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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제국 ㅣ 당대총서 14
하워드 진 지음, 이아정 옮김 / 당대 / 2001년 1월
평점 :
품절
혼자 살고 있는 한 사나이가 있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서 대답을 했다. 문을 열자 강건한 몸집에 잔인한 얼굴을 한 '폭군'이 서 있었다. 폭군이 물었다. "복종하겠느냐?" 사나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옆으로 비켜섰다. 폭군은 들어와서 사나이의 집을 차지했다. 사나이는 수년 동안 그를 시중들었다. 그리고는 그 폭군은 음식에 든 독 때문에 앓아눕게 되었고, 죽었다.
사나이는 그 시체를 싸서 문을 열고 나가 치워버리고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단호히 말했다. "아니오"
역사에 관한 책을 읽고 나서, 굉장히 기분이 좋아질 때가 있다. 요즘 읽고 있는 조너선 스펜스의 '현대중국을 찾아서'라든가 스탠리 월퍼트의 인도 이야기 같은 책들은 저자의 박학다식함과 유려한 문장, 필생의 노력과 열정 어린 시선 때문에 '역사책' 읽기가 재미있게 느껴지는, 그런 경우다.
그와는 다른 의미에서 기분 좋은 느낌을 주는 '역사에 관한 글'들도 있다. 대학시절 읽었던 김칠성의 '역사 앞에서', 진지함과 겸허함이 묻어나는 강만길의 '역사에세이'가 바로 그런 글들이었다. 딱히 새로운 이론이나 사실(史實)이 담겨서가 아니라, 그 학자적인 자세가 읽는 사람까지 맑아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오만한 제국'도 그런 책 중의 하나다. 이 책의 원제목은 'Declarations of Independence', 즉 '독립선언'이다. 국내 번역본에는 '미국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독립'이라는 부제와 함께 '오만한 제국'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미국의 여러 가지 '나쁜 점'에 대한 비판은 그렇다고 치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책에서 많이 들어왔고, 별로 코멘트 할 것이 없다. 내 눈에 띈 것은, 말 그대로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노학자가 인생을 살며 겪은 것들을 적절히 곁들여가면서 들려주는 '역사를 보는 눈'에 관한 것이었다. 얼핏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를 다룬 듯 보이지만, 이 책에서 빛나는 것은 역사를 대하는 그의 '마음'과 '시선'이다.
일단 저자는 '마키아벨리즘을 경계하라'는 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보통 학자들은 현대 국제정치의 흐름에 현실주의와 자유주의의 양대 산맥이 있다고들 하는데, 저자는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자유주의적 현실주의'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국제정치를 보는 주류의 시각에는 현실주의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실주의(Realism)라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현실(Reality)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그는 출발한다.
주류들이 얘기하는 현실이란 결국 힘의 논리이고, 그것이 구현되는 형태는 전쟁과 억압일 뿐이다. 이 논리에 기대고 있는 이 세상의 힘센 이들은 '폭력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프로이트식 개념을 받아들인다. 이에 대해 저자는 "생물학과 유전공학이 발달하고 있지만, 인간의 본성 중에 '폭력'이 들어가 있다는 증거가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한다.
"이른바 본능이라 불리는 것 중 어느 것도 '문화적 가치관에 대한 감정적인 충성'만큼 위험하지는 않다"(동물학자 콘라드 로렌츠)
주류의 논리에 맞서는 그의 저항은 '객관성'에 대한 관점에서 잘 드러난다.
"역사가가 되기 전에 나는 쓰레기가 뒹구는 뉴욕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자라났고 시위대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가 경관에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두들겨맞기도 했다. 3년 동안 조선소에서 일했고, 전쟁의 폭력에 가담했다. 이러한 경험들은 나에게,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리고 역사를 쓰는데 있어서도 '객관성'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게 만들었다"
생존과 자유, 행복 추구를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의 동등한 권리 보장을 근본적 가치로 삼고 그 가치를 확고히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편견'을 갖기로 결심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다만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에 있어서는 유연하고자 했다는데, 이런 시각은 사실 굉장히 중요하다. 90년대 초반 이른바 소련의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난 뒤에 패닉상태에 빠진 사람들이라면, 정말 새겨들을 만한 얘기다.
"역사에서 어떤 (불리한) 내용이 밝혀진다고 해서 내가 추구하는 가치, 목적, 이상을 폐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정직하게 해석하는 일이 내가 추구하는 목적을 해치게 될까 두려워 과거 역사를 왜곡시켜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범죄를 인정하는 연설을 했을 때에도 이른바 '사회주의적 가치'들에 대한 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신념과 함께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불의에 맞선 저항이다.
"이 땅에서 나가"
"왜?"
"내 것이니까"
"너는 그걸 어디서 얻었지?"
"우리 아버지한테서"
"그는 그걸 어디서 얻었지?"
"싸워서 얻으셨지"
"그래, 그렇다면 나도 그것을 위해 너와 싸울테다"
-칼 샌드버그, '민중들, 그래요' (The People, Yes)
2차 대전 때 폭격기 조종사로 직접 전쟁에 참가했었던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정의'와 '저항'과 '반전(反戰)'에 대해 거듭 강조한다. 때로는 불복종의 형태로, 때로는 시위대의 형태로, 또 어떤 때에는 법정 투쟁의 형태로, 그렇게 끊임없이 계속되는 약자들의 저항 말이다.
"희망이 없다는 이유로, 즉 총과 돈을 쥐고 있는 자들 그리고 권력유지의 결의를 완강히 내보이는 자들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힘이 압도적으로 우세해 보인다는 이유로 정의를 위한 투쟁을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된다"
지난 세기를 살아온 한 역사학자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는 바로 그 것이다.
나는 책을 통해 하워드 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념을 갖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어려운 일인지를 역으로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고, 이 노학자를 존경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