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소연 외 옮김 / 시각과언어 / 1995년 3월
평점 :
품절


라캉도 모르면서 지젝을 읽는다? 나는 라캉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라캉이라는 이름은 여기저기서 봤지만 도대체가 머리가 아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젝의 책을 읽고난 느낌은 한마디로 '재미있었다'가 되겠스무니다... 라캉을 모르면서 지젝을 읽는 만용을 저지른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라캉을 모르기 때문에 지젝을 읽었고, 지젝이라는 훌륭한 선생님을 따라서 '라캉식으로 대중문화 삐딱하게 보기'를 하는 작업은 재미있었다. 이 책은 라캉의 이론을 대중문화 작품들을 통해 해석해주는 것이기도 하고, 대중문화 작품들을 라캉의 눈을 빌어 들여다보는 것이기도 하다.

책은 현실과 실재, 욕망과 충동의 문제를 다루는 것에서 출발해 헐리우드 영화와 추리소설 같은 대중문화 장르들을 넘나들며 이미지의 이면에 숨겨진 공포와 환상을 파헤친다. (안타깝게도, 이 책을 읽으면서 뼈저리게 느낀 나의 무지함은-- 예상과 달리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 대한 무지함이 아니라 히치코크 내지는 영화에 대한 무지함이었다)
영원히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는 아킬레스의 패러독스처럼(양자역학 전문가들이라면 이 패러독스 자체에 극심한 거부감을 느꼈겠지만) 쾌락은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데에서 지젝은(혹은 라캉은) 출발한다. 지젝은 현대의 욕망의 역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들을 예로 들면서 "욕망은 환상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욕망의 실현은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충족되기까지 '끝없이 쫓아가는' 그 과정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젝에게 있어 외디푸스의 아버지, 즉 '살해된 아버지'라는 모티브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던 아들의 쾌락을 방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신화적 모티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다. 그에게 아버지의 역할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쾌락에 터부(금기)를 덧씌우는 기제로 작용함으로써 사실상 우리를 교착상태에서 구해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죽음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통해 우리는 쾌락의 충족을 지연시킬 핑계거리를 찾게 된다.
그러나 지젝(라캉)이 보여주는 현실과 실재의 메커니즘은 좀더 복잡하다. 상징적 메커니즘은 실재의 어떤 한 조각에 고정돼야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판명된다. 핼리혜성(기호)이 공포감과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뒤 재앙(실재의 응답)이 일어나는 것처럼, 어떤 사물/사건이 '기호'로 읽히는 것은 실재의 응답이 있을 경우에 한한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직면해 있는 '실재의 응답'으로 지젝은 생태학적 위기를 거론한다. 생태학적 위기는 '우리 삶에서 자명한 확실성의 영역을 잠식하는 것'이기에 궁극적인 형태의 위기가 된다. (하지만 '자연의 균형이라는 관념을 폐기하라'는 '라캉식 요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충족시킬지에 대해서는 아쉽지만 언급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대중문화 분석으로서 지젝의 작업은 이 책에서 히치코크의 영화들에 집중돼 있다. 지젝에 따르면 '내가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나를 응시한다'. 이 지점에서 관점의 전복이 이루어지는 한편, '응시'는 대상과 나의 관계를 분열로 이끄는, 즉 나의 현존을 교란시키는 '오점이자 얼룩'이 된다. 나는 거리를 두고 (안전한 곳에) 떨어져서 대상을 보지만 응시의 과정을 거치면서 내 머릿속의 프레임이 부서져버리는 것이다. 대상은 내 머리 속에 개입해들어오면서 (히치코크 영화의 사물들처럼) 기괴한 것으로 변해버린다. 지젝이 제안한 '라캉식으로 대상을 보기'는 이렇게 일상의 기괴함을 극대화함으로써 공포와 환상을 직시하게 한다. 이같은 작업이 현학성을 넘어 대중과 만나는 것은, 공포와 환상의 '기호'들이 '실재의 한 조각'과 연결돼 있다는 점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지젝은 이런 '낯설게 하기'를 이데올로기적 징환과 연결시킨다. 국가기구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택되어 끊임없이 우리의 뇌리를 떠도는 기호들에 대해, 이런 것들의 인위적인 성격을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이런 징환(신호)들을 오히려 컨텍스트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종류의 낯설게 하기를 통해 우리는 징후와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는데, 이를 정치의 영역으로 연결시킨 분석이 흥미롭다. 군중심리 혹은 집단광기처럼 하나의 징후(예를 들면 스스로 유대인을 때려잡는 몽둥이가 된다든가)에 매달리기도 하고, 트라우마를 안겨준 무언가에 집착함으로써 고통을 극복하는 효과를 얻기도 한다. 환경운동가들이 구호화한 '체르노빌'이라는 은유에 이르면 '징후와의 동일화'는 전복의 수단이 된다.

지젝의 글에서 눈에 띄는 또 한가지는 '환상의 윤리학'이다. 지젝은 타인의 환상공간에 침입하는 것, 그럼으로써 그의 꿈을 망치는 것이 곧 죄라고 말하면서 죄에 대해 정신분석학적 정의를 내린다. 라캉에게서 이어받은 이같은 '환상의 윤리학'을 통해 우리는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윤리학(인간의 자연권/보편적 이성)의 와해에 대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나로서는 수긍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했다. 타인의 꿈 또는 환상에까지 '인권'이라는 잣대를 적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유용할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철학자들 사이에 '계몽주의의 시대는 갔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유행할지언정 인간의 자연권/보편적 이성을 모두 부인할 수 있을 정도의 시대가 과연 된 것일까? 이 문제는, 구미의 철학자들이 너무 쉽게 포스트모던을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보다는 송두율 식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나의 근본적은 의문과 관련이 있겠지만.)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지젝의 문제의식이 히치코크 분석을 넘어서 정치적 실천의 문제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형식적 민주주의가 고도의 추상화를 전제로 하고 있으며, 주체가 상실된 추상화는 결코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연관들을 해소할 수 없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에 있어서도 (대중문화의 컨텍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주체는 공허 속에서 병적인 오점으로 더럽혀져 있다는 것이다. 형식적 민주주의 안에서 주체는 오직 민족주의의 이름을 걸고서만 나타나게 돼있으며, 민족주의는 신화를 통해 집단적 쾌락을 조직하는 방식일 뿐이다. 이런 언급은 물론 지젝이 민족주의의 폭력적 분출을 겪고 있는 동구권의 지식인이라는 조건에서 나온 것이기도 할 터이다.
지젝은 "서구의 형식적 민주주의 내에서 환경보호론자나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며, "일단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형성된 '생활의 패러다임' 내에서의 근본적 변화라는 기획은 반드시 형식적 민주주의의 토대 자체를 파들어가게 돼있다"고 말한다. 이런 지적은 굉장히 설득력 있지만, '라캉만이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말하는 지젝에게는 과연 어떤 해법이 있는가. 민주주의에 대한 현란한 해석, 그리고 공허감, 그런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나는 책을 읽으면서 답을 찾지 못했다.

책을 읽고난 뒤에도 라캉은 여전히 불가해한 존재로 남았다. 하지만 어찌됐든, 지젝을 따라 대중문화를 보는 동안 '틈새를 본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 점에서는 대단히 재미있었다. 라캉은 어떤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젝처럼 보기', 즉 '삐딱하게 보기'에는 모종의 훈련이 필요하며 그것이 묘한 쾌감을 준다는 것은 분명하다. 남은 물음들에 대한 대답은 천천히 찾아봐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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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11-05 0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망은 환상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욕망의 실현은 '충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충족되기까지 '끝없이 쫓아가는' 그 과정에 있다는 것".......................요즘 마냐 생각! .......나머지는 역쉬 넘 어렵군...

딸기 2004-11-05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너무 어려워서 머리에 쥐날 뻔 했는데, 다행히도 이 책 번역은 훌륭했어.

넘쳐나는 번역체 때문에 두려워서 책을 못 읽을 지경...

갈대 2004-11-05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2년쯤 전에 10쪽 정도 읽다가 너무 어려워서 덮어버렸습니다. 지금도 책장에 꽂혀 있긴 하네요. 제가 무지한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번역에 심대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다시 도전을 해야 할 텐데..

딸기 2004-11-05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의 번역 꽤 마음에 들었는걸요. 이런 종류의 책들, 말을 하도 이리저리 꼬아놔서 읽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 책은 제법 괜찮았어요.

로쟈 2004-11-13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책들은 곳곳이 '지뢰밭'인데, 그나마 목숨은 건질 수 있는 번역 중의 하나인 듯합니다. 저도 귀국하면 다시 읽어봐야겠네요...

딸기 2004-11-13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지금 모스크바에 계시다고 하셨죠? 언제 귀국하세요?
 
반역의 책 - 옹정제와 사상통제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이준갑 옮김 / 이산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스펜스의 책이 언제나 그랬듯, 이 책도 역시! 느무느무 재미있었다!

중국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지만 나는 중국의 황제들, 정확히 말하면 강희제와 건륭제에게 관심이 많다. 주제에 무슨 황제들이냐고? 경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최상급 드라마 '황제의 딸'에서 비롯된 관심이라고 설명하면 되려나.
실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이 드라마는 건륭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건륭제 자신이 꽤 중요한 주연급 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건륭제 역할을 맡았던 배우를 좋아하기도 하고, 드라마에 묘사된 황제의 이미지에 뿅간 측면도 있다. 변방의 북소리...랄까, 조선(특히 임진왜란 이후)에서 유교 근본주의(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_-)가 판친 것과 달리 중국에서 유교의 역할은 조선에서만큼 절대적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저런 류의 중국 드라마들이다. 건륭제가 누구인가. 중국 청대의 전성기를 장식한 최고의 황제, 청나라를 저~멀리까지 확대한 팽창정책의 실행자 아니던가.
울나라에서 세종대왕의 여자관계와 가족관계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드라마가 나온다면 아마도 전주이씨 종친회에서 명예훼손 소송을 걸고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반면 중국(대만이나 홍콩이 아니라 본토) 방송사, 그것도 CCTV가 제작한 '황제의 딸'에 나오는 건륭제는 참으로 인간적이며 호탕하며, 심지어 페미닌 하기까지 하다!

책 이야기는 잠시 미루고 드라마 이야기를 좀더 하자면-- 홍콩에서 제작된 하류급 드라마 '회옥공주'라는 것도 있었다. 드라마의 질은 형편없었지만 주인공으로 나왔던 홍콩 배우 손요위는 깔쌈하니 멋졌다. 손요위가 극중에서 맡은 인물은? 바로 강희제다. 강희제는 또 누구인가. 청나라 두 번째 황제, 누르하치(이름도 멋있지)의 대를 이어 청 왕조를 이어받아 한인들을 제압하고 전제군주정의 틀을 마련한 사람 아닌가.
이 인물, 드라마 '회옥공주'에서는 역시 우스워진다. 역할이 코믹해서가 아니라, 황제를 다루는 중국권 드라마들의 방식이 우리나라 사극들과 사뭇 다르기 때문에 생경하면서 재미나게 보이는 것이리라. 중국권 드라마들은 황제를 우리가 생각해온 '전통적인 방식'으로 다루지만은 않는다. 황제도 인간이므로 우스운 짓도 하고 실수도 하고 군신들과 말싸움을 하기도 한다. 그저 그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중국드라마들은 충분히 재미있었다. 심지어 내 경우는, 드라마들을 통해 역사를 보는, 왕조를 보는 새로운 눈을 얻게 된 것만 같았다. 강희제를 타이틀롤로 삼은 스펜스의 또다른 저서를 잠시 언급하자면, 이 책은 강희제 스스로 남긴 공식/비공식 기록들을 100% 인용해서 강희제라는 인물과 그 시대를 서술하고 있다. 엄청난 학문적 능력과 문학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책에서 스펜스는 전제군주 강희제의 통치방식과 함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보였다.

이제 '반역의 책'의 주인공인 옹정제에게로 돌아가자. 옹정제는 강희제와 건륭제 사이에 끼인 황제, 즉 청나라의 세번째 황제였다. 강건한 강희제, 화려한 건륭제의 이미지에 눌려있던 옹정제를 스펜스는 어떻게 다루었을까. 옹정제의 치세에 있었던 일을 굳이 책의 주제로 삼은 까닭은 무엇일까. 옹정제는 어떤 식으로 중국을 통치했으며, 또한 그의 시대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과연 그의 시대에 있었던 일은 다른 곳이 아닌 중국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까. 이 질문들에 차례차례 대답하기 앞서 책의 주인공을 소개하자면-- '반역의 책'의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옹정제와 '반역자 쩡징'이라는 인물이다. 또한 그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반역의 책', 즉 '대의각미록'이라는 책이다.

책은 쩡징이라는 인물이 만주족 황제에 맞서 반역을 도모할 것을 제안하는 서신을 '충성심 깊은' 한족 출신의 한 관리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쩡징이라는 인간은 기실 반역이란 것을 할 능력도 없는 인물이었고 그저 시골 몽상가에 불과했다. 쩡징은 체포됐고, 쩡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대로 숱한 사람들이 '반역자'의 대열에 올라 고초를 겪는다. 여기까지는 '예정된 스토리'다.

우리의 주인공 옹정제는 수차례 벌어진 '한족의 역모'의 복사판으로 보이는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여기에 '역사의 묘미'가 있다. 스펜스의 말을 빌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도 일어나곤 하는 것'이 바로 역사다. 무릇 황제라면 반역자를 능지처참하고 3족을 멸해야 할 것이거늘... 옹정제는 이 반역자를 '논리적으로 설득하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옹정제와 반역자 사이에는 문서를 통한 대화가 시작된다. 한족만이 인간이고 나머지는 금수라는 한족 특유의 중화사상이 어째서 모순인지, 명 말의 혼란을 청조가 어떻게 바로잡았는지, 백성들이 욕한다는 경제제도들이 실제로는 왜 필요하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옹정제 개인에 대한 유언비어들은 어째서 사실이 아닌지를 온갖 자료 총동원해 쩡징에게 보여줌으로써 황제는 논쟁에 승리한다. 황제는 첫번째 충격적인 결심에 이어, 아예 이 모든 과정을 책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까지 보여주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해서 편찬된 책이 '대의각미록'이다. 황제와 반역자는 이 책의 공동 집필자가 되는 셈이다. 스펜스는 이런 '있을법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진 상세한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옹정제라는 인간의 캐릭터와 청조의 통치구조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 단면은 참으로 낯설고 신기하고 재미있다.

책의 말미에 아주 잠깐 등장하는 건륭제도 주연급 조연에 해당된다. 다름아니라 건륭제는 옹정제가 벌인 저 모든 일들을 '일거에 뒤집는' 반전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집요하고 기묘한 발상이 불러온 일들을 수습하는 건륭제의 방식은 그야말로 '전통적'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재미있는 것 아니냐고 스펜스는 말한다.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또 그것을 뒤집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은 중국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일수도 있고(스펜스는 이쪽에 방점을 찍었다), 아니면 역사에서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일일수도 있다. 우리는 역사를 하나의 경향(반역자=능지처참)으로만 해석하는데에 익숙해있지만, 어쩌면 역사는 지금 우리의 눈에 '신기한 일'로 비치는 그런 사건들로 점철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소설보다 드라마틱하고, 드라마보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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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
반다나 시바 지음, 한재각 외 옮김 / 당대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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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다나 시바의 '물전쟁'을 읽고서 좀더 체계적으로 쓰인 이 저자의 다른 책을 읽어봐야지 했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이 책,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이었는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생태주의에 대한 나의 왜곡되고 못된 인식에 일침을 놓은, 의미깊은 만남이었다.
책은 선진국, 그리고 선진국의 초국적기업들이 주장하는 '지적재산권'이라는 우스꽝스런 권리를 '합법화된 해적질'이라 논박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유전공학의 문제점을 비롯한 기술우월주의/과학적 환원주의 전체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책은 단순히 유전공학의 '윤리적 문제점'을 거론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를 지배하게 될 것으로 보이는 환원주의적/제국주의적/선형적 가치관 전체를 비판하고 있다. 말하자면 환경운동에 대한 글이라기보다는 환경(생태)-여성-지역-평화로 이어지는 대안적 담론에 해당된다. 생태 환경 이런말들에 대해 모종의 거부감을 갖고 있던 내게는 인식을 전환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내가 제일 먼저 접했던 시바의 글은 유전자조작 식물, 그중에서도 번식기능을 거세해버린 이른바 '프레데터 식물'을 언급한 짧은 논문이었다. 이 책에서는 단편적인 언급을 넘어 생명공학 기업들이 하는 일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기술을 독점하고자 하는 초국적기업과 서방 선진국들의 압력을 제국주의의 식민지 개척의 새로운 단계로 단정한다. 과거 유럽이 제3세계를 '무주지' 즉 생명이 없는 '자연'으로 간주하고 식민지화했듯이, 이제는 생명체(그리고 생명체의 내부-유전자)마저도 '무가치한 자연'이라 주장하면서 식민화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제국주의화의 과정은 비서구적 지식체계, 자연과 상호작용하면서 혁신해온 각 지역의 지식체계와 그것을 만든 사람들을 철저히 배제하면서 이뤄진다.

동시에 시바는, 이 과정이 여성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없애버리는 과정이라고 본다. 즉 서구적-남성적-선형적 가치체계가 비서구적(지역적)-여성적-순환적 가치체계를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시바는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에서 자본주의의 대약진과 '발전' 개념의 확산, 그리고 자유무역 지상주의와 유전공학 혁명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모든 다양성을 사상해버리려는 획일화의 과정'으로 보는데 여기서 그녀의 통찰력이 빛난다. 획일화는 지배/억압구조와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고, 이 위계질서는 선진국-후진국/서구-제3세계/남성-여성 등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들을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글로벌한 문제'로 부상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공학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기술지상주의/환원주의자들에 맞선 싸움은 단순히 단작이냐 복합경작이냐, 유전자 조작 농산물이냐 유기농이냐 하는 수준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적-경제적-문화적 다양성을 되살리기 위한 싸움이 된다. 이제부터 해나가야 할 정치는 '역동성과 다양성을 통한 재생의 정치'가 되는 것이다.

시바는 인도에서 자신이 주도해왔던 다양한 사티아그라하(투쟁)들을 예로 들면서 몇가지 대안들을 제시한다. WTO의 지적재산권 협정에 대한 대안으로 내놓는 것은 경제적 이해관계 대신 지역 주민들의 생태적 권리를 보장하는 '집단적 지적 재산권' 개념이다. 시바는 DNA혁명 이후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는 '생물제국주의'에 맞선 이런 운동들을 가리켜 '생물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이라 부른다. 이런 운동들이 글로벌 자본주의 앞에서 적실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까-- 비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바 같은 운동가들이 '반세계화'라는 (다소 애매하긴 하지만 그만큼 포괄적이고 포용력있는) 거대한 물결을 이미 일으키고 있으니까. "오늘날과 같은 다양성의 조작과 독점의 시대에 씨앗은 자유의 장소이자 상징이 되었다. 씨앗은 자유무역을 통한 재식민화 시대에 간디의 실잣는 물레가 했던 바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 작은 '씨앗들의 싸움'이 다양성과 역동성이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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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10-28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룬다티 로이 책은 읽다가 접었는데, 반다나 시바 책은 읽을 수 있을런지.. 궁금하긴 한데 말이죠.

딸기 2004-10-28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례되는 질문입니다만 판다님은 뭐하는 분이시길래 그렇게 책도 많이 읽고 그림도 많이 보실 수가 있나요? 정말 대단하세요... ^^

panda78 2004-10-29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ㅜ_ㅜ 스트롱베리님처럼 글 잘 쓰시고 어려운 책 많이 읽으시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부끄럽사와요. 땅굴 파야 돼요. 흙흙. 제가 읽는 책의 90%는 대중 소설인 걸요. 어려운 책은 내공이 딸려서 엄두도 안 낸답니다.

(그리고, 집에서 노는 사람이지요. 공부한다는 미명 하에 뒹굴뒹굴... ;;;)

딸기 2004-10-29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공부한다는 미명하에 뒹굴뒹굴... ^^
 
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나남신서 377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윤형숙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젯밤 잠들기전 앤더슨의 책을 곱씹어보면서, 감히 '민족'이라는 큰 주제를 머리속에 떠올렸다. 뇌가 빙글빙글 돌았다. 대체 이것은 무엇이관대 한쪽에서는 허구적인 감정일 뿐이라 하고 한쪽에선 거기에 목숨을 거는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버릇을 들인지 꽤 오래됐다. 다만 제목과 저자 이름에 한줄짜리 소감을 붙이는 것일지라도, 독후감을 정리하기로 한 것이 91년이니 독후감이라면 물릴만큼 써봤다(난 쉽게 잘 물린다 -_-). 그런데도 아직까지 책을 읽고 나서 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정리해야할지 난감할 때가 있다. 앤더슨의 이 책이 바로 그랬다. 앤더슨의 주장들, 그리고 '한민족'이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여러가지 감정들이 머리속에 맴돌면서 두부같은 두부(頭部)는 몹시 복잡해졌다. 어설픈 번역 탓도 있겠고, 앤더슨의 서술 방식 자체가 내 입맛에 안 맞았던 탓도 있겠다.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도저히 이 책을 '거부할 수 없어서'였다. 이책 저책, '민족'이라는 말이 나오는 부분에 앤더슨의 책은 '반드시'라 해도 될 정도로 많이 인용된다. 그냥 넘어가자, 했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사고 말았다. 솔직히 이 책이 무슨 재미가 있으랴 싶기도 했다. 실제로 앤더슨의 문장은 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앤더슨의 생각에는 분명 뭔가가 있었다.
앤더슨은 '민족'을 '특정한 시기에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구성되고 의미가 부여된 역사적 공동체'라 정의하고, '상상의 공동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떤 특정한 시기? 바로 자본주의 시대다. 나와 우리의 삶을 붙들어매주고 있던 종교와 군주제가 힘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시기. 사람들에게는 귀속본능같은 것이 있어서, '뿌리'를 찾고싶어한다(이런 귀속본능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앤더슨은 이를 전제하는 듯하다).

인쇄자본주의의 도래와 때를 같이해 마침 신문이란 것이 등장해 사람들에게 공시성을 선사해줬다. 신문을 통해 얼굴과 이름은 몰라도(전근대적 지역공동체와의 차이점) 나와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알게되고, 믿게 되었다는 데에서 앤더슨의 민족 탄생의 열쇠를 찾는다. 민족 개념의 탄생과 인쇄자본주의의 역할을 연결지은 시각은 흥미롭다. 물론 이 밖에도 앤더슨은 (유럽에서) 라틴어의 퇴조와 지방어의 득세 등등 민족 개념의 탄생을 도왔던 다양한 요인들을 거론한다.

민족이 인류역사에서 비교적 최근 시기에 고안된 개념이라는 것은 앤더슨만의 고유한 시각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족의 유구성을 믿는다. 왜?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다른 나라였는데도 우리는 한민족 5000년 역사를 이야기한다. 왜? 민족은 '뿌리'와 연결돼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앤더슨의 말을 빌면, 민족이라는 '근대적' 개념은 우리에게 '고대성'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집단의 '영속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민족이라는 개념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앤더슨의 시각에서 눈에 띄는 것은 민족 개념이 시작된 곳이 아메리카 대륙, 즉 신세계였다는 주장이다. '민족'을 기반으로 한(것처럼 보이는) 근대 유럽의 제국주의는 궁지에 몰린 군주들이 식민지의 민족 개념을 받아들여, 즉 '모방'해 만든 것이라고 지적한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아메리카에서 탄생한 민족개념-> 유럽으로 건너가고-> 마지막으로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식민지들에서 완성됐다는 것. 정말일까? 그건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나는 민족 개념을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므로. 다만 저런 주장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동남아시아 사회를 가깝게 접할 수 있었던 앤더슨 특유의 통찰력 덕분이었음을 인정해두자.

아무튼 앤더슨은 저렇게 이야기한다.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라고. '상상'이라는 말이 여러가지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겠지만, 앤더슨은 민족이 상상의 산물이라 해서 곧 허구적인 개념인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오히려 그 반대다. 비교적 최근에 어떤 '계기'를 만나 개념으로 정립됐음을 지적하는 것일 뿐, 민족이라 부를만한 공동체의 공통된 역사적 언어적 경험(반드시 그 민족의 고유한 언어일 필요는 없지만)을 충분히 인정한다.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민족을 어떻게 볼 것인가.

민족을 허구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어떠한 종류가 됐건 '민족 문제'에 답하기 위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하나의 민족에 속하게 되고, 민족의 이름을 걸고 싸우게 된다. 이 이름이 주는 효과는 너무나 크다. 때로 이것은 탄압의 원인이 되고, 때로는 저항의 수단이 된다. 자신들의 존재조건을 아직 채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민족'은 공통된 의식을 불러일으켜주는 기능을 한다. 다만 그것을 앤더슨처럼 자본주의와 때를 같이해 나타난 특별한 '문화적 조형물'로 보는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분단조국'에서 살고 있는 별볼일없는 보통사람인 내가, 머리 속에 백신을 놓듯 '민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해야 하는 까닭은. 이유는 분명하다. 민족이 됐건 무엇이 됐건, 어떤 사람의 태생적 정체성 때문에 차별을 한다거나 핍박을 하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억압하기 위한 논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의 순교 행렬이 계속되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필히 경계를 만들어내고, 누군가를 배제하게 되고, 많은 것을 가리우게 된다. 민족이라는 이름을 걸고 저질러지는 일들은 흔히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겪어야하는 고통과 모순을 감추고 있다.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것들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이 개념의 절대적인 무게를 거부할 필요가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불면증에 시달리게 생긴 뇌를 잠시 휴식시켰지만 마음은 여전히 개운치가 않다. 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이 '민족'이라는 말에 양면적 혹은 다면적 감정을 느껴야만 하는 것인지.

(사족- 번역하신 분은 참 재밌는 분인 것 같다. "역자는 1983년에 나온 이 책 1판을 1991년에 완역, 출판하였다. 앤더슨의 개정증보판이 나온 1991년에 역자가 그의 초판본을 번역, 출판하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뭐가 아이러니컬인가. 코미디다. 하지만 역자해설을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것으로 용서해드리지요. 하지만 책 표지의 붉은악마 사진-- 이건 정말 코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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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 2004-10-26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네딕트 앤더슨의 시각에는 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데요.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이 근대에 다 와서야 형성됐다는 점에는 그다지 수긍하지 않지만요.

민족이라는 개념은 다시 오랜 옛날처럼 희미해져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일부 국가에서 벌어지고 있는(인도가 그랬고 러시아가 그랬던, 이라크에서는 현재 진행형인) 민족 독립 문제는 오히려 민족 문제이기보다는 지방 자치와 같은 권력 분권의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세계화의 혼돈 속에 갇힌 지구 속에 민족이라는 키워드는 어디쯤 있는 것일까 생각하다 돌아갑니다. 글 잘 읽었구요. :)

딸기 2004-10-26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의 개념은 다르겠죠. 통치기구와 영토 개념이 생겨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고, 앤더슨도 국가의 개념이 근대에 형성됐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개념이 근대의 산물이라는 것은 어느정도 인정되고 있는 견해 아닌가요? 우리 집단은 이러저러한 민족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 말이지요. 그런 '상상'이 가능하게 됐다는 것-- 그런 작업이 근대에 다 와서 이뤄졌다는 것이지, 그런 상상을 가능하게 만든 근거가 된 역사적 경험들이 모두 근대의 것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희미해져 가고 있을까요. 이라크 쿠르드족 문제나 러시아와 체첸 문제 같은 것들은 분명 민족의 외피를 쓰고 있는 걸요. 그 외피를 벗길 필요는 분명히 있겠지요. '민족 분쟁'이라는 이름이 덧씌워져 버리면, 그 땅, 그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과 모순이 너무 단순화되고, 진짜 문제들은 가리워져 버린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외면일기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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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러니 성격의 글들은, 의외로 익숙해지기가 쉽지 않다. 딱히 주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주제를 따지자면-- 아마도 그 글을 쓴 사람 그 자체가 아닐까. 투르니에의 글은 투르니에가 그 소재이자 테마인 것이고, 마루야마 겐지의 글은 마루야마가 소재이자 테마다. 그래서 나는 미셀러니에는 여간해서는 손을 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가장 가비얍고, 어떻게 보면 '사람'을 가장 열심히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 그 장르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모르고 보면 미셀러니만큼 별볼일없는 것이 없다. 반면에, 짧은 글들 사이에 묻어나는 촌철의 유머로 해서 글쓴이의 내면의 일단을 보게 될때에는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투르니에의 글들은 투르니에를 보여준다-- 그리고, 글 속에 나타난 투르니에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그것이, 힘겨운 '적응'의 과정을 참아가며 투르니에의 자질구레한 일상까지 들여다보는, 이유라면 이유다. 다행히도 투르니에라는 사람에게 익숙해지는 과정은 '견딘다'고 하기에는 굉장히 즐거운 과정이었다. '짧은 글 긴 침묵'도 그랬고, '예찬'도 그랬고, '헤르만헤세와 소크라테스의 점심'도 그랬다. 이 할아버지, 보통 웃기는게 아니고, 그래서 투르니에의 책을 손에 잡으면 대개는 키득키득거리게 된다. '외면일기', 나의 내면이 아닌 내 밖의 일기라니. 제목부터가 그럴듯하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우리집에 와서 식사를 하고자 한다고 예고해왔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 묻는다. "아니, 대통령이 왜 너희 집에 와서 식사를 한다니?" "내가 유명한 사람이니까." 어머니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대꾸한다. "그런다고 내가 믿을 줄 알고!"
...어느 일요일 아침 어머니가 TV에서 미사 드리는 광경을 시청하고 있다. 사제가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세 사람의 동방박사의 모험 이야기에는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상상해낸 네 번째의 동방박사 이야기는 여간 재미있는게 아닙니다."
..."그것 보세요. 내가 아주 이름 없는 존재는 아니잖아요. 일요일 설교 때 내 이름을 들먹이기도 하니까요!" 어머니의 말: "아, 분명히 알아둬! 신부님이 작가 미셸 투르니에라고 했어." 나의 대답: "그래서요? 그건 사실 아닌가요?" 어머니의 대꾸: "그렇긴 하지. 그렇지마 괴테나 빅토르 위고였다면 작가 괴테, 작가 빅토르 위고라고 하진 않았을 거야."

전형적인 투르니에식 우스개랄까. 나 어때? 나 굉장히 유명하다, 나, 꽤나 굉장한 작가라구! 그러니까 내 말 한번 들어보라고. 재미있지? 그게 인생인거야.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아서, 그의 재치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글 사이사이에 나타나는 박식함도 투르니에를 읽게만드는 유인요소 중 하나다. 재치가 결합된 박학다식만큼 재미난 게 또 있을까.

런던여행. 이번의 짧은 체류 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리폼클럽'에서의 식사였다. ...쥘 베른느에 따르면 거기서 필레아스 포그가 80일간에 세계일주를 하겠다는 내기를 걸었고 마침내 그 여행을 성공리에 마치고 그곳으로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집의 책임자는 유머감각이 별로 없는지 그 클럽의 가장 유명한 회원들의 초상화들 가운데 그 인물이 초상화를 끼워넣지도 않았으니 유감천만이었다. 나는 그 가운데 얼 그레이 경이 끼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가 거기에 끼게 된 것은 그의 이름을 딴 유명한 차에 베르가모트를 첨가했기 때문이 아니라 1830년에서 1834년 사이에 수상을 지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는 많이 실망했다.

길지 않은 문장을 통해서 나는 어릴적 읽었던 '80일간의 세계일주'의 한장면 한장면들을 떠올린다. 베르가못향이 살짝 감도는 얼그레이의 향기가 맴돈다.

박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생쥐가 소리친다: "오, 천사로구나!"

오늘밤 라디오를 듣다가 나는 옛 스승 가스통 바슐라르 선생의 부르고뉴 악센트가 섞인 목소리를 즉시 알아차린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 목소리는 그에게 엉뚱한 질문들을 던지곤 하는 어떤 바보 녀석 때문에 자꾸 끊어지곤 한다. 그리고 방송이 끝나면서 이런 안내의 말이 흘러나온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1949년 가스통 바슐라르와 미셸 투르니에가 주고받은 대담을 녹음한 INA 자료 내용을 들으셨습니다."

"나에게 오직 내 분수에 맞을 정도의 양과 질의 진실만을 말해주십시오."

이래서 투르니에를 좋아한다. 이 할아버지의 재기넘치면서도 따뜻한 말들이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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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즈 2004-10-23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투르니에를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이유는 딸기 님과 거의 같은 거 같아요. 박식함 속에 깃들인 겸손과 유머..
<짧은 글, 긴 침묵> <예찬> 등을 아끼면서 읽었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자주 권했었는데, 생각해보면 김화영 선생의 명번역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외면일기>는 일부러 무심히 지나치려 했는데, 이렇게 딸기 님이 펌프질(!)을 제대로 하시는군요. ^^..

마냐 2004-10-23 0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르니에 할배의 글을 제대로 본 적이 없군. 쩝. 저 어머님의 내공을 보니...아들도 오죽하겠어.

딸기 2004-10-23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 나도 저 할배 진짜 소설은 한개도 안 읽어봤어. 방드르디를 읽어볼까 싶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은 터라, 어째 땡기질 않네.

갈대 2004-10-24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 투르니에 할배도 에코 할배만큼 재밌네요. 물론 유머를 구사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지만요. 투르니에 할배의 자기비하성 유머는 마태님의 주특기인데, 암튼 언젠가 읽어봐야겠어요

로드무비 2004-10-24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면일기 저도 재밌게 읽었답니다.
시치미 뚝 뗀 유머가 좋아요.^^

딸기 2004-10-26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딱 들어맞는 표현이로군요. 시치미 뚝 뗀 유머!

panda78 2004-10-26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갑자기 마구 땡기네요. 전 <소크라테스와...>밖에 안 읽었는데, 예찬과 외면일기.. 장바구니로. ^^

딸기 2004-10-27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 판다님, 실은 저는 '소크라테스와...'가 제일 재밌었는걸요 ^^

에레혼 2004-10-27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인용해 놓은 대목 중 하나[어머니와의 대화...]는 일전에 제 '독서일기'에 옮겨 적은 대목이네요, 반가워라!
"20세기 문학사 중 가장 주목할 만한 문학적 사건은?"이란 설문 조사에서 미셸 투르니에는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가 출판된 것"이라고 대답했다는군요. 그 설문 조사에서 1위와 2위로 꼽힌 사건[인물]은 "마르셀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의 출현"이었다는데, 투르니에의 자신감 넘치는[아마 유머를 실은 것이었을 테지만...] 답변이 투르니에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미셸 투르니에, 멋진 작가입니다. 장편 소설이 좀 부담되면 <꼬마 푸세의 가출>이란 단편집부터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어요. 단편의 팽팽한 밀도와 구성의 미학을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 실려 있지요. 아, 이 노인네는 왜 이리 따뜻하면서도 예리한 걸까요?

딸기 2004-10-27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새 투르니에 뿐 아니라, 장편소설 자체가 부담스럽거든요
하지만 꼬마 푸세...라면 읽고싶어지네요. 보관함에 넣어놔야겠어요 ^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