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 5월 6일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에펠탑이 완공돼 관람객들에게 공개됐다.

건축가 귀스타브 에펠(1832~1923)의 디자인에 엔지니어 모리스 쾨흘린(1856~1946)의 구조 설계로 지어진 철탑은 당시로서는 말 그대로 ‘획기적’인 건축물이었다. 3년간의 대역사 끝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 탑을 만드는 데에는 총 1만8038개의 쇳조각과 250만개의 쇠못이 들어갔다. 
탑에 쓰인 철의 무게는 7300t, 비금속성 자재들까지 합치면 약 1만t의 자재가 소요됐다. 사각형의 밑변 길이는 각 99.3m이고 높이는 300m에 이르렀다. 후에 24m 짜리 철근 안테나가 덧붙여져서, 현재 높이는 324m다. 쇠로 만들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열에 많이 반응하기 때문에, 햇빛이 강할 때와 없을 때 18㎝ 가량 높이 차이가 난다고 한다.  

에펠탑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과 다가오는 20세기에 대한 희망, 역동하는 산업시대의 에너지를 결집시킨 ‘현대’의 상징물이었다. 
그러나 에펠이 만국박람회 측에 이 탑의 건축을 제안했을 때만 해도 공사의 위험성을 우려하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컸다. 설계안에 따르면 탑은 1, 2층에만 바닥이 있고 그 위로는 중심부가 뚫린 철골구조였다. 사고 우려를 의식한 에펠은 이동식 발판과 가드레일, 천막 등을 설치하는 등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안전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결과는 성공적이어서, 공사 기간 사고로 숨진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다.
소설가 기 드 모파상은 탑 계획안이 나왔을 때 “흉물스런 철골 구조물이 될 것”이라며 반대했으나 완공된 뒤에는 높이 80m 상공에 위치한 에펠탑 레스토랑을 즐겨 찾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일설에는, 에펠탑이 안 보이는 식당이 파리에 거기 뿐이어서 그랬다고). 1940년 독일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파리시는 히틀러의 선전에 악용될 것을 우려, 에펠탑의 전원 케이블을 끊었다. 이 때문에 파리를 찾은 히틀러는 탑 아래 입구만 방문한 채 올라가지 못했다. 나치 군은 에펠탑에 거대한 스바스티카(卍) 깃발을 달려다가 강풍에 실패했다는 일화도 있다.

완공됐을 때만 해도 에펠탑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으나 1930년 미국 뉴욕의 크라이슬러 빌딩에 자리를 빼았겼고, 20세기 내내 세계 각국의 ‘초고층 건물’ 건설경쟁이 이어졌다. 
지금도 경쟁은 진행중이다. 현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의 부르즈 두바이는 800m를 웃돌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아라비아 갑부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가 소유한 킹덤홀딩컴퍼니는 사우디 항구도시 제다에 높이 1000m가 넘는 건물을 지을 계획이다. 쿠웨이트도 ‘시티 오브 실크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1000m 건물 신축계획을 갖고 있고, 두바이의 부동산회사 나크힐도 같은 기록에 도전하려 하고 있다.
에펠탑과 같은 종류의 철골 타워로는 우크라이나의 키에프 타워(385m),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타워(375m), 중국 장인(江陰)의 양츠 철탑(346m) 등이 에펠탑보다 높게 지어졌다.
에펠탑은 지금은 프랑스에서도 5번째 높은 건물로 내려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파리의 랜드마크로서, 시민들의 ‘사랑’은 ‘높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매년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에펠탑을 찾는다. 개장된 이래 120년 동안 이 탑을 방문한 사람은 2억명이 넘는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와 중국 항저우 등지에 수많은 모사품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파리 가서 에펠탑 안 보는 사람도 있다. 나... 
나는 파리에 2박3일 있으면서도 에펠탑은 안 가봤다. 왜 그랬을까 -_-a)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스탕 2009-05-06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 시민들은 에펠탑 앞에 커다란 케익 만들어서 촛불 켜주는 그런 이벤트 안하려나요? ㅎㅎ
저런 철탑에 식당이 있다는게 신기해요! 올라가기도 무서울듯 싶은데..

딸기 2009-05-07 09:05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그런 이벤트 안 했으려나 모르겠네요.
어쩌면 했을 것 같기도 하고... ^^
 
천가지 얼굴의 이슬람, 그리고 나의 이슬람
율리아 수리야쿠수마 지음, 구정은 옮김 / 아시아네트워크(asia network) / 200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두어해 전 삼림파괴와 기후변화 문제를 취재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에 갔었다. 자와(자바)섬의 자카르타 공항에 내려 도심까지 들어가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서울에 오는 외국인들도 같은 느낌을 받을지 모르겠지만, 강남의 테헤란로 부럽지 않게 우뚝우뚝 솟아있는 마천루들과 초현대적인 주상복합아파트 단지들은 인상적이었다. 더 인상적인 것은 호화로운 첨단 건물들 바로 옆을 흐르는 쓰레기투성이 개천과 골목들이었다. 아시아의 거대 개도국 인도네시아의 두 얼굴을 보는 듯했다.
자카르타에서 이틀을 보내고 자와섬 중부의 소도시를 거쳐 탈탈거리는 소형 비행기를 타고 깔리만탄(보르네오섬)으로 가니, 그곳에는 이 나라의 세 번째 얼굴이 있었다. ‘빈부격차’를 논하기조차 힘든 미개발된 지역, 강물 위에 통나무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 그러나 한 꺼풀 벗겨보면 그 속에는 인도네시아의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미개발’이 ‘가난’을 뜻하는 말이라면 깔리만탄은 미개발 지역이다. 그러나 다국적 기업의 손아귀에서 자연과 삶을 착취당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그 곳 사람들은 결코 ‘미개발 지역의 원주민’이 아니었다. 다국적 제약회사가 운영하는 거대한 야자(팜)농장들과 속살까지 파헤쳐진 밀림은 그 곳이 세계화와 초국적 자본주의의 개발 바람에서 자유롭지 않은 곳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도네시아는 자원이 많고 땅이 넓고, 오랜 역사와 다양성을 지닌 나라다. 자와섬 중부 욕야카르타의 보로부두르와 쁘람바난에는 세계 어느 유적과 견주어도 빠지지 않을 찬란한 힌두·불교 유적이 있다. 깔리만탄과 이리안 자야(뉴기니섬 서부)의 원시림은 아마존과 함께 지구의 허파로 불린다. 발리의 전통문화와 아체의 석유, 자카르타의 마천루 모두 인도네시아가 자랑하는 자산들이다.
인도네시아는 가진 것만큼 상처도 많은 나라다. 이렇게 재해가 많이 일어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2004년 쓰나미에 지진, 산사태, 한국에서는 듣도보도 못한 ‘진흙화산 분출’, 항공기 추락과 유람선 침몰이 빈발하는데 심지어 조류독감까지... 재난과 사고가 끊이지 않아, 신문사 국제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인도네시아는 국가 차원에서 굿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씁쓸한 농담이 나오기도 했다. 수하르토 독재정권의 철권통치에 찢기고 1998~99년 금융위기에 타격을 받았지만, 뒤늦게나마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체제를 다시 세우려 애쓰는 나라. 그 곳이 인도네시아다.

이 책은 인도네시아 여성 칼럼니스트의 글을 모은 것이다. 인도네시아 최대 일간지인 <자카르타포스트>와 유력 잡지 <템포> 영어판 등에 쓴 것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국인들은 미국과 유럽에 쏟는 만큼의 관심을 아시아에는 쏟지 않는 편인 것 같다. 인도네시아는 우리에게 비교적 가까운 나라이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속속들이 알려지지는 않은 나라다. 아마도 대다수 한국인들이 인도네시아에 대해 갖고 있는 정보는 ‘수만 개의 섬으로 이뤄진 나라’, ‘쓰나미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은 나라’, ‘자원이 많은 나라’ 정도가 아닐까.
율리아의 글들은 인도네시아라는 ‘크지만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를 속속들이 엿보게 해준다. 전통사회와 현대의 충돌, 자본주의적 발전과 그로 인한 그늘, 독재와 민주화 같은 여러 가지 문제들이 칼럼들에 녹아 있다. 이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주제들이다.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과정을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다. 그래서 저자가 조곤조곤 얘기하는 인도네시아의 삶의 모습들이 가깝게 다가온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가장 큰 주제는 이슬람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민주적, 합리적인 종교로 만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율리아는 호주인 이슬람학자와 결혼한 인도네시아 무슬림 여성으로서, 이중의 편견에 맞서 목소리를 내려 애쓰고 있다.
첫째는 이슬람 보수파들을 향한 것이다. 이슬람은 여성들을 탄압하고 성(性)을 억압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러니 종교의 겉치레에서 벗어나 이슬람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 중 큰 줄기를 차지한다. “꾸란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율리아의 주장은 그런 의미다.
두 번째는, 이슬람을 ‘여성을 탄압하는 나쁜 종교’로 보는 외부의 시선을 향한 것이다. “이슬람의 본질은 그렇지 않다, 이슬람이 문제가 아니라 이슬람을 빙자해 테러와 폭력을 저지르는 자들이 나쁜 것이다.” 그러면서 율리아는 이슬람의 폭력성을 들쑤시고 부추기는 서방의 오만함을 질타한다. 율리아는 특히 여성학자로서 젠더·섹슈얼리티의 문제를 이슬람권에서 어떻게 관용적으로 다뤄야 하는가를 설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판에 박힌 이슬람 옹호론을 벗어나 발랄한 사고를 선보인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슬람과 여성’이라는 주제는 아프간 탈레반 집권 이래 서방에서 줄곧 제기해왔던 문제였다. 1996년 이슬람 순니파 극단주의자 그룹인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하고 여성들에게 ‘부르카’로 알려진 검은 옷을 입히면서 이슬람 여성의 문제가 ‘글로벌 이슈’로 부상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르카’는 검은 베일에 갇혀 얼굴과 목소리와 몸짓을 잃고 사회적으로 존재 자체가 지워져버린 이슬람 여성의 상징이 됐다.
이슬람은 여성을 억압하는 종교인가? 그렇다면 그 억압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이슬람의 여성차별은 꾸란에 규정돼 있는 것인가 아니면 무슬림들이 꾸란을 곡해하면서 나타난 현상인가?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가 될 것이다.
이슬람은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교는 물론 아니다. 이슬람 옹호론자들은 율리아처럼 “꾸란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며 꾸란에는 여성들에 대한 ‘배려’와 ‘보호’ 혹은 ‘재산권 인정’ 등을 규정한 내용이 들어있다고 말한다. 예언자 무하마드의 아내가 돈 많은 과부로서 경제권을 쥐고 있었다는 점을 예로 들기도 한다(율리아의 글에도 등장하는 소재다). 어떤 이들은 여성들에게 베일을 씌우는 풍습 등 ‘이슬람의 여성차별’로 알려진 관행 상당수가 아랍인들의 유목생활에서 온 잔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유를 이슬람 교리 자체에서 찾든, 아니면 아랍의 부족문화 유산에서 찾든, 이슬람 여성들이 탄압을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터키, 요르단 등지에서 자주 일어나는 ‘명예살인’은 대표적인 예다. 몇 해 전 파키스탄 동부 펀자브 주에서는 40대 남성이 4세부터 25세까지의 네 딸을 아내 앞에서 모두 흉기로 살해하는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유는 단 하나, 큰 딸이 바람을 피웠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프간 남부에서는 지금도 탈레반 추종세력들이 여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염산을 퍼붓는 테러를 가한다. 극단주의자들의 공격, 혹은 극단적·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이슬람권에서 드물지 않게 나타나는 ‘구조적인 범죄’들이다.

‘히자브’ 논쟁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슬람권의 여성들이 쓰는 머리수건을 보통 ‘히자브’라고 부르지만 형태에 따라 명칭이 조금씩 다르다. 얼굴까지 내놓는 검은 겉옷은 ‘아바’라고 부른다. 율리아의 글에 나오듯 인도네시아에서는 ‘질밥’이라 한다. 이란 문화권에서는 몸을 모두 덮고 얼굴만 내놓는, 혹은 얼굴까지 가리는 검은 겉옷은 보통 ‘차도르’라 불린다. 아프간의 ‘부르카’는 여성의 눈까지 모두 망사천으로 가려 밖을 제대로 볼 수도 없게 만든, 극단적인 형태의 차단막에 해당된다.
부르카든 질밥이든 개인이 원하면 쓸 수 있다. 유럽에서는 몇 년 전부터 히자브가 이슬람의 여성탄압을 상징하는 것이라 해서 ‘사회적 가치관에 위배된다’‘정-교 분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공공장소 착용을 금지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프랑스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무슬림 이민자들이 히자브를 마음대로 입을 권리를 달라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민자 2세인 무슬림 여성들은 “우리가 원해서 히자브를 쓰고자 하는 것”이라며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고 싶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국내에서도 여러 언론들이 이를 다뤘지만, 논점은 대략 ‘이슬람의 여성탄압이 문제냐, 유럽 우월주의 잣대가 문제냐’ 하는 것으로 모였다. 서구가 이슬람을 대할 때 보여준 오만함에 반감을 느끼는 이들 사이에서는 은근히 ‘히자브 착용론’을 옹호하는 분위기까지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맹목적 반미론자들처럼 ‘미국의 적은 우리 편’으로 보거나, 대테러전쟁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해서 이슬람의 억압적 기제들을 ‘문화적 다양성’으로 편들어주기만 할 수는 없다. 수억 명의 무슬림 여성이 자의로 머리수건을 쓴다 하더라도 히자브 혹은 차도르, 부르카, 질밥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살해 위협을 받거나 탄압받는 사람이 단 몇 명이라도 있다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존중한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
이슬람권의 여성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슬람이 서구의 지배적 종교인 기독교에 비해 ‘현대화’가 늦어졌음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 같다. 이슬람이라는 종교 자체보다는 이슬람국가 내부의 사회경제적 모순 구조가 약자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져 여성에 대한 린치와 테러가 일어나는 측면이 많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자(혹은 국가/사회제도)들이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슬람 국가들은 대개 동성애자를 극형으로 처벌하고 있으며, 에이즈에 대해서도 “부도덕한 자들에 대한 하늘의 징벌”이라는 시각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슬람과 여성, 이슬람과 마이너리티에 대한 주제는 어렵고 복잡하다.

이슬람의 여성차별·마이너리티 탄압과 인권침해는 뿌리 깊은 문제인 동시에, 비교적 최근에 두드러져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기도 하다. 이 역설은 최근의 ‘근본주의화’ 현상과 관련 있다.
이집트, 이라크, 이란 등 이슬람권 주요 국가들은 아주 최근까지도 종교와 거리를 둔 세속주의 근대 국가였다. 독재와 분쟁 등의 문제는 있었을지언정, 탈레반 치하의 아프간 같은 극단적 이슬람주의로 인한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슬람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지금도 여성이 운전을 할 수도, 사회생활을 할 수도 없는 국가이지만(여성 뿐 아니라 모든 이들의 정치적 자유가 없다는 점에서 이 나라는 모든 국민을 억압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아랍-이슬람권 국가들은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뒤 그들 나름의 근대화 과정을 걸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근대화 과정은 정치,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극도로 왜곡됐다는 점에서 서방의 궤적과는 차이를 보였다. 이 지역의 독재는 냉전 구도의 부산물이기도 했다. 냉전 체제가 끝난 뒤 이슬람권의 변두리 격인 아프간에 탈레반 정권이 등장한 데에서 보이듯, 근본주의화 현상이 퍼지기 시작했다.
율리아가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만 보더라도, 헌법상으로는 ‘이슬람 공화국’이 아닌 세속주의 국가여서 이슬람을 포함한 5개 종교를 공식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인구로 보면 세계에서 무슬림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다.
인도네시아는 좌파 민족주의에 경도됐던 수카르노 초대 대통령 시절부터  1999년 쫓겨난 수하르토 독재정권 시절에 이르기까지 정-교 분리를 엄격히 지켰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이슬람 세력의 목소리가 강해지고 있다. 특히 9·11테러 이후 미국이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면서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지에서 넘어온 이슬람 과격세력들의 활동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2002년과 2005년의 발리 연쇄테러, 2003년 자카르타 JW매리어트 호텔 폭탄테러 등은 이 과정에서 벌어진 초대형 테러사건이었다.

극단주의가 민주화를 비집고 들어오는 현상은 인도네시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세속주의 독재 혹은 권위주의 통치에서 민주주의로 어렵사리 옮겨가고 있는 이라크, 이집트, 터키 등 이슬람권 여러 나라들이 모두 비슷한 진통을 겪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안정된 말레이시아에서도 이슬람주의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 2000년대의 현실이다.
이렇게 이슬람 근본주의의 영향력이 커져가는 것을 가리켜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이슬람권의 사우디아라비아화(化)’라 부르기도 했다. 현대화된 도시의 이슬람이 오히려 퇴조하고 사우디 오일달러에 힘입어 ‘사막의 이슬람’ 즉 전근대적이고 교조적, 극단적인 교리가 이슬람 문화권을 질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의 ‘밖’을 향한 공격을 상징하는 것이 9·11 테러였다면, ‘안’을 향한 공격은 주로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을 노린 것이었다.
그래서 이슬람의 여성탄압은 전근대적인 종교·제도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탈냉전기 이슬람권의 사회변화와 연결된 ‘새로운 현상’이기도 한 것이다. 율리아 역시 인도네시아 사회가 ‘민주화’와 함께 어떤 왜곡을 겪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시민사회에 대한 공격은 인도네시아를 비롯해 세계 곳곳 이슬람권으로 퍼지고 있다. 이 점에서, 이슬람의 전근대성을 질타하는 미국과 서방도 근본주의화에 일단의 책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답답함을 느꼈던 부분도 적지 않았다. ‘율리아의 지하드’라고 했지만, ‘왜곡된 이슬람에 맞서기 위한 한 여성학자의 성전(聖戰)’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온건하고 너무 모호한 게 아닌가 싶은 부분이 많았다.
율리아는 이슬람 사회를 비판한다면서도 극히 온건하고 부드러운, 에둘러가는 표현을 쓴다. 심지어 ‘이슬람’이라고 명시하는 대신 ‘종교’라는 말로 대신하며 피해가기도 한다. ‘이슬람 극단주의’라 쓰지 않고 ‘종교적 극단주의’ ‘종교적인 문제’ ‘종교적인 보수파’라 바꿔 부르는 식이다. 이런 것들이 좀 더 강력한 ‘내부로부터의 목소리’를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조금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율리아가 처한 상황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율리아는 이슬람 보수주의를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가 극단세력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지에서는 율리아 같은 여성 비판론자들, 여성 지식인들에 대한 테러가 수시로 일어난다. 이 점을 고려하면서, 율리아의 글에 나타난 이슬람 비판의 강도를 머리 속으로 조율해가며 읽을 필요가 있다.
또 한 가지 짚고 싶은 것은, 이 책은 주로 ‘인도네시아의 이슬람’에 대한 것이지 ‘이슬람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 쓰여진 책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슬람권에도 여러 갈래가 있고 나라마다 독특한 문화가 있다. 인도네시아는 특히 열대의 섬들로 이뤄진 나라다. 사막의 유목문화에서 출발한 아랍 ‘본토’의 이슬람과 인도네시아 이슬람 문화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일례로 라마단 끝 무렵 고향을 찾아가는 인도네시아의 르바란 문화는, 농경문화가 약하고 추석이 없는 아랍의 라마단 명절 풍습과는 다소 다르다.

책의 전반부가 이슬람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글들이었다면, 뒷부분은 인도네시아의 근현대사가 어떻게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수하르토 정권의 억압 메커니즘은 여전히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그것은 인도네시아인들의 일상생활을 지금도 구석구석 지배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도 독재정권의 그늘이 가시기는커녕 최근 들어 오히려 억압통치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과거사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인도네시아에서 한 여성 지식인이 느끼는 참담함이 2부와 3부의 신랄한 글들로 묶여져 있다.
스스로 서문에서 밝혔듯 율리아는 인도네시아 사회의 상류층이다. 외교관 부모 밑에서 유럽을 돌며 자라났고, 서구식 교육을 받았다. 호주인 교수 남편을 둔 유명 칼럼니스트다. 그의 글에선 운전기사, 가사 도우미, 자신이 살고 있는 자카르타 교외의 고급 주택단지가 종종 등장한다. 자카르타 교외에는 별도의 경비인력을 둔 상류층 주택단지, 이른바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 들이 많이 형성돼 있다. 율리아는 인도네시아 사회를 굉장히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그의 글에서는 어쩔 수 없이 부르주아 의식이 엿보인다. 특히 자기 집에서 부리는 사람들에 대한 표현들이 국내 독자들에게는 다소 거북살스러울 수도 있겠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서 읽는다면 훌륭한 인도네시아 안내서, 이슬람 안내서가 될 듯하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04-29 0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9-04-30 14:13   좋아요 0 | URL
^^
잘 지내지?

구본씨 2009-04-30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 축하해. 재미있겠군. 이런 책들이 어느 정도 팔려줘야 하는데 국제화 시대에 맞게 말이야.

딸기 2009-05-01 09:39   좋아요 0 | URL
편집자가 매우매우 훌륭하게 <깊이보기> 코너들을 중간중간 넣어줘서, 책이 잘 나왔어.
이슬람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들을 소개하는 안내서 성격으로.

군자란 2009-05-02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읽었던 이슬람의 세계사1,2를 읽으면서 이슬람의 신앙방법이나 기독교의 신앙방법이나 이름만 다를뿐 거의 같다고 해도 틀린말이 아닐듯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저와 가까이 지내던 친구와의 이별을 통해 곰곰히 생각해보면 종교라는 문화 자체가 죽음을 먹고존재하는 인간사회의 기본적인 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람이라는 존재에게 사후세계란 거의 무방비상태의 무장해제를 해버리는 기능이 있어서 거의 종교라는 존재는 본능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마음을 가끔씩 들여다 보면 그 생각이 정말 실감이 날정도로....누군가의 책에서 들은 말이 생각납니다.종교란 한번 걸려들면 마치 치명적이고 헤어나올수 없는 덪이 아닌가

딸기 2009-05-05 14:04   좋아요 0 | URL
이슬람의 세계사 재미있나요? 한번 보고는 싶은데...
종교에 대한 말씀, 저도 공감합니다. 본능적인 것일 수 있지요. 하지만 본능을 따르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도 해요. 종교의 부작용;;에 아주 신물 느끼고 있거든요, 요즘. ^^

군자란 2009-05-06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는 있어요.읽을려면 초등학교 지도책정도는 옆에 끼고 읽어야 됩니다.....

딸기 2009-05-07 09:0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는 지도보는 것이 일인 걸요 ^^

hnine 2009-05-09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딸기님이 번역하셨군요 ^^
이제 봤어요.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이렇게 결과물로 나온 것을 볼때 뿌듯함이 참 크시겠어요.
축하드립니다.

딸기 2009-05-09 21:49   좋아요 0 | URL
네, 그런데 책의 절반은 편집자가 만들었어요. 대단히 능력있는 편집자... 존경하고 있답니다 ^^
그리고 저기 올려놓은 것은, 정확히 말하면 <책의 내용>은 아니예요. 책의 내용에 대한 보충 성격의후기랄까요.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 1
츠츠미 미카 지음, 고정아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 제목이 그럴싸하다.
책은 얇지만 내용은 기대 이상이다. 신문 서평에서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책’이라는 평가를 이미 보았던 탓에 기대치가 적당히 높아져 있었는데, 분량에 비해 아주 제대로 된 르포였다.

말 그대로, ‘빈곤대국 아메리카’. 세계에서 가장 강하면서 가장 취약한 나라, 가장 부자면서 가장 가난한 나라. 출발점은 지난해 미국을 강타한 금융위기, 아니 그 전 해에 이미 터져 나왔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미국의 주택 분양이 침체에 빠져들기 시작했을 때 업자들이 새로이 주목한 대상은 국내에 증가하기 시작한 불법 이민자와 저소득층이었다. 파산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신용카드를 만들 수 없는 사람들이라도 얼마든지 주택 융자를 받을 수 있다고 떠들어 대면서 고객을 확보했던 것이다. …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는 단순히 금융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과격한 시장원리가 경제적 약자를 희생양으로 삼은 ‘빈곤 비즈니스’의 하나였다.”

도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유학하고 9·11을 거쳐 미디어들이 존재의 근원부터 훼손당하는 것을 본 저자는 저널리스트가 되어 미국 사회의 현실을 일본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그는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 이를 테면 앞서 인용한 서브프라임 문제라든가 이라크전 참전군인 모집난 등을 ‘빈곤사회’의 구조와 연결짓는다.
그의 눈에 비친, ‘가려진 연결고리’는 명확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어 목숨줄이라도 내다팔아야 할 처지로 몰아붙이는 ‘신자유주의-민영화-폭주하는 자본주의’가 이 모든 사태들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2005년8월 미국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천재(天災) 아닌 인재(人災)’라는 이야기는 많이 나왔다. 저자는 연방재난보호청(FEMA) 전직관리들의 말을 통해,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얼마나 계획적, 구조적으로 재난구호를 ‘민영화’했는지를 추적한다.
많이 알려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충격적이다. 루이지애나 남부의 ‘흑인 빈민층’을 정부가 완벽하게 무시해 떼죽음으로 몰아붙였다는 것도 충격적이고, 부시는 재난이 났을 때 ‘의료사업 민영화’를 홍보하러 다니고 있었다는 것도 충격적이고, 재난을 맞아 삶의 터전을 잃은 아프리카계 빈민들을 정부가 또다시 저버렸다는 것도 충격적이다. 하지만 이 젊은 여성 저널리스트가 포착한 루이지애나의 현실 중 가장 처참한 것은, 재난을 맞은 그 땅이 이제는 부자들의 투기장이 되어가고 있다는 후일담이었다.
“루이지애나 주 배턴루지 시에서 선출된 리처드 베이커 하원 의원은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개답했다. ‘마침내 뉴올리언스의 빈곤자용 주택이 정리되었다. 우리가 못 한 일을 신이 대신하여 해 주신 것이다.’ 인적이 사라지고 깨진 벽돌만 널려 있는 거주 지역에서는 저소득자용 공공 단지가 헐리고, 고급 콘도미니엄군과 쇼핑몰이 건설되었다. ‘저지대 제9구’와 같이 해발 밑에 있는 빈곤 지구의 일부를 부 유층 지구를 지키기 위한 저수지로 개조하려는 계획도 이미 추진되고 있다.”

미국의 의료체계가 얼마나 망가졌는지에 대한 고발들은 점입가경이다. 망가졌다 망가졌다 하지만, 이 책에 드러난 구체적인 실태를 보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행여라도 미국에 거주해야 할 일이 생기지 않기만을 바라야겠다. 부시가 내세운 이른바 ‘교육개혁’이 어떻게 ‘이라크 파병’으로 이어졌는지는 더 충격적이다.
“낙오학생방지법은 표면상으로는 교육개혁이지만 그 안에 이런 항목이 있어요. ‘미국의 모든 고등학교는 학생의 개인 정보를 군 모병관에게 제출하라. 만일 이를 거부할 시에는 후원금을 중단하겠다’고 말이에요.”
현직 교사가 들려준 말이란다. 책의 중반부터는 ‘파병’-‘모병’과 가난이 미국 사회 안에서 어떤 사슬로 묶여있는지를 파헤친다. 가난한 미국인들, 혹은 미국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불법이주자들은 미군에 등록하고 이라크에 간다. 가서, 죽거나 다치거나 정신질환자가 되어 돌아온다. 문제는 이것이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얼마 전 한 신문에서 읽은 기사가 생각난다. 미국에서 시민권을 주겠다며 외국인 병사들을 미군으로 불러 모았는데 합격한 사람들 중 절반이 한국어 사용자, 즉 한국인이었다는 보도였다. 아메리칸이 되기 위해 기를 쓰는 한국인들이 어디 한둘이랴마는.

츠츠미 미카는 미군 병사가 되어 전장으로 가는 미국인들, 불법이주자들, 미국의 ‘전쟁산업 민영화’에 맞춰 파견직으로 이라크에 보내지는 가난한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의 대열에 합류하는 제3국의 가난한 이들의 사연들을 모아 들려준다. 네팔 등지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알선료까지 내고 ‘속아서’ 혹은 ‘알면서도’ 이라크에 가서 총알받이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자국 내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군인들을 충원할 수 없게 된 미 국방부가 하는 짓이 저런 것이다. 이라크에서 어처구니없게 희생된 김선일씨가 일했던 회사가 ‘켈로그 브라운 앤드 루트(KB&R)’의 하청업체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숱한 전쟁산업 파견근로자들도 바로 그 회사, 딕 체니가 경영했던 핼리버튼의 자회사인 KB&R과 연결돼 있다.
저자가 인터뷰한 이라크 파견자 중에는 ‘제3세계 빈민’ 뿐 아니라 일본인도 포함돼 있다. 우익들의 평화헌법 수정운동이 한창인 나라 일본,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부자 나라 일본 사람이 이라크로? 2005년에 실제로 일본인이 이라크에서 숨진 적 있었다. 파병도 안 했는데 왜? 신문 사진에서 본 그 일본인은 깍두기 헤어스타일에 다부진 체격의 젊은 남자였다. 아마 용병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세계의 빈민들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 이라크 전쟁”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하지만 이라크로 가는 군인과 민간인들 모두에게 남는 것은 병들거나 다친 육체, 그리고 다시 되돌아온 가난뿐이다.
미국 정부가 교육재정을 줄이고 장학금을 삭감하면서, 등록금 때문에 빚더미에 앉고 신용불량자가 된 대학생들이 넘쳐난다. 이런 가난한 대학생, 가난한 고등학생들은 군인 사냥꾼들의 주요 공략 대상이다. 참 대단한 모병제의 나라다. 여기서 얼마 전 미국 언론에 실린 또 하나의 기사가 겹쳐진다. 군 모병관들이 ‘군인 모집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하는 케이스가 늘고 있다는 거였다.
아니, 신병 모집이 얼마나 힘들기에 죽기까지 해? 그 답이 이 책에 나와 있다. 가난한 이들이 군인이 되어, 자기 나라에 붙어 있으려고 모병관의 길을 택한다. 모병 실적이 좋지 않으면 이라크에 끌려간다! 이것이 세계 최강 미군의 실태라니 허망하다 해야 하나.
책 표지에는 기나긴 설명이 붙어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른 극단적인 민영화의 폐해와 실상, 국민의 생존권과 관계된 분야까지 시장원리를 끌어들인 미국의 현실태가 전하는 경고!” 더 말해 무엇 하랴. 한국 정부는 미국 부시행정부가 했던 한물간 신자유주의 돈 놀음을 더 신이 나서 따라하려고 지랄을 떨고 있다. ‘빈곤대국 아메리카’가 ‘빈곤대국 대한민국’으로 재연되는 모양을 지켜보려니 기가 차다.

(번역에는 문제가 좀 있다. 일본어를 그대로 옮겨서 국방부를 ‘국방총성’이라 반복해 표기한 것은 매우 눈에 거슬린다. 이 책 뿐 아니라 아직도 상당수 책들, 그리고 한국 학자들이 ‘국방성’, ‘외무성’, ‘수상’ 같은 말을 쓴다. ‘국방부’, ‘외무부’, ‘총리’다. 런던 ‘경시청’이 아니고 ‘경찰청’이다. 이 책에는 ‘유유아’라는 말도 나온다. 乳幼兒를 그냥 발음대로 읽은 것 같은데 우리 식으로 하면 ‘영유아’다. 우라늄을 일본식으로 ‘우란’이라 거푸 쓴 것도 짜증난다. 그 정도는 알고 번역해줘야 하지 않나.)

댓글(6)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주미힌 2009-04-21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아.. 땡기네요... 근데 마지막 괄호 안의 내용은 윽윽윽 ;;;

딸기 2009-04-21 17:20   좋아요 0 | URL
전반적인 번역 문장은 괜찮아요. 제가 트집을 좀 잡은 거예요. ^^

구본씨 2009-04-21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래도 유유아나 우란은 결코 용서해서는 안돼.
저건 번역 이전에 편집자의 기본을 엿바꿔 먹은 것이야.
일본 경찰에서 경시청은 도쿄뿐. 나머지 도시는 경시청이 아닌데 다 경시쳥으로 쓰는 책들도..

딸기 2009-04-22 09:12   좋아요 0 | URL
좀 그렇지? '국방총성'에서 허걱하고, '우란'에서 완전히 깼어.
그것도 그냥 우란이 아니라 '열화 우란'... ㅋㅋ

[해이] 2009-04-22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번역과 교열에 조금 문제가 있나봐요^^ 섬세한 지적 도움이 많이 될듯

딸기 2009-05-12 18:15   좋아요 0 | URL
문제가 좀 있었지요... 아쉬운 부분이예요. 그래도 책은 재미있었어요. :)
 
평등해야 건강하다 - 불평등은 어떻게 사회를 병들게 하는가
리처드 윌킨슨 지음, 김홍수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의 질은 중요하다. 건강해야 행복하고, 행복해야 건강하다. 잘 살아야(돈도 좀 있어야) 건강도 행복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먹고 살만해진 지금 우리는 왜 건강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고 느끼는 걸까. 아니,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는 점점 많은 질병과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저자는 우리가 “불평등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얼핏 당연한 얘기인 듯도 하고, 얼토당토 않은 얘기인 듯도 하다. 당연한 얘기로 들리는 것은 우리가 이미 경험적으로, 느낌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가난할수록 보건 혜택도 못 받고 하루하루의 스트레스도 많은 것은 당연하다. 아프리카의 영유아 사망률만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얼토당토않은 주장처럼 들리는 것은, 앞서 말한 ‘당연한 이유’에는 함정이 있기 때문이다. 가난하면 건강하기 힘들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늘날 부자 나라로 불리는 미국 같은 나라(우리도 마찬가지이겠지만)에서조차 건강과 행복이 마구 증진되지 않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그것이 상대적 박탈감 같은 불평등과 관련 있다고 하면 너무 심리 지향적인 해석처럼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돈이 없다고 꼭 일찍 죽으란 법도 없다. “가난하지만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는 그 많은 이야기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사회적 불평등이 ‘건강 불평등’을 낳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우선 저자는 사회적 불평등과 건강 불평등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다양한 통계조사들을 검토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불평등은 대략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사회적 지위 격차, 즉 ‘권력의 격차’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더 많은 질병에 시달린다. 말단 공무원이 고위공무원보다 심장병에 걸릴 확률이 4배 이상 높다는 영국의 연구결과도 있다. 두 번째는 소득 불평등이다. 비록 소득의 총량에서는 6% 정도의 차이 밖에 없을지라도, 이것이 ‘상대적 박탈감’으로 이어질 때에는 40~50%의 격차 효과를 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가 실려 있다. 세 번째는 빈약한 사회적 관계다.
사회적 관계는 ‘사회적 자본’이라는 말로도 불린다. 경쟁적, 공격적인 사회 분위기에서는 소외감과 모욕감이 커지고 사회적 자본 즉 관계가 깨져나간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연결돼 있다. 하나가 다른 하나의 원인 혹은 결과가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연결된 사회적 불평등이 총체적인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권위적이고 상하 간 권력 불평등이 크고 경쟁적인 분위기의 사회에서 권력-부(富)의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있는 ‘낮은 지위의 사람들’은 병에 걸려 죽을 확률이 높아진다. “마음이 병을 만든다”는 통념을 넘어, 저자는 진화심리학적 연구들을 분석해 인간이 타인을 의식하고 서열을 의식하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수치심과 열등감을 느끼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나 마찬가지다. 남성들의 경우 폭력성이 증가하고 여성들은 우울증이 늘어난다는 현상적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지위/서열로 인한 스트레스를 경험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책은 이를 보여주기 위해 영장류 사례 연구와 사회심리학 스터디들을 검토한다.

불평등이 스트레스를 가져온다는 점을 진화심리학으로 설명한 저자는, 스트레스가 질병으로 이어지는 메커니즘을 규명하기 위해 생리의학적 연구들을 동원한다. 이를 테면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에게는 ‘투쟁-도주 메커니즘’이라는 생리학적 기제가 있다. 위기를 느끼면, 즉 스트레스를 받은 인간은 생체 자원의 배치와 생리적 우선순위를 바꾼다. 몸의 생리작용은 에너지를 근육활동에 집중시켜, 여차하면 싸우거나-혹은 도망치기 유리하게끔 대비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자원이 싸움-도주에 집중되는 동안 생체 조직의 유지·치유와 면역, 성장, 소화와 재생산 능력은 저하된다.

“그런데 몸싸움이나 도주가 필요 했던 과거와는 달리 현대사회에서는 정신적인 각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에는 지방조직으로부터 혈액으로 방출된 지방산이 사용되지 않아 혈관에 콜레스테롤이 쌓인다. 따라서 지속적인 무기력과 근심은 심장질환의 발병률을 높인다."

“문제는 스트레스에 짓눌려 있는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는 경우다. 우리의 육체가 경계 상태나 생 리적 각성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 자원 분배의 우선순위가 바뀌어 버리면, 건강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만성 스트레스 상태는 급속한 노화와 비슷해서 다양한 질병에 대한 면역력을 전체적으로 화시키며, 인간을 외부환경에 취약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를 받으면 에너지의 축적, 소화, 성장과 관련된 부교감 신경계가 활성화되지 못하고 교감 신경계만 활성화된다. 이 또한 심장 박동을 빠르게 하고 피가 근육으로 흐르게 만드는 효과를 낸다.

“스트레스에 대한 또 다른 생리적 반응은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생물학적 우선순위를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며, 인슐린만이 아니라 성장 호르몬과 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 테스토스테론 같은 재생산 호르몬의 분비도 억제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스트레스가 면역 체계를 파괴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주로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축을 통해, 그리고 교감 신경계의 지나친 활성화를 통해 이뤄진다.”

“불안이나 생리적 각성 상태가 몇 주, 몇 달, 몇 해에 걸쳐 너무 자주 발생했을 때 건강에 미치는 위험은 단순히 생리적 우선순위가 바뀌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는다. 각성 상태가 일정 기간에 걸쳐 계속되면 정상치로 회복되는 피드백 메커니즘이 파괴되어 버린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생겨나는 코르티솔 수치를 제어하는 피드백 센서가 무뎌진다는 뜻이다. 피드백 센서가 둔해지면 긴급한 상황이 생겼을 때 코르티솔의 반응도 둔화된다.”


코르티솔수치가 높아지면 인슐린의 신호가 억제된다.

“보통 만성 스트레스의 부작용이 누적되었을 때 신체가 지불해야하는 생리적 비용을 ‘알로스타 부하’ allostatic load라고 부른다. 이는 코르티솔의 기본수치와 혈압이 높으며, 인슐린 저항을 유발시키고, 혈액이 쉽게 응고되며, 복부 비만과 면역 기능이 감퇴하는 현상을 포함하고 있다. 알로스타 부하가 클수록 심혈관 질환, 암, 감염성 질환에 걸릴 위험이 높고, 나이가 들었을 때 정신적 기능이 빨리 저하된다.”

길게 인용했는데, 사회적 스트레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건강과 행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저자는 ‘평등해서 건강하고 불평등해서 건강하지 못한’ 사례들을 펼쳐보인다.
대표적인 예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이탈리아인 집단 거주지였던 로세토 마을이다. 상대적으로 전통 문화와 주민들 간 유대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던 이 지역 이탈리아인들은 주변 다른 주민들이나 다른 지역의 이탈리아인들에 비해 건강했다. 그러나 미국식 문화에 점차 젖어들고(이탈리아 문화가 미국 문화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미국 문화에 동화되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작용했다는 뜻이다) 유대관계가 깨지고 소수민족이라는 스트레스가 커지면서 건강도도 낮아졌다.
더 분명한 사례는 동유럽일 것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아 센은 1980년대 동유럽 연구를 통해 상대적으로 평등했던 동유럽 사회가 비슷한 경제수준의 다른 사회보다 건강 면에서도 훌륭했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사회주의 붕괴 뒤 ‘건강의 구조’는 모두 무너져 내렸다.
카스트제도 등으로 인한 차별이 어느 나라보다 심하다는 인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인도의 케랄라 주는 다른 지역에 비해 카스트와의 싸움이 많이 진전됐고, 토지개혁과 교육확대, 빈민 보조, 여성권익 향상 등에서 다른 지역보다 앞서 있었다. 케랄라 주의 평균수명은 1인당 GNP가 1000달러 안팎이던 1990년대 후반에도 미국보다 3, 4년 정도 짧은 수준으로까지 높아졌다고 한다.
한국의 사례도 등장한다.

“사실 정부와 통치자들은 항상 소득 분배와 사회 통합이 서로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건전한 직관을 가지고 있다. 사회를 통합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정부가 전략적으로 평등주의적 정책을 도입했던 사례들도 많다. 한때 ‘아시아의 호랑이’로 불리면서 빠르게 성장했던 아시아 국가들은 모두 1960-80년대에 소득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이들8개국(일본, 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은 세계은행이 ‘동반성장’이라 부르기도 했던 정책 하에서 급격히 성장했다. 세계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이 8개국 정부들은 정당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서 대중의 승인과 지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예를 들어 한국은 북한이라는 경쟁자가 있었고, 대만과 홍콩은 중국 본토와 관련해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다는 것이다. 일본도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기득권을 가진 세력들의 위세가 꺾이면서 급속하게 평등주의적으로 변모했다.”


책은 다양한 사례들을 촘촘히 분석하고 여러 분야를 가로지르는 연구 성과들을 종합한다. “불평등의 사회학”에 대한 과학적 해설이라 보면 되겠다. 현실적인 함의는 분명하다. 우리가 부국에 살든 빈국에 살든 ‘평등한가 그렇지 못한가’는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미국 50개 주를 대상으로 각 주의 소득 분배 정도와 개인의 소득 수준에 따른 사망률을 조사했더니 불평등한 주에 빈민층이 많아서 건강 수준이 미국의 전체 평균보다 낮아지는 현상은 불평등과 건강의 관계를 3분의 1 밖에 설명하지 못했다. 소득 불평등과 건강의 관계를 설명해 주는 나머지 3분의 2는 건강에 미치는 불평등의 맥락효과였다. 다시 말해 어떤 수준의 소득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더 불평등한 사회에서 생활한다면 평등한 사회에 사는, 자신과 비슷한 소득 수준을 가진 사람보다 사망률이 높게 나타났던 것이다.”

역으로, 종업원 지주제를 확대해 노동자들의 결정권을 높이고 민주적인 기업구조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직장 내의 스트레스는 확 줄어든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불평등을 제거하기 위한 작은 노력(그러나 굳은 정치적 의지를 필요로 하는) 만으로도 사람들의 건강을 증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건강과 심리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 빈곤의 물질적 측면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물론 아니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심리사회적 요인은 빈곤과 소득 불평등을 척결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추가적인 근거이지 결코 반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덧붙여 사회적 위계질서와 불평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경제 성장 다음으로 한 사회의 성격을 결정하는 본질적인 요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불평등의 정도는 사회 전체의 구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됐든 뭐가 됐든, 불평등을 양산하고 사회를 균열시키고 인심 나빠지게 만드는 정책들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더 설명할 것도 없는 요즘의 우리 사회 모습이다. 생각보다 재미있게 읽었는데, 다 넘기고 난 뒤끝은 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약회사는 어떻게 거대한 공룡이 되었는가 - 전 세계 보건의료 체계의 일그러진 초상화
재키 로 지음, 김홍옥 옮김 / 궁리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책 참 별로다. 내용은 지지부진 중구난방, 번역은 지리멸렬. <질병판매학>과 <몸 사냥꾼> <인체시장> 등등 비슷하면서 조금씩 다른 책들이 많이 있는데 평점 주자면 <질병판매학>은 95점이고 이 책은 5점이다. 영국 미국 얘기 뒤죽박죽에,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왜 하는 건지, 그래서 어쩌자는 건지... 제목장사 너무 심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