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적 개입 - 정의로운 무력행사는 가능한가
모가미 도시키 지음, 조진구 옮김 / 소화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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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자는 국제기독교대학 대학(부설 평화연구소 소장 역임)에서 국제법 및 국제기구론을 담당하고 있는 국제법의 권위자다. 일본 학자다운 꼼꼼한 사례분석을 통해 인도적 개입과 관련된 이슈들을 층위별로 다룬다. 일본어투를 그대로 번역으로 옮겨 놓아 문장은 지리멸렬해보이지만 반드시 한번은 생각을 해봐야 하는 문제들이다. 좋은 공부가 됐다.


▶ 예전에 평화는 전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침략하지 않고 죽이지 않고 빼앗지 않는 것이야말로 평화였다. 1920년 국제연맹이 창설되어 ‘집단안전보장’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이후 거기에 ‘침략을 진압한다’는 의미가 추가되었다. ‘침략하지 않을 것’에 ‘침략한 국가를 징벌한다는 것’이 평화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국제법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침략과 전쟁의 위법화, 무력행사의 금지, 다른 국가에 대한 간섭의 금지, 주권의 존중 등과 같은 원칙의 확립·강화를 의미한다. 사상적으로 본다면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절대평화주의의 입장과 중복되어 있다. 침략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무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절대평화주의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서 집단안전보장에 입각하여 “침략한 국가를 징벌한다”는 평화는 아마 절대평화주의와는 양립하지 않을 것이다.
인종차별 등 심각한 인권침해가 국제평화와 관련된 문제로서 대두된 것은 l960~70년 유엔이 그러한 침해에 ‘국제적인 관심사항’이라는 특별한 이름을 부여하고 나서였다. 그러한 정책을 취하고 있다고 지탄받았던 국가에 대해서는 유엔이 ‘개입’하여 제재를 가하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 그때 대상이 되었던 것은 백인정권에 의한 유색인종의 탄압이 심했던 남로디지아(현 짐바브웨)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다.
인도적 개입은 1999년 3~7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이 유고슬라비아를 폭격했을 때 각광을 받았다. 폭격 자체는 인도적 개입의 모델 케이스로 간주하기 어렵다. 코소보 자치주에서 인도적 행위가 벌어졌던 것은 사실이지만, 취한 수단(=폭격), 절차(=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무시), 얻은 결과(=박해의 순환) 등 어느 것을 보아도 의문이 남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서문)

▶ 1948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제노사이드 조약(집단살해의 방지 및 처벌에 관한 조약)에서 규정된 ‘제노사이드’는 다음과 같은 행위를 말한다.
1. 집단의 구성원을 살해하는 것
2. 집단 구성원에 대해서 중대한 육체적 또는 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3. 집단에 대해서 그 전부 또는 일부에게 육체적 파멸을 목적으로 생활조건을 고의적으로 부과하는 것
4. 집단내의 출생을 방해하기 위한 조치를 강제하는 것
5. 집단의 어린이들을 다른 집단으로 강제적으로 이송하는 것

▶ 영국의 국제정치학자 아담 로버츠의 정의에 따르면, 인도적 개입이란 “어떤 나라에서 주민에게 대규모의 고통과 죽음이 초래되었을 때 그것을 막을 목적으로 그 국가의 동의 없이 군사력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협의의 인도적 개입’이라 부르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인도적 개입의 공통적인 정의의 조건을 들면
1. 극도의 인권침해 또는 인도에 대한 죄라고 부를 수 있는 심각한 박해가 있을 것
2. 해당국 정부가 그러한 박해를 자행하고 있거나 주민간의 박해를 멈추게 할 의사와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을 것
3. 개입하는 것은 통상 다른 국가 또는 복수의 국가일 것. 복수의 국가에는 나토와 같은 군사동맹도 포함 된다(논자에 따라서는 유엔과 같은 세계 규모의 국제기구도 포함시키지만, 첨예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이외의 경우이다)
4. ‘개입’은 통상 군사력을 사용한 ‘무력개입’일 것(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무력을 사용할 경우가 첨예한 문제가 된다)  (22쪽)

▶ 하나는 합법적이라고 해도 어떠한 종류나 형태의 인도적 개입이 합법적인가는 별도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합법적일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 인도적 개입이 될 수 있을지 논란을 빚는 사례들
(1) 파키스탄에 대한 인도의 개입(1971년): 유엔에서 호응을 얻지 못함
(2) 캄보디아에 대한 베트남의 개입(1978~79년): 흥미로운 것은 베트남은 인도적 개입을 정당화의 근거로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전개한 것이 ‘이전론’ 즉 ‘두 개의 다른 전쟁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또 베트남군은 1980년 말까지 캄보디아 영내에 주둔했다는 점이다.
(3) 우간다에 대한 탄자니아의 개입: 1971년 아민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뒤 1979년 추방당 할 때까지 학살된 사람들의 수는 국제사면위원회 등의 조사에 의하면 약 30만 명에 달한다(50만 명에 이른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한 우간다에 대해 1979년 l월 20일, 3-4만 명의 탄자니아군이 군사 공격을 감행했다.
박해받는 희생자의 구제가 아니라 가해자의 처벌을 목적으로 한, 인도적 개입이 용인될 수 있는가는 더욱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니에레레 등의 발언에는(만약 탄자니아의 행동을 인도적 개인이라고 볼 수 있다면) 인도적 개입의 모습을 둘러싼 또 다른 어려운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유엔과 아프리카연합 등 국제사회는 탄자니아의 행동에 침묵 혹은 묵인했다.

▶ 인도적 개입이 유엔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은 주로 법적인 이유에서다. 즉 인도적 개입이라고 하면 무력행사를 수반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유엔헌장 상 무력행사를 수반하는 유엔활동은 ‘강제행동’(유엔헌장 제7장 특히 제39조와 제42조)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것은 ‘개입’과는 다른 합법성이 분명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엔군은 존재하지 않지만 평화유지활동을 위한 평화유지군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설치되었다. 평화유지활동의 경우 병력의 전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국가의 동의에 입각하고 있어 상대의 의사에 반할 경우에도 행해지는 강제행동이나 개입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또한 무력행사에도 많은 제약이 있으며 대상국에 명령할 권한도 없다.
유엔은 소말리아나 르완다 그리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기아와 살육이 발생하였을 때 대응을 요청받고 평화유지활동을 했다. 하지만 미묘한 형태로 행해진 활동이기 때문에 제약도 많았다. 세 경우 모두 문제점을 남긴 사례이기는 하지만 조금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유엔에 의한 ‘구호 활동의 과잉과 과소’라고 요약할 수 있다.

1. 소말리아- 과잉개입이 낳은 비극
1992년 l월에 취임한 부트로스 갈리 유엔 사무총장은 소말리아 문제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안보리와 연계하면서 일련의 ‘인도적’ 활동을 시작했다. 안보리 결의안 제733호에는 그때까지의 안보리 결의안에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인도적’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나왔다.
1992년 12월 3일 유엔평화유지군인 UNOSOM I과는 별도로 가맹국이 제공하는 병력으로 구성되는 ‘통합기동부대(UNlTAF·United Task Force)’ 부대의 설치를 결정했다. 최초로 인도적인 이유에서 무력행사를 용인한 이 결의안 제794호는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일주일 후인 12월 10일 미 해병대가 모가디슈 인근에 상륙하는 장면이 미국 방송들에 의해 전 세계로 방영됐다.
1993년 3월 26일의 안보리 결의만 제814호에 입각하여 설치된 것이 제2차 유엔 소말리아활동 (UNOSOM II)이었다. 그러나 UNOSOM II가 강제적으로 무장 해제를 추진하고 특히 아이디드 장군파와의 대립을 심화시킨 결과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임무 개시 한 달이 지난 6월 5일 파키스탄 부대가 습격당해 24명이 숨졌다. 같은 해 10월까지 사태는 유엔평화유지군(혹은 유엔평화강제부대)과 현지의 무장 세력 간의 전쟁 양상을 띠게 되었다.

2. 르완다- 내버려진 사람들
1994년에 대규모 학살이 발생했던 르완다는 과소개입의 예다. 현지에는 두 개의 평화유지활동이 전개되었다. 유엔 우간다 르완다 감시단(UNOMUR·1993년 6월~94년 9월 양국 국경지대에 전개됨)과 유엔 르완다 지원단(UNAMIR·1993년 l 월~96년 3월)이 그것이다.
실패의 원인은 복합적이며 어느 하나라고 말할 수는 없다. 더 큰 문제점은 안보리가 원래 이 지역에서의 평화 유지활동을 중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UNAMIR의 임무는 주로 정전협정의 이행을 감시하고 총선거 때까지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요원 수도 모두 2500명 정도로 소규모였으며, 인도적 긴급 사태에 대응할 만한 장비도 경험도 없었다.
1993년 1994년 내전이 격화되어 벨기에군 병사 10명이 살해당했다. 이에 벨기에가 철수를 결정하였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뒤를 따랐다. 이미 2000명으로 줄었던 군사요원은 한꺼번에 1500명 정도로 줄었다.
유엔 및 국제사회의 조치는 너무 늦었으며 너무 적었다. 조기에 충분히 무력을 행사했어야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조기에 비무력행사 형태로 병력과 경찰을 파견하였더라면 50만 명이나 되는 학살은 막을 수도 있었다는 의미이다. 오래된 부족간의 원한의 충돌이었기 때문에 막을 수가 없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국제사회가 막아야 했던 것은 분출하는 역사적 원한 그 자체가 아니라 삽과 괭이를 사용한 살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일이 전혀 불가능했을 리가 없다. 그 점에서 이 사건은 어떻게 하면 인도적 개입이 가능할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인도적인 예방활동이 가능한가를 묻는 사례였다.

3. 옛 유고연방 인종청소의 충격
유엔에 따르면 인종청소는 한 지역을 지배하던 민족 그룹이 다른 민족의 구성원을 말살하는 짓이며 살인 이외에 악질적인 괴롭힘, 차별, 폭력행위, 고문, 강간, 재판 없는 처형, 강제이주, 재산의 약탈, 종교시설의 파괴 등 다양한 수단을 포함한다.
이러한 만행이 빈발하는 가운데 유엔은 단계적으로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1992년 2월에는 유엔보호군(UNPROFOR)를 파견해 1995년 12월까지 주둔시켰다. 인종청소를 왜 막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논점이 있을 수 있다.
첫째, 분쟁 당사자의 행동이 상궤를 벗어나 있어 국외자가 예측할 수 없는 경우 그것을 신속하게 막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둘째, 그럼에도 광기가 폭발했을 경우 누군가가 그것을 멈추어야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라도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것을 막는 것은 아니다.
셋째, UNPROFOR가 잔혹행위를 막기 위해 필요한 권한이나 장비를 제공받았으며 그러한 의사와 능력을 갖췄는가 하는 것도 문제다.

4. 스레브레니차의 참극
사라예보 동북쪽 60km 스레브레니차는 유엔이 지정한 ‘안전지역’이었으며 공격이나 침입이 모두 금지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 세력은 1999년 7월 6일 총공격을 시작했다. 코피 아난(Kotì Annan) 사무총장의 보고서는 이 학살에 관해서 유엔이 몇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일관되게 지적했다. 첫째, 네덜란드 부대가 충분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로 현지부대와 사령부 사이의 통신과 의사소통이 나빴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무력행사를 할 것인지 스레브레니차가 함락될 때까지 유엔은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프랑스의 르몽드지가 “아난 사무총장의 죄책 고백”이리는 제목으로 이 보고서를 보도했는데 말 그대로 결론은 통한의 반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유고 폭격은 인도적 개입인가
-1999년 3월에 이르러 코소보의 상황은 사건의 사무총장 보고에 의하면 상당히 많은 비인도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해도 좋다. 따라서 희생자를 구하려는 행위를 인도적 개입이라고 부 르는 것도 일단은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주의해야할 것은 피해자 중에는 세르비아계 주민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상대적으로 희생자가 많은 쪽을 구하는 것을 ‘인도적 개입’이라 간주하게 되는 것일까?
-인도적 개입의 사례 중 많은 경우가 그랬듯 이 작전도 순수하게 인도적인 동기만으로 이루어졌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다른 목적이란 무엇인가? 최소한 밀로셰비치 정권이 NATO가 바라는 유고 평화협정안을 수락하게 하는 것이다.
-NATO의 군사행동에 대해서는 ‘징벌적 폭격’이라는 표현도 간간이 사용되었다. 그것은 코소보에서 알바니아인을 박해했던 것에 대한 징벌일지도 모르고 랑부예 합의를 거부한 것에 대한 징벌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었든지 ‘징벌’은 ‘구제’와는 이질적이며 사후적인 행위다. 그리고 ‘박해’ 현장인 코소보 이상으로 베오그라드 주변 특히 산업시설이나 생활 관련 인프라를 공격하는 작전이 많았다는 것은 단순한 보급·병참선의 절단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이 폭격은 ‘징벌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부수적 피해’가 많이 발생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있었다. 첫 번째 요인은 자신의 생명에 위험이 미치지 않도록 NATO군이 15,000피트라는 고공에서 폭격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고도가 높으면 정확하게 군사목표만을 폭격하는 것은 어려워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특히 베오그라드에서 인구밀집지역에 있는 공장이나 발전소, 방송국이 표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중 몇 개가 ‘군사목표’ 라 해도 그런 곳에서 폭격을 하면 부수적인 피해는 거의 피할 수가 없다. 그것은 과실이라기보다 고의에 가깝다고 봐야할 것이다.
-‘인도적 효과’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무엇보다 유고군의 알바니아계 주민에 대한 박해는 오히려 폭격을 계기로 강화되었다고 전해진다. 확실한 것은 폭격으로 난민과 피난민이 된 85만 명의 대부분이 알바니아계 주민이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폭격을 한 것이었는데 그 사람들의 고통을 더욱 증가시킨 결과가 된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이 모든 것이 폭격 때문에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그러나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박해를 연쇄적으로 발생시킨 사회구조를 개선하는 데 폭격은 어떤 의미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 불개입 원칙은 유엔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의 관습법이라는 성격이 강한 데 비해서 무력불행사 원칙은 유엔헌장에서 확립된 규범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더구나 무력불행사 원칙은 등장하면서 바로 ‘보통’이 아닌 규범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이렇게 해서 “일탈을 행하기 극도로 어려운” 상황이 확립되었다. 그것은 개별 국가에 의한 인도적 무력개입의 합법성을 긍정하려는 논자가 극복해야 할 l차적인 장애물이었다.
예외를 드러내기 위해 인도적 개입의 긍정론자가 내세우는 논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무력행사의 일반적인 금지는 유엔의 안전보장체제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할 때에는 개별국가의 무력행사가 허용되는 경우도 생긴다는 주장이다.
둘째, 인권보장은 무력행사와 함께 유엔의 대목적(大目的)이라는 점이다.
셋째, 헌장 제2조 제4항은 타국의 영토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을 침해하는 무력행사만을 금지하는 것으로 그 외의 (타국의 영토를 점령하거나 전복하는 것이 아닌) 무력행사는 허용된다는 해석이다.

▶ 소말리아나 르완다에서의 실패를 거울삼아 한꺼번에 ‘중립성과 비폭력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유엔의 새로운 역할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군사력을 동원한다”는 것은 반드시 해하는 주체에 대해 무력공격을 가하는 경우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박해로부터 보호하는 것이고 그 사람들에게 인도적 구호물자를 전해 주는 것임을 생각하면 그것을 실효성 있게 행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인도적 개입’의 정책적 과제가 아닐까.

▶ 정전(正戰)론에 반대하며
-정전이란 말 그대로 정당한 전쟁이며 적극적으로 싸워야 할 전쟁이다. 무력을 기본으로 하여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싸워야 할 정당한 전쟁을 설정하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엄격한 조건을 붙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특정 국가의 판단에 의해 행해져서는 안 되며 국제 사회의 총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공격하는 상대방이 아무리 ‘악’해도 통상의 전쟁과는 달리 상대방을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공격하는 대상이나 수단은 매우 제한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권을 침해당하고 구호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자신이 그러한 방법으로 구호를 받고 싶어 해야 한다.
-만약 비인도적 상황에서 ‘주권보다 인권’을 주장할 경우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인권(생명에 대한 권리·평화에 대한 권리·식량에 대한 권리·가족생활의 권리 등)을 보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해당국의 주권을 일축하며 죄 없는 시민들을 말려들게 할 가능성을 내재하면서 징벌적인 무력 공격을 하는 것 자체는 아닌 것이다.
-극도의 비인도적 상황에서 주권은 제한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선 해당 국가가 보호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타국 또는 국제기구 혹은 다양한 인간집단이 보호하고 구호하려고 할 때 그것을 방해할 권리를 해당 국가는 갖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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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콜로지카 Ecologica -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정혜용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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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사람들의 책은 내 취향이 아니야, 하다가도 이렇게 반짝반짝하는 책을 만나면 ‘이게 그들의 힘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앙드레 고르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스위스 로잔 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던 사람이다. “<렉스프레스>를 거쳐 <누벨 옵세르바퇴르>를 창간하고 유럽 신좌파 이론가로 활동하며 68혁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저자 소개에 나와 있는데, 그 명성대로다.
더 이상 이익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금융산업’이라는 이름으로 돈이 돈을 낳고 그 돈이 돈을 먹는 헛구르기만 계속하는, 궁지에 몰린 자본주의. 파괴와 낭비만 남은 자본주의의 탈출구는 ‘정치적 생태주의’라고 고르는 말한다.
굳이 ‘과학적 생태주의’과 ‘정치적 생태주의’를 구분해서 후자에 방점을 찍고는 있는데, 거창하게 부를 것 없이 전자는 기술발전으로 생태파괴를 막아보자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예 통째로 세상의 체제를 바꿔 생태주의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니 전자보다는 후자로 가야 자본주의라는 체제 밖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저자는 사회주의자이고, 사회주의에 ‘에콜로지’를 덧붙였다.

이반 일리히에게서 가져온 것이긴 하지만 자동차 문화와 도시생활의 확대에 대한 부분(자동차 때문에 점점 직장에서 먼 곳에도 살 수 있게 되고 결국 이동 시간은 줄어들지 않는다는)이나 해커의 사회학에 대한 접근(인터넷 초창기에 많이 나타났던 해커 예찬 같은 느낌도 들지만)은 재미있었다.
오늘날 넘쳐나는 ‘비정규직’의 비생산성을 자본주의의 위기와 연결지어 설명한 것도 눈에 띄었다. 지금 우리는 생존권 차원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고르의 통찰에 따르면 넘쳐나는 비정규직- 서비스직 일자리들은 자본주의의 막장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난 비생산적인 노동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사실 일자리라고 해서 자본주의 경제에서 의미하는 대로 ‘생산적’인 것은 아닙니다. 가치를 만들어내는, 다시 말해 자본증식을 낳는 일자리만이 ‘생산적’인 거죠. 특히 미국 경제활동인구의 5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용역이 그 경우라고 할 수 있죠. 그 일자리들은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며, 창출된 가치를 소비하는 것이죠. 이들에게 지불되는 보수는 그들의 고객이 생산적인 노동을 하여 올린 소득에서부터 나옵니다. 그러니 ‘2차 소득’이며, 1차 소득의 일부를 2차적으로 재분배한 것입니다.
... 용역 서비스 업종은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지 않고서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서비스나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활동들을 보수를 받고 제공하는 용역으로 변모시킨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활동들을 일자리로 변모시킨다고 해서 실제로 노동시간이 절약되는 것도 아니고 전 사회 차원에서 시간을 벌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사고파는 서비스들의 비생산적 성격이 잘 나타나고 있지요.”
 
 

그리하여 생산성에 보탬이 되지 못하는 수많은 서비스직, 비정규직, 용역직 노동자들은 이 사회의 ‘워킹푸어’가 되고 만다.

100쪽 조금 넘는, 그나마 글씨도 엄벙덤벙 크고 여백이 운동장만한 책에서조차 프랑스식 글쓰기의 특징인 ‘중구난방 어법’이 마구마구 나타난다. 쉽게 말하면 될 것을 참 어렵게도 한다. 지금은 당연한 듯도 들리는 그 쉽고 흔한 이야기에까지 이르는 생각의 길이 굽이굽이 길고도 험난했기 때문일까. 2차대전에 68혁명에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을까. 고르는 불치병에 걸린 아내를 20여 년 간 간호하다가 2007년 자택에서 아내와 동반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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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4-14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쪽 조금 넘는, 그나마 글씨도 엄벙덤벙 크고 여백이 운동장만한 책에서조차 프랑스식 글쓰기의 특징인 ‘중구난방 어법’이 마구마구 나타난다

오호 읽기 망설여지는군요 --;;

딸기 2009-04-15 02:47   좋아요 0 | URL
그래도 한번 읽어보세요 ^^
글씨도 엄벙덤벙 크고 여백이 운동장만하고 중구난방어법인데도
반짝거리는 통찰력이 있거든요.


무해한모리군 2009-04-16 08:39   좋아요 0 | URL
다시 용기를!!
중구난방 사이의 통찰이 내게도 번쩍여주기를!!

드팀전 2009-04-14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드레 고르는 순애보로 먼저 알게되었어요...ㅋㅋ 잘 지내시죠

딸기 2009-04-15 02:48   좋아요 0 | URL
잘 못 지내요. 저 감기 걸려서 엄청 끙끙 앓았어요 ^^
 
슈퍼자본주의
로버트 라이시 지음, 형선호 옮김 / 김영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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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를 넘어 라이시는 1970년대의 자본주의를 ‘슈퍼자본주의’라고 부른다. 이 자본주의에 ‘슈퍼’라는 형용사가 붙는 것은,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침공해 들어가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모든 국면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 우리들은 거기 공모해서 시민으로서의 존재의식을 잊고 소비자·투자자로서의 권리만 중시하게 되었다. 우리의 공모 속에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가치는 퇴색했다. 정치는 로비에 물들어 슈퍼자본주의에 결탁했다.
이 과정은 레이건 때문에, 대처 때문에, 신자유주의 때문에, 냉전 종식 때문에, 세계화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슈퍼자본주의는 이 모든 것들이 합쳐지면서 ‘우리의 공모 덕에’ 발전해왔던 것이다. 기업들은 점점 치열해져가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고, 소비자들은 이 경쟁 속에서 값싼 제품과 서비스를 찾아다녔을 뿐이고, 너나없이 펀드에 돈을 넣으며 내가 투자한 것이 조금이라도 이익을 가져다줬으면 하고 바랬을 뿐이다. 그것이 오늘날의 슈퍼자본주의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이 과정이 ‘옳은 것’ ‘바람직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지만, 불공평하고 잔인한 과정이었다.

생각 있다는 사람들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을 얘기하며 “나쁜 기업들을 좋은 기업들로 바꾸자”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는 ‘게임의 룰을 바꾸는 것’이다. 이 자본주의의 규칙을 바꾸어야만, 즉 법과 규제를 통해서 룰을 바꿔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쁜 월마트, 착한 월마트’는 없다. 월마트는 저임금 노동자들을 고용해 소비자들에게 값싼 물건을 파는 경쟁력 있는 기업일 뿐이다. 기업은 원래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있는 조직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기업의 자선행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민적 각성을 통해 정부를 움직여 법과 제도를 바꾸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함께 갈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이라고, 이제는 자본주의에 침공당한 민주주의에 다시 숨통을 틔워줄 때가 되었다고 라이시는 말한다. 요는 '민주적인 자본주의'를 만드는 방법인 것이다. 
꼭 그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우리는 ‘좋은 기업’들의 실패담을 종종 듣는다. 더바디샵이 몇 해 전 로레알에 넘어갔을 때를 생각해보라. 노벨평화상 수상자를 낸 그라민 은행도 요즘 흔들린다 하는 판이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들이 바로 그 책임을 다 하는 동안 ‘무슨 짓이든 하는 기업’들에 경쟁에서 밀리는 일은 허다하다. 아니, 이는 경쟁 구조의 본질에서 나온 필연적인 귀결일 수도 있다.
이 부분은 참 우리의 신경을 건드리는데, 그렇다고 부인하기엔 너무 씁쓸한 진실을 담고 있다. 못된 기업이 착한 기업을 이기는 것은 우리 안의 ‘투자자’가 ‘시민’을 이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안의 시민이 힘을 갖게 하지 않는 한 착한 기업이 나쁜 기업을 이길 도리는 없다. 착한 기업 이야기가 나오면 냉소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성공할 리가 없다’며 ‘합리적인 소비자들의 선택’을 들먹인다. 착한 소비자는 많지 않다고. 여기서도 문제는 ‘착한 소비자’가 아니다. 기업과 민주주의를 구분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책의 내용은 상식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하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가자는 얘기를 진실성 있게 전하기 때문이다. 나도 주주다. 나는 여러 언론사의 주식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적립식 펀드에도 투자를 해놓고 있다.
캘리포니아 공무원 연금인 ‘캘퍼스’ 만이 제 3세계에서 악명을 떨치는 악덕 기업들에 투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돈을 집어넣은 펀드가 지구 반대편 사람들에게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을 강요하고 있는 줄 누가 알랴. 우리는 알려 하지 않고, 알아도 모른 체 한다. 사회적 책임을 다 하지 못하는 면에서라면 이 금융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중에 자유로울 자 누구인가.

우리가 다루는 변화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다. 기업은 도덕성과 무관하다. 실상을 말한다면 우리 대부분은 소비자이자 투자자이며, 그런 맥락에서 슈퍼자본주의에서 엄청난 덕을 보고 있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공정한 게임을 이상으로 여기는 시민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소비자와 투자자뿐 아니라 시민으로서 우리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규칙 말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적절한 경계선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경제의 게임과 그 룰을 만드는 방식을 구분해서 양쪽이 서로를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기업은 시민이 아니다. 기업은 계약들의 묶음이다. 기업의 목표는 경제의 게임을 가능한 한 치열하게 수행하는 데 있다. 시민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업들이 룰을 정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22쪽)


중요한 것은 법과 제도라는 점. 라이시와는 통 인연이 없어서 <부유한 노예>도 몇 장 펼쳐보다가 말았는데 이 책은 생각보다 소박해서 순식간에 읽었다. 자유시장 만능론 같은 것과 ‘딱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자본주의의 개량을 이야기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개량은 중요하다. 아니, 어쩌면 끊임없는 개량만이 희망일지도 모른다.


▶ 대기업의 사회적 성격에 관한 문제는 자본주의가 급격하게 발전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제기되었고 산업화되어가던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주요 이슈로 부상했다.
결국에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만드느냐가 관건이었다. 일부 가능해 보이는 해결책이 유럽과 러시아에서 나왔다. 하나는 독점기업과 거대기업을 국가가 소유하는 것으로서. 이른바 말하는 사회주의였다. 이보다 더 과격한 방식은 공산주의였는데,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생산 수단’의 공동 소유에 기반한 것이었다. 세 번째 해결책은 거대기업을 정부의 일부로 만들고 한 사람에게 정부의 권한을 집중하는 것. 그러니까 파시즘이었다. 세 가지 모두 시도되었고 세 가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미국이 선택한 길은 일련의 실용적인 방법들을 결합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지나치게 큰 독점기업들을 더 작고 경쟁적인 단위들로 쪼개준 것이었다. 1890년의 셔먼법 Sherman Act은 미국 최초의 반反독점법이었다. 스탠더드오일과 아메리칸 담배가 대법원의 명령으로 해체되었다.  그후 수십 년의 기간에 걸쳐서 US스틸, 인터내셔널 하베스터, 제너럴 일렉트릭, 그리고 AT&T가 반독점 기소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반독점 법은 효과적인 무기가 되지 못했다. ‘독점’을 입증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37쪽)

▶ 1950~60년대에 정치학자들은 미국 민주주의의 특성을 규정하고자 애쓰면서 ‘이익집단의 다원주의’ 같은 추상적 용어들을 사용했다. 이 말은 예전의 교과서에 나오는 직접 민주주의나 대의 민주주의에 합치하지 않으면서도 대다수 시민들의 욕구와 희망에 나름대로 부웅하는 그런 시스템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들이 볼 때, 민주주의적인 정부는 서로 경쟁하지만 서로 얽힌 집단들 간의 지속적인 협상이었다. 이런 집단들은 서로 연합해야 무언가를 이룰 수가 있었기 때문에, 전반적인 시스템은 탄력성과 적응력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그 결과는 다수의 지배도 소수의 지배도 아닌 ‘소수들의 지배’ 였다.
연방정부는 간헐적으로 경제적인 힘의 새로운 중심들을 만들어 거대기업들의 힘을 상쇄시켰다. 노조와 소매업자, 소기업, 소액투자자들의 저항에 따른 이와 같은 상황은 경제 전반에 걸쳐서 일어났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이것을 ‘대항력 countervaillng power’이라고 표현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민간의 시장 지배력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대항력의 증가는 경제의 자율적인 규제 능력을 강화시키고 그럼으로써 정부의 불가피한 통제나 계획의 양을 감소시킨다”고 그는 썼다. (62쪽)

▶ 스스로 ‘업계의 정치인’을 자임했던 이 경영자들은 지주 의회에 나가 증언을 섰다. 이들은 국가를 위해서 무엇이 좋은지에 대해 의견과 시간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이들이 경영자로서 업계의 정치인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고 그럼으로써 이들이 보기에 자기 회사의 소비자와 주주들의 이익보다 전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과점 체제가 그것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쟁자가 치고 들어올 수도 있다는 걱정 없이 생산직 근로자들에게 푸짐한 임금과 복지혜택을 줄 수 있었던 것처럼, 자신들이 다른 곳에 관심을 쏟는 동안 경쟁자가 시장을 빼앗을 수도 있다는 걱정 없이 워싱턴에 가서 마셜플랜을 지지할 수 있었다. (68쪽)

▶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해서, 미국의 시스템을 떠받치던 거대 과점 기업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들의 매출과 수익, 고용은 훨씬 더 취약해졌다. 그리고 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주 큰 회사들이 점점 더 약해진 것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소비자들과 투자자들이 더 많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규모는 더 이상 진입 장벽이 아니었다. 2006년 평균적인 ‘포천 500’ 기엽은 1980년에 비해 (실질적인 기준으로) 3배나 커졌다. 그러나 가격을 높이거나 품질을 낮추는 기업들은 똑같은 것을 더 싸게 혹은 더 잘 제공하는 경쟁자의 침공을 당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현상의 증거는 경제의 중심에서 거대기업들의 가격설정 능력이 꾸준히 감소했다는 것이다. 과점 체제와 그것이 지탱하는 계획 경제의 논리적인 근거 자체가 점차 약해졌다. 이와 같은 변화는 1970년대에 시작된 생산성 하락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지금까지 일어난 변화의 이야기에는 영웅도 없고 악당도 없으며, 그 줄거리는 상당히 직선적이다. 이것은 1970년대에 새로운 기술들과 함께 시작되는데, 이 신기술들은 (내가 앞에서 얘기했듯이) 국방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신기술들이 차츰차츰 퍼져나가 여러 방면으로 확산되어 때로는 국경을 넘기도 하면서,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단위당 원가를 낮추는 생산 체제들 속으로 들어간다. (83쪽)

▶ 세 가지 상황 변화를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것들 모두 냉전 혁신들의 간접적인 산물이었다. 첫 번째는 이른바 말하는 세계화 globalization 이다. 두 번째는 새로운 생산 방식의 출현이다. 세 번째는 탈규제 deregulation 이다. 이것들 모두 규모의 경제와 20세기 중반의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다. (88쪽)

▶ 1980년대의 적대적 인수, 기업 사냥꾼, 정크 본드, 위임장 쟁탈전, 그리고 차입 매수를 촉발시킨 것은 욕심이 아니었다. 2000년대의 헤지 펀드, 사모 투자 회사, ‘소수파 행동가들’, 그리고 또 한번의 차입 매수와 위임장 쟁탈전을 유발시킨 것도 욕심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경우들에서 동기 유발의 요인은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기회들이었다. 욕심과 기회를 혼동하는 것은 욕망과 가능성을 혼동하는 것과 같다. 대학생들의 욕망은 40년 전에 비해 더 많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기능성은 훨씬 더 커졌다. (106쪽)

▶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은 우리 대부분의 안에 두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즉, 소비자와 투자자로서 우리는 더 좋은 거래를 원한다. 그러나 시민으로서 우리는 그런 거래에서 비롯되는 많은 사회적 결과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는 균형의 수단이 없다. 대개 소비자와 투자자로서의 우리의 욕망이 우세를 보인 다. 시민으로서의 우리의 가치관은 사실상 적절한 표현 수단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130쪽)

▶ 슈퍼자본주의는 수익을 악화시키는 착한 기업의 행동을 허용하지 않는다. 어떤 기업도 경쟁자들이 함께 하지 않는, 추가 비용이 발생하는 행동을 ‘자발적으로’ 할 수는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슈퍼자본주의에서는 규제만이 기업들이 수익에 해가 되는 일을 하도록 유도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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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20세기 - 화폐, 권력, 그리고 우리 시대의 기원 그린비 크리티컬 컬렉션 9
조반니 아리기 지음, 백승욱 옮김 / 그린비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세계체제를 다룬 책들은 어쩐지 구미에 맞는달까. 이 책도 재미있었다. 이렇게 두꺼운 책을 재미있다고 하면 뜨악한 눈으로 보는 친구들도 많지만, 아무튼 이 책은 재미있다. 화폐, 권력, 그리고 우리 시대의 기원- 이런 부제가 달려있는 책인데 재미없을 리 있나. 재닛 아부-루고드의 <유럽 패권 이전>과 안드레 군더프랑크의 <리오리엔트> 등을 이미 읽은 탓인지 논리 구조도 낯설지 않아 어렵잖게 책장을 넘겼다.

이 기나긴 책의 내용에 대한 학문적 평가들은 이미 많이 나와 있고 내가 그 이상을 아는 것도 아니니 생략하고, 그냥 책을 읽고 남은 의문만 적어놓고 넘어가려 한다.
요는, 지금의 글로벌 금융위기가 과연 ‘장기 20세기(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시대)’의 끝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위기’가 과연 ‘체제의 위기’인지 아니면 그냥 경기가 하강하고 주가가 떨어지는 그렇고 그런 위기의 하나인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1930년대의 저 대공황도 ‘장기20세기’의 위기라기보다는 순환적 국면에 해당됐었는데, 이번 위기는 과연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평가’의 차원이라기보다는, 금융위기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대안으로 어떤 시스템이 부상할 것이냐에 달려 있을 것 같다.

만약 우리가 지금 보고 겪고 있는 것이 진정한 시스템의 위기라면, 이것은 ‘장기 20세기’라는 자본주의의 한 국면의 위기 즉 ‘교체기’일까, 아니면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일까? 지금도 사회주의를 꿈꾸고 있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자체의 위기이길 바랄 것이고, 그냥저냥 착한 사람들이라면 신자유주의의 위기 국면이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계기가 되기를 바랄 것이다.
둘 중 어느 쪽도 아니고 못되어먹은 사람들이라면 “위기를 기회로 삼자”며 이 참에 없는 자들 것을 더 빼앗아 양손에 거머쥐려고들 할 것이다. 한국의 천민자본가들처럼 말이다. 못되어먹었지만 고상한 척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저런 논리를 들먹이면서 “자본주의는 영원하다”며 위기 국면을 거쳐 자본주의가 체질개선을 해 더욱 탄탄해질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 참에 구조조정 내지는 경제개혁을 하여 생산성 효율성을 높이자고 소리치면서 말이다.

아쉽게도 <장기 20세기>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심지어 ‘중국의 세기’ 이전에 나온 책이기 때문에 작금의 위기에 대해 직접적인 힌트를 주지는 않는다. 역자의 해설과 저자의 개정판 서문을 보니 저자가 일본을 과대평가한(이 책은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에 들어가기 전에 쓰였다) 것이 약점이라고 하는데, 뭐 그리 ‘치명적인’ 약점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좀 섣부른 예측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정도. 자본주의의 ‘섬들’(일본을 필두로 한 아시아의 용들)을 너무 칭찬해놓은 것 등등을 보면 아시아 경제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안다 싶지는 않다.
나중에 다른 저작에서 일본 대신 중국을 부각시켰다고는 하는데, 이 부분에서도 궁금증이 가시지 않는다. 일본이냐 중국이냐- 이것은 자본주의의 시대구분에서 본질적인 구분일까, 아니면 금융중심지가 바뀐 정도의 대수롭지 않은 변화일까? '팍스 자포니카'가 이미 물건너간 얘기가 된 상황이라고 치면, 이 문제는 '중국이 이끌어가는 자본주의(이런 시대가 정말로 올지는 모르지만)'가 어떤 모양과 내용이 될 것인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중국이 어디로 갈지는 참 궁금하고, 또 굉장히 중요한 문제일 것 같다. 아리기에게 물을 일은 아닌데, 앞날을 과연 누가 알리오마는 그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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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3-22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온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가 조금 더 근자의 논문-다양한 세계체계론자들-을 모아놓은거 아닌가 싶던데요...서점에서 대충 넘겨봤을 때 말이지요. 이 책은 너무 늦게 번역본이 나온거 아닌가 싶어요...

딸기 2009-03-23 13:57   좋아요 0 | URL
돈이 궁해서 요즘 책을 못 사고 있는데, 말씀하신 책은 아무래도 사서 읽어봐야겠어요.
이 책은 좀 늦게 번역본이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나와준 게 어딥니까. ^^
 
헝그리 플래닛 - 세계는 지금 무엇을 먹는가
피터 멘젤 외 지음, 홍은택 외 옮김 / 윌북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세계는 지금 무엇을 먹는가.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질문이다. 이 물음에 한마디로 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계인들은 참 여러 가지 음식을, 참 여러 가지 방법으로들 먹고 있기 때문이다. 몸에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 점점 사라져가는 먹거리가 있는가하면 글로벌하게 인기를 끄는 먹거리들도 있다. 문화에 따라 차이가 나는, 기호가 크게 엇갈리는 음식이 있는가하면 ‘먹거리 문화의 보편성’이라는 것도 무시 못 한다.
피터와 페이스 부부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미주 등 세계 24개국 30가정을 방문해 그들이 ‘무엇을 먹고 있는가’를 살핀다. 과연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먹고 있는지, 사진과 글을 통해 그들이 먹는 음식물들과 조리법 등을 엿보는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재미다.

피터는 사진을 찍고 페이스는 글을 쓴다. 이들이 만나 식사를 함께 한 가족들은 그 나라 그 사회의 단면을 보여줄 ‘대표성’이 있는 동시에, 그들만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 이야기는 책이 주는 두 번째 재미다. 호주의 애버리진(원주민) 가정, 전쟁 이후 보스니아 사람들, 아프리카 차드의 난민, 불가사리 튀김까지 먹는 중국인들, 경제제재에 짓눌려있지만 ‘그래도 삶이 있는’ 쿠바의 식탁, 그린란드 얼음땅 주민들의 외로운 사냥, 이탈리아 시칠리섬 가난한 생선장수의 삶, “항상 8분(80%)까지만 먹어라”라는 오키나와의 건강식단, 모든 먹을 것을 외국에서 수입하는 석유부국 쿠웨이트 중산층 가정, 오버사이즈에 허덕이는 미국 가정의 살빼기 노력...
먹는다는 것은 곧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밥상은 삶과 뗄 수가 없는 것이고, 밥상 문화에는 좋든 싫든 그 사회의 단면이 들어있다. 피터와 페이스 부부는 사진과 짧은 글들을 보다 보면 세계 곳곳 사람들의 삶이 저절로 눈 앞에 펼쳐진다.

아이디어도 좋고 포맷도 좋고, 그저 눈으로 보기만 해도 여러 가지를 배우게 되는 재미난 책이다. 하지만 ‘남들은 무얼 먹나’ 재미삼아 들여다보기 위한 팔자 좋은 부부의 여행기는 아니다. 피터는 과학·환경 문제를 다뤄온 보도사진기자이고 페이스는 TV 프로듀서 출신의 작가다. 부부는 이 책 이전에도 세계를 돌며 ‘물질적인 세계’ ‘벌레를 먹는 사람들’ 등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이 책에서 저자들이 주는 메시지는 명쾌하다. “세계는 지금 다양한 것을 먹고 있다. 그런데 다양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패스트푸드처럼 국적 불명에 건강에도 좋지 않은 것들이 점점 더 퍼져나가고 있다. 코카콜라와 맥도널드의 지방덩어리, 당분·칼로리 덩어리 음식에 우리의 밥상을 내어줄 것인가. 세계는 지금 먹거리, 곧 삶의 기로에 놓여 있다.”

저자들은 한 가정을 찾아가 장을 보는 데에서부터 음식을 차려먹는 것까지를 충실하게 기록한다. 어느 곳에 가든, 시작은 장을 본 일주일치 먹거리들을 몽땅 식탁 위에 올려놓고 가족들이 모여서 사진을 찍는 것이다. 사진들을 넘기다 보면 비닐 포장된 음식재료, 인스턴트식품이 세계의 식탁을 얼마나 점령했는지를 보며 놀라게 된다.
그러므로 이 책의 타이틀, ‘헝그리 플래닛(배고픈 세계)’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있다. 세상엔 배고픈 사람 못잖게, 탐욕으로 배를 채우는, 먹거리가 아닌 탐욕의 ‘고픔’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까. 지구를 갉아먹는 것은 진실로 배고픈 이들이 아니라, 더욱더 많은 칼로리를 먹어치우려 애쓰는 영양과잉의 우리들이다.

만일 피터와 페이스가 우리 집에 와서 취재를 한다면 뭐라고 쓸까. 고속 개발된 국가의 전형적인 대도시 주민, 고층 아파트에 살면서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며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지만 실제 집에서 밥을 먹는 시간은 거의 없는 핵가족, 첨가제 덩어리 인스턴트식품을 피하고 싶어 하지만 유기농 먹거리를 고집할 돈과 의지는 모자란 현대인, 아마 그렇게 비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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