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 생신이 낼 모레인데 오늘 우리집에서 미리 모였다. 시누이 가족도 와서 오랜만에 집안이 북적북적했다. 닭찜도 하고 잡채도 하고 미역국도 끓이고, 친정엄마 솜씨에 많이 기댔지만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평소 소식이 습관화되신 아버님도 모처럼 진지를 많이 드셨다. 임부복 사입으라고 용돈을 주셨는데 며느리한테 얻어먹는 밥값치곤 너무 비싼 것 같다. 내딴엔 무거운 몸을 해가지고 멀리 가는 것보다 집으로 오시라고 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서 내린 결정이었는데 말이다.   

  바야흐로, 시어머니와 친정엄마 세대. 그러니까 위로는 시집살이, 아래로는 며느리살이 하는, 낀세대 어머니들의 수난 시대다.  

  남편이 끄적끄적, 새해 소망이라며 그림을 그렸다. 그는 틈틈이 그림 그리고 붓글씨 쓰면서 나 대신 태교를 한다. 그림 속 아기 호랑이가 깜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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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1-02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깐따님 2세는 백호띠가 되는 거네요...
태교대로라면 그림 속 호랑이 같이 귀여운 아기는 확실하겠군요..^^

깐따삐야 2010-01-04 11:05   좋아요 0 | URL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메피님.^^

이매지 2010-01-02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그림처럼 깜찍한 아이 낳으세요! :)
태그에 쓰신 것처럼 새해엔 더 행복하세요~~

깐따삐야 2010-01-04 11:06   좋아요 0 | URL
네, 고마워요. 이매지님도 좋은 책 많이 만드시고 건강한 한해 되시길요.^^

L.SHIN 2010-01-03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글씨를 엄청 잘쓰시는구나!

깐따삐야 2010-01-04 11:07   좋아요 0 | URL
혼자 글씨 쓰고 그림 그리면서 잘 놉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늘빵 2010-01-03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아이 무척 귀엽군요! ^^ 예쁘다.

깐따삐야 2010-01-04 11:10   좋아요 0 | URL
사람이고 동물이고 어릴 때가 귀엽죠. 아프락사스님도 독립생활 잘 시작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무스탕 2010-01-03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교 해주는 아빠를 가진 아가는 참 좋겠어요 ^^

깐따삐야 2010-01-04 11:10   좋아요 0 | URL
엄마가 도통 태교를 안 해서 좀 서운해 할지도 모르겠어요.^^

레와 2010-01-04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알라딘에서 소통하시는 것도 훌륭한 태교라 생각됩니다. (힛~)


깐따삐야 2010-01-06 11:03   좋아요 0 | URL
제가 그럼 알라디너 2세를 키우고 있는 건가요? ^^
 

  31일이 한참 남은 줄 알았는데 라디오를 켜니 올해 마지막 날이라며 반성, 사과, 고백 등이 줄을 선다. 사람들 마음이 다 이맘때만 같으면 정말이지 온 누리에 평화가 오겠다. 먼지를 털고, 베란다 유리창을 닦고, 김치볶음밥을 하고. 내 하루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깐따삐야, 나 좋은 일 생겼어. 아침부터 문자. 결혼하니? 라고 물으니 그건 아니란다. 사귄다는 얘기는 들었어. H는 목하 첫사랑과 열애중이다. 두 사람은 십 년을 돌고 돌아 재회했다. 스무 살의 H가 연모의 대상이었던 J선배를 향해 탄성을 내지르던 모습이 아직도 선연하다. 나의 트리스탄! 내가 보기에는 바람 냄새만 쏠쏠 풍기던 그저 그런 남자였는데 H에게는 가을의 전설, 브래드 피트에 버금가는 멋쟁이로 보였는가 보다. 필시 연예인 사주를 타고난 듯한 H와 그에 버금가는 J선배는 각자 화려한 이십대를 보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만나 연애를 하고 있다니 놀라운 한편 아슬아슬하다. 얽히고설킨 인연의 그물망 때문에 두 사람의 연애가 공개되면 뒷목 잡고 쓰러질 사람도 몇은 될 것 같다. 하지만 사랑한다는데, 저리 행복하다는데, 부디 서로에게 굳건히 정착하여 고이고이 사랑하기를, 바래본다.

  남편과 나는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어서 쇼 프로그램 재방송을 보고는 “이런 축구 같은...” 이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 경상도 사투리로 축구가 바보란다. 세밑인데 서로에게 사랑과 감사의 뜻을 전하지는 못할망정 이상한 짓 해놓고 서로를 웃음거리 만들기에 바쁘다. 그러고 보니 올해 서거하신 김수환 추기경과 노무현 대통령의 별명도 바보였는데 우리에게는 참 ‘그리운 바보’들인 것 같다. 나는 살면서 나 자신이 바보는 아닐까, 바보이면 어쩌나, 전전긍긍할 때가 많은데 한 사람의 마음도 제대로 덥히거나 적시지 못하고 똑똑한 척 하면 뭐가 남는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나저나 내년에는 진짜 축구, 월드컵이 있다. 중계방송 보다가 이런 축구 같은... 경우가 안 생겼으면 좋겠다.

  친정이나 시댁이나 구정을 쇠지만 신정 지나고 곧바로 시어머니 생신도 있고 해서 방앗간에 가래떡을 맞췄다. 그냥도 먹고, 떡국도 끓여먹고, 싸드리기도 하고. 나이 한 살 더 먹는 것은 실감이 안 나는데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집중되었던 관심이 여기저기 분산되는 것을 느끼면서 예전과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 혼자였을 때나 지금이나 안온함과 쓸쓸함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나를 어루만지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하지만 누구의 말마따나 모든 것은 지나가리니, 둔해졌거나 혹은 담대해졌거나.

  뭔가 일을 하거나 움직일 때는 잘 모르겠는데 내 몸이 편안해지면 안에서 꼬물꼬물 아기가 운동을 한다. 아기는 엄마 뱃속에서 하루 종일 자다 깨다를 반복하면서 커간단다. 지난번 초음파 검사 때는 졸리기라도 한지 눈도 비비고 하품도 하더라는. 나는 아직 씩씩한 발길질 같은 건 느껴보지 못했는데 엄마는 나를 가졌을 때 하도 뻥뻥 차대서 깜짝깜짝 놀라기 일쑤였단다. 우리 아기는 아마 온순한 제 아빠를 닮은 모양이다. 남편은 아기에게 자꾸 말도 걸고 이야기도 해주라는데 나는 어째 그 모양새가 낯간지러워서 우리는 다 마음으로 알아듣는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눈짓만 슬쩍 해도 엄마 뜻을 바로 헤아리는 영리한 아이로 키우려면 뱃속에서부터 미리 훈육해야 한다면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 간혹 이렇게 낯설고, 어려울 때가 있다. 아무래도 내가 아기를 키우는 동시에 아기가 나를 엄마로 키워야 할 것 같다. 새해에는 그 두려운 모험을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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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09-12-31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년에는 이쁜 아가 사진을 올려주시겠네요.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
날이 많이 추운데 건강 관리 잘 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깐따삐야 2010-01-02 20:42   좋아요 0 | URL
출산의 고통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두렵습니다.ㅠ 남들도 다 하는 일이니 저도 잘할 수 있으려나요.
무스탕님도 새해엔 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래요.^^
 

  결혼을 함으로써 가족 내에서 나의 입장이란 것이 생기는 한편 상대방의 입장이 결혼 전과 달리 보이기도 한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나라면 저러지 않을 텐데, 하는 상황이 곧잘 벌어지곤 한다. 순간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되기도 하고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이면 얼굴을 붉히거나 차갑게 응대해주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그것은 ‘밖’의 일이므로 고민하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 자체가 낭비인 것 같아 오래 담아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정에서의 입장이란 것은 밖의 일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 같다. 결혼 전, 나는 딸이었고 시누이였다. 지금은 며느리이기도 하고 올케이기도 하다. 또한 내게는 올케도, 시누이도 있다. 성별이 같고, 같은 호칭을 쓰고 있지만 결국 모두 다른 사람들, 다른 여자들이다.

  학교 다닐 때 올케와 비슷한 부류의 여자 아이들이 있었다. 매년 같은 반이 되어도 나와는 절대 친해질 수 없는 타입. 평균적인 지성에, 말수가 적고, 욕심이 많고, 감수성이 부족한, 잘 빚어놓은 점토 인형 같은 아이. 모든 일에 결코 먼저 나서는 일이 없기에 큰 업적도 없지만, 별 실수도 없는, 고만고만한 모범생. 어느 새 누구도 거절하기 힘든 참하고 반듯한 미인으로 성장한 아이. 굳이 올케와 시누이라는 선을 긋지 않고 그냥 일대일로 놓고 보아도 서로 쉽게 녹아들지도, 섞일 수도 없는 그야말로 남남인 사람.

  스치는 만남이라면 그처럼 첫 이미지를 보고 재단한들 서로에게 마음의 짐으로 남거나 상처가 되지 않지만 가족이야 어디 그런가. 결국 나와 다른 피, 조화할 수 없는 정신이라고 해도 부단히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은 말고 존중이나 배려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조차도 그 사람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사람과 평생을 나야 하는 내 핏줄을 위한, 혈육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노력.

  그랬는데, 결혼 이후 어느 시점부터 올케에 대해 묘한 양가감정을 갖게 되었다. 과거에는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점점 정이 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지만 친밀감이 들지는 않는다. 나 또한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올케가 되어보니 그 입장을 잘은 알겠는데 그 입장이 되고 보니 그에 따른 불만도 생긴다고 해야 하나. 요즘 남. 보. 원이라는 개그 코너에서 시위하듯, 먹을 밥도 안 해놓고 들어오라고만 하면 장땡이냐!

  내가 남편을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나와 같은 직업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생판 다른 남녀가 함께 살다보면 안 그래도 부딪칠 일이 잦은데 그래도 직업이 같다보면 통하는 점도 많을 테니 자연히 대화도 많아지고 같이 보낼 수 있는 시간도 많겠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큰 부자로 살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돈을 써봤자 나 버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조언 또한 그러했고 살아보니 아직까지는 처음의 기대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올케는 서울내기라 그런지 생각이 달랐다. 본인이 교사이면서도 교사 남편은 싫다고 말하면서 내가 미혼일 적, 전문직 종사자나 대기업에 다니는 남자들과 선보라고 열심히도 권했었다.

  그런 남자와 안 살아봐서 이러는지는 몰라도 나는 현재의 삶에 자족하는 편인데 어찌 된 일인지 그런 남자와 살고 있는 올케는 뭐가 불만인 모양이다. 우리 남편이야 오가는 길, 출퇴근 시간 일정하고 짧게나마 방학까지 있지만 오빠는 일의 특성 상 그럴 수가 없다. 출장도 많은데다 중요한 자리에 있을 때는 연락이 안 될 때도 많다. 가끔은 남들 다 쉬는 연휴에 출근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쁜 만큼 많이 벌고 부지런히 움직인 만큼 승진도 한다. 하는 일이 그런데 올케는 그런 오빠만 턱 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니 그것은 너무 보고 싶고 좋아해서라기보다 배려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오빠한테 제발 잘 좀 하라고 했다. 이후에 올케가 몸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오빠만 들볶았다. 하지만 그간 올케와의 대화와 꾸준한 관찰 결과, 올케의 감수성 부족, 취미 부재가 눈에 들어왔다. 오빠에게 권했다. 언니한테 재미있는 책이나 좀 색다른 취미생활을 권해보는 건 어때? 하지만 올케는 책도 좋아하지 않는데다 홀로 다양한 취미의 세계를 개척, 탐구할 만큼 적극적인 사람도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엄마는 올케에게 <좋은 생각> 정기구독권을 선물했다. 그래, 언니는 다른 사람들 사는 모습 보면서 좋은 생각을 좀 할 필요가 있어. 하지만 이제는 나 혼자 툴툴거리고 있다. 자기가 좋아서 오빠랑 결혼해놓고 이해는 못해줄망정 왜 뒤늦게 난리야!

  올케는 예쁘고, 알뜰하고, 정직하고... 장점이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가정생활의 이치를 참 나만큼도 모르는 것 같다. 오빠가 아무리 고집이 세다고 해도 남자들이란 대개 단순해서 여자가 자기 할 일 똑부러지게 해놓고 나서 잘 구슬리면 백퍼센트 까지는 아니어도 하는 시늉이라도 하게 마련이다. 나 같은 성질머리에도 이따금 마음에도 없는 입에 발린 말로 구슬릴 때가 있다. 햇볕정책은 북한한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자칫 버르장머리가 나빠질 우려가 있으므로 발뒤꿈치 닳도록 잘해줄 필요까지는 없지만 일단은 아내의 역할을 최대한 하고나서 한두 가지, 중요하다 싶은 것을 요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엄마한테 이제부터 혼낼 것은 혼내고 예전처럼 너무 많이 배려하지 말라며 화를 냈다. 그것이 오빠를 위한 일인 줄 알았는데 어째 오빠를 더 피곤하게 하는 일 같다고도 했다. 엄마가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나도 남편한테 잘해주면서 살고 있는데, 올케가 대체 먼데! 이런 생각까지 들더라는.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한 남자를 선택했다면 이익만 취할 것이 아니라 그에 따른 부수적인 불편들까지 감수해야 한다고 본다. 올케는 능력 있고 돈 많이 버는 남자랑 결혼해서 좀 심심한 모양인데 나는 시간 많고 자상한 남자를 택했더니 매 끼니 차려주는 일이 곤욕이고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 눈에 사나운 와이프로 보이는 것을 감수해야 하더라는. 어떤 선택이든 일장일단이 있는 법.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앞뒤 안 재고 물불 안 가리지, 올케 같은 사람은 체면 살피고 손익 계산 따지느라 남들 앞에서 참하게 굴어야 하니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우리 시누이는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좀 무섭고, 과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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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12-29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댁대신 처가가 있는 결혼한 유부남인 저로써도 많은 공감이 가요. 우리 처형들 저와 너무 다르거든요. 월급쟁이 따분하다고 사업들하지...잘되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지.. 술을 잘 마시지도 않지...만나서 유일한 공통사항이 고스톱, 포카면 정말 말 다했죠. 그래도 사람들이 모나거나 모뙨 구석은 전혀 없어 그나마 참 다행이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죠..

그런데..나처럼 일 많고 돈 많이 못 벌고 시간도 많이 못내주고 자상한가? 한 남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

깐따삐야 2009-12-30 16:06   좋아요 0 | URL
혈육도 다른데 피 한방울 안 섞인 다른 식구야 오죽하겠어요. 결국 어우렁더우렁하다가 공존의 룰을 찾기 마련인데 올케는 늘 제자리라고 해야 하나. 처음엔 나름 고집 있어 보여 좋았는데 이제는 갑갑하네요. 그런 성격을 가진 본인이 어쩌면 가장 힘들 것도 같고.

메피님의 마님은 예술가시잖아요. 스스로 열정을 쏟아부을 무언가가 있는한 주변 사람에게 매달리지 않죠. 더욱이 메피님이 얼마나 자상하셔요!


레와 2009-12-30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별다른 취미 생활 없이 살고있는 무료한 삶을 본인 탓이 아닌, 타인 탓이라 생각해요. 더욱이 책이나 음악, 영화 보는것도 별로라 하구요. 그럼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재미가 있고 행복하다면 상관없지만, 행복하지 못해 옆에 있는 사람을 들들 볶는 경우가 있거든요.

제 경우엔 결혼한 친구가 전화를 걸어 징징 거리는데, 조목조목 따지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찌 행복하려고 하니, 라고 물으면 '그러게..'라며 전화를 끊어요.
아놔..;;

만화책도 재미있는게 얼마나 많은데, 왜 알려줘도 안할려고 할까요? ^^;

깐따삐야 2009-12-30 16:14   좋아요 0 | URL
공감해요. 혼자 즐길 수 있는 취미도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오래도록 보고 싶었던 연극 한편을 보고 난 뒤 그 힘으로 며칠을 기분 좋게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더 좋은 것을 보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죠. 대개 비슷하게 흘러가는 인생인데도 그렇게 차이가 나요.

마치 우리 올케와 엄마의 통화 내용 같군요. 더욱이 서울은 얼마나 혜택 받은 도시에요. 나 같으면 여기저기 찾아다니고 구경 다니느라 바쁠텐데.

그러게나 말이어요. 게으른 사람은 하느님도 못 이길 것 같아요.ㅠ
 

  크리스마스 이브, 남편이 장미 서른 송이를 사왔다. 꽃보다 현금이라고 주장해서 용돈도 받았다. 저녁에는 작년 크리스마스에 샀던 트리에 불을 밝히고 눈사람 인형도 옆에 세워놓았다. 특별히 외출을 계획하지는 않았다. 배가 불러오는 이유도 이유지만 요즘 밖에 자유롭게 나다니지 못하는 이유는 앞머리 때문이었다. 파마약 냄새 나는 미장원에 가기 싫어서 집에서 앞머리를 좀 정돈해 보려고 했는데 남편이 본인이 깎아주겠다고 나섰다. 손재주가 있어 믿고 맡겼는데 이게 웬 걸! 금방 못난이 인형으로 만들어 놓았다. 예쁘다고 억지를 부리는 남편에게 욕을 해주고는 어서어서 부지런히 길러서 미장원에 가야겠다, 마음먹고 있었다. 어느 정도 앞머리가 내려와서 미장원에 갔는데 남편이 이렇게 깎아놓았다고 했더니 미용실 언니 포복절도. 주변에서 머리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 파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미용실에서도 권하지 않고 출산 이후로 미뤘다.

  그래도 앞머리도 잘랐겠다, 미용실에서 드라이도 해줬겠다, 간만에 신경 쓴 것 같아서 <아바타>를 보러 갔다. 3D로 봐야한다는 일념 하에 전 좌석 매진인 상영관에 갔는데 밀폐된 공간에서 두꺼운 옷을 입은 숱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려니 숨이 턱턱 막히더라는. 영화 초반에는 생각보다 지루해서 잠깐 졸기까지 했다. 하지만 영상도, 스토리도, 메시지도, 그간에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영화였다. <늑대와 춤을>, <매트릭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등 여러 가지 영화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들과는 다른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웰빙 SF, 자연주의 블록버스터라고나 할까. 무성한 입소문처럼 굉장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신선한 상상력이나 예상 밖 해피엔딩도 그렇고,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좋을 것 같다.

  크리스마스나 연말이면 직장 동료나 친구들 선물 위주로 생각했는데 올해는 엄마를 위해 냉장고를 질렀다. 친정집에 십년 넘은 냉장고가 있는데 문도 헐거워지고 냉동실도 좁아서 엄마가 그 동안 불편해 하시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앞으로 몇 년은 더 쓸 수 있다며 절대로 바꾸지 않으실 기세였다. 냉장고 리터로 치자면 우리 집에 있는 것이 훨씬 더 큰데 대부분의 음식을 친정집에서 얻어다 먹고 있으니 항상 죄송한 마음이 있었다. 장모님이 해주신 일 년치 반찬값에 한참 못 미친다며 남편은 손수 냉장고를 고르고 계산했다. 엄마는 얘들이 무슨 짓을 한 거냐며 펄쩍 뛰셨지만 이미 결제하고 배달 예약까지 해놔서 소용 없다고 잘라 말했다. 따지고 보면 다 우리를 위한 일이다. 엄마가 언제 당신만을 위해 장을 보고 요리를 하신 적이 있었던가. 그래도 어쨌거나 남편이 장한 일을 했으니 나도 이번 시어머니 생신 때 신경 좀 써야겠다. 

  작년에는 둘 다 논문 쓴다고, 올해는 무거워진 몸 때문에, 항상 계획만 하고 있는 겨울 여행은 가지 못했지만 조촐하게 보내는 크리스마스에 별다른 아쉬움은 없다. 어쩌면 둘이서 조용하게 보내는 크리스마스도 올해가 마지막인지 모른다. 트리와 눈사람 인형이 제자리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크리스마스를 나는 것도. 끝나가는 연휴를 아쉬워하지 않으며 이렇게 푹 쉴 수 있는 겨울도. 새 달력을 걸고 새 탁상달력에 동그라미도 쳐놓았다. 얼마 남지 않은 한 해를 잘 마무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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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12-27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벌써 몇년째인지 몰라요..
마님이 크리스마스와 신정때 호두까느라 집에 매일 밤 11시에 들어오니까요..흑흑.

깐따삐야 2009-12-28 11:06   좋아요 0 | URL
참! 마님이 이맘때쯤 가장 바쁘시구나. 그래도 덕분에 멋진 공연 보시잖아요. 좋으시겠다.^^

2009-12-27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8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8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9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상상했던 서른과는 조금 달랐지만 올 한해도 비교적 무탈하게 보냈다. 언젠가 친구와 재미로 색깔사주란 것을 본 적이 있다. 영화관 앞 한 평 남짓한 간이건물에서 수다쟁이 색깔도사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는 그때 내 인생의 정점은 지났다는 듯 말했었다. 그리고는 평범하게 흘러가는 인생이 요즘 같은 시대에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내 인생에 과연 정점이 있긴 있었나? 내 직업과 내 성격 상,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다.

  올 한해 학교에 복직해서 여름까지는 정말 바쁘게 보냈다. 군단위의 작은 학교에 근무하다가 대학원으로, 다시 도시의 큰 학교로 복직했을 때 처음에는 다소 혼란스러웠다. 항상 어디에나 장단은 있는 법. 시골 아이들이 학구열은 낮은 반면 정감 있는 행동들로 감동을 주었다면, 도시 아이들은 매사 열심이면서도 이기적인 말 한 마디로 확 거리를 두게 만드는 대비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아이들을 지도하는 교사나 학부모도 마찬가지였다. 콩 심은 데 팥 나겠나. 아이들이 그러한 부모와 교사들의 언행을 무의식중에 답습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미안한 것은, 담임이 자꾸 바뀌어서 우리 반 아이들에게 혼란을 주었던 점. 지금 그 아이들을 대신 맡고 계신 기간제 선생님을 보면서 느낀 것도 많다. 임시 담임을 하는 내내 교탁에 예쁜 화병을 갖다 놓고 아이들에게 잔치도 열어주셨다. 아무 걱정 없이 쉴 수 있었던 것도 선생님 공이 크다. 나와 동갑이지만 그 순수하고 열성적인 마음에 존경심이 절로 일었다. 그런 분들이 학교 현장에 많아졌으면 좋겠다.

  결혼생활도 그럭저럭 꾸려왔다. 남편은 나에게 많이 변했다고 한다. 예전 같으면 절대 이쯤에서 끝나지 않을 문제도 지금은 어느 순간 입을 다물어 버린다나. 내가 뒷심이 없어 포기가 빠른 건지, 더 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아버려 체념하기 시작한 건지, 다툼은 과거보다 줄었지만 그렇다고 내 기분이 썩 좋아진 것은 아니다. 그는 성실하긴 하지만 훌륭할 정도는 아니고 나 역시 크게 꼬투리 잡을 데는 없을지라도 함께 살기 무난한 성품은 아니다. 자꾸 마모되다 보면 둥글어지기도 하는 것인지 이제는 왜? 라며 고개를 바짝 쳐들 때 보다 그래그래, 하고 넘어갈 때가 더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더욱이 엄마 목소리를 식별한다는 뱃속의 아기를 생각하면 청소기 돌리는 소음 이외에는 오로지 좋은 소리, 고운 말만 들려주고 싶기도 하다. 이따금씩 너도 알 건 알아야 해,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그런 주장을 핑계로 목소리를 높일 때도 있지만.

  책을 많이 읽는다고 좋은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는, 어쩌면 당연한, 그러나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깨달음 하나. 부모님으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심지어 남편에게까지 들었던 말. 너는, 깐따삐야 너는, 당신은, 책을 노상 읽으면서도... 어떻게... 오버인지는 몰라도 그러한 비판은 일말의 수치심까지 들게 했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책을 읽는 줄 아냐, 라고 반박하기에는 어딘지 께름칙한 기분. 좋아하는 책을 읽는다고 좋은 사람이 되지는 않지만 필요한 책을 읽으면 희망이 있는 것도 같다. 아픈 곳이 낫고 무럭무럭 성장하려면 때로는 쓴 약, 입에 맞지 않는 음식도 섭취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간혹 아, 이 책 재밌겠는데, 가 아니라 이 책은 나 같은 사람이 읽어야 되는데, 싶은 책들이 있다. 책 많이 읽고도 하나도 안 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으면, 스스로 사랑해 마지않는 취미에 오욕을 남기고 싶지 않다면, 지적 허영이나 호기심, 단순한 흥미를 떠나 전략적, 성찰적 독서가 필요한 것 같다.

  며칠 전, 영화 <파주>를 보면서 생각했다. 사람은 참 약하고, 비겁한 존재구나. 죄의식에 시달리다가도 쉽게 용서를 구하고, 잡히지 않아 열망하던 것들에 대해 다시 쉽게 실망하고 도망치고... 모든 다채로운 감정과 이성적 판단에 앞서 살아가는 일, 삶이 우선이기 때문일까. 언젠가부터 전혀 간을 하지 않은 음식처럼 내 삶이 밍밍해졌음을 깨달았을 때 나이를 먹는구나, 라는 느낌 한켠에는 내가 이제 제대로 비겁해지고 있구나, 하는 씁쓸한 자각. 어떤 문학작품들은 마지막 불씨를 태우듯 서른을 불사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간의 세월동안 구축해놓은 틀 안에서는 그 무엇도 도화선이 되지 못하더라는. 영화에서 김중식(이선균 분)은 말한다. 자꾸 할 일이 생겨. 그는 학생일 때는 학생운동을 하고 사회로 나오자 사회운동을 한다. 자꾸 할 일을 만듦으로서 정체성을 찾고 속죄를 하고. 아무것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지만 그것이 삶의 누추함과 지루함을 견디는 그의 삶의 방식이다. 내 눈에는 그 또한 비겁한 삶의 방식.

  내게는 이제 더욱 평범해지는 일만이 남은 것 같다. 수다쟁이 색깔도사가 말한 것처럼. 그때는 그 말이 어쩐지 섭섭하게 들리기도 했지만 이제는 부디 그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죽음’을 잊고 살 때가 많은데 베푸는 것은 관두고서라도 그저 주변에 빚 많이 안지고 떠날 수 있는 생이었으면, 하는 바람.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상상을 하더라도 결국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한 자리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현실. 나는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했지만, 영원히 어른아이로 머물더라도, 반드시 숙제를 끝내고나서 놀러나가는 순진한 초등학생 같은 마음가짐만큼은 변함없이 가지고 갔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 비겁함과 맞바꾸는 최고의 약속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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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12-23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파주를 보며 그냥 '불쌍한 인생들' 이 자꾸만 떠올랐다는.. 하지만 그 영화에서 건진 건 '서우'라는 배우에요. 형부를 사랑하지만 감정이 뒤얽혀버린 연기를 너무 기가막히게 해주는지라..더불어 책 많이 읽는다고 똑똑하고 현명해지지 않는다.. 이것 역시 요즘 제가 느끼는 명제 중에 하나라는..^^

깐따삐야 2009-12-27 15:00   좋아요 0 | URL
저는 그 영화 속 주인공들이 참 싫었어요. '서우'의 연기는 단연 돋보였죠. 이선균에 대해선 조금 실망. 책도 많이 읽어야 할 나이가 있는 것도 같고. 저 자신이 매너리즘에 빠진 것도 같고 그러네요.^^

레와 2009-12-24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새해 다짐을 '무뎌지지 말자!'로 정했어요. ^^

쿵당쿵당 가슴 뛰는 일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깐따삐야 2009-12-27 15:02   좋아요 0 | URL
좋네요. 무뎌지지 말자! 제게도 필요한 다짐이에요.
전에는 별 거 아닌 일에도 급흥분하고 가슴 뛰고 그랬는데 말이죠.^^

웽스북스 2009-12-26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의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위무였음을 깨닫게 되는 일이 많지요. 파주, 저도 꼭 보고 싶네요. 흑.

사실 이 연말일기를 쓰자는 태그를 보고 저도 뭔가좀 써보고싶은데 슬렁슬렁 아무래도 그냥 지나가게 될 것 같아요. 흐흐. 깐따삐야님. 우리 새해에는 글로 좀더 자주 만나요.

깐따삐야 2009-12-27 15:05   좋아요 0 | URL
그쵸? 그나저나 영화가 좀 어두워서 보고 나면 꿀꿀해져요.

작년에는 서로 이런저런 변화를 맞느라 그랬는지 이야기를 많이 못했죠. 정말 올해는 더 많이, 자주 봐요.^^


Mephistopheles 2009-12-27 15:07   좋아요 0 | URL
또 누가 압니까 웬디양님과 깐따님이 자주 수다를 떨면 메피스토가 간장게장 쏠지...(먹는 걸로 미끼 던지는 중)

깐따삐야 2009-12-29 17:28   좋아요 0 | URL
대체 언제적 간장게장인지 가물가물~ 지금은 왠지 냉면이 먹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