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가족 대산세계문학총서 158
고지마 노부오 지음, 김상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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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년에 중부 일본에서 태어나 1941년에 도교국제대학 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중학교에서 교사를 하다 징집, 중국 동북부, 즉 만주 지방으로 파병된 경험이 있다고 한다. 나도 고지마 노부오의 작품은 처음 읽어볼 뿐만 아니라 이이의 이름도 ‘도쿄국제대학’이란 학교 이름만큼 신기해 위키피디어 등을 뒤져보니 그리 큰 정보는 나오지 않는다. 전후 일본 문학에서 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소설가이며,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했다는 거. 위키 백과에선 이이가 일찍이 니콜라이 고골, 프란츠 카프카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1960~70년대 작가치고 이 세 소설가에게 영향 받지 않은 사람 있으면 세 명만 대보라고 하고 싶다. 그리하여 결론 내기를, 일본 국내에서는 명성도 있고 문학적 성가도 있을 수 있지만 세계인이 공통적으로 동감하기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작가, 정도로 알고 말기로 했다. 근데 도쿄국제대학이란 학교가 정말 있어? 궁금해마지않아 구글 검색해보니까, 있기는 있지만 신주쿠와 가와고에 시에 걸쳐 있는 학교로 1965년에 설립되었다는데? 고지마가 졸업한 학교는 아닌 모양이다. 혹시 몰라, 전쟁 때 폭탄 맞아 문 닫았다가 20년 만에 다시 열었는지. (확인해보니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을 '도쿄국제대학'이라고 잘못 쓴 거다. 문학과지성사에 알려줘야겠다.)
  <포옹가족>은 도쿄에 있는 한 콩가루 집안 이야기다. 미와 씨 가족. 구성원은 주인공이자 영문학자이며 은근히 돈도 많은 미와 슌스케, 그의 아내 도키코, 이제 고등학생이 되는 아들 료이치, 중학교에 다니는 딸 노리코, 그리고 집에 들어온 후 점점 집이 지저분하게 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드는 중년의 가정부 미치요. 흠. 이 작품이 나오고 55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점잖게 가정부 미치요를 ‘미치요 씨’, 라고 부르기로 하자. 미치요 씨, 이 집안을 미치게 만드는 최초의 단추를 누른 인물이니 충분히 ‘씨’라 불릴 자격도 있다.
  아내 도키코가 미와 씨보다 두 살이든가 연상이다. 예쁘지는 않지만 큰 골격에 시원시원하게 생긴 여사는 남편한테 단단하게 삐친 것이 있으니, 전에 일 년 동안 미국에서 연수를 받을 때, 미국 측에서 동부인해도 된다고 했던 것을 미와 씨가 아내의 의견을 그냥 무질러버리고 혼자 떠났던 것에 앙심을 품은 게 아직 덜 풀렸을 듯한 분위기. 짐작 하시리라.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지만 60년대 초반의 일이니 일본에서도 이런 일은 아내가 결정은커녕 의견개진도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여간 이젠 역전이 되어 슌스케가 아내에게 단 둘만의 여행을 떠나자고 제의를 해도, 당신처럼 재미없는 사람하고 뭐 하러 여행을 가겠느냐, 하고 타박을 하고, 얼마 전에 면허증을 땄으니 자동차나 있으면 전 가족이 자동차 여행이나 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더라도 함께 자동차 여행을 떠날 사람은 조지, 미치요, 료이치, 노리코를 태우면 자리가 없을 터이니 남편은 집이나 지켜야 할 팔자라고 싹 입을 닦는다. 물론 아직 자동차를 구입하지도 않았지만 차가 있더라도 말이지.
  어라? 조지? 조지가 누군가 하면, 가정부 미치요 씨가 알고 지내는 미군 군무원 헨리 씨가 있었는데, 아이들에게 영어로 가르쳐줄 겸, 외국인 친구 역할 좀 해달라고 해 승낙을 받았으나 일찍이 존 웨인과 같은 기병대 출신이라고 뻥을 친 헨리 씨가 그만 병이 나는 바람에 조카인지 뭔지 하는 젊은이 조지를 헨리 씨 대신 아이들 친구 겸해 미와 집에 기숙을 시키고 있었던 거다. 일본인들이 워낙 예의가 깍듯한지라 미군기지 병원에 입원한 헨리 씨에게 병문안을 가기로 해서, 당연히 가정부 미치요 씨가 앞장을 서고, 슌스케와 도키코, 그리고 조지가 뒤를 좇았다. 어떻게 하다가 슌스케가 얼핏 조지의 가슴팍을 쳐다보니 넥타이가 암만 봐도 도키코가 사준 것 같아 왠지 좀 망연자실 해진 경험이 있었다. 그것 뿐 아니라 늦은 시간에 조지로부터 전화가 와 슌스케가 받자 멀리 있던 도키코가 득달같이 달려와 수화기를 사납게 낚아채며, 이건 료이치에게 온 전화이니 당신은 신경을 끄라면서 과민반응을 일으키기기도 했지만, 저게 미쳤나 왜 이리 심하게 화를 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하면서 사케 한 잔 마시는 걸로 정리를 한 적도 있었다.
  슌스케가 책 출간 일 때문에 2주 만에 적지 않은 번역비와 함께 귀가했을 때는 도키코가 외출 중이었고, 아이들도 다 학교에 가서 딱 혼자 있게 되었다. 이때 미치요 씨가 은근히 슌스케에게 접근해 뭐라 하느냐 하면, “선생님, 저기 글쎄, 사모님께서…… 조지와…….” 슌스케는 체통 상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어 됐다고, 더는 말하지 말라고 했으나 즉각 도키코에게 전화를 해서(어디로 외출했는지는 알았나보다.) 당장 집으로 오라고 하고 점점 초조해 하더니 대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도키코 여사가 등장하니 일단 집 안으로 들인 다음, 도키코를 확 밀쳐 소파에 쓰러뜨리고는 “당신이 그 자식이랑 한 짓, 세 시간이나 그 자식이랑 붙어 있었어.”라고 외친 다음 왼 손으로 도키코의 머리타래를 잡은 상태에서 오른 손으로 주먹을 쥐고는 세 번, 탕, 탕, 탕, 얼굴을 구타했다. 도키코가 정보의 출처를 묻자 슌스케는 ‘취재원 보호’ 또는 ‘취재원 비익권’이런 최소의 의리도 무시하고 미치요 씨의 이름을 댔으며, 미치요 씨는 또 조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도키코를 깊은 상념에 빠지게 하는 의문. 이상해, 왜 조지가 그런 거짓말을 한 것일까. 슌스케가 “그놈한테 아무한테도 이걸 발설하지 말라고 말했겠지?”하고 묻자 도키코의 의문은 더해만 간다. 맞아. 그게 제일 마음에 걸려. 정말 떠벌였을까? 여기까지 독자도 약간 헛갈리는데, 이어지는 도키코의 결정적 고백이자 남편에 대한 요구로 확정하게 된다.
  “그 녀석, 주제에 베테랑이더라. 내가 도망치지도 못하게 했으니까. 그 사람과 많은 것을 했어. 그러니까 당신도 그렇게 해줘.”
  이 말, 또는 요구를 들은 슌스케. 하긴 한다. 제대로 하질 못해서 문제지만. 그래놓고 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아내를 흔들어 깨운 다음에 미국 연수 가기 전에 자신이 유부녀와 벌였던 불륜을 털어 놓으면서, 자신은 심지어 그 여자를 품은 순간에도 여자에 대한 사랑은 눈곱만큼도 생기지 않고 머릿속에는 아내 생각만 가득하더란 하소연을 해버리니까, 이번에도 도키코가 반격을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자, 그래. 그 여자한테 한 것처럼 나한테 똑같이 해봐! 자 해봐! 못해? 아이고, 천벌을 받았구나!”
  이런 부부도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있다.
  이들은 환경을 바꿔보기로 하고 시외에 땅을 사서 새 집을 짓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정을 한다. 그리하여 서양식으로 통유리 집을 짓기는 하지만 세상에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나 있나. 여기저기 하자가 생겨 끊임없이 자잘한 수리를 더 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하루는 슌스케에게 도키코가 자기 몸의 이상을 얘기해 종합병원에 가 진찰을 해보니, 의사는 정상이라고 진단을 하고나서, 따로 슌스케를 불러 선언을 하기를 유방암이란다. 발견하기 가장 쉬우며 거의 대부분 남편에 의하여 발견되는 암인데 어찌 이렇게 진행될 때까지 모르고 있었을 수 있느냐고 남편의 무심을 질타하면서. 이제 암이라는 절벽을 앞에 놓인 부부. 그들에게 한 때 벌어졌던 불륜, 아니면 적어도 한 시절의 불장난이 뭐가 대수랴.
  스토리는 여기까지만 하자. 나도 양심이 있지 더 이상은 한 마디도 보태지 못하겠다.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일본 작가들 특유의 사소설이기는 하지만 전후 모던한 기운이 보태져 그나마 읽어볼 만한 사소설. 일본식 블랙 유머가 포함되어 있으나 그리 흥미를 끌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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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9-26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 이거 읽으셨군요. 저도 도서관에 신청해둔 거 내일 찾으러 갑니다! ㅎㅎ 그나마 읽을 만한 사소설이라니 더 기대합니다.

Falstaff 2020-09-27 08:22   좋아요 0 | URL
지금쯤 찾으러 가시겠군요. ㅎㅎㅎ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스토리 진행이 빨라서 휙휙 넘어가더군요.

다락방 2020-09-27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서점 가서 이 책 사가지고 지금 막 돌아왔습니다!! 어쩐지 제 취향의 책일 것 같아서 말이지요. 아하하하하.

Falstaff 2020-09-27 15:20   좋아요 1 | URL
흠... 전 다락방 님 취향은 아닐 거 같은데요.
제목을 제가 ˝사랑보다 더 질긴 정˝이라고 적어놓았는데 정말 쓰고 싶었던 제목은요, ˝사랑보다 더 드런 게 정˝이었답니다. ㅋㅋㅋㅋ

다락방 2020-09-27 15:32   좋아요 0 | URL
안...야한가요? 🙄

Falstaff 2020-09-27 16:05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전혀, 전혀 야하지 않아요. 15금도 안 될 수준입니다.

다락방 2020-09-27 16:10   좋아요 0 | URL
아..............................................................................
 
신이 되기는 어렵다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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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한 시절의 전설 비슷한 자리에 오른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의 공동작업. 이 형제들의 작품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과 <노변의 피크닉>에 이어 세 번째다. 두 명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라 그런지 발표한 중장편만 스물일곱 편에 이르지만 우리나라에는 내가 읽은 세 권의 책만 번역되어 나왔다. 이들의 작품은 소위 ‘장르’문학으로 치는 SF 계열이라 아직까지는 읽는 사람들이 비교적 적어서였겠지만 이젠 SF 독자층도 상당한 두께를 갖고 있어 앞으로 더 많은 번역 작품들이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확실한 SF 작품. <세상이 끝날....>에서는 지구의 종말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비밀을 풀 과학적 열쇠가, <노변의 피크닉>에선 지구를 방문했던, 놀러왔던, 외계인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또는 오물을 인간이 대하는 방식 같은 것을 재미있는 상상력으로 펼쳐놓았는데, 이번엔 한 편의 무협지를 썼다. 250명의 지구인들이 저 먼 먼 광년 떨어져 태양조차 작게 깜박이는 별로 보이는 곳에, 완전히 지구와 같은 환경에서 지구인과 같은 사람이 사는, 다만 아직 봉건시대에 머무는 별에 보내져 봉건사회가 어떻게 공산주의로 바뀌게 되는지 연구하는 학자들을 그리고 있다. 근데 무협지라고? 그렇다, 내 의견은.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은 지구인들이 22세기 정도의 문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 별은 지구로 치면 약 천 년 전의 문명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 방식대로 역사가 흘러가는 수천 개의 행성 가운데 하나로, 250명에 달하는 지구인을 이 별로 파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현지 인류를 돕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일개 관찰자에 불과하여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어떠한 개입도 못하게 규정하고 있다. 총 대장의 이름은 돈 콘도르. 별에서의 공식 직위는 좀 거창해서, ‘소안상인공화국“이란 나라의 대법관이자 국가 인장의 수호자, 열두 무역상 협의회 부회장, 자비로운 기사단 소속 기사. 그러나 주인공은 이이가 아니라 아르카나르 나라의 난봉꾼 귀족을 참칭하는 돈 루마타, 안톤이란 본명을 갖고 있는 소련인이다.
  안톤 또는 루마타는 22세기 미래 엘리트가 갖고 있는 지식과, 수없이 단련했을 뿐더러 현지에선 적어도 3백 년이 흘러야 개발하기 시작할 눈부신 검술과 체력, ‘미다스’라고 불리는 금화(이들이 보기엔 신만 창조할 수 있는 순수한 금화)제조기, 플라스틱 소재로 만들어져 창으로 결코 뚫을 수 없는 가벼운 재질의 갑옷 등을 겸비하고 있다. 심지어 대장 돈 콘도르는 헬리콥터까지 한 대 가지고 있으니 말 다 했다. 그러니까 현지 사람들이 보면 신이거나 신의 수준에 달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여기서 문득 생각나는 소설 속의 인물. 복거일이 쓴 <시간 속의 나그네>의 주인공 이언오. 그는 21세기 인간으로, 26세기에 출발해서 불시착한 타임머신, 시간주머니라는 의미의 ‘시낭’ 가마우지 호를 고쳐 타고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 절름발이 과학자인데, 정작 타고 보니까 타임머신은 5백년 주기로 덜커덕, 고장을 내는 거였으니 이언오 역시 16세기 말에 불시착하고 만다. 26세기 인간은 자신으로 하여금 역사가 뒤틀려져버리기를 바라지 않아 불시착과 동시에 자살을 해버렸으나 이언오는, 내가 죽긴 왜 죽어, 라고 규정을 무시한 채 타임머신 밖으로 나와 10년 후에 닥칠 임진왜란에 대비하면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건 놀라운 과학적, 사회적 지식과 딱 세 번 쓸 수 있는 비 살상 호신용 무기 한 정, 자살용 독약 키트, 가벼운 재질의 운동성 좋은 옷 한 벌이 다다. 그는 튱쳥우도(충청우도)의 총 관찰사가 되어 자본주의의 이상향을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이 작품도 무협지. <신이 되기는 어렵다>나 <시간 속의 나그네>나 외로이 중원을 방황하며 악의 무리를 타도하는 초고수의 맞장뜨기가 등장하지 않는 반면에 현대화된 지식을 무기로 종횡무진하기에 이르는데, 이런 것도 무협지 맞잖아?
  실제로 나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저 먼 먼 광년 떨어진 행성이 아니라 천 년 전으로 간 타임머신의 승조원으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게 더 어울렸으니, 다른 행성의 인류가 지구인하고 거의 완벽하게 같다는 건 좀 무리 아냐? 천 년 전이면 12세기. 귀족과 영주를 위해 모든 평민, 노예, 상인, 기타 등등이 복무해야 하는 최고의 불평등 시대. 그들의 신은 평민들에게 상전께 말을 하라고 혀를 준 게 아니라 주인의 장화를 핥으라고 주었으며, 그것도 만일 평민의 혀가 엉뚱한 장화를 핥는다면, 그러면 그 혀는 통째로 뽑히게 되는 것이었다. 큰길은 오직 귀족들과, 귀족들에게 물자를 바치기 위한 상인들만 다닐 수 있었고 평민들은 뒷골목이나 피치 못할 경우엔 벽에 납작 붙어 움직여야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여기에 ‘돈 레바’라는 악당이 왕의 측근에 등장해 모든 지식인, 문화인, 심지어 글을 읽을 줄 아는 귀족 아닌 자들을 잡아 모진 고문 끝에 계급에 따라 교수대에 매달거나 화형에 처하거나, 목을 잘라 죽였다. 그래 모든 지식인, 학자, 문학에 종사하는 자, 심지어 회계원들은 이웃나라로 망명을 가거나 고요히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니, 혹시 이거 스탈린 시대의 문화적 박대와 분서갱유를 풍자한 거 아냐? 그랬거나 말거나, 돈 레바의 경우 말고도 경향각지에서 쉬지 않고 평민 학대와 착취과 살인이 낭자한 꼴을 22세기의 휴머니즘을 몸에 익힌 인간들이 그냥 관찰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10년 전 스테판 오스트롭스키라는 파견자, 돈 카파다라는 이름으로 황제의 궁병 중대장으로 잠입하고 있었다가 에스토르의 마녀 18명을 공개적으로 고문하는 형리들을 보다 못해 부하들에게 저 자들을 석궁으로 쏴버려라, 라고 명령해 제국법관, 법원 간부들을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살해했다가 창에 맞아 죽은 적도 있고, 비슷한 시기에 독일과 프랑스 농민전쟁 연구의 권위자로 양모(양털)상인 ‘파니-파’로 위장하고 있던 카를 로젠블룸은 무리스 지역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켜 단숨에 도시 두 개를 점령한 후, 도시를 약탈하던 농민군을 저지했다가 그를 이해하지 못한 농민반란군이 쏜 화살에 목 뒤를 맞고 절명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루마타가 별에 도착하기 바로 전에는 카이산 독재자의 벗이자 심복으로 훌륭하게 위장하고 있던 지구혁명역사 전문가 제러미 타프낫이 갑자기 궁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권력을 탈취해버리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타프낫은 두 달 동안 동료 지구인들과 지구 측의 성난 추궁에 굳건한 침묵으로 답하며 자신이 아는 22세기 제도와 과학으로 황금시대를 열기 위해 노력했으나, 12세기 정도의 문명을 갖고 있는 현지인들에게는 미친 사람으로 명성을 떨쳐 여덟 번의 암살 시도를 운 좋게 피했지만 결국 지구인이 운영하는 연구소 재난수습팀에 체포당해 잠수함에 실려 남극의 섬 기지로 송출된 적도 있다. 이런 것들이 꼭 나쁜가?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는, 정상보다 조금 더 많은 정의감을 보유한 인간들이 이런 상황을 만나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간 그렇다. 우리의 안톤 씨는 하필이면 난봉꾼으로 이름이 난 루마타로 위장을 해야 하니 온갖 상류층 여자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적어도 책 속에서는 단 한 번도 그렇게 하질 못한다. 자신은 비록 노력을 해서 심지어 최고 권력자,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인물 돈 레바의 정부를 꼬여 침대에 눕히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아뿔싸, 12세기 여인답게 그녀는 이도 닦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고, 목욕은 절대로 하지 않은 채 향수만 듬뿍 뿌려, 떡이 진 머리카락과 입과 겨드랑과 샅과 발가락과, 심지어 손가락 사이에서도 꼬랑 꼬랑 피어나는 악취로 인해 도저히, 도저히, 바지는커녕 조끼조차도 벗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 거다. 이것으로 실제적인 최고 권력자 돈 레바와의 사이를 망가뜨린 루마타. 정말 돈 레바가 루마타와 다른 지구인들이 생각했던 그런 종류의 탐욕스러운 악당이었을까? 오히려 욕심이 과해 누군가의 꼭두각시는 노릇을 한 건 아니었을까? 그건 재미있는 책이니 직접 확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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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09-24 1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들어본적 조차 없는 저자와 그의 소설을 거침없이 읽고 리뷰 올리시는 falstaff님.
ABC의 모렐의 발명 이틀 전에 다 읽고도 어떻게 리뷰를 올릴지 몰라 미루고 있는 hnine 입니다. ㅠㅠ

Falstaff 2020-09-24 12:42   좋아요 2 | URL
전 5년 전에 <모렐의 발명>을 읽고 독후감의 결론을 이렇게 내렸더군요.
˝기본적으로 사랑 이야기. 고독한 사랑 이야기. 허무하고 고독한 사랑 이야기. 그것보다 차라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 ㅋㅋㅋ
 
겨울날 창비시선 4
김광섭 지음 / 창비 / 197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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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섭. 호는 이산怡山. ‘기쁜 산’이라는 뜻. 1905년 함경북도 경성군 어대진에서 출생해 중앙과 중동학교를 거처 와세다 영문과를 졸업했으니 이만하면 초년 운은 괜찮다. 와세다를 졸업하고 33년, 스물여덟 살에 모교 중동학교에 영어교사로 재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41년,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했다는 혐의로 3년 8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 제3 동 62호실, 북편 독방에서 생고생을 하고 풀려나, 이후 일제에 의하여 주요감시대상 리스트에 올랐다. 당시 중동학교에서 교사를 하기 위해 창씨개명을 하긴 했으나, 이름 김광섭金珖燮, 성씨를 김 다음에 별 성자를 붙여 김성金星으로만 바꾸었다. 그리하여 블랙리스트 상 이이의 이름은 금성광섭金星珖燮이 되는 것.
  이 시집 《겨울날》에는 그의 초기 작품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시인 자신과 당시 창비시선의 편집책임자였던 백낙청이 고른 대표작 86편을 싣고 있다. 초기 시들은, 초기의 대표작인 <동경憧憬>을 포함해 1930년대 초기 시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그저 그런 정서를 담고 있어서 그리 특별한 감상을 느낄 수 없었으나, 1930년대 말 혹은 1940년 언저리에 쓴 <우애友愛 - 소천형宵泉兄에게>라는 시에 와서 시절에 대항하는 의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세상은 차디차고 인생은 애처로울지라도
  우리 사이에 얽힌 마음 수정같이 낡질 않고
  푸른 바다 밑 산호같이 변칠 않았으니
  우리들은 불행에 울고 영원성에 애정을 붙였다


  그러나 보라 우리들은 세기의 어두운 등불 아래서
  고달프고 초조하고 불안한 잠을 이루며
  아침 어지러운 꿈자취를 헤치고 나아가는 자
  언제까지나 여윈 손등에 눈물을 씻을 것인가 (부분. 작 중 한자어는 전부 우리말로 고침. 이하 인용 시도 같음.)


  위의 시를 쓴 이산은 다음해 또는 그 다음해에 또 이렇게 노래하며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가게 된다. 그의 마음이야 어땠을까는 다음으로 하고, 겉으로는 마치 소풍을 가는 어린 아이나 된 듯이 “나는야 간다.”라고 앞과 뒤를 무지르면서.



  이별의 노래 - 서대문형무소행



  나는야 간다
  나의 사랑하는
  나라를 잃어버리고
  깊은 산 묏골 속에
  숨어서 우는
  작은 새와도 같이


  나는야 간다
  푸른 하늘을
  눈물로 적시며
  아지 못하는
  어둠 속으로
  나는야 간다  (전문. 1941. 5. 31)


  출소를 하고 시간이 지나 해방을 맞은 김광섭. 그에겐 여름이면 파김치처럼 추근해지고, 겨울 긴긴 밤 추위에 허리가 꼬부라지던 시기를 회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터. <벌罰>이란 시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푸른 하늘 아래로 거닐다가도
  아지 못할 어둠이 문득 달려들어
  내게는 이보다도 더 암담한 일은 없다


  그리하여 어느덧 눈시울이 추근해지며
  어데서 오는 눈물인지는 몰라도
  나의 눈물은 이제 드디어
  사랑보다도 운명에 속하게 되었다
  인권이 유린되고 자유가 처벌된
  이 어둠의 보상으로
  일본아 너는 물러갔느냐
  나는 너의 나라를 주어도 싫다 (부분)


  마지막 행, “나는 너의 나라를 주어도 싫다.”를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 몰라도 이보다 더 의미심장하게 비식민주의를 웅변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이 행을 일본에 대한 증오로 읽으면 오독 아닐까 싶다. 나는 너희 나라를 통째로 주어도 싫은데, 너희는 어찌 35년 동안 조선을 겁박했는가, 하는 꾸짖음.
  이렇게 해방이 되자 김광섭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공보비서관을 지내고, 이후 주로 경희대학 국문과에 적을 두고 후학을 기르는데 힘을 쏟는다. 그러면 1950년대까지를 관통하고, 이 시절엔 처음엔 좌우 대립과 혼란, 미군정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을 건국하지만 곧바로 한국전쟁이 일어나 국토가 완전히 초토화 된다. 이어지는 60년대는 정치군인들에 의한 독재가 이어지고, 일찍이 대통령의 공보비서관을 지낸 경력의 대학교수는 적당한 선, 그러니까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서대문형무소에 가지 않을 정도의 사회비평시를 써낸다. 내 눈에 띄는 작품이 하나 있었으니, 그의 대표작이라고 일컫는 <성북동 비둘기>가 아니라 <서울 크리스마스>. 독후감에 소개하기엔 조금 길기는 하지만, 어쨌든 전문을 인용한다.



  서울 크리스마스


  무엇인가 다가오고 있다


  고요가 흔들리며
  바람이 불어
  풍조가 인다


  먹구름이 초생달빛에 찢기며
  한조각 푸른 하늘이
  면류관을 쓴
  예수의 얼굴로 번진다


  서울길
  인파에 밀려
  예수는 전신주 꼭대기에 섰고
  성탄의 환락에 취한 무리들
  붐비고 안고 돈다
  번화가의 전등은 장사치들의
  속임과 탐욕이 내놓이지 않도록
  경축의 광선을
  조심스레 상품 거죽에 던진다


  모든 나무들은 벌거벗었는데
  성탄수만은 솜으로
  눈오는 밤을 가장했다


  예수는 군중 속에서 발등을 밟히다 못해
  그만 어둠을 남겨두고
  새벽 창조의 시간을 향해
  서울을 떠났다
  가로수들만이 예수를 따라갔다


  어디선가 맨발로 뛰라는 소리가 났다
  그날 밤 서울서는
  한 방화범이 탈주했다
  성탄야의 종소리가 잉잉 울었다


  서울은 테두리만 퍼져나가는 

  속이 텡 빈 종소리였다


  산 등성이에서 빈대처럼 기는
  오막살이 지붕들만이 모여서
  이마를 맞대고 예배를 올렸다
  이튿날 아침 서울거리에는
  예수의 헌 짚세기
  한 켤레가 굴러다니는 것을
  맨발로 가던 거지가 끄을고
  세계의 새 아침으로 갔다



  왜 이 시를 길게 인용했는가 하면, 1950년생으로 김광섭을 사사한 시인 정호승이 있는데, 그의 대표적인 시집으로 《서울의 예수》가 있다. 또 54년생으로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시인 김정환 역시 실천문학사에서 《황색예수전》을 낸 바 있다. 나는 정호승과 김정환의 시에서 등장하는 한반도의 예수를 먼저 읽었던 바, 이번에 김광섭의 <서울 크리스마스>를 읽으면서, 과연 이산이 없었으면 두 시인들의 예수가 나올 수 있었을까를 궁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나왔겠지. 나올 수도 있고. 그러나 특정하게 딱 민중(이건 옛 말이니 세련되게 좀 더 예전 말로 바꾸어), 소외된 시민들의 곤고한 삶을 예수를 통해 노래한 건 김광섭의 밑밥이 없었더라면 적어도 더 어려웠을 수는 있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서 이 시가 내 경우엔 팍, 꽂혔다는 얘기다.
  세월은 더 흘러서 70년대 중반이 되고, 시인 역시 자신도 알았겠지만 마지막 날을 향하면서 지난 시절을 뒤돌아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북에 두고 온 누님을 떠올리고, 먼저 가신 아버지, 어머니, 아내를 그리워하며, 특히 자신이 넘쳐 아내의 몸에 메스를 대 의료과실로 먼저 보내게 한 신씨 성을 가진 의학박사에 대한 원망까지 쏟아낸다. 스스로가 이야기하듯 좋은 시는 아니지만(그래서 인용 역시 하지 않겠지만) 시인으로 자신의 아내가 죽게 된 일을 시로 써야만 했던 시절도 다 지나간다. 시는 초기 시처럼 쉬워지고 일상의 이야기를 하면서, 독립운동가이기도 한 시인은 마지막 침상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다. 그리하여 1977년, 일흔 세 살의 일기로 작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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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09-23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권을 유린하고 자유를 처벌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대신 분단된 우리의 현실을 속에서 아직도 물러가지 않은 일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인용하신 <벌罰>의 마지막 부분에 다른 의미로 공감하게 되네요...

Falstaff 2020-09-24 08:42   좋아요 1 | URL
불행하게도 식민지를 겪은 거의 모든 나라가 완전한 탈식민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우리는 한때 식민모국이었던 일본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우습다고 깔보는 시민의식이라도 있습니다만, 물론 그게 다가 아니지만 다른 나라들하고 구별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안도라 서문문고 258
막스 프리쉬 지음 / 서문당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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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스위스가 자랑하는 두 극작가가 있었으니 막스 프리슈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 뒤렌마트가 프리쉬보다 열 살 아래인데 일 년 먼저 숟가락 놨다. 프리시가 초상집에 문상을 갔다고 치고, 그랬으면 뒤렌마트의 영정에 절을 두 번 반 했을까, 안 했을까? 그렇다. 나이 일흔 넘으면 형 아우는 입관 순이다. 지가 나이 좀 많다고 절 안 하고 배겨? 그지? 근데 'Max Frisch'의 표기를 보면, 고려대학 출판부와 책세상은 ‘막스 프리쉬’, 문학동네는 ‘막스 프리슈’, 이번에 읽은 서문당은 ‘막스 프리시’. 이거 작은 문제 같아 보이지만, 검색할 때 문제가 생긴다. 어떻게 같은 표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여태까지 프리쉬의 작품이라고는 소설만 읽어봤다. <몬타우크>, <나를 간텐바인이라고 하자>, <슈틸러>, 이렇게 세 편. 솔직히 이번에도 ‘막스 프리쉬’라는 이름만 가지고 책을 선택해서 <안도라>가 희곡인줄 모른 채 책을 폈다. 오, 어쨌거나 이래서 내가 프리쉬의 희곡을 읽게 되는구나. 기분이 괜찮았다. 나는 프리쉬의 책을 선택한 순간, ‘읽는 재미’는 일단 포기한다. 처음 경험했던 <몬타우크> 한 편을 읽은 다음부터 내내 그랬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주제부터 묵직하다. 20세기 초중반에 있었던 유대인 학살을 다루었다.
  ‘안도라’는 가상의 작은 도시. 마치 폴란드나 체코를 염두에 둘 수 있으나, 작가 스스로가 사건이 일어난 곳 ‘안도라’는 사실상의 어떤 국가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악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검은 나라’의 유니폼도 과거 어느 특정적인 사실(나치에 의한 학살)을 상기시키면 안 된다고 했단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작가는, 작품 속 안도라에서 일어났던 일(유대인 처형)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굳이 대상을 유대인에 국한할 필요도 없는 것. 1923년 9월 1일, 일본의 간토, 시즈오카 등지에서 발생한 대 지진으로 엄청난 재해를 당하자 일본인의 분노는 엉뚱하게 재일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로 확장되어 닥치는 대로 조선 사람을 색출해 꿰어 죽인 사건이 발생했으며, 근 백 년이 지난 2020년 5월 25일에도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는 건장한 백인 경찰이 무장하지 않은 흑인 청년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무릎으로 눌러 직실해 죽게 했다.
  이런 점에서 <안도라>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정치적 가치를 지닌 작품이라고 상찬해도 무난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크게 기대하지는 마시라. 앞에서 말했듯이 프리쉬의 작품 속에서 ‘읽는 재미’를 구하는 건 나무 위에서 생선을 따는 것만큼 쉽지 않으니.
  작지만 아름답고, 평화스럽지만 약하고 가난한 도시 안도라에 비교적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캔’이란 이름의 교사가 있었다. 이이는 젊은 시절 자신의 신념과 정의라고 믿는 가치에 반하게 쓰인 교과서를 박박 찢어버리는 등의 과격한 행위가 시민들에게 알려질 만큼 나름대로 이름이 난 남자였다. 이이가 도시를 벗어나 공부에 매진하던 젊은 시절에 매우 예쁘게 생긴 아가씨와 사랑에 빠져 그만 아이를 낳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완고한’ 작은 도시 안도라에 아가씨와 갓 낳은 아들을 데리고 올 만큼의 강단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저 검은 군대한테서 가까스로 살려낸 유대인 아이라고 소개하며 자신이 아들 삼아 키우겠노라 동네 사람들에게 일러두었다. 당시에 이런 행위는 시민들에게 ‘장한 일’로 칭찬을 받을지언정 조금도 손가락질을 받을 만하지 않아, 이름을 ‘안드리’라 지은 아이는 안도라에서 무럭무럭 자라 벌써 스무 살이 되었다. 그리고 20년 동안, 시절이 변했다.
  이제 저 너머 검은 군대가 쳐들어오면, 그들이 유대인들을 말뚝에 묶어놓고 목에다 총을 쏴서 죽인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면서 여태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지냈던 이웃들의 시선이 달라진다. 그렇다고 지금껏 유대인 고아소년 의붓아들이라고 말해왔던 것을 사실은 자신의 친 아들이라고 말할 수 없어 진퇴양난에 빠진 진보적 교사 캔은 터지는 가슴을 식히기 위해 날이면 날마다 주점에 들러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사람들에게 닥치는 대로 고함을 치며 어리석은 소리만 해댄다. 그러나 교사는 아직까지 정말로 자신의 마음을 뒤집어 놓을 충격적인 일 하나를 모르고 있는 상태. 여기까지 온 거, 다 말해버리겠다. 스무 살 안드리가 교사의 합법적 배우자이자 지금 함께 살고 있는 아내가 낳은 딸 바르플린과 사랑하는 사이이며 더구나 결혼을 약속해 가벼운 애무까지 진도가 나갔다는 사실.
  아들과 딸이 서로 사랑해 결혼을 처음 생각했을 때, 자신들이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법적으로 남매 사이라는 것을 떠올려 좌절한 나머지 독초를 먹고 죽을 생각까지 했을 때, 바르플린의 엄마가 이를 알고 걱정하지 말라고, 안드리는 사실 저 너머에서 아빠가 데리고 온 유대인 아이를 키운 것이니 너희들은 결혼할 수 있다고 말해준 덕분에 지금 큰 희망 속에 살고 있다는 것.
  그러거나 말거나 이웃들이 안드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날이 갈수록 이상하게 변해간다. 그쪽에 재능이 있어 목수가 되고 싶어 하는 안드리의 희망을 이루어주고 싶어 하는 교사는 목수에게 도제로 받아달라고 부탁하지만 목수는 엉뚱하게도 대가로 현금 50 파운드를 요구한다. 이건 정말 돈을 바라서가 아니라 안드리, 즉 유대인을 도제로 받아 나중에, 검은 군대가 쳐들어온 후에 복잡한 일에 연루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아예 아이를 도제로 받지 않겠다는 뜻임을, 이때까지는 교사로 알아채지 못해 기어이 자기 땅의 일부를 팔아 돈을 댄다. 그럼 지금 하는 일은? 의붓아버지이자 친부이기도 한 교사가 날이면 날마다 술 퍼마시는 식당의 보이로, 팁을 받을 때마다 주크박스에 넣고 음악을 듣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중간쯤으로 가면 목수의 도제로 들어가 곧잘 가구를 만들지만 목수의 엉뚱한 평가를 받고 좌절하기도 한다.
  식당 주인, 목수, 말로만 용감하고 실제로는 비겁하기 짝이 없는 군인, 의사, 견습생 등등이 안드리를 보는 시각이 점점 외로 꼬아지는 상태에서 결정적으로, 사실 진정한 안도라 사람인 안드리를 유대인으로 만들어 놓는 인물이 등장하니 동네 가톨릭 신부다. 그는 안드리를 성당에 불러, 천주님은 안드리를 유대인으로 태어나게 했으며, 안드리가 스스로 유대인이란 걸 인정할 때 세상을 향해 비겁하지 않게 된다는 걸 확신시킨다. 즉, 빼도 박도 못하게 안드리를 진짜 유대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작품은 시작할 때부터, 한 챕터가 끝날 때마다 특정 발언자가 등장해, 이미 처형되어 죽은 안드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관객/독자는 결론을 아는 상태에서 어떻게 안드리가 유대인이 되었으며, 시민들로 하여금 소외를 받게 되었는지를 냉정한 방식으로 알게 만든다. 안드리와 바르플린의 사랑마저도 안드리를 유대인으로 아는 이웃 때문에 깨지게 되지만, 그의 장래희망, 정체성,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고 발언하는 이웃들, 이들을 독자는 만나게 된다. 이건 거꾸로 유대인, 또는 1923년 관동지역에서의 조선인을 학살한 나치 독일과 전체집단 일본인들만의 죄가 아닌 모든 사람들의 포괄적인 책임이라는 것을, 막스 프리쉬는 선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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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9-22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 책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폴스타프 님 리뷰 보고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 지금 막 장바구니에 넣었는데 책 표지보면 왜이렇게 지루하게 생긴건지... 아무튼 저도 읽어보렵니다.

Falstaff 2020-09-22 09:07   좋아요 0 | URL
옙. 재미 있습니다. 실제 공연에서도 연일 만원을 기록했다고 하고요, 우리나라 공연에서도 마찬가지였다네요.
말씀대로 표지 디자인이 별로 좋지 않고요, 오래 안 팔린 책이라서 실제로 받으시면 (하필이면 흰색 바탕이라서) 때가 좀 묻어 있을 수도 있으니 약간, 아주 약간 각오하고 계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ㅎㅎㅎ

잠자냥 2020-09-22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잉 저 이 포스팅에서 이 책 표지 보고 흠칫 놀랬어요. 제가 요즘 이 시리즈, 그러니까 서문문고 178인 <미시시피 씨의 결혼>을 읽고 있거든요. 어디서 많이 본, 분위기 비슷한 표지다! 하고 깜놀(물론 전 전자책으로 읽고 있습니다만). 요즘 같은 때 이런 연식 오래된 책을 이웃 서재에서 보니까 반갑네요. ㅋㅋㅋㅋㅋㅋㅋ 이 책도 담아둡니다.

Falstaff 2020-09-22 10:07   좋아요 0 | URL
ㅋㅋㅋ 근데 표지가 고야의 그림 ˝5월 3일의 학살˝이예요.
프랑스가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는데 반항한 19세기 초의 사건. 프랑스 사람들이 알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겠어요. ㅎㅎㅎㅎ

Falstaff 2020-09-22 10:13   좋아요 0 | URL
앗, <미시시피 씨의 결혼>이 뒤렌마트네요? 흠.... 이거 또, ㅋㅋㅋㅋ

잠자냥 2020-09-22 10:49   좋아요 1 | URL
<미시시피 씨의 결혼> 읽으세요. ㅋㅋㅋㅋ 추천합니다. 이 작품도 지금 절반 가까이 읽었는데, 장난아니네요.

다락방 2020-09-22 17:00   좋아요 1 | URL
저도 읽을래요 미시시피 씨의 결혼!
 
브이.
토머스 핀천 지음, 설순봉 옮김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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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자가 빽빽하게 배열된 8백 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소설. 이 책을 선택하면서, 이이의 작품을 읽는 행위 자체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잊었다. <브이.> 150쪽까지 읽어가다가, 일단 책을 덮고, 잠깐 고민한 다음 (이걸 읽어? 말아?),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이번엔 옆에 노트와 볼펜을 꺼내놓았다. 핀천은 역시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독자인 내게 매우 높은 단계의 집중을 요구했으며, 작은 글씨로 노트 다섯 장 반을 메모하게 했다. 이러니 읽는 속도가 나지 않을 수밖에. 그러나 토머스 핀천을 고르는 순간, 독자 스스로 고난의 행군을 견디겠다는 암묵의 동의를 한 것이므로, 이런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게 된 팔자를 원망해야지 결코 작가나 작품 탓을 하지는 못하리라.
  무엇이 ‘책 좀 읽는’ 나로 하여금 150쪽까지 읽다가 다시 첫 페이지로 되돌아오게 만들었느냐 하면, 무수하게 많은 등장인물들이, 인생이 그렇듯 다 나름대로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는 것까지는 이해하겠지만 핀천 선생의 많은 등장인물들은 아버지 때부터 서로 얽히고설킨 내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 연루에 동참하지 못하는 인물들 역시 먹고, 마시고, 행위하고, 즐기고, 돈을 버는 일상을 일일이 다 소개해, 독자로 하여금 드디어 자신의 뇌 용량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양의 메모리를 쏟아내기 때문이다. 서두부터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이 결국엔 어느 한 사건이나 장면으로 엮이게 구성되었을 것이란 점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만, 엮이는 과정이 매우 복잡해, 일단 도입부에서 실타래가 한 번 엉크러졌다 하면 미노타우로스가 사는 미노스의 미궁에서 결코 빠져나오지 못한 채 결국 반인반수의 정찬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150쪽이 무슨 대수랴. 250쪽까지 읽었더라도 깨끗하게 포기하고 다시 제일 앞으로 돌아가 모자란 뇌 용량 대신 메모를 해가며 읽는 게 좋다면 그렇게 해야지. 어쨌건 나는 그렇게 했다. 그리하여 꼬박 8일이라는 날짜를 투자해 이제 막 읽기를 마치고, 완독을 자축하기 위해 피처럼 진한 와인 한 잔을 하려 했으나, 아직 오정도 되지 않아 축배는 저녁으로 미루고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이 놀랍게도 토머스 핀천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다. 핀천. 이 양반의 삶 자체가 대단히 특징적이어서 누군가 혹은 핀천 스스로 이이/자신의 일생을 소설로 써도 매우 재미있는 작품이 될 정도로 기발한 일생을 살고 있다. 덧니에 뻐드렁니를 합한 치아와 악골을 가진 작가에 대해, 나는 작가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심정에서 하나도 소개하지 않겠다. 작가는 ‘자기공개기피증’이라 역자 설순봉이 명명한 질환에 걸려 있어서 <중력의 무지개>로 큰 상을 받을 때에 이르러 열여덟 살 때 찍은 사진을 처음 공개한 이력이 있고, 심지어 신경질을 내며 문학상 수상을 거부한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하니 어찌 작가소개를 생략함이 예의가 아니겠는가.
  책은 1955년의 크리스마스이브에서 출발한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베니 프로페인. 슐레밀이자 요요인간이다. 슐레밀Schlemiel은 중동부 유럽에 살던 아쉬케나지 유대인들의 말인 이디시어에서 온 단어로, 일이 잘 꼬이는 불운한 인간이란 뜻이란다. 주변에 간혹 이런 사람들 보인다. 멀쩡하게 생기고 학력도 괜찮은데 이상하게 면접만 봤다하면 떨어지고, 가게만 차리면 망해먹는 사람들. 외가 쪽으로 당숙 되시는 분이 이런 부류였는데,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해 빌빌대다가 개인택시도 아니고 회사택시 운전하더니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연락도 안 된다. 멀쩡하고 허여멀겋게 잘 나게 생기기까지 했음에도. 이게 인생이지 뭐. 공부 잘 했다고 인생까지 잘 되면 재미없잖아. 물론 당하는 입장에서는 참담하겠지만.
  근데 이 슐레밀인 프로페인은 자신 스스로가 슐레밀인줄 안다. 그래서 그나마 다행이다. 미 해군에 입대해 구축함 USS스캐폴드 호의 승선원으로 있다가 말뚝 박는데 실패하고 제대해 줄곧 도로 인부로 일을 했다. 그러다가 이젠 길이라면 꼴도 보기 싫어 때려치우고 일 년 반 동안 미국 동해안을 요요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는 바람에 ‘요요인간’이란 타이틀까지 차지했다. 어쨌든 첫 무대는 미국 버지니아 주 노포크 시에 있는 ‘세일러스 그레이브’라는 옥호의 술집. 프로페인이 승조원이었을 때 단골로 다니던 집으로 서빙하는 아가씨들 모두는 ‘비어트리스’ 단테 알리기에리에게 구원의 여신 역할을 했던 여인의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는 “모든 술집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비어트리스가 되어야 한다.”는 모토로 영업을 하는 비어트리스 버포 부인의 철학을 기원으로 한다. 그리하여 버포 부인은 발포 고무로 만든, 유방 모양의 맥주 빨아먹는 꼭지를 제작해 해군 월급날에 맞춰 오후 여덟 시부터 아홉 시까지 한 시간 동안 ‘수유시간’을 제정했는데, 이 발포 고무 맥주 빨개를 향해 몰려드는 수병들이 몇 백에 달해 근 백 대 일의 경쟁을 뚫어야 겨우 한 모금을 마시는 행운이 걸리는지라 월급날마다 싸움 그치지 않는 날이 없었다고 한다.
  왜 지금 소설 줄거리와 거의 상관이 없는 곁가지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게 책의 1장 몇 절에 소개하는 에피소드인데, 독자 입장에선 과연 비어트리스 버포 여사가 나중에 중요 인물로 등장할지, 안 할지 모르고, 매우 독창적인 캐릭터로 해군장화를 신은 키가 150센티미터 밖에 안 되는 악동, 풍치로 이를 전부 뽑고 (군인이니까)세금으로 새로 해 넣은 인조 이를 줄로 날카롭게 갈아 세일러스 그레이브에서 비어트리스들의 엉덩이를 깨무는 습관이 생긴 플로이 역시 나중에 중요 등장인물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이나 행위가 재미있으니 기억하게 되며, 결국 이 딱 한 번의 등장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걸 알 때쯤엔 대신 다른 중요한 등장인물을 기억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까, 안 생길까. 그건 당신이 직접 읽어보시고 판단하시라.
  프로페인은 술집에서 옛 동료이자 무단으로 외출 나온 피그 보딘을 만나 갑판장 호드 영감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호드 영감이 45세일 때 지중해, 시칠리아 섬에서 일곱 시 반 위치에 있는 몰타의 명망가 열여섯 살 아가씨 파올라 마이스트랄과 결혼을 해 미국으로 함께 온 일로 연결되고, 파올라가 호드 영감하고 별거에 들어갔으며 지금 세일러스 그레이브에서 비어트리스로 일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이 사실은 나중에 중요한 것임이 드러나는데, 절반은 가톨릭이고 엄마가 유대인이라서 일관된 도덕관이 없는 프로페인이 어찌어찌 해서 파올라와 한 침대에 들었다가 관계를 맺지 못하고 눈 내리는 밤에 정처 없이 (남의)집을 나서 피그 보딘의 지저분한 집에서 숙박한 다음 뉴욕으로 흘러들어오게 된다. 그러니 적어도 피그 보딘과 파올라는 끝까지 주인공 프로페인의 곁을 지킨다는 거 아닌가. 물론 아직까지 독자는 파올라가 나중에 그렇게도 중요한 등장인물로 상향조정될지는 꿈에도 모르고 있을 터이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니 1901년생, 그러니까 언필칭 20세기 인간, 로버트 스텐슬. 아버지 시드니 스텐슬은 전직 영국 외무부 공무원이었다고 하나 사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만날 외국으로만 나가 다니는 동안 자신이 태어났고 자랐으며, 아버지는 죽었다. 현금이나 부동산 재산 하나 남기지 않고. 혹시 모르지 엄마가 다 떼어 먹었는지. 이 로버트 스텐슬을 프로페인과 연결시켜주기 위해 핀천은 이들 가운데 부잣집 따님이자 털털하고 완전 서민적 풍모로 무장한 의리의 여인 레이철을 등장시킨다. 레이철은 TV 시리즈 각본을 쓰는 라울, 산발적으로 작업을 하는 화가 슬램, 기타 연주자이자 진보적인 포크 송을 노래하는 멜빈 등과 함께 뉴욕의 젊은 예술가들과 ‘영혼의 동반’을 하고 있으니 이 동아리를 ‘모든 병든 족속들’이라 칭했다. 이 족속 가운데 가장 연장자로 스텐슬이 들어온다. 그의 타이틀은 ‘세계적인 모헙가.’
  이 때쯤, 혹은 책을 열 때부터 “V."가 무엇인지 독자는 V.의 정체 찾기에 골몰하고 있을 듯하다. 프로페인은 V.와 거의 관련이 없고 이 스텐슬, 아들인 로버트 스텐슬이 V.와 더욱 밀접한데, 그게 뭘까. 나는 첫 장부터 V.의 정체에 거의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어서 심지어 ‘세일러스 그레이브’의 여급들 이름으로 나온 베아트리스도 혹시 Beatrice가 아닌 Veartice, 즉 ‘V.’ 아닐까? 했을 정도다. 그건 아닌 게 확실하고, 그럼 파올라가 살던 몰타의 수도 발레타Valleta? 그러나 V.에 대한 최초의 문자적 기록은 로버트의 아버지 시드니가 1899년 4월에 피렌체에서 남긴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V.의 배후와 내부에는 우리 중 누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비밀이 숨어 있다. 그것은 ‘누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를 것이다. 그녀는 과연 무엇일까? 제발 내가 그 답을 적지 않아도 되기를 기원할 뿐이다. 이 기록에서나 공적인 기록에서 거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
  이것을 보면 V.가 분명히 ‘그녀’라고 되어 있으니 한 여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서양 사람들, 특히 영국인이 여인을 ‘무엇’이라고 했을까? 구체적으로 ‘빅토리아Victoria’라는 이름의 여성을 가리키는데 정말 이 여자가 V. 맞아? 스텐슬이 생각하는 V.로 말할 거 같으면, 난봉꾼에게는 벌린 다리가 V.이고, 조류학자에겐 이동하는 새의 무리가 V.이며, 촬영기사에겐 쓸만한 기계, 예를 들어 잘 빠진 삼각대 다리가 V. 아니겠느냐는 건데 혹시 V.라는 것이 특정한 형태를 갖지 않은 <황금가지>나 <백색여신>같은 정신적 모험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애매한 생각도 가지고 있다. 물론 끝까지 읽어보면 핀천이 이렇게 쓴 게 틀림없이 독자를 헛갈리게 만들 의도였음이 드러나긴 하지만, 아 그래도 도대체 V.가 뭐냐고! 아니면 누구냐고!
  글쎄. 그걸 알려드리면 곤란하지 않을까? 8백 페이지에 달하며, 읽기가 상당히 난감해 지독하게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을 읽은 보람이 없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안 알려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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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09-20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대체 어떤 글일지 상상이 안가지만 이 책은 v의 정체를 밝혀내는게 목표인가보네요. 정자세로 8일 동안 읽으셨는데 저라도 안 가르쳐 줄거같아요. 근데 읽을 엄두가 안나니 영영 v는 알 수 없네요.ㅎㅎ

Falstaff 2020-09-20 16:5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절대 추천하지 않을 겁니다. 그냥 핀천이 좋은 몇 몇 이상한 독자들은 즐길 수 있을까요? 하하하...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잠자냥 2020-09-20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어떤 대작을 읽으시기에 리뷰가 뜸한가 했더니 이 책을 읽고 계셨군요! ㅎㅎ 저도 이 책, 올해 안에는 읽는 게 목표입니다.

Falstaff 2020-09-20 16:56   좋아요 1 | URL
에휴,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이 이 책에 비하면 이도 안 난 수준이더라고요. 포스트 모던? 염병이나 하면 좋겠어요.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