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선물
이서인 지음 / 화남출판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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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에 나온 책인데 그때 나는 무슨 책을 읽고 있었을까. 왜 이 책을 지나쳤을까. 아마 홍보 탓일 것이다. 웬 뒷북인지 요즘은 좀 되는 소설들에 관심이 간다. 최근 소설들은 -최근에 나온 소설들을 모두 읽지는 못하였으나- 낭비라는 느낌을 준다. 치열함이 없다.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횟집을 겸한 민박집에 장기투숙을 하게 된 하유정이라는 작가와, 그곳 주방장인 한수라는 남자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러브스토리 또는 불륜이라고 쓰려다가 그냥 만남이라고 쓴다. 하유정은 한수를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러브스토리가 아니며 불륜이라고 하기에는 한수의 순정이 저급해 보인다.  

  책을 읽다보면 하유정이라는 여자에 대해 계속 분노하게 된다. 남편과 딸이 있는 그녀는 작가란 모름지기 자유로운 영혼이어야 한다는 구실로 남성 편력을 즐긴다. 물론 천재적인 남성들로부터 영감과 잠재력을 이끌어내던 루 살로메 같은 여인은 아니다. 그녀에게 남자란, 그리고 연애란 심심풀이 육포 같은 것이다.  

  복잡한 가정의 묵묵한 맏이로, 식당의 근면성실한 일꾼으로 아무런 갈망 없이 살아왔던 한수에게 완전한 낯섦으로 다가온 하유정은 지식인, 먹물 특유의 관찰력과 통찰력으로 순수덩어리인 한수를 알아본다. 그리고는 아무 어려움 없이 한수를 자기 남자로 만들어 버린다. 한수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 매우 고급하고 세련된 세계에서 왕림한 듯한 하유정에게 스스로를 아낌없이 내어준다.

  "하 작가님은 정말 모든 사람에게 배려가 깊어요. 하기야 작가라면 마땅히 인간을 연민할 줄 알아야지요. 그런 면에서 하 작가님은 작가로서의 진정성을 갖추신 분이에요." 다시 김 선생의 말, "오히려 제가 저들에게 배우죠." 그녀의 말. 한수는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돌아왔다(p.254). 오히려 제가 저들에게 배우죠. 이 대목에서는 토할 것 같았다. 그리고 뜨끔했다.    

  헌신하다가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진 한수에게 그러나 이 연애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바, 이렇게 묻고 있다. 저 여자는 자기가 어떤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p.277) 작가는 독자들이 하유정에게 분노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돌아보았으면 한다고 썼다. 하지만 이런 소설을 읽는 평범한 독자들보다는 권해줄 사람들이 따로 있지 않은가. 지식권력으로 분류되는, 소설책이라고는 전혀 사볼 것 같지 않은 사람들에게 한번 읽혀봤으면 싶다. 물론 튼튼한 자기애와 자기합리화를 자양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한권의 소설로 개선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이런저런 상상해보기를 좋아하는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하유정이라는 작가와 오버랩되는 여류작가 한명을 떠올렸다. 물론 나는 그 작가의 사생활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자꾸 그 여자가 생각났다. 그리고 하유정의 친구로 잠깐 등장하는 또 다른 여류작가가 이 책을 쓴 '이서인'의 반영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너는 그래도 나는 아니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오만일 것이고 일부의 이야기를 전체가 다 그런 것처럼 결정지워버리는 것은 편견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작가의 오만과 편견이 독자에게 뭔가 매섭고 찌릿한 일깨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무기력하거나 자폐적인 목소리만 넘쳐나는 요즘 소설을 읽다가 간만에 참 강단있는 소설을 만나니 모처럼 뭐 하나 제대로 읽은 것 같다. 

  그런데 작가 이서인은 알고보니 소설가 임영태와 함께 사는 여인이었다. 표지에 실린 사진이 아름다웠다. 작가의 첫 장편인 <숲속의 연어>는 절판되었단다. 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구 가지고 계신 분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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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 - 1994 제18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임영태 지음 / 민음사 / 199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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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영태 작가의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을 읽고 예전에 읽었던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세월이 흘렀지만 역시 재미있고 좋은 소설이다. 요즘 이만큼 쓰는 작가도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검색해보니 작가의 책 대부분이 절판된 상태. 안 팔렸고, 안 팔린단 얘기다. 많이 아쉽다.   

  이 소설엔 세 친구가 등장한다. '우리'라고 명명되는 두 사람, 그리고 '두호'. 요즘 청년들은 아니고 음악다방, DJ의 마지막 세대쯤 될까. 공고를 나와 생계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전전하며 하릴없이 노닥거리는 우리는 서울 생활에 진력이 나거나 훌쩍 뜨고 싶을 때 춘천에 있는 두호에게 찾아간다. 두호는 노동현장에서 총무 일을 하면서 집안의 맏아들로, 빈손으로 찾아드는 우리의 물주로, 약한 내색 없이 묵묵히 살아가는 친구다. 소설은 우리의 이야기와 두호의 이야기, 그리고 우리와 두호의 이야기를, 그 또래 청년의 시점과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러고보니 공고생, 상고생들을 잊고 살았다. 언제는 기억하고 살았냐만은 요즘은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청춘들도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치는 마당이니 실업계 고교를 나온 청춘들에게까지 눈을 돌리지 못했다. 음악다방이라니, 무슨 고릿적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여상을 나온 친구 하나는 이번에 출산을 하면서 십년을 다닌 회사에서 잘렸다. 출산율을 걱정하는 나라에서 오늘 이 순간에도 벌어지는 일이다. 십년간 청춘을 바쳤던 직장이 그녀에게 준 것은 상당 분량의 분유였다. 모유수유를 하는 그녀는 분유가 필요하면 자기에게 말하라 했다. 아직 유통기한이 한참이나 남았다고.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3교대로 일했고 그 와중에 편찮으신 어머니와 마땅한 직업 없이 전전하는 남동생을 돌봤다. 중학교 때까지의 내 기억으로 그녀는 영어 성적이 좋았고, 글씨를 예쁘게 썼으며, 특히 피아노를 잘 쳤다. 그리고 서태지를 좋아했다. 꿈이 뭐냐고 물은 적은 없다. 하지만 언제고 결혼하고 임신하면 내쫓는 회사에서 십년간 뼈빠지게 일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회사에서는 아주 당연히 그만두는 걸로 알던데?" 그녀의 말에 문득 서글퍼졌다.   

  소설 속 우리와 두호도 무엇을 하기도 전에, 꿈도 꾸어보기 전에 벽에 부딪힌다. 책을 읽어도 처지에 맞지 않는 인문적 기질은(p.34) 상처로만 돌아오고 이십세기에 살면서도 잡지 속 아름다운 여성과의 연애는 언감생심일 뿐. 그러나 누구를 향하여 무엇에 대하여 분노하랴. 그 대상을 알 만큼 우리는 깨어 있지 못했다. 우리는 그저 황폐한 유적이 되어 가라앉으며 오래도록 벌레라는 말만 신음처럼 주저리고 있었다. 벌레(p.217).     

  그때와 지금은 달라졌을까? 계급이 좀더 미시화, 세분화 되었다는 것 정도? 그러나 영악해진 젊음들은 황폐한 유적이 되기를 거부한다. 할 일이 없다고 왜 황폐해야 하는가. 그들은 열심히 놀거리를 찾아다니며 무정형의 삶을 즐긴다. 우리는 벌레였어, 라고 절망할만큼 순진한 것 같지도 않다. 그래서 나는 술이 떡진 우리와 두호보다 해사한 그들이 더 낯설고, 무섭다.    

  나는 이 보잘것 없는 젊음들의 찌질한 신파, 케케묵은 정서가 썩 마음에 든다. 특히 두호의 삶은 HD 이전 드라마게임을 보는 것처럼 축축하고 촌스럽다. 요즘 소설에서는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케릭터들이다. 담배도 못 피우면서 길에서 만나면 담배 한갑 사주고 싶다. 선선한 저녁 무렵, 파라솔 밑에서 소주 한잔 해도 좋을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그렇게 그들의 삶을 응원하고 싶었다. 나는 벌써 기성화된 것일까. 어느새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그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니.  

  임영태 작가의 건필을 빈다. 내가 갖고 있는 두 책 모두 잘 읽히고 오래 곱씹게 된다. 무엇보다도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진솔함이 있다.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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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10-06-17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아홉번째집두번째대문을 다 읽지도 못하고 도서관에 반납을 했지 뭡니까? 다시 한번 더 빌려 읽으려구요. 뒷 이야기가 궁금하지만 찾아보거나 그러지 않고 있어요. 내가 읽어야지!
저도 여상을 나왔어요. 졸업도 전에 취직을 했지요. 다행히 좋은곳(?)에 취직이 돼서 결혼을 해도 애를 낳아도 나가라는 말 한마디 안하는 직장이었지만 제가 여건이 안맞아 그만두게 되었네요.
아마 그래서 더 공무원을 선호하겠죠? 사기업과 달리 공무원은 결혼했다고, 출산한다고 그만두라는 소리 안하니까요. 얼른 기업 풍토가 바뀌어야 할텐데 말이에요..

깐따삐야 2010-06-18 10:54   좋아요 0 | URL
되게 좋게 읽은 소설이에요.^^
졸업하기도 전에 그런 좋은 직장을 구하셨다니 공부 열심히 하셨나 보다. 그 친구네 회사는 여직원이 결혼하고 임신하면 너무도 당연히 그만두는 분위기래요. 여전히 그런 곳이 많죠. 그러면서 출산율이 어쩌고 하는 거 보면.-_-
저는 교사이다보니 그만두란 소리는 안 듣지만 눈치도 보이고 아이도 안 낳은 남자 선생님들이 업무 효율 어쩌고 하는거 보면 완전 짜증나요. 우리나라는 아직도 한참 멀었어요.

비로그인 2010-06-17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한 걸 부러워하는 몹쓸 짓을 권하는 사회.
저도 이 작가를 좋아합니다. 밑바닥에서 담담한 목소리를 끌어낼 줄 아는 필력의 작가.

깐따삐야 2010-06-18 10:56   좋아요 0 | URL
우울해요.ㅠ
Jude님도 좋아하신다니 반갑네요. 많이들 모르더라구요. 대부분 절판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고. 다음 소설을 기대하고 있어요.^^
 
진심의 탐닉 - 김혜리가 만난 크리에이티브 리더 22인 김혜리가 만난 사람 2
김혜리 지음 / 씨네21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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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화야 미안해>에서 김혜리 기자의 필력은 확인한 바가 있다. 그 책을 읽고 거의 상찬에 가까운 리뷰를 썼다. 영화에 관심이 있고, 맛있고 성실한 영화평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즐거운 독서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 책을 샀다.

  이 책은 '김혜리가 만난 크리에이티브 리더 22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김제동, 유시민, 신형철 등의 인터뷰에 관심을 갖고 읽었다. 그외 김명민이나 고현정과의 인터뷰도 흥미로웠다. 그런데 이들이 정말 리더인가, 더욱이 크리에이티브 리더인가? 어쩌면 당시 이슈가 되고 있거나 접근이 용이한 사람들을 김혜리 기자의 기준으로 선택, 취재한 것은 아닌가?

  "오늘날 인터뷰에 대한 수요는 군중 속의 고독을 강요하는 삶의 양식이 낳은 슬픈 허기의 신호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가짜처럼 보이는 시대에 진짜배기의 벌거벗은 진실에 가닿고 싶다는 간절한 발돋움이다." 인터뷰의 동기에 관해 김혜리 기자가 인용한 조지 가렛의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 책에서 보리라 기대했던 것도 진짜배기의 벌거벗은 진실 같은 것일텐데 어쩐지 나는 보던 것을 다시 본 느낌이다.     

  물론 이 책에는 많은 것들이 들어있다. 유머와 감동이 살아있는 버라이어티쇼 같은 글모음이다. 김제동이 야구 포지션을 가족 구성원에 비유할 때는 무릎을 치며 폭소가 터져나오고 고현정이 촬영 구경 나온 아이를 안아주는 모습에서는 마음이 짠해진다. 그런데 새롭지 않다. 보아왔던 것들이고 있음직한 장면이다. '진짜배기'의 '벌거벗은' '진실' 같은 것은 어디에서도 못 보았다. 그래서 재미있는데도, 읽고 나면 심심하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내게 "너는 사람 속내를 털어놓게 하는 재주가 있어." 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를 향한 부담스런 각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당시의 나는 귀는 당나귀처럼 컸고 입은 봉제인형처럼 지퍼를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놀라운 집중력이 있었다. 이 책의 멋진 제목처럼 사람에서든, 책에서든, 그 무엇에서든 진심을 탐닉하고픈 때였다. 사람을 만나고 오면 행복했고, 또 피곤했다. 그리고 지금은? 피곤할 것 같은 사람은 아예 안 만난다. 

  인터뷰는, 경청은, 그 과정을 한편의 글로 완성, 새로운 진실로 주조한다는 것은 단순히 상대방 앞에서 마음을 연다, 귀를 기울인다, 이상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사람 속내를 털어놓게 하는 것은 재능이 아니라 성정일 가능성이 크다. 김혜리 기자는 그 성정과 에너지를 두루 갖추었다. 그러나 기왕 공식적인 인터뷰어로 나섰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주면 좋겠다. 어깨 힘을 느슨히 빼고 하지만 발걸음은 과감하게. 기대를 갖고 읽은 책에서 벌거벗은 진실이 아니라 고만고만한 진실만 보았기에 이렇듯 아쉬움이 남는다.  

  책을 엮지만 말고 <영화야 미안해 2>를 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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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 장영희가 남긴 문학의 향기
장영희 지음, 장지원 그림 / 샘터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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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뮈를 알게 되고 한창 좋아할 무렵, 고려대 학생들을 부러워 한 적이 있다.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수강신청을 해서 김화영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하고. 카뮈 연구를 집대성한 <문학상상력의 연구>는 딱딱한 제목과는 달리 마치 지중해의 과일처럼 풍성하고 아름다운 책이었다. 저자의 육성으로 책 속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내 심신은 부드러운 스폰지처럼 한 마디, 한 마디,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흡수할 것만 같았다.  

  조선일보에서 장영희 교수님의 칼럼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질투가 일었다. 서강대 영문과 학생들은 섬세하고 인간적인 에세이스트이자, 쾌활하면서도 사려 깊은 스승으로서의 장영희 선생님을 매일 만나겠구나 하고. 목발에 기댄 채 문학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워지고 건강해지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선생님. 그곳의 학생들은 단지 지식뿐만이 아니라 삶에 임하는 자세까지 배우겠구나 싶었다.     

  이번 책은 장영희 교수님 1주기 추모 기념으로 발간된 책이다. 미발표된 수필, 저자가 좋아했던 영시와 번역, 고인을 아꼈던 이들의 추모글 등이 실렸다. 기존에 나와 있는 고인의 책들과 비슷한 느낌이지만 그렇듯 비슷한 느낌이어서 반갑고 가슴 뭉클해지기도 했다.     

  학창시절에 장영희 교수님의 아버지인 장왕록 교수님의 번역으로 나온 <달과 6펜스>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읽자마자 무작정 좋아져버린 책이다. 이 책의 말미에는 부녀가 함께 찍은 사진이 몇 장 실려 있다. 세 살짜리 딸내미를 안고 다정하게 웃고 있는 아버지. 함께 문학의 길을 걷고 나중에 같이 교과서를 만들게 되는 부녀. 내가 엄마가 되어서 그런가. 그 흑백사진 한장이 되게 애틋했다.  

  대학원에 다닐 때, 지도교수님은 초췌한 낯빛을 감출 수 없음에도 항상 열정적인 어조와 확신에 찬 눈빛으로 문학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시곤 했다. 사석에서 어린 딸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땐 그 어조와 눈빛에 따스함과 부드러움이 더해져 수줍은 애정을 드러내셨다. 나는 그 모습이 참 좋았다.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진솔하고, 인간적이고, 아름답구나. (연락도 하고 찾아가고도 싶은데 아, 내가 좀 많이 변했다. 살도 빼야 하고!)

  언젠가 <위대한 개츠비>의 리뷰를 쓰며 개츠비의 위대함은 시대착오성에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나는데 이번 책에서 개츠비의 위대함을 아주 제대로 알았다. 저자 피츠제럴드가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를 꼭 집어서 말한 적이 있단다. '희망을 가질 줄 아는 비상한 재능, 낭만적 준비성, 그리고 경이로움을 느낄 줄 아는 능력 extraordinary gift for hope, a romantic readiness, capacity for wonder'(p.166) 이라고. 역시 개츠비는 시대착오적이다. 더불어 그는 문학적인, 너무나 문학적인 주인공이다. 장영희 교수님의 삶과 글 또한 그러하다.  

  모처럼 이렇듯 진실한 사람, 착한 글을 만나면 마음이 누그러지고 편안하면서도 한편으론 슬프다. 시대착오적인 사람이 될까봐서 매번 허우적거리는 나 자신을 직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살고 싶은대로 사는 것이 곧 나의 길이 되면 좋으련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에서 마음 지키며 사는 일이 쉽지 않다. 이미 내 서정은 많이 말라버렸다. 언젠가 슬프지도 않게 된다면 그것이 더 불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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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5-13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문학의 숲을 거닐다였나, 내생애 단한번이었나, 를 읽으면서 서강대 영문과 학생들을 정말 부러워했었어요. 게다가 저 아는 분은 실제로 서강대 영문과 출신이어서, 장영희 선생님께 수업을 들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생각해보면 저도 좋은 선생님들한테 배웠으면서, 또 이럴 땐 남의 떡이 커보여요.

그래도, 깐따삐야님은 스스로를 잘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인걸요. 이제 영달이가 깐따삐야님께 더 많은 희노애락을 선사해주지 않겠어요? 서정이 말라버리는 일은 없을 거에요. ^-^

깐따삐야 2010-05-14 15:04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 역시 좋은 선생님들한테 배웠으면서 항상 남의 떡이 커보인다죠.

웬디양님, 그나저나 몸은 많이 좋아진 거에요? 그새 봄이 다 가고 여름이 오려나봐요. 우리가 봄에 만나서 그런가. 나는 항상 훤칠하고 싱그런 봄처녀로 웬디양님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의 만남도 참 '서정적'이었어요.^^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맞추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
김용택 지음, 김세현 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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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발령을 받아 담임을 맡았던 아이들이 올해 스무 살이 되었다. 이제는 성인이 된 아이들이 미니홈피 방명록에 흔적들을 남기고 갔다. 대학에 간 아이도 있고 취직을 한 아이도 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자기 이름을 기억하냐고 물었고 발령 첫해 만났던 특별한 아이들이라 그런지 얼굴과 이름이 고스란히 매치되어 새록새록 기억이 났다. 당시의 나는 노하우는커녕 정열만 넘치는 어리석은 교사였고 아이들은 젊고 어설펐던 내게 매 순간 희비가 엇갈리는 다이나믹한 하루를 선물하곤 했다. 스트레스로 인한 탈모와 어지럼증까지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다시는 그 마음, 그 시간으로 돌이키기 힘든 추억이다. 

  이 책은 교단을 떠난 김용택 시인이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엮은 에세이집이자 작가 자신의 인생론과 시론을 담은 명상록이기도 하다. 특히 섬진강 아이들과의 추억이 강물처럼 반짝인다. 출산을 이유로 벌써 몇 개월째 교단을 떠나 있지만 나 역시 교복 입은 아이들을 보면 저절로 시선이 가곤 한다. 말쑥한 교복을 입고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아이들을 보면 이 정신 못 차리는 계절과는 별도로 싱그러운 기분이 들곤 한다. 그들은 때로 온갖 악행과 거짓말로 교사를 절망시키기도 하지만 나 역시 그런 시절을 지나왔고, 굳이 언론에서 콕 짚어주지 않더라도 어른들의 행태를 그대로 답습한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크다. 그나마 김용택 시인의 아이들은 아름다운 섬진강에서, 소수정예로, 훌륭한 시인 선생님까지 두었으니 축복받은 셈이다. 똑같은 한부모가정, 조손가정이라 하더라도 시골 아이들에 비하여 도시 아이들은 가난과 결핍감을 더 크게, 더 직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자연은 공평하지만 사회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책에는 짤막한 단상부터 날카로운 교육론, 시인으로 살게 된 운명 등 다양한 글이 실려 있는데 함께 실린 삽화 또한 눈길을 끈다. 글을 돋보이게 하면서도 나름의 메시지와 여운을 남기는 좋은 그림들이다. 박수근이나 이철수의 작품처럼 단순하고 친근한 그림들이 호젓하고도 정감 어린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사느라 눈빛에 날이 서고 마음은 퍽퍽해질 때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글 한 줄 읽고, 그림 한 편 보고 그러면 좋을 것 같다.

꽃 핀 운동장에 햇살이 좋다.
살 내놓은 아이들이 튀는 햇살을 차며 뛰논다. 눈부시다.
아름다우면 배고프다. 피는 꽃 보면 배고프다.
지는 꽃 보면 더 그런다.
내 오래된 허기다.
아이들이 바람에 날리는 꽃잎을 따라다닌다. 가벼이 떠서 나는 나비떼 같다.
저 오래된 인류의 희망, 꽃 이파리들이 하얗게 굴러가는,
아이들이 뛰노는 땅에 엎드려 입 맞추다. -p.203

  머잖아 운동장에 화사한 봄볕이 내리고 나비떼 같은 아이들이 하얀 꽃잎 사이를 날아다니겠다. 험한 일들이 많은 요즘, 시인의 눈빛과 마음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는 어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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