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와 베네수엘라 그리고 21세기의 혁명
조지프 추나라 지음, 이수현 옮김 / 다함께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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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책인데... 알라딘에서 주문하면서 정가가 2000원 밖에 안 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받아보니 예상대로 책이라기보다는 팜플렛이다. 내 손바닥 2.5배 작은 크기에 60쪽 분량. 책의 거품이 너무 심하다보니, 이런 팜플렛도 하나의 방식이고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박노해 선생님네 나눔문화에서 요새 ‘팜플렛운동’ 하던데 다시 팜플렛이 유행이런가.

한국 언론들이 앞다퉈가며 차베스라는 인물을 별종으로 만들어 희화화하는데 과연 그렇게 볼 일인가. 이 팜플렛은 너무 예찬 위주여서 오히려 신뢰도가 떨어지는 면이 없지 않지만, 차베스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나름의 확신과 ‘21세기 사회주의 실험’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놓았다는 장점이 있다. 신문에 많이 나오는 차베스가 어떤 인물인지, 뭐하는 사람인지, 미국놈들이 욕하듯이 진짜 형편없는 인간인지 궁금하긴 한데 그렇다고 아주 자세히 알 필요는 없겠다 싶은, 그저 신문기사보다 조금 더 알고싶은 정도인 사람들에게는 딱 알맞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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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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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유명하고 중요하고 의미 있는 책이라, 뭐라뭐라 끄적일 만한 의견 따위 있을리 없고.
다만 생각보다 재미없었다는 점, 그래도 늦게나마 읽기는 잘했다는 점. 18세기 이래 유럽의 오리엔탈리즘을 주로 중근동에 대한 유럽의 문헌들을 바탕으로 다루고 있는데, 저자 자신은 ‘중근동 이외의 지역으로 범위를 넓혀봐도 마찬가지다’라면서 오리엔탈리즘을 굉장히 폭넓게 정의하고 있다.

 

읽는 동안 지겨우면서도 감동을 좀 하면서 책장을 넘겼는데 머리 속에 이 생각 저 생각 많이 떠올랐지만 정리를 못했다. 첫째 유럽이 중동/아시아 말고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를 대해온 태도도 ‘오리엔탈리즘’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아니면 다른 틀이 필요한 것인지), 둘째 ‘서발턴은 대신 남의 입을 빌려서는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식의 비판에서 사이드 스스로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점(나는 서발턴이 대리인들의 입을 통해서라도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셋째 오리엔탈 세계의 일원인 한국 사람으로서 서양에서 베껴온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치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 등등의 문제가 머리 속에 좀 남는다. 책에선 셈족과 관련된 서양인들의 인식을 주로 추궁하는데 안티세미티즘이 오히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에서 이스라엘의 무기로 악용(?)되고 있는 현실도 의미심장하다는 생각.

첫 번째 문제는 아무래도 요즘 내 관심사가 중동보다 아프리카 같은 곳으로 많이 가 있다 보니 “아시아 특히 중동에 대해선 이런 얘기라도 나오지만 아프리카는 완전 죽은 땅 취급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유럽이 유사 이래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해야 했던 중근동 말고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같은 경우는 아예 짐승 취급하며 노예로 삼고 더 몹쓸 짓을 많이 했는데, 유럽이 아프리카, 아메리카에 대해서는 사이드가 말하는 것 같은 ‘타자화’ 하는 과정조차도 불필요하게 여겼던 것이 아니었을까.

두 번째는 사이드가 중동의 이야기를 하는데 워낙 출신 성분이 엘리트이다보니깐... 늘 나오는 비판의 일종인 것이고. 세 번째는,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서 역시 우린 고민이 너무 적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뜬금없는 소리인지 모르지만 유전자 결정론 내지 ‘종족/민족/인종 환원론’이 워낙 많다는 것. 그런 것들 어떻게 해야 고칠수 있나 우리나라 학자들도 고민을 많이 해야 하지 않을까...

 

번역과 관련해서 할말이 좀 있다.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는 책이고, 번역자도 열변을 토해가며 오리엔탈리즘 내지는 한국인들의 서구지향성을 비판하는데... 고유명사 표기 자체가 오리엔탈리즘적이다. 마호메트, 아라비아어, 우마이어, 가자 서해안, 아브델 마레크, 우르만, 만수어, 플로벨... 인내심을 요하는 이런 표기들이 거듭된다는 점. 역자가 열성을 다했긴 했는데 아무래도 아랍 중동 이쪽에 대해선 잘 모르는 분인 탓인 듯. 이 분이 번역한 책을 전에도 읽은 적 있지만 의지와 문제의식은 칭찬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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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3-26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도 언젠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던 책인데.. 페이지의 압박때문에 계속 미루고 있습니다. 후-

마늘빵 2007-03-26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좋은거 자꾸 올려주시면 보관함 무게가 ...
 
실험실 지구 - 스티븐 슈나이더가 들려주는 기후 변화의 과학 사이언스 마스터스 10
스티븐 H.슈나이더 지음, 임태훈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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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북스의 ‘사이언스 마스터스’ 시리즈 10번째권이다. 이 시리즈 목록을 보면 1권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섹스의 진화’, 3권 폴 데이비스의 ‘마지막 3분’, 4권 리처드 리키의 ‘인류의 기원’, 6권 수전 그린필드의 ‘휴먼 브레인’, 7권 리처드 도킨스의 ‘에덴의 강’ 이런 식으로 돼 있다. 과학책 몇권이라도 들춰본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명사급 필진들의 책들이다. 그런데 ‘마스터스’라고 하기엔 좀 뭣하고, ‘유명한 과학자 누구누구의 짧지만 중요한 글’ 거의 이런 식인 것 같다. ‘실험실 지구’를 보면 조그만 판형에 듬성듬성 큰 글씨, 줄간격 늘리고 뒤아래 양옆 공간 넓게 쓰는 플레이 하면서 300쪽에 1만3000원... 하드커버가 아깝다는게 바로 이런 경우다.

스티븐 슈나이더는 여러 종류 책에 언급되는 나름 유명한 인물이니까 교양;; 삼아 기후학 공부하는데 밟아야할 다리를 밟는다 생각하고 읽었다. 사실 기후 문제, 지구온난화 문제 알아보려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기본’은 항상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거니까 읽고 나서 시간 아깝지는 않았다.


사실 책은 훌륭하다. 그런데 책이 나온 시점이 1997년이니 10년 지났고, 이 분야 연구들이 어제오늘 다르게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감안하면 좀 뒤떨어진 감이 없지 않다. 그런 점에서는 고전이라 부를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기후변화의 그것이 가지는 생태학적 의미를 살피되, “환경과 경제 사이의 균형잡기라는 ‘현실적인 맥락’에서 지침을 얻어낼 것”이라고 머리말에서부터 못을 박고 들어간다. “선한 과학이라면 어떻게 해야 생물보존작업을 경제적, 정치적으로 가장 실천적인 방식으로 진행할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데 도움이 돼야 한다.” 껄끄러운 번역 때문에 문장이 꼬였는데, 암튼 과학자치고는 참으로 ‘현실적인 자세’라 아니할 수 없겠다.

슈나이더는 가이아이론의 유기체 관점을 이어받아 지구가 살아있다는 전제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유기체와 무기체는 서로 연결돼 있고, 기후학자들이 흔히 얘기하듯 이 연결은 양-음의 되먹임 고리를 통해 상호작용을 이끌어낸다(이 책에선 ‘정의 되먹임’ ‘부의 되먹임’ 해놓아서 좀 어색해보임). 이 상호작용에 대해 시생대 고온과 그후 기온(즉 이산화탄소의 농도)의 안정화 과정을 설명하는 여러 이론들을 설명하고 질소, 황, 탄소의 순환과정 등등 기후변화의 메커니즘을 소개한다. 기후학자들이 모형 만드는 방법에 대한 간략한 설명도 있다. 생물 군집(생태계) 내에서 특정 종의 역할을 다른 종이 대신할 수 있는지, 즉 ‘생태계 서비스’가 대체 가능한지 하는 부분에 대한 설명 같은 것들도 재미있었다.

사실 기후변화 시나리오라는 것들은 ‘경향성’이라는 것을 보여주긴 하지만 모델마다 다른 수치를 보여주기 때문에 믿거나 말거나 혹은 ‘과장됐다’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이 부분에 대해서 슈나이더는 “종합평가의 목적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예측해내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변수가 생겼을때 결과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사실 이 책에서 ‘과학적인’ 부분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현실적인’ 부분들이다. 환경문제는 개개인의 사소한 행동이 겹쳐 ‘정말 우연히’ 일어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의 행동이 낳을 수 있는 의도되지 않은 결과를 의식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책무”라는 것.

당연한 얘기 같지만, 실제로 주변 사람들과 환경 이야기를 해보면 많은 이들이 기후변화의 영향력을 부인 혹은 평가절하하거나, 겉으로는 알고 있다 하면서 실제로는 모르고 있거나(구체적이지 않은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내가 뭘 하리” “경제가 개판인데 기후변화가 웬말이냐” “넌 얼마나 환경 생각한다고 나한테 머라 해” 이런 식이다. 뭐, 나도 속으로는 그런 생각 아예 안 한다고 말할 수 없으니.
이 책에 예일대 경제학자인 윌리엄 노드하우스라는 사람이 고전파 경제학자와 환경 경제학자, 대기과학자, 생태학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했다는 조사의 내용이 나온다. 21세기 말에 지구평균기온이 섭씨 6도가 일어난다고 가정하더라도(실제로 이건 매우매우 과격한 파국적인 시나리오이며 가능성이 높지는 않은데) 전통적인 경제학자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혹시 지난 10년간 좀 달라지긴 했을까).


저자는 생태학자와 경제학자의 차이를 두 가지에서 찾는다. 첫째 이 거대한 인구, 고도의 과학기술, 거대한 경제규모가 유지될 수 있을까(지속가능성) 하는 점. 생태학자들은 현상태로는 안된다고 말하고, 경제학자들은 아예 ‘안된다’는 전제를 부정하는 것 같다. 두 번째 생태계 서비스(다양한 생물종들이 유기체처럼 얽힌 지구 생태계의 기능)이 뭔가로 대체될 수 있다고 보는가.
생태학자들은 순식간에 파바박 생태계가 적응해서 기온 상승에 맞춘 적자생존이 이뤄지고 종 다양성이 그대로 유지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본다. 반면 경제학자들은 과학기술낙관론에 의존해서 앞날에 뭐가 나올지도 모르면서 ‘해결책이 나온다’고 말하고, 그게 합리적인 ‘시장의 법칙’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뭐든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 정작 과학자들은 회의를 표시하는데도 말이다!
생태학자 경제학자들 얘기일 뿐 아니라 그냥 우리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각차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아직은 (적어도 한국에선) 대부분 국민이 경제학자들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과학에 관한 ‘정책’을 결정하는 단계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과학은 ‘사회적 과정’이 된다. 여기서 저자는 당연한 결론 즉 ‘작은 실천’을 강조한다. 딱 한 표 차이로 선거결과가 판가름 나는 일은 실제 세상에선 거의 없지만 언제나 정치인들은 ‘당신의 한 표가 중요하다’고 하지요? 그런데 사실입니다. 왜냐면 효과는 누적되는 거니깐... 이렇게 슈나이더는 평범한 원칙을 다시 얘기한다. 요새는 미국도 재생가능에너지 한다 하고 유럽은 아주 앞서나가고 있다. 우리는? 에너지 기후 이런 얘기하면 뜬구름 잡는 웃기는 인간 되고, 잘난척 한다는 소리 듣기 십상이다. 그래도 지구는 살려야 한단 말이지... 슈나이더가 말하는 '평범한 원칙'은 그래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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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창조자 - 인류가 기후를 만들고, 기후가 지구의 미래를 바꾼다
팀 플래너리 지음, 이한중 옮김 / 황금나침반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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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에 대한 것은 그동안 나온 책들을 꽤 많이(실은 대부분;;) 읽어봤기 때문에 이젠 더 읽지 말아야지 했는데 어쩔수 없이 더 보아야만 하는 일이 생겨서, 조금 돈이 아까운 감이 드는 것을 꾹꾹 눌러가며 기후에 대한 책을 또 샀다.

 

읽다 보니 돈 아깝다 생각한 것이 미안할 정도로 알찬 책이었다. 지금껏 본 기후 책들 중엔 이 책이 최고.

기후변화에 대한 책들은 사실 내용이 대동소이한데, 책의 ‘질’은 ‘세부사항’이 얼마나 충실히 나와 있는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다. 이 책은 기후변화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쉽게, 그리고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 2005년초까지의 비교적 ‘최근’의 상황을 담았다는 것도 시기상으로 보면 큰 장점. 다만 올해 기후변화 정부간 패널(IPCC)의 4차 보고서가 완료될 예정이니깐 올해 책들이 우르르 나오면 세부사항에서 좀 달라지는 것들이 있을 것 같다.

시각도 좋고 내용도 좋고. 다르푸르 문제를 기후 변화 측면에서 본 것, 이러다가 ‘탄소독재’ 나오겠다 내다본 것 재미있었다.


▶ 버지니아대학의 환경과학자인 빌 러디먼은 우리의 후기 산업시대를 나름의 지질시대로 구분했다.

이 중대한 지질학적 사건을 처음으로 인식하고 이름을 붙인 것은 오존층 구멍에 관한 연구 업적으로 1995년 노벨화학상을 받은 폴 크루첸 팀이었다. 그들은 이 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부르며 산업혁명의 거대 기계들이 뭉게뭉게 피워 올린 메탄가스와 이산화탄소가 지구 기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1800년을 이 시대의 태동기로 구분했다. 러디먼은 이들의 주장에 자신의 독창성을 가미했다. 1800년보다 한참 전부터 인류가 지구 기후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이는 증거를 발견해낸 것이다.

8000년 전에 시작된 지난 일사(日射) 주기(밀란코비치의 2만3000년 길이의 궤도일사주기) 초기에 밀란코비치의 메커니즘은 메탄 배출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다.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농경, 특히 동아시아의 논농사와 같이 물을 많이 사용하는 습식 농경의 시작이었다. (99쪽)


▶ 아주 먼 과거에는 파충류나 포유류, 조류가 없었다. 대신 갑갑하고 꿉꿉한 생장물이 곤충류와 함께 번성했다. 당시 대기는 산소가 풍부해서 불완전한 호흡기를 가진 동물도 엄청난 크기로 자랄 수 있었다. 노래기는 길이가 2m까지 자랐고, 거미는 몸길이가 3m나 되었다. 30cm나 되는 바퀴벌레가 날개 폭이 1m나 되는 잠자리와 함께 푸른 초목을 나누어 차지했으며, 물에는 크기가 악어만 하고 거대한 머리와 널찍한 입과 반짝이는 눈을 가진 양서류가 숨어 있었다. (108쪽)

 

▶ 목걸이레밍쥐(collared lemming·Dicrostonyx hudsonius)는 아북극이 아닌 훨씬 더 북쪽에서도 살 수 있다. 혹독하게 추운 그린란드 북해안에서도 생존할 뿐만 아니라 빙권에서도 너무 잘 적응한다. 이들은 설치류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겨울에 털이 흰색으로 변하고, 겨울이 되면 발톱이 두 갈래의 넉넉한 삽 모양으로 변해 딱딱한 눈에 터널을 뚫을 수 있다. 이들의 개체수는 약 4년 주기로 오르내리는데, 주기의 마지막에 이르면 너무 많아져서 떼를 지어 먹이를 찾으러 다닌다. 바로 이 때문에 무리로 절벽 아래로 떨어져 자살을 한다는 잘못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북극에 사는 생물들이 아무리 강인하다 해도 북극의 생태계는 대단히 취약하다. 2004년에는 이 지역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나라들이 후원해 작성된 보고서 ‘북극 기후영향평가’가 발간되었다. 지구온난화 추세가 이어지면 숲이 북극해 가장자리까지 북상하면서 툰드라 지대를 파괴할 것이라는 보고서 내용은 충격적이다. 목걸이레밍쥐와 툰드라 지대와의 관계는 불가분의 것이어서, 보고서에 따르면 레밍쥐는 이번 세기 말이면 멸종될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 때가 되면 자살 성향이 있는 작은 설치류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비극적인 사실은 이 레밍쥐들이 스스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떠밀린 것이다. (187쪽)

 

▶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은 지역은 대단히 광범한, 대서양에서부터 수단에 이르는 사하라 남부의 엄청난 구역이었다. 강수량이 갑자기 떨어진 뒤로 40년이 지났는데도 생명을 주는 우기의 비가 회복할 조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강수량이 줄어들기 전에도 사헬 지역은 생명체가 살기 어려운, 강수량이 극히 적은 곳이었다. 비교적 토양이 좋고 비가 좀더 많은 곳에서는 농민들이 땅에 의존해 살았으며, 더 건조한 황야에서는 낙타를 기르며 낙타의 먹이를 찾아 반쯤은 유목 생활을 하며 돌아다녔다. 비가 줄어들자 두 그룹 모두 사는 것이 어려워졌다. 낙타를 치는 사람들은 진짜 사막이 되어버린 곳에서 풀을 찾기가 힘들어졌고, 농민들은 밭이 다시 생동하도록 해줄 충분한 빗물을 거의 구경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의 언론들은 정기적으로 그 결과를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

나는 어릴 때 이러한 이미지들을 텔레비전에서 보았으며, 지나친 방목과 급증하는 인구 때문에 빚어지는 끔찍한 상황이라고 듣곤 했다. 사실 서구 사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러한 현상을 인간이 스스로 끌어들인 재앙이라고 주장해왔다. 낙타와 염소, 소를 지나치게 방목하고 아울러 땔감을 구하는 과정에서 얼마 되지 않던 식물군을 파괴하면서 짙은 비깔의 맨땅이 드러나게 되었고, 그만큼 이 일대의 알베도(태양빛을 반사하는 비율)가 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환경론자와 도덕론자 모두에게 주의를 줄 만한 내용이었지만 거의 모든 면에서 그릇된 것이었다.

사헬에 닥친 재앙을 부른 진짜 원인은 2003년11월에 드러났다. 콜로라도 볼더에 있는 미국 국립대기연구센터의 기후학자들이 만든 컴퓨터 시뮬레이션 모델은 이 일대의 과거 및 현재의 기후를 실제에 가깝게 복원했는데, 인간이 황폐하게 만든 땅은 극적인 기후변동을 일으킬 수 없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대신 기후 변수 하나가 강수량 감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인도양의 해수면 온도가 상승해 온실가스가 쌓이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사헬 지역에 닥친 재앙이 원시적이고 무지한 목축민들이 환경을 잘못 다룬 탓이 아니라는 뜻이다.

수단 서부에 있는 다르푸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기후 변화 때문에 절박한 처지에 내몰렸다. 낙타를 모는 유목민들이 낙타를 농경지 있는 곳으로 몰고 가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서 불가피하게 농민들과 충돌하게 된 것이다. 이 유목민들은 아랍인이고 농민들은 아프리카인이다. 생활방식에 약간씩 예외가 있는 것만 빼면 이들은 문화적, 신체적으로 차이가 없다.

사헬에 일어나고 있는 기후변화는 세계가 직면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금 서구 사회는 문제를 일으킨 명백한 원인인 환경 재앙보다는 종교와 정치에만 치중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우리는 문제의 원인에 대해 스스로를 속여 왔다. (171쪽)

 

우리가 수단에서 낙타를 몬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평생 좋은 날씨를 경험하지 못했으며, 좌절 끝에 낙타 무리를 몰아 우리와 통혼도 하고 교역도 하던 농민들의 땅으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우리 가축들은 작물을 짓밟고 불화의 씨를 뿌렸다.

세상은 수십 년 동안 우리의 난처한 처지를 우리가 천연자원을 잘못 다룬 탓으로 돌렸다. 이제 지구상에서 가장 힘센 정부가 우리에게 대량 학살의 혐의를 씌우고 있다. 그러다 우리는 비가 오지 않는 확실한 이유를 발견했다. 그것은 제일 부유하고 힘센 나라들이 대기를 오염시켰으며, 사헬 사람들을 기근과 빈곤과 분쟁의 나락으로 빠뜨렸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부당한 일을 어떻게 보상받아야 할까?(353쪽)

 

▶ 과학자들이 지구의 기후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균형이 무너지는 점(tipping point)’에는 중요한 내용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멕시코 만류의 약화 또는 중단이고 둘째는 아마존 우림지대의 소멸이며, 셋째는 해저에서 올라오는 기체 수화물(포접화합물)의 방출이다. (244쪽)


▶ 마지막 시나리오에 따르면 인류는 ‘가이아의 자동 온도조절 능력을 통제하는 지구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 수밖에 없는데, 교토의정서에서부터 쉽게 출발할 수 있다. 위원회는 바다를 이용해 지구의 자동 온도조절 능력을 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전지구적으로 바다라는 공공재를 이용하고 소유하는 문제를 논할 새로운 국제적 협력이 필요하다.

기후 위기가 심각해질수록 위원회는 한 나라가 기후변화 때문에 상당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를 중재해야 할 것이다. 결국 일부 구성원들은 더욱 효과적으로 활동하기 위해 문제의 근본 원인, 곧 지구상의 인구 수에 집중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로써 위원회는 자체적인 통화와 군대를 가진, 그리고 지구 구석구석과 모든 사람을 통제하는 오웰 스타일의 세계 정부로 변해갈 것이다. 너무나 끔찍한 결과지만, 우리가 기후변화의 위기에 맞서 싸우는 활동을 지체하면 생존을 위한 탄소 독재가 반드시 필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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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3-26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도 있었군요!^^

마늘빵 2007-03-26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목보고 이거일거라 생각했어요. 저도 보관함에 있는데. ^^

가을산 2007-03-26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딸기님과 같은 이유로 이 책은 사지 않고 있었는데.... 고민되네요... ^^;;

딸기 2007-03-26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분, 이거 사서 읽어보십시오~~~
 
간디와 마틴 루터 킹에게서 배우는 비폭력
마리 아네스 꽁브끄. 귀 들뢰리 지음, 이재형 옮김 / 삼인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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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책인데 사놓고 2년이 넘어서야 읽었다. 간디와 마틴 루터 킹. 간디에 대해서는 전기를 읽고 나서 ‘(존경심을 한껏 담아)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킹 목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어서 새로웠다.

역시 간디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 킹 목사는 여전히 잘 모르는 사람. 하지만 책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비폭력. 어쩌면 폭력적인 저항은 그 자체가 비폭력보다 비겁한 마음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는 것, 알 듯 모를 듯 참으로 어려운 말이다. 압제와 불의가 나를 누를 때 분연히 주먹을 들고 떨쳐 일어나는 것은 나 같은 사람에겐 참 어려운 일일 것 같은데, “맞으면서 싸워라”라니. 하지만 그것을 가능케 함으로써 간디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감동과 비전을 주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문장이 좀 꼬여있어서 부드럽게 읽히는 책은 아닌데, 무시 못할 장점이라면 책이 작고 얇다는 점. 비폭력에 대해 다룬 책들이 많은데, 이 책은 맛뵈기 플러스 약간의 고민을 얹어 시간 내 읽어볼만한 수준인 듯.


▶ 가스실은 존재했다.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스실의 비효율성을 폭로해야만 가스실이 다시 세워지는 걸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간디에 따르면 살인은 비효율적인 행위의 전형 그 자체다. 앙드레 말로는 그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시 정부 때의 레지스탕스 활동가들과 합류하는 것을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거부했던 것이다.

“죽이고 싶다는 욕망은 비겁한 자들의 감정이다. 당신은 살인까지 해가면서 도대체 누구를 해방시키겠다는 것인가?” - 간디, <힌두스와라지> (12~13쪽)


▶ 말하자면 레닌과 간디는 달리고 있는 열차에 올라탄 셈이었는데, 레닌은 이미 그의 마음 속에 있던 계획에 따라 열차의 궤도를 바꿔놓기 위한 것이었고, 간디는 소외당한 계층과 함께 여행하면서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기 위한 것이었다. (113쪽)


▶ 페스트가 유행하는 바람에 아슈람은 아름다운 풍경이 공장 굴뚝에 가려진 사바르마티 강가의 아흐메다바드 지역으로 옮겨졌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민감한 적이 결코 없었던 간디는 중앙교도소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특히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자기가 앞으로 감옥에 자주 들락거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감옥은 아슈람에서 겨우 몇 발자국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21쪽)


▶ 2002년, 권력을 잡고 있는 군인들 패거리에 의해 반역자로 기소당해 1989년부터 박해를 받아왔던 아웅 산 수지가 석방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1959년 이래 티베트 체류가 금지되어 있고, 그의 조국은 점령자 중국에 의해 고통 받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저지른 죄는 비폭력이다.

비폭력은 하나의 조국이며, 그 시민들은 이 세계의 모든 국가와 모든 종교, 그리고 인류의 모든 세대에 속해 있다. 우리는 이 이상의 가장 오래된 증거를 아프가니스탄에서 발견한다. 칸다하르에서 걸어서 서너 시간 가량 걸리는 곳에는 기원전 260년 경에 아소카 황제가 불교로 개종하고 난 뒤 암벽에 새겨놓은 칙령이 존재했고, 만일 탈레반의 몽매로 인해 파괴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 열 두 번 째 칙령은 이렇다.

‘바로 이것이 신들로부터 사랑받는 황제의 바램이니: 모든 종파의 신자들은 또한 그들의 종파와 다른 종교의 신앙도 알아야 할 것이다. 진실로 만일 누군가가 다른 종파들을 희생시켜가며 자기 자신의 종파를 찬양한다면 그는 그 자신의 종교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 칙령은 잘랄라바드 근처의 라미얀과 페샤와르 근처의 샤브아즈가르히에서 발견된 다른 칙령들 속에도 들어있다. 위치에 따라 이 문구는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로도 쓰여 있으며 인도어 계열의 프라크리트어로도 쓰여 있다. 불교는 기원후 3세기까지만 해도 이 지역에서 지배적인 종교로 남아 있었다. 그렇게 6백년이 넘도록 아프가니스탄은 비폭력 전도의 활기찬 중심지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동쪽에서 온 대상(隊商)들이 불교를 퍼뜨리기 전에, 이미 서쪽에서 온 다른 낙타몰이꾼들이 이곳에 평화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이 간절한 기대를 바랑 속에 넣어 들고 나타난 사람의 이름은 자라투스트라였다. 그는 말년에 칸다하르 남서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아문 호숫가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 호수에서 멱을 감던 그는 이곳에 예언의 정액을 몇 방울 남겨놓았다. 파시교의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한 젊은 처녀가 이곳에 멱을 감으러 왔다가 장차 천 년 동안 지상의 인간들을 선정(善政)으로 다스리게 될 평화의 왕 사오시안트를 낳았다는 것이다. 근처 야산에는 불의 사원이 남아 있고, 여기서는 지금도 승려들이 그가 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별이 떴는지 보려고 하늘을 살펴본다. 기독교의 전설에 따르면 동방 박사 세 사람이 여기서 출발하여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신의 아들을 경배하러 갔다고 한다. (164~166쪽)


▶ 몽고메리를 하나의 전환점으로 만든 것은, 버스에 타기를 거부하는 형태의 직접적인 비폭력과 법정에서의 사법적 압력 수단을 결합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탄생한 통합 투쟁 모델은 곧 정치의 영역에서 선거권과 권리 평등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항상 정치와 사회의 영역에 개입하는 길을 찾는 것, 이것이 바로 비폭력 운동의 특징 중 하나다. 왜냐하면 비폭력은 단순히 투쟁 방식을 묘사하는 도구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입장을 취하라는 요구’인 것이다.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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