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세계문학세트>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어느 사랑의 실험 - 독일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알렉산더 클루게 외 지음, 임홍배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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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이야기를 읽은 지 오래되었다. 옛날에 어느 마을에 욕심 많은 장사꾼이 살았는데, 멀고 먼 옛날 어느 고을에 마음씨 착한 총각이 살고 있었는데... 그렇듯 향수 어린 동화 말이다. 이 책에 실린 열일곱 편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오래되고 슬픈 동화를 읽는 기분이었다. 촌철살인의 재기발랄한 작품들도 있었지만 한 권의 작품집 전반에 흐르는 정서는 ‘애수’였다. 또한 이 타국의 옛날이야기들은 학창시절 밤을 지새워가며 한국 근현대 단편들을 읽던 추억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현진건의 ‘빈처’, 김유정의 ‘떡’, 전영택의 ‘화수분’ 등 내가 그 시대를 살아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잊지 못할 아프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했다.

  작품집에는 괴테, 토마스 만, 헤쎄, 카프카 등 낯익은 거장들의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주로 장편으로 주목받은 작가들이지만 새롭게 소개되는 흥미로운 단편들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토마스 만의 ‘루이스헨’은 그간에 보아왔던 토마스 만의 작품과 완전히 달랐다. 미모의 젊은 아내가 소심한 뚱보 남편을 파티 석상에서 쇼크사 시키는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인데 만은 이야기 서두에 이렇게 쓰고 있다. 세상에는 아무리 대담한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도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결혼사례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경우는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도리밖에 없다. 마치 연극에서 얼간이 노인네와 생기발랄한 미인이 사랑의 모험으로 결합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듯이. 스물두 살에 쓴 작품이라기엔 다소 벤자민 버튼스럽다. 오히려 나중에 발표한 ‘트리스탄’이나 ‘토니오 크뢰거’가 더 젊은 작품이란 생각이 들 정도.

  그밖에 좋았던 작품은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 그리고 알렉산더 크루게의 ‘어느 사랑의 실험’이었다. 심리소설의 대가라고 일컬어지는 슈니츨러는 그 명성답게 그리 대단하지 않은 소재를 가지고도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데에 성공했다. ‘장님 제로니모와 그의 형’은 죄책감과 사랑이라는 두 가지 감정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교묘하게 얽어놓은 수작이다. 슈니츨러의 심리학은 참으로 명석하고 현실적이면서도 감동을 준다. 한편, 크루게의 ‘어느 사랑의 실험’은 독자에게 ‘불행이 일정한 도를 넘으면 더 이상 사랑을 작동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던진다. 나치 치하에서 자행되었던 잔인한 생체실험 과정을 보여주는데 연출된 극본, 무미건조한 보고서와 같은 문장이 다소 충격적이다.

  나머지 모든 작품을 일일이 다 열거하기 보다는 문학에 관심이 있거나 재미있는 옛날이야기에 목마른 독자들이라면 직접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특별히 독문학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거나 흥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 사는 보편적인 이야기로 읽힐 만큼 재미와 가치가 있다. 또한 전집 중에서 단 한권의 책만 받아보았지만 매우 정성껏 엮었다는 느낌이 든다. 깔끔한 장정에 오자, 탈자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더러 번역체의 어색한 문장 때문에 외국 소설을 꺼려하는 독자들도 많은데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주로 숨겨진 단편들을 발굴하여 싣다 보니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깊이 있게 탐색하고 이해할 수 있는 문학전집은 아니지만 거장의 싹을 품고 있는 새롭고 흥미로운 작품들과 조우할 수 있는 즐거운 책읽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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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3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5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낮의 시선>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한낮의 시선
이승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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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을 읽고 아직도? 라는 생각을 했다. 작가 이승우에 대해서. 이십대 초반, 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무성영화에 나오는 코메디언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극심한 허무함에 빠져 있었다. 나는 도저히 나를 구원할 수가 없었다. 친구를 따라 성당에 나가보기도 했고 서점과 도서관의 심리, 철학 코너에서 하루 종일 배회하기도 했다. 젊은이라면 누구나 그런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그 시기로부터 벗어난다.

  그 무렵에 읽었던 책들이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김성동의 『만다라』, 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과 같은 책들이었다. 종교도 없었고 주변의 종교인들에 대해서도 다분히 회의적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위와 같은 책들을 문학으로, 소설로 읽었다. 그때 작가 이승우와 처음 만났다. 젊고 열정적인 신학도가 아니라면 결코 써내지 못할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빛나는 처녀작이란 대개 그 시기의 그 아름다움으로 제 몫을 다 할 뿐. 작가도 세파를 피해갈 수 없으니 그가 추구하는 세계에도 변화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는 쓰고 있다. 신과 절대자, 아버지에 대해. 최근에 가장 주목받았던 『생의 이면』도 그렇고 꾸준히 내놓고 있는 중단편집에 실린 작품들 또한 그 색채에 일관성이 있다. 그런데 지겹지 않다. 도리어 눈물겹다고 해야 하나. 두 번 쯤 감탄하게 된다. 한 가지 주제에 천착해 꾸준히 밀고 나가는 그 고집에 한 번, 그리고 무겁고 답이 없는 이야깃거리를 쉽고 흥미진진하게 풀어가는 솜씨에 한 번. 책을 만들기에만 급급한 요즘 작가들이 눈여겨 배워야 할 미덕이다.

『한낮의 시선』속에 담긴 사연도 이전에 그가 추구했던 이야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날, 폐결핵으로 요양 중에 문득 아버지를 찾아 나서게 된 청년이 있다. 이런저런 환영과 꿈에 시달리다가 무언지 모를 힘에 이끌려 지난 세월 무의식 속에 묻혀 있었던 아버지를 찾지만 청년은 아버지로부터 자식임을 거부당한다. 하지만 폭군이면서 동시에 보호자였던 병장을 살해한 일병의 이야기를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두렵고 불안한 ‘있음’보다 두렵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은 ‘없음’이 더 두렵고 불안했을 것이다(p.142). 실제로 그렇다. 인간이 종교를 갖고, 예술을 하고, 사랑을 하는 것. 그렇듯 삶 전반을 아우르는 숱한 행위들은 어쩌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큰 불확실성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인간은 그 두렵고 불안한 ‘있음’을 찾아다니고 의지한다. 아버지를 찾는 청년의 운명 또한 그렇다. 그는 인정받을 수도 있지만 거부당할 수도 있다. 선택은 오롯이 아버지의 몫이다. 하지만 평화로운 ‘부재’보다는 불편한 ‘존재’를 기어이 찾아 나선다. 의지할만한 권위와 절대를 지향하는 인간 운명의 상징에 다름 아니다.

  나는 천내로 데려가 달라는 말만 했다. 내가 꿈속에서 보았던 숲이 천내의 숲이라는 걸 나는 꿈을 꾸는 동안에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숲속에 들어가 있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가장 깊은 곳, 하늘을 받치고 선 키 큰 나무들과 투명한 햇빛이 큰 품이 되어 껴안는, 가장 오래된 시간의 정적 속에 들어가 있고 싶었다. 그곳에서라면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고, 무엇에도 쫓기는 일 없이 그저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그루 나무처럼 햇빛에 휩싸인 채 다만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곳에서라면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말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p.159). 마침내 마음속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청년이 가고 싶은 곳. 천내의 숲. 그곳은 혼돈이나 갈망 없이 다만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 곳,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상태로 머무를 수 있는 곳이다. 결국 믿고 기댈만한 절대적 존재를 찾아 헤매는 것이 인간 운명이지만 그 질긴 존재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한낮의 투명한 숲속에 홀로 설 수 있는 경지, 천내의 숲은 그 경지의 종착점이자 작가 이승우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이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여전히 삶과 인간의 근원을 파고드는 작가의 꾸준한 고집에 존경과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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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의 일기 - 버지니아 울프의 삶과 문학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희진 옮김 / 이후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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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을 처음 안 것은 중학생 무렵 즈음,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라는 시에서였다. 학교 도서관에는 그녀의 책이 몇 권씩 있었지만 당시에는 헤세나 디킨즈의 소설을 즐겨 읽을 때라 어둡고 난해해 보이는 그녀의 작품을 가까이 하지 못했다. 어느 날, 다른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오빠가 두툼한 책 한권을 집에 가지고 와서 읽는 것을 보게 되었다.『항해』였다. 나는 재미있냐고 물었고 오빠는 독특했던 그녀의 삶을 이야기해주며 재미있다, 그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는 잘 읽힌다고 했다. 주로 추리소설이나 역사소설을 좋아했던 오빠가 그 책을 읽던 모습은 이상할 만큼 아주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중에는 오빠가 그때 사춘기였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였나, 막연하게 짐작해 볼 뿐이었다.

  전공시간과 그 외 틈틈이, 그녀의 작품이나 비평들을 읽으면서 작가노트나 일기에 대한 호기심이 항상 있었다. 울프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 그녀는 영국에서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여자였다. 그만큼 재능이 있었지만 재능 있는 여성들은, 어쩌면 그 재능이 눈에 띄면 띌수록, 그만큼 감수해야 할 것도 많은 시대였다. 이렇듯 불합리한 시대와 시대를 앞지르는 자의식 사이에서 갈등했던 여성이라면 대외적인 작품 이외에 자기만의 비밀 노트 한권 가지고 있을 법 했다. 그리고 기다림 끝에 마침내 버지니아 울프의 일기가 번역되어 국내에 공개되었다.

『어느 작가의 일기』는 버지니아 울프가 27년(1915~1941)에 걸쳐 쓴 일기를 남편인 레너드가 편집한 것이다. 울프에게 레너드가 없었다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실제로 유서에서도 고백하고 있듯, 울프는 레너드에게 많은 빚을 졌다. 하지만 남편의 사랑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우울증은 그녀를 자살로 몰고 갔다. 그렇다면 그녀는 불행했을까. 분명 그런 날도 없지 않았지만 일기장 곳곳에는 여성으로서, 작가로서, 주어진 삶을 사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울프의 정열과 의지가 엿보인다. 어제가 내 생일이었다. 그래서 이제 서른여덟이 되었다. 그렇다. 스물여덟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 그리고 오늘이 어제보다 더 행복하다. 새 소설의 새로운 형식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에. -1920년 1월 26일. 그녀는 오직 잘 쓰고 싶다는 욕망과 결의만으로도 어제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찌하여 인생의 모든 호사와 사치는 남성인 줄리언이나 프랜시스에게만 주어지고, 여성인 페어나 토마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것인가? -1928년 10월 27일. 여성에게도 자기만의 방과 연 500파운드의 수입만 있다면 셰익스피어나 워즈워드 같은 작가가 나왔을 거라는 유명한 메시지처럼 울프는 과거, 동시대 여성들이 겪는 불평등을 주목했다. 그런 면에서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양질의 문학수업을 받고 오로지 글만 쓸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았던 그녀는 행운아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혜택의 이면에는 여타의 여성들과 다르다는 것. 다르게 살게끔 남다른 재능과 교육과 자의식을 부여받았다는 것. 그것은 그 값을 톡톡히 치를 수밖에 없는 운명일 수도 있다.

  가끔 나는 자문해 본다. 어린애가 은빛 공에 홀리듯 나는 인생에 의해 최면에 걸린 것은 아닐까 하고. 그리고 이것이 산다는 것이냐고. 이것은 매우 빠르고, 반짝거리고, 자극적이다. 그러나 어쩌면 천박할지도 모른다. 나는 인생이라는 공을 두 손에 들고, 그 둥글고, 매끄럽고, 무거운 감촉을 조용히 느끼면서, 그렇게 며칠이고 가지고 있고 싶다. -1928년 11월 28일. 이런 부분에서는 이례적으로, 매우 낭만적이면서도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진 울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성추행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의 기억, 세간의 혹평, 시시각각 쳐들어오는 우울과 싸워야 했지만 그녀는 삶과 글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해 갔다. 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또 남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글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그리고 영원히 나 자신의 주인이다. -1937년 8월 6일. 어쩌면 자살은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그런 그녀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죽음의 방식이란 생각이 들었다.

  한편, 이 책은 울프 고유의 서평록이라고도 볼 수 있을 만큼 짧지만, 의미 있는 비평들이 가득하다. 그녀는 특히 바이런, 밀턴, 셰익스피어 등의 천재성에 관해 구체적인 찬사를 보내고 있다. 언젠가 세미나 시간에 울프의 비평문을 다루면서 그녀가 지향했던 '양성적(androgynous) 글쓰기'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 알 듯 말 듯 개념이 잘 잡히지 않았는데 문득 박경리의『토지』가 떠올랐다. 강한 여성성을 그리면서도 남성적이고 기백 있는 문체가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울프는 아마도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창조적인 통합을 뜻하는 의미로 그런 말을 쓰지 않았는가 싶은데 이러한 면은 울프의 소설보다 비평에서 더 두드러진다고 생각한다. 대외적인 글이 아니기에 다소 산만한 감이 있지만 그러한 비평의 씨앗들이 일기 곳곳에 드러나 있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를 읽고 나서 그 고집스런 은둔과 집중에 놀라워한 적이 있는데 버지니아 울프 역시 작가로서, 더욱이 여성으로서, 많은 것을 무릅쓴 작가였다. 결혼했지만 아이를 갖지 않았고 불필요한 사교를 자제하며 오로지 글쓰기에 몰입했다. 그리고 이 소박한 타이틀의 두툼한 일기장은 그처럼 울프 자신이 여성으로서 갖은 편견과 몰이해 속에서도 자아를 지켰던 분투기이자, 위대한 작품들의 영감과 근간을 품고 있는 작가노트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녔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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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9-12-11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뵙네요.
이 책 챙겨놨다가 꼭 한번 읽어야 겠는 데요.
쌩유 ^*^

깐따삐야 2009-12-12 19:1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참 오랜만이죠? ^^
다른 사람 일기장 읽는 것은 언제나 재밌는 것 같아요.ㅋ

L.SHIN 2009-12-11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깐따님 서재에 글을 다는군요.
시간상 글은 못 읽고 인사차 다녀갑니다.^^

깐따삐야 2009-12-12 19:17   좋아요 0 | URL
앞으로는 더 자주 뵈요. 저도 놀러갈게요.^^
 
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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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소설을 좋아해서 기대를 좀 했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 장정일은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후에 나를 크게 만족시킨 적이 없었다. 숱한 책을 섭렵한 박학다식함은 잘 알겠다. 하지만 그것이 때로 잡설이 된다. 나는 그가 어느 정도 자기 세계를 구축한 작가나 사상가라기보다는 아직도 미숙한, 탐색이라는 의미에서의 헤맴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냥 헤매고 있는 작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두 주인공, 금과 은. 시인을 꿈꾸다 정치적 우파 청년으로 성장하는 은과 시민운동을 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문학을 택해 낙향하는 금. 작가는 주인공 은에게 가장 공을 들였다 한다. 은에게는 다른 인물에게는 없는 자기개발의 특성과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반성 능력이 있다. 이 작품에서 은은 구 우익과 뉴라이트의 영향 아래 있지만, 그들과의 사상투쟁을 통해 자긍심에 찬, 젊고 순수한 우익으로 단련되어갈 것이다. 작가의 말만 보면 그럴듯한데 내가 보기에는 은이 작가의 기대처럼 성장할 것 같지도 않고 대학 초년생으로서 보낸 그 기간 동안 은에게서 작가가 묘사하는 저런 특성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금과 은이 입은 옷은 광주태생의 정치외교학과 학생, 부산출생의 사범대 학생, 지극히 도식적인 구도인데 이들에게서 발견되는 남다른 특성이란 자폐성향과 동성애 정도랄까. 아버지나 주변 인물들을 통해 드러나는 노무현,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도 식상했고 그 정도의 식상한 깨우침으로 인해 금과 은이 커다란 성장이나 의식적 변화를 일으켰을 것 같지도 않다. 우익 청년 탄생기라는 타이틀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 싶을 만큼 작가가 추구하는 이상에 비해 전체적인 비약이 너무 심하다는 얘기다.

  우화적 스토리 구조나 하나하나의 문장을 보면 장정일은 글을 잘 다루는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읽는 맛도 있다. 하지만 그 도구에 담아내는 내용이 나는 영 마뜩치 않다. 내가 좀 더 어릴 때는 내가 세상을 아직 잘 몰라서 그래, 생각하고 그의 글을 읽었다. 그런데 지금은 장정일은 뭘 제대로 알기나 하고 이렇게 쓰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좌, 우 성향을 가진 청년 둘이 친구가 되고 애인이 되어 한 사람은 문학으로, 한 사람은 정치로, 나아간다는 결론은 너무 속 편하지 않은가. 설마하니 장정일이 이 정도의 혼자만의 이상을 가지고 좌우 이념을 무색하게 할 근사한 보수 우익 청년의 탄생을 기대했다면 그는 너무 순진한 것 같다.

  우리에게는 『지와 사랑』,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가까이는『젊은 날의 초상』등 재미있고 훌륭한 성장소설이 많이 있다. 소설로 한 사람을 키운다고 해서 모두 성장소설로 읽히는 것은 아니다. 『아담이 눈뜰 때』의 아담이야말로 장정일의 청춘의 자화상, 구월의 이틀이었다. 촉망되는 우익 청년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아담에게는 진정성이 있었다. 금과 은은 마치 이런저런 청춘들을 곁눈질로 살펴가며 만들어낸 인조인간처럼 보인다. 나는 작가 장정일이 자꾸 선생님이 되려 하지 말고 더더욱 그다워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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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 최영미 산문집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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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미, 하면 대개의 사람들이『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서른 살과는 먼 나이 즈음 신문 지면을 꽉 채운 그녀와 그녀의 시집을 보았다. 왠지 내 나이와 맞지 않는 것 같아 새 시인이 등단했나 보군, 하고 지나쳤다가 대학생이 되고 난 후에 그 시집을 읽게 되었다. 지금이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일에 동요하고 아파하던 시기여서 그랬는지 책 속의 많은 시들이 마음을 끌었다. 이후에 그녀와 관련된 기사 및 평론들까지 찾아 읽게 되었는데 베스트셀러가 된 첫 시집 한권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른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 책에서 그때의 유감을 뒤늦게 고백하고 있다.

  당시 평론가들과 최영미 시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말이 오갔든, 나는 그녀의 시로부터 많은 위안을 받은 독자였다. 굳이 혁명이니, 80년대니, 이데올로기니, 그런 무거운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다음과 같은 시에서 시인으로서의 날카로운 감수성을 읽었다. 우연히 동승한 타인의 차/안전벨트로 조여오는 침묵의 힘/다리를 꼰 채 유리 속에 갇힌 相思/밀고 밀리며/스스로를 묶어내는, 살떨리는 집중이여 -‘짝사랑’ 전문. 갖가지 육중한 용어를 써가며 숨은 뜻을 찾아내려는 몇몇 평론가들도 있는 듯 했지만 나는 그녀의 시를 아주 단순하게, 청춘을 보내는 고통의 연가쯤으로 읽었다.

  그 후로 그녀는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간간히 산문집도 내곤 했다. 첫 시집만큼 이렇다할만한 책이 없었던 것은 독자로서의 내 취향이 변한 탓인지, 그녀도 장정일이나 이문재처럼 처녀작이 워낙에 대단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주문했는데 오랜만에 읽는 맛이 나는 산문을 접한 기분이다. 나도 그녀처럼 오프사이드를 겨우 이해한 축구광이고, 이종욱과 고영민이 있는 두산베어스의 팬인데다, 덩치 큰 화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그런 공통분모 덕도 있겠지만 재미있게 읽히는 까닭은 행간마다 묻어나는 그녀의 ‘솔직함’ 때문인 것 같다. 시인 김용택이 최영미를 가리켜 ‘응큼떨지 않는 서울내기 시인’이라고 했는데 아주 적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어딘가 까탈스럽기는 해도 인정이 있어서 함께 있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친해지는 사람이 있는데 최영미 시인도 그런 타입의 사람이지 싶다.

  지금은 아마 속초에 살고 있나보다. 서울에서 춘천으로, 속초로 옮겨가니 집도 마련하고, 차도 생기고, 악다구니 같은 서울살이도 면하고. 자족하고 있는 듯 했다. 비좁고 말도 많은 동네이다 보니 나이 먹어 혼자 사는 여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럴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담담히 읊어주고 있다. 서른아홉의 그녀는 강둑에 앉아 남은 청춘을 방생하리라 다짐하며 서른인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서른은 결코 한 해가 아니다. 언제든 자기 인생을 철저하게 뒤돌아 볼 때 우리는 영원히 서른 살이고, 부러진 뼈들을 추슬러 새로 시작할 수 있으리라. 가차 없이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나는 감히 믿는다. -p.149 철저하게, 가차 없이. 오랜만에 듣는 말들이다.

  서른 살의 고통스러웠던 잔치는 마흔 살의 보다 여유로운 고백으로 나아가면서도 철저하고 가차 없는 자기성찰 만큼은 그치지 않는다. 작가의 그런 점이 믿을만하다. 치열했던 서른 살, 어쩌면 아직도 서른 살 같은 그녀와 달리, 나는 고작 서른임에도 듬성듬성 느슨해지는 사고를 온 심신으로 느끼는 중이다. 타인에게 관대해졌다기보다는 무심해진 것이 맞고, 스스로에게 가차 없기는커녕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대충 눈감아버리는 일이 많아졌다. 잘난 희망이 아니라 질긴 절망을 벗삼아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오기가 무섭고도 부럽다. 어느 시점에는 이렇듯 잘 변하지 않는 사람과 재회하는 일이 반가울 때가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강단 있고, 외로워도 구차하지 않은, 그녀의 싱글라이프가 내내 건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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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1-25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관심이 가는 산문집이네요.
나도 그녀를 좋아하거든요.^^

깐따삐야 2009-11-27 21:25   좋아요 0 | URL
첫 시집 이후 조금 실망하기도 했는데 이번 산문집은 잘 읽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