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팜파스
윌리엄 헨리 허드슨 지음, 이한음 옮김 / 그린비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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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 무렵, 아르헨티나 팜파스.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저 시기에, 아르헨티나의 팜파스라니! 그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1970년대,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같은 사람한테는 상상조차 힘들다. '내 마음의 팜파스'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팜파스에서 자라난 영국의 조류학자 윌리엄 허드슨이 어린시절을 돌아보는 회고담을 담고 있다. 아름답다. 상상도 할 수 없는 19세기 중엽의 팜파스를, 허드슨은 할아버지 옛날이야기같은 어조로 차분히 그려내 보인다. 그곳의 나무들, 새들, 짐승들, 그리고 사람들. 가우초들과 함께 보낸 어린 날, 대평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다섯살에서 열다섯살 사이, 소년의 눈에 비친 세상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그저 기쁘고 낙락한 일들로만 가득차 있기 때문은 아니다. 소년의 눈에 비친 팜파스는 때로는 격정적이고,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아름다운 그런 세상이다. 그 곳에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따뜻하기도 하고, 촌스럽기도 하고, 격정적이고 폭력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드슨이 되돌아보는 팜파스는 아름답다. 자연도 사람도 빗장을 닫아걸지 않았던 시절, 훗날 조류학자가 된 어린 소년은 새들의 지저귐과 나무들 속에서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배우고 사랑과 행복을 배운다. 열살 무렵부터 총을 들고 오리사냥을 다녔던 '초원의 소년'은 멧돼지와 뱀, 들짐승들, 가우초들 사이에서 세상을 본다. 아르마딜로의 꼬리를 붙잡으면 이 짐승이 엄청난 힘으로 땅을 파고 들어가 사람이 빨려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 들판의 주머니쥐는 성질 사나운 독사까지도 나긋나긋하게 복종시키는 사나운 육식동물이라는 것, 야생화된 멧돼지의 위험성, 뿔이 서로 얽혀 굶어죽고 마는 성마른 숫사슴들. 소년은 그렇게 초원에서 태어나 자란다.

"사람들이 이 세상과 인생이란 행복하게 살 수 있을만큼 그렇게 즐겁거나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고, 마지막까지 평정을 유지하면서 지켜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그들이 제대로 살아본 적도 없고, 그들이 그렇게 부족하다고 보는 세상이나 그 속의 어떤 것도 명확하게 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풀잎조차도 말이다."

병상에서 어린시절을 돌아보는 노인은 팜파스에서 보고듣고 배운 인생의 이야기를 잔잔하고 감동적으로 들려준다. Far away and long ago, 책의 원제처럼 이미 너무 오래전의 일이, 너무 먼 곳의 일이 되어버린 이야기를. 허드슨은 1922년에 죽었고, 그가 이 책을 쓴 뒤로도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정말이지 오래되고 먼 이야기가 되어버린, 150년전 팜파스. 그래서 잔잔한 옛이야기의 감동이 더욱 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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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토마스 이디노풀로스 지음, 이동진 옮김 / 그린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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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3대 종교가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라고 알고 있고 또 실제로도 그렇지만, '3대 유일신교'라고 하면 통상 불교 대신 유대교를 집어넣는다. 이 세 종교는 모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서 시작됐다는 공통점과 함께, 구약성경이라는 공통의 텍스트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유독 서로간에 분쟁과 갈등을 많이 일으켰던 종교들이기도 하고,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지금도 서로 얽혀 있는 종교들이기도 하다. 얽혀있는 정도가 아니라 물고뜯고 싸우는 점에 있어서는 이 세 종교의 관계만큼 복잡한 것이 없다고 해도 될 것이다. 이 책은 '예루살렘'을 키워드로 해서 세 종교의 역사를 훑어보고, 세 종교의 신도들이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에 대해 갖고 있는 특수한 관념을 소개한다.
저자는 미국인인데, 이름과 약력으로 볼 때 그리스 계인 듯하다. 종교학자이고, 동방기독교(정교) 계열이 아닌가 싶다. 다만 약력을 통해 추측할 때 그렇다는 것일 뿐, 책에는 저자의 종교를 직접적으로 암시해주는 구절은 없다. 적어도 각 종교에 대한 설명에선 '객관성' 면에서 합격점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저자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의 순서(이는 저 종교들이 탄생한 순서이기도 하고, 저 종교를 믿는 세력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순서이기도 하다)에 따라 예루살렘과 각 종교의 독특한 역사적 관계를 설명한다. 물론 예루살렘은 '키워드'일 뿐,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카테고리를 훨씬 넘어선다.
1부 '유태인 역사에서 본 예루살렘의 의미'에서는 유대인-유대교의 역사와 함께 팔레스타인 지방의 고대사를 두루 훑고 있다. '골리앗과 다윗' '솔로몬왕의 재판' 따위의 일화로만 알려져 있는 다윗왕과 솔로몬왕. '정치가 다윗' '권력자 솔로몬'의 면모를 비롯해, 면모를 비롯해 고대국가로서 이스라엘의 독특함(신정체제)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더불어 저자는 유태인들이 갖고 있는, 역시나 독특한 숙명적 역사관을 설명하는데에 상당부분을 할애한다. '다윗왕가의 부활과 예루살렘 귀환'을 핵심으로 하는 유태인들의 예정설에 가까운 역사관은, 그들이 예루살렘에 목숨 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 고리이기도 하다.

2부는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바라본 예루살렘을 다룬다. 동로마제국을 중심으로 한 동방기독교의 역사, 십자군 운동을 비롯한 '서방'의 움직임도 등을 다루면서 기독교 내부의 신학적 논쟁도 소개하고 있다. 3부는 '이슬람 역사에서 본 예루살렘의 거룩함'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예루살렘에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역시 이슬람권 전반의 역사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책의 장점을 말하자면, 3대 유일신교를 교차 서술했다는 점을 우선 들 수 있겠다. 이들 세 종교의 접점이 예루살렘 뿐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중동분쟁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이 저술은 충분히 의미있는 작업이다. 더우기 이슬람교가 유대교와 기독교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그닥 알려져 있지 않은 우리나라 같은 상황에서는, 일반 독자들에게 중동의 상황을 알려주는 제법 훌륭한 개론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두번째로, 이 책은 극히 드물게도-- 국내 번역자와 출판사의 지극정성으로 부가가치가 엄청 높아진 책이라는 점이다! 문장이 매끈한 것은 물론이고, 페이지마다 아랫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충실한 각주는 모두 역자가 붙인 것. 거의 감동적...이라 할 정도의 성실성이 아닐 수 없다. 더우기 책이 갖고 있는 '편향'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뒷부분에는 국내 학자가 쓴 보론을 첨가해놨다. 책은 1967년 3차 중동전쟁까지만 다루고 있는데, 그 이후 상황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한 배려다. 뿐만 아니라(이건 원저자의 노력이겠지만) 중동지역 약사와 각 종교그룹의 왕계표, 참고연표를 실어놨기 때문에 중동사 개론서로 읽어도 손색이 없을 듯 싶다. 

문제가 있다면, 예루살렘의 최근사(20세기 초~1967년)를 다룬 4부. 저자는 전반적으로 종교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어서 정치경제적 배경에 다소 소홀한 측면이 있고, 무엇보다 현대 이스라엘의 탄생을 '아랍권의 과실'로 보는 견해를 갖고 있다. 오스만의 지배에서 갓 해방된 아랍인들이 제국주의와 결탁한 유태인들의 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고, 또한 '역사적 사실'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책 전반에 대한 만족도가 이 부분에서 상당히 떨어졌다는 것도 나한테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저자는 오스만 치하에서 망가진 예루살렘을 영국 점령당국이 훌륭하게 정비했다고 했는데, 일제가 개판 5분전이던 조선에 철도를 놓았다는 논리와 똑같다. 또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전 유태인 민병대가 아랍인들을 학살했던 것은 쏙 빼놓은채 '아랍인들이 폭력적으로 유태인을 죽였다'고만 서술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취사선택'함으로써 사실상 왜곡해버리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점이 많은 책인 것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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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18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4-12-18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별 셋이어야 할까요. 저도 고민을 했었는데...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
기시모토 미오·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김현영·문순실 옮김 / 역사비평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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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더니... 가을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면서 나의 독서는 끝장이라도 난듯이, 게으름만 늘었다. 책읽기도 리뷰 쓰기도 모두 귀찮아서 팽개치고 있었건만, 도저히 이 책은 칭찬을 해주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가 없을 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나의 무지함을 꾸짖어야했고, 일본 학자들의 엄청난 학구열에 혀를 내둘렀다.

책은 일본의 중국사(명/청사) 전공자와 한국사 전공자, 두 사람이 각각 명-청과 조선 시대를 맡아서 근세의 여러 모습을 살펴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나야 역사에 문외한이라서 이런 분야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만일 '비교역사학'이란 분야가 있다면, 이 책은 필히 거기에 속한다. 명-청 시대와 조선시대를 교차 편집해서 보여주는데 서술 방식이 재미있고 내용도 알차다. 어느 정도 알차냐면-- 우리나라 국사교과서를 없애고 이 책으로 고교생들을 가르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 대체 나는 우리 역사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던 것인지! 내 역사지식은 그러고 보면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정지된 것이나 다름없다. '고등학생 수준의 지식'이 뭐냐면, 결국 이런거다. '태정태세 문단세'를 외울 수 있고, 훈민정음 창제 연도를 알고 있고... 뭐 이런 식의 단순암기 수준 말이다.

책은 내가 '연도 외우기' 식으로만 알고 있던 것들 뒤에 숨겨진 배경, 역사적 의의를 설명해준다. 때로는 조선시대 어느 양반의 족보를 사례로 들어 양반사회의 진면목을 들춰내고, 때로는 중국-조선-일본-동남아를 오가는 왜구의 움직임을 종횡으로 연결한다. 구텐베르크에 앞선다는 고려의 금속활자는 어떤 의미/한계를 갖고 있는지, 이른바 '당쟁에 빠진 조선인'에 대해 조선인 스스로는 어떻게 보았는지-- 극히 협소한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바람에 정작 자긍심은 커녕 최소한의 이해조차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역사교육을 6년간 받느니, 차라리 이 책 한권을 읽는 편이 낫겠다. 농담 아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서양까지 포함해서)의 연구는 어떤 수준으로 진행돼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라서, 책 읽으면서 참 많이 쪽팔렸다.

쪽팔리기만 했나? 재미도 있었지... 책 참 재미있다. 딱히 어떤 '사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역사를 조명하는 일본 중앙공론사 시리즈의 일부분인 만큼 한정된 시대에 대한 개론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 것이어서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곁들여진 삽화와 그림에서도 성의가 철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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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12-10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감동지수가 느껴지는 리뷰로군. 에잇, 읽을 책 리스트만 늘어나면 뭐하누...(역시 게으름병과 바쁨병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라...-,.-)

딸기 2004-12-10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게으름병+시한부말기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는데...

마냐 2004-12-10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시한부말기증후군이 곧 바쁨병으로 바뀌리라는 게 짐작되니...어찌 '물귀신의 기쁨'이 없을소냐.. 나, 말년병장 완전 꼬여서...박민캡 모시구, 암7의 마와리처럼 구르고 있다 요즘...ㅠ.ㅜ

숨은아이 2004-12-10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사고 싶다. 흑흑.

딸기 2004-12-10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셔요 ^^

panda78 2004-12-13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딸기님의 리뷰들도 정말... 그냥 넘어가질 못하게 만드는군요.. 쩝.. 비싸 보이는데...;;

딸기 2004-12-13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아주 쉽게 읽을 수 있으니깐 심심풀이로 한번 보세요. 재밌어요.

딸기 2004-12-13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근데...



판다님이 나타났다!

로즈마리 2004-12-15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읽어봐야 겠네요. ^^ 딸기님의 글에서 풍기는 그 열성(?)이 느껴집니다.

딸기 2004-12-15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요샌 열성???이고 뭐고... 서평도 게을러져서 통 안 쓰게 되더라고요.

연말을 앞두고... 무종의미..가 되려고 해요
 
솔로몬의 반지 - 그는 짐승, 새, 물고기와 이야기했다
콘라트 로렌츠 지음, 김천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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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재미있는 동물이야기'이다. 저자가 콘라트 로렌츠이고 보면, 그닥 두껍잖은 책이지만 뭔가 알짜배기 내용을 기대하는 것이 독자로선 당연한 일.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심오한 철학이 있냐고? 이 책을 펼치는 독자라면, '비교행동학의 창시자' 혹은 '노벨상 수상자'라는 로렌츠의 경력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읽기를. 이 책은 로렌츠가 노벨상을 받기 훨씬 전에 쓰여진 것이다.

책에서 만날 수 있는 로렌츠의 모습은 '두리틀 선생'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도나우강 근처의 어느 유럽식 주택, 집안에는 개와 햄스터가 돌아다니고 지붕 처마밑에는 갈가마귀 무리, 서재에는 거위와 기러기가 들락거린다. 엉망진창인 집의 한구석에는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전형적인 과학자' 아저씨가 지저분하게 털이 뜯겨져나간 카페트를 밟고 서서 어항속 물고기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다-- 이 정도면 책의 분위기가 전달되려나. 책은 로렌츠가 '집에서' 동물들과 함께 살면서 관찰한 내용을 담은 에세이들로 구성돼 있다. 로렌츠는 친절한 동물가게 아저씨처럼 이 동물은 어떻고 저 동물은 어떻고, '집에서 기르려면 이런 애완동물을 골라라'는 충고까지 해주면서 다양한 동물친구들을 소개한다. 이런 로렌츠의 모습은 마법의 반지를 가지고 동물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솔로몬 왕보다는 수의사 두리틀 선생을 더 닮았다.

로렌츠의 명성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상 책을 읽는 것은 처음이었다. 책을 읽기전 내 눈에는 뭐랄까, 색안경 같은 것이 한꺼풀 씌워져 있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로렌츠의 '나치 부역' 경력이다. 이 책은 로렌츠가 알텐베르크라는 곳에 살 적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1937년 로렌츠는 실업자였다. 가톨릭성향의 빈 대학은 종교적인 이유로 동물본능에 대한 연구를 금지했다. 그는 자비로 새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알텐베르크로 내려갔다. 그리고 독일 정부에 연구비를 신청했다." 매트 리들리는 <본성과 양육>에서 '나치토피아'라는 제목으로 로렌츠의 나치 경력을 들춰내고 있다. "1938년 6월 오스트리아 합병 직후 로렌츠는 나치당에 가입해 인종차별 정책에 일조했다. 그는 즉시 동물행동에 관한 자신의 연구가 나치 이데올로기와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연설하고 글로 쓰기 시작했다. 1940년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후부터 1944년 러시아 전선에서 체포되기까지 몇년동안 그는 일관성 있게 과학적으로 입증된 인종정책', '국민과 민족에 대한 인종 개량', '도덕적으로 열등한 자들의 제거' 등의 유토피아적 이상을 주장했다."(<본성과 양육>에서 인용)

<솔로몬의 반지>에는 나치는 커녕, 정치적인 어떤 것을 암시하는 이야기도 나와 있지 않다. 주위 사람들에게 미친사람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동물에 몰두한 어떤 학자와, 그의 동물친구들 얘기만 나와 있을 뿐이다. '학문은 학문이고 정치는 정치'라고 말하기엔 좀 그렇잖아? 책을 덮으면서 기분이 찝찝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이 재미난 에세이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믿어야할지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로렌츠가 밝혀낸 개념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물의 '각인'이라는 것이다. 동물원의 공작이 하필 바다거북한테 필이 꽂혀 어긋난 애정행각을 벌였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실은 이 책에 나와 있는 것이다. 한데 리들리의 설명을 빌자면, 로렌츠는 자신을 엄마처럼 쫓아다닌(잘못된 '각인'의 실제 사례) 러시아 오리를 몹시 끔찍스러워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는 등장하는 '모든' 동물에 대한 로렌츠의 애정이 철철 넘쳐나고 있어서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어찌됐든 책은 굉장히 재미있다. 로렌츠가 직접 그렸다는 삽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번역이 형편없지만, 전문과학자 겸 에세이스트로 활약했었다는 로렌츠의 이야기 솜씨는 대단하다. '닐스의 이상한 여행' 저리가라다(재밌게도 로렌츠는 이 동화를 책에서 인용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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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12-01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굉장히 좋아하는데, 로렌츠가 나치에 부역했다고요? 충격... 그럼 전후에 사과라도 했나요?

바람구두 2004-12-01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콘라트 로렌츠의 책이네요. 헐헐...

딸기 2004-12-01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두님 혹시 로렌츠 책 보신 것 중에 재미난 거 있으면 추천 좀 해주세요.

근데 ... 웃음소리가 바뀌었네요?

숨은아이님, 로렌츠는요 전후에 '사과'는 아니고요, 자기가 진짜로 나치즘을 신봉한 것은 아니고, 과학적 원칙을 굽히긴 했다, 이렇게 얘기했대요. 근데 로렌츠 사후에, 로렌츠가 훨씬 적극적으로 나치즘에 가담했던 것이 드러났다나요. 재미난 것은, 나치즘의 우생학은 로렌츠와 상관없이 만들어진 거였고, 실제로 로렌츠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답니다.

바람구두 2004-12-02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제가 과학책인데, 읽었을리 없잖아요. 그 방면에 대해서만큼은 제가 딸기님에게 묻고 싶다고요. 콘라트 로렌츠에 대해서 알게 된 건 라이프에서 예전에 나왔던 자연사 시리즈 중에서 "동물의 행동"이던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그 책에서 그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어서 그 책에서 읽은 것이 전부입니다. 다만, 나치즘의 우생학이 로렌츠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는 건 딸기님 말씀이 맞을 겁니다. 그때만해도 로렌츠는 애송이 과학자였을 테니까요. 게다가 가는 길도 많이 다르고.... 하여간 덕분에 좋은 책 알게 되었군요. 나한데 이런 책 좀 많이 소개해주지? 흐흐.

딸기 2004-12-02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흐흐'로 돌아왔군요 ^^

제가 보기엔 구두님도 인문사회과학, 음... 그러니까 '문과' 쪽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머리 회전방향을 잠시 돌리기 위해, 존 홀런드의 '숨겨진 질서'를 재미삼아 읽어보세요. 다른 과학책들하고도 사뭇 다르고, 문과쪽 책들하고는 전혀 다른 재미가 있거든요.

바람구두 2004-12-02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홀런드? 일단 콘라드 로렌츠도 읽고.... 그 책도 읽어보도록 할께요.

저보다는 딸기사마가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과학 분야에도 그렇게 관심을 가질 줄이야.... 김동춘 선생 책은 가능하다면 한 번 읽어보시고, 서평 올려주시길... 나야 김동춘 선생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는 인간인지라...(그렇다고 딸기사마가 다르다는 건 아니지만) 궁금해요. 이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하고... 흐흐, 오늘은 학술세미나에 가서 꾸벅꾸벅 졸다가 이제 막 사무실로 돌아왔답니다. 오늘은 딸기사마 서재에서 농탕질치고 있군요, 흐흐.

딸기 2004-12-02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학술세미나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학술세미나, 하면 생각나는 기억.

회사 들어간 첫해. 그 다음해가 '쥐의 해'였거든요. 쥐...에 대해 쓰라는 지시를 받고, 쥐에 관한 학술회의에 갔지요. 어찌나 재미가 없던지...쯧쯧. 쥐에 대해 한바닥(지면 한 면을 몽땅) 쓰는데, 쥐와 관련된 민담, 쥐 토템(실제로 있어요), 쥐가 나오는 꿈, 쥐를 묘사한 그림과 조각 기타등등... 그런걸 다 긁어모아야 했답니다. ^^

김동춘선생 책을 전에 한권 읽어봤는데, 글의 논지가 명확하고 내용이 아주 좋았어요. 근데 ... '글'을 조금만 더 잘 쓰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글재주는 타고나는 거니깐 너무 과한 요구인지 모르겠지만요. 그나저나 지금은 사놓고 안 읽은 책들이 많아서, 아마도 귀국한 뒤에나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바람구두 2004-12-04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김동춘 선생은 사회학자 중에서 글을 가장 잘 쓰는 축에 속하는데... 무슨 글을 읽고 그런 얘기를 하는 건지... 나로서는 잘 이해가 안가요. 글구, 소위 주제(야마)가 명확한 걸 좋아하는 경향은 저에게도 있지만, 기자들이 지닌 직업병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보시압. 흐흐, 귀국 얼마 안 남았구랴. 내 선물도 하나 사다 주려나....?

딸기 2004-12-04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음... 김동춘선생 글 중에서 뭘 읽었더라... 아마도 '근대의 그늘'이 아니었던가 싶어요(제목은 정확하게 기억 안 나지만). 그분 글을 다시한번 꼭 읽어봐야겠네요.

근데 다 좋은데, 선물...은 대체 뭡니까. ^^ 지인들 선물로는 몽땅 가네보 클렌징 폼(뭔지 아우?)을 사갈 생각인데 그거라도 좋다면 하나 준비해 가지요. ㅋㅋ

바람구두 2004-12-04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건 싫어요. 흐흐. 그보다는 좀더 기념이 될만한 선물을 주시길...

욕심이 과한 건 알지만, 주려거든 좋은 걸 주고, 싫은 아예 주지 말아요.

그런다고 서운해할 사람도 아닌데...

딸기 2004-12-04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아무려면 제가 구두님한테 클렌징 폼 같은거 줄까봐요 ^^

(상상만 해도 웃기네요)
 
이미지의 삶과 죽음
레지스 드브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시각과언어 / 1994년 11월
품절


덧없는 것에 대한 고뇌가 없다면 기억이란 것도 필요하지 않으리라.-28쪽

기술과 신념의 공동의 진화는 우리를 보이는 것의 역사 속에 세 시기들로 이끌어간다. 즉 마술적 시선과 미적 시선, 그리고 경제적 시선으로. 첫번째 것은 우상을 불러내고 두번째 것은 예술을, 세번째 것은 영상적 시각을 불러내었다. 비전 이상으로, 거기에 세계의 조직이 있다.-47쪽

그림으로 그려진 감각에는 언어적 등가물이 없다-54쪽

클로망 롯세, '회화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선 관객에 따라 그 스스로 의미가 된다.'-56쪽

이미지가 그 고유한 수단을 통해 인정받지 못하면 못할수록, 더욱더 그것을 말하게 할 해설자들이 필요해질 것이다.-59쪽

하나의 이미지는 영원하고도 결정적으로, '최선의 독해'가 불가능한 수수께끼이다.-66쪽

발터 벤야민이 '기술적 복제 가능성'으로 인한 그 소멸을 한탄했던 이 거룩한 분위기 즉 '아우라'는 그가 그렇게 염려했던 대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인격화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작품들을 더이상 우상화하지 않는 대신 예술가들을 우상화하고 있다.-71쪽

이미지는 모든 사람과 신이 만들어가는 하루하루마다, 크고 작은 비용을 들여가며 무의식적인 모방성향을 제공한다. 자기와 동일시하는 상상적 모델의 문제는 결코 새롭지도 또 서구만의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정할 수 있는 것은 빙하기의 젊은 들소 사냥꾼이 벽화를 보았기 때문에 쓸데없이 만용을 부리는 위험스런 짓들을 했었으리라는 점이다.-128쪽

어째서 단테는 '중세의 시인'이며 단 일년 차이 밖에 없는 그와 동시대 사람은 벌써 '르네상스 화가'라고 불리는 것일까? 왜 뉴턴의 연속적, 도일적이며 동위체적인 공간이 이미 그보다 한세기 전에 원근법의 발견자들에게서 찾아지는 것일까? 어째서 프라고나르의 가벼운 화풍은 단지 궁전의 각도를 바꿔놓을 뿐인데도 그토록 깊게 앙시앙 레짐의 몰락을 알리고 있는 것일까? 왜 풍경화가 위베르 로베르으 폐허들이 혁명의 파괴들을 예고하는 것일까? 왜 터너는 열역학보다 먼저 불의 은유들을 그려 보이는가? 왜 큐비스트의 작품에서 관점의 해체가 기초적인 인문학적 주제의 성급한 소멸을 재촉하는 것일까? 왜 미래파는 문학이기 이전에 파시즘의 한 형태인가? 왜 1939년 이전에 막스 에른스트가 그린 방향감각을 상실한 도시들 속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윤곽이 어른거리는 것일까?
왜냐하면 감각적 이미지는 이 세상 속에서 메아리치며, '열등한' 에너지의 원천으로부터 자양을 취하며, 따라서 '우월한' 정신 활동보다 덜 감시받거나 더 반칙적이며, 더 자유롭거나 덜 통제받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더 멀리 그리고 더 낮게 포착하는 레이더를 만든다.-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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