 ‘영원’히 살아갈 세상을 꿈꾸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유발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 담고 있다.

   이야기를 창조하고 허구와 신화를 창조하며 협력한 호모 사피엔스가 과학기술로 기아, 역병, 전쟁까지 해결한 이후에는 이제 정복할 것은 신의 창조영역이다. 신은 창조되었는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인지, 무엇을 믿든 간에 불멸, 행복, 신성을 갖고자 하는 인간을 유발 하라리는 신이 된 인간, 호모 데우스라 명명했다. 그리고 신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했다.


신성을 획득한다는 것이 비과학적인 말 또는 매우 엉뚱한 말로 들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흔히 신성의 의미를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성은 모호한 형이상학적 성질이 아니다. 그리고 전능함과 똑같은 말도 아니다. 인간을 신으로 업그레이드한다고 말할 때 그 신은 성경에 나오는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보다는 그리스 신들 또는 힌두교의 천신들을 말한다. 우리의 후손들은 제우스와 인타라처럼 약점, 꼬인 구속, 한계를 가질 테지만 우리보다 훨씬 더 큰 차원에서 사랑하고 증오하고 파괴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신과 그리스 신들 또는 힌두교의 신은 어떻게 다른가. 그것은 ‘인간성’이 아닐까. ‘신성’을 염원하면서 ‘인간성’ 가득한 신의 능력을 얻고자 한다는 말은 뭔가 어불성설인 듯하지만, 적어도 내게 이 두 신들의 차이를 말하라면 그렇다. 하긴 하나는 종교화되었고 하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도 차이이긴 하겠다. 종교혁명이 신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믿음은 얻은 것이라는 말은 의미있게 들리긴 한다. 하지만, 여전히 세상은 종교적인 지배가 절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지배 때문에도 고통받는 존재들이 있다. 신의 사랑은, 그들에게는 가닿지 않는 모양이다. 인간이 신이 된다면 달라질까.

  유발 하라리의 글은 요즘의 트렌드에 맞게 감각적으로 기술된다. 비슷한 분야의 제레미 다이아몬드와는 또다른 느낌인데, 둘 다 술술 읽히긴 하는데 왜인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글에 더 재미를 느낀다. 아마도 문화인류학자로서 직접 경험한 사례를 펼쳐놓는 다이아몬드의 글에 더 흥미를 느끼는 것이기도 하고, 하라리가 그리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상을 상상하기 싫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후반부로 갈수록 하라리의 글에 대한 집중도 약해진다. 힘있게 서술하던 처음과는 달리 그의 글 또한 뭔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도 같다. 그가 그리는 ‘될 것이다’의 세계는 부분 이뤄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니 인류의 미래를 위한 경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중점을 잡아야 할 인류의 미래는 무엇일까. 필요한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저자의 의견일 것이다. 어쩌면 정보가 너무 넘쳐나서, 어쩌면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우리는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때론 과학문명이 여기서 멈추었으면 싶을 때도 있다. 업그레이드 했다가 오류를 발견하면 다운그레이드 하건 리셋하는 것처럼 이 문명의 행운이 더 이상 운이 아니라고 느껴진다면 말이다. 과학이 제시하는 미래가 암울한 것이 아니라 그 과학을 이용, 활용하는 이의 결정에 미래가 놓여 있다는 것이 암울한 것이다. 유발 하라리에 의하면 호모 사피엔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집단의 협력으로 종을 유지해 왔다. 절대적인 믿음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라져왔지만 각각의 다른 믿음들을 이끌어 온 존재가 있었다. 여전히 인간 존재에 대한 가치부여도 인간의 손에서 이루어지고 있기에 인간을 믿으면서도 믿지 못하게 된다.

  “가능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런 가능성이 실현되지 않도록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

  인간 개개인이 생각하는 새로운 방식과 행동들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궁금하다. 내 생각과 행동이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급격히 심각해진다. 창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괴하기 위해 신이 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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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MB의 뒷담화론


사피엔스-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가 사용하는 언어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아침을 먹기 전에 불가능한 일을 여섯 가지나 믿어버릴 수 있다는 데는 누구나 쉽게 동의할 것이다.


  진정 탁월한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임을 증명하는 MB부대들이 연이어 검찰 출두하는 모습을 본다. 새삼, ‘인간도 아닌’이라는 욕들이 무색해진다. 이렇게 MB를 호모 사피엔스로 등극하게 한(?) 이론을 펼친 유발 하라리는 얼마 전 TV 강연에도 등장했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가 인간 종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세상을 지배하는 이유를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류가 동일종의 직선계보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유발 하라리는 사람들의 이런 오류에 대해 지적한다. 적어도 여섯 종 이상의 인간 종이 존재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한 종만이 살아남아 있는가. 저자는 이것은 우리 종의 ‘범죄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호모 사피엔스가 움직여간 모든 곳에 ‘멸종’이 있었다. 그렇다. 호모 사피엔스가 홀로 살아남기 위해 저지른 잘못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MB가 벌인 행태와 유사하다.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많은 숫자가 모여 협동을 하려면 사실상 반드시 필요하다. (…)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사피엔스가 더욱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로 이야기다. 허구를 만드는 능력. 상상력. 저자는 사피엔스가 가진 특별한 무언가가 바로 허구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확산시킬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주장한다. 허구적인 이야기를 동일하게 믿는 한 사람들은 그 관행과 규칙을 따르게 되고 설득당하기 쉽다. 이를 통해 유연한 협력을 함으로써 인류가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한다.

  상상력은 그 자체로 좋고 나쁨을 가지지 않는다. 아니, 그것을 나쁜 쪽으로 활용할 때 나쁜 것이 되고 좋은 것으로 사용한다면 좋은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 중 누군가는 이것을 좀더 나쁜 쪽으로 활용했고 그런 무리들이 되어 그들만의 사회를 유지시켰다. 이런 활용이 지속적인 세상의 지배자로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가고 있는 중이고 여전히 호모 사피엔스의 후예들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좋은 상상력을 활용해나가고 있다. 인류 문명의 진화로 제시한 세 가지 혁명, 인지혁명과 농업혁명을 거쳐 과학혁명을 맞이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단계를 거치며 인간은 행복해지고 있는가.

  홀로 살아남은 호모 사피엔스의 문명기는 흥미롭게 전개된다. 과거의 모습들을 마치 직접 겪은듯 향수에 젖어 돌아보게도 되는데 수렵채집인 시대를 그리워하는 이 마음이라니! 정착하며 살아가기 시작하면서 인구, 노동시간, 전염병이 급격히 증가해 간다. 오늘날의 삶이 이 농업혁명기의 삶이 모태인듯 보이며 수렵채집인의 삶이 ‘이상적’으로 보인다. 진정 꿈꾸는 삶인 것마냥 느껴지는데 저자는 바로, 지적한다. 그 시대라고 풍요사회일 수만은 없노라고. 하지만 인간이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 밀이 인간을 길들였다는 관점은 오늘날의 현실을 개탄하는 입장에선 참 자조적으로 들리는 말이기도 했다.


행복의 관건은 의미에 대한 개인의 환상을 폭넓게 퍼진 집단적 환상에 맞추는 데 있을지 모른다. 내 개인적 내러티브가 주변 사람들의 내러티브와 일치하는 한 나는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며, 그 확신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꽤 우울한 결론이다. 행복은 정말로 자기기만에 달려 있는 것일까?


  어디 그뿐인가. 미래도 마냥 낙관적이진 않다. 과학기술은 질병을 치료하고 인간 수명을 연장하게끔 해왔지만 과연 이런 기술의 진보는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내려앉을 것인가. 오랫동안 혁명의 혜택이란 항상 권력자들, 가진 자들에게 우선권이 있었다. 한번도 변하지 않은 사실이다. 그러니 발전된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은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뿐. 또한 무한히 뻗어 나가는 유전공학의 세계는 경이롭기도 하지만 무서움을 준다. 역시나 그것 자체로는 어떤 선악을 판단할 순 없을 것이다. 그것을 이용하는, 이용할 수 있는 누군가의 ‘욕망’과 ‘의도’에 인류 전체의 행복 또한 달려 있을지 모른다. 뒷담화론과 이 과학기술혁명에 필수적으로 윤리가 요구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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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안다는 것


바다생물 이름 풀이사전-생명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이름들 

박수현, 지성사, 2008-04-25.


  “집채보다도 더 큰 고래가 헤엄쳐 다닌다는 바다”

  『요람기』속 아이처럼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바다엔 거대한 생물들이 살고 있고 고래가 뭍으로 올라와 소원을 가져다주는 구슬을 내밀거라고. 용의 아들 포뢰처럼 고래를 보고 놀라 울지 않고 고래입으로 걸어 들어가 뱃속을 탐험할 거라고 말이다. 물에 빠져 떠밀려간 기억에 깊은 물이면 공포를 느끼면서도 바다 깊은 곳에 대한 환상과 신비는 여전했다. 바다 세계를 탐험하고픈 꿈을 늘 가진 채 아이는 어른이 되어 뭍으로 떠밀려온 거대한 고래나 심해어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곤 했다.

  “거봐, 엄청나게 크잖아! 나를 만나려고 왔나 봐.”

  아니다. 이건 어린 아이의 말이다. 이제 커버린 나는 해안에서 죽거나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심해어나 고래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우와, 저 밍크고래 발견한 사람 좋겠다. 저게 얼마라고?” 그때, 입안에 회를 자근자근 씹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횟집에서 무심하게 메뉴판을 고르는 어른의 나를 아이의 모습으로 돌려주었다. 식탁에 놓인 ‘모듬회’ 접시가 아니라 바다를 유영하는 생물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이름을 불러보고 싶게 만들어 주었다.『바다생물 이름 풀이 사전』. 친구의 이름을 알고 싶어하듯 펼친 이 책은 그저 바다생물에 관한 정보와 지식만이 아니라 이름에 가득한 신화와 동화적 상상력까지 되살려 주었다. 아이가 꿈꾸었던 바다속 환상을 눈앞에 펼쳐주었다. 고래뱃속을 탐험하고 팠던 것처럼 물을 무서워하지 않고 언젠간 스킨 스쿠버를 해보리라는 꿈을 갖게 해주었다.

  이 책에선 108개의 부를 수 있는 이름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어류, 연체동물, 절지동물, 자포동물, 극피동물, 포유동물, 해조류, 파충류 등으로 나누어 바다 생물들의 이름과 어원, 생태적 특성 뿐 아니라 신화와 전설을 소개하며 낯선 생물들을 친숙하게 만들어 준다. 선조들이 남긴 어류도감뿐 아니라 많은 문헌에서 어류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내어 지식과 이야기를 함께 담고 있는 것이다. 바다세계를 1,900번이 넘게 탐험했다는 저자의 사진을 통해 한번도 본적 없는 화려한 바다생물의 모습을 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어떤 생선은 ‘어’자가 어떤 생선은 ‘치’자가 붙는 것이 비늘 유무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말미잘, 산호, 해파리, 히드라 같은 생물들을 가시가 있는 세포란 의미의 ‘자포’동물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자주 먹던 홍합이 먼 바다로 나간 배에 딸려 왔던 외래종 진주담치에 밀려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선조들은 해삼과 굴을 바다의 삼, 바다의 우유라고 했는데 현대 과학자들이 실제 그 성분을 추출해낸 것을 보면서 다시금 선조들의 지식과 통찰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재밌는 이름도 있다. 나폴레옹 피시와 말미잘이 그렇다. 이 물고기는 농어목 놀래기과에 속하는데 2미터에 200킬로그램이 넘을 정도로 크다. 그런데 어쩌다가 나폴레옹이란 이름을 획득했을까. 절대 물고기 전쟁의 강자여서가 아니라 외양 때문이라고 한다. 이 물고기가 성장하면서 이마에 혹이 튀어나오는데 이 모양이 나폴레옹의 ‘모자’를 닮아서라나. 나폴레옹이 아니라 나폴레옹 모자를 닮은 이 물고기는 태평양 지방 원주민들에겐 의식의 제물로 사용되어 왔다고도 한다. 말미잘은 정약용의『자산어보』에 따르면 항문을 닮아 미주알이라 표기하고 있다.

  미주알은 ‘구멍을 이루는 창자의 끝부분’이라는 뜻이다. 우리 선조들은 사람에 비유하기 곤란하거나 다소 큰 것을 가리킬 때 ‘말’이라는 접사를 붙였다. 항문을 뜻하는 미주알과 말이 합쳐져 말미주알에서 말미잘로 전해졌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말미잘을 본 적은 없지만 이 어원을 떠올리며 항문을 생각하게 될 텐데 그런데 서양사람들은 다르다. 서양에서는 이 말미잘을 시아네모네(Sea Anemone)라고 부른단다. 바다의 아네모네라는 뜻이다. 같은 생물을 보면서도 누군가는 항문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봄에 잠깐 피었다 바람에 지는 아네모네’를 생각했다니 얼마나 사물을 바라보는 생각과 눈이 다른가. 단지 말미잘뿐만이 아니라 바다생물의 이름에는 각 나라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각 나라가 처한 상황과 생물의 유용성에 따라 생물의 이름뿐 아니라 그 생물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것을 볼 수 있다.

  자연과 생물에 인간은 ‘인간’의 시각에서 이름을 붙이고 있다. 하지만 생물의 특성을 잘 관찰하여 그 특성을 잘 가려내어 생활에 유용하게 활용하면서도 공존의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수많은 포획으로 멸종이 되어가는 생물은 협정을 통해 보호종으로 지정하여 포획하지 않는 방법으로 말이다. 생태계를 보호하는 것이 인간 역시도 생존의 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 인류가 지속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아 가고 있다. 절대로 ‘창꼬치 증후군’으로 살아가지 않을 것이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기존의 규칙이나 관습을 고수하는 경향을 창꼬치 증후군이라 한다. 창꼬치가 수족관 유리벽이 있는 줄 모르고 작은 물고기를 공격하다 실패하자 유리벽을 치워도 변화를 알지 못한 채 물고기를 바라만 보는 데서 붙인 말이라고 한다. 기후변화와 지각변동으로 점점 생태계가 위협받고 있는 이 변화 속에서 생태계 보존을 위해 노력하는 방법의 하나가 다양한 생물들에 관한 이름을 알아가는 일이 아닐까 한다. 이름을 안다는 것, 그것은 그 생물의 특성을 안다는 것이기도 하다. 생물의 특성을 안다는 것은 고유한 특성을 해치지 않고 보호·유지하며 어울려 살아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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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항해 - 감정 이론, 감정사史, 프랑스혁명
월리엄 M. 레디 지음, 김학이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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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사고


  오랜 시간 감정은 이성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이성이 객관적이 분석적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측면에서 얘기되는 것과 달리 감정은, 그것 자체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듣거나 말했다.

  감정이 생각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나아가 감정이 생각에서 발현된다고, 감정이 사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만난 『감정의 항해』는 격하게 반가운 책이다. 저자 윌리엄 레디는 역사학 및 인류학 교수이다. 또한 행동주의 심리학 연구소 펠로로서 감정을 개념과 감정연구에 관한 역사를 분석하며 감정에 관한 새로운 이론틀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역사학 전공자로서 ‘감정’의 연구에 역사를 활용한다. 그가 끌여들어온 역사적인 시기는 프랑스 혁명시기이다. 대체로 감정에 관한 연구는 심리학이나 인류학에서 주로 다루어져 왔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연구를 혁명시기와 접목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고, 어떤 이론이 전개될 것인지 상당히 흥미진진한데 저자의 지식과 사료의 활용으로 인간의 감정에 관한 연구가 또다른 접근으로 생생하게 펼쳐진다.

  크게 2부로 나뉘어 1부에선 감정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룬다. 여기에서는 인류학과 심리학에서의 연구 내용과 함께 저자가 제시하는 감정의 이론틀을 제시한다. 2부는 프랑스 혁명시대의 감정을 저자가 제시한 이론의 틀과 함께 대한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무엇인가. 서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감정은 학습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관해서는 심리학과 인류학에서도 어느 정도 견해가 일치되었다고 보고 있다. 저자의 이 주장의 이유는 이렇다.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감정 개념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감정 개념이 보편적이어야만 고통이란 무엇이며, 왜 우리는 모두 자유 속에서 살 자격이 있는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역사적 변화도 유의미해지고, 역사가 인간의 감정 구조를 포착하려는 노력의 기록이요, 정치사회적인 질서를 그 감정 구조를 포착하려는 노력의 기록이요, 정치사회적인 질서를 그 감정 성격에 합당하도록 만들기 위한 노력의 기록이 된다. p9


  저자의 감정이 생각과 다르지 않다는 핵심적인 주장은 ‘인지’ 개념과 연관시켜 이야기된다. 감정은 상황에 대한 인지이며 인간은 특정 상황에 놓였을 때 목표가 정해진다고 본다. 그에 따라 생각 재료들이 활성화되고 그중 일부만이 의식에 입장하게 되는데 의식에 입장하지 못한 나머지 활성화된 생각 재료가 감정이다. 저자가 말하는 “이모티브imotive”는 바로 이 생각 재료를 활성화시키고 감정을 발동시키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이모티브가 가지는 중요한 함의는 그것이 감정만큼이나 사회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가 개개 구성원의 감정을 장악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감정의 의미가 변한다면 감정 역시도 변하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측면 때문에 저자가 프랑스 혁명의 역사 속의 감정을 분석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부여된 특정 ‘감정’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어떤 영향으로 변화되는지를 이 분석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감정이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저자의 주장은 단순하게 생각해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대한민국을 들끓는 ‘분노’라는 감정이 촛불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생각하면 더더욱.


  하지만 저자는 감정이 자유로웠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프랑스 혁명시기를 구분하여 분석하면 감정체제에 대한 반응을 더욱 확연히 알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자유로운 감정의 항해를 펼쳐나가야 국민들의 감정에 대해 오히려 경직을 강요함으로써 혁명으로 연결되었다고 본다. 감정 피난처란 “감정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안전지대를 제공해주고 감정적 노력의 이완을 허용하는 의례, 공식 비공식 조직, 관계”라고 정의한다. 이 감정피난처는 기존의 감정체제를 뒷받침할 수도 위협할 수도 있는데 자유로운 감정의 허용이 이루어지지 않은 감정체제의 결과가 혁명을 초래했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누군가의 감정을 유도한다고 했을 때 의도한 감정을 이끌어낼 수도 있지만 오히려 반대의 감정이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프랑스혁명의 시기는 자유로운 감정의 발현이라기보다는 다양한 감정의 변화들이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인식하지 못하지만, 사실 프랑스혁명은 이타애적인 개혁 제스처를 수단으로 하여 프랑스 전체를 일종의 감정 피난처로 변모시키려던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감정이 무엇인지 오해하는 동시에 국가의 물리력을 투입하여 이타애와 박애를 확산시키려는 역설적인 시도가 전개되자, 1789년에 설계되었던 감정 피난처들은 4년 만에 공포정치라는 악성의 감정고통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p223~224


  감정이 감정체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감정의 항해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는 인간이 스스로가 자신의 감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저자가 프랑스 혁명시기의 정치가들의 편지나 연설문, 민사소송의 판결문 등의 사료를 통해 분석한 내용은 저자의 우려가 나타난다. 그 시대가, 사회가 억압하는 감정체제에 따라 사고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제한적이고 길들여진 감정에 머물러 있는 것. 이것은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과 같다. 감정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사고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누리지 못함과 같다. 감정이 사고와 다르지 않다면 감정을 규율하는 감정체제는 사고 역시도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보다 자유롭고 합리적인 선의 감정과 사고가 이루어질 수 있는 시대, 감정의 자유로운 항해는 결국 그 사회의 문화와 규율의 수준이 어떠한가가 관건이다. 그러나 또한 통제적이고 억압적인 감정체제를 유지하려는 기득권, 권력층의 입맛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감정이 자유를 누리는 인간들이 이 사회를 굴러가게 한다는 것을 감정의 항해를 보며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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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아다니는 왕자들의 정체


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명작 동화에 숨은 역사 찾기

박신영, 페이퍼로드, 2013.


 

    책을 읽으며 특정 부분에 중점을 두게 된다면 그 부분이 전공이거나 관심두는 부분이거나. 보통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을 하게 되는데 내 관점에 따라 책을 선택하거나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다.

  작가는 고전 동화와 소설에서 자신의 관심 분야를 이끌어 내어 집중한다. 책에 쓰인 27개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자기만의 줄거리와 주제를 가지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주제와 줄거리에 맞게 이야기를 선별하고 배치한다. 작가의 이 책에서 말하는 주제는 ‘역사’다. 동화와 소설이 쓰여진 당대의 인물과 역사적 배경과 상황에 관한 이야기다. 구전되어 온 동화가 어떻게 탄생되고 변형되는지를 사료들을 제시하고 있어 동화와 소설을 환상과 허구가 아니라 타당한 역사적 현실로 인식하게끔 한다.

  책의 제목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가 담고 있는 내용을 보자. 잠자는 숲 속의 공주뿐만 아니라 백설공주 등 많은 동화 속에 등장하는 왕자들은 백마를 타고 참 많은 곳을 돌아다닌다. 그 과정에서 위험한 일도 겪지만 공주를 만나 행복한 결혼을 하는 걸로 마무리된다. 어쨌든 모험을 통해 성공과 사랑을 거머쥐는 수많은 백마 탄 왕자님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걸까. 저자는 이들 왕자가 “신분 상승을 꿈꾸는 떠돌이 구혼자”라고 말한다.


작은 나라에 후계자가 될 왕자가 많은 경우 문제가 생긴다. 영토를 분할하여 상속하면 국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위를 계승하는 한 왕자를 제외한 나머지 왕자들은 스스로 자기 인생을 개척해야만 했다. (……)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웃 나라 외동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처가의 왕국을 물려받아 공동 왕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왕자들은 공주가 한눈에 반할 수 있도록 현란한 말솜씨와 에티켓, 기사도를 몸에 배도록 수련해야 했다. 유리관 속의 백설 공주가 자기 스타일의 여성이 아니어도, 심지어 100살쯤 연상인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100년 동안 이를 닦지 않아 입 냄새가 진동해도 꾹 참고 키스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아아, 슬프지만 이것이 바로 소녀들이 한 번쯤 꿈꾸던 백마 탄 왕자, 프린스 차밍의 정체인 것이다. p16~20


  이 목적을 명확히 해주는 대표적인 왕자가 딱 떠오른다. 영화 겨울왕국의 열두번째 왕자인 한스. 많은 동화책에서 왕자들의 이러한 목표가 드러나지 않아 수많은 세월 동안 백마탄 왕자님에게 환상을 품고 산 이들에게 뒤통수를 딱 때리는 역사적인 상황이 알려주는 진실을 작가를 통해 알게 된다.

  잔혹한 늑대로 잘 알려진 빨간 모자 속 늑대에겐 어떤 역사적 상황이 있을까. 이는 실제  ‘평화상실형’을 받은 인간이다. 중세에 중죄를 범해 평화상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을 누군가 죽여도 죄가 되지 않기에 불안한 이들은 숲으로 도망가게 된다. 평화상실자는 바르구스라고 했는데 늑대를 뜻하는 말이며 실제로 죄인에게 늑대 머리를 덮어 씌워 추방하기도 했었다고 하고 몸에 털이 많은 사람을 늑대인가이라 여겨 추방하기도 했다 한다. 그러니까 동화 속 늑대는 평화상실형을 선고받은 죄인이었던 것이다.

  많이 알려지고 또 많이 해석되고 있는 백설 공주 속에서 찾아보는 역사적인 이야기는 뭐가 있을까. 작가는 백설 공주 속 못된 왕비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니까 농경 사회 속에서 여성은 생산력이 중요하기에 나이가 들어갈수록 젊은 여성에 비해 쓸모없는 취급을 받게 되었다. 늙은 왕비의 이야기는 결국 이 땅의 여성들이 인구 생산의 도구로 인식하는 시대에 살던 여성들의 애환이 가득 담긴 이야기라는 것이다.

  빨간 구두 이야기에서 왜 그토록 빨간 구두를 신고 춤추는 것이 금기가 되고 죄악이 되는가. 여기에는 종교 개혁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그 답을 알려준다. 종교 개혁 이후 사회는 엄격하고 금욕적인 풍조가 팽배했다. 그렇기에 춤추고 술 마시고 극장에 가는 것은 큰 죄악이다. 특히 빨간색은 사치와 방종의 상징이기도 했고 여전히 검은 양복에 검은 스타킹과 검은 구두만 착용하는 칼뱅주의자 신도들이 네델란드에만 50~60만 명이 있다고 한다.

  이런 형태로 작가는 동화 속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이나 상황을 들려준다. 그렇게 해서 더욱 깊은 이해로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렇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동화들이 교훈을 가득 담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는 동화에서 너무 교훈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데, 변화무쌍한 사회 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안쓰러운 인생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마냥 환상적이고 재밌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감내하고 인내해야 했던 무수한 날들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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