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미래로 떠난 여행 - 투발루에서 알래스카까지 지구온난화의 최전선을 가다
마크 라이너스 지음, 이한중 옮김 / 돌베개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과학, 환경, 기후, 이런것들에 대한 책을 꽤 여러권 읽어봤는데, 이 책이 단연 재미있다. ‘투발루에서 알래스카까지 지구온난화의 최전선을 가다’. 영어 원제는 High Tide-News From A Warming World.

책 앞날개에 실린 저자 약력을 옮겨보면
“1973년 피지에서 태어나 페루, 스페인, 영국에서 자랐다. 에든버러 대학에서 역사와 정치를 공부했으며, 졸업 후에는 2000년까지 원월드넷(OneWorld.net)에서 활동했다. 이제 기후변화 분야의 전문가가 된 그는 기자, 환경운동가, 방송해설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의 홈페이지(www.marklynas.org
)는 기후변화에 관한 가장 풍부한 자료들을 모아놓은 보물창고 중 하나이다. 현재 옥스퍼드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하여 저자는 세계 곳곳을 돌며 지구온난화의 생생한 현장을 찾아가는데, 그 목격담은 정말 충격적이다. 지구온난화, 기상이변, 기후변화 같은 것들, 신문에서 늘 접할 뿐 아니라 철 바뀔 때마다 서울 복판에 앉아서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만(어떤 과학자들과 어떤 정부관리들은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우린 알고 있다 - 봄가을이 사라진다, 여름이 더워졌다, 물난리가 자꾸 난다... 결국 우린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저자가 전하는 이야기들은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투발루. 투발루라는 나라를 들어본 일 있는가? 태평양 작은 섬나라가 신문에 등장한 적이 내 기억으론 두 번 있다. 지구온난화 때문에 해수면이 올라가 나라가 가라앉을 판이라며 온실가스 펑펑 내뿜는 선진국들 상대로 소송 냈다는 것, 나라이름 인터넷코드가 .tv 라서 미디어업체들이 투발루 도메인을 탐낸다는 것, 그렇게 두 번이다.

소송 냈다고만 들었지만 어느 나라가 투발루 사람들에게 미안해하며 사과를 할까. 그러니 이들의 투쟁은 그냥 시위성으로만 보였을 뿐인데, 아직 ‘다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산호초 섬에는 이미 물이 들어차 ‘물바다 속에서 바비큐를 구워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들은 몇 년 안에 나라를 버려야 하고, 그나마 간신히 ‘난민’을 받아들여주기로 한 뉴질랜드로 조금씩 조금씩 이사를 가야만 한다. 어떤 노인들은 “섬과 함께 가라앉겠다”고 한다는데 비장하고 슬프다. 결국 나도 그들을 가라앉히는데 일조하고 있지 않은가.

 

해마다 황사가 심해지다 못해 아주 난리를 치는데 4장 ‘중국을 붉게 물들이는 황사’도 옆 나라 사람으로서 간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는 얘기였다. 저자가 묘사한 중국 변방 사막지대의 어느 마을 풍경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부해(腐海) 같기도 하고, 아베 코노 ‘모래의 여자’에 나오는 엽기적인 마을 같기도 하다. 저자는 또 빙하를 연구하는 아버지가 20년전 찍은 사진을 들고 페루의 산악지대를 찾아가는데, 아버지의 사진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20년 뒤 ‘사라진 빙하’의 모습은 쇼킹하다. 저자는 빙하가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사라진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두 장의 사진을 보는 독자의 눈에도 역시나 충격적이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은 ‘열기를 느껴보라’이다. 사실 우린 이미 열기를 느끼고 있다. 뜨거운가? 겁나는가? 우린 그저 여름이 더워졌다며 에어컨을 켤 뿐이지만 투발루 사람들은? 이 책에 실린 르포들은 ‘지구의 미래로 떠난 여행’이 아니다. 우리에겐 미래의 일인지 모르지만 어떤 이들에겐 이미 현실이 됐고, 우리의 현실로도 계속 스며들고 있다. 다만 우리가 모른척하고 있을 뿐, 이것은 ‘지구의 현실로 떠난 여행’인 것이다. 투발루 사람들은 에너지 펑펑 써대면서 난민은 못 받겠다며 교토의정서조차 거부한 호주 사람들을 비난한다. 조지 W 부시 미국대통령은 전임자가 서명했던 교토의정서를 거부했고, 호주 일본 같은 나라들을 끌어들여 ‘반(反)환경-반 교토’ 국가모임을 조직했다. ‘청정개발 및 기후에 관한 아·태 지역 파트너십’이라는  x 같은 모임에 작년 우리나라도 한자리 끼어들었다. 투발루 사람들에게 그저 미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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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2006-11-01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적게 쓰며 살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미안할 따름입니다.

딸기 2006-11-01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우주의 구조 - 시간과 공간, 그 근원을 찾아서
브라이언 그린 지음,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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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는 시공간의 초미세 구조에 대하여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 간접적인 증거를 제시해왔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물론 아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시공간의 근본적인 구성요소를 규명하라고 하면, 지금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자신감도 줄어들 판이다.” (653쪽)

 

책 표지에 자랑스레 써있는 구절- ‘엘러건트 유니버스의 저자 브라이언 그린’. 그 저자 그 출판사 그 번역자, 내가 이 책을 사서 읽은 것도 ‘엘러건트 유니버스의 저자 브라이언 그린’이 쓴 책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부제 ‘시간과 공간, 그 근원을 찾아서’ 라고 돼 있는 것처럼 내용은 시공간의 실체에 관한 것이고, 주인공은 역시나 끈이론이다. 시공간의 실체에 관한 것이라고 하니, 좀 어폐가 있긴 하다. 시공간은 과연 실체가 있는 것인가? 시공간이란 대체 무엇인가? 저자는 예의 그 재미난 비유로, 시공간을 빵 덩어리로 만들어서는 톱니 달린 빵칼로 쓱싹쓱싹 썰어 보인다. 이쪽으로 비스듬히 썰면 과거, 이렇게 비스듬히 썰면 타임머신 타는 거야, 어때, 2차원으로 그리니 감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이해는 가지? 이렇게 중간 중간 되짚기도 하고 빗대기도 하고 농담도 던지면서 말이다. 요는, 원제의 Fabric 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우주에는 뭔가 씨실 날실 같은 ‘구성 성분’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이고, 시공간의 구성성분이 뭔가가 있는 것 같다는 것인데 저자도 단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말이다, 이 초끈 이론이라는 것을 내가 이해할 수가 있겠냐고. 시간과 공간이란 정말 어렵다. 브라이언 그린조차도 저렇게 고백하는데 무지한 내게 차원, 그것도 ‘여분의 차원’은 정말 너무하다. 이 독자야말로, 그동안 과학책들 심심풀이로 읽으면서 얻은 쿼크만한 자신감도 줄어들 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재밌었다. 멋지지 않아? 홀로그램 같은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니, 양자가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고, 어딘가에 이 우주와 비슷하지만 다른 평행우주라는 또 다른 가능성이 열려 있을 수 있다니, ‘웜홀’이라는 녀석은 공간의 터널이자 시간의 터널이 될 수 있다니, 클라크가 말한 것 같은 절대정신(자아), 혹은 쿠르드 신화에 나오는 것 같은 편재하는 신의 존재, 우주적 정신, 그런 비유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다니!

 

저자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익숙한 세계관 익숙한 생각’으로 우주를 생각하고 시공간을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라!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들(뉴턴물리학의 세계)을 기준으로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바라보면 안 된다,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의 행복한 만남을 위해서 우리는 모든 상식을 버려야 한다! 브라이언 그린 식의 농담따먹기 때문이 아니라, ‘유년기의 끝’에 나오는 절대정신 같은 것을, 시공간의 빵칼을 상상하느라고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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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6-10-31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책..멋진 서평...추천 꾸욱..

딸기 2006-11-01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제야 봤네.. 고마와요. :)

전자인간 2006-11-02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는 이 책 서평을 써야지~~ 하면서 일년이 지났는데, 딸기님이 저 대신, 훨씬 재밌게 써 주셨네요. 감사 ^^

딸기 2006-11-03 0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앗 전자인간님 리뷰 꼭 써주세요! 읽고싶어요! 아무래도 저하고는 생각이 다르실테니깐... 솔직히 저는 저 책 이해가 잘 안 가서 걍 쓱쓱 넘겼거든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은행가
무하마드 유누스 외 지음, 정재곤 옮김 / 세상사람들의책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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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 경제학 교실은, 영화가 끝날 무렵엔 주인공이 승리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영화관처럼 한가롭기 그지없는 장소로 비쳤다. 나는 처음부터 모든 경제학 문제는 우아한 해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의실을 나서자마자 내 눈앞에는 가혹한 현실이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학생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조브라 마을은 내가 다닐 대학이고, 조브라 주민들은 나를 가르칠 교수들이 될 터였다. 나는 ‘땅 속 벌레의 눈’으로 세상을 보리라 작정했다. 현실을 보다 가까이서 보면 더욱 더 잘보일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마치 땅벌레처럼, 길을 가다 장애를 만나면 장애를 둘러감으로써 결국 목표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분명 나는 여러 사람을 도울 수는 없을지언정,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도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근심이 누그러졌다. 말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나에게 희망을 주었다. 나는 다시 힘을 냈다. 마침내 조브라 마을을 찾았을 때, 나는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찾았다. 나의 앞길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분명하게 보였다.
(23~25쪽)

사회복지 전문가들이나 공동체 지도자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본은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였다. 정말로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정신과 치료나 의료지원, 직업 훈련, 교육, 주택 문제 등과 같은 사회제도적 도움이라는 주장이었다.
물론 나는 이런 반대 의견들이 선량한 의도에서 나왔다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8년 동안 이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일을 하다 보니 우리가 표명하는 소신이야말로 결코 그른 것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사회적 지원보다도 융자가 더욱 더 절실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283쪽)

시장경제와 대량생산이 절정을 이루고 있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 개인에게 소액 융자를 제공함으로써 보잘것 없는 자립형 경제활동이나 조장한다는 이유를 들어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렇게 해봐야 거시적으론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가난을 퇴치하려면 단순히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보다는, 포괄적이고 보다 심층적인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길은 일 자체보다는 일과 연관된 자본에 있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가난한 사람들은 아주 미미한 여유 자본만 있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 (296쪽)

나는 2050년이 되면 전세계가 마침내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지구상의 그 어느 누구도 가난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를 바란다. 그 때가 되면 ‘가난’이란 말은 의미를 상실하고, 다만 역사적 의미로만 존재했으면 하고 소망한다. 가난은 박물관에나 전시되는 과거의 유물이 되어 있고, 문명화된 세계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박물관을 찾은 초등학생들이 이 과거의 유물을 보면서 지난 시대에 창궐했던 끔찍한 모습을 떠올리며 치를 떨 것이다. 그러면서 이 아이들은 21세기 초두에 이르도록 조상들은 어째서 그런 처참한 불행을 그대로 방치하였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나는 전세계적으로 가난이란 사실 경제적 문제라기보다는 의지의 문제라고 언제나 생각해왔다. 도한 가난이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는 까닭은 우리가 가난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충분한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은 가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가 가난을 직시하지 않으려는 방책으로 우리는 그저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더 일을 해야 한다고 부르짖을 따름이다. (319쪽)

그 어떤 경제학자도 자립형 노동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보는 세계의 모습이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성년기에 이르러 열심히 일함으로써 고용주의 눈에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이기까지의 전초 단계로 파악하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경제학자들이 그리고 있듯이, 젊은이가 고용주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설명에 한마디로 역겨움을 느낀다. 내가 어릴 적 우리의 어머니들이 딸들에게 시집 잘 가려면 곱게 차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던 과거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삶이란 고귀한 것이어서 취업시장에 나가기 위해, 또는 일생을 고용주를 위해 바치느라 허비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325쪽)

나는 경제학을 통해서 돈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배울 수 있었다. 지금 나는 은행을 운영하면서 돈을 융자해 주고, 또 이 융자를 통해서 우리가 거두고 있는 성공이 바로 회원들의 손에 쥐어진 구겨진 돈 때문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돈을 매개로, 돈으로써 이루어지는 우리의 소액 융자는 사실상 돈과는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무관한 것이다. 소액융자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돕는 것이다. 소액 융자는 우리 인간이 가진 꿈을 일깨움으로써, 가난한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 존엄성과 존중의 마음을 갖도록 만들고 스스로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377쪽)


무하마드 유누스가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덕택에 이 책도 잘 팔려나가게 생겼다. 이 책에 적혀 있는 유누스의 말과 생각과 실천에 대해 감히 토를 달고 싶지는 않다.
그는 방글라데시와 미국에서 경제학을 배웠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경제학’을 실천하기 위해 ‘내려갔다’. 예수가 사랑을 실천하러 밑바닥으로 내려갔듯이, 테레사 수녀가 인도의 빈민가로 내려갔듯이, 다니엘라가 탄광촌으로 내려갔듯이. 그곳에서 그는 진짜 경제학을 배웠다. 경제학은 왜 국가의 부와 고용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정작 가난에 대해서, 스스로 일하는 자립형 노동과 소경영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 것일까?
유누스가 세운 그라민(마을)은행은 ‘다른 은행들과 반대로’ 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의 은행’이 될 수 있었고, 세계은행을 가르치는 은행이 됐다. 유누스 본인의 말을 빌자면 그는 자본주의의 룰에 충실하려 애쓰는 인물이며 때론 미국 보수우익들의 주장과 상통하는, ‘가난한 이들에게 보조금 따위는 필요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동시에 그는 오늘날과 같은 경제학,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를 거부한다. ‘체제 안에서 밖을 지향하는’ 것이 유누스와 그라민 은행의 싸움인 셈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뭘 가르치려 하지 말고 돈을 주어라, 인간은 누구나 먹고 살 능력이 있다, 그러니 그들에게 작은 생산수단(돈)을 주고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라, 그들은 살아나갈 것이다 - 그라민 은행을 놓고 좌니 우니 하는 것을 따질 필요는 없다. 오늘날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게으름 탓이 아니라 ‘자본을 쥔 이들’ 때문임을 인정한다면 ‘당장 한 사람을 돕기 위해’ 나서야 한다. 한 사람을 도우려 나선 어느 경제학 교수의 실천정신이 한 마을을 살리고 세계 수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유누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소탈한 듯 하지만 사실은 본질을 꿰뚫고 있고, 그래서 (때론 순진해 보이기도 하지만) 희망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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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제국 - 어둠의 대국 러시아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에가시라 히로시 지음, 이정환 옮김 / 달과소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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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러시아에 관심을 좀 가져볼까 했는데 워낙 아는 바가 없고, 가장 걸리는 것은 푸틴이라는 인물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참 냉혹하게 생긴 인상이다. KGB 출신이라고 하고, 체첸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모스크바 극장 인질사건 때에는 자기네 국민들도 가차없이 희생시키고. 외신사진에 나오는 푸틴의 모습은 너무나 차갑고 뱀같고 유령같다. 최근 들어 ‘친숙한 모습’을 선보이려는지 어린아이와 사진을 찍고 무술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심지어 몇 달 전에는 네티즌들과 ‘웹 대화’까지 했다는데, 그래도 이 사람의 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인상을 한마디로 하면 ‘냉혹함’이다. 난 그 인상이 너무 싫고 무서워서 어떤 때는 푸틴 얼굴 사진으로 보는 것도 싫다. 정말 정내미 떨어지는 얼굴.
내 궁금증은 단순한 것이다. 그런데 왜 러시아인들은 푸틴을 좋아할까. 어째서 70% 넘는 지지율로 그에게 재선을 안겨준 것일까. 외신들로만 보면, 러시아 사람들은 푸틴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만 같다. 자기에게 대드는 기업인은 가차없이 체포해버리는 걸 보면 푸틴이란 작자, 민주주의 할 사람은 결코 아닌 것 같은데 국민들은 그를 좋아한다고 한다. 올리가키에 대한 반감 따위를 정치에 적절히 이용하고 국민들의 ‘강한 러시아’ 희구심리를 자기 인기로 전화시키는 놀라운 정치력의 소유자?

니혼게이자이신문 모스크바 특파원 출신인 저자는 이 책에서 옐친 정권 말기부터 2003년까지 러시아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난 이런 식으로 ‘눈으로 보는 것 같이’ 묘사하는 건 영 미덥지 않아 싫어하는데 이 책은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러시아 최근 상황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해놓은 것은 마음에 든다.
그런데 정작 푸틴에 대한 설명은 없다. 푸틴의 제국이라는데 푸틴은 어디에? 제목으로만 보면 이건 순 ‘낚시질’이다. 현재의 러시아를 ‘푸틴의 러시아(이 책의 영어제목)’로 부를 수 있을지 어떨지도 잘 모르겠다. 만일 러시아가 푸틴의 제국이라면, 그렇게 되는 과정은 현재진행형이고, 평가는 한참 뒤에나 가능할 것이다. 사실 이 책의 내용으로만 보자면 러시아는 푸틴의 제국이 아닌 '츄바이스의 제국'이다. 저자는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무명이었던' 푸틴이라는 자의 놀라운 정치적 성공의 비밀을 풀어놓는 대신, 1990년대 말 이래 러시아에서 벌어진 민영화와 관련된 이전투구, 그리고 푸틴 정권 내 이권다툼 같은 것들을 설명하는데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 핵심에 서있는 인물은 츄바이스와 베레조프스키다. 아쉽게도 이 책의 글쓴이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잘 하는데 '사람'을 설명하는 데에는 영 젬병이다. 결과적으로 푸틴도, 츄바이스도, 베레조프스키도, 내면의 동력을 들여다보며 생생히 캐릭터를 재구성해내는데 실패해 '신문기사 속 인물'의 수준을 거의 벗어나지 못한 꼴이 됐다.
내 궁금증은 풀어주지 못했지만, 어쨌든 적당히 저널리스틱하면서 재미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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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평전
찰스 펜 지음, 김기태 옮김 / 자인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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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이 책이 어디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것일까. 책꽂이에 꽤 오래, 적어도 몇 년간 꽂혀 있었다. 나는 그다지 공간이 넓지는 않지만 매우 너저분하고 뒤죽박죽인 내 책꽂이에서 적어도 이 책이 어느 위치에 놓여 있는지는 계속 파악하고 있었으니 그렇다면 최소한 내 관심권에는 있었다는 얘기인가. 아무튼 어디서 났는지, 돈 주고 산 것인지, 그랬다면 왜 샀는지, 누가 가져다준 것인지 통 기억나지 않는 이 책을 어제 꺼내들었다. ‘20세기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게 읽고 갑자기 동남아에 ‘꽂혀서’ 하늘색 가벼운 이 책, 그러나 가볍지 않은 한 인물의 일생을 담은 책을 펼쳤다.

“호치민의 인격이나 업적을 볼 때, 이상한 것은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티토주의는 있는데 호(치민)주의가 없다는 사실이다. 생애 마지막 한 시기에 그가 숭배의 대상이 되었을 때 호산나를 외친 것은 거의 대부분 젊은이였다. 젊은이는 충성심도 변덕스러웠나보다. 아마도 호치민은 ‘주의’와 어울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대표하는 것은 정치적 숭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철학적 개념이다. 더 나은 표현이 없어서 우리는 그의 공헌을 ‘호치민적인 것’이라 부르기로 한다.” (99쪽)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영국이 처칠을 따랐고 미국이 루스벨트를 따랐던 것처럼 베트남은 호치민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호치민은 베트남 국민에게 있어서 처칠이나 루스벨트보다 위대한 영웅이었을 것이다. 그는 귀족이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240쪽)


책은 가볍다면 가볍다. 호치민이라는 사람에 대해 나는 잘 모르고, 베트남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저자는 AP통신 기자였다고 하고, 2차 대전 때 미군 OSS(잘은 모르지만 ‘태백산맥’에서 김범우가 일했던, 그리고 최근 드라마 ‘서울 1945’에서 김호진이 분장하고 나온)에서 일했다고 한다. 저자는 호치민과 직접 접촉할 기회가 있었고, 베트남 문제에 직접 관여를 했었다고 하는데 책이 밀도가 있냐면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평전이라고 하는데 치밀하지 못하고, 그대신 문체도 내용도 소탈하고 재미있다. ‘평전’이란 걸 읽게 되면 책의 주인공이 주는 느낌과 전기 스타일이 겹쳐지는데 이 책에서 주인공은 저자를 그다지 압도하는 것 같지 않다. 어쩌면 ‘호아저씨’도 저자도 스타일-문체에서 똑같이 소탈하기 때문일까.
호아저씨는 어릴적 고향을 떠났고, 프랑스에서 공산주의를 접했고, 민족해방 투쟁을 벌였고, 베트남의 국가원수가 됐고, 전쟁 와중에 세상을 떠났다. 고난과 영광의 길이라 하기엔 그의 생생한 행보와 생각의 여정이 잘 나와 있지 않다. 저자는 호아저씨가 남긴 글이 마오쩌둥처럼 많지 않고 젊은시절 호아저씨에 대한 기록도 별로 없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아마 사실이겠지. 결국 호아저씨는 내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적어도 옷깃은 스친 것 같다. 베트남 사람들이 너나없이 그를 아저씨라 부르며 좋아했던 것처럼, 파리 사람들이 그에게 홀딱 반했던 것처럼 갑자기 나도 ‘호아저씨’가 따뜻하게 느껴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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