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에 집 앞에 있는 대형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8시에 문을 열지만, 아마도 7시 경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을 것이다. 8개나 되는 계산대마다 카트들이 뱀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내와 나는 장바구니에 당장 필요한 것만을 담았다. 우리 앞 줄에 카트에 물건을 잔뜩 실은 영국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우리가 뒤에 서자 다른 물건을 더 사는 척 하며 뒤로 슬쩍 빠져주더라. 우리 바구니를 보고는 자리를 양보해 준 것이었다. ---영국에서 이런 일은 흔하다. 자기는 계산할 물건이 많고 저 사람은 소량이면 흔히들 자리를 양보해 준다. 암튼 사려고 했던 달걀과 화장지는 사지 못했다. 영국 여기 저기서 패닉 바잉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 대해서 한국과 영국 정부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의 대처는 상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구태여 첨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코로나 바이러스 대처법은 심각하게 형이상학적이다. --- 그 심오함에 나같은 범인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는 뜻이다. 한 열흘 전에 영국의 수상은 집단 면역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인구의 60%가 항체를 갖게 되면 바이러스는 더 이상 의학적 약자에게 침투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면 인구의 60%가 감염되도록 하는 것이 영국 정부의 정책인가? 아니면, 과학적 숙명론을 따라 우리가 무엇을 하든 인구의 60%는 감염이 되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일까? 영국 정부의 정책 목표는 무엇일까? 한국의 경우는 조기 검진을 통해 감염자를 빨리 찾아내어 격리하고 치료하여, 추가 감염을 억제함과 동시에 치명률을 낮추는 것이 목표일 것이다. 그러나 영국 수상이 강조하는 것을 잘 들어보면 영국의 경우는 감염을 억제하거나 치명률을 낮추는 것이 정책 목표가 아님을 알게 된다. 영국 방역 당국의 목표는 의료 체계의 붕괴를 막는 것으로 보인다. --- 그러므로 영국의 과학자들은 텔레비젼 인터뷰를 통해 코로나 바이러스가 그리 위험한 질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한다. 그네들은 말 한 마디를 할 때마다 '과학적 증거를 살펴 보면,' '과학적 증거에 따라' 라는 말을 꼬박꼬박 덧붙이지만 이 신종 바이러스에 대해 과학적 증거가 지금 도대체 얼마나 축적되어 있겠는가? 지금 치명률이 보수적으로 잡아도 1% 이상인데, 그렇게 되면 영국에서 코로나바이러스로 몇 만명이 죽어나가야 한다. 영국 수상이 매일 기자회견에 데리고 나오는 고문 과학자는 그런 이야기를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언론에 이야기한다. (어느 뉴스 인터뷰에서 진행자가 이 과학자에게 집단 면역이 되려면 인구의 몇 퍼센트가 감염되어야 하는 것이냐고 물으니까 이 사람이 60%라고 대답했다. 진행자가 이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서 다시 묻는다. 16%? 아니, 60%. 진행자의 헛웃음. 세상에 이런 블랙 코메디가! 그래서 나는 이 고문 과학자를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라고 부른다.)    


그래도 이번 주부터 영국도 정책 방향이 바뀐 것 같기도 하다. 오늘(금요일)부터 학교를 닫을 것이며, 일일 검사 양을 확대할 것이며 등등의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글쎄... 정책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기존 정책의 타임 라인에 따른 대책들인 것인가? 바뀐 것이라는 사람도 있고 아니라는 사람도 있다. 나로서는 영국의 정책이 철학적으로 하도 심오해서 잘 판단하지 못하겠다. 만약 정책이 바뀐 것이라면 영국은 어마어마한 시간을 낭비한 셈이 될 것이다. 이삼 주 안에 이탈리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사태가 영국에 휘몰아칠 것이라 하면서도 영국 정부는 그것을 자연적(필연적, 피할 도리가 없는) 현상인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상은 충분히 확보되었는가? 의료진을 보호할 마스크 등의 수급은? 은퇴한 의료인이나 의과대 학생들을 동원할 필요는 없는가? 등등은 영국에서는 국가 단위에서가 아니라 해당 기관들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 아니 어제 오늘부터 부랴부랴 국가 단위에서 고민하기 시작한 것 같다!


한국 사람으로서 내게 답답한 것은, 영국 정부의 잘못된 방향에 대해서 언론이 거의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국가적 재난 사태에 대해 정부에 힘을 실어 주고 국민적 통합에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 정부와 다른 목소리는 자제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적어도 내게는, 한국의 언론들이 아무리 심각하게 정파적이고 비열해도 한국의 언론 지형이 영국처럼 획일적인 것보다는 지금의 사태에서 국민들을 더 안전하게 해주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 정부가 실수하기만을 학수고대하는 승냥이 떼 속에서 한국 정부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투명성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기 상황에서조차 심각하게 정파적인 한국의 언론 상황은 물론 최악이지만, 정부가 영국 정부처럼 엉망인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 물론 그 근원에는 국가라는 존재에 대해 한국과 서구 사회가 서로 다른 경험을 겪었고, 그러므로 다른 관념, 다른 기대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놓여 있을 것이다.


아침에 간 마트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은 단 한 명 보았다(어디서 구했을까? 혹은 확진자일까?). 계산원들도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각 상점은 패닉 바잉 상태이기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는 완전히 불가능하다. 이런 점을 보면 감염세가 쉽게 줄어들 것 같지가 않다. --- 치료제나 백신이 어서 개발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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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에, 우리도 코로나 사태 장기화에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국의 이마트에 해당하는, 테스코에 장을 보러 갔다. 물(커피 만들 때 쓸 용도), 화장지(화장지가 다 떨어져 갔으므로), 파스타(사태 장기화 대비용)를 사려고 했었는데, 물을 제외하고는 선반이 텅텅 비어 있었다. - 여기서 질문! 파스타야 그렇다치고 왜 사람들은 화장지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일까? 나도 잘 모르겠는데... 내 멋대로의 생각으로는 화장지가 문명적 삶의 마지노선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그런 것 아닐까 싶다.


(오늘 아침 근처 마트에 가서 화장지를 사는 데 성공했다. 개장 시간에 맞춰 갔는데도 카트들이 떼로 몰려들어서 옴싹달싹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평소라면 사지 않았을 브랜드의 화장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것도 곧 동이 나겠지 싶었다.)


엊그제 영국 총리가 봉쇄 정책에서 지연 정책으로 전염병 정책을 변경한다고 선언했다. 봉쇄 정책은 한국에서 현재 시행하고 있는 발본색원 정책을 의미하는 것인 것 같다. 지연 정책으로 변경하겠다는 것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광범위한 확산을 막는 것이 이제 불가능하니 과부하로 인한 의료 체계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검역, 역학 조사, 검사 등은 최소화하고, 중증 환자의 치료 위주로 해나가겠다는 뜻일 것이다. 총리는 경증 환자는 자가 격리(그러므로 자가 치료?)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러다 만약 이탈리아처럼 중증 환자가 폭증한다면?) 


마트에 사람이 몰리고, 선반이 텅 비는 품목이 더러 생기는 것 말고는(아, 스포츠 경기들도 취소되고 있고 재택 근무가 늘고 있다), 아직 영국의 일상에 커다란 변화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일단, 거리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못봤다. (그리고 나의 아내도 오늘 아침에 인도 출신 친구와 '기생충'을 보러 극장에 갔다. 기생충을 보고나면, 특히나 다른 문화권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많을 것 같아서 차마 가지 말라고 말리지 못했다.)  

    

(서양 사람들은 마스크 쓰는 것을 싫어한다. 싫어한다? 이 말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라면 차라리 마스크를 쓰고 동네나 동네 번화가를 다닐 용기가 나지 않는다고 말하겠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고, 유난떤다는 시선을 받을지도 모른다. 동양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에 비해 주위의 시선을 더 의식한다는 말은 반쪽만 맞는 말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주위의 시선을 의식한다. 다만 그 시선이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문화마다 다를 뿐이다. 서양에서 그 시선은, 예컨대 털털하고 쿨할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젊은 남자가 용모에 너무 신경을 쓴다면 주변으로부터 게이냐는 질책을 받을 것이다. 서양 사람들이 정말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거리에서 마스크를 쓰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어야 할 것이다. 병이 더 광범위하게 퍼지고, 용기 있는 누군가가 하나 둘 마스크를 쓰기 시작하면, 그리고 마스크 수급이 원활해지면, 그때서야 마스크를 쓰는 것이 쿨함을 해치지 않는 것이라는 예외 조항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 오랜 만에 블로그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니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여튼 아까 유튭으로 한국 관련 기사를 찾아보니 미국 NBC 방송에서인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한국에 대해 취재한 것이 있었다. 박원순 서울 시장과도 인터뷰를 했는데, 기자가 박원순 시장에게 바이러스와 싸우면서 얻은 교훈 한 두 가지를 말해 달라 하자, 박원순은 투명함과 신속함을 들었다. 후자는 누구나 알고 있는 전형적으로 한국적인 가치이다. 그러나 전자transparency는 지금까지는 서양적인 가치로 여겨지던 것이었다. 찾아보면 동양의 사상적 근저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가치이지만... 나는 한국 정부가 투명성을 정책의 가장 커다란 기조 중 하나로 표방하고, 그것을 정책의 강점으로 내세운다는 점에 대단히 뿌듯함을 느낀다. 좋은 정부란 시민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정부이고, 이번 정부는 투명성이 얼마나 위대한 가치인지를 잘 증명해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아직 한국이, 그리고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그래프의 어느 지점에 놓여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때로는 이번 사태가 운명과의 싸움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바이러스가 지수적으로 확장하는 그래프가 있다. 나라마다 상황이 다른데도 감염 추이가 얼추 동일한 그래프를 따라가는 것 같다. 인간의 개입이 그래프의 기울기를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까? 예를 들어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인구의 반 이상이 감염될 수 있다는 경고를 통해 일종의 숙명론을 받아들였다. 반면 한국은 공격적인 발본색원 정책을 통해, 감염자 수준을 일정 수치 아래로 억제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믿고 있는 듯 하다. 이 믿음은 한국 국민들의 정부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고, 당국의 정책 판단이기도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영국 정부는 이런 식의 판단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영국의 공공 의료 자원은 이번 사태가 아니더라도 현상 유지에 급급한 수준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이 운명과 씩씩하게 맞서 싸워서 최종적으로, 너무 큰 상처를 입지 않고, 승리를 거둘 수 있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Wish people were all happy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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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는 분의 집에 놀러 갔다가 영화 기생충을 보게 되었다. 해외 영화제에서 큰 상을 탔다는 얘기는 얼핏 들었는데 그게 칸느 대상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여튼 기대를 잔뜩 안고 영화를 보게 되었다. 


2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이 조금도 의식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웃음거리와 적당한 긴장감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는 재미있는 영화였다. 기술적으로 상당히 깔끔한,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살인의 추억’을 개봉관에서 봤었고, 그러므로 봉준호가 천재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감독에게 이 정도 작품은 소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 그만큼 내게는 이 작품이 가벼운 오락 영화 정도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살며시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왜 이 영화에 칸느를 줬을까?” 아내의 대답은 이랬고 나는 어느 정도 동의했다: “일본 영화 같잖아. 서구 사람들이 일본 스타일 좋아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나는 이 영화가 계급 우화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 말고는 그다지 의미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관객들과 심리적 수싸움을 벌이는 감독의 수완이 놀랍다는, 즉 기술적 차원에서의 감탄 말고는 이 영화에 돌려 줄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적 주제를 드러내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장면인, 이재민 대피소에서의 아버지의 대사를 보라. “무 계획이 가장 좋은 계획이다.” 여기 영국 말로 filler, 즉 구색이나 맞춰 시간이나 때우는 식의 무의미한 대사인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의 긴 나레이션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런 영감도 없고 뻔한 대사를 길게 늘어놓을 뿐이다.


현대 사회의 계급 문제를 다루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두 계급 사이의 상호 의존적 관계를 드러내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계급의 절대적 고착 과정, 즉 한 계급의 필연적 전락을 다루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만약 봉준호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계급 문제를 다루고자 한 것이 맞다면, 즉 웃기면서도 괴기스러운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계급 우화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감독은 가장 피상적인 방식으로 이 주제를 다룬 셈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보자. 송강호 가족들은 반지하에 사는 백수들이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렇게 사는가? 영화에서 그들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은, 내가 보기에는 딱 하나이다. 그들에게는 확실한 계획이 있다. 그들은 그 계획을 깔끔하게 실현해 낸다. 코너링이 좋은 송강호를 비롯해 가족 각자의 개인기는 출중하다. 그런데 그들은 왜 반지하 방바닥에서 뒹굴며 그렇게 사는가? 답은, 주인집 가족이 캠핑을 떠난 후 그 집을 차지하게 된 반지하 가족들의 행태에서 드러난다. 그 반지하 가족들은 그 좋은 주택에서조차 반지하에서 살 때와 똑같이 술이나 퍼마시면서 뒹굴고 있는 것이다. 즉, 그 냄새는 반지하 집에 살면서 몸에 배인 것이 아니라 그네들의 DNA이며, 그네들의 운명인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냄새 때문에 주인집 남자를 살해한 것은 자신의 냄새, 자신의 계급, 자신의 운명,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기 혐오에 지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영화는 이런 식의 관점으로 일관되게 해석된다. 그리고 이 관점이란 하층 계급 사람에 대한 경멸의 관점이다. 예전에, 일베라는 사이트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궁금하여 그곳의 여기 저기를 구경해 본 적이 있었다.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자기 계급에 대한 혐오였다. “내가 중국집 배달을 하는데, 잘 사는 아파트에도 배달을 가보고, 못 사는 아파트에도 배달을 가보니, 진상들은 전부 못 사는 아파트에 몰려 있드라.” - 미안하게도 영화 기생충은 이런 관점에 머물러 있다. 아내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기분이 나빠졌다고 했다. 그 이유는 이 영화의 관점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이 영화가 우리 속의 아픈 무엇인가를 건드려서가 아니라 말이다.



2. 크리스마스에 맞춰 아마존에서 타겟 메일이 왔고 거기에 켄 로치 감독의 BBC 시절 작품을 묶어 놓은 것이 있었다. 나 스스로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 치고 주문을 했다.  CD 6장. 한 장에 두 편의 드라마가 담겨 있다. 총 18시간 30분의 분량이란다. 지금까지 4편의 작품을 보았다.


켄 로치가 BBC에서 한 작업 중 가장 큰 반향을 일으켰다던 ‘Cathy come home’은 두 번을 보았다. 한번은 혼자서, 또 한번은 아내와. 1970년 영국에서 순진하고 선량한 젊은 남녀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면서 전락을 거듭하다 결국 홈리스가 되고 아이들은 고아원에 뺏겨 버린다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더블 인컴이었다가 출산 때문에 남자만 돈을 벌어야 했는데, 운전을 하던 남편이 차사고를 내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아내와 한참을 토론을 했다. 그 젊은 부부가 만일 유죄라면, 그것은 모던 사회의 엄중함에 무지한 죄라는 것이다. 한번 집을 줄여 이사하면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절대 집을 줄여서는 안된다. 수입 총액을 계속 유지할 수 있지 않는 한 있던 수입원을 포기해서는 결코 안된다. 아이를 낳으면 여자 쪽이 직장을 포기하게 될 수 있기 때문에 함부러 아이를 낳아서는 안된다, 등등. (두 남녀 주인공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그들이 홈리스가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켄 로치는 주택 보급률이 너무 낫다는 현실과 아이를 홈리스 부모에게서 빼앗는 관료제 기구의 잔인함에 촛점을 맞춘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영국의 전후 첫 세대가 성년이 되어 교육, 결혼, 취직, 주택 마련 영역에서 맞닥뜨리게 된 사회적 갈등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추상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모던 라이프의 일상적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서의 '모던' 사회는 IMF를 기점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실존적 이유(살아남는 것과 일정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것) 때문에 결혼과 출산, 다시 말하면 인간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계기들을 포기하게끔 강요하는 사회가 정의상 모던 사회인 것이다. 


(영화는 밝고 선량하던 캐시가 각종 보호소를 전전하면서 날카로워지고, 쉽게 화내고, 책임을 남들에게 돌리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가족을 재건하는 일이 이제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남편은 더 이상 캐시를 보러 오지도, 돈을 보내지도 않게 된다. 이미 노숙의 길에 접어 들었지도 모른다. 세상 어디든 젊은 남자에 대한 보호 장치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되니까. 그리고 이쯤 되면 이 두 젊은 부부는 하층 계급에 대한 우리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게 된다. 뻔한 진상 짓을 하며 가족에 무책임한 사람들! 영국말로는 쉐임리스라고 한다. 그들에게 보내는 경멸은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에게 보내는 안도이기도 하다. )



3. 요즘 즐겨 듣는 음악은 로저 워터스의 것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도 전곡의 작사와 거의 모든 곡의 작곡을 로저 워터스가 맡았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월’은 주인공 핑크의 탄생부터, 그가 자신의 주위에 벽을 쌓는 과정, 그리고 기어이 그 벽을 부수고 마는 장면까지를 묘사하고 있는 컨셉트 앨범이다. 핑크가 벽을 쌓는 이유는 간단히 말할 수 있다. 모던 사회의 실존적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여 안전해질 수는 있지만 새로이 고립감이 고개를 들게 된다. 그러므로 이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해 일종의 연대감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거짓된 연대감이다(즉, 파시즘). 문제는 벽 자체를 허무는 것 뿐이고, 핑크는 결국 벽을 허문다. 그러나 ‘더 월’에서 핑크는 스스로의 결단으로 벽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 상정되는, 매우 흉측하게 생긴 벌레라는 존재로부터 벽을 허물라는 판결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사르트르의 유명한 “우리는 자유롭도록 처단되었다” 라는 명제에서처럼 우리는 벽을 허물도록 처단되었을 뿐이다. 즉, 사르트르의 명제에서 자유는 일종의 징벌이기 때문에 자유를 회피할 방법을 계속 모색하게 되는 것처럼, ‘더 월’에서 핑크는 벽을 부수라는 징벌에 대해 새로이 벽을 쌓을 궁리를 늘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에서의 회피와 벽을 쌓는 행위는 우리 존재의 영원한 조건이 된다. 이러한 순환성의 깊이 있는 구조가 락 앨범인 ‘더 월’을 주조하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더 월’을 듣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전체 곡의 흐름을 배경으로 독립성 있는 곡 위주로 듣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체 곡의 흐름 그대로를 듣는 것이다. 후자의 방법에서는 싱글 컷이 가능한 독립적인 곡들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들리게 될 위험이 있다. 나는 취향상 후자의 방법을 좋아하기 때문에 예컨대 ‘컴포터블리 넘’ 같은 곡들을 싫어하게 되고 만다. 

앨범의, 짧지만 인상적인 곡은 ‘The Thin Ice’ 라는 곡이다. 가사의 구절인 “If you should go skating / On the thin ice of modern life . . .  / Don't be surprised when a crack in the ice / Appears under your feet” 거의 우리의 관용구가 되었다. The thin ice of modern life보다 정밀하게 우리 시대의 실존을 정의할 있는 말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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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핑크 플로이드를 즐겨 듣는다. 어렸을 때는 이 밴드를 좋아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느리고 블루스적인 연주, 온갖 시각적, 음향적 효과의 과다한 사용, 촌스러운 신디사이저 사운드, 웬지 느껴지는 뽕끼 등등. 아마 레드 제플린의 기타 연주자 지미 페이지의 코멘트도 일조를 했을 것이다. "요즘 밴드들의 지적 우월성 과시가 도에 지나치다. 우린 그냥 사랑 얘기만 연주할 것이다." 


위 동영상은 The Wall 앨범 중의 한 곡이다. Mother라는 제목으로 이런 잔인한 가사를 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떤 이에게는 매우 매우 가슴 아픈 노래일 것이다. 특히나 영국에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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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개혁에 대한 생각을 몇 번 적어 올렸으므로 마무리를 짓기 위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낙관론자이므로 사태가 여기까지 이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쨌든 일은 이렇게 진행되고 있고, 검찰은 어떻게든 조국 전 장관을 구속 기소하려 할 것이다. --- 이것이 사태의 한 가닥이다.


검찰이 이길 수 있는 시나리오를 생각해 본다. 그것은 검찰 개혁을 좌절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을 심각하게 깍아먹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일단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와 기소가 문재인의 지지율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 같지는 않다. 


검찰에게 가장 좋았던 시나리오는 검찰의 조국 수사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개입해 오고, 그리하여 검찰과 대통령이 충돌하는 모양새를 빚어 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의 할 일과 법무부가 할 일을 분명하게 경계지음으로써 이중의 효과를 보았다. 첫째는 검찰의 자율성을 철저히 보장한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고, 둘째는 법무부의 업무 영역에 검찰이 치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고를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의 법무부 장관은 사실상 문재인 대통령 본인이다.


공수처나 검경 수사권 조정의 국회 통과와 상관없이 행정부 수반의 검찰 개혁 의지가 이렇게 강력하다면 검찰이 달리 저항할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예전처럼 검찰 개혁을 주창하는 정치인들 몇을 날려 버린다고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전처럼 검찰이 집단적으로 항명한다고 끝날 일도 아니다. 여전히 총선 전망은 현 여당이 우세하고, 다음 대선 전망도 현 여당이 우세하다. 


검찰이 좀 더 똑똑했더라면 조국 일가에 대해 대대적인 수사를 벌일 것이 아니라 조국의 개혁안에 대해 일일이 꼬투리를 잡고 딴지를 걸어서 어느 정도 양보를 얻어내려 했을 것이다. 어정쩡한 타협안을 만들게 해서 이저 저도 아닌 개혁이 되게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는 조국 장관을 검찰과 절연하게 했고, 그리하여 조국의 개혁안에 검찰 쪽 의견은 거의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 그 연장선상에서 검찰 개혁은 철저하게 법무부와 문재인 대통령 본인 주도하에 논의되고 있고, 검찰은 여기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버린 것으로 본다. 검찰이 징징거리면 문재인 대통령은 예의 그 업무 분장을 이야기하면 된다. --- 검찰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검찰 개혁은 결국 한국 민주주의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이다. 역사는 목적론적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예컨대 모순이 어떤 마술에 의해 저절로 지양되는 식으로 운동하지 않는다. 어떤 철학자의 말대로 하루에 두 끼만 먹는 이탈리아의 가난한 노동자들에게는 하루 두 끼가 정상 상태인 것이다. 그것이 운동이 되고 혁명이 되기에는 그 객관적 상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마술과 같은 전진을 보노라면, 한국 역사의 어떤 특권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한국의 역사가 특권 계급의 창설 없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어쩌면 이상이란 기억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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