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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 이야기
베르나르 키리니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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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제목만 보고 고기 이야기인줄 알았다. 채식주의에 맞선 육식주의자의 육덕진 에피소드 모음집인가. 역시 그럴 리는 없었고 '베르나르 키리니'라는 변태인지 천재인지 헷갈리는, 어쩌면 변태성 천재라고 명명할 수 있는 젊은 프랑스 작가의 기상천외한 소설집이었다.     

  여기 실린 열네 편의 소설들을 읽다보면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해진다. 온몸이 오렌지 껍질로 덮여 있는 여자, 영혼은 하난데 몸이 두 개, 급기야 세 개까지 번식하는 주교, 착각의 나라에서 오해의 언어로 소통하는 야푸족, 해안의 기름띠에서 미학적 가치를 찬미하는 집단, 파리지옥과 동거하는 식물학자 등 좀처럼 보지 못했던 낯설고 기괴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짜릿짜릿 신나는 롤러코스터를 타고난 뒤 얼얼한 정신과 후들대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생각한다. 아, 또 타고 싶다. 아, 내가 다시는 타나 봐라. 이 소설집의 느낌이 그랬다. 베르나르 키리니, 도련님마냥 해사한 얼굴을 해가지고는 읽는 이의 얼을 쏙 빼놓는다. 솜씨 좋은 악덕 셰프가 요리한 정교한 판타지, 초현실적 뻥, 달콤살벌한 탐미주의 앞에서 나는 고민한다. 이걸 권해. 권하지 말어.  

  지금 장난하냐. 아니다. 참 대단하다. 독특한 상상의 유희일세. 아니지. 대부분 혹세무민의 헛소리에 불과해. 오락가락하던 와중에 김영하의 소설을 읽고 났을 때가 그랬다는 것을 떠올렸다. 쿡쿡대며 재미있게 읽고난 후 갑자기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허무감에 망연자실. 이쯤 되면 괜히 작가한테 트집을 잡고 싶어진다. 당신 뭐요. 그래서 뭐. 인간이 고작 이것밖에 안되는줄 아는가 보지.   

  눌려있던 무의식을 건드리는 알싸한 에스프리에 시종일관 감탄하면서도 이런(?) 소설들을 만나면 공연히 착잡해진다. 나라는 인간이 고루한 정규교육의 산물이라 그런가. 독특한 스타일의 소설가 한 둘 쯤 갖는 것이야 괜찮겠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소설은 이러지 말아야 할텐데,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오버 섞인 바람을 하곤 한다. 허무와 권태와 상실로 마비된 현대인에게 구원책은 오로지 판타지 뿐인가. 현실의 서사를 망각한 채 새로운 스타일에 취하기만 하면 되는가. 골치 아픈 질문들이 웅얼웅얼 올라온다.  

  이제는 오직 전설만을 믿을 것. 그리고 삶에 대해서는 다 잊어버릴 것! (p.274)  

  피에르 굴드 씨의 좌우명이 내게는 조금 위험하게 들린다. 자극적 판타지보다 무자극적 현실이 더 기묘할 때도 많고 삶을 위해 판타지가 필요한 것일 뿐. 그 이상은 아니라는 생각에 워낭소리 같은 잔잔한 다큐멘터리 한편 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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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를 기다리다
코이께 마사요 지음, 한성례 옮김 / 창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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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고 노래했던 건 함민복 시인이었다.  

  <타따도>의 연인들은 관계의 경계를 너나들며 누가, 누가 우리 좀 떼어놔주지 않겠어요? 라고 바란다.   

  <파도를 기다리며>의 여인은 파도를 타러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누군가의 시체가 해변에 밀려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45자>의 오가따는 갇힌 방과 달리는 길의 경계에서 계속 달리고 싶지만 이번에는 세상 밖으로 나가버릴지도 모른다고 고백한다.  

  <언덕 무리>의 나는 아들이 사라진 현실과 아들이 돌아온 환상의 경계에서 죽은 남편이 남기고 간 종이비행기를 모두 날려보낸다.   

  코이께 마사요는 카와바따 야스나리상 수상자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여기 실린 네편의 소설은 매우 시적이고 탐미적이다. 작가는 등장인물을 아슬아슬한 경계에 놓아두고는 그들의 정황과 공상, 독백을 통해 관능적인 꽃을 피워낸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그 꽃을 한번 만져보고 싶도록 매혹한다. 손을 대는 순간, 그 꽃은 검붉은 피를 철철 흘리며 죽음과 허무의 향을 짙게 피워올릴 것 같다.   

  종이로 만들었지만 끝이 날카로워서 싸울 수도 있을 정도야. 그러니까 절대로 사람을 향해서 날리면 안돼. 맞으면 상처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 종이에 곧잘 손가락을 베이기도 하잖아. 종이는 부드럽지만 흉기가 되기도 해(p.213).   

  경계를 넘어서며 제 힘으로 멀리까지 날아가는 종이비행기에 감탄하는 아이를 향해 <언덕 무리>의 내가 충고하는 말이다.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윤리적인 대목인데 이상하리만치 오래 기억에 남았다. 이런 것을 보면 나는 아름다움에 매혹되긴 해도 그것에 천착하는 사람은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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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ia 2010-10-21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소개글 신문에서 봤는데 표지 사진만 보고 단박에 알아챘어요.
어제 알라딘 와보니 깐따비야님 글 있어서 반가웠구요.
중고교때 국사 배우면서 묘한 반일감정에 사로잡혔던 탓인지 스무살이 넘어서도 일본작가들 책엔 손이 가질 않았었는데 나쓰메 소세키 읽은 뒤로 하나둘씩 찾아보고 있어요.
일반화하긴 그렇지만 일본소설은 때로 낭창하고 때론 어둡고 대체로 섬세한 느낌을 줘요.^^

깐따삐야 2010-10-23 11:38   좋아요 0 | URL
저도 뒤늦게 아톰하고 밍키한테 괜한 감정 품고 그랬었는데 말이죠.ㅋ
알리샤님 느낌처럼 낭창하고 어둡고 섬세한 소설 읽고 싶을 때, 특히 저는 겨울만 되면 이상하게 일본소설이 땡겨요. 나쓰메 소세키는 내 바닥을 들여다보고 싶을 때 손이 가는 작가에요.^^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윤대녕 산문집
윤대녕 지음 / 푸르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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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에서 굴렌 굴드를 듣던 시크한 남자는 어디로 갔지? 책을 읽으며 아내의 퉁박에 꼼짝 못하는 퇴화한 중년 사내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윤대녕을 읽지 않은 이들은 뭐 이 정도의 글을 가지고, 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간 윤대녕을 읽어온 이들은 알듯말듯 모종의 미소를 지을 수도 있겠다. 아마도 이 산문집은 윤대녕 스스로 자신의 이력과 속내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첫 책이 될 것이다. 어느덧 나이 먹은 그의 마음이 소박해져 독자들을 향해 나 실은 이런 사람이오, 반성과 고백을 하고 싶었는지도. 윤대녕식 은유와 비의에 길들어 있던 나는 대낮에 맨얼굴의 여인을 만난 것처럼 조금 실망했고 덕분에 그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책은 소제목을 달고 다섯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지만 분류에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모든 글이 언제나처럼 힘들이지 않고서도 유유히 읽히는데 특징적인 점이라면 마지막 장에 그간의 서평들을 실었다는 것. 그는 어떤 책을 읽어왔을까, 서평은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을까, 그에게 한 수 배워볼까, 기대했는데 다소 건조하다 싶은 인상에 창작과 비평은 역시 별개인가, 하는 아쉬움.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이 한 권의 산문집은 이 작은 아쉬움을 상쇄시키고도 남는다. 고독했던 유년기, 수수께끼 같은 불교식 선문답, 신기루이자 구원의 존재인 여인들, 클래식에 대한 감식안, 유랑자들의 휴식처인 제주도, 시 또는 회화 같은 문체 등, 윤대녕 하면 떠오르거나 짐작할 수 있는 창작의 모티브들이 오랜 베일을 벗고 드러나 있다. 무심하던 그가 독자를 향해 쑥스럽게 내미는 선물 같은 책이다.  

  "사랑하는 자는 말이 없다."(p.18) 그는 첫사랑이 남기고 간 이 말을 간직하며 그 후 사랑을 숭고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한다. <데미안>의 에바 부인 같던 그의 여인들은 아마도 첫사랑의 환영들이었는가 보다.  

  아주 오래전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소풍을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앉아 우리는 김밥과 사이다를 먹고 호수에 떠다니는 오리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고 얼핏 돌아본 어머니의 얼굴엔 난 같은 잔잔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날 어머니는 행복했던 것일까? 부디 그랬더라면 좋으련만(p.40). 부모의 인생을 돌아보고 연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나 자신 나이 먹어간다는 증거일 수도. 감히 말한다면 그도 철들기 시작했는가 보다.   

  문학으로 뜨거운 국과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에 어느 날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 굶어죽지 않고 버티는 게 삶에 있어서 가장 큰 미덕이라는 것도 알았다. 자진해서 세상 밖으로 나갈 생각이 아니면 어쨌든 턱걸이를 계속해야 한다. 세상과 매끈하게 어울리는 재주는 없으나 땀을 흘리고 뛰어와야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는 건 안다. 그러나 입장권을 얻기 위해 고개를 숙이지는 않는다(p.161). 강직하고 경건한 문학 노동자를 보는 것 같다. 어딘가 생존본능이 결여되어 있는 듯 했던 윤대녕의 남자들은 이렇듯 남몰래 부단히 턱걸이 중이었던가.  

  문화는 진정제가 아니라 오히려 면역력을 기르는 비타민에 가깝다. 요컨대 문화라는 건 타인을 알아가는 과정처럼 어느 정도의 능동적인 자기 투자와 이해의 노력이 필요한 품목이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가치와 삶의 깊이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p.190). 문화에 대한 훌륭한 정의다. 시대 탓을 하며 시류에 휩쓸려 가는 도중에 이런 문장을 만나면 죽비소리처럼 환기가 된다.  

  아기 속에는 어른을 위한, 어른의 소란스러운 세계를 위한 그리고 나중을 위한 예비로서의 침묵이 수북이 쌓여 있다(p.251).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에 나오는 구절로 이 책의 마지막 장 서평에서 발췌했다. 아직 옹알이 뿐인 영달이를 떠올리자 웃음이 났는데 현란한 바디랭귀지를 보고 있자면 아기는 결코 침묵한다 볼 수 없다. 어쩌면 내재된 언어의 전압을 몸짓으로 뿜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떠오르는 짤막한 인연 하나. 십년 전, 나는 아무개에게 <침묵의 세계>를 선물했고 그는 나를 멋진 사람으로 착각했고 그 착각 속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가 곧이어 정신을 차리곤 이상한 편지와 함께 떠났다. 그리고 나는 내내 침묵했다. 그 책을 여기서 다시 만나다니.      

  무작위로 인용하고 보니 책에 비하여 너무 초라한 리뷰가 되어버렸다. 무릇 사랑하는 자는 말이 없고 그는 조용한 여자를 좋아한다는데 그것은 그를 향한 나의 소란스런 애호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니 독자인 것이 행복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번 산문집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그의 아내의 면모에 일말의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나는 그와 함께 사는 여인이 항상 궁금했는데 한 사람을 풍경처럼 바라보는 것과 그 풍경 안에서 함께 지지고볶고 사는 것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 새삼 재확인하게 되었달까. 윤대녕을 계속 읽을 수 있는 것은 어느만치 그 여인 덕분이란 생각에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감사하고 싶어졌다. 윤대녕은 그 자신의 말처럼 인복이 많고 그 속에는 분명 처복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이 모든 것이 궁금한 독자들은 어여 읽으라는 말 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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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와 2010-10-04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요, 깐따삐야님이 별을 다섯개나 준 책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요. ^^

네. 시월이에요. :)

깐따삐야 2010-10-05 10:04   좋아요 0 | URL
윤대녕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페이지를 아껴가며 야금야금 읽게 되실 거에요.^^
시월은 좀 울적한데 이 책으로 위안하며 시작했네요.

Alicia 2010-10-04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신문에 인터뷰 글만 보고도 눈물이 쏟아지는 줄 알았더랬습니다..
조만간 읽어보려구요 :)

깐따삐야 2010-10-05 10:07   좋아요 0 | URL
아니 왜 이 냥반은 책을 안 내는 거냐고 새로 나온 책, 새로 나올 책을 클릭해가며 신경질을 부린 적도 있어요. 그 보답 같은 책이에요.^^

2010-10-04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05 1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목 박완서 소설전집 10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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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핍진한 소설을 찾고 있었다. 왜 갑자기 <나목>이 떠올랐을까. 사춘기 무렵에 이미 읽었는데 문득 다시 읽고 싶어졌다. 박완서 할머니는 올해도 한권의 에세이집을 세상에 내놓았는데 그 책에는 관심이 가지 않고 <나목>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6.25로 두 오빠를 잃은 뒤 성치 않은 어머니를 부양하며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일하는 이경. 전쟁의 상흔과 청춘의 열망 사이에서 방황하던 그녀 앞에 나타난 환쟁이 옥희도 씨. 외롭고 상처 받은 이경에겐 사랑할 대상이 필요했고 옥희도 씨에겐 자신이 예술가로서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줄 생생한 대상이 필요했다. 그렇듯 절묘하고도 절박한 지점에 만난 두 사람. 자연히 사랑을 하지만 옥희도 씨의 말처럼 그는 그저 질식할 것 같은 회색빛 생활에서 경아라는 신기루에 정신을 판 것이고, 경아는 옥희도 씨를 통해 아버지와 오빠를 환상하고 있었던 것 뿐. 헐벗은 나목의 계절, 시정의 논리로 인정할 수는 없지만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인연이었다.   

  마흔 살, 다소 늦은 나이의 등단이었지만 일명 '복수의 글쓰기'라 명명되는 리얼리스트적 사명으로 박완서 할머니는 그간 참으로 숱한 작품을 써왔다. 흔히 번복되는 소재인 6.25를 비롯하여 중산층의 삶과 속내, 중년에서 노년에 이르는 세월 속에 드러나는 개인의 문제 등, 특유의 차지고 맛깔스런 글발로 남녀노소를 아울러 여러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또한 천의무봉의 글솜씨라는 평이 있을만큼 매번 빈틈없는 글쓰기, 작품의 똑고른 질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내겐 처음이나 지금이나 이 작품이 가장 아름답다.  

  본격적인 생활인이 되기 전, 꾸밀래야 꾸밈없는 달뜬 목소리가 면면히 들려서일까. 옥희도 씨가 자신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 물구나무 서기를 하며 온 화실을 돌아다니고 싶어하는 이경을, 하지만 결코 그럴 수는 없는 이경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를 완전히 발가벗기고 깨뜨리고 싶지만 끝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절규하는 이경을, 청춘 언저리의 그 두 가지 얼굴을 나도 마주한 적이 있다. 어제의 망령과 내일의 희망 사이에서 죽고 싶다, 살고 싶다, 를 되뇌이는 이경은 비단 50년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이라는 구원이자 절망의 감옥에서 나목의 계절을 견디고 있는 또 다른 옥희도 씨도 나는 알고 있다.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근원적 고독은 때때로 스스로를 잠식해가지만 그 끝없는 부침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대결 속에서 <나무와 여인> 같은 불멸의 작품이 탄생하기도 한다. 결국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잔혹한 시대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존재 조건, 그들 자신이고 그래서 이 오래된 소설은 세월을 거슬러 여전히 호소력을 갖는다.       

  작가들은 대개 가장 마지막 작품이 가장 훌륭한 작품이 되기를 바라겠지만 그들의 처녀작, 또는 등단작에는 이후의 작품들 속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투명한 맨살, 말랑한 속살 같은 것이 만져지게 마련이고 그것은 이후의 풍성함이나 정교함 보다도 훨씬 더 독자인 나의 마음을 끈다. <나목>도 물론이었고 이 꾸무적대고 느리적대는 가을의 문턱에서 간만에 찡, 하게 다시 읽은 아름다운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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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과 시작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대산세계문학총서 6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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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토피아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모든 것이 명백하고, 일목요연하게 설명되어진 섬. 

그대의 발은 탄탄한 증거의 토대를 딛고 서 있다. 

모든 길은 목적지를 향해 뻗어 있다. 

이곳에는 혼돈에서 영원히 해방된 나뭇가지로 뒤덮인  

'논리적인 가설의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우물가에는 곧고 탄탄한 '이해의 나무'가 

"옳아! 이제 알겠어!"를 연방 외치는 중. 

그 안쪽으로 '명백한 타당성의 계곡'이 

드넓게 펼쳐진 푸른 숲이 있다. 

일말의 의구심이라도 싹트기 시작하면 바람이 불어와 사방으로 흩어놓는다. 

메아리는 부르는 사람 없어도 저절로 응답하면서 

세상의 비밀에 대해 기꺼이 속삭인다. 

오른쪽에는 '의미'가 보관된 동굴. 

왼쪽에는 '심오한 깨달음'의 호수. 

바닥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온 '진실'이 수면 위로 살포시 고개를 내민다. 

'흔들리지 않는 확신'의 언덕에 오르면 

꼭대기에서 '사물의 본질'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매력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섬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다만 해변에서 희미한 발자국이 발견될 뿐. 

그것들은 한 치의 예외도 없이 모두 바다를 향하고 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바다에 몸을 던져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는 것뿐이라는 듯. 

삶이란 워낙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가득 차 있는 법이니. (pp.263-264)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알라딘의 리뷰에서 발견한 폴란드 시인인데 모르고 살았으면 아쉬울 뻔 했다. 폴란드 시인은 처음이고 시를 읽는 것도 무척 오랜만이지만 몇몇 갸웃거리는 시들을 제외하곤 대개 잘 읽히는데다, 철학적 사유를 참신한 언어로 담아내는 솜씨가 탁월했다. 책의 너덜거리는 띠지를 곧잘 떼어버리곤 했지만 이 시선집의 띠지는 버리지 않았다. 담배 피우는 시인의 모습이 흑백 사진으로 실렸는데 무슨 고민 있을 때 쳐다보면 야 인마, 괜찮다, 그럴 것만 같다.  

  아무도 수심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나비는 바다가 무섭지 않다, 고 노래했던 이는 김기림이었던가. 명명백백한 유토피아를 피해 모순과 오류의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존재, 바로 인간. 위의 시를 읽으면서 과연! 이란 감탄사와 함께 차가운 스타우트가 마시고 싶어졌다. 이렇듯 검고 진한 흑맥주를 부르지만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을 것 같은 시편들이 이 묵직한 시선집 속에 풍성하게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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