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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지대 고라즈데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을 대단히 감명깊게 읽었다. 너무 상투적인 표현같지만, 그 책은 정말 재미있었다. 역자의 말마따나 ‘코믹 저널리즘’이라는 새 장르를 개척했다 할만한, 공들인 역작이었다. 단아하지 않고 섬세하지 않고 격렬하지 않고 심금을 울리지도 않고 심지어 코믹하지도 않은, 저자 특유의 저널리즘. ‘팔레스타인’의 매력은 적어도 내겐 그 성실함에 있었다. 네모칸 구석구석, 얼마나 성실한지. 지겨운 것은 지겨운 대로, 우울한 것은 우울한 대로 그저 성실하게 그려내는 만화가라니. 그리하여 그 지긋지긋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태의 진면목을 여지없이 보여줘 버리는 성실함이라니.
그러니 이 작가의 또다른 작품을 고르면서 주저함이란 있을 수 없었다. ‘안전지대 고라즈데’. 같은 작가, 같은 번역자, 같은 출판사. 코믹저널의 제목치고는 너무하잖아, 이 책. 이건 너무 빤한 제목에 뻔한 역설이라서 끌리지가 않는다고! 라고 중얼거리면서 책을 펼쳤다.
이럴 줄은 몰랐다. ‘팔레스타인’을 다 읽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렸지만 ‘고라즈데’를 끝까지 넘기는 데에는 꼬박 두 달이 걸렸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현실은 암담하다. 이스라엘 놈들은 참 나쁘다. 나는 사람들이 그 사실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선한 유대인 야만스런 아랍인’이라는 편견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들이 그렇게 많은지 한심스러웠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외국(서양) 사람들이 자기네들 사정을 너무 몰라준다고 하고, 서방 언론이 친이스라엘 입장에서 편견을 갖고 아랍을 들여다본다고 말한다. 반면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들 얘기한다. 팔레스타인 문제가 너무 정치화되어있고 서방은 2차 대전 피해자였던 자기들을 너무 몰라준다고, 팔레스타인은 언론플레이만 한다고. 어쨌거나 팔레스타인 얘기는 세간에 그나마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조 사코가 그린 팔레스타인의 현실은 신랄하고 적나라했다. 그래서 좀 무섭기도 했다.
책을 간단히 소개하면, 옛 유고연방에서 갈라져 나온 보스니아 땅의 고라즈데라는 작은 도시에서 유고 내전 당시 벌어진 일들을 스케치한 만화다. 저자는 95년과 96년 고라즈데를 여러 차례 방문해 그곳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같이 생활하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그렸다. 주로 세르비아계가 보스니아계(무슬림)를 상대로 저지른 잔혹한 인종청소의 실상이 한권의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런 표현은 우스꽝스럽지만, 저자의 전작인 ‘팔레스타인’은 ‘고라즈데’에 비하면 장난에 불과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형편이 참혹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고라즈데’가 ‘팔레스타인’의 수백 아니 수천배 더 참혹하기 때문이다. 엽기 이미지는 물론이고 공포영화 하다못해 갱영화도 보지 않는 내게, 이건 시각적 폭력이다. 난 이렇게 끔찍한 이야기에는 전혀 내성(耐性)이 없는 사람이란 말이다.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이런 얘기를 읽은 적이 있다. 보스니아에는 ‘살인관광’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내전 때 서양 관광객이건 누구건 보스니아에 들어가 사람사냥을 해도 됐었다고, 돈만 내면 살인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고. 믿어지지 않았고, 지금도 그것이 루머인지 혹은 유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무튼 보스니아는 나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심지어 유럽의 ‘좌파’라는 이들이 “NATO의 유고 공습이 폭력을 부추겼다”고 주장하는 마당에.
토할 것 같았다. 역겨워서, 괴로워서, 이 책을 읽는 데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것이 ‘코믹 저널리즘’의 힘이다. 사진과는 또 다른 시각적 묘사. 더없이 성실한, 잘리고 파헤쳐진 인체를 꼼꼼히 묘사한 그림들. 책장을 넘기다가 덮었다가를 반복했다.
“이 도시에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내용에 대한 비디오들이 있다. 고라즈데판 ‘엽기 홈 비디오 특급’이다. 날아오는 포탄, 산산조각난 동물들, 토막난 채 타버린 아이들의 시체, 마취하지 않고 잘라내는 다리 등을 아마추어들이 담은 것이다. (중략) 그런 증거물을 시청한 일이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고, 마지막도 아니었다. 결국 봐도 덤덤해지게 된 이후에도...”
저런 것들을 보고 들으면서 인간은 과연 ‘덤덤해질’ 수 있는 것일까. 저자는 아주 치명적인 증거들을 들이대면서 ‘인간성’의 신화에 돌을 던진다. 독자인 나는 돌에 맞아 쓰러질 지경이다. 세계의 분쟁지역 실태에 대해 내가 읽은 얘기 중 가장 끔찍한 것을 고르라면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사태이고, 두 번째가 이 ‘고라즈데’다.
인간은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 외에 책을 읽으면서 내 머리를 짓누른 것들이 있었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한 국가의 주권을 존중해주는 일과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명분 사이에는 항상 갭이 존재한다. 단적인 예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다. 지난번 이라크전쟁 때에는 미국이 워낙 지랄을 떨어서 그런 논쟁 자체가 무의미해지긴 했으나, 어쨌건 미국이 뭔가에 ‘개입’할 때에는 항상 인도주의를 내세운다. 대단히 우습지만 미국이 바그다드를 폭격할 때에도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는 데에 실패하자 ‘쿠르드족 학살한 사담은 범죄자’라면서 ‘인도주의적인’ 명분을 내세웠었다.
어떻게 볼 것인가. 이라크의 경우 서방의 ‘이권’이 눈에 보이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제관계의 ‘현실론’을 인정하든 부인하든 결국 개개인에게 그 판단은 ‘선택’의 문제였던 것 같다. 반면에 보스니아 쪽으로 가면 문제가 아주 복잡해진다. 세르비아계가 알바니아계(무슬림)를 말살하려 했던 옛 유고연방의 또다른 내전을 다룬 ‘전쟁이 끝난 후’라는 책에서 알렉스 캘리니코스, 레지스 드브레, 타리크 알리, 미셸 초스도프스키 등 서방의 ‘좌파 지식인’들은 “NATO의 코소보 공습은 인도주의를 내세운 제국주의의 공격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비판한다. 인종청소를 비롯해 세르비아계의 잔혹행위가 시작된 것은 오히려 NATO의 공습 이후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 ‘국경 없는 의사회’ 같은 국제구호기구 요원들은 언제나 분쟁지역에 서방이 ‘개입’해줄 것을 요구하지만 이는 인도주의라는 간판 아래 강대국들이 해당 국가의 주권을 무시할 명분을 주는 것에 다름없다고 지적한다.
반면에 미국인 만화가는 강대국들이 허울 뿐인 ‘중립’ 운운할 적에 지구의 어느 한 구석에서는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고 시체마저 갈갈이 찢기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분쟁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긴 하지만 참 어려운 문제다. 후세인이 쿠르드족을 죽였다. 그럼 ‘강대국’이 후세인을 몰아내야 하는가? 세르비아계가 무슬림들을 마구 죽이고 있다. 그럼 NATO가 세르비아계를 폭격해야 하는가? 아니면 남의 나라 민족분쟁에 개입하지 말고 ‘중립’을 지켜야 하는가? 손 놓고 있는 사이에 사람들이 죽고 있다. 100명 죽으면 개입해야 하나, 10000명 죽으면 개입해야 하나? 강대국의 ‘횡포’와 ‘개입’ 간의 그 모호한 간격을 세계시민들은 어떻게 올바로 포착하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인가.
여담이지만 ‘팔레스타인’의 추천사는 에드워드 사이드가 썼는데, ‘고라즈데’는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썼다. 제법 괜찮은 인물로 평가받던 히친스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면서 미국 내 진보동아리에서 왕따된 것을 생각하면 세상은 역시 희한하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