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히스토리아 문디 3
키스 W.휘틀럼 지음, 김문호 옮김 / 이산 / 2003년 8월
평점 :
절판


최근 몇 년 동안 되는대로 집히는대로 읽어왔던 것은 중동/이슬람/이스라엘에 관한 책들이었다. 왜 책을 읽는가? 잠시 우문(愚問)을 던져보면, '보기' 위해서다. 그냥 남이 보여주는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고, 간단하게 대답해두자.

바로 보는 것, 제대로 보는 것은 '가려진 것'들까지도 보는 것, '권력의 담론'에 머무르지 않고 '배제된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마다 절절이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다. 제대로 보려면 많이,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만 해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아주 구체적인 사실들을 많이 알아야 한다. 알아야 할 것은 너무 많은데, 그 많은 것들이 또한 권력의 담론에 의해 가려져 있으니. 그래서 알기가 힘들고 보기가 힘들다. 아무리 '비판적'인 책들을 읽는다 해도 눈을 가리고 있는 장벽은 두텁디 두텁다. 두터운 장벽을 조금이나마 뚫어보려고 책을 읽는다. 한 권을 읽고, 이제 1cm 쯤은 뚫렸겠거니 생각하고 또 한권을 펼치면 여전히 높고 두터운 장벽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어려운 작업인가. 리뷰를 쓰기 앞서 이런 독백 아닌 독백을 늘어놓게 만든 이 책. 책을 읽으면서 제대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시 절감하면서 잠시 좌절. 착한 독자를 이렇게 좌절하게 만든 이 책은 참으로 나쁜 책이다! 한번 욕해주고 싶지만 대단히 훌륭한 책이다.

 

책은 '침묵당한 팔레스타인 역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침묵당한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소개한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이른바 '성서고고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고대 이스라엘'에 대한 연구들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고대 이스라엘'에 대한 환상의 이면에 숨겨진 정치적 함의를 파헤친다.

역사연구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 역사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특정 텍스트를 '선택'해 연구하고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학문이라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역사학은 편파적인 학문이다'라는 것이 저자의 기본 전제다. "이 책은 팔레스타인의 역사가 아니며, 팔레스타인의 역사라는 프로젝트가 성서연구의 담론에 의해서 어떻게 방해받아 왔는가에 대한 논평이다." (23쪽) 책은 '고대 이스라엘'이라는 허구적 개념을 '고고학적 증거'들로 뒷받침하는데에 혈안이 되어온 성서고고학의 '편파적 텍스트'들에 맞서 쓰여졌으며, 따라서 이 책 또한 '편파적인 텍스트'라고 저자는 미리 선언을 해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자가 '환상'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성서고고학의 기본 가정은 어떤 것인가.

"지금부터 약 3000년 전에 팔레스타인 땅에 선진 문명을 가진 유대민족이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했다. 유대민족의 위대한 선조 다윗은 타락한 다신교 신앙에 물들어있던 가나안 부족들을 정복하고 유일신교를 믿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당시 그 땅에 살고 있던 부족들은 열등한 문화 밖에는 갖고 있지 못했으며, 선진 문명을 건설할 능력이 없었다."

조야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이같은 '가정'은 '추론'을 넘어서 고고학자들의 대전제가 되었고, 고고학적 연구는 대전제의 '증거'들을 찾는 작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지워졌다. '팔레스타인'은 어떤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일지언정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이름은 아니었다. 이 연구를 진행해온 사람들은 철저하게 팔레스타인의 고대사를 지우고 '고대 이스라엘'이라는 상상의 산물을사실(史實)'로 만들어버렸다. 팔레스타인 역사를 '지우는' 행위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는 명백하다. 첫째 현대 이스라엘을 위해서, 둘째 기독교 경전에 바탕을 두고 근대 민족국가의 '기원'을 찾고자 했던 서구를 위해서였다. 성서고고학자들의 연구에서 시오니스트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대사를 지우는 행위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저자는 우선 '시간과 공간의 명명법의 선택'이 하나의 방법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청동기 후기-철기시대 초기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가나안 시대' '정착과 판관의 시대' '유대 제국 시대' 등으로 이름 붙이는 것이 '시간의 명명법'에 해당된다면, '공간의 명명법'은 지금 이스라엘이 무력점령하고 있는 골란고원과 웨스트뱅크 등지에 가나안 사마리아 식으로 '성서의 지명'을 붙이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름붙이기, 즉 '이스라엘'이라는 꼬리표 붙이기에 이어 성서고고학자들은 '진화론적' 시간을 도입하는 방법을 함께 동원한다. 가나안 땅에 유대인이 '정착'하고 '정복'했던 것에 대해 도덕적, 진화론적, 서구적 개념을 적용하는 것. 여러말 할 것 없이, 서양이 '대항해의 시대' 이후 '야만인의 세상'을 문명화시켰다는 논리와 그대로 일치한다.

또하나의 방법은 '문자 텍스트(성서)에 의존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진정한 역사'는 오직 문자로 기록된 자료를 토대로 해야만 쓸수 있다는 성서연구의 공통된 가정 아래 작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자료들이 없기 때문에 '선사'는 역사와 똑같은 비중을 갖지 못하고, 아무튼 사실이 아니며, 그래서 결국 이 시기들에 살았던 민족들은 침묵당하게 된다. 이것은 국민국가의 맥락에서 발전한 19세기 서양 역사서술의 원칙이다. 이제 그 원칙은 우리가 '진짜 역사'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오직 이스라엘 국가(국민국가)와 함께 할 때뿐이라는 사실에 의해 이스라엘 역사의 구성 속에서 더욱 강화된다." (189쪽) 그리고 '성서'는 팔레스타인땅의 과거를 서술한 '객관적인 역사책'으로 격상된다.

저자는 민족국가/문자텍스트만을 선별적으로 채택해온 성서고고학의 연구결과들이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갖고 있는지, 바로 그 연구서들을 뒤져가며 설명한다. 성서학자들은 '우월한' 유대민족이 '열등한' 원주민들을 정복한 것은 정당한 행위였으며 심지어 '신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인종주의를 극명하게 드러내보인다. 심지어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성서고고학계의 이런 경향은 사라지기는커녕 강화되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유대인을 나치와 동일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한 성서고고학자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의 권리가 '정복의 권리'에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제국주의의 논리를 반복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성서고고학은 이스라엘은 '특별한' 나라였다는 선민사상을 여과없이 수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특별한 위상 때문에 팔레스타인 정복은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복은 사실상 신의 계획의 일부"가 된다. 이는 곧 기독교 근본주의다.

 

책의 3장(고대 이스라엘 발명하기)과 4장(이스라엘 국가의 창조)은 1970년대까지 성서고고학을 주도했던 독일과 미국 주요 연구자들의 연구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5장에서는 1980년대 이후, 성서고고학에 대한 반발로 '수정주의' 해석들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의 연구들을 소개하고 비평한다. 요약하자면 성서고고학은 이스라엘이 고대부터 '국민국가'의 원형을 갖고 있었다는 허구적 가설 위에 지어진 집이라는 것, 다윗과 솔로몬이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는 것, 성서고고학의 기본 가정들은 '다윗왕의 황금시대'와 같은 개인숭배적 요소들로 인해 더욱 강화됐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핀컬스타인 류의 수정주의적 해석들 또한 성서고고학의 바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현대 이스라엘'이라는 지배요인에 압도당한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침묵을 강요당한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어떻게 제 목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아쉽게도 책은 '앞으로의 연구'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작업이 갖고 있는 의미는 크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역사를 말살하는 행위가 구체적으로 학문의 틀 안에서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갈파해내는 것, 현재와의 유사성을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고대이건 현대이건, 이스라엘-유대민족의 우월함과 팔레스타인-아랍인의 열등함을 강조하는 것은 공통의 전제다. 또 고대 이스라엘의 '제국' 건설과 '정복'에 '침략적 자기방어'라는 우스꽝스런 이름을 붙이는 것은 현재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 골란고원에서 이스라엘이 저지르고 있는 짓들과 완전히 똑같다. 고대 이스라엘의 이주-정복 모델은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과정과 일치한다. 이스라엘을 '민주주의 국가'로 묘사하면서 토착민들의 사회(페르시아/아랍)에 전제정치의 꼬리표를 붙이는 것도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역사적 모델'을 만드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현재가 과거를 만들고, 정치가 역사학을 만드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역사 지우기'가 팔레스타인 땅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국민국가'를 기본틀로 역사를 해석하는(빼앗는) 행위는 '국가'를 만들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역사 속에서 사상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팔레스타인의 비유대계 거주민들, '신대륙'이라는 이름 아래 역사를 빼앗겨 버린 아메리카의 원주민들, 국가를 만들려 한다는 이유로 터키 정부에 의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고 있는 쿠르드족, 티벳 등 목록은 계속 길어질 수 있다. 이들 모두를 위해서도 '편파적 텍스트'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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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1-11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기' 위해서, 책은 정말 중요함다. 그리고 때론 이런 책들을 통해 제대로 보는 사람을 '알고 있는 것'이 더 편하고 좋슴다. ㅋㅋㅋ

딸기 2005-01-11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추천 눌러줘야지!

마냐 2005-01-11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잇, 꾸욱.

딸기 2005-01-11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히히.
 
잘못 들어선 길에서 (구) 문지 스펙트럼 17
귄터 쿠네르트 지음, 권세훈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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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부인하지 않으련다. 모두 시효가 지났기 때문이다. 1730년 이후 여러 명의 산지기를 먹어치웠음을 고백하는 바다. 그들이 풍기는 역겨움에다가 값싼 담배, 사슴뿔 단추, 더러운 로덴천 등의 냄새는 내 식욕에 대한 충분한 형벌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나는 백년이 넘도록 산지기를 두번 다시 건드리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 산지기를 먹어치운 '그 누구'를 상상하게 만들고, 압도되게 만들고, 기어이 충격을 주는 소설, 그리고 한바퀴 돌아서 어이없이 '그 누구'를 먹어치워버리는 세상에 대한 풍자. 
귄터 쿠네르트, 동독 출신으로 서독에 망명했던 소설가, 처음 접하는 단편소설집, 작고 얇은 책, 역시나 가벼운 책값. 책표지에는 '전체주의 체제로의 편입을 거부한 아웃사이더의 목소리! 국내 처음 소개되는 귄터 쿠네르트의 대표 단편 모음집'이라는 문구가 박혀 있다. 그 밑에 작은 글씨로 쓰인 옮긴이의 말 따위는 한번 훑어보지도 않은채 책장을 펼쳤다. 그리고는 그만 깜짝 놀라버렸다. 첫째 이런식의 판타지, SF 소설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둘째 다소 엽기적인 판타지들이 뭔가의 정곡을 찌르고 있기 때문에.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 이라고 한마디로 정리해 버리면 이 책은 그저 '동독 지식인의 독재정권 비판' 혹은 '서독에서 더 인기가 있었던 동독 작가의 작품'으로만 남게 된다. 이 책의 묘미는 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작가는 이 작은 단편집에서 때로는 전체주의 정권의 사상검열을 비판하고(G.라는 남자와의 만남에 대한 검열관의 보고) 때로는 물질문명 전체에 대해 씨니컬한 시선을 던져보낸다(때아닌 안드로메다 성좌/아담과 이브/올림피아2). 어떤 소설에서는 두 가지 비판이 결합되기도 한다(동화적인 독백). 그런가 하면 꼭 동독이 아니어도,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어도 상관없을 현대사회의 허망한 사랑이야기(러브 스토리 메이드 인 DDR/장례식은 조용히 치러진다)도 있고, 갈곳 모르는 인간 심리의 단면을 단칼에 토막쳐버린 단편들(잘못 들어선 길에서/대리인)도 있다. 결국 작가가 그려보이는 것은 전체주의, 자본주의, 과학지상주의, 이 모든 것들이 결합된 현대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이다. 시체를 배달하고 배달받는 사회, 타인의 죽음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다시 말하면 "우리 중에 죄 없는 자 누구인가". 1929년생 소설가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다른 작가를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어술러 르 귄의 단편들이 인류에 대한 SF적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누군가가 내게 말한다면, 그냥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 책을 건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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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1-05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anks to 입니다. 리뷰도 잘 읽었습니다.

딸기 2005-01-05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꼭 알라딘에서 구입하셔서 저의 마일리지에 보탬이 돼주세요. ㅋㅋ

하이드 2005-01-06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헤 ^^ 샀어요. 한 50원쯤 보태드렸나봐요.

딸기 2005-01-06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벌써! 사셨군요 ^^

로즈마리 2005-03-29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 책을 여기서 보니 정말 반갑네요..^^ 내용이 의외고 기상천외해서 더 재밌으셨겠죠?

딸기 2005-03-29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즈마리님 때문에 읽은 거라고요. ^^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월터 J. 옹 지음, 이기우 외 옮김 / 문예출판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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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랜만에 재미난 책을 읽은 느낌. 평소 생각해보지 못했던 주제,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던 것에 대한 지적인 도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 아닐까.
'책'을 '읽는다'- 이 책은, 바로 '책'과 '읽는다'는 것, '말'과 '이야기한다'는 것에 대한 책이다.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이행(모든 사회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이 인간의 의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문자와 책과 인쇄가 어떻게 인간의 사고방식을 시각적인 텍스트로 '고정'시켰는지에 관한 '책'이다. 선입견을 버리고 구술문화를 바라볼 것을 강조하는 저자의 요구가 다름 아닌 '책'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러나 어쩌랴, 책은 그렇게 쓰이라고 만들어진 도구인 것을. 다만 무심결에 줄지어선 문자들을 눈으로 보고있는 나를, 평소 의식하지 못하던 '책읽는' 행위를 의식하게 만들어줬다는 것, 그 자체가 저자의 선물이라면 선물이다.

"옛날 옛날 한 옛날 어느 마을에"로 시작되는 오래된 이야기들 하나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이야기'라 해도 될 것이다. 할머니들의 입을 통해 오랫동안 세대와 세대를 거쳐 첨삭되고 꾸며진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이 지금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하는 의문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저자는 인간이 현대인의 생각 이상으로 오랜 기간 동안 '구술문화'의 시대에 머물러 있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구술문화, 즉 저자가 '1차적 구술문화'라고 부르는 것은,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말로만 의사소통이 이뤄지고 이야기로만 역사가 전달되는 그런 문화를 말한다. 인류가 문자를 만들고 발전시킨 오랜 역사를 생각해보면, 구술문화 단계가 아주 최근 즉 근대 직전까지 계속돼왔다는 지적은 다소 이상하게 들릴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장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에는 읽고쓰기를 못하는 '문맹'이 흔했다는 사실. 이른바 '식자층'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구술문화는 아주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왔고, 정치경제적 '지배층'의 언어문화와 다르게 실제로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했던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그런 문화였다는 것이다.

문자문화 사회에 속하는 우리들이 1차적 구술문화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역설적이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담은 책(문자)들이라든가, 얼마 안되는 '원주민 사회' 정도. 저자 또한 현존하는 '구술문화 집단'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결과들에 상당부분 기대어서 구술문화의 특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문자문화와 비교했을 때 구술문화에서 '이야기' 혹은 '말하는 방식'에 나타나는 특징들을 설명한다. 구술문화가 지배적이던 시기, 입에서 입을 통해 역사와 지식이 전달되던 시기에 말은 곧 행동이었고, 이름은 곧 힘이었다. 사고(思考)는 대화를 통해 이뤄졌고, 기억은 패턴 혹은 리듬(관용구)을 통해 이어져왔다.
저자가 논리를 풀어가는 화두로 삼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을 비롯한 '옛이야기'들에서 영웅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심리학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여러가지 설명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자는 언어학적 측면에서 이를 설명한다. 기억을 저장하기(고정시키기) 위해서는 뭔가 뚜렷한 특징을 가진 인물, 혹은 유별난 행동을 한 인물을 묘사하는 것이 중요했다는 것. 가장 중요한 것은 '반복성'이다. 지리하다 싶을 정도로 장황하고 후렴구가 반복되는 옛노래들, 옛이야기들을 머릿속에 떠올린다면 쉽게 이해가 되리라.

구술문화의 특징을 다루면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는 '지금의 우리'의 의식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이는 서방/지식인/스스로를 문명인이라 생각하는 자들의 오만일 뿐이라는 것이다. 문자문화는 '기억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인간의 의식을 해방시켰고, 인간의 사고는 책이라는 저장도구가 생겨나면서 날개를 달았다. '듣는' 부담이 사라지고 논리와 추론이 가능해졌다. 동시에 이야기는 사물(책)이 되었다. 인쇄는 이 특별한 '물건'의 대량생산을 가능케하면서 대부분의 사회에서 구술문화를 밀어내는 역할을 했다(이렇게 변화된 사회를 우리는 '문명'이라 부르고, 이렇게 변화된 시기를 '근대'라 부른다). 그리고 문자문화는 구술문화에서와는 다른 인간형을 만들어냈다. '쓰기' 즉 문자化가 어느 한 지방의 말을 '기록되는 언어(기록방언)' 혹은 '공식 언어'로 만들면서 '국어'가 형성되고 근대민족주의 시대가 열렸다--아마도 베네딕트 앤더슨의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이런 논지가 그닥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책에서 언뜻언뜻 스치고 지나가는 몇가지 테마들은 지금, 우리의 언어문화를 되돌아보는데에 크게 도움이 된다. '위대하시고 영명하신' 등등 독재자 앞에 따라붙던 수식어구가 구술문화가 가진 반복성의 위력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구술문화 시기 엘리트들의 독점적 문자문화에서 배제됐던 여성들이 훌륭한 이야기꾼이자 소설 애호가가 된 이유, 추론과 논리를 '지성'과 동일시하는 우리의 버릇이 사실은 글 못 읽는 나뭇꾼의 체험적 지식보다 우스운 것일 수 있다는 것.

이 책은 깊디깊은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분량이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저자의 설명은 '풍부한 예시'보다는 추론에 많이 기대고 있고, 특히 후반부 전자문화의 영향력을 암시하는 부분에서는 아이디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30여년전에 쓰여진 책임을 감안하면, TV 방송을 '2차적 구술문화'라 간파한 정도만 해도 충분히 탁견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21세기의 독자로서 아쉬움이 남는것은 사실이다. 우리시대의 이야기문화를, 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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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마리 2005-03-29 0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당근 추천

하이드 2005-05-31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할 사람을 찾았다! 덥썩 꾹~ ^^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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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이 소설의 제목을 들어본지는 너무 오래되었고, 읽은지는 며칠 되었다. 리뷰를 올리기까지 여러가지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방드르디의 생명력, 로빈슨의 철학, 그것들이 어우러져 어째서 내게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지!
이래서 소설을 읽는다. 철학, 역사, 과학, 결국은 한권의 소설이 그 모든 것들의 집결체가 아니던가. 투르니에는 이 소설에서 '세계'를 창조해냈다. 더불어 하나의 신화에 도전하고,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가 도전했던 것은 이성과 합리성의 신화(서양의 신화)이고, 그가 만들어낸 것은 생명과 죽음을 오가는 역동성의 신화, 네이티브의 신화다.

책의 앞부분은 로빈슨의 고독을 묘사하고 있다. 투르니에는 어쩌면 끊임없이 '고독'에 대해 상상하고, 느끼고, 즐겼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는 투르니에 할아버지, 젊었을 적부터 이렇게 고독을 곱씹던 사람이었던가. 고독한 철학자 로빈슨은 합리성과 진보, 서구문명의 상징이다. 섬을 '조직'하고 '건설'하는데 매진하는 로빈슨의 고군분투가 실감나다못해 귀여워질 지경이었다. 
철학자 로빈슨의 세계는 방드르디라는 他者의 등장으로 여지없이 흔들리고 무너져내린다. 로빈슨 스스로 방드르디라는 '작명'의 이유를 설명했듯, 처음에는 '사물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었던' 타자의 등장. 로빈슨은 질서와 위계를 요구한다. 이 위계의 기반은 당연하게도 로빈슨의 문명이 가진 힘, 총탄과 화약이 지닌 힘, 파괴력이었다. 방드르디가 이것을 깨부수는 과정 또한 문자그대로 '파괴적'이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생명'으로서 방드르디의 모습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오래전 대학로에서 개그맨 출신 연극인 이원숭이 주연 겸 연출을 맡았던 '프라이데이'라는 연극을 본 적 있다. 투르니에에게서 시작된 '로빈슨 뒤집어보기'는 그 자체가 패턴화되어서 여러곳에서 반복됐던 모티브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작 투르니에가 창조해낸 새로운 '방드르디'는 위계를 거부하는 연극속 프라이디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우아한 원주민도 아니고 야성의 절규는 더더욱 아닌 '어떤 인간' 방드르디에게는 파괴와 생명의 구분이 명확히 적용되지 않는다. 질서와 자유의 구분도 없다(물론 그것이 로빈슨을 당혹스럽게 했을 터이지만). 숫염소 앙도아르를 방드르디가 '재창조'하는 장면에 이르면 자연과 생명, 그리고 죽음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결합되어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이 모호해진다.

"그는 웃는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폭소를 터뜨린다. 그 웃음은 총독과 그가 통치하는 섬의 겉모습을 장식하고 있는 그 거짓된 심각성의 가면을 벗겨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방드르디는 '노예'시절, 그 이후의 시절, 웃음으로, 생명력으로 로빈슨을 무력화한다. 그리하여 로빈슨으로 하여금 "해여, 나를 방드르디와 닮게 해다오, 웃음으로 활짝 피고, 송두리째 웃음을 위하여 빚어진 방드르디의 얼굴을 나에게 다오" 하고 기도하게 만든다. 로빈슨은 방드르디의 생명력에 불쾌해하다가, 마음속으로 모욕해보다가, 결국 동화되어버린다. 프란츠 파농이 "백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흑인의 생명력"이라고 지적했던, 바로 그 전형적인 '백인 심리'가 로빈슨에게서 진행되는 듯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방드르디의 모습에는 항상 '죽음'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앙도아르의 '죽음'을 통해 '자연의 소리'와 '비상(飛翔)'을 얻었듯이, 방드르디의 생명력은 죽음의 냄새를 짙게 풍긴다. 
로빈슨이 방드르디를 닮고자 할 때, 자신의 문명적 기반을 거부할 때, 그렇게 로빈슨의 '극복'은 섬과의 화해, 혹은 합일과 함께 이뤄졌다. 그런데 삶과 죽음의 순환, 원주민의 생명력과 야만성, 방드르디의 생명력과 지성이 '죽음'의 냄새를 끊임없이 풍기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서방이 생명력 넘치는 부족 사회들을 죽였듯, 자연을 죽였듯, 결국 방드르디의 '예고된 죽음'(물론 그의 물리적 '죽음'이 소설에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은 투르니에식 문명비판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르니에는 어째서 '마지막 희망'을 예비해두는 것일까.

책은 여러가지 화두를 던져줬다.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줄거리 못잖게 재미있었던 것은 투르니에의 글쓰는 스타일이었다. 지적이고 발랄하면서 의표를 찌르는 에세이들을 통해 투르니에 할아버지를 먼저 만났던 내게는, '젊은 투르니에'의 정열적인 문체를 만나는 것이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반면, 사족을 달자면, 투르니에 스스로 '투르니에 전문가'라 불렀다던 김화영 선생의 번역은 의외로 맘에 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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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5-01-03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추천은 제일 처음이군요. 제가.^^

딸기 2005-01-03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엉망진창인 글에 추천까지... 고맙습니다, 발마스님.

깍두기 2005-01-03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이 좀 어렵던데...뒤로 갈수록 재밌긴 하더만요^^

딸기 2005-01-03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의 왼갖 어려운 화두들은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습니다. ^^

urblue 2005-01-03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부터 들었다 놨다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언제쯤 읽게 되려나. 하여간 땡스투!

딸기 2005-01-03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어요, 진짜예요! 읽어보세요 블루님.

하이드 2005-01-04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봐야 하나 심각하게 고려중입니다. 그러니깐, 진짜 재미있다는 부분에서 말이지요. 방드르디에서 맡으신 죽음의 냄새라는거는 잘 모르겠지만, 첫번째로 로빈슨 크루소의 문명, 방드르디의 자연.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의 체계, 방드르디의 카오스. 세번째로 로빈슨 크루소의 파괴, 방드르디의 자연적 치유 이런거 생각하면서 읽기는 했지요( 수업시간에 배운게 저절로 생각나서 짜증나는) 혼자임에 몸부림치는 로빈슨 크루소가 귀여워질지경이었다는건! 동의하기 힘듭니다! 핵전쟁으로 산 속에 소와 고양이와 고립된 여자의 이야기를 쓴 독일작가의 책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방드르디는 없었지만, 문명도 얼마든지 자연에 화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었어요. (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런 걸 만화로 만들어주면 좋으련만)

바람구두 2005-01-04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잡생각없이 읽으면 더 재미있는데... 흐흐.

딸기 2005-01-04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드님, 저는 오히려 저 책에서, 그런 이분법을 무너뜨렸다는 것이 인상적이었거든요. 로빈슨이 섬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고, 방드르디에게도 나름의 질서가 있다는 식으로요. 방드르디의 파괴(염소를 죽이는 행위)가 곧 창조(염소를 연/악기로 만드는 행위)로 이어지고, 섬과 하나가 된 로빈슨이 결국 문명을 거부하는 식으로요.

미야자키 하야오는, 오랜옛날 '나우시카'와 그 다음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그런 걸 보여주는 것 같았는데... 요즘 들어서는 어쩐지 '아니올시다'라는 생각이 많이 들고요. '하울~'은 아직 못봐서 잘 모르겠지만요.

구두님, 흐흐...

바람구두 2005-01-05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개인적인 생각으론 미야자키 하야오는 원령공주 까지의 세계에서 그가 보여줄 만한 것들은 거의 다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센과 치히로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일종의 바리에이션으로 보아야겠지요. 흠흠.... 천재가 나이먹으면 스타일만 남는 법이니까.

딸기 2005-01-05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의.

딸기 2005-01-05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르니에 할아버지 취향이 원래 좀 엽기적이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히히.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
김동춘 지음 / 창비 / 2004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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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은 '천박함'이다. 수퍼 파워 미국을 이끈다는 작자의 입에서 나오는 언사들의 그 참을 수 없는 천박함, 전쟁을 벌이면서 '충격과 공포' '무한 정의' 이따위 작전명을 붙이는 새대가리 같은 작태, 그 천박함이란!

그 천박함 중의 일단을 드러내보였던 장면을 기억한다. 부시라는 작자가 이라크전쟁 '승리'를 선언한 뒤 무려 보잉사 무기 생산공장에 몸소 찾아가서 전쟁 승리를 자화자찬하며 무기 PR에 열을 올리던 모습. 항공모함 선상에서 같잖게 군복 차려입고 종전을 선언했던 것보다도 부시의 천박함을 더더욱 극명하게 보여줬던 것은 아마도 보잉사에서 브리핑하듯 기자회견을 했던 그 모습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미국이라는 제국이 군산복합체와의 결탁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나라라고는 하지만, 저 정도로까지 노골적으로 나대는 것은 정말이지 구역질나는 수준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다.

진보적 학자인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이라크전을 계기로 본 미국의 실상을 다룬 이 책에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참 잘 붙인 제목이다. 책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가지 결탁관계들을 드러내 보인다.

핵심은 제목 그대로 '전쟁과 시장'이다. 전쟁에 필수적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는 무기들과 그것들을 생산하는 산업체, 그리고 군산복합체에 돈을 퍼부어주는 미국이라는 국가. 지난해 이라크전에서 전쟁과 전쟁시장(군수산업)의 관계는 단순히 '전쟁과 무기'의 구매관계를 넘어 한차원 업그레이드됐다고도 볼 수 있다. '전쟁의 민영화'라는 점에서 이라크전은 분명 이전의 전쟁들과는 달랐다. 켈로그 브라운 & 루트 같은 회사들은 중남미 일대에서 독재정권들을 위해 군사작전 수립까지 '대행'해주는 기업들이고, 이번 이라크전에서는 상식적으로 '국가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인 군대의 후방지원을 비롯해 다종다양한 일들을 맡아 처리했다. 이라크전은 바야흐로 문자 그대로의 '전쟁산업' 시대에 진입했음을 보여줬다.

전쟁과 산업의 결탁, 그것을 가능케 만든 또다른 결탁관계는 '전쟁과 제국'의 결탁이다. 제국의 존재기반은 돈, 그리고 무력이다. 강압성, '시범 보여주기'. 한 놈 죽도록 패어주고 나면 다른놈들은 못 덤벼든다, 이런식의 '때려잡기'. 기본은 '힘'이다. 이런 힘의 논리를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줬다는 면에서도 부시의 이라크전은 걸프전을 훨씬 넘어섰다.


책의 전반부는 제국을 움직이는 무력 기반, 그리고 그 뒤에 숨은 자본의 기반을 파헤치는 것이고, 후반부는 제국 내의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이 책의 중심은 사실 뒷부분이다. 사실상 '한 당의 두 분파' 정도의 차별성 밖에 없는 미국식 양당체제의 허실, 이익집단에 조종되는 워싱턴 정치의 특성, 그것이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시장근본주의, 여론의 조작과 상업미디어의 활약. 더 깊이 들어가면 미국 주류사회의 존재기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종차별주의와 기독교 근본주의가 있다.

오만함, 그리고 그 오만함에서 나온 외부(외국)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 제국 밖의 식민지들 못잖게 괴로움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제국 내의 식민지, 빈민들. 중첩되는 결탁관계들은 이렇게 제국의 안과 밖에서 이리저리 이어지는 선을 만들고, 선은 필연적으로 배제되는 사람들을 양산한다. 저자는 350페이지 분량의 이 책에서 제국을 둘러싼 결탁관계들과 그것의 귀결점들을 정리해 보여준다.


만일 내가 지금 신문 서평을 쓰고 있는 거라면, 이 정도에서 이 책에 대한 평가를 끝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은 훌륭한 반미교과서다. 저자 스스로 '미국의 좋은 점만 알고 있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미국의 다른 면을 보여주기 위해 쓴 것'이라고 밝혔듯이, 글자를 읽을 수 있는 모든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반드시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아쉬움이 남는다. 이 정도면 대단히 훌륭한 책인데, 읽고난 느낌이 어쩐지 허전하다. '반미교과서'들을 너무 많이 읽은 것일까? 촘스키류의 책에 너무 익숙해진 것일까?

허전함의 요체는, 저자의 분석이 너무 '일반론적'이라는 것이다. 책의 내용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구체적인 분석이나 새로운 정보는 사실 별로 없었다. 책의 근거가 되는 사실/자료들은 신문에 나왔던 것들이나, 국내에 출간된 촘스키류 지식인의 미국 비판서에 실린 내용들이다. 따라서 기존의 미국비판서들과 큰 차이가 없고, 실제로 저자는 그 책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 일반적인 얘기 외에 나는 진보학계의 선두주자 김동춘 교수에게 좀더 듣고 싶은 것들이 있는데 말이다.

 

미국을 움직이는 양대 엔진의 하나로 저자는 '시장'을 꼽고 있지만, 사실 '시장'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 안에서는 다양한 헤게모니 싸움이 진행된다. 미국의 보수우파에도 역시 여러 종류가 있다. "부시 식의 오만함과 팍스 아메리카나 전략은 사실 2차대전 이후부터 계속돼 왔던 것이고, 대항세력이 없어진 지금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일 뿐" 혹은 "클린턴이나 부시나 그 넘이 그 넘"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부족하다. 저자는 맞는 말을 하고 있지만, 부시 정권의 기반에 대한 좀더 세밀한 분석은 없다. 예를 들면 신영복 선생은 지난해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부시 정권이 미국 내 자본 분파 중 군수산업체라는 비교적 '하드'하고 '올드' 한 분야에 지지기반을 두고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 문제는 사실 굉장히 중요하다. 1980년대 이후 주도적 자본분파로 부상한 월가의 금융자본과 군수자본의 이해관계는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월가는 부시 정권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를 꺼려왔던 측면이 있고, 월가의 큰손들이 이라크전 이후에야 비로소 부시와 '비공개 회동'을 갖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부시정권의 정치적 기반 역시 상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이른바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의 부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김동춘 교수는 상세히 설명하지 않았고, '네오콘'이라는 용어의 사용에서조차 혼선을 빚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냉전 종식 이후 사실상 '첫 전쟁'이었던 1차 걸프전을 일으킨 아버지 부시 정권 시절의 보수파와 지금의 네오콘들은 분명 다르다. 미국 내에서 보수 우파들 사이에 정치적 헤게모니의 이동이 벌어졌고, 이 경쟁의 승자들이 현재의 부시정권의 기반이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체니와 럼즈펠드는 레이건 시절부터의 인물들이지만 그렇게만 보면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노골적인 일들'에 대해 주먹구구식 해석을 내올 수 밖에 없다.


부시의 세계전략 또한 구체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당장 부시는 이라크전을 통해 '중동질서의 재편'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물론 잘 진척되고 있진 않지만). 저자는 이라크전쟁의 배경으로 '에너지 안보' '달러 방위' 등을 들고 있지만 일반론적인 분석 내지는 인용에 그칠 뿐이다. 이것만으로는 미국이 중동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미국이 이라크에 적용한 '레짐 체인지'라는 방법은 '예방 공격'이라는 개념 못잖게 향후 미국의 국제전략의 방향을 읽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리고 미국은 이란과 북한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저자의 이라크전 독해가 '일반론'에 그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결국 '구체적인 사실들'에 대한 지식의 부족에서 나오는 것일수도 있다. 옥의 티일수도 있지만 이란을 계속 '아랍권'의 범주에 넣었던 것이라든가, 부시 정권의 핵심 인물들에 대한 지식이 신문기사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 등등. 여전히 '미국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저자의 작업은 분명 의미있고 필요한 것이고, 책은 '교양서적'으로 아주 훌륭하다. 하지만 구체성과 세밀함 면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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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12-24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딸기다운 리뷰, 좋아요, 좋아....게다가 간만에 '반(反)뽐뿌성'이야. 필독서라고 보긴 어렵다는 건가? '미국책을 쫌 과하게 읽었더니, 그래서 어쩔건대..라는 생각만 든다'고 투덜거렸던 나로서는...조금 미뤄야겠다는 생각이..흐흐.

딸기 2004-12-24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거 뽐뿌성이란 말야!

근데 마냐님 또 어디가서 숨어있다가 오랜만에 나타난 거야 ^^

'그래서 어쩔건대' 증후군... 그거 심각하지. 나도 그거 종종 겪고 있지. 그럴 때에 읽어보면 좋은 책이 있음(뽐뿌를 뽐뽐뽐)- 후지따 쇼오조오의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을 읽어보세요. 생각하라, 생각하라, 생각하라! 지금 내 컴퓨터가 놓여있는 이 책상이 무슨 나무로 만들어졌는지, 어느나라 밀림을 잘라내어 어느나라 노동자들이 만들었는지 끊임없이 생각하라! 다소 우스꽝스럽게 표현됐는데, '그래서 어쩔건대?' '그래, 어쩔 건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내 한번 생각해볼란다' 뭐 이런 겁니다. ^^

마냐 2004-12-24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뽐뿌성이 왜 반뽐뿌로 보였지? 저 편한것만 눈에 들어와요..흐흐....'전체주의의 시대경험' 접수함...(숨어있는게 아니라, 딱한 처지라니까! 하루종일 딴 청 못피게 무서븐 박모선배가 막 쪼구, 부려먹구..일 마구 떠맡기구 뭐, 그래..ㅜ.ㅠ 다음달에 대규모 인사있다니까, 뭐 어찌될런지..)

딸기 2004-12-24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뽐뿌성이 반뽐뿌로... ㅋㅋㅋㅋ

글쎄, 반미서적 탐독증이 있는 마냐님한테는, 이 책보다는 '전체주의--' 쪽이 굳이 고르라면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

로즈마리 2004-12-24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도 서평이지만 두 분 리플 읽는 것도 정말 재밌네요. ㅋㅋ

바람구두 2004-12-24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딸기님의 리뷰, 아주 좋아요. 제가 그래서 딸기님에게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부탁드렸던 겁니다. 다만 저랑 약간 생각이 다른 한 가지는 딸기님이 지적하고 있는 부분, 부시 미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을 군산복합체니 올드한 자본에 뿌리를 둔 대목 역시 일반적인 데 비해 김동춘 교수 자신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지원, 정치적 활동이란 측면을 좀더 부각시키고 싶어 하는 것 같더군요. 저자 자신도 앞서 누차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 그대로 그가 미국에 있는 동안 한국에선 미국의 진실에 대해 알려주는 책들이 많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인데, 그럼에도 한국의 학자가 이야기하는 것과 미국의 모모 지식인들이 이야기하는 건 그 토대부터 다른 거니까. 하여간 딸기님의 리뷰를 읽으며 중동과 아랍 그리고 이슬람을 구분해 주어야 한다는 건 평소 제 지론이기도 한데, 잘 지적해주셨어요. 다만, 이건 비전문가로서의 평소 궁금증인데 제가 알기로 꾸란은 아랍어 이외의 말로 번역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알고 있어요. 다른 지역에서도 아랍어에 대해 우리가 영어에 대해 생각하는 정도로 일반화되지 않았나요? 어떤가요? 현지에서의 언어 사용은?

딸기 2004-12-24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동춘교수가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었는지는 저도 알겠고요. 그러니 구두님 지적도 맞습니다. 구두님이 리뷰에 썼던대로, '사회학적 분석', 미국 사회의 심리구조에 대한 분석이 이 책에서 저도 제일 재미있었어요. 국내 학자가 이런 책을 내준 것은 대단히 고맙고 반가운 일이지요!

꾸란은 아랍어 이외의 말로 번역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물론 학술 연구를 위한 번역은 얼마든지 이뤄지고 있습니다만). 하지만 아랍어를 쓰지 않는 나라들에서는, 당연히 사람들이 아랍어를 잘 못합니다. 터키 사람들은 아랍어 전혀 못해요. 자기들이 지배자였고 아랍인들이 피지배자였으니까 어찌 보면 터키 사람들이 아랍어를 못하는 것은 당연한 거겠죠. 이란에서 온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는데, 아랍어를 잘 못한다 그러더군요. 다만 이란어와 아랍어의 뿌리가 가깝고, 꾸란의 영향도 있고 해서 비슷한 부분이 많은지는 모르겠습니다.

바람구두 2004-12-24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큐... 참,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는 제가 최근에 이슬람 관련해서 몇 가지 책들을 보고 있는데 에드워드 사이드 이전과 이후를 경계로 다르다고 할까... 미묘하긴 하지만 관점이 다르더군요.

딸기 2004-12-24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에드워드 사이드 책을 아직 한번도 안 봤어요, 실은.

이상하게 인연이 없다고 할까. 읽으려고 맘 먹으면 어찌어찌해서 뒷전으로 밀리고...

요새 읽고 있는 이슬람 관련 책들 중에 재밌는 거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올해는 그쪽 책들은 영 소홀했기 때문에, 아무래도 업뎃이 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광야 2005-01-26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하진 않지만 위의 서평에서 미국 관련한 논문을 쓰셨다는 분은 서울대 안정옥 선생인 것 같군요. 어쨌든... 구술사와 관련해서는 여러 연구자들이 연구하고 있는데, 윤택림 선생의 책들을 참고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그리고, 성공회대학교 사회문화연구원의 노동사연구소 쪽에서도 현재 노동사 구술작업을 진행하는 것으로 압니다.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