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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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본질적'인 얘기를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버리는 작가. 이런 책을 읽을 때면 작가라는 사람들이 무서워진다. 그들이 툭툭 던진(사실은 고도의 계산 속에서 나왔을 터인)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내 몸뚱아리가 저만치 내팽개쳐지는 듯한 기분이 든단 말이다.

소설을 손에 쥐기 전, 나보다 먼저 이 책을 읽은 이에게 물어봤었다. "재미있어?" "응." 대답하는 사람의 말투에 잠시 뭔가 착잡한 기운이 스쳐지나갔다. 어떤 책일까 궁금했다. 일단 나는 이 작가에 대한 사전 지식이라고는 한 알갱이도 없었다. 다만 이 책의 제목을 들었을 때 어쩐지 끌린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소설은 금새 읽혔다. 순식간에, 정확히 말하면 낮잠 자기 전 반나절 만에 읽어버렸다(그래서 낮잠을 많이 못 잤다). 읽고 나서 머리 속이 정리가 잘 되지를 않았다. 꽤 오랜 시간, 적어도 책 읽는데에 걸린 시간의 스무배쯤을, 그냥 생각만 했다. 모래...라니. 모래. 모래? 모래에 대해 생각해본 일이 있어야 말이지. 모래의 여자. 모래 속에 사는 여자. 모래 속에 사는 남자. 모래에 묻힌 마을. 모래가 흐르고 모래가 날리고 모래가 모든 것인 그런 곳. 모래에 파묻힌 인생. 


한 남자가 '실종'된다. 그냥 사라진다. 물이 모래에 스며들듯이, 그리고는 뙤약볕 밑에서 흔적없이 증발해버리듯이 그렇게 사라져버린다. 남자는 모래에 묻힌 마을, 모래에 묻힌 집, 모래에 묻힌 여자에게 걸려들어 모래 세상의 일원이 된다. 모래에서 벗어나려 애쓰다가 실패를 거듭. 남자는 결국 스스로 '모래의 남자'가 된다. 참 희한한 소설이다. 

책을 읽고 나서 모래 세상 이야기가 부채의식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읽을 때엔 그저 적당히 재미있는, 조금 희한한 소설이라고만 생각을 했었다. 내 머리속에서 윙윙거리던 모래 세상의 모습은 다만 흘러가는 모래 더미, '더미'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모래, 그런 거였다. 책을 읽고 시간이 흐르니 이 소설, 그야말로 '완벽한 소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집을 갉아먹는 모래바람처럼) 슬금슬금 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소설은 픽션이다. '모래의 여자'는 픽션이다. 사람이 무슨 날벌레도 아닌데, 거미줄에 걸리듯 모래구멍에 걸려들어 나갈 수 없게 된다는 것이 있을수 있는 일인가. 모래에 묻혀 있는 세상, 거기서 자의반 타의반 묻혀 사는 사람들이라니. 이건 픽션이다. 그런데, 허구는 허구이되, 실상은 허구가 아닌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 또한 '소설'이 아니겠는가. 픽션인 줄 알지만 너무나도 그럴듯하다. 이런 일이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다는 '개연성'의 차원이 아니라 이야기가 담고 있는 '진정성'의 측면에서 정말 '그럴듯하다'. 가족이 되었건 연인이 되었건 지금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과의 사이에서도 건너기 힘든 심연을 시시때때로 발견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 심연을 '늪'이라 해도 상관 없고 '바다'라 불러도 상관없다. 그러니 '모래'라 부른들 그 또한 어떠하리. 

작가가 그린 모래세상은 그 '심연'에 대한 비유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이 작품에서 '모래'는 나와 세상을 연결해주는 고리들이 사실은 얼마나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를, 그저 모래구덩이에 빠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실종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도구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모래는 희한한 매력으로 사람을 끌어들이고, 녹아웃시켜서 진을 빼버리고, 오를 수 없는 벽으로 군림하고, 물처럼 흘러서 생명을 위협하고,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며 모든 것에 스며든다. 그런가하면 원초적 본능을 부활시켜 인간을 인간되게 만들기도 한다. 남자는 모래의 여자와 한 몸이 되고, 모래가 깊은 곳에 아주 은밀히 물을 머금고 있다는 대발견을 한다. '모래의 에로티시즘'이라니, 별나기도 하다. 


작가가 그려낸 이야기는 허구이되 허구로 끝나지 않고, 작가가 잘라보이는 단면 또한 '단면'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픽션이지만 세상의 본질을 푹푹 찌르고, 길지 않은 소설의 여운이 오래 남는다. 그래서 '완벽한 소설'이다. 이리저리 참 잘도 꿰어맞췄다. 소설의 구성이 워낙 잘 짜여져 있다. 아무래도 이 작가는 성질 괴퍅하고 편집증적인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순순히 "재미있어"라고 말하기 앞서 조금은 착잡한 심정이 되게 만드는 이야기, 이 작품이 가진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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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긴 침묵 - 개정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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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도시, 탕헤르. 그곳에 가보고 싶다. 나처럼 탕헤르에 가고파하던 어린 친구가 있었다. 이제는 더이상 어리지 않은, 어쩌면 나보다 훌쩍 커버렸을 그 친구는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을 떠나 여행을 하고 있다. 친구에게서 온 엽서 한 장에는 고비사막의 낙타들이 있었다. 그 다음 엽서는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였다. 무함마드 진나 알리가 파키스탄 건국을 선포했던 라호르를 들러 페샤와르에 도착했다고 했다. 

우리들 주위로 백악질의 야산에 층층이 쌓아올려진 도시 탕헤르가 그 수많은 창문에 불을 켰다. 지평선 저쪽에는 지브랄타르 바위 위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의 오른쪽에는 지중해의 고요한 물 위로 달이 떠올랐다. 왼쪽에는 마지막 석양빛이 잠겨드는 대서양의 거친 물결. 에드몽 샤를로가 알제리아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그가 겪은 그 수많은 지진들, 특히 그 자신은 기억도 할 수 없지만, 그의 부모가 정원에서 져녁식사를 하고 있을 때 집이 무너져 어린 그의 요람을 덮쳤던 첫번째 지진 이야기를 막 들려주었다. 그는 또한 구름 떼처럼 몰려들던 마지막 메뚜기떼들의 재난도 경험했다. 기이하게도 그의 기억에 깊이 아로새겨진 것은 그 두 가지 재난의 무서운 소리였다. 지진은 동굴 속에서 울리는 듯한, 대지 전체를 뒤흔드는 저 근원적인 소리로 노호했고 굵은 메뚜기떼들은 나무를 잎사귀 하나 없이 발가벗기면서 무수히 성난 듯 달려들어 어지럽게 탁탁 튀는 소리를 냈다. 
 
친구의 엽서를 통해 나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뉴스에서만 접했던 페샤와르의 야산을 보는 것 같았고, 그 곳을 돌아다니고 있을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쩐지 묘한 기분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엔 안나푸르나에 올라간다는 친구의 편지를 받았다. 대체 어떤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로선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무언가를 보고 듣고 경험하고 있다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탕헤르에서는 이상하게도 서쪽으로 강제 이주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자신의 근원에 고집스레 충실하기 위하여 자꾸만 대서양 쪽으로는 등을 돌리려고 애를 쓴다고 했다. 이미 율리시즈는 6일 동안 사나운 태풍 속에서 표류하며 '세상 끝으로 떠내려가다가' 마침내 칼립소의 동굴에 이르렀었다. 빅토르 베라르는 그 동굴이 바로 여기서 지척인 세우타 근처임을 밝혀낸 바 있다. 세우타의 민물은 '오디세이'에 언급된 네 줄기 샘에서 나오는 것이다. 순수한 지중해 사람들에게 이 서쪽의 머나먼 끝은 불길한 구석이 없지 않은 곳이다. 헤라클레스가 그의 열두가지 영웅적인 사업을 완수한 헤스페리데스 정원 역시 이 곳에서 멀지 않은 릭수스-나중에 라라슈가 된-에 있다고 샤를로는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그리고 끝으로 그는 이 땅의 마지막 수수께끼 하나를 소개해주었다. 이번에는 산악지방에서 잇었던 신비로운 일이다. 지금부터 몇년 전 우아르자자트 남쪽 드라아 골짜기에 자리잡고 살던 작은 유태인 공동체가 있었는데 그 마을이 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종교서적 필사본들이 가득찬 도서관과 함께 그야말로 고스란히 증발해버린 것이 그것이었다.

친구는 테란과 이스파한을 거쳐 다마스커스로 갔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다마스커스라니. 테란, 이스파한, 다마스커스. 이런 도시들과 탕헤르, 그런 이름들을 둘이 같이 꼽아보며 즐거워했던 적이 있었다. 향료 냄새가 폴폴 풍겨오는 것 같은, 다마스커스.

열에 들떠있고 사향 냄새가 풍기는 광란하는 도시, 여행자의 어깨를 부여잡고 놓지 않는 시니컬한 도시. 너무나도 유명한 제마 엘 프나 광장은 마치 거대한 상설 곡마단같이 군고기 장수들, 광대, 곡예사, 점쟁이, 이야기꾼, 이 봅는 사람, 대마초장수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나의 시야는 내 옆에 있는 천재적인 미국 사진작가 아더 트레스 덕분에 더욱 밝고 깊어졌다. 그는 가는 곳마다 우리들의 발 아래서 온갖 형상들과 장면들을 불쑥 솟아오르게 만들었다. 그것들은 사진작가의 부름에 응하고 있었으므로 잔혹하고 광적인 양식에 있어 서로 닮은 것이었다.

미셸 투르니에는 모로코의 마라케슈를 이야기한다. 내겐 다마스커스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사향 냄새가 풍기는 도시, 여행자의 어깨를 부여잡고 놓지 않는 시니컬한 도시라니.

이리하여 고객은 그의 은밀한 꿈인 알 카포네와 일치하도록 보르살리노 모자를 눈 밑까지 깊숙이 눌러쓰고 두아니에 루소의 그림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만 같은 시카고의 뒷골목에서 기관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으로 차린다. 그렇지 않으면 인조 표범 가죽으로 기운 원시인 치마를 두르고 칡넝쿨과 고사리가 우거진 무대를 배경으로 박제 사자와 마분지로 만든 표범 사이에서 가슴을 내밀고 으스대는 타잔이 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천일야화의 왕자가 되어 비단과 보석으로 몸을 감싼 채 요염한 여인들 가득한 특석 한가운데서 군림한다. 이런 모든 것이 여간 진지하고 심각하고 엄격한 것이 아니다. 여긴 시장바닥이 아니며 꿈을 가지고 장난치는 법이 아니니까 말이다……

친구의 계속되는 여행기, 이스탄불과 카이로를 거쳐 에티오피아로 향해간다. 하라레를 거쳐 이번에는 수단이다. 수단의 피씨방에서 서울의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있는 그녀, 어떤 모습일까.

이 성스러운 과업을 완수하도록 운명이 그에게 점지해준 이 은퇴생활은 의미심장하다. 지브랄타르는 균형 잡히고 절도 있고 투명하고 한계를 아는 지중해 세계가 안개에 덮인 채 사납게 일어나는 저 가없는 대양을 바라보는 열쇠 구멍이 아니고 무엇인가?

파울로의 연금술사도 탕헤르에서 머뭇거리더니. 탕헤르는 ‘마법의 도시’인가보다. 낯선 도시들의 이야기를, 투르니에만큼 매력적으로 전해주는 사람을 아직 못 봤다. 나는 투르니에와, 벌써 1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 친구의 손을 잡고 함께 여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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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4-13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셸 투르니에는 참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비법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딸기 2005-04-1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두근거리지요, 저런 글을 읽으면. :)
 
내 모든 사랑을 아이에게? - 한 조각 내 인생과 아이 문제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지음, 이재원 옮김 / 새물결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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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든 사랑을 아이에게. 내 ‘모든’ 사랑을 아이에게. ‘한 조각’ 내 인생. 이런 말들이 아주 무겁게 내 귀에 들어오고, 아주 가볍게 내 입에서 흘러나간다. 과연 어떤 걸까, 21세기 초입, 한국 사회에서, 한 아이를 기르고 있다는 것은.
책은 독일 여성학자가 독일(주로 동독) 사회의 변화와 독일 여성들의 출산/육아문제를 검토해 쓴 것이지만 전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나는 20세기 한국의 여성이었다. 큰 고민 없이 결혼제도에 뛰어들었고 21세기 초에 아이를 낳았다. 좀 일찍 결혼했고, 좀 늦게 아이를 가졌다. 책을 읽으면서 뒤늦게 어머니가 된다는 것/아이를 키운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내 ‘모든’ 사랑을 아이에게 준다는 것이 ‘한 조각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과연 내 인생은 내게 있어 ‘한 조각’ 뿐이며 아이가 내 ‘모든’ 사랑을 퍼부을만한 존재인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예스’라면 그건 어떤 이유에서이며 ‘노’라면 또 어떤 까닭에서인지, 나를 둘러싼 현실과 내 안의 고민들은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어떤 쪽으로 향해야 하는지.
질문의 목록은 길고 대답 또한 쉽게 나올만한 것들이 아니지만, 실은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대한민국의, 아니 이 세상의 엄마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책에 던져진 분석들, 사례들, 문제의식,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누구나 몸과 마음으로 알고 느끼는 내용들이다. 책은 분량이 많지 않다. 논리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이해가 가능하게, 요점만 딱딱 짚었다. 책 두께에 비해 사례를 풍부하게 넣고 있다. 독일에서 언론에 보도된 사례라든가 생활사(生活史) 측면의 사료, 여성들 인터뷰를 다양하게 집어넣었다. 별로 편치 않은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여성들 인터뷰나 사례들은 대충 건너뛰었다. 처음 몇 개의 케이스는 찬찬히 훑어봤지만 읽을 필요가 별로 없는 것들이었다. 인용된 글들이 무가치해서가 아니라, 남의 사례를 읽을 것도 없이 내 케이스를 생각하기만 하면 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이 문제’라는 것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출산율 저하, 일하는 여성과 보육 문제, 양육과 여성의 자아실현, 교육문제 등등. 책에 나타난 ‘아이 문제’는 이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이지만 특히 저자가 역점을 두고 들여다본 것은 ‘아이와 사랑’이다. 육아지침서가 아니라 여성학 책이다. 엄마의 사랑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니라,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것이 엄마에게 미치는 영향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통일 독일에서 ‘출산율 저하’로 드러나는 ‘아이 문제’는 결국 사회적인 문제임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유럽 부르주아의 등장 이후 가족관계와 ‘모성’ 개념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봄으로써 ‘근대적 모성’의 출현 과정을 추적한다(모성의 사회사). 간략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독자는 ▲모성과 육아 개념은 상대적, 역사적인 것이며 ▲동시에 ‘사회적’인 것임을 확인하고 ▲“일하는 여자들은 아이를 안 낳으려고 한다”는 흔해빠진 어구가 어째서 ‘절반의 진실’일 뿐인지를 배우게 된다.

엄마들의 고민이야 더 말할 필요 없는 것이고. 책은 고민 많은 엄마들이, 자기들 고민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냉정하게 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읽을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래서? 언제나 질문은 여기로 향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낡은 처방’이라는 제목으로 말미에 짤막하게 몇 가지를 제안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해결책’이 아니라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제안’ 정도가 될 것이다.
첫째, 여자들이 아이를 많이 낳게 하기 위한 ‘인구학적 차원의 출산장려 정책’은 자칫 여성들을 다시 집안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처방은 한 가지를 오해하고 있다. 즉 여성의 삶의 변화들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근대사회의 대변혁과 함께 시작된 기나긴 역사적 발전의 최종 산물이라는 점이다.”
당연한 말씀. 근대, 그리고 산업사회는 당.연.히. 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도 변화시켰다. 사회 속에서 여성의 위치는 이 산업사회와 상호작용하며 유기적으로 변해온 것이다. ‘아이를 안 낳으니 노동력이 부족하다, 그러니 여자들이여, 노동을 그만두고 아이를 낳아라!’ 당연히 말이 안 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적어도 ‘공식 석상’에선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택시 기사 아저씨들까지 동반 각성한 것은 아니다. “나아가 이러한 역사적 발전과 결부된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적 가치는 여성 운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가 부상한 것에 근거하고 있다.” 페미니즘이라면 침 튀기며(간염 옮을라) 욕하는 남자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중요한 것은 아이는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해왔건, 지금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한다. 내 인생의 100%는 아니지만, 퍼센티지를 놓고 보면 내 사랑의 압도적인 부분이 아이를 향해 있을 것이다. 다만 아이를 향한 내 사랑은 내가 가질 수 있는 사랑 용량의 100%가 아니라는 점이고, 나는 그것이 100%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 사랑 95% 나 자신에 대한 사랑 5%일지라도, 그 5%가 없다면 사람이 아닌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5%에 ‘이기심’이란 딱지를 붙일 수도 있겠고, 실제로도 그렇다. 이기심을 욕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지 않았나?
내 ‘모든’ 사랑이 아이에게 가는 것은 아니지만 ‘한 조각’ 내 인생에 아이는 너무나 중요하다. 저자가 책에서 거듭 지적하듯 오늘날의 문제는 여성들이 출산을 기피하게 만드는 현실, 아이와의 아름다운 상호관계를 처음부터 포기하게 만드는 현실이다. 정작 낳아놓고 나면 엄마와 아이를 동시에 내리 눌러서 그 아름다운 관계가 성공을 향한 힘겨운 사다리타기로 변하게 만드는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위력! “인간적인 원리에 따라 조직된 사회, 육아가 여성의 개인적인 문제라고 밀쳐내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아이의 성장을 돌보는 일이 일반적인 공적 우선권이 되는 사회- 이것이 페미니즘 속에 들어있는 비전이다.” 정말 ‘낡은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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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3-27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세기 말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우리도 진화한 모양이네. 추천.

딸기 2005-03-27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것도 그렇네요.
참... 저런 책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뭐냐면, 사실 뭐가 문제인지, 뭐가 엄마들을 힘들게 하는지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거지. '낡은 처방'이 결국 가장 올바른 처방인데, 그것 또한 이미 알고는 있다는 거지. 그래서 답답한 것이고.
 
축구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가
프랭클린 포어 지음, 안명희 옮김 / 말글빛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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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들이 아이의 가슴팍에 불을 붙였죠. 그 괴물 같은 놈들이 아이를 죽였어요.”
“그들의 손에는 쇠몽둥이와 나무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마치 잔디 깎는 기계가 지나간 것처럼 부상자들이 널려 있었다.”

책은 옛 유고연방의 수도였던 베오그라드에서 시작된다. 수비에 능한 슬로베니아계, 공격성이 강한 크로아티아계, 날카롭지만 전술적인 예리함이 모자라는 보스니아계와 세르비아계. 지금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 공화국의 수도로 되어있는 베오그라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전쟁은 문자 그대로의 전쟁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문명사회의 치욕’이라 불렀다던 훌리건들의 이야기는, 90년대 베오그라드에선 ‘훌리건의 탈을 쓴 민족분쟁’의 리얼한 전투담으로 돌변한다. 베오그라드를 연고로 둔 두 팀, 레드스타와 파르티잔의 경쟁은 세르비아 민족주의 세력과 크로아티아계의 충돌을 대변하는 대리전 양상으로 진행되다가 결국 진짜 유혈분쟁으로 격화됐다.
축구와 정치, 축구와 폭력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사례는 너무나 많다. 실상 유럽과 중남미 명문 축구클럽들의 역사는 축구라는 이름의 전쟁, 축구를 통해 표현된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시사잡지 뉴리퍼블릭의 정치담당 기자인 저자는 세계를 다니며 ‘훌리거니즘’으로 표현되는 축구팬들의 폭력적 행동의 배경을 관찰, 이 책에 담았다. 축구팬이라면 대부분 알 법한 유명 클럽들의 뒷얘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글래스고 레인저스와 종교갈등, 아약스의 친유대주의, 훌리건 난동을 뿌리 뽑으려던 대처의 축구장 시설개선 정책이 역으로 축구클럽들에 대자본을 끌어들이는 계기가 됐던 일, 첼시 훌리건과 신나치즘, 폭력을 예찬하는 훌리건문학에 ‘훌리건활동 컨설턴트’.

이미 유럽에선 인류학의 연구대상으로까지 떠오른 축구폭력의 실태는 ‘붉은 악마’처럼 얌전한 팬들만 알고 있는 국내 독자들에겐 자못 소름끼칠 정도다. 저자는 “축구의 정치학을 지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세계화”라고 말한다. 축구의 어두운 단면은 세계화의 그늘이고, 대륙을 넘나들며 관중을 열광케 만드는 축구선수들은 우리시대의 유목민들이라고. 세계화는 국경 없는 거대 자본의 제국을 만들어냈지만, 실제 경기장에서 작용하는 ‘훌리건 정치’는 세계화의 뒤안길을 보여줄 뿐이다.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극단적 민족주의가 사라지지 않듯 세계화된 축구 또한 종파주의와 갈등을 완화하기는커녕 오히려 부추기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상업화’는 지역주의와 결합된 훌리건들에게 폭력 충동을 발산할 기회를 만들어 줄 뿐 이라는 것이다.

세계화된 축구의 이면을 파헤치는 책인 만큼, 같은 주제를 다룬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축구, 그 빛과 그림자’(예림기획)와 비교하면서 읽지 않을 수 없다. 갈레아노는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진보적 지식인이자 소설가인 반면 포어는 온건파 성향의 저널리스트다. ‘비꼬기의 대가’인 갈레아노의 책에는 역설과 해학, 그리고 축구에 대한 애정이 철철 넘쳐나는데 반해 포어의 책은 훨씬 분석적이고 저널리스틱하다.
감동으로 따지자면 역시 갈레아노 쪽이 한 수 위겠지만 포어의 책도 유럽 클럽축구 팬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축구에 관심이 많지 않은 독자에게라면 아마도 이 책은 국제정치에 대한 책으로 읽힐 것이다.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책 읽는 동안 내내 생선가시처럼 목에 걸리는 번역의 문제다. 이탈리아 도시 토리노와 피렌체는 영어식으로 ‘투린’과 ‘플로렌스’로 돼 있고, 베오그라드의 축구팀 오빌리치는 ‘오빌리크’로 표기됐다. 유대교 명절인 욤키푸르는 ‘욤키퍼’, 아프리카 국가인 코트디부아르는 ‘코프티부아르’로 해놨다. 축구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영국의 명문클럽 아스날은 ‘아세날’, 이탈리아팀 라치오는 ‘라지오’로 돼 있다. 스페인 유명 클럽 FC바르셀로나의 애칭은 ‘바르카’가 아니라 ‘바르샤’이고, 이 클럽의 감독을 했던 ‘루이스 반 갈’은 ‘루이스 반 할’로 읽어야 한다. 영국 클럽 토튼햄 핫스퍼도 ‘토튼엄 호츠퍼’로 돼있다. 명색이 축구에 대한 책이라면 이 정도의 이름들은 제대로 표기됐어야 옳다.
이탈리아의 반부패 개혁운동을 가리키는 ‘마니풀리테’는 고유명사처럼 굳어진 말인데, 원저자가 영어로 ‘클린 핸즈’라 쓴 것을 그대로 한글로 적어놨다. 이탈리아 명문 유벤투스의 구단주 겸 피아트사(社) 소유주를 앞부분엔 ‘아넬리 ’ 뒷부분엔 ‘아그넬’이라고 썼는데 정확한 표기는 '아†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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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3-17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치명적 약점에도 불구하고...별 넷이라니. 일단 갈레아노 책이나 빌려주시압.(읽을 책 산더미 쌓아놓고 뭐하는 짓이냐구? 글게 말야..-,.-)아참, 타치바나 딸기님. 추천했어용.

딸기 2005-03-17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은 감사한데... 갈레아노 책은 찾아봐야할 듯. 집에 고이고이 모시고 있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혹시 없어졌는지도 모르니깐. ^^
근데 사자의 대변인 아직도 울집에 있는 거 알고 있으신지요. ㅋㅋ

바람구두 2005-03-17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거 절판되었는데... 잃어버렸으면 통분할 일일텐데...
흐흐, 아(르)놀드(트) 하우저도 대단한 축구광이었다는 거 혹시 아세요?

딸기 2005-03-17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놀드 하우저 책이라곤 한개도 안 읽어봤어요~~
그러니 축구광이란 것도 모르지요

딸기 2005-03-17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레아노 책이 저 책보다는 역시 재미있고 감동적이지요!

매운 요리 2005-03-18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치바나 딸기님!


말글빛냄 출판사입니다.


먼저 당사의 책을 읽어 주시고 번역에 있어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해 주신 것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역자분께서 영어 발음에 충실한 나머지 고유명사 표기에 있어


독자분들께  불편을 끼쳐 드린 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곧 출간되는 2쇄에는 축구를 좋아하시는 독자님들께서


편히 읽으실 수 있도록, 타치바나 딸기님의 고견을 적극 반영하겠습니다.


끝으로 당사의 출판물에 관심을 가져주신 점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


앞으로는 출간에 앞서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딸기 2005-03-18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출판사에서 직접 코멘트를 남겨주셨네요
꽤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번역에서 너무 트집잡은 것 같아 죄송스런 마음이 사실 있었거든요. 2쇄에는 바로잡아 주신다니, 고맙습니다. *^^*

centerpot 2005-04-10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그럼 2쇄가 나오면 그때 사서 정확한 발음 교정된 책을 읽어야 할듯..^^;;;

딸기 2005-04-10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enterpot 님, 반갑습니다. :)
 
석유의 종말
폴 로버츠 지음, 송신화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외국 ‘저널리스트’들이 쓴 책들엔 공통된 문체랄까, 패턴이랄까, 그런 것이 있다. 일단 ‘세계’를 돌며 모은 사례를 말머리에 꺼낸다. 반드시 자국이 아닌 다른나라여야 한다. 그렇게 ‘발로 뛴’ 냄새를 팍팍 풍겨 주되, 진지하거나 쉽게 깜 잡힐 얘기를 케이스로 넣어선 절대 안 된다. 아주아주 사소해 보이는 것(예를 들면 차창 밖에 보였던 파이프 하나, 중앙아시아 구석배기의 공장 한켠 같은 식으로)을 살짜쿵 보여준 뒤에, 거창한 얘기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 작은 살짜쿵~ 케이스는 이 어마어마한 이야기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뭐 이런 식. 아주 유명한 사람의 코멘트 따위는 반기지 않는다. 미국 에너지장관 누구가 이러저러하게 말했다, 라고 해버리면 신문 보고 인용한 느낌이 나거든. 그러니 기필코 “아제르바이잔 석유부의 공무원 누구누구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써야만 한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진정 저널리스틱하다. 케이스도 이만하면 풍부하고, 저자의 생각도 A부터 Q까지(에너지 문제에서 Z까지 갈 수 있는 논자는 없을테니깐) 생각의 틀이 딱 잡혀 있고, 문제점 진단에서 장-단기 대안 제시까지 일목요연 일사불란하다. 문체마저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센세이셔널하니 당근빠따로 재미있다. 제목부터 ‘석유의 종말’이다. 허위과장광고가 아니면서도 센~세~이~셔~널~하게 들리는 문구(文句)다.

저자는 미국에게 “계속 초강대국으로 있어라, 다만 화석에너지 대신 새로운 에너지를 찾으려 애쓰고, 기후변화를 막고, 신기술로 앞서 가라”고 말한다. 미국에선 제법 알려진 하퍼스 매거진(난 읽어본 적 없지만 100년 넘은 전통있는 매체로 알고 있다)에 기고하던 사람이라는데, 별반 진보-보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을 것 같은 ‘미국의 저널리스트’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그래야만 불필요한 반감 때문에 책 맛을 잃는 오류를 피할 수 있다).

저자는 석유를 중심으로 한 에너지 문제를 ▲지정학적 불안 ▲기후변화 ▲공급부족 등 세 가지 측면에서 바라본다. 지정학적 불안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려면 한이 없지만(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2008년에 죽으면 울나라에 무슨 일이 생길지 예상해본 일 있는가), 일단 넘어가자. 기후변화 문제도 논란이 많긴 하지만 패~스. 핵심은 결국 공급 문제다.

바보같은 소리 같지만, ‘석유는 기름이다’. 풍력이나 조력, 태양열하고는 다르다. 태워 없애는 에너지원이란 말이다. 미국은 아랍을 때려잡아 지정학적 불안을 없애고, 기후변화 문제는 교토의정서 깡무시해서 입막아버리려 하고 있는 모양인데... 1단계 2단계 통과해도 3단계, 공급부족 문제만큼은 부시 아니라 부시 아들손자가 대를 이어도 해결할 수가 없다. 석유 문제를 얘기할 때 학자들은 종종 ‘종형 곡선’이라는 얘기를 한다. 남아 있는 석유와 파낸 석유의 비율을 생각해보자. 100 배럴 있었는데 50배럴 파내고 50배럴 남았을 때를 종의 꼭대기라고 본다면 그때부턴 곡선이 하향세를 그릴 수 밖에 없다. 하향세로 넘어가는 시점, 즉 파낸 양보다 남은 양이 적어질 때가 대체 언제냐 그 말이다.

정말 웃긴 것이 석유를 둘러싼 통계다. 통계치고 웃기지 않은 것이 뭐 있겠냐마는... 석유는 땅속에 묻혀있다. 석유 매장량이란 것은 파내보지 않고선 알수가 없다. 그렇게 중요한 석유 문제가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점이 놀랍게 생각될 정도로 석유 매장량 통계는 제멋대로다. 사우디 쿠웨이트 등등이 국제시장에서 돈 필요할 때면 매장량 팍팍 늘려서 발표한다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문제는 뻥튀기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 석유는 언젠간 사라진다. 언제냐! 석유가 21세기 말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짧고도 강력했던 석유시대는 인류의 역사에서는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20세기, 그리고 21세기 약간. 기껏 100년이 ‘석유의 역사’로 그려질 것이다. 몇 년 몇월이 될 것이라고 말할순 없지만 아무튼 석유는 사라진다. 그러니 ‘새로운 에너지’로 가야한다. 그런데 새로운 에너지로 가는 길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가 놓여 있다.

저자는 이 장애물들을 ▲기존 산업의 반발(석유산업의 특수성- 막대한 설비투자) ▲기술적 한계(수소전지에 목매달지 마시라) ▲에너지 빈부격차 확대 등으로 정리한다. 세 번째 문제, 에너지 빈-부 격차의 확대는 부시와 빈라덴의 싸움 못잖은 ‘새로운 전쟁’을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장애가 많은 것이 범지구적 에너지 현실인 것이다!

인류는 수차례 에너지 혁명을 겪어왔다. 땔감에서 석탄으로, 다시 석유로. 석유에서 차세대 에너지로 가는 변화도 자연스레 오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과거에도 시장논리에 따라 새로운 에너지가 과거의 에너지를 대체했다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고. 

이런 귀여운 착각에 대해 저자는 “예전의 변화와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변화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석탄에서 석유로의 변화를 사람들이 받아들였던 것은, 석유가 ‘현실의 이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라고. 반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는 ‘미래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지구 환경과 직결되는 대체에너지로의 전환은 미래세대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시장 논리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실현 가능한 방법’을 찾자고 저자는 말한다(저자는 환경단체들의 주장들에 대해 실현불가능한 방법을 고집하는 극단론자들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음). 물론 이 사람이 말하는 ‘대안’이라 해도 결국은 경제 시스템과 에너지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통째로 바꾸는 것이지만, 중-단기적으로 해야 할 구체적인 과제들에는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우선 오일쇼크 이후 카터 시절 유행했던 ‘에너지 효율성’ 개념을 다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이건하고 부시는 에너지 많이 들여와 많이 쓰는 걸 좋아하는데, 에너지 효율성을 높이는 쪽으로 다시 바꿔야 한다. 이렇게 하면 적어도 차세대 주력에너지가 개발될 때까지 지구를 위해 시간을 벌어줄 수는 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이미 유럽에서 시행에 들어간 탄소세, 가스 확대정책, 클린석탄기술 지원, 그동안 감춰져 있던 에너지 ‘외부비용’의 공식화, 각종 가전제품의 에너지효율성 높이기 등을 제안하고 있다.

장기적으론 물론 차세대 에너지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풍력, 태양열 등 이른바 ‘대체에너지’의 현황을 소개하는데, 새로운 에너지로 가는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한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책은 에너지 문제에 대한 ‘교과서’로 꽤 훌륭하지만, 에너지 문제를 다룬 좀더 정교한 텍스트와 함께 읽는다면 훨씬 더 많이 공부가 됐을 것 같다. 새롭게 알게된 사실들이라고 한다면 외신에서 놓쳤던 중국의 움직임과 가스경제의 난점 같은 것들. 몇해전 시끌시끌했던 미국 에너지 기업 엔론 파산 뒷얘기와 에너지업계 인수-합병의 숨은 배경도 재미있게 읽었다. SUV 좋아하는 미국인들 못잖게 ‘에너지 망각증상’에 빠져 있는, ‘원자력 5대 국가’ 한국의 에너지 위상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 것도 수확 아닌 수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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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5-03-05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록으로 땡스투도...

플라시보 2005-03-05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정말 책을 늘 재밌는것만 골라보는 저에게도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와닿습니다. 감사해요^^

딸기 2005-03-05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재밌는것만 골라보는 플라시보님께서 좋아해주시니 저도 기쁩니다 ^^

마냐 2005-03-05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저널리스틱한 책. 그래서인지 술술 재니나게 읽힌 책. 그 가볍지 않은 내용....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마땅할 책. 따라서 추천.

2005-03-05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5-03-05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냐님 땜에 읽은 책... 재미없었으면 물어내라고 할려 그랬다구. ㅋㅋ

울보 2005-03-05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나 누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