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유전학의 역사를 바꾼 초파리
마틴 브룩스 지음, 이충호 옮김 / 이마고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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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라는 말, 과학전공자들끼리만 소곤소곤하는 단어가 아님은 분명하다. 신문에건 어디에건 툭하면 등장하는 '흔한 단어'가 된지 이미 오래다.

<초파리> 앞에 '20세기 유전학의 역사를 바꾼'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원제는 Fly: an experimental life 인데 우리나라 번역본에서 붙인 저 수식어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실험실의 초파리라는 작은 존재를 통해 19세기말 이후 유전학의 역사를 설명하는데, 소설처럼 흥미진진하다. 재미있으면서, 동시에 유전학의 기본개념을 쉽고 알차게 설명해주니 과학서적으로서는 양대 미덕을 모두 갖춘 책이다.

팀 털리라는 과학자는 아주 정교한 기계를 만들어서, 초파리를 학습을 시켰다. 이런 실험을 거쳐 초파리도 학습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여기까지만 얘기하면, 동물행동학과 분자생물학의 차별성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털리는 의도적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킨 초파리를 이용해서, 학습능력과 유전자 간에 연관성이 있음을 밝혀냈다.
이런 실험들을 통해서 '학습과 기억은 일련의 생화학적 스위치로 번역됐다'. '만약 우리 인간 역시 초파리와 똑같은 유전자 주형으로 만들어져 있다면, 이것은 기억 조작이라는 흥미로우면서도 무서운 미래를 예고하게 된다'.

유전자에 대해 연구하고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유전학에 관한 책을 보면서 끊임없이 그 중요성을 확인하게 되는데, 앞서 말한 학습능력의 사례는 하나의 예에 불과할 뿐이다. 과학은, 어느 분야나 그렇듯이, 고도의 목적의식 하에 이뤄지는 학문이고, 그 '목적의식'은 인간의 욕망과 직결돼 있다. 오래 살고 싶은 욕망, 더 많이 갖고 싶은 욕망-다윈 식으로 말하자면, '더 많이 번식시키고 싶은 욕망'.

우리는 욕망을 채우기 위한 방법을 꾸준히 개발시키고 있지만, 일부 똑똑한 이들이 선도하는 그런 방법상의 발전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특정 집단에 독점돼 있다. 그 집단(과학자들, 자본들)에 속해 있지 않은 우리 같은 과학 문외한들은 바퀴가 어디로 향해가는지도 모르는채 달리는 자동차 위에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이나 똑같은 것 아닌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싶다면, 혹시 내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운전수의 목을 졸라서라도 멈추게 만들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면, 더이상 유전자 이야기를 남들 얘기로 넘겨서는 안 될 것 같다.

<초파리>는 바로 그런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번 읽어보라고 권해줄 만한 책이다. 과학소설이라 생각하고 읽어도 될 정도로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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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한 제국 당대총서 14
하워드 진 지음, 이아정 옮김 / 당대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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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혼자 살고 있는 한 사나이가 있었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서 대답을 했다. 문을 열자 강건한 몸집에 잔인한 얼굴을 한 '폭군'이 서 있었다. 폭군이 물었다. "복종하겠느냐?" 사나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옆으로 비켜섰다. 폭군은 들어와서 사나이의 집을 차지했다. 사나이는 수년 동안 그를 시중들었다. 그리고는 그 폭군은 음식에 든 독 때문에 앓아눕게 되었고, 죽었다.
사나이는 그 시체를 싸서 문을 열고 나가 치워버리고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단호히 말했다. "아니오"


역사에 관한 책을 읽고 나서, 굉장히 기분이 좋아질 때가 있다. 요즘 읽고 있는 조너선 스펜스의 '현대중국을 찾아서'라든가 스탠리 월퍼트의 인도 이야기 같은 책들은 저자의 박학다식함과 유려한 문장, 필생의 노력과 열정 어린 시선 때문에 '역사책' 읽기가 재미있게 느껴지는, 그런 경우다.
그와는 다른 의미에서 기분 좋은 느낌을 주는 '역사에 관한 글'들도 있다. 대학시절 읽었던 김칠성의 '역사 앞에서', 진지함과 겸허함이 묻어나는 강만길의 '역사에세이'가 바로 그런 글들이었다. 딱히 새로운 이론이나 사실(史實)이 담겨서가 아니라, 그 학자적인 자세가 읽는 사람까지 맑아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오만한 제국'도 그런 책 중의 하나다. 이 책의 원제목은 'Declarations of Independence', 즉 '독립선언'이다. 국내 번역본에는 '미국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독립'이라는 부제와 함께 '오만한 제국'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미국의 여러 가지 '나쁜 점'에 대한 비판은 그렇다고 치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책에서 많이 들어왔고, 별로 코멘트 할 것이 없다. 내 눈에 띈 것은, 말 그대로 산전수전 다 겪은 이 노학자가 인생을 살며 겪은 것들을 적절히 곁들여가면서 들려주는 '역사를 보는 눈'에 관한 것이었다. 얼핏 국제정치의 역학관계를 다룬 듯 보이지만, 이 책에서 빛나는 것은 역사를 대하는 그의 '마음'과 '시선'이다.

일단 저자는 '마키아벨리즘을 경계하라'는 데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보통 학자들은 현대 국제정치의 흐름에 현실주의와 자유주의의 양대 산맥이 있다고들 하는데, 저자는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자유주의적 현실주의'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국제정치를 보는 주류의 시각에는 현실주의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실주의(Realism)라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현실(Reality)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그는 출발한다.
주류들이 얘기하는 현실이란 결국 힘의 논리이고, 그것이 구현되는 형태는 전쟁과 억압일 뿐이다. 이 논리에 기대고 있는 이 세상의 힘센 이들은 '폭력은 인간의 본성'이라는 프로이트식 개념을 받아들인다. 이에 대해 저자는 "생물학과 유전공학이 발달하고 있지만, 인간의 본성 중에 '폭력'이 들어가 있다는 증거가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반문한다.


"이른바 본능이라 불리는 것 중 어느 것도 '문화적 가치관에 대한 감정적인 충성'만큼 위험하지는 않다"(동물학자 콘라드 로렌츠)

주류의 논리에 맞서는 그의 저항은 '객관성'에 대한 관점에서 잘 드러난다.

"역사가가 되기 전에 나는 쓰레기가 뒹구는 뉴욕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자라났고 시위대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가 경관에게 정신을 잃을 정도로 두들겨맞기도 했다. 3년 동안 조선소에서 일했고, 전쟁의 폭력에 가담했다. 이러한 경험들은 나에게,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리고 역사를 쓰는데 있어서도 '객관성'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게 만들었다"

생존과 자유, 행복 추구를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의 동등한 권리 보장을 근본적 가치로 삼고 그 가치를 확고히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편견'을 갖기로 결심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다만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에 있어서는 유연하고자 했다는데, 이런 시각은 사실 굉장히 중요하다. 90년대 초반 이른바 소련의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난 뒤에 패닉상태에 빠진 사람들이라면, 정말 새겨들을 만한 얘기다.

"역사에서 어떤 (불리한) 내용이 밝혀진다고 해서 내가 추구하는 가치, 목적, 이상을 폐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정직하게 해석하는 일이 내가 추구하는 목적을 해치게 될까 두려워 과거 역사를 왜곡시켜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범죄를 인정하는 연설을 했을 때에도 이른바 '사회주의적 가치'들에 대한 확신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신념과 함께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불의에 맞선 저항이다.


"이 땅에서 나가"
"왜?"
"내 것이니까"
"너는 그걸 어디서 얻었지?"
"우리 아버지한테서"
"그는 그걸 어디서 얻었지?"
"싸워서 얻으셨지"
"그래, 그렇다면 나도 그것을 위해 너와 싸울테다"

-칼 샌드버그, '민중들, 그래요' (The People, Yes)


2차 대전 때 폭격기 조종사로 직접 전쟁에 참가했었던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면서 '정의'와 '저항'과 '반전(反戰)'에 대해 거듭 강조한다. 때로는 불복종의 형태로, 때로는 시위대의 형태로, 또 어떤 때에는 법정 투쟁의 형태로, 그렇게 끊임없이 계속되는 약자들의 저항 말이다.

"희망이 없다는 이유로, 즉 총과 돈을 쥐고 있는 자들 그리고 권력유지의 결의를 완강히 내보이는 자들이 세상에서 차지하는 힘이 압도적으로 우세해 보인다는 이유로 정의를 위한 투쟁을 포기해서는 절대 안 된다"

지난 세기를 살아온 한 역사학자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는 바로 그 것이다.
나는 책을 통해 하워드 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념을 갖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어려운 일인지를 역으로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고, 이 노학자를 존경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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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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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만물의 척도다, 하느님은 인간을 위해 세상 만물을 만드셨으니 인간은 세상만물의 주인이다- 이런 '인간 제일주의'의 편견을 깨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다윈이 진화론을 내놨을 때 이미 인간이 제일이라는 생각은 깨져나갔어야 했는데 다윈이 어정쩡하게(자기가 속해있고 또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서양 제국주의 문명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탓에) 진화론 속에 '진보'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놓는 바람에, 창조론을 뒤집을 절호의 찬스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인간 제일주의가 깨지지 못했다는 야그.

그럼 진화란 무엇인가. 진화는 실재하는 사실(현상)이지만 진화에 대해 흔히 오해를 한다. 진화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일 뿐이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세상만물로 들어찬 '풀 하우스'이지 직선으로 연결된 위계질서의 사다리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진화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풀하우스' 안에서 변이의 정도가 어떻게 줄어들었다 늘어났다 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지 다종다양한 생물 군상을 무시하고 '고등한 인간'의 오만함을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런데 왜 '진화'라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들 오해를 하는 것일까. 여기에 바로 '통계의 함정'이 숨어 있다. 9명의 가난뱅이들과 1명의 빌 게이츠가 있다. 9명은 오늘 먹을 빵도 없는데 빌 게이츠는 혼자 연간 10억달러를 벌었다면 이들 10명의 연평균소득은 자그마치 1억달러! 이 '평균'이란 과연 유효한가? 아니다, 9명의 가난뱅이들의 진실을 숨기고 무시하고 없애버리는 장난질에 불과한 것이 바로 '통계'라는 것이다.

저런 통계의 장난들이 진화론을 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물들을 보는 우리의 시선을 가리고 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무지하게 많은 박테리아들과 원생생물들, 인간보다 '하등'하고 심지어 포유류보다도 못하고 척추동물보다도 못난 것으로 간주되는 숱한 생명체들이 몽땅 무시당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진화는 곧 한 방향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고등한 생물로 향한 고속도로'가 아니라는 점, 인간을 위해 이 세상 만물이 복무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인간은 지구가 굴러가다보니 생겨난 고등생물일 뿐이라는 점. 이렇게 주장해서 남는 것이 뭐가 있느냐. 아메바로부터 감사 편지라도 받을 수 있을 것이냐.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라는 사실을 여러 통계학적, 생물학적 지식을 통해 입증해보임으로써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다양성은 다양성 그 자체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직선의 진화를 주장한 서구문명의 오만함은 곧 제국주의의 오만함이요, 오늘날과 같은 망가진 지구를 만든 물신주의의 오만함이 아니던가. 다양성을 무시하는 사고방식을 깨는 것은 서구문명의 오만함을 반성하자는 것이요, 인간을 위해서라면 이 지구야 어떻게 되든 좋다는 인간의 무지몽매함을 벗어나자는 것이다.

저자는 현재 과학평론가들 중에서는 제일 '잘 나가는' 사람이다. 물론, 평론가 아닌 과학자로서도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그에 대해 조금의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인간복제 얘기만 나오면 눈에 쌍심지를 켜는 비관론자라는. 그런데 이 책은, 굴드가 과학저술가로서 왜 유명한지 대번에 알아차리게 해준다.

돌리 탄생 이후 저자가 끄적끄적했던 몇 편의 짧은 글들에서는 느낄수 없었던 깊이와 지적인 도전, 지식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 싸움꾼의 기질 따위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알기 쉽게 통계의 허점들을 지적하는 것도 그렇고, 다소 오만해보이기까지 하는 자존심도 그렇고, 일목요연하게 주장을 펼쳐나가는 논리력도 그렇고...일단 대단히 재미있게 읽었고, 그 다음으로 저자의 '좌파적 진화론'에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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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11-15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어요... "인간에 대한 오해"도 아직 안 읽었는데... (저 책더미 어딘가에 박혀 있겠지... --;)

딸기 2004-11-15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에 대한 오해,는 주제가 명확한 대신 재미는 좀 떨어져요. 저는 풀하우스가 더 재밌었던 것 같아요. :)

panda78 2004-11-17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의 엄지는 어떤가요? ^^;;

딸기 2004-11-17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판다님... 그건 판다님이 잘 아시겠지요! ㅋㅋ

판다의 엄지는 안 봤어요, 아직.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못 읽고 있는 책 중의 하나입니다.

푸하 2005-01-05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핵심을 짚어내는 리뷰같아요,,, 진화가 진보가 아니고 다양성의 증가라는 진술은 비단 생물학(과학)에서 뿐 아니라 인문 사회과학 분야에도 다양한 시도가 있다고 들었어요...
 
천 년 동안에 1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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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바라보는 용기를 밑바탕으로 하는 꿈이나 이상이라면 몰라도,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소도구로 문학이 존재한다면 나는 거부하고 싶었다. ... 집단으로 형성된 세계는 그것이 어떤 세계든 나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샐러리맨의 세계를 거기에서 또다시 재연하다니 넌덜머리가 났다. 혼자 힘으로 헤쳐나갈 수 있는 세계이기에 뛰어든 것이다. ...내가 바라던 삶은 좀더 남자답고 - 비웃고 싶으면 비웃어도 좋다 - 좀더 긴장되고 좀더 산뜻한 그 무엇이 아니었던가.'

마루야마 겐지의 재미없는 소설에 반했습니다.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라는 소설을 작년에 비교적 재미있게 봤지요. 흥미진진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문장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허걱... <천년 동안에>는 두 권으로 이뤄진, 아주 긴 소설입니다. 판타지 소설이라면 10권 짜리라도 보겠지만, <천년 동안에>는 아주 지루합니다. 저처럼 얄팍한 취미를 가진 사람한테는 참 재미없는 소설이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사람 이름이 하나도 나오지 않고 2인칭 시점으로 돼 있는 소설이랍니다. 그러니 얼마나 지겨울까요 ^^

인용해놓은 것은 마루야마의 에세이 '소설가의 각오'에서 따온 겁니다. 아쿠타카와상을 탄 뒤의 생각을 적은 것이라고 하네요. 우리나라에는 이문열 같은 작자들이 보수의 탈을 쓰고 범죄적인 수준의 곡학아세를 서슴지 않는데 일본에는 그래도 이런 작가가 살아있구나. <천년 동안에>는 '작가 정신이란 바로 이런 것'을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저는 마루야마의 철학과 투쟁에 반했습니다.

소설은 세 가지 시간 축을 돌며 진행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나무'인데, 천년을 살아온 나무입니다. 나무가 지내온 천년의 흐름, 나무가 내다본 한 인간의 인생역정 28년, 나무가 미래를 내다보는 동안의 한나절의 시간을 세 축으로 해서 소설은 진행됩니다. 줄거리는 별로 중요치 않구요 ^^
나무의 입을 빌어 작가가 말하는 것은 '고이지 말고, 끊임없이 흐르라'는 겁니다. 군국주의와 환경파괴, 어리석은 대중과 그들에 기반을 둔 권력의 절대화. 이 어리석은 시대와 사회, 국가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과 중우정치, 집단 우선주의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쉬지 말고 흘러라. '집단으로 형성된 세계는 그것이 어떤 세계든 나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는 마루야마의 정신은 아주 높고, 고양돼 있습니다.

깜짝 놀란 것은, 90년대 중반에 쓰여진 이 소설이 고이즈미 집권 이후 현재의 일본 정치상황을 쪽집게처럼 예견해놨다는 겁니다. 대중을 휘어잡는 정치인의 등장이 곧바로 군국주의화, 전쟁의 길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지만, 과연 '21세기의 묵시록'이라 할 만한 책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되 매몰되지 않으려 하는 소설가의 통찰력이 대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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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비친 유럽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1
조셉 폰타나 지음, 김원중 옮김 / 새물결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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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기간동안, 조셉 폰타나의 '거울에 비친 유럽'을 다 읽는데 '성공' 했습니다. 책 한권 읽는데 무슨 '성공'이라는 말까지 붙이느냐. 이 책은 유럽의 언어권들을 대표하는 5개 출판사가 회심의 역작으로 기획중인 '유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라는 기획시리즈의 첫 번째 편이자, 총론에 해당하는 책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체가 완역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서울대 서양사학과의 최갑수 교수를 필두로 한 일군의 서양사학자들이 기획에서 번역까지를 맡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번역이 워낙에 안 좋아서 말이죠. 실은 이 책의 첫장을 펼쳐든 것이 한달도 더 됐는데, 읽기가 아주 힘들었습니다. 영어식 문장을 그대로 번역해서(더우기 원본은 스페인어로 쓰여졌을 것이니까요) 초반부에 상당한 참을성을 요구하더군요.

알려진대로, 조셉 폰타나는 바르셀로나 태생의 역사학자입니다. 현대사와 경제사를 전공했다고 하는데, 이 책은 이른바 '수정주의 역사관'을 토대로 쓰여졌습니다. 우리가 배워온 기존의 '유럽사'라고 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유럽의 로마화와 기독교화-암흑의 중세-르네상스-지리상의 발견과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유럽의 성공'이라는 도식으로 돼 있습니다.
폰타나의 시각은 여기에서 잠시 벗어나, 경제적 발전과 정치체제의 변동이라는 요소들의 인과관계를 뒤바꿉니다. 봉건제라는 '대전제' 하에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유추해내는 것이 아니라, 농업생산력의 상승을 바탕으로 해서 기사도와 봉건제라는 제도가 발전해나갔다는 식으로 뒤집어보는 거죠. 폰타나의 '뒤집어보기'를 통해서 널리 알려진 브뤼겔의 그림들은 '귀족제의 뒤안에 가려져 있던 민중의 생생한 생활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런 '뒤집어보기'를 위해서 저자는 '거울을 깨뜨리는' 역사서술을 시도합니다. 원래 '야만인'(barbarian)이라는 말은, 그리스인들이 그리스어를 쓰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표현했던 단어랍니다. '야만인'이라는 타자(他者)에 비춰 자신들을 보기 시작했을 때에 비로소 '그리스인'(헬레네스)이라는 정체성이 생겨난 것처럼, 오늘날의 유럽인들이 갖고 있는 자신들에 대한 인식이나 나머지 세계에 대한 인식들은 모두 타인을 향한 거울에서 역으로 유추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폰타나는 이같은 '타자의 거울'로 9가지를 꼽습니다. 야만의 거울(로마의 게르만 진출), 기독교의 거울, 봉건제의 거울, 악마의 거울('이단시'되는 것에 대한 배타성), 촌뜨기의 거울(귀족과 평민의 구분), 궁정의 거울(십자군과 종교개혁), 미개의 거울(식민주의), 진보의 거울(역사발전의 단계구분론), 대중의 거울(국민주권 개념)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별로 이해하지 못할 내용은 없습니다. 서술방식이 기상천외한 것도 아니고, 문장도 평이합니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배우는 것이 있다면, 저 거울들이 비단 유럽인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자의 지적대로 '비유럽인들 자신들까지도 유럽인들이 만들어놓은 거울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지경이 된' 오늘날 아시아의 현실을 얘기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폰타나는 유럽을 비추는 거울들을 깨뜨리는 작업을 통해서 역사란 무엇이며, 왜 역사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서 인용된 안토니오 마차도의 말을 다시 인용해봅니다. '과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속에서 온갖 희망들, 즉 실현되지 못한, 그러나 그렇다고 실패한 것도 아닌 희망의 저장소-요컨대 하나의 미래가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성공의 역사'에만 눈이 어두워져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책에서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은, '성공한 역사' 이면에도 또 다른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역사의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어야만 미래의 '또다른 가능성'에 마음을 열 수 있다는 것, 새겨들을 만한 지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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