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동남아시아의 역사
클라이브 크리스티 엮음, 노영순 옮김 / 심산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동남아시아 역사에 대한 책을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몇 해 전에 어느 서양 외교관이 쓴 ‘한권에 담은 동남아시아 역사’라는 것 한 권 보고 나서 적당한 교재를 찾지 못한 것도 있고 내 관심사가 아닌 것도 있고 해서 그냥 치워놓고 있다가 이번에 세미나 커리큘럼으로 이 책이 들어간 덕에 읽게 됐다. 참 재미있게 읽었다. 아주아주 훌륭한 책이다!

뭐가 훌륭하냐면, 동남아시아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준다는 거다. 모헨조다로 앙코르와트 이런 식으로 출발해버리면 그 나름대로 의미는 있겠지만 김이 좀 빠진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20세기에 초점을 맞춰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여러 지역들의 풍경을 전한다. 그냥 풍경화 풍속화로만 그리는 것은 물론 아니다. 20세기가 어떤 시대였나. 우리도 ‘아시아’ 해봐서 아는데, 이 지역 사람들에게 20세기는 쉬운 시절 아니었다. (역사에 ‘쉬운 시절’이 과연 있을까마는) 이 100년 동안 아시아 사람들 참 많이 당하고, 남한테 얻어맞고 빼앗기고 자기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난리도 아니었다. 식민지, 투쟁, 독립, 이념대립, 전쟁, 발전, 이런 것들이 100년 동안 이 동네 난리북새통으로 만들고 숱한 사람 괴롭히고 또 영웅도 낳고 했었다.


편저자는 그 모양들을 담은 여러 문헌들을 통해 100년간의 동남아시아를 보여준다. 오늘날의 국가 구분으로 하면 말레이시아(말라야),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타이, 버마, 라오스와 캄보디아, 그리고 싱가포르가 약간 들어간다. 서론은 식민시대 이전 동남아를 내륙부와 해양부로 나눠 아주 간략히 개괄하고, 그 뒤로는 연대순-테마별 단락들이 들어간다.

“이 책의 서술 배후에 놓여 있는 첫 번째 질문은 ‘전체로서의 이 지역 근현대 역사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통일성을 어느 정도 논증할 수 있느냐’이다. 일견 동남아시아는 지배적인 민족도, 언어도, 문화도, 종교도, 전식민 시기 국가도, 식민세력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에는 특기할 정도로 공통의 역사적인 경험이 있음을 알 수 있다.”(33쪽)

그 공통의 경험은 서구 열강의 식민통치를 겪었다는 것(태국이 예외적으로 독립을 유지하기는 했다), 1940년대 초·중반 일본의 군사점령을 당했다는 것, 2차 대전 후 탈식민화를 경험했다는 것, 곧바로 냉전이라는 구도 속에서 곡절을 겪어야 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2장과 3장은 1990년부터 1941년까지 일본이 망하고 동남아에 지금 같은 나라들이 생기기 이전까지를 다루는데, 2장에서는 이 지역에서 근대적 민족의식이 어떻게 싹텄는지를 보고 3장에서는 그런 의식이 어떤 정치적인 흐름으로 이어졌는지를 살핀다. 4장은 일본 점령 시기, 5장은 일본의 패배와 항복 뒤 동남아의 ‘혁명’ 시기, 6장은 독립 후 국가세우는 과정, 7장은 독립·정착 과정에서 민족간 협상 갈등 냉전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구체화한다. 8장은 1954~1965년 주로 베트남 전쟁 등 인도차이나 상황과 냉전의 영향, 9장은 좀 어수선하지만 자리잡아가는 동남아시아를, 10장은 마무리 격으로 발전해가는 동남아시아를 다룬다.


저자는 우선 저런 테마별로 간단히 설명하고 관련된 문헌들의 요약본을 소개한다. 테마들은 하나같이 재밌다. 프랑스 통치에 대한 베트남의 대응/동남아시아 민족주의와 반식민주에 미친 ML 영향/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의 공산주의자 반란들/제2차 세계대전 중 타이와 일본/동남아시아에서 미국의 새로운 역할/버마의 군사혁명/세계도시 싱가포르 등등. 하나하나 테마들이 모두 책 한권씩은 읽었으면 좋겠는, 의문 들고 관심 가는 것들이다. 시간대별로 필요한 지역들을 이리저리 교차시켜서 뽑아놓은 문헌들도 종류가 다양하다. 버마 사야산 반란을 다룬 글은 서양 사람이 관찰한 당시 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베트남에서 ML 영향은 호치민의 ‘민족과 식민 문제에 관한 테제’를 직접 인용해놨다. 미국 국무부 백서, 키신저의 글 같은 것들이 고루 들어가 있어서 여러 가지 각도에서 사건들을 볼 수 있게 했다.

“20세기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이념적 차원이 가끔은 부당하게 과소평가되어 왔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이데올로기는 이 지역의 역사가 전개되는 각기 다른 단계에서 주요한 정치적인 세력들과 개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과 우선적인 가치를 형성하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안내자 역할을 했다.”(35쪽) 이 책에 묶여있는 글들은 편저자가 중시하고 있는 이 지역 사람들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우리나 그들이나 같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따라 굴러왔다는 점이다. 동북아와 동남아 서로 좀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 적어도 20세기에 두 지역 대부분 나라들은 식민지-투쟁-독립-전쟁-발전 같은 겹치는 경로들을 밟았다. 어떤 부분에서 동남아 어떤 지역들은 조선보다 역동적이었고 한국보다 힘이 있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무기력하고 한심했다. 책 읽는 내내 조각난 퍼즐들을 맞추는 듯한 느낌이었다. 깨진 거울로 내 모습을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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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0-30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리뷰를 읽다 보면 봐야 할 책이 너무 많이 쌓이는 압박이 있습니다. ^^

딸기 2006-10-31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바로 서재질의 마력;;이지요 ^^
 
만델라 자서전 -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넬슨 만델라 지음, 김대중 옮김 / 두레 / 2006년 3월
구판절판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투사로 인종차별 철폐 투쟁을 벌이던 만델라 할아버지는 아프리카 흑인 이웃나라들을 돌면서 지원을 호소하는 활동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감옥에 가기 전 탄자니아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

니에레레 대통령(탄자니아 대통령)은 내가 음베야로 갈 때 그의 전용기를 빌려주었다. 거기서 다시 로바체로 가는데 조종사가 내게 카니에에 착륙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왜 계획이 변경되었는지 걱정스러웠다. 카니에에 내리니 지방 치안판사와 보안관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백인이었다. 지방 치안판사는 내게 다가오더니 내 이름을 물었다. 나는 데이비드 모차마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나의 진짜 이름을 대라고 말했다. 나는 다시 데이비드 모차마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저에게 진짜 이름을 말하십시오. 나는 여기서 만델라 씨를 만나서 그를 도와주고 수송을 제공해주라는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당신이 넬슨 만델라 씨가 아니라면, 유감스럽지만 나는 당신을 체포해야겠습니다. 당신은 비자 없이 이 나라에 입국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넬슨 만델라 씨가 맞습니까?"
나는 난감했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어차피 체포될 것 같았다. "만약 당신이 내가 데이비드 모차마이가 아니고 넬슨 만델라라고 우긴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우기지는 않겠소" 라고 말했다.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우리는 어제 당신이 올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의 동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451쪽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판사는 의기소침하고 언짢아보였으며 나를 똑바로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다른 변호사들도 난감해하고 있는 듯했다. 그 순간 의외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의 마음이 불편했던 것은 단지 동료 법조인이 이제는 몰락하여 피고석에 서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의 신념 때문에 처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이전에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어떤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피고인으로서 법정에 선 나의 역할 그리고 내 앞에 놓인 가능성이었다. 나는 압제자의 법정에 선 나의 역할 그리고 내 앞에 놓인 가능성이었다. 나는 압제자의 법정에 선 정의의 상징이었고, 자유와 정의 그리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사회에서 이 위대한 이상들을 대변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때 그 자리에서 나는 적의 요새 안에서도 투쟁을 계속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464쪽

나는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을 되찾고, 젊은 시절 나의 인생으로부터 오래된 실을 뽑고, 아침에는 사무실에 나갔다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고, 약국에 들러서 치약을 사고, 저녁에 옛 친구를 방문하는 것을 갈망해왔다. 이러한 일상적인 일들이 내가 감옥에 있을 때 가장 그리워했던 일이며, 내가 자유롭게 되었을 때 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재빨리 이러한 일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밤 이후로 몇 주 동안 매일 밤, 나의 집은 수백 명의 지지자들로 에워싸였다. 사람들은 노래하고 춤추고 소리 질렀으며, 그들의 기쁨은 쉽게 퍼졌다. 그들은 나의 민족이었고, 나는 그들을 거부할 권리도 욕망도 없었다. 그러나 내 자신을 나의 민족에게 양보하자 또다시 내 자신이 가족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8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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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 자서전 -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넬슨 만델라 지음, 김대중 옮김 / 두레 / 2006년 3월
구판절판


아파르트헤이트는 내 조국과 국민들에게 깊고 오랜 상처를 남겼다. 우리 모두는 그 심한 상처를 치유하는 데 여러 세대 또는 적어도 여러 해를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의 억압과 잔인함은 또 다른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바로 억압과 잔인함이 우리 시대에 올리버 탐보, 월터 시술루, 추툴리 추장, 유서프 다두, 브람 피셔, 로버트 소부퀘와 같은 대단한 용기와 지혜와 관용을 지닌, 내가 다시는 알지 못할 그런 사람들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런 고귀한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토록 심한 억압이 필요할는지도 모른다. 나의 조국은 땅 속에 묻혀 있는 광물과 보석이 풍부하나, 나는 항상 우리 나라 최고의 재산은 순수한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훌륭하고 진실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897쪽

아래층 협의실에서 우리는 종종 종이에 글을 써서 의사소통을 했다. 종이는 사용 후 태워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우리를 감시하던 특수부 장교 가운데 스와네포엘이라는 중위가 있었는데, 퉁명스럽고 얼굴색이 붉은 이 사람은 우리가 항상 자신을 속인다고 믿고 있었다. 어느 날 스와네포엘이 문에서 우리를 감시하고 있을 때, 고반 음베키가 극도로 조심스럽게 쪽지를 쓰기 시작했다. 역시 조심스럽게 그는 내게 쪽지를 건넸다. 나는 그것을 읽고 점잖게 고개를 끄덕인 후 케이시에게 쪽지를 건넸다. 케이시는 보란 듯이 쪽지를 태우기 위해 성냥을 꺼냈다. 그때 스와네포엘이 방을 급습했다. 케이시에게서 쪽지를 뺏은 그는 방에서 성냥을 켜는 것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자기의 전리품을 읽기 위해 방을 나갔다. 몇 초 뒤 그는 "나는 이 일로 너희 모두를 가만두지 않겠어"라고 말하며 황급히 돌아왔다. 고반이 대문자로 쓴 말은 "스와네포엘 녀석 잘생기지 않았소?"였다. -5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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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겜보이 2006-10-21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동남아의 이슬람 - 동남아학총서 9 동남아학총서 9
양승윤 지음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00년 8월
평점 :
절판


참으로 조악하게도 만들었다.
책 내용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편집이 그렇다는 얘기. 어쩜 그렇게 대학출판부스럽게 만들었는지. 이런 편집, 요새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겠지만, 그래도 동남아시아 다룬 책 중에서 제법 오래전에 나온 것이고, 내용은 나쁘지 않다. 이슬람에 대해 영 모르는 사람이라면 쓸데없이 좋은 종이에 사진 몇 장 넣어서 비싸게 파는 그런 책보다는, 그냥 이거 사서 앞부분 간단히 이슬람에 대해 정리해놓은 것 보는 것도 괜찮을 듯.

'이슬람권'이라고 하는 지역이 워낙 넓기 때문에 하나로 뭉뚱그리기가 쉽지는 않다. 아랍 세계가 있고, 이란이 있고, 터키가 있고, 중앙아시아가 있고, 남아시아(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의 무슬림도 있고... 사실 인구로 따지면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는 인도네시아다. 2위, 3위도 아마 동-남부 아시아 국가들이 차지할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슬람 종주국이라고 하지만 인구로 따지면 아시아 친구들한테 명함 못 내민다.
이 책은 인구상으로 다수를 차지하면서도 여전히 이슬람세계의 주변부인(어찌 보면 모든 분야에서 주변부 취급을 받는) 동남아를 다루고 있다. 이슬람의 역사에서 동남아는 분명 빼놓을 수 없는 한 축이고, 동남아의 역사에서 이슬람은 역시나 빼놓을 수 없는 축이다. 책이 대단히 알찬 것은 아니지만, 동남아-이슬람 두 가지 중 하나라도 관심 있는 사람에겐 나쁘지 않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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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러피언 드림 - 아메리칸 드림의 몰락과 세계의 미래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원기 옮김 / 민음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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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신 기사를 인용할 때 종종 ‘국제사회’라는 표현을 쓰게 된다. 국제사회라는 것의 실체는 무엇일까? 신문에서 ‘국민여론’을 얘기하는 것과 비슷할 텐데, 실체가 없는 것 같지만 ‘국제사회’나 ‘국민여론’이나 분명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뭉뚱그려 왜곡하기 쉽다 뿐이지, 국제사회나 국민여론은 분명 존재한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 계획이 국제사회의 반발에 부딪쳤다”고 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국제사회’는 통상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 이를테면 러시아 중국 프랑스 독일 일본 이런 개별 국가들을 가리킨다. 세계 무대에서 영향력 있는 나라들 상당수가 미국의 계획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식, 비공식적으로 밝혔다면 미국은 국제사회의 반발에 부딪친 것이 된다. 어떤 때는 개별국가들 뿐 아니라 유엔 같은 국제기구나 국제앰네스티처럼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는 비정부기구들이 국제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조지 W 부시가 미국 대통령이 된 뒤로, 특히 이라크 공격을 운운하기 시작한 이래로 미국은 번번이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러시아나 중국이나 중동 국가들이 미국에 눈총 주는 건 그렇다 치고, 유럽과 미국의 간극은 그야말로 주목할만한 현상이었다. 막가파 부시보다 더 느끼하게 생긴 프랑스의 자크 시라크는 왜 번번이 미국에 반대할까? 불독처럼 생긴 게르하르트 슈뢰더(지금은 우파 메르켈에게 자리를 내줬지만)는 왜 미국에 반대할까? 한때 시라크는 ‘제3세계 지도자’라도 되는 양 떠올랐고, 미국과 다름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정치생명의 열쇠인 것처럼도 보였다.

단면도를 잘라보면 겹겹이 쌓인 지층들, 말 그대로 서로 다른 층위의 여러 가지 현상과 분석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은 정말 미국과 다른가? 유럽은 어떤 점에서 어떻게 미국과 다른가? 유럽은 미국보다 덜 오만하고 환경친화적이고 다원적 민주적인가? 유럽은 계속 미국과 다른 길로 갈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네들 이익 챙기기에 몰두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것 아닌가? 유럽이라는 것이 단일한 실체인 것도 아닌데 뭉뚱그려 말할 수 있을까?


리프킨은 저런 질문들에 모두 ‘예스’라고 말한다. 느낌표까지 찍어서 ‘예스!’. 아예 한걸음 더 나아가 ‘미국도 빨리 유럽을 따라가야 한다’고까지 하는 듯하다. 리프킨이라는 인물도 그닥 단순한 사람은 아닐 터이고, 예스라는 대답 뒤에는 이런저런 여러 가지 설명들이 붙을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정말 하나부터 끝까지) 쟁점들을 대하는 유럽과 미국의 태도, 언술은 분명 다르다. 미국은 개인주의가 최고라고 하는데 유럽은 보편적 인권이 개개인의 행동을 아주 세세한 수준까지 규정하는 법체계 그 자체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에너지 펑펑 써서 개발하고 발전하면 최고라고 얘기하는데 유럽은 어머니 지구를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에너지 덜 쓰는 길로 나가야만 한다고 말한다. 미국은 돈이 최고이고 빨리 많이 돈버는 효율성이 지상과제라고 하는데 유럽은 아름다운 여가와 가치있는 인생이 최고라고 말한다. 한쪽에서는 시계가 빨리빨리 안 돌아가 난리이고, 한쪽에서는 시계가 빨리 돌아가는 걸 욕한다. 분명 겉으로 보기에 미국은 오만하고, 유럽은 가끔 오만하지만 그래도 덜 오만하려고 애쓰고, 오만한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한다. 한쪽은 힘이면 다 되는줄 알고, 한쪽은 그래도 대화와 협상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얼핏 보기에 유럽은 미국과 다른 얘기를 하고, 다른 길을 하려고 하는 것 같다.

정말일까? 딱 보기에 미국보다 유럽이 훨씬 착하고 똑똑하고 올바른 것 같은데 말이다. 믿을 수 있을까?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길로 가겠다는 유럽을 믿을 수 있을까? 힘이면 다 되는 이 세상에서 유럽의 저런 생각 저런 말, 진심일까?

리프킨은 일단 포인트를 잘 잡은 것 같다. 그는 유럽과 미국이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아주 중요한 변화로 평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런 변화의 조짐이 ‘진짜’일까 하는 점일 터인데. 저자는 ‘진짜’라는 전제 하에 유럽의 새로운 가치관, 유럽이 내놓은 새로운 방향성이 지구 전체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유럽 내에도 여러 다른 목소리들이 있고 좌가 있고 우가 있고 진보파가 있고 꼴통들이 있지만, 유럽 이 나라 저 나라 입장들이 다르고 그래서 아직은 갈팡질팡하고 있지만, 분명 변화의 흐름은 시작됐고 그것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길이라는 것이다. 유럽이 새롭게 내놓은 가치관(개인의 욕망에 철저히 초점을 맞춘 ‘아메리칸 드림’ 대신 저자가 ‘유러피언 드림’으로 명명한)이 세계의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인가. 유럽에서 시작돼 세계를 지배했던/지배하고 있는 저 단선적이고 직선적이고 위계적이고 계몽적인 세계관이 다시 유럽에서부터 바뀌어갈 수 있을 것인가.

 

유럽의 거대한 실험은 단순히 ‘유럽연합 결성’이라는 정치 시스템의 문제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많지만’ 앞선 질문들에 대한 리프킨의 대답은 과감히 ‘모두 예스!’인 것이다. 그는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이라는 배경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었기에, 철저하게 일국(一國)을 전제로한 것이기에 글로벌 시대에는 맞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아메리칸 드림이 본질적으로 국경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유러피언 드림은 국경을 넘어선 그 무엇, 민족국가의 영토적 경계를 떠나있는 새로운 어떤 정체성과 연관된 것이다. 유러피언 드림은 계몽주의의 프로젝트를 완전히 벗어난 그 무엇이며 우리 머리 속 ‘국가’라는 개념을 완전히 뒤바꾼 어떤 정체성과 관련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것은 ‘새로운 도덕성’과 연결된 문제다. 인권과 환경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사회를 우린 아직 가져본 적이 없는데 유럽은 지금 그걸 꿈꾸고 있다. 유럽을 너무 치켜세우는 것 아니냐고? 유럽의 ‘현재 모습’과 별개로, 어쨌건 유럽연합의 이상은 그런 것이다!

그 안에서 이상주의자들과 현실주의자들이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조율해갈 것인지, 그들의 실험이 실패할 것인지 성공할 것인지는 그야말로 그들에게 달려 있다. 다만 우리는 그들의 실험이 너무나 새롭기 때문에 주목하는 것이고, 그들의 실험이 성공해서 잘난 미국도 따라가기를 바랄 뿐이다!


처음 펼쳤을 때엔 ‘내가 또 뭣 때문에 리프킨의 책에 돈을 들였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리프킨의 책들을 몇권 읽어보았는데(정작 그를 유명하게 만든 ‘엔트로피’는 못 읽어봤지만) 모두 재미있었다. 누구의 말마따나 ‘나이브한’ 측면이 없잖아 있지만, 분명 리프킨에게는 시대를 앞서 묘사하는 능력이 있다. 종합할 수 있는 능력이라면 그런 것이고, 통찰력이라면 통찰력이다. 아무튼 바이오테크 시대,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실은 이 책은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좀 헷갈린다), 수소혁명, 모두 재미있으면서 약간씩 허전한 구석을 남기는 책들이었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부족한 2%’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분명 사례를 많이 제시하고 통계도 많이 언급하는데 왜 뜬구름 잡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것이 내 의문이었고, 리프킨의 책에 더 이상 돈을 들이고 싶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리프킨의 책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은 어느 후배의 강력한 주장 때문에, 그저 이 책을 같이 한번 읽어보자는 제안 때문에 다시 손을 대게 됐다.

어쩌면 리프킨이 남겨주는 허전함은, 그의 통찰력이 좀 많이 앞서있는 것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엔트로피, 비평형 열역학, 일리야 프리고진, 비유클리드 기하학, 복잡계.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수소혁명, 바이오테크, 모두 좀 앞서갔다. 틀린 관찰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통찰력은 참 반짝반짝했다. 그다지 재치있는 문체는 아니지만, 어딘가 허술한 듯 하면서(앞서나가려니) 반짝거리는 통찰력이 있어서 그의 생각들은 재미가 있었다.


앞서나가는 탓에 부족한,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 이 책 ‘유러피언 드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번엔 진짜 재미있게 읽었다. 줄간격 너무 넓고 여백이 많고 하드커버에 2만2000원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엔트로피에서 노동의 종말과 바이오테크 사이를 넘나들다가 훌쩍 ‘아메리카와 유럽’의 문제로 건너뛴 걸 보면 리프킨은 분명 대단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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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6-10-20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간만의 일치...이런가.
리프킨의 그 통찰력, 항상 좀 앞서 있기 때문에 엄한소리처럼 들리는데, 따지고 보면 맞거든. 맞았거든. 드러커도 좋아하는데, 톰 피터스는 안 읽어봤어. 함 봐야겠네.

blowup 2006-10-20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왓. 리뷰가 아주 암팡져요.

딸기 2006-10-20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앗. 나무님 오랜만이예요. *^^*

전자인간 2006-10-21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제가 리뷰 올려놓고 보니 딸기님이 하루 전(8시간 전이군요!)에 리뷰를 쓰셨네요.
그리고 헉, 정말 예리한 리뷰네요.

딸기 2006-10-21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아앗 전자인간님! 이게 또 얼마만입니까!
리뷰 잘 읽었어요. 추천 꾸욱~ 누르고 왔어요. 전자인간님 글 보니까
제가 얼마나 중구난방으로 독후감을 올렸는지-- 바로 비교가 되자나요 ^^;;

수퍼겜보이 2006-10-21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름지름지름~신 노래를 한다~ ♬

딸기 2006-10-22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할 때 사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