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진실 - 왜 일부 국가만 부유하고 나머지 국가는 가난한가
존 케이 지음, 홍기훈 옮김 / 에코리브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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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에는 중구난방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와서 좀 지루했다. 그러다가 중반부 지나가면서 논지가 비교적 명확해지고 재미도 더해갔다. 요는, 경제학은 완벽하지 않지만 시장을 읽는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완전경쟁시장’을 중심에 놓고 무조건 시장만 옳고 정부 개입은 나쁘다 했던 (밀턴 프리드먼식) 경제학계 주류의 생각이 잘못됐었다는 것이다.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로 ‘미국식 경제학’ ‘금융자본주의’ ‘통화주의와 시카고학파’가 지탄받는 세상이 된 지금은, 영국 경제학자인 저자의 주장이 그리 낯설지 않게 들린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니 지금도 한국 정부여당 등이 주장하는 것을 보면 저따위 논리가 반성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책은 금융위기 전에 쓰인 것인데, 왜 완전경쟁-시장제일주의가 현실을 해석하고 개선하는데 착오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시장은 작동하지만 향상 그리고 완벽하게 운영되지는 않는다. 다원주의적 시장구조는 혁신을 중진하고, 경쟁적인 시장은 소비지들의 수요를 충족시켜주지만, 시장의 결과가 효율적일 것이라고 믿을 만한 포괄적인 근거는 없다. 사회적·경제적 제도들은 시장경제에서 정보의 교통을 관리한다. 이 제도들은 문화와 가치, 법과 역사에 의존한다.” (422쪽)

책의 원제는 ‘문화와 번영’이다. 저자는 경제적 번영은 총체적인 사회 제도에 달려있다고 지적하면서,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시장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제도의 일부분으로서만 의미를 지닌다는 측면에서 저자는 시장을 ‘임베디드 시장(embedded market)’이라 부른다. 시장이 제도 안에 ‘임베디드’ 되어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기술적인 이식(移植)을 해주는 것만으로는 낙후된 경제권을 번영으로 이끌 수 없다. 이것이 ‘빈국을 부국으로 바꾸기 위한 선진국들의 이식작업’이 실패한 이유다.

“생산성은 단순히 자본과 기술 기용성의 결과가 아니며, 또한 개개 노동자들의 숙련도의 차이에 의한 것이 아니다. 현시대에서 기술은 어디서나 개발될 수 있고, 지본과 기술은 국가 간에 자유롭게 흘러 다닌다. (국가간) 경제적 차이는 생산성과 생활수준이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제도와 서로 교차하는 경제적 환경의 복잡한 산물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존재한다. 개인의 경제생활은 그들이 속한 시스템의 산물이다. 이 책은 우리의 경제생활을 규정하는 제도들에 관한 것이다. 경제제도는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정황의 일부로서만 기능한다. 이것이 내가 임베디드 시장(embedded market)이라고 기술하는 것이다.” (43쪽)

“부국들과 빈국들 간의 차이는 각각의 경제적 제도의 질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40년의 실망 후에 개발기관들은 이것을 인식했고, 채무국 정부에 개혁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처방은 대개 너무 미약하다. 러시아에 제공된 것은 미국식 제도가 아니라 미국 비즈니스 모델의 비책이었다. 시장제도-소유권의 보장, 최소한의 정부의 경제적 개입, 규제완화-는 단순하고 보편적일 것으로 믿어졌다. 이러한 처방들이 이행된다면 성장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시장에 관한 진실은 이보다는 더 복잡하다. 부국들은-글자 그대로-시민사회와 정치적·경제적 제도들이 수세기를 거쳐 이룬 공진화의 산물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만 이해하는 공진화는 빈국에 이식할 수 없다." (440쪽)


책의 전반부는 경제현상 전반을 간략하게(그러나 쉽지는 않다) 설명하면서 경제학의 맛을 보여준다. 중반부터는 프리드먼식 경제학이 어떤 점에서 틀렸는지를 조목조목 짚으면서, 사회 제도의 ‘공진화’를 통해 시장이 번영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여기서 비판 대상은 통화주의/시장제일주의,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미국식 비즈니스 모델(ABM)’이 된다.

“ABM의 등장은 탐욕은 좋은 것이라는 주장을 허용했다. 주식시장의 계속되는 상승은 금융서비스분야에서 매우 큰 이익을 창출했고, 금융기관에 종사하는 경영자들은 자연적으로 자신의 급여와 월스트리트의 성과급을 비교하게 되었다.
ABM의 순 도구적 동기들은 궁극적으로 스스로 패배하게 된다. 이윤이 시장경제의 목적이고,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은 그것에 대한 수단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즉, 목적은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이고 그 수단들을 이익이 나게 하는 것이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행복만을 외곬으로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가장 이윤이 많은 회사는 이윤 위주 회사가 아니다. 적응의 결과는 최대화의 결과와 비슷하나 최대화의 산물은 아니다.“ (425쪽)


요즘 유행(?)하는 ‘생물학적 경제학’이라고 봐야 하려나, 진화론-적응(옮긴이가 앞에서는 ‘적응’이라 해놓고 뒤에서는 ‘순응’‘순응적’이라고 번역해 헷갈리게 만드는데 ‘적응’이 맞을 듯) 개념을 중심으로 미국식 경제학을 비판한다. 인간이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생물학의 고전적인 전제가 절반의 진실일 뿐인 것처럼, ‘인간은 이기적이다, 경제활동의 목적은 이윤추구다, 탐욕은 곧 선(善)이다’라는 개념들의 집합체인 미국식 경제학 역시 온전한 진실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부분에서 도킨스식 이기주의-이타주의 개념과 경제학이 접목된다.

“밀턴 프리드먼은 합리성이 동기에 대한 가정이 아니라 행동에 대한 예측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개인들이 이기적이 아니어도 이기적 행동이 이타심을 만들어낸다. 기업은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결국 경쟁적인 시장에서 살아남는 기업은 이윤을 극대화한 기업이다. 이러한 주장은 프리드먼과 반자본주의 활동가들을 결속시켜주지만, 둘 다 틀렸다. 이러한 주장은 행동이 이성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 적응적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이성적 행동과 적응적 행동은 반드시 같지 않을 수도 있다.” (264쪽)

꽤 재미있는 경제학 개론서인데, 개론으로 보기엔 좀 문장이 꼬여 있다는 점이 흠이라면 흠. 저자의 말투도 그리 문어체는 아닌 것 같고(이른바 비비꼰 ‘영국식 유머’들이 섞여 있다) 번역은 정말 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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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서의 현재 - 전 세계 권력 지형에 대한 비판적 조망
네르멘 샤이크 지음, 김병철 옮김 / 모티브북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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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학자들 인터뷰 모음. 이름 들으면 흥미가 절로 생길 만한 저명한 인사들. 아마티아 센, 헬레나 노르베르-호지, 조지프 스티글리츠, 시린 에바디, 가야트리 스피박...
그런데 번역은 엉망. 제대로 알아먹기 힘든 완전 직역 문장에 인터뷰 대상자들 소개 부실, 옮긴이 주 부실. 특히 뒷부분으로 갈수록 이해하기 힘들다. 가야트리 스피박 부분은 읽다 지쳐 넘어갔다. 아무리 스피박이 말을 해괴하게 꼬아서 하기로서니... “내가 영어를 잘하는 것은 영국에 소유되었었기 때문”이라는 문장이 버젓이 나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중동·이슬람권에 대한 얘기가 상당 부분 차지하는데 그 쪽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전반적으로 국제문제에 대한 번역자 이해가 부족하고, 인터뷰 대상자들에 대한 사전 지식도 별로 없었던 듯. 이런 ‘다국적 인터뷰 모음’이라면 최소한 인터뷰이들 어느 나라 사람인지 정도는 설명해주는 게 예의 아닐까. 굉장히 좋은 책이면서 번역 때문에 망친 책 리스트에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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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8-12-22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서를 못 구해서 책상맡에 두고만 있는 책인데, 역시나 그렇군요...

딸기 2008-12-23 11:10   좋아요 0 | URL
네, 웬만하면 원서로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열매 2008-12-24 0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인터뷰글이 예상외로 이해하기도, 번역하기도 힘들더군요. 분명히 한국말로 이해하고 나면 쉬운데 구어가 문어체로 정리되는 과정에서 문장이 문법에 잘 들어맞지도 않고 상당히 압축되어 있기도 해서, 역으로 인터뷰들이 얼마나 난해했었을지 추리가 될 정도가 되곤 하지요. 또 한국의 학계나 언론계가 해외 소식의 전달에 게을러서인지,--조중동같이 자기들 입맛에 맞게 요리해 괴물같은 정보가 유통되기도-- 사상사적 맥락을 무시한 사상의 돌출적 유입때문인지, 인터뷰의 내용을 읽는 이가 따라오게 하려면 본문의 1/3정도의 번역자주석을 달아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습니다.
여하튼 좋은 인터뷰집이 불성실한 번역으로 읽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니 안타깝네요.
하지만 예상컨데 영어원서도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인터뷰집일수록 더더욱 그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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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권선언’이 오는 10일 60주년을 맞습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의 악몽이 가시지 않은 1948년12월10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30개 항의 이 선언은 구속력은 없지만 이후 유엔의 인권 권련 헌장들과 결의의 준거가 됐으며, 인권의 보편적 기준으로서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인권선언 60주년을 앞두고 세계 곳곳에서는 성대한 축하행사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제3세계에서는 잔인한 ‘인종청소(제노사이드)’와 민간인 살상이 계속되고 있고, 선진국에서도 ‘테러와의 전쟁’ 등을 이유로 한 인권침해가 끊이지 않습니다. 6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인권의 길’은 멀고 험난하기만 합니다.


유엔은 인권선언이 채택된 12월10일을 ‘세계 인권의 날’로 정해 해마다 기념해왔습니다. 인권선언 60주년을 앞두고 유엔은 지난해 인권의 날부터 1년에 걸친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60주년 테마는 ‘우리 모두를 위한 존엄성과 정의(Dignity and Justice for All of Us)’입니다.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는 매달 세계 인권상황을 짚는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아제르바이잔·브라질·콩고·이집트·그리스·파라과이·러시아에서는 인권선언 60주년 기념 국제회의와 인권사진전이 돌아가며 열렸다고 합니다. 지난 9월 프랑스 파리에서는 ‘모두를 향한 인권’이라는 주제로 인권선언 60년의 발자취를 되돌아보고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회의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올 인권의 날에는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60주년 기념식과 유엔인권상 시상식이 개최됩니다. 올 수상자는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로 결정됐습니다. 12일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유엔 인권이사회 특별회의가 개막되고요. 제네바·뉴욕·파리 동시 인권영화제(10일부터), 중동평화 메시지를 전파해온 이스라엘 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인권음악회(10일 뉴욕) 등의 문화행사도 예정돼 있습니다.

그러나 성대한 잔치 이면에는 참담한 현실이 숨어 있습니다.

60년 동안 세계의 인권은 크게 향상됐지만 사각지대가 여전히 많습니다. 수단 다르푸르(아래 사진)는 국제사회가 인권 지키기에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유엔은 올해 2만6000명의 평화유지군을 다르푸르에 파병하기로 결정했으나 각국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1만2000명을 보내는데 그쳤습니다. 유엔에 따르면 2003년 이래 다르푸르에서는 30만명이 숨졌고 270만명이 난민이 됐으며 470만명이 유엔의 구호식량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정부군의 비호를 받는 이슬람 민병대의 학살이 계속되자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지난 7월 오마르 알 바시르 수단 대통령을 기소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바시르는 꿈쩍 않고 있고, 석유를 가진 수단의 횡포 앞에 국제사회는 무력하기만 했습니다. AFP통신은 8일 “유엔의 애타는 호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다르푸르는 올해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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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분쟁이 이어졌습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인권 실태는 여전히 열악하지요. 그루지야 전쟁으로 민간인 살상이 벌어졌지만 실태조차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콩고민주공화국(옛 자이르), 레바논, 라이베리아, 네팔 등 제3세계 인권 실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면서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호소했습니다.

유엔은 특히 세계 경제위기 때문에 인권문제가 내년에는 더욱 뒷전에 밀릴 것으로 우려하고 있습니다.

반 총장은 며칠 전 “경제위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노예상태로 전락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국제법상 인신 매매는 금지돼 있으나, 유엔은 전 세계에서 2700만명 이상이 노예로 팔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합니다. 인권 기구들은 경제위기 때문에 더 많은 이들이 비인도적인 노예 수준의 노동을 하는 처지가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인권 향상을 위해 선진국들이 더 많은 노력과 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국제앰네스티(AI)는 인권선언 60주년을 앞두고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에게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으로 실추된 인권 국가의 명성을 되살려야 한다”며 인권 리더십을 보이라고 촉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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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12-08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권선언이 발표된지 60년이나 됐는데도 아직도 이모양이란게 비참한거지요.
 
소비 -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
로버트 보콕 지음, 양건열 옮김 / 시공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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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에 대한 책인 줄 알고 펴들었는데 프랑스 독일 철학자들 이름이랑 무슨 주의, 무슨 주의가 줄줄이 나오는 책이었다. 처음엔 지레 겁먹고 닫아버릴까 했는데 두께가 얇아서 그냥 읽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읽다보니 의외로 꽤 재미가 있었다. 결론은 허무했지만.

마르크스는 노동이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지으며 노동에서의 소외가 자본주의의 주된 문제라고 지적을 했는데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소비가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고 소비에서의 소외가 주요한 문제가 된다는 것이 책의 요지다.

이렇게만 말하면 너무 당연한 얘기 같기도 한데, 사실 이 책은 특별한 이론을 전개한다기보다는 그동안 소비를 연구한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분석하면서 정리해주고 있다. 욕망, 정체성, 소외, 상징 이런 것들이 줄줄이 나오는데 읽어서 이해 못 할 내용은 없고, 뭐 딱히 새롭게 들리지도 않았다.

책에서 언급한 학자들 중에는 얼마 전 100세 생일을 맞은 레비-스트로스처럼 생존해있는 인물들도 있지만 그의 주요 작업도 이미 오래전에 이뤄진 것이고, 마르쿠제니 부르디외니 라캉이니 하는 이들이 소비 문제를 다룬 것도 이미 시간이 좀 지나간 일이다. 특히 책의 전반부는 거의 2차대전 이후, 40~50년은 더 지나간 시대에 나온 분석들을 다루고 있다. 대량 소비가 ‘전지구적인 현상’이 된 1980년대 이후 글로벌 ‘소비자본주의’ 시대에 대한 특별한 분석이 좀 덧붙여져 있었더라면 좋았으련만. 그런 면에서, 맨 뒷부분에서 살짝 언급만 하고 지나간 ‘20세기 말의 몰 워커(mall walkers)’ 얘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더 재미난 연구들이 나와 줬으면 싶다.


저자가 언급한 소비에 대한 연구들은 환경/기후변화 담론이 지배적이 되기 전 시대의 것들이어서, 소비를 분석함에 있어서 환경/기후변화 문제가 거의 거론되지 않은 것 같다. 또한 식민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자본주의의 글로벌 착취구조는 오히려 고착화돼 직접적인 전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소비의 ‘도덕성’ 문제를 ‘가치중립적’으로 묘사한 것은 아쉽다. 간단히 환경 문제를 언급하기는 했지만, 프랑스 철학자들 이름 폭탄을 난사하기 앞서서 상식 있는 소비자라면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문제들이다.

우리가 너무 탐욕스럽게 소비만 하다 보니 지구를 해치고 남의 것 빼앗으려 하는 것 아닌가, 양차 대전 등 전쟁이 사회를 압도했던 시기 전쟁에 나가있던 남성들이 ‘평화의 시기’를 맞아 새로운 소비자로 부상, 기존에 ‘소비=여성’으로 젠더화됐던 것을 뒤집었다는 분석은 재미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의 소비(그 바탕에 있는 무한 탐욕, 물질주의)가 약탈과 착취와 전쟁을 이미 배태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소비자들의 에너지 낭비를 뒷받침해주기 위한 석유전쟁들은 대표적인 예다. 저자는 “허구헌날 싸움질하는 사회들에서는 적어도 총질보다는 소비가 평화적인 대안처럼 보일 수 있다”며 “이걸 더 분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문제를 이론화할 필요가 있는 것은 소비가 세계 전체에서 계속 커지고 있고 소비가 정체성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라고 싱거운 소리를 한다.

소비를 열심히 분석하는 이유는, 그것이 저자의 말마따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소외를 일으키는 주요한 기제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요약한대로 ‘소비=상징의 소비’이고 ‘상징=욕망을 생산하는 장치’다. 이 소비는 애당초 실재하는 물체 자체가 아닌 상징 자체에 대한 욕망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쓰고 또 써도 욕망은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다. 무한 욕망과 무한 소비의 싸이클인 셈이다.

소비 대국은 잉여를 찾기 위해 점령의 길로 나가야 하는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소비를 보장하기 위해 세계의 패권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소비는, 지구를 망치고 글로벌 착취/약탈구조를 만든다. 동시에 소비는 그 자체로 특정 국가/지역의 문화/이데올로기를 퍼뜨리는 메커니즘이 된다. 정작 소비는 착취 국가에서건 피착취국가에서건 모든 ‘소비자’들을 소외시켜버린다. 무한 소비의 싸움에서 승자는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 밖에는 없다.

 

마르쿠제 들뢰즈 가타리 라캉 헤겔 부르디외 등등을 연구하는 게 “이 메커니즘을 알고 깨뜨리자”는 목적에서인지 그냥 심심해서 꼼꼼히 분석해본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는 “알고 깨뜨리자”는 쪽으로 우리 모두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알고 깨뜨리기 위한 대안으로는 여러 가지 반물질주의 생태주의적 아이디어들을 얘기할 수 있을텐데, 저자는 ‘왜 소비가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깊이 생각을 안 해본 모양이다.

비의 사회심리학이니 정신분석학이니 하는 것을 우아하고 복잡하게 분석하다가(이 과정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갑자기 “금욕주의적 가치관과 연결된 종교가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려서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더군다나 주요 종교가 대부분 친환경적이라고 누가 그래? 기독교 세계관의 반환경적 관점에 대한 얘기는 들어보질 못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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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춘미 옮김 / 하늘연못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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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만에 찬 불신 행위를 잊게 하고, 양심의 발언을 압살하는, 기계. 나는 나에게 걸터앉은 자가 바라는 것보다 더 먼 곳으로 가고 싶어하는, 과격한 오토바이. 나는 어쩔 수 없는 심정에서 방랑길을 떠나는 자에게 어울리는, 파란 오토바이.

논리에만 매달려 미래를 통찰하려고 하는 자. 시냇물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며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자. 읽다 만 책에 침을 흘리며 잠자는 자. 이부자리에서 빗소리를 듣는 데서 무한한 희열을 느끼는 자. 무슨 일이 있어도 단정한 태도를 흩뜨리지 않고, 예의를 잃지 않는 자. 분을 잔뜩 칠한 음란한 여자한테 혼나고 싶어 하는 자. 명석한 두뇌와 진드기 같은 어머니 때문에 꼼짝 못하는 자. 그들 쪽도 그렇겠지만, 그러나 내 쪽도 그런 인간들은 사절하겠다. (19쪽)

앞으로밖에는 달릴 줄 모르는 자동차는, 그 어느 것도 내 호적수가 될 수 없다. 녀석들은 수많은 노동자와 함께 자본가와 그 앞잡이의 노예가 되어 있다. 녀석들과 함께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들은 무산 계급의 우리에 틀어박혀서, 보기에도 시원해 보이는 숲 속을 힐끗 쳐다보고, 위에서 토혈할 날이랑, 뇌일혈이라든가 심부전 때문에 꽈당 쓰러질 날을 향해서, 씁쓰름한 얼굴로 달리고 있다. (101쪽)

밤은 어디까지나 밤이다.

여름은 어디까지나 여름이다.

우리는 달리고 있다.

우리는 흐르고 있다.

우리는 움직이고 있다.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 (31쪽)

너무나도 마루야마 겐지답다. “뒈져라, 형법 불소급의 원칙/뒈져라, 불교사상의 근기(根基)/뒈져라, 외국의 침략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는 국가.”(224쪽) 늙고 병들고 타락한 나라 일본을 향한, 이단아의 처절한 외침. 하지만 어찌 일본뿐일까.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겉으로는 냉소, 속으로는 절규를 내뿜는 오토바이의 방백을 들으면서 가슴 찔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저 흔해빠진 문명비판, 도시비판이라면 빌딩숲을 욕한 뒤 자연예찬 따위를 적당히 섞어서 도 닦는 사람인척 했으련만. 마루야마 겐지는 오토바이라는 강력하면서도 뿌리 뽑힌 것 같은 ‘문명의 이기’를 통해 문명을 비판한다. 두서없이 책장을 넘기던 나는 어느 틈엔가 긴장하고 있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은 지긋지긋하면서도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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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8-12-01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이 이 책 품절시켰나보네요.
지긋지긋하면서 무섭다에 동의 한표 보냅니다.

딸기 2008-12-01 15:50   좋아요 0 | URL
ㅋㅋ 안그래도 리뷰(도 아니지만) 올리려고 보니 품절이네요.
사실 제가 갖고있는 책은 표지도 저것과는 좀 달라요. 옛날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