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 시대의 철학 - 하버마스, 데리다와의 대화 현대의 지성 120
지오반나 보라도리 지음, 손철성.김은주.김준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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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에서 대형 테러가 났던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회사에서 두 명의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에 부딪쳤다고, 큰 일이 일어난 것 같다고. TV를 켰다. CNN방송은 아무 설명도 없는 채로, 불타오르고 있는 무역센터 건물을 비추고 있었다. 신문사에서 일하는 죄로 부랴부랴 선배들에게 연락을 하고 회사로 달려가 호외를 만들었다.
그 뒤로 두달 동안은 정신이 없었다. 새벽같이 출근해서 정신없이 외신을 들춰보고 기사를 '써제꼈던' 날들이었다. 나는 그때 임산부였고, 뱃속의 아이는 아마 태중에서 '테러'와 '전쟁'이라는 두 단어를 가장 많이 들었을 것이다. 이 아이가 태어나 살아가야 할 '테러시대'라는 것에 대해 나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조지 W 부시가 선언한 대로 '테러와의 전쟁'은 계속됐고, 결국 이라크전이라는 고전적 의미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라크 파병논란, 김선일씨의 피살 등의 사건들을 '후일담'으로만 치부할 수 없듯이, '테러시대'는 이제 우리에게도 '남의 일'이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9.11 사건 이후로 나의 의식에는 여러가지 변화가 생겼다. 중동에 대한 관심은 전부터 있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공부 아닌 공부를 하게 됐고 이라크를 방문하게 됐다. 이후 3년 동안 내 머릿속에는 언제나 '중동' '이슬람'이라는 단어들이 맴돌았다. 신경과민증 혹은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머리와 마음으로 중동을 찾아 헤맸다. 중동 내지는 이슬람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다소 안목이 생긴 것도 있지만 언제나 머리가 '고팠다'고 할까, 항상 뭔가 결핍된 듯한 느낌이 있었다.

9.11 이 있은 직후에, 선배 한 분과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몇년 지나면 이 사건에 대해 역사적, 철학적인 분석들이 쏟아져나오겠지, 이 사건이 세계사에서 어떤 의미로 자리매김될지 궁금하다...
<테러시대의 철학>은 그런 의미에서,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내가 기다리던 바로 그런 책이었다. 미국 바싸르대학 교수라는 저자는 9.11 테러가 일어나고 두 달 뒤, 뉴욕에서 하버마스와 데리다를 각각 만나 인터뷰했다. 책은 두 사람과의 개별 인터뷰와 함께, 두 '석학'의 이야기를 풀어 설명해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하버마스, 데리다. 얼마나 저명한 '철학자들'인가!

하버마스의 이야기는 그닥 인상적이지 못했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것은 데리다와의 대화 부분이다. 두 사람의 인터뷰 스타일은 정반대였던 듯하다. 하버마스가 간결하게 '신사처럼' 얘기했다면, 데리다는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가운데에서 정곡을 찌르는 스타일이랄까. "9.11은 대사건이 되겠지요"라는 질문에, 데리다는 "무엇이 '대' '사건'인가"를 되묻는다. 9.11이라는 숫자들로 '명명'함으로써 이 사건을 반복해서 되뇌이게 만드는 동시에, 현재진행형인 테러/테러시대/테러시대를 불러온 모순들을 마치 '종결된 사건'인 양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데리다, 하면 생각나는 키워드는 뭐니뭐니 해도 '해체'다. (데리다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아무튼) 데리다는 우선 9.11 이라는 '이름'을 해체하고, '테러' 혹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말이 얼마나 모호한 것인지를 지적한다. 무엇이 공포(terror)인가. 이 '공포'의 원인은, 그것이 미래에 맞닿아있다는 점이다. 더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 이런 일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냉전이라는 최소한의 균형조차 깨어진 뒤에 찾아온 '팍스 아메리카나'. 9.11은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던 '미국'이라는 안전판을 강타하고 부숴버린 것이었고, 거기에서 '미래에 대한 공포'가 생겨난 것임을 지적한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보자면(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미국이 지목한 '테러리스트'들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생겨난 존재들이다. 데리다는 이를 특유의 '자가-면역' 논리로 해석한다. 스스로의 면역체계를 부수면서, 안에서부터 생겨난 병리학적 존재들.

테러와의 전쟁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는, 지금의 이라크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폭력적인 교조주의에서 근본주의자들 스스로가 해방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데리다라고 해법을 알까. 철학자에게 '현실적 해법'을 내오라고 주문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의 문제의식으로 족하다.
우리 나라에서도 언제부터인가 '똘레랑스(관용)'라는 말이 유행을 했던 것 같은데, 재미난 것은 '관용'에 대한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정반대되는 평가다. 하버마스는 비록 '관용'이라는 말이 어떤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민주적인 사회'에서라면 그 한계가 다수의 뜻에 따라 합리적으로 결정될 것이라면서 '관용'의 유효성을 높이 평가한다.
반면 데리다는 '관용'이라는 개념이 갖고 있는 기독교적 성격을 지적하는 동시에, 관용은 어디까지나 '문턱'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 사회는 이러저러하지만, '너'의 행동도 이러저러한 수준까지는 봐줄 수 있다, 까놓고 말하면 관용은 그런 것 아니냐는 얘기다. '봐줄' 수 있는 한도, 그것이 관용이다. 관용이라는 개념에 반대하면서 데리다가 내놓는 것은 '환대'라는 개념이다. 네가 비록 이러저러할 지라도 나는 받아들인다- 보라도리는 데리다가 말한 '환대' 혹은 '초대'의 개념을 '용서'와 연결짓는다. 무조건적인 환대, 무조건적인 용서, 무조건적인 책임.
내 집에 누가 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손님을 환대한다면-- 반가운 손님이 올 수도 있고, 강도가 칼을 들고 들어와 나를 찌를 수도 있다. 환대는 나에게 엄청난 위험부담을 가져다주는 그런 개념이다. 관용을 넘어선 '완전한 환대'는 법적으로, 국제정치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데리다 역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 '불가능한'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 한, 기존의 논리를 해체하고 새롭게 상상하지 않는 한 해법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이 해체주의자의 지적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지성을 대표하는 하버마스와 데리다의 문제의식은 결국 '유럽' '계몽주의'의 문제를 향해 간다. 이성, 합리화, 이런 것들로 특징지어지는 계몽주의-근대화의 프로젝트를 포기해야할 것인가.
타리크 알리 같은 사람은 "9.11 이후에 변한 것이 과연 있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9.11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평가절하한다. 과연 9.11은 어떤 사건이었나.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이 미-소 양극체제에 일격을 가한 사건이었다면, 냉전이 끝나고 10년만에 일어난 9.11은 미국 일극체제를 향해 폭탄을 터뜨린 사건이었다. 빈 라덴같은 근본주의자들은 미국을 '적'으로 명시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화에 반기를 들었다. 빈라덴의 선전포고를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화/계몽주의 시대에 대한 총체적 반대'로 해석할 수 있을까?

데리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를 통칭해서 '아브라함적 종교'라 부른다. 하버마스는, 이 아브라함적 종교들 중에서 '구미'의 종교에 해당되는 기독교의 경우 근대에 이르러 '세속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유일신교 특유의 배타성과 폐쇄주의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여러가지 역사적, 경제적 원인이 있겠지만) 이같은 세속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상태에서 모순이 축적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지경(근본주의의 발흥)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을 찾는 것, 합리화와 근대화(표현이 좀 이상하군)는 더더욱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할 과제라고 본다. 이 부분에서는 데리다 또한 문제의식이 일치한다. 미국에 맞서는 (척하고 있는) 지금의 유럽에 한정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 시작된 계몽주의의 이상'이라는 의미로 '유럽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책 말미에는 이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지난해 두 사람이 프랑스와 독일에서 동시에 발표한 '공동선언문'이 실려있다.

9.11의 의미와 계몽주의의 문제-- 이것은 너무나 거대한 이야기이기에, 하버마스와 데리다가 던진 짤막한 이야기는 그저 '분석의 시작'에 불과하다. 이런 분석작업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갈지 궁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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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 2004-10-05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 님의 글이 이주의 리뷰로 추천돼 있어 냉큼 들어왔답니다. 축하드려요!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볼 수 있기를요.. ^^..

제가 봐온 딸기 님의 여느 글과는 사뭇 어조가 다른데요. 9.11 테러에 대한 하머마스와 데리다의 입장, 특히 데리다의 '환대' 개념을 소개하면서 9.11 테러를 다시 바라보게 해주는 글은 차분하면서도 엄정한 분석의 시선을 잃지 않는 것이 말의 정직한 의미에서 '정치한 글'이라는 생각입니다.

9.11 테러에 대한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최근에는 '화씨 911' 같은 영화를 통해 보다 대중적인 고발(?)도 이뤄졌지만, 여전히 '트라이앵글'의 갈등, 이란을 비롯한 에너지원을 둘러싼 각축은 도를 더해가는 듯합니다.

딸기 님의 글을 너무 잘 읽어서 몇 자 쓴다는 게 췌사가 될 수도 있었겠네요. 이주의 리뷰로 선정된 것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추천도 하고 갑니다.

딸기 2004-10-06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블로그를 근근히 유지하고 있는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브리즈님이라구요. ^^

balmas 2004-10-06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딸기님.
좋은 서평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처음 서평 볼 때부터 좋은 서평이구나 했는데(첫번째 추천자는 바로 접니다. ㅋㅋ),
이 주의 서평으로 뽑히셨군요. 축하드릴게요.

딸기 2004-10-06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처음에 추천 1 올라가있길래, 단순하고도 상상력이 없는 저는
'알라딘 편집부에서 추천도 해주나보다' 그랬다는 거 아닙니까.
한동안 알라딘 접근을 피하다가(돈이 넘 많이 들어요 ㅠ.ㅠ) 최근 블로그질을 개시했는데
새로운 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

가을산 2004-10-06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에요.
이미지, 아직도 오드아이시네요. ^^

딸기 2004-10-06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가을산님. 오늘 하루종일 알라딘에서 놀고 있는데, 여러 분들 만나뵙게 되네요.
얼마전 가을산에 다녀왔답니다. 벌써 2주 전이던가... 단풍이 막 들기 시작할 무렵의 가을산에서 청량한 기분 한껏 만끽하고 왔어요. 가을산님은 이 가을 어떻게 보내고 계신지요.
 
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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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이 핵폭탄에 반대한 것을 알고 있고, 혼자 조용히 반대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서명운동에 가두시위까지 앞장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외에는-- 없다. 영국 사람이라는 것 정도일까나.

맑스의 사위이기도한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는 책을 몇년 전에 읽었다. 그게 언제였더라. 아마도 1996년 정도가 아니었던가 싶은데. 라파르그의 책과 러셀의 책을 자연스럽게 비교하게 됐는데, 내용은 사실 비슷하다. 노예가 아닌 그리스 '시민'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사색을 예로 든 것도 그렇고, 여가를 강조한다는 것도 그렇고, 내용에선 별 차이가 없다. 문체를 놓고 보면 라파르그의 책은 위트와 독설이 넘치는 반면 러셀의 책은 내용에 걸맞지 않게 진지하달까. 전자는 '여유와 사색'에 대한 밀도 있는 한편의 에세이인 반면 후자는 러셀의 다종다양한 문제의식이 담긴 글들을 묶어놓은 것이라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러셀의 이 책은, 솔직히 그닥 재밌지는 않았다. 이 사람, 아니 이 분, 대단한 분이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책에 전개된 주제들에서 논리적 정합성이라기보다는 노인네 잔소리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기나긴 인생에 걸쳐(98년을 살았으니 길긴 길었다) 끊임없이 사색하고 고민하고 투쟁해왔던 내용들을 짧은 글로 정리해놓았으니 외려 '책이 부실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게다. 적어도 러셀은 이 책 이상이기 때문이다. '내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반대하는 이유' '사회주의를 위한 변명'과 같은 글들에선 시대가 안겨준 고민으로 인해 결국 상아탑 밖으로 뛰쳐나올 수 밖에 없었던 늙은 철학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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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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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어반복에, 일부러 독설을 뿜어내는 우스꽝스런 마초이즘--
그런데, 이런 마루야마의 소설이 아주 좋다. 옛날식 소설에 안주하는 게으름뱅이 멍청이 소설가들은 가라, 계집애같고 게이같은 놈들아, 평론가 나부랭이들아, 나는 이렇게 초인적인 열정과 노력으로 글을 써서 승부를 볼 것이다, 영화와 싸울 것이다, 찬연한 이미지를 글로써 만들어낼 것이다! 이런 식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이런 선언을 할 자격이 있다. 신경숙 따위가 추천사를 쓰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텐데. 일년에 소설 한두권 들춰볼까 말까 하는 나같은 독자에게 완벽한 면죄부를 주는 소설가의 고백록이 아닌가! 지지부진한 소설들, 구태의연한 '옛날 소설들'에 지치고 싫증난 나같은 독자가 마루야마의 소설에 열광하고 말았으니, 자부심마저 느껴질 정도다. 그래, 소설가들 잘못이었어, 내가 무식한 독자였던 것이 아니었어, 새로운 이미지를 형상화해주는 새로운 소설만 있다면 얼마든지 읽어주겠단 말이다! 나는 마루야마의 논리에 편승해서 수준높은 독자가 되어버린다.
사실 이 책은,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 혹은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전혀 읽을 필요가 없다. 제목 그대로, 마루야마 겐지가 소설가로서 자신의 각오를 쓴 글들이다. 스물 몇살 때부터의 에세이들을 모아놓았는데 다만 놀라운 것은, 어쩜 이 사람은 젊은 시절이나 나이가 들어서나, 말하는 내용이 이리도 똑같을 수 있나 하는 점이다. 녹슬지도, 무뎌지지도 않다니. 이런 인간이니깐 그런 소설을 쓰지... 나는 줄곧 <천년동안에>의 작가 마루야마 겐지를 떠올리면서 이 책을 읽었다. 문장은 의외로 졸문에, 반복에, 재미 하나도 없다. 아무튼 성질 유별난 작자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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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04-27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예전에 써놓은 글 아닌가요? 암튼, 서재를 방치하지 않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셨나요?

딸기 2004-04-28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예전에 써놓은 글 아닌데요. 이 책 읽은지 얼마 안 됐거든요. ^^
서재는, 계속 방치--입니다. 다만, 아시잖아요 ^^ 리뷰 자꾸 쓰면 마일리지 올라가는거~~

브리즈 2004-10-09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편집자가 내게 물었다. "어떤 독자들을 상정하고 소설을 쓰는가?" 나는 곧바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목적을 갖고 전력투구하며 살아가는 젊은이나,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여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남자들이다."
그러자 편집자는 이렇게 반박했다. "이해는 하겠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는 문학이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되물었다. "그렇다면 문학이란 대체 어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인가?"
편집자는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한참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후 그는 두 번 다시 그 점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 228쪽.

나는 심심풀이로 책을 읽는 것이 싫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처럼 질주하는 편이 좋다. 그 쪽이 훨씬 재미도 있고, 훨씬 감동적이다. - 246쪽.

99년에 읽었던 책이에요. 그 무렵 겐지의 소설에 푹 파져 있던 터라 읽었었는데, 책의 앞 내지 여백에 이렇게 베껴 놓았었네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졸문과 반복만 있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요. ^^.. 괜히 딴지 걸다 갑니다. ㅎㅎ..

딸기 2004-10-09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지에 걸려서, 철푸덕~~
저도 마루야마의 소설 몇개(아주 쬐끔) 재밌게 읽었어요. 감히 마루야마의 글을 졸문이라 내갈긴 것은, 한번 마루야마 흉내를 내봐야지, 했던 거지요. ^^
 
베이루트에서 예루살렘까지
토머스 L. 프리드만 지음, 장병옥.이윤섭 옮김 / 창해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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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내전부터 1988년 1차 인티파다까지 다루고, 뒤에 미국계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별도 항목으로 다뤄놨다. 프리드먼의 솔직한 '취재기'이기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진 감은 있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레바논 내전 당시 베이루트에 주재하다가 이후 예루살렘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간 프리드먼이 93년에 펴낸 책이니 딱 10년이 됐다.

그 10년 동안 변한 것들도 있고, 변하지 않은 것들도 있다. 변한 것이라면 당시 프리드먼의 '낙관적 전망'보다 훨씬 더 상황이 안 좋아졌다는 점. 93년은 오슬로 평화협정이 맺어진 시기였고, 프리드먼의 견해는 따라서 너무나 낙관적이었다. 2차 인티파다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이 목숨 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지금의 상황과 극히 대조되는 것이 오히려 인상적이다.

변치않은 것은 사건의 '주역들'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계속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고, 그들의 지도자들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아리엘 샤론은 베이루트의 '룰'을 모른채 레바논 내전에 뛰어든 무뢰한(그러나 상당히 담백한 -_-)으로 그려지고, 야세르 아라파트는 능구렁이로 묘사된다. 죽은 시리아의 아사드는 더없이 잔혹한 인물로 나타난다.

사실 내가 재미있게 본 것은 이 책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부분이었다. 지도자는 국가(집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지도자의 캐릭터가 한 국가의 발전경로를 어느 정도까지 결정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어설픈 유물사관에 입각하여 결정론적으로 세상을 보던 것과는, 지금 나의 시각은 사뭇 다르다. 국제관계에 대해 주워듣고읽다 보면 지도자의 인성이라는 것이 국가의 행로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자꾸만 확인하게 된다. (시리아와 레바논의 케이스를 여기에 바로 대입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지도자론에 너무 충실한 이들은, 종종 오류를 범하곤 한다. 시오노 나나미처럼 '위대한 독재자'론으로 흐른다거나, 한 국가/민족집단의 역사적 발젼경로를 무시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러나 그런 종류의 위험을 알고는 있지만, 의외로 지도자의 캐릭터는 굉장히 중요한 것 아닐까? 이 문제에 집착하는 까닭은, 박정희 정권을 어떻게 볼 것인지 여.전.히. 궁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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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 로이터 통신의 팔레스타인 리포트
로이터 통신 엮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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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로이터통신의 팔레스타인 리포트. 분쟁과 평화과정의 역사적 장면들을 포착한 사진들이 아주 인상적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책은 글보다는 사진을 봐야 하는 책이고, 편집도 사진 위주로 되어 있다. 클린턴과 아라파트, 라빈, 무바라크, 후세인 국왕이 한 방에서 제각기 넥타이를 정돈하는 모습처럼 역사적 장면과 그 뒤안길을 생생하게 포착해놔서 자료사진 가치도 크고 재미도 있다.

그런가하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치 장면, 폭력으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이 오열하는 모습은 너무 슬프고 비극적이다. 책 제목에서 보이듯 비극은 끝나지 않고 있고, 독선과 아집도 계속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책의 마지막 사진은 무지개다.

'베들레헴 하늘을 수놓은 이 무지개 사진을 통해 나는 극히 아름다운 순간 뿐 아니라 크리스마스 이브에 예수의 탄생지를 방문하는 내 꿈도 포착한 것 같았다. 더구나 새로운 세기의 첫해가 끝나는 시기에 무지개가 뜬 것은 더 의미깊어 보였다. 팔레스타인 봉기가 4개월 째에 들어서는 등 어지러운 시절이라 그 모습이 더 각별했다. 바리케이드에도 불구하고 많은 순례자들이 베들레헴에 모여들었다.
그날은 하늘이 구름에 덮여 있었지만 가끔씩 그 사이를 뚫고 햇빛 줄기가 비쳤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구룸을 벌리고 위에서 희망을 보내주려 하는 것 같았다. 한 순간, 예수탄생 교회 밖에서 베들레헴 상공에 뜬 이 아름다운 희망의 무지개를 보고 내 가슴은 뛰었다. 나는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무지개는 오래가지 않았고 곧 사라졌다.' (피터 앤드류, 2002년 12월)

다시 한번 역사를 향해 '누구의 죄인가'라는 대답 없는 질문을 하게 만든다. 이-팔 사태를 개괄적으로 알기 원한다면 이 책이 가장 좋은 길잡이가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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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열정사이 2006-08-06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주문해서 볼려구요. 가장 중립적 입장에서 쓰여진 자료를 찾고싶었는데, 이책이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