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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본능 - 마음은 어떻게 언어를 만드는가
스티븐 핀커 지음, 김한영 외 옮김 / 소소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스티븐 핑커의 책은 ‘빈 서판’에 이어 두 번째다. 전작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공통점이 있다. 구미를 끌어당기는 제목에 ‘미국의 도킨스’ 같은 냉랭하고 재치 넘치는 어투, 그러나 책장을 넘기면 사실은 너무나 학구적이어서 ‘재미있으면서도 지루하다’는 것이다. 지금 책꽂이에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도 꽂아놓고 있는데, 두께로 봤을 때 역시나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은 말 그대로 인간의 ‘언어 본능’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학습할 수 있는 생물학적 구조를 타고 났고, 그런 점에서 보면 언어는 가히 ‘본능’이다. 이 본능은 또한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형성되고 발전돼온 것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노엄 촘스키의 생성문법에서 시작된 ‘본능적 언어 습득’에 관한 논지를 발전시켜 나가면서 언어를 ‘교육의 산물’로 보게끔 만들어버린 과거의 학자들과, 대중들의 오해를 비판한다.
저자는, 자기 선배이자 동료인 촘스키를 한껏 추켜세우면서도 “촘스키는 언어기관이 선천적임을 인정하면서도 다윈의 자연선택론에는 회의를 표해 독자들을 얼떨떨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자기는 촘스키의 언어학적 성과를 인정하되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언어본능’이라는 것이 어떻게 자연선택의 과정을 따라 진화해왔는지를 밝혀 보이겠다고 큰소리를 땅땅 친다. 난 촘스키의 언어학을 잘 모르기 때문에 촘스키가 어떤 한계를 가졌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핑커가 주장하려는 것의 요지는 대략 알겠는데, 이 책에서 ‘언어기관의 다윈적 진화과정’이 어떻게 밝혀지고 있는 것인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저자는 마음의 설계도이니 문법 유전자이니 하는 오해해선 안 될 개념들을 가지고 언어가 진화의 산물임을 설파하는데, 동의를 하지 못할 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생물학자가 아니라 언어학자이며, 인간의 몸뚱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언어’ 그 자체를 이용해 보편문법의 존재를 설명하고 있어 그리 일목요연하게 다가오진 않는다. 요는, 언어는 본성이냐 양육이냐 혹은 유전이냐 환경이냐의 이분법으로 갈라놓을 수 없는 진화론적 과정을 거쳐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 됐다는 것이며, 언어의 작동방식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인류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이다.
어쨌든 재미는 있었다. ‘마음은 어떻게 언어를 만드는가’. 책꽂이에 꽂힌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못잖게 황홀하도록 눈길을 끄는 제목이고,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주제다. 이런 질문들에게 답하기 위해 수백 쪽에 이르는 장문의 연구서를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으로’ 내놓을 수 있다는 점에서 핑커는 대단한 저술가다.
구슬은 꿰어야 보배라지만, 꿰는 과정을 100% 따라잡을 수 없었던 모자라고 게으른 독자에겐 구슬 하나하나도 재미있는 얘깃거리였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언어를 배워나가는 과정’에 대해 재미난 관찰을 많이 하게 되는데, 따끈따끈한 내 관찰 내용을 이 책에 나오는 설명들과 연결지어 되새겨보는 것도 개인적으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나온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절판이다. 이러니 한국에선, 책꽂이에 손도 못 댄 책들이 쌓여있어도 일단 돈 들여 쟁여놓고 보는 수밖에...)
인류학적 유언비어와 관련하여 에스키모 어휘 날조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에스키모인들은 눈에 대해 영어 화자들보다 더 많은 어휘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어떤 출판물에서 주장하듯이 눈에 관해 400개의 어휘는커녕 200개, 100개, 49개, 아니 실은 9개의 어휘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한 사전에 따르면 단 2개다. 후하게 쳐서 전문가들은 약 10개 정도라고 하지만 이 기준에 따르면 영어도 별로 뒤지지 않는다.
이같은 오해는 어디서 온 걸까? 아마도 시베리아에서 그린란드에 이르기까지 퍼져 있는 포합어 계열의 유피크 및 이누이트-이누피아크어족을 실제로 연구한 사람에게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류학자 로린 마틴은 한 다리 건널 때마다 부풀려지는 도시의 전설처럼 어떻게 이 이야기가 부풀려졌는지 기록하고 있다. 1911년 프란츠 보아스는 별 생각 없이 에스키모인들은 눈에 대해 서로 무관한 네 가지 어근을 사용한다고 말했다. 벤자민 워프는 그 수를 7개로 불렸고, 그의 글은 여러 곳에 실렸으며 마침내 언어학 관련 교과서와 대중서적들에까지 인용되었다.
<에스키모 어휘 날조>라는 에세이에서 마틴의 글을 소개한 언어학자 제프리 풀럼은 이 이야기가 그토록 통제 불능으로 부풀려진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정했다. “이른바 에스키모인의 어휘 낭비는 그들이 사용하는 포합어 같은 여러 가지 낯선 성벽들(서로 코 비비며 인사하기, 이방인에게 아내 빌려주기, 날 바다표범고기 먹기, 북극곰에게 잡아먹히도록 할머니 바깥에 내치기 따위)과 잘 어울려 보였다.”
그것은 아이러니한 외곡이다. 언어상대론은 보아스 학파가 문자가 없는 문화도 유럽문화 만큼 복잡하고 정교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벌인 캠페인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식견을 넓혀주는 듯한 이러한 일화들이 인기를 끈 것은 다른 문화의 심리현상들을 기묘하고 이국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온정적 우월주의에 어필한 덕분이었다. (91쪽)
소니에서 워크맨을 개발한 이래 어누 누구도 두 대의 소니 워크맨이 Walkmen 인지 Walkmans 인지 확신하지 못했다(남녀평등적 대안인 Walkperson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Walkpersons와 Walkpeople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에 부딪힐 테니까). Walkmans 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은 그 단어의 핵이 없음에서 기인한다.
소니는 두 대 이상의 Walkman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공식적인 대답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의 상표가 하나의 명사로 변환될 경우 아스피린이나 클리넥스처럼 총칭적인 하나의 의미로 사용될 것 같자 그들은 Walkman Personal Stereos를 제시함으로써 문법적인 사안을 비껴갔다. (207쪽)
인간을 달에 보내는 국가가 받아쓰기를 할 수 있는 컴퓨터 하나 만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바에 따르면 각 음소들은 고자질장이 음향지시 기호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전자속기사가 바로 등장하지 않는 것은 동시조음이라 불리는 근육 제어의 일반적 현상과 관련이 있다. 하나의 음소를 조음하고자 할 때, 우리의 혀는 즉시 목표한 자세를 취할 수 없다. 혀는 필요한 위치로 들어올리기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무거운 살덩어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움직이는 동안, 우리의 뇌는 궤도를 계획하면서 다음 자세를 예상한다. (263쪽)
우리가 분석기가 되어 하나의 문장을 해독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연산 부담을 지고 있다. 하나는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판단이다. 하나의 단어나 구를 두 가지 규칙에 따라 해독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어떤 규칙을 적용할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기억은 컴퓨터에게는 쉽고 인간에게는 어려운 반면, 판단은 인간에게는 쉽고 컴퓨터에게는 어렵다. (291쪽)
동물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동물들의 의사소통 능력에 대해 점점 더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동물의 능력에 대한 주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평가를 위해 과학계가 이용할 수 있는 자료는 빈약하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조련사들은 그들의 원자료를 공유하자는 과학자들의 요청을 거부해왔다.
(님 침스키의 사례에서) 페티토는 좀더 표준적인 기준을 가지고 진정한 어휘수가 125개라기보다는 25개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혹자가 문법이라 부르길 원한 어떤 것에 대해서도 침팬지의 능력은 거의 빵점에 가까웠다. 수년간의 집중적인 훈련에도 불구하고 침팬지들의 평균적인 ‘문장’ 길이는 변함이 없었다. (495쪽)
사람들은 침팬지를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살아 있는 종으로 생각하여 침팬지들의 최소한 언어의 조상뻘 되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짓고 싶어한다. 그러나 진화가계도는 종이 아니라 개체들의 가계도이기 때문에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살아있는 종’이라고 해서 특별한 지위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종이 무엇인가는 멸종이라는 우연한 사건에 따라 결정된다.
인류학자들이 외딴 고지대에서 호모 하빌리스의 잔존자들을 발견했다고 상상해보자. 하빌리스는 살아있는 생물로서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될 것이다. 이런 사실이 침팬지가 언어와 같은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압력을 없앨 수 있을까? 아니면 어떤 전염병이 수천년 전에 모든 유인원들을 전멸시켰다고 상상해보자. 원숭이에게 언어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못해 다윈이 위험에 처하게 될까? 과거에 어떤 우주인들이 영장류의 털 코트에 열광한 나머지 털 없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영장류를 사냥하고 포획하여 멸종에 이르게 했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개미핥기와 같은 식충동물들이 조어(造語)의 짐을 짊어지게 될까?
우리의 뇌와 침팬지의 뇌, 개미핥기의 뇌는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만의 배선을 가지고 있다. 그 배선은 다른 대륙에서 어떤 종이 살아남고 또 멸종하는가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505쪽)
핵심은 이렇다. 나는 상대주의를 싫어한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나는 상대주의가 오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상대주의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간단하고 거칠게 표현하자면 인간 본성의 고정된 구조다. 현대의 지식사회는 보편적인 인간 본성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상대주의로 가득 차 있으며, 언어본능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부인에 대한 도전이다.
그 상대주의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학설이 표준사회과학모델이며, 이것은 1920년대부터 지식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의 행동이 기호와 가치의 자율적 체계인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는, 인간의 유아는 단지 몇 가지 반사능력과 학습능력만을 갖고 태어나 교화, 보상, 벌, 역할모델을 통해 문화를 학습한다는 인류학적·심리학적 개념의 결합으로 이뤄져 있다. 지금까지 표준사회과학모델은 학계 내에서 인류에 대한 연구의 근거였을 뿐 아니라 우리 시대의 세속적 이념, 즉 버젓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취해야 할 인간 본성에 대한 태도로 작동하고 있다. 최소한 학식 있는 사람들의 수사학에서 표준사회과학모델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모든 행동은 천성과 양육의 상호작용에 의해 나타나며, 이 두 요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알게 된 언어본능에 관한 지식들이 유전과 환경이라는(또는 천성과 양육, 생득설과 경험설,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생물학과 문화의) 무분별한 이분법으로 축소돼 버린다면 우울한 일일 것이다. 행동의 근원이 유전인가 환경인가 또는 그 둘 사이의 어떤 상호작용인가에 대한 논쟁은 모순적이다. 이제 우리는 모든 지각, 학습, 행동의 직접적인 원인인 인간 뇌의 복잡성을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 학습은 선천성의 대안이 아니다. 학습을 수행할 수 있는 선천적인 메커니즘이 없다면 학습은 결코 일어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5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