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과 역설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6
에드워드 W. 사이드·다니엘 바렌보임 지음, 장영준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복합적인, 다중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가능할 뿐 아니라, 오히려 성취해야 할 대상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에 속한다는 감정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수 있습니다."

‘목이 긴 두 여자의 대화’라는 연극 이름이 생각난다. 남북한, 서로 목을 길게 빼고 바라만 보아야 했던 두 여자 대신에 두 남자가 대화를 한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이스라엘에서 자라고 독일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는 유태인 음악가 다니엘 바렌보임,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카이로에서 어린시절을 보내고 미국에서 살아간 아랍인 기독교신자 에드워드 사이드. 음악이라는 공통의 키워드로 묶인 두 사람의 대화다. 아쉽게도 나는 바렌보임의 음악에 대해서도, 사이드의 학문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지만 이들의 대화는 듣기에 좋았다.
누군가가 ‘경계인'이라는 말을 쓰면서 잠시 우리 사회에서도 그 말이 유행한 적 있었지만 바렌보임과 사이드야말로 경계인이다. 출생지, 국적, 민족, 종교, 사상의 경계를 살고 있는(살았던) 두 사람의 대화. 이들에게 정체성은 곧 ‘경계인’이다. 경계에 서있다는 것,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들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다중의 정체성’이라고 말한다. 순혈주의 국수주의 민족주의의 압박감에서 허덕이는 대한민국의 독자에게, 이들의 활달한 ‘경계인 선언’은 낯선 감각을 넘어 부러움까지 불러일으킨다.

지구상 가장 적대적인 두 민족, 팔레스타인의 유태인과 아랍인. 그들의 대화에서 줄곧 이어지는 키워드는 음악이지만, 거기에 국한될 수는 없는 일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문화 전반, 종교, 민족, 철학을 넘나든다. 이들이 맞서야 할 ‘경계’는 너무나 포괄적이기 때문일까. 대화는 종종 ‘역사’의 문제로 달려간다.

"역사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위선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 그리고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지상에서 벌어지는 현실에서 먼저 시작해야 하는 듯 가장하는 것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실용주의적 정치견해입니다. 인문주의자로서 그리고 각 민족의 역사가 정의와 상처와 억압이라는 개념들을 연루시키는 복합적 사태라고 믿는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사이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을 거론하면서 저렇게 말했지만, 한일관계이든 독재체제의 문제이든 ‘과거사’라 이름붙일 수 있는 모든 것에 통용될 수 있는 통찰력이 아닐까.
두 사람의 대화에는 너무나 많은 음악가들의 이름이 나온다. 한~~~번도 들어본 일 없는 그들의 음악에 대해 이 무식한 독자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마는, ‘평행과 역설’, ‘각자의 정체성을 초월해 전체를 향해 나아가는 그들만의 여정’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는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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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3-05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나니 좋네....라기엔, 보아하니 모르는 소리가 넘 많을 거 같은데....읽어보란 거유, 아닌거유..ㅋㅋ

딸기 2005-03-05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난 음악을 너무 몰라서, 솔직히 읽느라고 무리를 좀 했지 ^^;;
 
평화의 발명 - 전쟁과 국제 질서에 대한 성찰
마이클 하워드 지음, 안두환 옮김 / 전통과현대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뜻밖에도 가벼웠다. 부피가 작고 두께도 얇고. 얼렁뚱땅 만든 듯, 어딘가 엉성해보이는 편집이 황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이런 책이었나? 제목에서 느껴졌던 중량감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분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내 수준에선) 굉장히 빨리 읽었다. 내용은 가볍지 않았다. 내겐 익숙치않은 문체, 생각할 거리들, 생각의 꼬리를 붙잡지 못하고 물러서버린 나. 책을 읽고 시간이 좀 흘렀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수첩에 메모해뒀던 내용들을 다시 읽어봤다. 역시 ‘평화’는 어렵다. 이루기 어려울뿐더러 이해하기도 어려운 개념이다. ‘전쟁’보다 ‘평화’가 어려운 것은, 사람들이 평화를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일까. 혹은 그 반대의 순서이거나. 전쟁영화, 전쟁광, 전쟁소설. 평화영화, 평화소설 같은 것은 없는데 ‘전쟁’은 넘쳐난다. 텍스트에서건 현실에서건. 50년 넘게 ‘휴전상태’에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나는 전쟁도 평화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전쟁이 없는 상태가 ‘평화’인가. 전쟁은 싸우는 것, 그렇다면 싸우지 않는 것이 평화인가. 전쟁은 평화를 해치는 것인가, 평화를 위한 것인가.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누구이며, 전쟁에 반대하는 자는 누구인가. 싸우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평화롭게 사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이 책의 저자는 “전쟁도 평화도 ‘사회현상’이다”라고 말한다. 유럽 중심의 역사적 고찰이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핵심은 전쟁과 평화 그 어느 하나가 인간(역사)의 ‘본질’이 될 수 없으며 둘 다 특정 시기 특정 국면에 나타나는 사회현상임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당연한 말 같기도 하고, 새로운 시각 같기도 하다. 전쟁은 분명 사회현상이다. 그런데 평화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현상이다? 이를 인식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평화’를 얻기 위해 애써야 할 우리 인간은 안타깝게도 문제가 많은 존재들이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또한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갈등의 존재, 그리고 그것이 폭력(전쟁)으로 나타나는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비로소 평화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라는 개념이 싹튼 것도 인류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어쨌든 최근의 경험(유럽 중심으로 봤을 때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우리는 전쟁이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갖는지 절감했고, 평화를 갈망하게 됐다(과연?). 무기의 파괴력을 극점까지 끌어올린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 덕이라고 한다면, 핵폭탄 개발자들에게 감사를 해야할 지경. 아무튼 ‘평화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야말로 계몽주의 이래의 수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역사는 한가지만을 가르쳐주진 않는다. 역사는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가르치는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구하기 힘든 과실인지도 확인시켜주었다. 평화는 ‘인간의 본성’도 아니고, 자연스레 주어지는 것도 아님을 인식해야 이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갈등은 인간의 속성’이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도 평화도, 그 어느것도 ‘인간의 본성(혹은 자연스런 상태)’이라 잘라말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기반 위에서 풍선처럼 날아가려 하는 평화를 붙잡으려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내 머리 위에도 헬륨풍선이 떠다닌다. 서구는 1,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장에서 ‘계몽주의 이래의 수확’을 거뒀다. 한국은 한국전쟁이라는 독특한 전쟁을 겪었다. 군사독재정권, 군비경쟁. 겉으로는 전쟁 혐오, 실제로는 ‘반전평화’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죄인이 되었던 속사정. ‘평화’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시점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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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3-04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오키나와 사람들의 평화를 위한 투쟁(우습죠? 평화를 위한 투쟁이라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이전에 김동심 씨의 글을 통해서도 오키나와 사람들의 그 열린 마음을 접하고 존경의 눈초리로 쳐다본 적이 있어요. 어제 다시 그 다큐를 보면서 참으로 평화란 이루기 어려운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마이클 하워드의 책에 제가 별을 몇 개 주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데, 별 다섯 내지 최소한 넷은 주었을 겁니다. 그건 평화에 대한 서구의 현실적인 고민들에 대해 짧은 글에서 잘 묘파해주었다고 생각해서였어요. "평화"를 공부할 수 있다면....*앗, 추천....

딸기 2005-03-04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리뷰는 너무 허접해서 리뷰라고 보기도 힘든데 구두님이 추천을 해주네. 앗싸~
 

존 쿳시 지음, 조규형 옮김 / 책세상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누구누구님의 서평을 재미있게 읽고서 구입한 책. 그러니까 나는 '해몽'부터 듣고 나서 꿈을 꾸었던 셈이다. 결과는? 별로 재미없었다. 
뭐가 불만이냐... 이 작가가 대단히 유명한 문학상을 받은 사람인 모양인데, 이 책 자체만 놓고 보자면 대단치는 않다.  저자는 '화자(話者)' 와 '언술'의 문제 같은 것에 초점을 두고 로빈슨을 다시 쓰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하필 로빈슨? 굳이 로빈슨을 골라 다시 쓸 이유가 있었는지, 저자는 늙은 로빈슨에게서 무슨 '새로움'을 끄집어낸 것인지. 무식한 독자인 나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 밖에. 뭐야,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할 것 아냐. 
저자는 '화자' 혹은 '말(言)의 효과' 같은 것을 얘기하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너무 직접적으로 그런 얘기를 소설에 끄집어낸다. 그런데도 정작 나는 잘 못알아듣겠다. 저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걸까? 말하는 사람에 따라 얘기는 다르게 들린다? 혹은, '이야기'가 없으면 '존재'도 없는 것이다? 그런 얘기인가?
'말'의 문제를 다뤄야만 한다, 독자들에게 이해시켜야만 한다는 작가의 강박관념 때문에 재미있을 수도 있었을 이야기에서 재미가 깎여나간 것 같은 느낌. 심지어 이해도 잘 되지 않으니. 더우기 페미니즘 어쩌구하고 연관시킨 선전은 너무나 과도한 해석이었기에 별로 언급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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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3-03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가 쓴 여자 로빈슨 얘기. 척하는 것 같아서 밥맛떨어졌던 기억만 남아 있는 소설이네요. -_-a

딸기 2005-03-04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피듕포듕 2010-01-05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굳이 로빈슨 크루소를 택한 이유는 소설의 시작을 다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라고 보고 있고, 작가인 존 맥스웰 쿳시는 소설의 새로운 시작의 기점으로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간 것이고요. 음.. 나름 괜찮았던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moonpalace 2012-11-19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 여기서부터 님이 쿳시의 소설을 좋아할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재미를 위해 글을 쓰지도 않지만 소설이 재미를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쿳시의 소설이 별로 와닿지 않은게 안타깝습니다.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기대하신다면 실망하실만 하죠..실재로 이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그의 책들을 더 읽어보신다면 조금은 더 이해가 가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굳이 로빈슨 쿠르소의 이야기를 차용하게 된 이유도 있지만 그걸 여기에 주저리 주저리 이야기하기는 그렇습니다. 쿳시는 제가 제일 존경하는 소설가이지만 솔직히 누군가에게 쉽게 추천하기는 그런책입니다. 기회가 되시면 나중에 한번 더 읽어보세요. 그럼 조금은 다른 생각이나 사유가 가능할지도 모르니까요.
 
브레인 스토리 - 뇌는 어떻게 감정과 의식을 만들어낼까?
수전 그린필드 지음, 정병선 옮김, 김종성 감수 / 지호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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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큰 기대를 안 갖고 읽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인간의 뇌, 해소되기 힘든 궁금증들에 대해 정말 쉽고 재미있게 대답해주는 책. 지금까지 알려진 뇌와 관련된 사실들을 가장 최근의 것들까지 포괄해가면서 핵심을 추려 설명하고, 동시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혹은 ‘앞으로 연구해야할 것들’까지 이야기한다. 
질병, 약물, 꿈 등 뇌와 관계 있는 소재들을 들어 설명하기 때문에 정말로 쉽고 재미있다. ‘쉽고 재미있는 과학책’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쉽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책은 말그대로 쉽고 재미있다. 술술 읽힌다. 그러면서도 ‘상식백과’ 수준의 교양서를 넘어서는 미덕을 갖고 있다. 인간의 뇌는 이런 겁니다, 오만하게 단정짓는 대신 최근의 연구성과들을 통해 추론해볼 수 있는 것들, 저자의 추측 등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기 때문에 ‘선생님 설명을 듣는 기분’으로 읽을 수가 있었다.

인간 뇌의 작용기제가 낱낱이 밝혀지려면 아직 멀었지만 ‘인공 뇌’를 만들겠다는 오만한 인간들은 많이 있다. 사실 SF라 불리는 것들의 대부분은 그런 상상을 바탕에 깔고 있지 않던가? 저자는 이런 발상에 일침을 놓는 것도 잊지 않는다. ‘뇌’라는 물질이 어떻게 판단, 상상, 이성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지는 아직 알 수 없고, 이것이야말로 ‘뇌의 신비’의 본질에 해당된다. 물질에서 어떻게 비물질적인 것이 나오는가? 이 책의 저자는 물론이고,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저자가 지적하는 것은 “환원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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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muko 2005-03-03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벌써 이 책 읽으셨군요. 전 덜렁 구입은 해놓고 요새 왜 이리 책을 못 읽고 있는건지... 대충 넘겨 보니 무지 재밌을 것 같긴 했어요^^

딸기 2005-03-03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렁슬렁 읽으시면 될 것 같아요. 전 참 재밌게 봤어요.
 
전체주의의 시대경험
후지따 쇼오조오 지음 / 창비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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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리뷰를 쓰려고 마음먹은지는 오래됐다.  '서평'이라고는 하지만 어차피 '나를 위한' 독후감이다. 이 책을 읽고서 내가 나에게, 아무 말 없이 넘어가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반드시 독후감을 정리를 해야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리뷰를 쓰기가 참 힘들었다. 이 책, 몇마디 말로 정리해버릴 수 있는 그런 책이 아니다. 다른 분들의 리뷰를 읽었다. 알라딘에 올라와 있는 리뷰 3편, 별이 열다섯개. 거기에 지금 내가 별 다섯개를 더 붙이고 있다. 몇편 안 되는 리뷰이지만 이렇게 일관되게 '별 다섯개'를 받을 수 있는 책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더우기 재미난 소설책도 아니고, 뭔가 대중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킬 요소 따위란 눈을 씻고 봐도 없는 책. 
제목부터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이라니, 이 얼마나 무거운가. 게다가 저자 후지따 쇼오조오는 일본에서는 '마지막 철학자'(모든 철학자가 사라진 뒤에까지도 그는 '생각하는 사람'으로 남아있을 것이다)라 불린다지만, 자기네 나라에서도 '대중성'과는 아마 거리가 먼 인물일 것이다. 이 사람, 군국주의의 망령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본에서, '철학' 따위는 멀찌감치 내던져버린 경박한 세상에서, 상품문화에 모두가 일로매진하고 있는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단코 '주류' 같은 것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책은 에세이집 비슷하게 되어 있다. 후지따는 길지 않은 에세이들에서 군국주의 문제라든가 자본주의, 환경에 대한 생각 같은 것들을 들려준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비판적 지식인'이라는 말이 결코 아무한테나 아무렇게나 붙일 수 있는 상투적인 찬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의 글은 한 사람이 '전체주의'로 가득찬 이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기 위해 얼마나 모질고 힘든 철학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철학'은 프랑스 철학자들의 이름을 줄줄이 불러대는 식의, 요새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종류의 '철학공부'하고는 전혀 다르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더 깊이 생각해보고, 숨겨진 것들을 한번 더 생각하고, 숨겨진 것을 들춰내고, 그리하여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것이 그의 '철학'이다. '전체주의'라는 시대를 경험하는 지식인으로서, 아니 굳이 '지식인'이라 할 것없이 이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은 세상/지구에 대한 '의무'라고 후지따는 말한다.

요컨대 지금 필요한 것은 생활을 주의깊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중략) 그것을 '패러다임'과 같은 새로운 용어로 얼버무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생활을 주의깊게 해나가는 가운데서 자기비판의 구체적인 재료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대체적이고 총론적으로 자기비판을 하는 것보다는 개별적인 자기비판을 쌓아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문제에 대해서 이것을 행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시계는 어떤가? 아니면 이 책상은? 나왕이로구나. 이것은 새것인 걸로 봐서 필리핀에서 벌채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보르네오 것이리라. 필리핀은 이미 오래전에 벌거숭이가 되어버렸으니까 등등. 이와 같이 주의깊게 살펴보노라면 자기자신의 생활환경이 무엇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환경보호를 말하면서 환경파괴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생활을 말이다. 또 세계의 모든 현상 그리고 우리들의 생활과 관련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내용을 알 수 있게 된다.

후지따의 글은 거창하지 않지만 머리와 가슴을 찌르고, 목소리는 잔잔하지만 카랑카랑하다. 후지따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비로소 땅으로 내려온 느낌이 들었다. 사회과학 책들을 백번 읽은들, 나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으리. 나는 이 세상의 어디에 위치하는가. 모든 것에 '글로벌'이란 꼬리표가 붙어 있는 이 파괴적인 전체주의의 시대에. 
알고 있다. 우리 모두.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르는 사이에 얼마나 순응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지, 그렇게 우리가 세포 하나하나를 죽이고 있는 동안에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인간과 나무들이 죽어가는지, 죽어간 나무와 인간들이 어떻게 지폐로 쌓여가고 있는지, 도대체 왜 우리가 '저항'이라는 말을 입에담아야 하는지, 그런데 그 저항이란 것의 형체는 너무도 무정형적이어서 내 눈에는 도저히 안 보인다는 것을, 결국 살아숨쉬는 정신으로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것 밖에, 방법은 없다는 것을.  
그것은 생각없이 살아가는데 익숙해진 자에게는 물속에서 숨쉬는 것처럼 힘든 일이겠지만, 그래도 숨을 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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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1-2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도무지 추천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글이네요.
안다는 것과 그렇게 산다는 것은 얼마나 다른가....

딸기 2005-01-24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요, 안다는 것과 그렇게 산다는 것.

숨은아이 2005-02-02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바로 아래 있는 제 리뷰가 부끄러워져 버립니당...

딸기 2005-02-02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말씀을. ^^

2005-02-03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5-02-04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내일부터 이너넷 끊겨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