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반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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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닛의 애독자로서 격하게 읽어보고 싶다. 당장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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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교실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25
에리히 캐스트너 지음, 문성원 옮김 / 시공주니어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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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하늘의 나는 교실 Das Fliegende Klassenzimmer』
에리히 캐스트너 글/ 발터 트리어 그림/ 문성원 옮김/ 시공주니어

이 책을 읽는 내내 깊은 아쉬움이 들었다. 이런 책을 진작 읽었더라면, 진작 읽어야 했던 것을 . . . 그러면서 한편으로 나를 위로했다. 다행이야, 지금이라도 읽게 되어서. 『하늘을 나는 교실』은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집 책꽂이에 어김없이 꽂혀 있던 책이었다. 제목만 보아서는 날아다니는 양탄자 같은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가득한 어린이책 같아서 그닥 읽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었다. 얼마 전 서경식의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에서 에리히 캐스터너 편을 읽다 이 책을 읽고 싶다, 꼭 읽어야겠다는 욕구가 부싯돌에 불붙듯이 확 일어났다.

이 책은 들어가는 대목이 여느 어린이책과 다르게 신선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저자는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런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아이들이 항상 명랑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하기만 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 그들에게도 슬픔과 눈물이 있고 그래서 불행한 아이들도 있다는 것을 ‘정직하게’ 보여 주고 싶어서 이 책을 쓰게 되었노라고 저자는 말한다. 머리말에 나와 있듯 이 책은 “용감한 사람과 겁 많은 사람, 영리한 사람과 머리가 나쁜 사람의 이야기”이다. 한 사람의 용감무쌍한 영웅이 아니라 머리도 성격도 제각각인 다섯 명의 학생이 이 책의 주인공들이다. 남자 기숙학교인 김나지움 5,6학년들(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쯤)은 크리스마스 축제를 위해 연극을 준비한다. 그 연극의 제목이 <하늘을 나는 교실>이다. <하늘을 나는 교실>은 모든 아이들이 꿈꿀 만한 학교다. “오늘 수업을 현장에 가서 하겠다”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학생들은 비행기를 타고 현장으로 날아간다. 폼페이의 최후와 화산의 특성을 연구하러 베수비오 화산으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견학하러 이집트로, 북극곰과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 황량한 땅을 보러 북극으로. 정말 멋지지 않은가. 금전적인 문제로 해외까지 갈 여유가 없다면 각종 책이나 비디오로 이른바 가상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어쨌거나 이 연극을 준비하는 다섯 명의 학생들은 나를 울리고 웃겼다. 부모에게 버림 받고서도 꿋꿋하게 자란 문학소년 요니,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에 옮길 줄 아는 용감한 아이 마르틴, 늘 배가 고파 먹을 것을 달고 살고 밥만 먹으면 더 껄떡대는 미래의 권투 선수 마르티스, 용기가 없어 늘 꽁무니를 빼는 땅꼬마 울리, 머리가 좋고 어려운 책들만 골라 읽으며 젠체하는 제바스티안. 이 각양각색의 애물단지들이 연극 연습을 중단하고 학교 울타리를 넘어 레알슐레 학생들과 벌이는 패싸움과 포로로 붙잡힌 친구 구출 작전은 통쾌하고 짜릿하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절대 도를 넘지 않는다. 싸움에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을 따르지 않는 아이들에게만 주먹과 따귀를 날리며, 학교 규칙을 어긴 이유를 선생님에게 논리적으로 말하며 그에 대한 벌칙을 군말 없이 받아들인다. 정의와 의리와 반성을 아는 껴안아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저마다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요니는 네 살 때 혼자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넌다. 어머니가 집을 나가 버리자 아버지가 독일에 있는 조부모님 댁에 요니를 홀로 보낸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끝내 항구에 나타나지 않았다. 몇 해 전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선장의 누이동생 집에서 지내게 된 요니는 네 살 때 겪은 그 아픔을 결코 잊지 못하고 많은 밤을 울며 지새웠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남몰래 슬픔을 삭였다. 크리스마스 방학 때도 돌아갈 집이 없어 기숙사에 남는 요니는 자신의 처지를 친구 마르틴에게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일은 익숙해지기 나름이야. 자기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어. . .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아주 행복한 건 아냐. . . 그렇지만 아주 불행한 것도 아니야.”(212)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린 요니는 한편 안 됐지만 누구보다 대견하고 듬직하다. 

마르틴은 부모님이 가난해서 수업료의 반은 보조 받고 장학금을 받는 우등생이다. 그런데 올 크리스마스 휴가에는 집에 갈 수가 없다. 고향에 가려면 8마르크가 필요한데 부모님이 송금해준 돈은 고작 5마르크다. 그마저도 빌린 돈이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편지를 써서 집에 오지 말고 보내준 돈으로 초콜릿이라도 사 먹고 썰매도 타면서 씩씩하게 보내라고 당부한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르틴은 “절대로 울면 안 돼, 절대로 울면 안 돼, 절대로 울면 안 돼!”라고 백 번 넘게 속으로 다짐하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유스투스 선생 앞에서 끝내 목 놓아 울고 만다. 도대체 그런 약속을 어떤 아이가 제대로 지킬 수 있겠는가. 마르틴의 눈물은 그야말로 정직해서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났다. 유스투스 선생 덕에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마르틴은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넉넉한 부모님과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땅꼬마 울리는 겁쟁이라고 놀려대는 아이들의 등쌀에 화가 나 어느 날 결단을 내린다. 운동장 철봉대 사다리에서 우산을 펴고 눈 덮인 언 땅 위로 뛰어내린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용기를 시험해 보인 것이다. “평생 남들한테 하찮은 사람 취급받을까봐 불안해하며 사는 것보다 다리 하나 부러지는 게 더 낫다”는 유스투스 선생의 말은 행동의 결과보다 원인을 우선시한 사려 깊은 지적이었다. 그 사건 후로 땅꼬마 울리는 작은 몸집 안에 아무도 당해낼 수 없는 힘을 지니게 된다. 

울리의 사건을 두고 무모했다고 말을 해대는 아이들에게 제바스티안은 울리는 그냥 겁쟁이가 아니라며 자신의 치부를 고백한다. 자신도 울리처럼 용기가 없는 사람이지만, 약아서 그런 사실을 부끄러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는 반면, 울리는 꾸밈없고 순수해서 무척 힘들어했다는 것이다. 물론 제바스티안은 자신의 치부를 반성하거나 고치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런 자신으로 일관하겠다고 선언하는 제바스티안의 소신도 근사해 보였다. 

다섯 친구들 중 마티아스는 자기 안의 슬픔이나 아픔이 가장 적은 단순한 아이다. 그러나 닮은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 울리와 가장 친하고 그 친구가 다리를 다쳐 병실에 누운 모습을 보고 울음을 터뜨리는 껄떡 대장 마티아스는 속이 말랑말랑한 다정한 친구다. 먹기만 하면 기억력도 끝내준다니까 라고 말하는 마티아스 같은 친구가 있어 네 친구도 더 많이 웃을 수 있었다. 

이 개성 만점의 애물단지들이 무척이나 좋아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두 어른이 있다. 골초지만 금연자 전용석인 고물 객차에 산다는 이유로 금연 선생으로 불리는 니히트라우허 씨와 옮고 그름을 어른의 잣대가 아닌 정확한 상황 판단에 의거해 따져 주는 유스투스(정의) 선생이다. 두 어른의 공통점은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안다는 것이다. 고리타분한 설교로 아이들을 억누르지 않고 그들의 정당한 행위(비록 그것이 교칙에 어긋난다 해도)에 대해서는 훌륭하다고, 잘했다고 말해줄 줄 아는 멋진 어른들이다. 이런 어른들이 많이 생긴다면 아이들이 사는 세상이 좀 더 여유롭고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저자인 에리히 캐스트너는 사범학교를 나와 한때 학교 선생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가 표현해내는 아이들의 모습은 허황되지 않고 실감이 넘친다. 특히 아이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그래 맞아 우리도 이렇게 말했어’라고 무릎을 치게 만드는 것들이 많다. 이만한 나이대의 아이들이 겪을 만한 사건과 갈등, 슬픔과 절망, 용기와 희망을 그려놓은 『하늘을 나는 교실』은 내 아이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책이다. 일본의 독일문학가 이케다 히로시는 나치에 저항한 에리히 캐스트너를 두고 “도덕이 무너져버린 시대”에 모럴리스트가 되려 했던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이 책의 머리말을 보면 저자의 그런 면이 엿보인다. 

“진정한 삶은 돈을 버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돈을 버는 데서 시작돼서 돈을 버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 . 여러분은 될 수 있는 한 행복해야 한다! 기쁨에 겨워 그 작은 배가 아플 정도로 웃으라! / 다만, 어떤 것에도 속지 말고 어떤 것도 속이지 말라. 불행에 맞서는 법을 배우라. 실패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말라. 운이 나쁠지라도 기운을 잃지 말아야 한다. 기죽지 말라! 용기를 내라! / 권투 선수들 말마따나 펀치를 맞아도 강하게 버텨 내야 한다. 펀치를 받아치고 견뎌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상이 여러분에게 먹이는 첫 펀치에 나가떨어질 것이다. 세상이란 엄청나게 큰 글러브를 끼고 있으니까! 세상의 펀치를 견딜 준비를 단단히 하지 않고 있다가는 방 안에서 파리 한 마리가 기침만 해도 벌렁 나자빠져 앓아눕게 될 것이다. / 그러므로 기죽지 말라! 용기를 내라! 알겠는가? 이걸 깨달은 사람은 이미 반은 이긴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자신에게 날아온 펀치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용기와 지혜를 보여줄 수 있는 마음가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 지혜 없는 용기는 어리석은 것이고, 용기 없는 지혜는 부질없는 것이다! 세계사에는 멍청한 사람이 겁 없이 굴거나 영리한 사람이 비겁하게 굴었던 시대가 많이 있다. 그것은 옳은 게 아니었다. / 용감한 사람들이 영리해지고, 영리한 사람들이 용감해질 때에야 비로소 인류의 진보라는 것이 얼마나 자주 그릇되이 인식되어 왔는지 드러날 것이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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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9-08-12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리히 케스트너의 책을 예전에 읽긴 했는데요... 저런 멋진 말을 본 기억이 없는 걸 보면... 역시 독서는 비독서랑 한몸인 것 같네요. ㅋㅋ 삶과 죽음이 한몸이듯이... 좋은 글 잘 읽고갑니다.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
하워드 진.도날도 마세도 지음, 김종승 옮김 / 궁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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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엄마가 되고부터 내 삶에 한 가지 고민이 더해졌다. 그것은 다른 모든 부모들처럼 내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이다. 아주 많은 육아서를 읽은 건 아니지만, 최근 들어 잇달아 읽은 아이 교육과 관련된 육아서들의 공통된 주제는 우리 아이 어떻게 하면 똑똑한 아이로 키울 수 있나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책들이 내 아이를 영재나 수재로 만들기 위해 아이를 닦달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지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룬 아이로 키우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교육법이라는 것이 저자들의 한결같은 외침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뭔가 찜찜했다. 나사 하나가 빠진 것만 같은 허전함과 답답함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러다 읽게 된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는 가뭄 뒤의 단비 같은 해갈을 맛보게 해주었다.

이 책은 “진보적 역사학자이며 극작가이고 사회운동가이자 대학교수”로 “미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실천적 지식인 하워드 진이 학교가 안고 있는 모순, 다시 말해 민주주의 교육에 앞장서야 할 학교들이 오히려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들을 위태롭게 하는 체제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음을 까발리고 있는 일종의 고발서다. 대담, 논문집, 강연, 인터뷰, 기고문 등 다양한 형식의 글을 한 권으로 엮어낸 이 책에서 하워드 진은 승자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역사 교육, 체제에 순응할 줄 아는 착하고 선량한 시민을 키워내는 학교 교육, 콜럼버스와 서구 문명 그리고 부시의 대테러 전쟁의 은폐진 진실, 계급이 실종된 미합중국 민주적 선거 제도의 허실, 계급의식을 가지고 자라는 것의 의미, 교사는 학생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구체적인 실례들을 통해 아주 진지하고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경탄한 첫 번째 대목은 무겁고 딱딱한 주제인 데 반해 글이 전혀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힌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저자가 고리타분한 정의나 당위론만을 내세우는 대신 과거에 빚어졌거나 현재 빚어지고 있는 미국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그리고 그것을 타개해 나가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적절하게 보여줌으로써 글과 말에 탄력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책에서 하워드 진이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민중의 시각에 선 역사관을 통해 피상적인 앎이 아니라 “마음 깊이 진정으로 느끼는 본질적인 앎”에 도달하자는 것이다. 그는 이른바 객관적인 역사란 있을 수 없다고 일갈한다. 역사란 수많은 사실들로부터 선택되는 것이고, 그러한 선택에는 어떤 판단이 끼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그 판단을 누가 하는가, 대통령, 의회, 대법원, 장군들처럼 지위가 높고 힘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체제에 큰 위협을 주지 않는 사실들만이 선택되고 그것들이 학교에서 가르쳐진다는 것이다. 가진 자, 승리한 자의 관점으로 이루어지는 학교 교육에 대한 대안으로 저자가 제시하는 것은 ‘연계성’ 교육법이다. 저자가 예로 든 고등학교 교사 빌 비글로우 씨가 축구공을 이용해 축구공 속에 숨어 있는 의미(파키스탄 노동자의 현실)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수업 방식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여기서 내가 눈여겨 볼 대목은, 축구공에 담긴 착취와 고통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된 학생들의 글이 그런 사실을 몰랐을 때보다 훨씬 문학적이면서 깊이가 더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식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줌으로써 내가 아닌 타자들에 대한 공감 능력도 키워준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솔직히 부끄러움을 많이 느꼈다. 대학을 졸업한 후로 나는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에 완전히는 아니지만 살짝 눈을 감고 살았다. 오랜 전부터 가진 자들의 손아귀에서 쥐락펴락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대고 내가 한 팔 높이 쳐들어 잘못을 외쳐댄들 무엇이 바뀔까 하는 냉소와 회의가 일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1922년 가난한 이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밑바닥 세계를 경험한 하워드 진은 그 세계에서 빠져나와 대학 교수가 되어서도 그 세계를 결코 잊지 않고 빈자의 계급의식을 버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어느 젊은이 못지않게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냉소주의나 절망에 빠지지 않고 진보의 변화를 추구하는 일에 일관되게 헌신할 수 있었던 동력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하워드 진은 세 가지로 대답한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고 하더라도 사회 변혁에 헌신해온 진정으로 훌륭한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저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저를 지탱해줍니다. / 한편으로는 일종의 역사의식이 저를 지탱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주변을 둘러보면 냉소주의와 비관론에 빠지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 . 민중의 분노가 강을 이룰 때, 그리고 그들이 모이기 시작할 때 변화는 매우 급격하게 이루어집니다./ 지속적으로 주장을 펼치고, 실천하려 노력하고, 또 참여하도록 한 요인은 바로 그것이 삶을 더 흥미롭고, 즐겁고, 가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 . 저는 참여하는 사람들이 더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고 믿습니다. 바로 그것이 저를 지탱해주는 힘입니다.”(191)

이 세 가지 답변 중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세 번째 항목이었다. 희생하는 삶이 아닌 자신을 살찌우는 충만한 삶이라, 바로 그런 시각을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가지게 된다면 이 그릇된 세상이 좀 더 살 만해지지 않을까란 희망이 슬금슬금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렇다,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는 부모라면, 우리의 교육을 고민하는 교사라면, 나는 이 책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내 아이의, 내 학생의 점수 몇 점을 더 올려주는 것보다 역사에서 정말 중요한 배우는 민중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 그들의 저항운동을 통해 오늘날의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 그래서 인종과 국가를 초월한 공감과 연대의식을 가지게 하는 것,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독단이 붕괴된 바로 그 자리에 희망이 솟는다. 사람들은 자라난 환경이 어떠했든지 간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열린 사고를 가졌으며, 과거를 바탕으로 그들의 행동을 자신 있게 예단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태도에 영향 받기 쉬운 약점을 가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약점이 바람직한 것과 또 그렇지 않은 온갖 가능성을 낳기도 하지만, 그러한 약점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그 같은 약점은 어떤 인간도 포기해서는 안 되고, 어떤 생각의 변화도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될 수 없음을 뜻한다.”(220)  

 이 글은 사람들이 저자를 두고 가난한 집 아이로 태어나 돈에 쪼들린 삶을 살았기 때문에 계급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그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자신과 아주 유사한 세계관을 가진 젊은 역사학자 스토튼 린드를 소개하며 전통적인 교조적 ‘계급 분석’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들이민다. 그의 말대로 인간의 의식이 환경에만 지배받는다면 세계의 역사는 결코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사상에 영향 받기 쉬운 인간의 약점은 반대로 세상을 진보시킬 수 있는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저자는 당부한다. 역사를 공부하되, 역사가 오늘날에도 살아 숨 쉬게 하고 싶다면 일부 역사가들이 저지르는 오류, 무수한 사실의 전당인 역사 속으로 들어가 길을 잃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다. 이 책 속에는 내가 막연히 알고 있었던, 미국의 힘의 논리에 의해 가려진 또 다른 구체적인 역사가 곳곳에 실려 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게 어제오늘의 일인가, 원래 세상이 그런 게 아닌가,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 . 그러나 하워드 진은 사실과 더불어 민중의 분노와 노여움을 같이 느끼게 하는 것, 그래서 많은 사람이 변혁의 대열에 설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의 힘이라고 말한다. 나는 내 아이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 무엇인지를 궁리할 것이다.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도 통제한다. 그리고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조지 오웰)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이 곧 역사를 기술할 수 있는 위치에 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미래까지도 결정할 수 있다.(141)

우리는 이렇게 흘러가는 세상을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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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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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Der Vorleser』
베른하르트 슐링크/ 김재혁 옮김. 이레(2004)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다가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를 보았다. 책을 다 읽지도 않고 영화를 보러 간 것은 매혹적이고도 신비에 가득 찬 한나라는 인물을 케이트 윈슬릿이 어떻게 연기해내는지 참을 수 없을 만큼 궁금해서였다.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사실 실망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지만, 전작 〈빌리 엘리어트〉와 〈The Hours〉를 보고 이미 감탄한 바 있는 감독이었기에 큰 실망을 주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 예감은 맞아 떨어졌다. 영화는 원작을 거의 충실히 따르고 있다. 영화를 본 소감은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감동 코드를 무척 잘 읽어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콧날이 시큰해지는 감동을 주는 면에서 나는 영화 쪽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한나가 미하엘(영화에서는 마이클로 나온다)과 자전거 여행을 떠난 어느 마을의 교회에서 문맹의 한나가 뜻도 모르는 성가를 들으면서 감동에 겨워 우는 장면(이건 원작에 없다), 한나가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8년이 지난 후 성년이 된 미하엘이 그녀를 위해 책을 읽어 녹음하는 장면, 그가 보내 준 녹음테이프를 듣던 한나가 어느 날 감옥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빌려 미하엘의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며 단어를 통으로 외우는 장면이 가장 감동적이었다. 개인적으로 책에서 내가 가장 감동을 받은 대목은 한나가 미하엘의 집에 초대되어 갔을 때 그의 아버지의 서가를 둘러보던 장면이었다.

그녀는 마치 책을 한 권 고르려는 듯 사방의 벽면을 빼곡히 채운 서가들 위로 눈길을 던졌다. 그러더니 한 서가로 다가가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가슴 높이로 들고 천천히 책들의 등을 문지르면서 걸어갔다. 다음 서가로 넘어가서도 역시 손가락으로 책등을 문지르며 걸어갔다. 그녀는 온 방 안을 그렇게 걸어 다녔다. 이윽고 창문가에 멈추어 서더니 캄캄한 어둠 속을, 유리창에 비친 서가의 모습과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69)

문맹의 한나가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박힌 무수한 책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신비로움, 근사함, 부러움, 답답함??? 나는 그녀가 그 서가에서 황홀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비록 글은 읽을 줄 모르지만 누구보다 강한 감수성을 가진 그녀기에, 그 많은 책들을 보면서 그 속에 담긴 이야기들을 상상하며 행복해한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단순히 15세 소년과 36세 여인의 나이를 초월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물론 ‘사랑’에 초점을 더 두고 있지만, 소설은 사랑과 고통, 수치와 분노, 죄책감과 이해 등 인간의 여럿 약점을 다루고 있는 철학적인 글이다. 그것을 원작자는 나치라는 시대사를 끌어들여 전쟁 세대와 전후 세대의 갈등으로도 연결시킨다. “한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겪은 나의 고통이 어느 면에서는 나의 세대의 운명이고 독일의 운명이라는 사실 (183),” “나는 한나를 이해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또다시 그녀를 배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나는 이해와 유죄 판결, 이 두 가지에 대해 나름대로 입장을 취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170)

그러므로 한나에 대한 이해는 결국 내 앞 세대에 대한 이해라 할 수 있다. 전후 세대는 나치의 만행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전쟁 세대가 내 부모이거나 친척이기에 수치심과 연대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저자는 한 세대나 벌어진 남녀 간의 도발적인 사랑 이야기를 통해 동시대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두 세대 간의 갈등과 이해를 말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 사이에 다리를 놓고 양쪽 강가를 모두 관찰하고 그리고 양쪽에 다 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 . 도피는 과거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각인시켜주고 또 우리가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과거의 유산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결연한 정신 집중을 의미한다. (193)

책을 읽으면서도 영화를 보면서도 내내 떠나지 않은 생각이 있었다. 우리도 우리의 못난 역사를 드러내고 반성하고 냉철하게 비판하고 바로잡는 날이 와야 한다고. 죄 지은 자들이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살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한나는 읽는 법을 배운 후로는 강제수용소에 대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위에서 요구 받은 그대로 오직 자신이 맡은 책임만을 다한 것이 죄가 되느냐고 묻던 그녀는 수도원 같은 감옥에서 자신의 죄를 알아간다. 물론 그녀의 자살은 그 죄의식과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녀의 자살은 여자 교도소장의 말처럼 그녀가 스스로의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새롭게 정의한 쪽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녀의 자살이 전혀 슬프지 않았다. 책상 위에 자신이 보던 책들(자신과 미하엘을 그토록 오래 세월 이어준)을 올려놓고서 한 치의 동요도 없이 담담한 얼굴로 자살을 택하는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아름다웠다.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훌륭했다. 나는 <타이타닉>보다 <주드>(토마스 하디 원작)라는 영화에서 그녀의 연기자로서의 자질을 보고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이 영화에서 그녀는 한나라는 인물이 되어 버렸다. 영화의 뒷얘기에 따르면, 책의 원작자도 감독도 케이트 윈슬렛을 한나 역으로 점찍었다고 한다. 바빠서 동참하지 못하겠다는 그녀의 거절로 두 번째 거론된 인물이 니콜 키드만이었다고. 그녀가 임신을 하는 바람에 케이트를 다시 설득하게 되었단다. 니콜 키드만도 훌륭한 배우이긴 하지만, 그녀는 한나를 연기하기에 너무 아름답다. 특히 몸매가. 나는 덜 착한 몸매를 가진 케이트가 한나 역의 적임자였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정말 한 번 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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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평점 :
절판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돌베개(2007)

서경식의 최근작 『고통의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를 읽고 전에 사두었던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을 내쳐 읽었다. 이 책은 저자가 한국어판을 펴내며에서 밝히고 있듯 “20세기를 대표하는 이들의 초상집이다.” 원래는 아사히신문사에서 1995년 1월 20일부터 같은 해 11월 5일까지 간행된 『20세기 천 명의 인물』전 10권 가운데 실린 글들을 한 권의 단행본으로 펴낸 것이다. 저자는 집필 대상자를 일관된 주제 아래 골라냈다고 말한다. 저자가 고른 20세기의 대표적 인물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의 극한의 시대를 온몸으로 치열하게 살다간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사형, 전사, 암살, 객사,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저자는 맺음말에서 “선명한 죽음을 통해 시대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한 인물들의 “묘비명”을 쓰고자 했다고 말한다. 고작 여섯 페이지에 지나지 않는 묘비명이지만, 저자의 글은 그 어떤 긴 평전보다 크고 강한 울림과 감동을 선사한다.
사실 저자가 고른 20세기의 대표적 인물들 중 내가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너무도 귀에 선 인물들의 이름을 대하면서 이 책을 옮긴 역자도 부끄럽고 민망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나 또한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러움과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이 책을 읽노라면 모르는 것,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죄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 책에 등장하는 49인은 폭압, 폭력, 전쟁이 난무하는 시대에 자신의 안위를 밀쳐둔 채 저항의 기치를 내걸고 투쟁 전선에 뛰어든 인물들이다.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 이들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다. 무수한 죽음들 중 내가 특히 감탄한 것은 일본의 여성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이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한국인 남편 박열과 함께 대역죄 위반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천황의 ‘은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그러나 그녀는 여죄수 지소에서 스스로 엮은 노끈을 독방 쇠창살에 걸고 목을 매어 자살한다. 겨우 스물 셋의 나이였다. “미래의 나 자신을 살리기 위해 지금의 나를 죽이는 것은, 단언컨대 절대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권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어서 끝까지 나로 시종일관하겠습니다.”(186)
이 책에서 자살을 선택한 인물들의 사유를 들여다보면, 저자가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에서 자살에 대해 언급한 대목과 일맥상통한다. “개인의 독립성은 죽음에 대한 독립성이다, 정신적인 독립성이야말로 개인의 독립성의 바탕이다.”(161쪽) 다시 말해 어떤 권력이나 종교나 이데올로기 같은 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온전한 판단으로 선택한 삶과 죽음이야말로 진정한 자기의 것이며, 그럴 때 선택한 죽음은 자유의 또 다른 일면임을 저자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죽음은 현실 도피가 아닌 저항의 몸짓이라는 데 고개가 끄덕여진다. 예순일곱의 나이에 아파트 현관 난간에서 계단 아래로 몸을 던져 죽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자살은 그 자산이 말한 “인간적인 행위”였다.

아우슈비츠 이후, 인류의 역사는 생환을 기약하기 힘든 ‘오디세우스의 항해’에 내던져졌다. 바다는 어두컴컴하고, 항해는 목적지도 정하지 못한 채 계속되고 있다.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고, 레비는 결국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죽음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레비의 자살은 인류 자체의 자살 과정을 상징하고 있는 것일까.(124)

이 책은 제목이 시사하듯,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더 정확하게는 사라지지 말아야 할 사람들을 우리의 기억 속으로 불러들이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부끄러움과 죄책감과 더불어 각 인물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엑기스만을 뽑아서 일목요연하게 감동적으로 정리해낸 저자의 글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펴내며>에서 저자는 이 짧은 평전을 쓰는 일이 결코 순탄치 않았다고 고백한다.

1년이 채 못 되는 시기에 47편이라는 짧은 평전을 쓰는 일은 무척 가혹한 작업이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 무렵은 정말이지 열심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썼던 것 같다. 그 가혹한 작업이 현재의 나라는 ‘글쟁이’의 지식과 사고의 토대를 형성해 주었다. 요컨대, 나는 이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교사들에게 배우고 스스로를 가르친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배움과 생각의 위력을 읽을 수 있었다. “부지런히”라는 말에서도 느껴지듯, 저자는 각 인물들을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조사하여 사실이라는 주춧돌 위에 따스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훈훈한 집을 완성했다. 겉에서 보면 작은 집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높고 넓은 하늘이 올려다 보이는 큰 집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아는 사람들은 더 가깝고 깊게 알게 되었고, 모르는 사람들과는 통성명하는 사이가 되었다. 내 책꽂이 한 켠에 이 책을 잘 보이게 꽂아 놓고 세상에 대한 냉소와 무력감이 슬금슬금 기어올라치면 읽어볼 생각이다. 이 책을 옮긴 이목 선생의 후기도 근사했다.

저자는 세계의 근현대사에 자신의 족적을 또렷이 아로새긴 49명의 인물들을 한자리에 불러들여 우리의 ‘편향된 인식’과 ‘망각’을 질책한다. 그들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의 기억이란 단순히 개인들의 경험을 보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응당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다시 그들과 함께 기억을 공유하면서 사회적 기억=사회적 관계망을 확장해가야 한다고. 그리하여 암담한 현실에 저항하고 어두운 기억에서 밝은 미래를, 희망을 이야기하자고. / 기억이 정치적·문화적 산물이라는 말은 그래서 가능하다. 이런 기억의 속성 때문에,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는 서로 다른 ‘기억들 간의 싸움’이 매일 치열하게 반복된다. 과거의 역사를 애써 외면, 왜곡, 망각하려는 자들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안간힘을 다하는 자들의 싸움, 이 책에 실린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의 기억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며 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자산이다.

마지막으로 출판사 돌베개를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접해본 책들 중 이 책만큼 편집에 정성이 들어간 책을 본 적이 없는 듯하다. 각 인물과 관련된 보충 자료를 일일이 조사해 정리를 해준(이것 역시 지루하지 않게 엑기스만) 덕에 시대 상황과 인물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책 속의 책들을 왕창 선물 받아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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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4-02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선물 왕창 받을 거라구요!! 서경식님 책 읽었었는데-제목은 까먹;;;;-이것도 기대되네요!!

syo 2021-04-04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력이 장난 아니시네요. 12년 전이라니.... 저는 그때 빌빌거리면서 학교다니고 과외하고 연애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