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레라 시대의 사랑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7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른 것도 다 비슷하겠지만, 책에도 궁합이란 것이 있다. 굳이 궁합을 따지자면 난 라틴아메리카쪽 소설하고는 그야말로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

지금 다니는 회사의 입사시험을 볼 때 논술 문제 1번이 ‘최근에 읽은 책 서평하기’였다. 나는 뭐든 안 가리고 좀 용감무쌍한 면이 있어서(바꿔 말하면 눈치가 없어서;;) 감히 보르헤스의 ‘불한당들의 세계사’에 대한 얼토당토 않은 감상을 주절거렸다. 과정은 생략하고, 어쨌든 결과적으로 나는 그 서평을 이쁘게 보아준 어느 분의 권력남용 채점 덕에 입사하게 되었으니 보르헤스에게 감사해야 하려나, 아니면 이런 일;;을 하게 만든 보르헤스를 원망해야 하려나.

어쨌든 보르헤스는 10여년 전 도식적이고 교조적인 생각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20대 초반의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20세기의 모든 사조(思潮)는 보르헤스에게서 나왔다고 하던가. 보르헤스에 열광했던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바벨의 도서관’이나 ‘아스테리온 집’, ‘알렙’ 같은 신화적 알레고리들에 빠져들고 마음이 허공을 떠돌고 그랬었다. 비록 정도가 좀 약해지긴 했지만 ‘보르헤스적 어휘’들을 대할 때마다 약먹은 듯 어지러워지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보르헤스 말고도 이사벨 아옌데의 작품들도 재밌었고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라든가 ‘거미 여인의 키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같은 중남미쪽 책들은 다 재미있었다. 하지만 보르헤스식 판타지를 제외하면, 역시나 압권은 가르시아 마르께스인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식의 이야기놀이가 싫다고 하는데 나는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것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서 아주 책을 꼭꼭 씹어먹거나 손에 돌돌 말아가지고 다녔으면 싶을 정도다. ‘100년 동안의 고독’은 정말 너무 좋아서 읽는 내내 환상 속을 떠다니는 듯했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사놓은 지 이태가 되도록 손을 못 댔지만, 한번 책장을 넘기게 되면 분명 숨죽이며 읽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대로였다. 굳이 말하자면 ‘100년 동안의 고독’ 같은 종류에 비해선 ‘마술적’ 보다는 ‘사실주의’에 더 방점이 찍혀있는 책이지만 사랑의 온갖 잔인하고 지저분하고 리얼한 단면들을 어쩜 이렇게 칼로 긁듯 묘사할 수가 있는 것인지.

나한테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소설은 언제나 마술이다. ‘콜레라 시대’라니, 이것은 정말 뒤통수를 치는 시대의 표현 아닌가. (콜롬비아로 여겨지는) 어느 항구도시의 냄새나는 거리, 콜레라로 상징되는 한 시대의 스케치는 생생하다 못해 처절하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멋진 소설이었다.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인’ 소설이라 하는데 그 평가에 대해선 뭐라 말하진 못하겠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07-02-01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란 제목이 제게는 너무나 어렵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감히 읽어볼 시도 조차 못하고 있었거든요. 딸기님, 저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도 아니고 평범한 소설만 골라 읽을정도로 편식이 심한데, 이 책 어렵지는 않나요? 딸기님의 리뷰를 보니 읽고싶어져서 말예요. :)

이네파벨 2007-02-01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의 리뷰들이 저에겐 마술입니다.
어쩜 그리 꼬오오옥~ 읽어보고싶게 리뷰를 쓰시는지요.
빨리 하던 일 마무리하고...책 붙들고 딍굴고 싶네요,

딸기 2007-02-01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이 책 어려운 책 전혀 아니예요. 한 남자와 한 여자, 혹은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이야기인데요, 그냥 쭉쭉 읽어나가면 돼요. 저도 제목이 좀 무거워서... 죽음의 냄새가 나거나 그런 것 굉장히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마음 다잡고 읽었는데 그런 음침한 내용은 아니었어요 ^^
이네파벨님, 제 리뷰가 마술이라니요! 이네파벨님이야말로 제가 못 보고 안 보는 책들 많이 읽으시자나요. 이 책은 아무튼 재미있었어요. :)

마노아 2007-02-02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리뷰 너무 맛깔스러워요^^

딸기 2007-02-03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저거 읽어보세요. 재밌어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
아룬다티 로이 지음, 정병선 옮김 / 이후 / 200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위기가 소비되면서 닳고 닳아버리는 것보다 더 슬픈 일도 없습니다.(그런 사례를 확인하려면 2002년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과 인도의 구자라트 주를 보십시오.)

위기 보도는 우리에게 이중의 유산을 남겨주었습니다. 정부들이 위기관리의 기예(위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기술)를 갈고 닦는 동안 저항운동 진영은 계속해서 위기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일종의 혼란스런 함정에 빠지고 있습니다.

... 스펙터클로서의 위기가 오랜 전통을 가진 진정한 시민 불복종의 원리와 단절하고, 점차로 실질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인 저항의 도구로 변해가고 있다는 점이 오늘날의 고민입니다. ... 저항운동과 정당의 선거 캠페인이 모두 스펙터클을 좇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추구하는 스펙터클의 종류가 무척 다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13~15쪽)


부시 때리기는 재미있다. 그가 쉽고도 그럴싸한 표적이기 때문이다. 그가 위험하고, 거의 자멸의 길로 가는 조종사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부시라는 인물 자체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은 그가 조종하는 기계이다. (44쪽)


민주주의가 얼마나 위기에 처해 있는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당대에 민주 정체 국가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세계 최대 규모의 민주주의 국가는 인도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흥미로운 민주주의 국가는 남아프리카공화국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민주주의 국가는 미국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교훈적인 사례, 온갖 계획들이 시도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는 이라크입니다. ... 제국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60~61쪽)


민중의 권리가 공격당할 때면 여러분은 언제나 그들과 연대해 왔습니다. 그들이 여성이든 아이든, 박해받는 시크교도든 무슬림이든, 노동자든 관개용수를 거절당한 농민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인간성에 대한 예민하고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감각이 다가올 시대에 우리의 무기가 되어야 합니다. ...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우리의 들판, 가정, 강, 일자리, 기간 시설, 자연자원을 강탈하는 행위가 동일한 과정의 산물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86~87쪽)


부커상 수상작인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이 번역돼 나왔을 때 어쩐지 끌려서 사놓고 결국 못 읽은채 책은 어디론가 없어져버렸다. 그 뒤 몇 년이 지나면서부터, 로이의 이름은 점점 더 자주 들려오기 시작했다. 세계화의 횡포에 반대하는 투사,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운동가, 다보스 포럼에 맞선 빈자들의 세계운동 ‘세계사회포럼(WSF)’에 참석하는 대표적인 지식인 등등. 로이의 이름에선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는 로이의 강연과 기고문들을 모은 것인데, 그동안 외신에서 많이 보았던 사건들과 이슈들로 되어 있어서 내 입장에선 읽기 편했고 되새김질하는 재미도 있었다. 날카롭다. 내 친구 누구는 반다나 시바와 아룬다티 로이가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두 사람’이라고 한 적 있다. ‘인디라 간디가 저 세상에서 웃겠다’고 말하고 넘어갔는데, 아무튼 로이와 반다나 시바의 이름은 따로 떼어놓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이 책은 모음집이라서 반다나 시바의 ‘자연과 지식의 약탈자들’ 같이 하나의 사상체계-대안의 세계관으로서 정리가 잘 되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통렬하면서도 힘이 있어서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인슈타인의 베일 - 양자물리학의 새로운 세계
안톤 차일링거 지음, 전대호 옮김 / 승산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약 200년 전에 영국의 영(Young)이라는 과학자는 빛이 ‘파동’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두개의 좁은 틈으로 빛을 비추어 물결무늬 그림자를 보여주는 ‘이중 슬릿(틈새)’ 실험을 생각해냈다. 이중슬릿은 과학책을 한두 번이라도 들춰본 사람이라면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현대물리학에서 빠지지 않는 획기적인 실험이었다.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이중슬릿 실험을 여러 용도에 응용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빛은 입자(광자·光子)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파동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언제 입자가 되고 언제 파동이 되는 것일까? 우습게도 빛은, 이중슬릿을 관찰하는 내가 광자의 위치를 알고 있을 땐 입자처럼 행동하고, 모르고 있을 땐 파동처럼 행동한다! 놀랍지 않은가? 빛이 내가 지켜보는 것을 어떻게 알고 내 눈길에 따라 행동방식을 바꾼단 말인가.

과학자들에게 가장 유명한 고양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것이 있다.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듣기에 따라선 좀 잔인하게 생각될 수도 있는 실험 하나를 제안했다(어디까지나 생각과 논리만으로 이뤄지는 사고실험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상자 안에 고양이를 가두고 스위치를 눌러, 상자 속 방사능 폭발장치를 가동시킨다. 스위치를 누른 순간 폭발이 일어날 확률은 50%. 스위치를 누르고 5분 뒤에 당신은 상자 뚜껑을 연다. 고양이는 살아 있을까 죽어있을까?

고양이의 운명은 5분 전에 결정됐지만, 당신이 뚜껑을 열 때까지 5분 동안 고양이의 생명은 ‘결정돼 있지 않다’. 과학자들은 고양이의 생사를 ‘파동함수’로 표현을 한다. 그들의 어법을 빌자면 5분 동안 파동함수는 ‘중첩’돼 있는 것이 된다. 바꿔 말하면 고양이는 ‘살면서 또한 죽어있는’ 것이다. 고양이의 생명을 가르는 파동함수는 당신이 상자를 여는 순간에야 비로소 고정되는 것이다.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는데, 양자물리학자들 버전으로 바꾸면 “내가 그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을 때 그는 내게 와서 실재(實在)가 되었다”가 된다.


그저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다. 살고도 죽었다니, 내가 쳐다보는 순간 정체를 바꾸는 빛이라니. 내가 가진 정보가 물질세계를 규정한다고 하니, 이만저만한 유아론(唯我論)이 아닌 셈이다. 정보가 실재를 만든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기 힘든 소리다.

때로 현대물리학은 직관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 아인슈타인의 베일 뒤에 가려진 양자의 세상은 우리의 직관, 상식을 완전히 던져버리기 전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공간이다.

안톤 차일링거

안톤 차일링거는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에서 일하는 유명한 물리학자다. 비엔나대학 실험물리학연구소는 현대물리학의 선조 격인 루드비히 볼츠만과 에른스트 마흐, 앞서 말한 고양이의 냉정한 주인 슈뢰딩거가 여기에서 연구를 했다. 차일링거 박사의 연구팀은 실험을 통해,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공상과학소설의 단골 소재인 순간이동이 가능함을 입증해보였다. 방법은, 여기 있는 양자의 ‘정보’를 저리로 옮겨 일종의 재생을 하는 것이다.
차일링거는 우리가 가진 세상을 정보가 결정한다는 주장을 넘어, 정보가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 단위로는 비트(bit)를 개량(?)한 ‘큐비트(qubit)’이라는 것을 제안한다.

여기 이 입자는 내가 측정하기 전에는 여기 있지 않았다. 여기 이 고양이는 내가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정보가 곧 세계이다. 고대인들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에테르(ether)라는 물질이 둘러싸고 있다고 믿었다. 현대 과학자들은 자기장, 전기장 같은 장(場)들이 세상을 감싸고 있다고 말한다. 차일링거는 에테르와 장을 ‘정보’로 바꾸었다.

‘정보 환원주의’라는 비판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빛이나 전기, 자기, 에너지처럼 지금은 잘 알려진 것들도 예전엔 미지의 것들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저런 개념들이 물질세계를 지배하는 존재로서 과학의 영역에 들어온 것은 몇 백 년 동안의 일이다. 비트, 디지털 같은 말들이 우리 귀에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불과 수십 년 간의 일일 뿐이다.

양자의 세계로 들어가면 우리의 일상이 펼쳐지는 ‘뉴턴적(的) 공간’의 물리학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이 작고 미묘한 세계에서 실재성(實在性)이나 객관성은 너무나 취약한 개념들이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이후 물질세계에서 절대적인 것, 객관적인 것은 사라져버렸다. 양자들의 세계는 측정불가능하며, 확률적인 정의만이 가능한 세계다. 그곳은 불확정성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 세상의 천재과학자들마저 아연케 만드는 당혹스러운 공간이다. 관측자가 가진 ‘정보’가 관측 대상과 피드백을 해 존재의 조건을 바꾸는 것이 양자들의 세상인 것이다. 차일링거의 ‘정보’가 세상의 구성요소로 격상될 순간이 오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재미있다. 원래 양자역학은 어려운 법이다.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아인슈타인도, 리처드 파인만도 양자역학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다. 책에서 차일링거는 양자역학의 기본개념들을 재치 있게 설명한다.
차일링거가 보여주는 탁월함은 어려운 개념에 대한 쉬운 설명들과 ‘정보 물리학’에 대한 통찰력을 넘어서, 철학적 질문들로 향해갔을 때 빛을 발한다. 정보가 실재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스무고개 같은 간단한 사고실험 등을 통해 보여준 뒤, 차일링거는 과학과 철학의 전면적인 만남을 시도한다. ‘정보는 물질세계의 근본이다’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세계관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책의 후반부는 양자역학의 주요 개념들이 어떻게 철학적 질문들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데에 할애돼 있다.

 

“우리는 많은 것이 아직 불분명하고 몇 가지 매우 중요한 질문이 아직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실재와 정보를 포괄하는 개념의 본성에 대한 질문, 즉 앎의 본질에 대한 질문도 그런 질문들 중 하나이다.”


양자물리학을 흥미진진하게 풀어놓은 것을 보면 차일링거는 물리학자이자 철학자이면서 작가적 역량 또한 탁월한 사람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같은 시기에 출간된 ‘과학의 새로운 언어, 정보’ (Information - The Language of Science. 승산)는 미국 물리학자 한스 크리스천 폰 베이어가 차일링거의 연구와 아이디어에 감복해 내놓은 ‘정보 물리학 소개서’다. 이 책을 먼저 읽고 ‘아인슈타인의 베일’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쟈 2007-01-29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보관함에 집어넣습니다.^^

깍두기 2007-01-29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깍두기 2007-01-29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보>책이 더 쉬우니 먼저 읽으란 말씀인가요?

딸기 2007-01-30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읽어들 보시면 재미있을 거예요. 저도 과학책 읽으면 한개도 이해 못하지만 재밌거든요 ^^ '정보'라는 책은 사실 영양가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정보' 먼저 읽고 '아인슈타인의 베일'을 읽었는데, 하나를 골라서 읽는다면 당연히 후자쪽을 읽어야 할 것 같고, 시간과 돈이 있으시면 ^^;; '정보' 먼저 읽고 '아인슈타인의 베일' 읽으셔도 괜찮고요. 순서를 거꾸로 하면... 뒤에 '정보'를 읽는 것은 시간낭비가 될 것 같아요.

이네파벨 2007-01-30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진진한 리뷰네요...퍼가도 되죵?

딸기 2007-01-30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그니죵~

책읽기는즐거움 2007-03-29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는데, 양자물리학자들 버전으로 바꾸면 “내가 그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을 때 그는 내게 와서 실재(實在)가 되었다”가 된다.


딸기 님께서 만드신 비유이신가요?
제 생각에는 정말 괜찮은 비유라고 생각되요.
깔끔하게 정리해 주시는 센스가 느껴지는 걸요ㅋ
좋은 책에 대한 정보도 얻고
좋은 글도 잘 읽고 갑니다^^

p.s)아, 참 생각해 보면 출판사 '승산'은 과학을 대중들에게 알리는데
정말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아요. 위 두 책도 승산 출판사 꺼내요
제가 수학과학관련 도서 관심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승산이라는 이름이 저절로 외워지기까지 했다는ㅋ
(박병철이라는 분도요ㅋ 제 입장에선 다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에요ㅋㅋ)
 
국민이라는 괴물
니시카와 나가오 지음, 윤대석 옮김 / 소명출판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일본의 노학자가 근대를 말한다. 일본을 말한다. 한국을 말한다. 책 중간 중간은 ‘문명’과 ‘문화’에 대한 개념적 설명, 프랑스에서 탄생한 근대가 일본에 와서 어떻게 변용됐는지 등을 밝히는데 좀 어렵고 그렇게 재밌지도 않다.
하지만 책 전반을 흐르고 있는 것은 그런 구체적인 부분들이라기보다는, ‘반성’과 ‘통찰’이어서 읽는 내내 감동이 있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저자는 말하자면 극도의 반골인데, 이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는 일본 사회가 참 건강하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맥락은 좀 다르지만 마루야마 마사오의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에서 보이는 것 같은 통찰력과 깊이, 역시나 얘기가 좀 다른 것 같기는 하지만 마루야마 겐지의 ‘천년 동안에’에 드러난 것 같은 전체주의적 속성에 대한 근본적인 거부, 그리고 후지따 쇼오조오의 ‘전체주의의 시대경험’에서 같은 치열한 고뇌와 의식 같은 것들 말이다. 구글을 찾아보니까 저자는 전공인 프랑스 문학에 대한 책이나 번역서도 많이 냈고, 요사이는 전체주의·군국주의 흐름을 비판하고 국민국가론을 반성하는 글들을 아주 활발하게 쓰고 있는 모양이다.


“만약 유·소년기를 보낸 장소를 고향이라고 부른다면 저의 고향은 틀림없는 조선입니다. 저는 이미 대학에서 정년을 맞이한 노인이지만, 유·소년기를 보낸 땅에 대한 기억은 해가 갈수록 선명하게 되살아나 향수에 빠지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한편 저는 가혹한 식민지 지배에 종사한 군인의 자식이고 저의 유·소년기에 대한 기억도 그러한 침략의 역사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전후 한국으로의 도항이 가능해진 후에도 저는 오랫동안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습니다.”


“이 책을 비롯한 저의 국민국가 비판을 단순히 이론과 학문적 담론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국민국가 비판은, 제 자신의 전쟁 체험과 전후 체험의 일체, 즉 지금까지의 전생애와 그 전생애를 좌우했던 것에 대한 반성과 분노에서 나온, 말하자면 통한의 담론입니다. 만약 패전이 없었다면 저같은 교육을 받았던 애국소년은 그대로 용감한 병사가 되고, 여전히 무자각적인 제국주의자, 식민주의자가 되어있을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에 반하는 가정은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특히 전쟁 기간에 세계의 국민국가는 그와 똑같은 애국소년, 아니 더욱 비참한 애국소년을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국민국가론은, 근대 이래 각국이 내세운 국민국가라는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민국가 이데올로기에 어쩔수 없이 포위되어 의도적이든 원치 않든 간에 거기 맞춰 사고를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사람들, 이른바 ‘국민’들의 문화적, 사회적, 제도적 환경 모두를 총체적으로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국민 모두를 꽁꽁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보통의 의식과 훈련으로는 되지 않는다.

저자 스스로도 1960년대까지는 민족문제를 낙관적으로 보았다고 한다. “한국 중국 대만 혹은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된 나라의 민족주의와 국민국가 형성에 기대를 걸었고 그 나라들의 미래를 믿었던” 것.

하지만 이런 기대는, 바로 그 나라들에서 독재정권이 판을 치고 식민시대나 마찬가지로 민중들이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을 보면서 바뀌었다. 문제의 원인은 특정 국가의 식민지배에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국민국가’라는 시스템 자체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저자는 말한다. ‘반둥회의의 찬란했던 이미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저들의 독재정권과 일본 제국주의 정권의 본질적인 차이는 그럼 뭐란 말인가. 일본의 과거를 반성하고 주변 신생 ‘국민국가’들의 승리를 기원했던 나는 어디에서 정당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나도 일본이 일으킨 것은 침략전쟁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져야 할 책임을 생각한다. 그러나 어떠한 반성과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일본 국민으로서의 자랑’과 ‘긍지’를 되찾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일본 및 일본국민과 동일화시키면서 무엇을 말하고 행하는 것만은 그만두자는 것이 내가 전쟁에서 배웠고, 전후문학을 읽으면서 키워온 생각이었다.”


전후 일본에서 천황은 온국민이 같이 과거를 참회하자고 했다. 자기 죄를 왜 국민이? 몇몇의 죄를 왜 국민이? 국민으로서 사죄하는 순간, 국민은 천황과 제국주의 세력의 공범이고 동반자이다. 동시에 천황과 제국주의 세력의 죄는 희석되고 사라졌던 것이 전후 일본의 희한한 과거사 청산 메커니즘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저자가 “국민임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반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간다.


“홉스와 마르크스 덕분에 우리들은 국가를 괴물(Leviathan)로 그려내는 데에는 익숙하다. 그러나 ‘국민’도 또한 무서워해야 할 괴물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저자의 국민국가론이 ‘국가에 대한 거부’를 담은 적잖은 시각들과 구분되는 것은, 국민들을 국가주의의 희생양이나 피동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민이길 거부하지 않는 한, 너도 나도 언제든 천황의 신민이 될 수 있고, 월남의 한국군이 될 수 있고, 이라크의 미군이 될 수 있다. 거부하지 않는 한 너와 나는 언제나 괴물이 될 수 있다!


사람을 괴물로 만드는 ‘국민화’ 작업을 가리켜 저자는 ‘국가가 사람을 회수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과정은 실로 우리를 똘똘 감싸고 있다. 사람은 문화에 의해, 문학과 예술에 의해, 가족과 학교로 인해, 출생신고와 호적·신분·학력에 의해, 과학과 모든 학문을 통해, 때로는 종교에 의해, ‘국민’과 ‘민족’과 ‘대중’의 개념을 통해, 텔레비전과 신문과 모든 정보를 통해, 스포츠를 통해, 만국박람회와 축제와 모든 이벤트를 통해 국가로 회수된다. 또한 사람은 생활과 노동의 장을 통해, 질병과 범죄 혹은 그런 것에 대한 공포심을 통해, 복지국가의 개념을 통해 국가로 회수된다.


“심지어 사람은 반체제운동을 통해서도 국가로 회수된다. 자발적인 반체제운동 자체가 시간이 흐르면 차차 체제화되어 간다. 모든 반체제운동은 그것이 국가권력의 탈취를 목적으로 삼는 한, 국가권력을 통해 자기의 주장을 실현하려고 하는 한, 즉 또 하나의 국가를 지향하는 한 마지막에는 체제화되어 국가로 회수된다. 사람은 전쟁의 비참한 기억을 통해, 전쟁 희생자의 고통과 히로시마·나가사키·오키나와를 통해서조차, 평화운동을 통해서조차 국가로 회수된다.”


그럼 대체 어쩌란 말인가! 저자의 말마따나, 모든 사람을 국민으로 만들어 국가로 회수하는 것이 곧 근대의 역사이고 우리들 국민의 역사였다. 시작은 역시 작은 것, 그러나 변증법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국민국가는 실로 교묘하게 만들어진 인공적 기계이고 그것의 강제력은 압도적이지만, 우리들은 국가로 회수되는 순간에도 반드시 전면적으로 회수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위화감과 반발심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민통합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은, 국민국가의 틀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1060년대, 70년대, 80년대, 90년대를 지나면서 일본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다양한 흔들림이 있었다. 비록 국가와 국민이라는 두 가지 괴물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뒤집으려는 의도는 없었다 해도 말이다.

출발은 국민을 ‘상대화’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스스로 탈국민화를 도모하여 국가를 상대화하는 것은 실은 아주 곤란한 작업입니다. 우리들은 이미 사고도 감성도 항상 국민화되어 있기 때문에, 가령 우리들이 말을 하면 그것은 바로 국어이고, 대부분의 경우 국가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의 상대화는 국민의 상대화이기도 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국민으로서의 ‘나’와 ‘나’의 상대화가 문제시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국민국가가 흔들리고 있는 시대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 국가 이데올로기에서 가능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궁리와 노력을 하는 것, 우리들이 국가로 회수되는 무수한 회로를 응시하고 그 회로에서 몸을 빼기 위해 애쓰는 것, 그 지점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착취와 차별에 대해 가능한 이의를 제기하는 것. 국민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나의 자유를 위한, 정의를 위한 것이다!


이런 책을 읽고 나면 항상 나를 좀 반성하게 되는데, 나의 반성은 그리 치열하지는 않다. 국민이기는 참 싫다, 하는 정도로, ‘남쪽으로 튀어’ 같은 소설을 읽으면서 대리만족을 하고 또 이런 책을 통해 존경심과 감동을 느끼게 되지만 실제로는 이 돌돌 말린 회로에서 벗어날 방법을 진지하게 찾지는 않는다. 그래도 궁리는 해야 하고, 적어도 싫어하고 반발심을 갖고 멍청하게 끌려 다니지 않아야겠다, 하는 생각을 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냐 2007-01-16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글러스 러미스던가. 엄청난 반인륜행위들이 '국가'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고..실상 가장 못된게 '국가'군 했던 기억이...
그나저나 일본 사회는 건강한걸까? 누군가 "일본의 검찰은 불임검찰"이라고 하더군.권력유착형 정권 비리를 제대로 수사해본 적이 없다나. 그건 일본이 단 한번도 정권교체를 해보지 않은 탓이라고 하더라구. 참 신기한 나라. 실정을 하고 그릇된 우경화에도 절대 정권이 바뀌지 않는 나라. 건강한 사회, 배울 점 많을 사회일 수도 있지만..일본은 신기해.

딸기 2007-01-16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어, 맞어. 정말 신기해... 배울게 많긴 한데, 저렇게 되고는 싶지 않은 나라라고나 할까...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 지음, 김호동 옮김 / 사계절 / 200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버트 카플란의 책이 연말 거의 다 읽고 몇장 안 남은 상태였는데, 그래도 한 해의 첫 시작을 카플란 책으로 하기엔 좀 그렇다 해서 굳이 남겨두고 이 책을 읽었다. 작년부터 읽어야지 했다가 이제야 손에 넣고 책장을 넘겼는데 의외로(아니 어쩌면 예상대로)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다.

서문에서 역주를 단 김호동 서울대 교수가 이 책의 ‘원본’을 충실히 설명해놓았고 각주도 열심히 달아 읽는 데에 많이 도움이 됐다. 베네치아를 영어식으로 베니스라 한 것은 역자가 영어판본을 번역한 탓인 것 같고, 각주에 계속 km가 아닌 마일 단위가 나오는 것도 그 탓인 듯. 이런 책을 애써 펴낸(더불어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까지 옮겨냈던) 김호동 교수에겐 박수를 쳐드리고 싶은데, 각주에서 마일 단위 나오는 것과 한자 한글발음 병기 안 한 것 때문에 읽으면서 아주 조금 불편했다.


원제목은 ‘Divisament dou Monde’ (세계의 서술) 이라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방견문록’이라는 터무니없는 이름이 된 것이 지금도 우리에겐 그렇게 인식돼 있다고 한다. 책의 내용을 보면 ‘동방견문록’ 해도 영 틀린 것은 아니지만 원제대로 좀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예 번역자가 ‘세계의 서술’로 못박아버렸다면 조금은 바로잡기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역자가 지적한대로, 첫째 유럽인의 눈으로 본 유럽 이외의 모든 세계(유럽인들이 신대륙에 가기 이전)를 담겠다는 것이 저자의 의도였고, 둘째로 ‘동방’이라 하면 중국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 책은 멀리 아프리카 일부지역과 러시아, 북극 가까운 곳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 책은 폴로가 감옥에서 구술(口述)했다고 하는데 책의 세세한 부분까지 따지면 진위논쟁이 있는 것들이나 불명확한 부분이 한둘이 아니니 전공자가 아닌 나로서는 그냥 그런가보다 할 따름이다. 구술한 것 치고는 너무 상세하다는 점도 폴로의 정체(?)를 의심하는 학자들 사이에선 하나의 논거가 되었다고 하는데, 어쨌건 이 책의 재미는 바로 그 디테일함에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전체가 다 디테일이다 - 대단한 통찰력을 담은 서술이라기보다는, 건조하게 세부사항들을 아주 꼼꼼히 다룬 책이라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그 중엔 저자가 직접 다녀본 곳에 대한 설명도 있고, 전해들은 것들도 있다. 오늘날의 투르크와 이란, 중앙아시아, 중국 북부와 서남부, 동남부, 인도양 섬들과 인도를 거쳐 소말리아의 모가디슈와 오늘날 탄자니아의 잔지바르(예전엔 ‘인도 영향권’이었고 지금도 그러한) 같은 아프리카 동쪽 해안지대까지, 여러 지방과 도시의 독특한 풍물을 담고 있다.

그런데 수십년에 걸쳐 이 넓은 곳을 다니면서, 언급하는 지역에 대해 짤막짤막하게나마 위치와 거리, 인구, 경제력, 생계 수단(직업), 천연자원과 동식물, 정치구조 같은 것을 빼곡하게 실었다. 구술 형식 탓인지 중세 유럽풍인지는 몰라도 폴로라는 이의 말을 받아적는자가 듣는 이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돼 있는데, 그렇게 ‘이야기’로 치기엔 너무 방대하고 너무 건조하다. 여행담이라기보다는 지리서나 박물지에 가깝다. 팩트들을 기록해 남기겠다는 의무감과 사명감을 갖고 정리를 해놓은 듯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책의 재미는 바로 그런 것들이다. 여러 지역에 대한 폴로의 ‘느낌과 생각’ 같은 것을 찾으려 했는데, 기독교도로서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이슬람(사라센인들)에 대한 비하와 경멸의 표현 같은 구태의연한 것들 말고는, 사적인 감상이 너무 적다. 그 대신 당대의 이방인들 눈에 신기하게 비쳤을 생생한 풍물들이 나와 있어 그걸 보는 재미가 컸다.

바우닥(바그다드)과 바소라(바스라), 이스파안(이스파한), 타우리스(타브리즈), 야스드(야즈드)와 케르만, 소금산과 발크(발흐), 사마르칸(사마르칸드), 탕구트, 카라코롬, 그리고 모게다쇼(모가디슈)와 찬기바르(잔지바르)까지. 너무나 너무나 가보고 싶은 곳들이어서, 그런 지명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남아시아인들이 말하던 루크(로크) 새 이야기가 여기 나온 것도 반가웠다(이 새에 대해서라면 난 정말 관심이 많은데). 일본 지브리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면’에 나오는 ‘라피스 라즐리’라는 돌이 이란 북부 바닥샨에서 나는 청금석이란 사실은 처음 알았다.



“조르지아(그루지야)인들과의 경계에 있는 한 샘에서는 100척의 배에 한꺼번에 실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기름이 뿜어져나오지만 식용으로는 좋지 않다. 그러나 불이 잘 붙고, 가려움병이나 옴이 붙은 낙타에게 발라주면 좋다. 사람들은 아주 멀리서부터 이 기름을 구하기 위해 오고, 근처에 있는 모든 지방들에서도 이것 말고는 결코 다른 기름을 태우지 않는다.” (104쪽)


“카타이 지방 전역에 걸친 산지의 광맥에서 캐낸 검은 돌의 일종이 장작처럼 탄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돌은 나무보다도 더 잘 탄다. 더구나 여러분에게 말하건대 저녁에 불을 잘 붙여놓으면 이 불은 밤새도록 계속되고 더러는 아침까지 가기도 한다. 장작과 같은 나무도 충분히 있지만, 카타이 전역에서는 이 돌들이 태워지고 있다. 이 돌들은 엄청나게 많은 양이 존재한다. 그들이 이 돌을 때는 이유는 비용이 적게 들고 나무를 많이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284쪽)


중앙아시아의 석유와 중국의 석탄 이야기. 그 시절부터 그랬었구나 생각해보니 이것도 재미있다. 악어를 보고 ‘입이 엄청나게 큰 무섭고 커다란 뱀’이라 한 것이나 호랑이를 ‘얼룩무늬가 있는 커다란 사자’라고 한 것 등등 웃음 짓게 하는 구절들이 많았다. 암살단(아싸신)을 얘기하는 ‘산상의 노인’ 편은 여러 책에서 접했었지만 여기서 보니 또 재미있다. 용연향 정향 침향 사향 등등 여러 향료에 대해서는 좀더 자료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나 더 기억에 남는, 인도네시아 ‘소자바’(수마트라섬) 페를렉 왕국 이야기.


“그들은 여러 가지를 숭배하는데, 아침에 일어나 처음 눈에 띄는 것을 숭배한다.”


마음에 든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야겠다. 아침에 일어나 처음 눈에 띄는 것을 숭배한다! 나는 내 가족을 숭배하고 새벽공기를 숭배하고 지하철5호선을 숭배하고 이 도시와 나의 삶을 숭배하리라! 이것은 새해 첫 책으로 선택해준 데에 감사하며 폴로가 나에게 주는 한해의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