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구경도 하고 바람도 쐴 겸 서점에 다녀왔다. 시내에 대형서점이 두 곳 있지만 내가 자주 가는 곳은 집 근처의 지하서점이다. 그 서점의 재미있는 점은 주인이 알라딘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책이 많지는 않은데 주인의 취향이 보인다. 시내 서점처럼 어수선하지 않은 점도 마음에 든다. 단, 도너츠 가게와 원두커피 가게가 위층에 있다 보니 지날 때마다 고소한 커피향이 코끝을 자극하는 것이 곤욕이다. 한 잔은 괜찮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곧 출근하게 되면 안 마실 수 없게 될 것 같다.
김인숙의 『안녕, 엘레나』를 읽기 시작한 오후.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지고 낮잠을 안 자보려고 버둥거리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C선배였다. 졸업한 후로는 동아리 멤버들의 경조사가 있거나 시전이 열릴 때, 선배가 가끔 이 도시로 출장을 올 때마다 얼굴을 보곤 했었다. 선배는 사흘 동안 연가를 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중이라고 했다. 나와 동기였던 선배의 와이프 E는 그새 둘째를 가져 만삭이라고도 했다. 저녁에 남편과 친정에 가기로 되어 있던 터라 미리 연락을 주지 않은 선배를 탓했지만 선배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듯 평소 같지 않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는데 선배는 갑작스런 이야기로 사람을 당황시켰다. 전혀 생뚱맞은 것은 아니었다. 선배는 대학 시절, 꽤 오랫동안 사귀던 여자가 있었다. 동창이었다가 연인으로 발전했다고 얼핏 들었는데 동아리 회식 자리에 언젠가 얼굴을 비추기도 했었다. 여자는 직장인이었고 선배는 복학생, 더욱이 원거리 연애를 하고 있었지만 양과 질이 모두 훌륭한 연작시를 쏟아낼 만큼 참으로 끈끈한 연애였다. 우리는 농담으로 언젠가 이별의 연작시를 쓰게 될 날이 올 거라고 지껄였지만 다들 C선배의 재능과 매력을 알고 있었기에 두 사람을 축복했다.
하지만 얼마 후 선배는 그녀와 헤어졌고, 내가 싫어졌나 보지, 웃으면서 툭 던지는 말로 상황을 종료했다. 항상 대충 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모두를 놀라게 하더니 얼마 안 있어 E와 결혼했다. 곧이어 자신과 똑 닮은 아들을 낳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재미있게 살기를 주창했던 사람이니만큼 어디서도 자기 색깔 유지하며 잘 살겠거니 했다.
그런 선배가 물어온 것은 십년 전의 그녀를 다시 만나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미련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확신했기에 갑자기 왜 그러고 싶은가를 물었다. 그냥 한번 보고 싶다고 했다. 욕심이라고 했더니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단다. 왜 갑자기 헤어지자고 했는지를 포함해서 들어보고 싶은 말이 있단다. 연락처는 모르지만 근무하는 곳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면서 근처에서 기다렸다 만나보면 어떨까, 한다. 나는 여자가 남자한테 갑자기 헤어지자고 한 다음 뒤도 안 돌아보고 결혼한 케이스면 뻔한 거 아니냐고 최대한 냉정하게 말했다. 선배는 다 알지만, 그냥 한번 만나보고 싶을 뿐이란다.
선배의 목소리는 간절하기 보다는 너무나 심상해서 그녀와의 이별을 전하던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 심상함에 속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더니 십년씩이나 흘러서 이러기야 정말. 나는 마치 철없는 남동생을 다그치는 나잇살 먹은 누나처럼 식상한 충고들을 늘어놓았다. 마누라가 만삭인데 시간이 남아돈다는 둥, 계절 탓인 것 같으니 정신 차리라는 둥. 하지만 더 이상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선배가 아닌 것 같아 허공에 손짓하는 느낌만 가득했다. 선배님은 누가 뭐라던 결국 그녀를 만나겠지요. 하지만 내가 그녀라면 보는 것도, 만나는 것도 싫을 거에요.
동기 E는 선배의 지난 앨범을 손수 정리할 정도로 담대한 사랑을 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지난 일, 힘이 없는 추억이라고 믿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백 장의 사진을 버린들, 남편이라는 사람은 십년 전 그녀를 다시 만날 궁리를 하고 있었다니. 선배는 자기 주변엔 바람피는 사람들도 많은데 결혼 5, 6년차 쯤 되어 이런 생각하는 게 그렇게 잘못인 거냐고 반문해왔다. 그래, 만나서 서로의 안부 묻고 옛 추억에 잠겨 커피 한 잔 하고 헤어질 수 있겠지. 선배는 어쩌면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질기고 순수한 사랑을 했는지도 모르지. 아주 잠깐 동안, 알지도 못하는 그녀가 야속했다. 그리고 야속한 그녀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선배가 안쓰러웠다.
사람이 항상 쓸데 있는 생각만 하고 살 수는 없다. 더욱이 생활에 유용하지 않은 생각들을 절로 부르는 계절이 아니던가. 나 역시 아주 가끔 지나간 사랑을 떠올릴 때가 있다. 지금 마음 같으면 정말 덤덤하게 커피 한잔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죄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뭐하나 싶다. 어제까지 사랑한다고 했던 그녀가 갑자기 돌아섰을 때, 미련이 잔뜩 남았을 선배의 그리움, 궁금함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별별 이유로, 또는 아무 이유 없이 멀어지는 것이 사람인데 십년 후의 이런 포즈는 미련을 넘어 사치스럽다. 물론 선배의 그런 면 때문에 선배가 선배인 거고, 그런 선배를 여전히 좋아하지만 그저 사흘간의 가을여행을 잔잔하게 마쳤으면 하는 바람. -어째 별 것 아닌 이야기에 나 혼자 오버한다는 느낌도 들긴 하지만- 얼마 전,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가수 김태원이 그랬다. 과거는 뭐든지 다 아름다운 겁니다. 이제는 그것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