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세계 - 미국 외교정책과 구질서의 위기, 그리고 한반도의 운명
리처드 하스 지음, 김성훈 옮김 / 매일경제신문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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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하스는 국제뉴스에서 꽤 자주 이름을 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포린어페어스'로 유명한 미국외교협회(CFR)의 회장이고, 미국 외교문제에 대해 유명 언론들에 적잖이 코멘트를 해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조지 H W 부시 시절에 백악관 특보와 국가안보회의(NSC) 중동-남아시아 담당 특보를 했다고 한다.


리처드 하스의 <혼돈의 세계>(김성훈 옮김. 매일경제신문사)를 읽었다. 부제가 '미국 외교정책과 구질서의 위기, 그리고 한반도의 운명'이라 달려 있다. 영어 제목은 A World in Disarray 이고 부제는 '미국 외교정책과 구질서의 위기'다. 한글판은 제목의 Disarray를 '혼돈'으로 옮겼고 부제에다가 '한반도의 운명'을 덧붙였다. 번역은 매끄럽다. 다만 번역자는 하스 스스로 "한국에서는 Disarray를 혼돈이라 해석한다고 어느 통역자에게 들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어서 '혼돈'이라고 번역했다는데, 이건 좀 이상하다. 하스는 chaos가 아닌 disarray라는 단어를 일부러 썼다고 서론에서 직접 밝혔고, 그가 책에서 줄곧 언급하는 H 부시 시절의 'New World Order'가 결국 현실이 되지 못했다는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부제도 사실 좀 과하다.


날카로움이나 통찰력같은 것은 많이 엿보이지 않았다.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이렇게 급변하고 있는 시점에, 지난해에 나온 이 책의 '북핵 위협'을 강조하는 서문을 읽자니 더더욱 그랬다. 냉전 시절의 사고방식에서 그다지 크게 벗어난 것도 아니고, 현실주의 노선의 기본틀에 머물고 있는데 그렇다 해서 로버트 카플란처럼 미처 알지 못했던 지구상 어딘가의 일들을 전해주는 것도 아니고. "냉전시절의 현실주의+21세기의 무질서 몇 가지=미국은 중국을 배제하지 말고 중국(그리고 러시아)와 협력해서 세계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되는 듯. 


책을 읽으면서 브레진스키를 여러번 떠올렸다. 기본적으로 강대국 간 힘의 균형(하스는 대놓고 '세력균형'을 얘기한다)을 중시하되, 미국이 단일패권국가는 아니지만 이 혼란한 세계를 관리하는 역할을 방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세계경찰 미국'의 역할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쪽에 서 있다는 점에서 니얼 퍼거슨 류와 비슷하기는 한데, 아들 부시 시절 막 나가는 미국을 예찬하는 쪽에 섰던 퍼거슨 식의 오만한 '미국 제국론'보다는 좀 점잔을 빼는 식이랄까. 


아버지 부시의 현실주의 외교노선을 칭찬하는 점도 브레진스키와 비슷하다. 브레진스키는 '보수적인 민주당 외교 원로'였지만 하스는 아버지 부시 시절 직접 외교에 관여했던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지 싶다. 그런데 정치적 스펙트럼과 상관 없이 브레진스키의 책에서는 세계를 진짜 크게 보는 원로의 느낌이 나는 것과 달리, 하스의 책에서는 그런 안목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두 사람 다 유대계인데, 특히 하스는 이스라엘을 미국이 밀어주고 편들어주는 걸 너무 당연하게 '옳은 길'로 제시하고 있다.


중국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만들 때 미국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딴지만 걸다가 결국 왕따가 돼 실기를 했고 "그 결과 미국은 이러한 시도에 대해 영향력을 잃었고 무기력해 보였으며 중국이 세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으려는 노력을 방해하려 한다는 인상만 많은 중국인들에게 주었다"고 진단한 부분, "그럼에도 전략적 맥락이 변화했고 중국의 국력이 절대적 상대적 측면에서 성장함에 따라 세력균형도 변화하고 있음을감안할 때 여전히 미중 관계가 놀라울 정도로 견고하다는 사실"(104쪽)을 언급한 것 등 몇몇 부분은 재미있었다. 


아버지 부시의 측근이었지만 하스 또한 아들 부시의 이라크 침공에는 혹평을 한다. 물론 그의 혹평 밑에는 도덕적 측면이나 이라크인들의 고통 따위는 깔려있지 않지만 말이다. 그저 그는 기술적인 문제만 짚을 뿐이다. "첫째, (오바마의) 미국은 주둔군 지위협정 개정을 통해 제한된 규모의 미군이 주둔할 수 있도록 하지 않고 계획대로 병력 철수를 추진했다. 둘째, 비록 알말리키 총리가 2010년 선거에서 다수표를 획득하지도 못했고 국가 전체의 이익보다는 시아파의 이익을 챙기는 편협한 종파주의자였지만 그럼에도 미국은 그에게 정치적 지지를 보냈다. (중략) 2003년에 전쟁을 개시하기로 한 결정과 그 이후 있었던 이라크군의 해산, 그리고 과도하게 많은 지배 정당 소속 인사들을 축출시키기로 한 결정이 가장 중대한 정책적 오류였다"(188쪽)는 것이다. 어찌 됐든 미국의 정책적 오류에 대한 이런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와 중국에 대한 생각은 '세력균형에 바탕을 둔 협력론'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같다. 그는 냉전 시대를 풍미한 조지 케넌의 '봉쇄' 개념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한다. 정작 케넌은 자신이 보고서를 만들었던 봉쇄 개념이 군사적 봉쇄와 대결로 향하자 회의를 품고 반대론자로 돌아섰다고 하지만. (사실 이 책보다는 몇 해 전 읽은 케넌의 책이 훨씬 재미있었다)


"나는 냉전시대 미국의 외교정책으로서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억누르려고 했던 봉쇄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 소련도 그랬지만 중국이든 러시아든 이념이나 지정학적 욕망이나 동기로 인해 자신이 통제하거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지역을 무한정 확대하고 싶어 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행동이 매우 유감스럽지만 전 세계를 지배하려는 첫 수순이 아니었으며 마찬가지로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태도도 그랬다. 오히려 러시아와 중국은 각각 정치적이면서 안보와 연관된 이해관계가 있고, 비록 이러한 이해관계가 아주 크기는 하지만 전혀 충족시킬 수 없는 건 아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거나 방향성이 설정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와 중국에 대해 '통합'이라는 정책이 한층 더 설득력 있다." (231쪽) 


이런 맥락에서 그는 특히 남중국해 문제에서 '미국과 친한' 나라들을 안심시키고 편드는 게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중국을 도발하지 않도록 억누르는 것도 미국의 주된 역할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외교적 상호의존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말은 달리 표현하자면 다른 강대국들도 지역적 혹은 글로벌 수준의 질서 형성과 운영 과정, 즉 정통성이 무엇인지 규정짓고 현실에서 정통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의미다. 이는 지정학적 통합으로서 몇 년 전 중국에게 제시했던 '책임 있는 이해관계자(responsible shareholder)'와 유사하기도 하지만 이 표현은 많은 중국인들에게는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동참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미국과 중국이 협력하여 이 시대에 통용될 수 있는 정통성을 형성하는 규범과 제도 창출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목표는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232쪽)


유엔 체제가 실효성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온갖 다양한 이슈별 지역별 중소규모 다자대화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갈수록 그렇게 되리라는 분석, 외교정책 수단으로서 '제재'를 활용할 때 미국이 염두에 둬야할 것에 대한 지적은 재미있었다. 관계가 안 좋아졌다 해서 정치경제사회문화를 몽땅 묶어 통째로 대립으로 끌고가지는 말아라, "러시아 또는 중국의 행동이 정당하지 않아서 제재를 해야 할 경우에도 양국 관계에 악영향을 주지 않아야 하고 다른 선택이 가능한 분야에서는 협력을 위해 가급적 좁은 범위에서 제재 조치를 취해야 한다"(233쪽)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오바마 정부는 참 어정쩡했다. 전면 대립을 바라는 것이 아니면서도 결과적으로는 협력의 길을 막는 길을 택했으니. 트럼프는? 하스는 "일단 상황이 해소되면 어떤 제재라도 조절과 해제가 용이하도록 고안돼야 한다. 여기에 두 가지 요소를 추가하고자 한다. 첫째, 제재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과 무력 사용 사이에서 쉽게 택할 수 있는 '안전한' 제3의 선택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를 통해서 봤을 때 제재만으로는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거의 없다. 둘째, 우방국이나 동맹국이 이런 저런 이유로 미국이 원하는 조치를 거부한다고 해서 제재가 이들과의 주된 갈등 요소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234쪽)고 말한다. 새겨들을 말인데, 국제정치에서 이를 면밀히 구분할 수 있는지는 좀 의문이다. 


중동 전문가인 그는 이란이나 이스라엘 문제에선 고전적인 시각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래도 눈길 끄는 게 있다면 이란을 현실로 인정하자는 것 정도. 이란을 압박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모든 수단(군사적 수단까지 포함해서!)을 동원하되, 이란을 무너뜨리거나 변화시키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란이 40여년 간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왔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이란을 개조하겠다는 시도는 비현실적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란이 점점 온건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 가능할지 몰라도 이런 변화만 기대할 수는 없다. 중국과 러시아를 다루는 방식과 유사하게 이란을 다루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과거에 아프간과도 일부 협력이 가능했던 사례처럼 선택적으로 협력하고 핵 분야에서 위험 방지 외교 활동을 하며 필요할 경우 제재를 동원하여 봉쇄하는 한편 이란 주변국에는 안보를 제공하고 이란이 중동지역 내 미국의 핵심 이익을 위협하는 경우에 군사조치 등 다양한 정책 수단을 활용해야 한다." (290쪽)


이란을 압박해야 한다는 걸 기본전제로 깔고, 그는 "이스라엘 지지"를 중동 정책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로 제시한다. "군사, 경제, 정보 지원을 유지하거나 선택적으로 증가시키는 수준 이상"으로 이스라엘을 밀어줘서 모든 역내 문제를 이스라엘과 논의하자는 것. '이스라엘=미국 사냥개' 주장은 언제까지 되풀이될 것인지.


"중동 지역 내 국경선의 현상유지를 미국 핵심 이익으로 설정하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오히려 가까운 시일 내에 중동 국가들이 자칭 국가라는 수많은 자치 지역으로 구성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의 경우에는 명목상으로는 중앙정부가 있지만 실제 통치하는 지역으로 볼 때는 그렇지 못하다. 국가라기보다는 자치주가 새로운 규범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와 같은 새로운 추세를 어떠한 공식 제도로 규정짓고자 해서도 안 된다. 1차 세계대전 종식 후 오스만 제국을 분열시켰던 파리평화회의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분열되는 선례를 따르려는 국가가 없거나 있더라도 아주 적을 것이고, 설령 그렇게 할 의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국경선을 어떻게 그을지에 관한 합의를 도출할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에 파리평화회의와 유사한 시도를 한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가까운 미래에 중동의 실상은 법적 현실이 아닌 실질적인 현실에 따르고 있을 것이다." (293쪽) 


전체적으로 저자의 톤은 모든 면에서 '현상 유지+관리'라고 보면 될 것같다. 테러리즘에 대해서도 "이제 테러리즘은 그동안 상당히 축적된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요소의 산물이자 소위 뉴노멀로 보아야 한다"면서 "테러리즘으로 성취할 수 있는 기대 수준과 성공 가능성을 낮춰서 테러리즘이 우리 일상생활의 근간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방, 보호, 원상회복 등의 요소가 조화를 이룬 지속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접근법이 필요하다"(288쪽)고 말한다. 일면 용감하고도 현실적인 발언이다. 이미 세계는 그렇게 돼 가고 있다. 다만 그것이 미국이나 어느 나라 정부 덕이 아니라 '시민들의 힘'이라는 점. 이 책의 저자 눈 앞에는 '시민'같은 존재는 전혀 없으니.


뒷부분에서 그는 '주권국가의 힘'이 약해지면서 무질서가 심화되는 시대에, 베스트팔렌 체제 이후 절대적인 것으로 인식돼왔던 주권이라는 개념을 오히려 확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권국가는 다른 국가나 정부에 대한 권리뿐 아니라 의무도 가져야 한다는 식으로 정통성의 개념을 발전시키고 이런 인식이 널리 지지받아야 한다"(240쪽)며 여기에 '주권적 의무(sovereign obligation)'라는 이름을 붙였다. 잘 와닿지는 않는다. 개념의 모호성도 그렇고, 그 개념을 어떻게 주권국가들에게 '의무화'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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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 공감 본능은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위해 진화하는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최재천.안재하 옮김 / 김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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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라는 제목을 가진 책 두 권을 연달아 읽었다. 제레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 The Empathic Civilization>(이경남 옮김.  민음사)는 매우 길었다. 840쪽, 양장본, 그야말로 벽돌책이다.


딱히 재미는 없었다. 이제 리프킨은 그만 봐야겠다. 이전의 책들은 대략 재미있었고 문제의식이 앞서나가는 것들이었는데 이번 책은 쓸데 없이 길다. 뭘 이렇게 길게 썼어... 뭘 이렇게 많이 인용했어... 그냥 기후변화, 환경파괴라고 쓰면 될 것들을 뭘 굳이 '엔트로피'라고 했는지. 


리프킨의 책에 인용된 또다른 <공감의 시대>(최재천 옮김. 김영사)는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생물학자 프란스 드 발이 쓴 것이다. 책 표지에 설명이 많다. '공감 본능은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위해 진화하는가', '이타성과 공정성의 생물학적 기원에 관한 탁월한 연구', '공동체의 생존에 필수적인 모든 사회적 가치는 공감 본능에서 비롯되었다'라는 문구와 함께 '타임 가장 영향력 있는 영장류학자' '디스커버 과학계 위대한 지성'이라고 쓰인 동그란 딱지도 그려져 있다.


프란스 드 발의 <공감의 시대>는 매우 재미있었다. 딱 내 취향. 책의 앞부분을 읽다 보니, 리프킨이 자기 책 기본 컨셉은 거의 여기서 가져다 썼구나 싶었다.


저자가 영장류를 지켜보는 사람인 까닭에 영장류 사례가 참 많이 나와 있다. 책의 내용은 인간이 '공감'을 진화시켜온 '동물'이라는 점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나는 인간 아닌 동물들 얘기가 재미있어서 그런 부분만 밑줄쳐가면서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생망이니 내 딸이 생물학자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영장류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신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꼬부라진 짧은 꼬리를 지닌 수려한 돼지꼬리원숭이들은 상당히 지능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동남아시아에서 건장한 수컷들은 흔히 농장 노동자로 고용되는데, 도시의 도로에서 이들을 마주치면 깜짝 놀라곤 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 뒷좌석에 인간이 아닌 승객이 진짜 사람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서 양옆으로 다리를 흔들거리며 지나간다. 농장으로 일을 하러 가는 중이다. 훈련받은 돼지꼬리원숭이가 야자나무 위에 올라가 아래에서 소리치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잘 익은 코코넛을 따서 아래로 떨어뜨리면 주인은 나무 아래에서 코코넛을 주워 담아 시장에 판다. (60쪽)


도킨스와의 일화도 나온다. 은근슬쩍 들이미는 유머가 꼭 영국식 유머코드같아 재미있는데, 네덜란드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말하고 쓰는 걸까? 


생물학자들이 유전자를 이기적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실제로 유전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도킨스가 의미한 바는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도킨스와 함께 관측탑에서 침팬지들을 내려다보며 토론하면서 더 분명해졌다.

배경을 잠깐 이야기하자면, 도킨스와 나는 각자의 책에서 서로를 비판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동물의 친절에 관해 시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고 했고, 나는 도킨스가 오해받기 쉬운 비유를 만들어냈다고 책망했다. 도킨스가 비이기적으로 아래에 있는 유인원들에게 과일을 던져주면서 우리는 재빠르게 공통점에 도달했다. 나는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말이 동물이나 인간의 실제 동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만 제대로 이해된다면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었고, 도킨스는 순수한 친절도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행동이 자기 운반체를 이롭게 하기 위해 선택된 유전자에 의해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고 동의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진화를 이끄는 것과 실제 행동을 이끄는 것을 분리하는 데 동의한 것이다. (66-67쪽)


시아망 Siamang은 커다란 검은 긴팔원숭이로 숲이 따뜻해지기 시작하면 나무 높은 곳에 올라가 노래를 한다. 이 소리는 새소리보다 훨씬 더 깊은 수준으로 나를 감동시키는 행복하고 감미로운 소리인데, 아마도 포유류가 내는 소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아망의 노래는 어떤 새의 노래보다도 더 장엄하다. 이들의 요란하고 거친 노래는 "인간이 아닌 육지 척추동물이 부르는 가장 복잡한 작품"이라고 일컬어지는 완벽한 합창으로 이어진다. 이런 듀엣은 다른 시아망들에게 '저리 가!'라는 말을 전달하는 동시에 '우린 하나야'라고 선포한다. (99쪽)


아주 오래전부터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씻기고, 데리고 다니고, 달래고, 보호한 어미들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간의 공감에 남녀 차이가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사회화 이전에도 잘 나타난다. 한 아기가 울면 다른 아기들이 따라 우는 것도 이미 남자 아기보다 여자 아기에게 더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나이가 들수록 성별 차이는 더욱 두드러진다. 두 살 난 여자아이들은 다른 아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 같은 나이의 남자아이들이 하는 것보다 더 걱정하며 대한다.

하지만 이런 점들이 수컷의 공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성별 차이는 보통 종형 곡선이 겹치는 형태로 나타난다. 즉 남성과 여성이 평균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상당수의 남성이 평균적인 여성보다 더 많이 공감하며 상당수의 여성이 평균적인 남성보다 덜 공감한다. (103쪽)


모스크바 주립 다윈박물관에 들어서면 진화론의 역사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놀랄 만한 것이 첫 번째로 전시돼 있다. 다윈과 대비되는 사상으로 자주 등장하는 프랑스 진화학자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의 실물 크기 조각상이다. (127쪽)


우리가 위대한 여성 영장류학자에 익숙하긴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는 용감한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편견을 뒤엎으며 숲속의 위험한 생물들 사이에서 생활함으로써 주목을 받은 일이다. 러시아인 나디아 코츠 또한 용감한 여성이었다. 하지만 코츠를 위협한 것들은 숲이 아닌 크렘린 궁전에 도사리고 있었다. 진화론은 비종교적인 세계관 덕분에 볼셰비키의 마음에 들었지만 유전적 변화라는 개념은 제외됐다. 코츠와 코츠의 남편이자 박물관장이었던 알렉산드르는 이 문제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가장 주된 일로 삼게 되었다. 부부는 가장 민감한 문서와 자료들을 지하실의 박제된 동물들 사이에 숨기고, 라마르크가 박물관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자리를 차지하도록 했다.

코츠는 서구에서 교조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과학자들이 동물의 마음에 대한 책은 나오는 족족 없애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코츠는 어린 침팬지 요니의 대리 엄마 노릇을 하면서 요니의 감성과 지성에 눈을 뜨고 마음을 열었다. 

"내가 눈을 감고 눈물을 흘리며 우는 척을 하면 요니는 즉시 놀이나 하던 일을 멈추고 내게 달려왔다. 마치 나쁜 놈을 찾는 듯 내 주변을 바삐 돌아다녔고, 내 얼굴을 쳐다보며 부드럽게 내 턱을 자기 손바닥에 가져다 대고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볍게 만지며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려는 듯했다.

코츠의 연구가 지닌 유일한 한계점은 너무 어린 침팬지 단 한 마리를 관찰했다는 점이었다. 코츠는 그 종이 성숙했을 때의 심리를 관찰한 적이 없었고, 침팬지들이 야생에서 사는 방식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코츠는 매일같이 요니와 함께했고 얻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에 거의 아무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침팬지를 면밀하게 볼 수 있었다. 

미국의 유인원 심리학 전문가 로버트 여키스가 통역을 통해 코츠와 대화하는 사진, 그리고 리센코와 스탈린에 의해 처형당한 여러 명의 과학자들을 기리는 음울한 초상화 전시관을 지나자 나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전시물과 맞닥뜨렸다. 요니가 간지럼을 타며 웃고 있는 사진과 좌절해 울고 있는 사진들, 그리고 나무 장난감들과 놀이용 밧줄들 한가운데에 요니가 서 있었다. 박제술은 최고 수준이었다.

처음에는 코츠가 사랑과 애정을 쏟았던 대상이 마치 아직도 살아 있는 것처럼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자연사박물관의 전통적인 방식을 따라온 부부에게는 요니를 보존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도 그 둘은 결혼 선물로 서로에게 보존된 동물을 주고받은 사람들이다. (128-130쪽)


쿠니라는 암컷 보노보가 동물원에서 자기 우리의 유리벽에 부딪혀 기절한 새를 발견했다. 쿠니는 새를 풀어주려고 한 나무의 꼭대기까지 데리고 올라갔다. 그리고 마치 작은 비행기처럼 새의 날개를 펼쳐서 공중으로 날려보냈다. 즉 새에게 필요한 부분에 맞춰서 도움을 주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쿠니는 아마 매일같이 날아다니는 새들을 보며 알게 된 것들에 근거해 그런 행동을 했을 것이다. (135쪽)


수족관에서 돌고래들은 관리인보다 한 수 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탱크 안의 쓰레기를 주워 오도록 훈련받은 한 돌고래는 사기극이 들통날 때까지 포상 물고기를 축적했다. 이 돌고래는 신문지나 종이 상자 같은 큰 물건들을 물속 깊은 곳에 숨겨놓고, 거기서 조금씩만 찢어서 조련사에게 하나씩 갖다 주었다. (182쪽)


2005년 어느 추운 12월 일요일에 캘리포니아 앞바다에서 암컷 혹등고래가 나일론 밧줄에 얽힌 채 발견됐다. 밧줄은 지방층을 파고들어 상처를 내고 있었다. 고래를 풀어주는 유일한 방법은 수면 아래로 잠수해 들어가서 밧줄을 자르는 것이었다. 다이버들은 한 시간 정도를 그렇게 했다.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고, 고래 꼬리의 힘을 생각하면 분명히 위험을 감수한 일이었다. 가장 놀라운 일은 고래가 풀려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고래는 그 장소를 떠나는 대신 주변을 맴돌았다. 그 큰 동물이 큰 원을 그리며 헤엄치면서 모든 다이버들 한 명 한 명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고래는 한 명에게 코를 비비고 다음 다이버에게 넘어갔고, 결국 모든 다이버들에게 차례로 코를 비볐다. (184쪽)


10년 전 한 신경과학자 팀은 '폰 에코노모 뉴런' 또는 VEN 세포라 불리는 세포가 호미노이드의 뇌에만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VEN 세포는 긴 방추형으로 생긴 점이 보통의 뉴런과 다르다. 이 세포는 뇌의 더 멀고 깊은 곳까지 닿아서 멀리 떨어진 층들을 연결하기에 이상적이다. 이 세포는 인간에게 특히 크고 풍부하며,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여기는 특성을 담당하는 뇌 부위에서 발견된다. 이 부위에 손상을 입으면 관점 바꾸기, 공감, 포용력, 유머, 미래 지향성을 잃는 독특한 종류의 치매에 걸린다. 이 환자들은 자기인식 또한 하지 못한다.

존 올먼의 팀이 가장 최근에 발견한 바에 따르면 VEN 세포는 인간과 유인원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이 뉴런들은 포유류에서 단 두 가지의 다른 부류에서만 나타났는데, 바로 고래와 코끼리였다. (195쪽)


인상적이었던 종교와 동물 이야기. 조셉 캠벨같은 이들이 오래 전부터 지적한 대로, 유일신앙 특히 3대 아브라함 종교라 하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은 '사막에서 태어난 종교'다. 저자는 인간을 모든 동물과 분리시키고 '신의 형상'이라 말하는 것 또한 이들 종교가 건조한 지역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나는 동물의 감정에 대해 말하길 꺼려하는 것은 과학보다 오히려 종교와 연관이 있다고 믿는다. 아무 종교가 아니라 우리처럼 생긴 동물들을 볼 수 없었던 곳에서 생성된 특정 종교들 말이다. 어딜 가든 원숭이와 유인원이 있는 열대 우림의 문화에서는 인간을 자연 바깥에 두는 종교가 단 한 번도 생겨난 적이 없다. 야생 영장류가 흔한 인도, 중국, 일본과 같은 동양의 종교들도 인간과 다른 동물 간에 날카로운 경계를 긋진 않는다. 다양한 형태와 방식으로 환생이 일어난다. 하누만과 같은 원숭이 신도 흔하다. 

유태계 기독교만이 인간을 동상으로 만들어 영혼이 있는 유일한 종으로 취급한다. 사막 유목민이 어떻게 이런 관점을 갖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들에게는 거울을 비춰줄 동물이 없었기에 '우리는 혼자다'라는 관념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그들은 자신이 신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고 보았으며,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지능이 있는 생물이라 여겼다. (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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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아프리카의 역사 대륙과 문명의 세계사 1
리처드 J. 리드 지음, 이석호 옮김 / 삼천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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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지리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 뒤 19세기 이후 주요 지역들의 역사를 훑는 책이다. 두께가 상당하다. 지역과 테마가 교차하게 돼 있어서 좀 어수선한 느낌이 들 수 있지만 거대한 대륙 전반을 다루는 것이니... 


서방의 대륙 침략과 땅 나눠먹기가 진행되는 사이 아프리카인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 눈에 띈다. 어느 식민지에서나 비슷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아프리카에서도 일부는 열강에 저항했고, 일부(혹은 대다수)는 그저 희생됐거나 협력했거나 열강의 움직임 속에서 발 디딜 터를 잡기 위해 애썼다. 협력하면서도 밀고당기기를 했고, 얻어낼 것을 얻어내면서 '서구식' 국가를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저자는 이 모든 과정을 아프리카인들의 주체적인 '응전의 역사'로 본다. 


20세기, 독립 전후, 그리고 그 후의 아프리카 역사를 전하면서 서구를 향한 저자의 시선은 식민주의를 다룰 때보다 오히려 더 냉혹해진다. 역사를 만들고 끌어가려는 사람들을 옥죄고 참견하고 어긋나게 만든 것이 서구였기 때문이다. 다만 개괄서인지라 나라마다의 사정이 상세히 나오지는 않는다. 


전체적인 인상은, 유럽에서 온 기독교도들과 사헬 남쪽의 이슬람 부흥운동을 비롯해 종교적인 맥락을 중시한다는 것. 저자의 전공이 우간다 쪽이었는지, 우간다 지역에 과하게 비중을 실은 느낌도. 서아프리카가 동아프리카보다 발전해 있었다는 저자의 일관된 주장도 좀 생소하다. 


이 책과 같은 시리즈에 속한 <현대 유럽의 역사>를 일전에 읽었는데, 두 책의 한계와 아쉬운 점이 묘하게 겹친다. 편집자가 꼼꼼히 정성들인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그래서 길면서도 엉성하다는 점. 책의 만듦새만이 아니라 원본 자체도 비슷한 스타일인 것같다. 특정 '테마'를 좀 많이 강조해서 과하다는 느낌이 든다든가, 그렇다고 딱 집중되거나 일목요연한 것도 아니며 산만하다든가. 


삼천리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시리즈인 듯 싶어서 굳이 주문해서 펼쳐들었는데 사실은 조금 실망했다. 아프리카인들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역사를 쓰려 애쓴 측면이 있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영국인이 아프리카인들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서술한 아프리카의 역사'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


'현대'의 전반부를 차지하는 19세기는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열강의 식민지가 되어 뜯겨나가고 피 흘린 역사다. 책을 보면 그 아픔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 '열강' 중에서 주축은 프랑스와 영국이었는데 책에는 '영국은 이러저러했다, 영국령 아프리카는 이러저러했다' 길게 설명한 뒤 '프랑스령에서도 뭐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는 식으로 서술돼 있다. 같은 맥락에서, 19세기에 영국에서 벌어진 기독교도들의 노예 반대 운동에 너무 힘이 실렸고 영국 기독교도들 얘기가 지나친 비중으로 적혀 있다.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대륙을 초토화시킨 대서양 노예무역에 대해 오해하기 딱 좋다.


무엇보다 실망스러운 건 번역. 문장은 얼핏 보기엔 매끄럽지만 옮긴이 주석이 거의 없다. '네그리튀드'에 대해 주석을 달았는데, '(이 번역자 자신이 번역한) 에메 세제르 책에 나온 개념'이라는 식으로 설명을 붙여놨다. 정작 네그리튀드가 뭔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채. 번역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옮긴이 주석을 다는 것이 번역 일의 최소한 3분의1은 차지한다는 것을. 그만큼 귀찮고 성가시지만 그게 책 만드는 데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정성인데... 정성에 비하면 책값이 좀 과하다.


번역자가 아프리카 전문가인 모양인데, 이 책에서 '아프리카 역사의 일부'라 못박아 집어넣은 북아프리카-마그레브 역사에선 빼놓을 수 없는 게 '이슬람'이다. 소코테 '칼리파테 Caliphate 제국'이라는 번역은 너무 심했다. 다른 페이지에선 칼리파, 칼리프가 혼용되는 걸 보니 어쩐지 쪽번역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간다, 우간다, 부간다가 거푸 나오는데 어슷비슷한 이 용어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같은 건지 다른 건지 설명도 없다(굳이 덧붙이자면 오늘날의 Uganda 땅에 있었던 Ganda 민족의 왕국이 Buganda였다). 뜬금없이 '히자즈 지역에선~' 이라고 써놨는데, 히자즈는 홍해를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와 마주한 아라비아 반도의 서쪽 지역을 가리킨다. 사이사이에 번역을 잘못한 것으로 추측되는 문장들도 보인다. 분명 저자는 아프리카인들의 자율성과 서방의 편견을 지적하고 있는데 문단 안에서 완전히 거꾸로 된 문장이 보인다든가.


아쉬운 대목이 많긴 했지만 현대 아프리카의 역사를 다룬 이렇게 두꺼운 책이 나왔다는 것 자체는 반갑고 좋다. 사실 이 책은 아프리카의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이 읽기엔 쉽지 않다. 하지만 이전에 나온 아프리카에 대한 두꺼운 책들 모두 마찬가지다. 책들이 나빠서라기보다, 우리가 아프리카에 대해 원체 아는 것이 없어서다. 

이산에서 나온 존 아일리프의 <아프리카의 역사>, 휴머니스트에서 펴낸 마틴 메러디스의 <아프리카의 운명>과 같이 읽으면 좋을 듯. 메러디스의 책은 스크랩을 해놓으려고 밑줄 많이 그어놨는데 게으름 탓에 결국 못 했다. 현대 아프리카의 나라별 사정과 쟁쟁한 지도자들 얘기가 생생하게 나와 있어서 엄청 재미있었다. 실은 이 두 책이 넘나 괜찮았기 때문에 아프리카 역사를 조금만 더 훑어보자는 생각으로 이번 책을 산 건데 좀 많이 모자랐던 것이라.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라는 책도 나와 있는데, 지금 확인해보니 가격이... 가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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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고마워 - 가속의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낙관주의자의 안내서 Nous 7
토머스 L. 프리드먼 지음, 장경덕 옮김 / 21세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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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토머스 프리드먼의 책. 내가 오랜만에 읽은 게 아니고 이 아저씨가 오랜만에 내놓은 책이겠지, 아마도. 프리드먼의 책은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를 비롯해 경도와 태도렉서스와 올리브나무뜨겁고 평평한~세계는 평평하다 등등 전부 읽었다. 만델바움과 함께 낸 <미국쇠망론> 하나만 빼고.


프리드먼의 책을 찾아 읽기는 하지만 언제나 별로라고 생각했다. 말투가 싫어... 그런데 이번 책은 좀 달랐다. 일단 재미는 있었다. 너무나 빨리 변해가는 세계, 너무나 걱정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관주의를 견지하면서 우리 모두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프리드먼은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라지는 세상의 메커니즘을 대기계(기술의 변화), 대자연(기후변화), 그리고 무어의 법칙(변화의 속도를 곱배기로 만드는)같은 개념들로 설명한다. 프리드먼식 개념붙이기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롤러블레이드를 타고 다니며 수퍼노바(클라우드를 프리드먼은 이렇게 부른다)의 혁신을 이끄는 에드워드 텔러의 손자를 비롯해, 실리콘밸리와 인도 등등 여러 곳의 격변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너무 낙관적이라며 트집잡을 수도 있고, '힘센 나라 가진 자들의 논리에만 충실한 것 아니냐, 지금 지구가 개판인데'라고 반발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프리드먼이 그 정도 모를 리는 없을 것같고... 이 혼란 속에 최대한 많은 이들이 적응하고 변해야 하며, 그 변화에 맞춰 개인은 스스로 달라지고 기업은 추동하고 정부는 도와야 한다는 조언은 누가 뭐라든 맞는 얘기다.


오히려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젠 환갑이 지나버린 이 저널리스트의 목소리가 변해가는 과정이랄까. 베이루트~는 유대인 가정에서 자라나 중동에서 전쟁을 취재한 열정적인 기자의 기록이었다. 그 뒤에 그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준 '렉서스~'라든가 '평평' 같은 책들은 세계를 넘나들며 변화의 현장을 소개하면서 컨셉트를 잘 잡았고 브랜딩도 잘 했지만... 넘나 미국적이고 넘나 주류적인 시각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기분이 나빠지는 그런 책들이었다.


그런데 이번 책에선 어쩐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것같은 느낌이 난다. 책은 미국 대선이 한창일 때, 하지만 결과가 결정되기 전에 나왔다. 이번 책에서 프리드먼은 "미국은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 미국이 나서야 한다, 여전히 미국은 해줘야 할 역할이 많으며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거듭해서 말한다. 미국의 오만함을 체현해보이려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트럼프식 미국우선주의, 거기 동조해 결국 트럼프를 미국 대통령으로 만들어버린 미국인들의 정서, 점점 배타적으로 안팎의 이방인들을 몰아내려는 미국 사회의 흐름을 경계하기 위해 열변을 토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트럼프의 당선이었고, 세계는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선동에 휘둘리고 있으니. 미국 대선이 끝나고 트럼프가 하는 짓들, 거기 박수치며 세상을 거꾸로 살려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이 책을 읽으니 참 허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허무하게 바라볼 수만은 없지. 이대로 흘러가게 둬서도 안 되고. 유대인들이 여전히 차별받고 집 구하기도 힘들던 시절, 자기 고향 세인트루이스파크는 어떻게 유대인들을 끌어안는 곳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데에 저자는 이 책의 뒷부분 4분의 1 정도를 할애했다. 


암튼, 이모저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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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01-04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야 놀러가자님 무술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딸기 2018-02-26 16:49   좋아요 0 | URL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는 흑인이다, 나는 흑인으로 남을 것이다 에메 세제르 선집 4
에메 세제르.프랑수아즈 베르제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 그린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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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동안 시장직을 수행한 그는 나를 오래된 시청 건물에 있는 자기 사무실에서 맞았다. 처음 만난 이 사람은 아주 정중했다. 또한 주의 깊은 반면 데면데면하기도 했고, 소심한 반면 친근하기도 했으며, 매사에 관심을 가진 반면 의심이 많기도 했다. 자기와의 대담이 가질 수 있는 의미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저작들이 예전히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믿고 싶지 않아 했다. 또한 런던에 있는 한 대학에서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이 그의 저작들, 특히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과 <귀향 수첩>을 연구하고 인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워했다.

 

프랑수아즈 베르제라는 포스트식민주의 학자가 에메 세제르를 만났다. <나는 흑인이다 나는 흑인으로 남을 것이다>(변광배·김용석 옮김. 그린비)는 두 사람의 대화를 담은 대담집이다. 


책의 분량은 매우 짧은 데다가, 뒷부분 절반은 베르제가 포스트식민주의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다. 정작 세제르의 목소리는 그리 많이 담겨 있지 않다. 그럼에도 울림은 얕지 않다. 세제르는 카리브해의 프랑스 영토(해외도)인 마르티니크 사람이자 ‘프랑스 옛 식민지의 흑인들’을 상징하는 인물이며 탈식민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정치가다. 인터뷰를 한 베르제는 역시 프랑스의 해외도인 레위니옹 출신이다. 이 인터뷰 자체에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명예·인정·영광 등은 세제르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이런 것들을 무시하는 듯 보였다. 그는 더 영광스러운 많은 제안을 물리친 채 마르티니크에 사는 것을 선택했다. 여러 번에 걸쳐 내게 반복해서 말한 것처럼 그는 자기가 태어난 섬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가 항상 프랑스령 앙티이(카리브의 프랑스 옛 식민지 섬들)에 대해 부드러운 태도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앙티이를 역사적인 면에서 상기하는 것, 그것은 앙티이와 끝장을 보려는 내 의지이다. 그러니까 역사의 가장자리에서 기아·기근·억압이라는 이름 붙일 수 없는 막장 상태를 끝장내려는 내 의지이다.”

이와 같은 그의 단언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하니는 열대 섬에 대한 낭만주의의 거부이다. 다른 하나는 <귀향 수첩>의 도입부에서 볼 수 있는 그 유명한 구절이다. “굶주리고 천연두 딱지가 닥지닥지 내려앉은, 술에 절은 앙티이인들. 돌다 돌다 떠돌다 이 부두의 진창에, 이 도시의 속진에 좌초한, 속절없이 가라앉은 앙티이인들.” 또 다른 하나는 “사랑과 도덕의 질서정연한 장소”인 마르티니크에 대한 깊은 애정이다. 그는 마르티니크인들에게 “공감”을 가지고 있다. 
(8쪽)

 

이제는 ‘탈식민’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유행 지난 것처럼 느껴지는 시대에 세제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더군다나 2017년의 한국에서. 이 대담집은 에메 세제르 선집으로 묶여나온 네 번째 책이다. 일본의 프랑스문학자이자 탈식민주의 학자인 니시가와 나가오의 책에서도 세제르와의 짧은 대화를 엿본 적 있는데, 베르제의 이 책에서 느껴지는 정조는 뭐랄까, ‘회한’에 가깝다. 하지만 한 가닥 희망과 열정을 놓칠 수 없는 그런 회한.

 

세제르와 같은 피부색을 지니고 있는 사람인 까닭일까. 베르제가 이 노인에게 집요하게 파묻는 것은 ‘흑인’ 혹은 ‘흑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이다.

 

널리 퍼져 있는 주장들은 식민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세제르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부정하고 있고, 그 몫은 오히려 프란츠 파농, 파트리크 샤무아조, 에두아르 글리상에게 돌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보기에 ‘흑인’에 대한 세제르의 접근방식은 파농의 그것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흑인 문제’에 훨씬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세제르에게 ‘흑인이라는 것’은 대륙횡단적 역사를, 특히 전 세계에서 이루어진 디아스포라의 원천인 아프리카를 가리킨다. ‘흑인이라는 것’은 잉여의 무엇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노예무역과 노예제도의 역사에 대한 기억과 기술이 공적 토론의 대상이 되고 있는 동안, 노예제도가 정착되었던 식민지 출신이자 프랑스의 공공 교육을 받았던 한 사람의 저작을 다시 읽는 작업은 매우 중요해 보였다. 여전히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섬에서 태어났고, 프랑스 엘리트의 산실인 고등사범학교 학생이었던 한 사람, 그것도 193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한 사람의 저작을 말이다. 그의 저작들에는 그가 살던 시대의 역사적 중요성이 잘 나타나 있다. 투생 루베르튀르에 대한 그의 에세이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극작품, 연설, 그리고 아이티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여러 글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14쪽)

 

평생을 고뇌와, 싸움과, 때로는 비난과 맞서 싸워온 세제르에게 마르티니크인이라는 것의 의미는 절절하고, 복합적이다. 그는 마르티니크를 떠나던 어린 시절의 기쁨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특히 상고르와의 만남을 회고한 부분은 인상적이었다. 세제르와 함께 프랑스 ‘식민지 지식인’을 대표하는 상고르 아닌가.

 

나는 아주 기뻤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말했어요. ‘마침내 파리에 입성했군. 마르티니크는 지긋지긋했어. 난 이제 꽃을 피울 거야!’ 나는 그 길로 고등사범학교 준비 1학년 반에 등록했습니다. 사무실에서 나오면서 한 남자와 마주쳤습니다. 그는 중간 키, 아니 작은 키에 회색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곧장 나는 그가 이 학교 기숙생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허리 끝에 빈 잉크병이 달린 줄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녕, 이름이 뭐야? 어디에서 왔어? 무엇을 하니?” “난 에메 세제르야. 마르티니크에서 왔고, 고등사범학교 준비 1학년반에 등록했어. 넌?” “난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야. 세네갈 출신이고, 준비 2학년 반이야.” 그러고 나서 그는나와 가볍게 포옹했습니다. “반가워, 반갑다.” 이 일이 루이르그랑 고등학교에 도착한 바로 그날에 일어났어요! 그 이후 준비 2학년 반에 있던 그와 1학년 반에 있던 나는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만났고 토론했습니다. 그는 조르주 퐁피두와 준비 2학년 반에 있었고, 아주 친했습니다. 
상고르와 나는 아프리카, 식민주의, 문명에 대해 끝없이 토론했습니다. 그는 그리스와 라틴 문화를 화제로 삼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는 아주 훌륭한 헬레니스트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함께 성장했던 것이고, 그렇게 해서 다음과 같은 첫번째 질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난 누구지? 우린 누구지? 백인들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이지?” 중요한 질문들이었죠. 두번째 질문은 도덕적인 것이었습니다. “난 뭘 해야 하지?” 세번째 질문은 형이상학적인 것이었습니다. “뭘 희망할 수 있을까?” 이 세 질문은 그 당시 우리의 주요 관심사였습니다.
전쟁 후에 파리에 다시 갔을 때 나는 예복을 입은 키 작은 사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상고르는 세네갈에서 국회의원이 되었고, 나는 마르티니크에서 국회의원이 되었던 겁니다. 우리는 다시 포옹을 나누었습니다. 성격과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우정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인이었고, 니는 앙티이인이었습니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고, 정치적으로는 인민공화국운동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거나 ‘공산주의에 가까워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언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좋아했고, 성징하는 과정에서 서로 영향을 많이 주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24-25쪽)

 

한 흑인이 아프리카에서 납치되어 노예선 바닥에 실려 묶인 채 얻어터지고 모욕을 당하면서 대륙으로 이송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이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고 합시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을까요? 이 모든 것이 내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없습니다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역사가 분명 무겁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30쪽)

 

‘자유·평등·박애’, 프랑스 본국인들은 이 세 종류의 가치를 항상 권장할 겁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들은 정체성 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보게 될 겁니다. 어디에 박애가 있습니까? 왜 사람들은 이 박애를 경험하지 못합니까? 그것은 바로 프랑스가 정체성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네가 모든 권리를 가진 인간, 다른 사람들의 존중을 받아야 할 인간이라면, 나 역시 한 명의 인간이고, 나 역시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나를 존중해 주기 바란다. 그 순간에 우리는 형제가 되는 것이다. 서로 포옹하자. 그것이 바로 박애이다.’ 
(38쪽)

 

혹인 노예 지지자들의 말만큼이나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박애주의자들이, 분명 선량한 마음으로, 모든 사람은 사람이고, 백인도 흑인도 없다고 주장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오. 그건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이고, 이 세상 밖의 일이오, 부인. 모든 사람이 같은 권리를 갖고 있다. 나도 그것엔 동의하오. 하지만 공동 운명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의무를 가진 사람이 있소. 그것에 불평등이 있다오. 명령의 불평등 말이오.
(62쪽, 에메 세제르 <크리스토프 왕의 비극> 중 크리스토프의 대사)

 

아래는 베르제가 후기에서 설명한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의 역할.

 

‘포스트식민성’ 개념은 권력들의 새로운 지도를, 본국과 식민지 사이의 접촉 지대들을, 그리고 식민지들 사이의 접촉 지대들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포스트식민 이론은 대규모의 가속화된 이주와 사회적 구조의 상실, 잔혹함과 폭력이 곧 권리인 정책들의 재출현, 정체성의 후퇴, 폭력의 폭발, 모든 것이 상품이며 판매될 수 있는 자유시장경제 담론의 헤게모니적인 지배와 같은 새로운 동요들을 설명하고자 노력한다. 포스트식민 이론은 학제 간 학문이 되고자 하고, 부차적인 표현들과 ‘소수자들’에, 새로운 저항의 장소들(음악, 조형예술, 도시 문화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자 하며, 권력과 착취의 새로운 형태들, 지역들과 새로운 교역로들과 국제 도시들의 출현을 목도하는 데 관심을 두고자 한다. 역사는 선형적인 것이 아니다. 게다가 식민지의 역사가 이주와 유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의 구성 원칙인 ‘민족’은 더 이상 최고의 준거 대상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뿌리 또한 더 이상 가치를 높게 평가받거나 찬양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86쪽)

 

파농이 포스트인종주의적 사회를 건설하려고 시도한 바로 그 지점에서, 그 ‘피부색’이 더 이상 신원 판별의 기준이 되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세제르는 그 어떤 부정적인 신원판별도 그것과 결부되지 않으면서도 흑인이 되는 것이 가능한 사회를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반환청구이고 노예무역과 노예와 세계를 가로지르는 디아스포라에 대한 반환 청구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Blackness without Ethnicity’는 유효하다. 이때 네그리튀드는 “체험된 경험들의 합”, “참아낸 억압 공동체”, “역사속에서 역사를 사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정말이지 한 공동체의 역사의 경험이 그 공동체 인구의 강제 이주,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의 인간 이송, 요원한 믿음에 대한 기억들, 말살된 문화의 폐허들과 함께 독특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는 “기억으로서, 충실성으로서, 연대로서의 차이에 대한 의식화이다. “억압에 대한 거부”인 네그리튀드는 “투쟁”이며, 또한 “지난 수세기 동안에 구성된 것으로서의 문화 시스템”에 맞서는, “유럽의 환원주의에 맞서는” “저항”이다. 
(98쪽)

 

번역은 껄끄럽다. 아리스티드(아이티 전 대통령을 가리키는 듯)를 지명으로 옮긴 것도 그렇고...
세제르의 <귀향수첩>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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