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의 종말
제프리 삭스 지음, 김현구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현존하는 인물 중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 하버드대학교 최우등 졸업, 하버드대학교 최연소 정교수, 현재 프린스턴대학교 지구연구소 소장. 볼리비아 정부 자문위원,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의 자문위원을 지냈지만 미국과 IMF와 세계은행을 누구보다 비판하는 사람. “절대 빈곤은 없앨 수 있다, 그것이 부국의 책무이며 우리 시대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라고 외치는 사람.


책 표지 앞날개에 제프리 삭스의 프로필과 흑백 사진이 나와 있다. 책의 편집이 깔끔한 것에 비해 사진의 질은 좋지 않지만 너무나 마음에 드는 얼굴. 곧 있으면 할아버지 급이 될 제프리 삭스의 얼굴은 참 좋다. 잘생겨서가 아니다. ‘진심’과 ‘진지함’이 얼굴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조지 소로스에 대해 여러 가지 시각이 있을 수 있지만 그의 책을 읽으면서 진심이 느껴져 기분이 좋았었다. 그래서 ‘진심은 마음을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소로스는 내 마음을 움직였으니까.

삭스의 글은, 움직이던 내 마음을 한 곳으로 향하게 한다. 절대빈곤은 끝내야 한다고, 그것은 21세기 첨단의 시대, 번영의 시대, 세계화된 시대를 살아가는 나의 의무라고. 잊지 않으려 마음먹었지만 자꾸만 마음에서 지워져가는 시에라리온과 가나의 그 아이들을 생각해야만 한다고, 절대빈곤을 벗어나 선진국을 향해 일로매진하는 동아시아 한 나라에 살고 있지만 적어도 한때는 우리도 타인의 원조를 받았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금 내가 먹고 마시고 쓰는 것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일 수 있음을 늘 깨닫고 있어야 한다고.


얇진 않은데 너무 술술 읽혔다. 이 책은 제프리 삭스라는 상아탑의 경제학자가 어떻게 개발도상국의 빈곤 문제에 눈 뜨게 되고 상아탑에서 뛰쳐 나와 빈곤과의 싸움에 나서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볼리비아 인플레이션 잡기, 폴란드와 러시아의 경제 시스템 바꾸기, 방글라데시와 말라위와 케냐 같은 가난한 나라들의 고통과 싸움 등등 삭스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공부하고 실천했던 것들이 이 책 안에 들어있다. 어찌 보면 자서전 같기도 한 이 책은, 지구촌을 돌아다니며 빈곤과 싸워온 한 학자/운동가/행정가의 인생이 그대로 들어있어 재미가 있고 감동도 있다. 경제적인 측면을 아주 쉽게 설명하는 것은 학자로서 선생으로서 그가 갖고 있는 재주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경험을 살려 구체적인 시간, 장소, 사람들, 프로그램들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제프리 삭스는 자본주의 경제학의 틀 안에서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 그는 이것이 꿈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계획이고 이뤄야만 할 임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비현실적인 몽상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대다수일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가 덜 좌파적이라고, 자본주의를 용납한다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어떤 논리를 내세우든, 살 수 있는데 단돈 몇 푼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은 살려야 한다. 에이즈 환자를 벌레 보듯 하는 사람들에겐 “그 병은 이제는 약만 있으면 충분히 지탱할 수 있는, 만성 간염 같은 질병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해주어야만 한다. “아프리카가 가난한 것은 사람들이 게으르고 유전적으로 모자라서가 아니라 기후가 혹독하고 환경 지리조건이 다른 지역보다 안 좋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나라들의 정부가 끔찍할 만큼 썩어서 원조 받은 돈을 뒷주머니로 챙기는 것이 아니라 부자 나라들이 기부한다 말만 해놓고 돈을 안 줘서 원조자금이 모자라는 겁니다”라고 진실을 알려야 한다.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 내 주머니에서 단돈 만원 꺼내지 않으면서 “미국이 나빠” “원조같은 것으로 빈곤을 구제할 수 있겠어” 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다소는 양심 없는 짓이라고 본다. 돕지 않으면서 "굶는 이들을 구하긴 힘들어"라고 말하는 것, 해보지도 않고 패배주의를 말하는 것은 '현실적'이 아니라 '기회주의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 당장 우리는 50, 60년 전 어느 나라 착한 사람들의 원조 덕분에 이 정도 살만한 형편이 되지 않았는가. 미국의 흑인들은 버스 좌석에도 마음대로 못 앉게 만들었던 인종차별의 장벽을 무너뜨리지 않았던가.


삭스는 경제학 책을 벗어나 발로 뛰며 얻은 통찰력으로 기부원조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편견을 깬다. 오늘날 빈곤의 원인은 부국들에 의한 착취, 빈곤국 정부들의 부패, 국제기구의 비효율성, 빈곤한 사람들의 게으름과 문화적 한계 같은 것들 중 어느 하나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요소들이 결합되어, 그리고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지리·환경·생태적 요인들이 합쳐져서 일어난 것이다.

삭스는 사례별로 빈곤의 원인을 의사처럼 ‘감별진단’한 뒤, 빈곤 국가와 지역에 대한 감별진단의 테크닉을 일반화시킨 이론으로 정리해낸다. 그리고 절대 빈곤과 싸우기 위한 스케줄, 프로그램, 할 일들을 구분해서 조목조목 정리해 읽는 이들을 설득한다. 원조가 펌프의 마중물이 되어 빈국들을 ‘빈곤의 함정(원시적인 수준의 자본축적조차도 가로막아 빈곤의 악순환을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함정)’에서 끌어내 ‘번영의 사다리’에 한 계단이라도 올라설 힘을 갖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경제발전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며 인류는 진보해왔다고, 계몽주의자의 신념을 다해 인간의 이성과 모럴에 호소한다.

진심은 항상 마음을 움직인다. 인류는 그런 진심의 승리를 과거에도 여러 차례 보아 왔다. 언젠가는 삭스와 같은 이들의 진심이 세상을 움직여 절대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7-03-31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믿어요. 우리 모두의 소망이구요. 리뷰 잘 보았습니다^^

로쟈 2007-04-01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도 사람을 움직이는데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의 책이 달랑 한권 번역돼 있다는 것도 좀 놀라운 일입니다...

가을산 2007-04-01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리뷰는 블랙홀이에요...... ^^;;

딸기 2007-04-01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모두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도웁시다. 정말이예요, 정말 너무 불쌍하잖아요. 월드비전도 좋고 유니세프도 좋고, 힘 닿는대로 (사실 한달에 2만원 정도를 못 낼만한 사람은 별로 없지 않을까요 ^^) 도웁시다!

그런데 로쟈님, 삭스의 책이 그렇게 없다는 건 정말 실망이예요. 더 보고 싶은데...

마늘빵 2007-04-18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뒤늦게 축하드려요.

딸기 2007-04-19 0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뒤늦게 알았습니다. 고마워요. :)

드팀전 2007-04-19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재로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거 밖에 없어서...해요^^ 축하해요.....
네팔 아동과 1대 1 결연 지원을 몇 년째 하고 있는데...단체가 교회관련단체여서 그만두고 유니세프로 바꿀까해요.교회단체라고 나쁠 건 없지만 제가 교인도 아니고 다른 단체들도 많은데 종교색이 강한 단체를 굳이 선택할 필요는 없어서요.^^

"미국이 나빠” “원조같은 것으로 빈곤을 구제할 수 있겠어” 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으며, 다소는 양심 없는 짓이라고 본다.....
맞는 말이에요. 그냥 말장난 같은 건데 이것도 가능해요- '생활에 장애를 주지 않는 몇 만원을 기부하면서 도덕적 면죄부를 받고 거대한 체제의 혜택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가? "....'온정주의' 라고 하는건데..그런 태도를 수용하는 것은 과연 옮바른건가? ^^ 심각하게 생각할 가치가 없는 질문이겠지만 생각해도 손해볼건 없겠지요.

마노아 2007-04-19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왓, 메인에 떴어요! 안 그래도 덕분에 이 책 눈여겨 보았더랬죠. 축하합니다^^

딸기 2007-04-20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님, 요즘 제가 정신이 없어서...
말씀하신 내용, 절대적으로 공감합니다. 좀더 긴 답글 달고 싶은데...
이따가 마감 끝나고 다시 올릴께요. :)

마노아님, 그런데 메인이 어디지요? 저도 찾아볼께요. 그리고 마노아님은 저한테 1만4700원 상당의 책을 주문해주십시오. 한권 선물해드리겠습니다. 지난번 재미난 책들(흑흑 리뷰도 못 올리고 있는)에 대한 보답으로... ^^

마노아 2007-04-20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오후에 메인에 떴는데, 몇 시간만에 금주의 책으로 다시 바뀌었어요ㅠ.ㅠ
알라딘은 메인에 있는 '이주의 마이리뷰'를 제때 안 바꿔줘요. 저도 저번에 당첨되었을 때 아예 이름이 실리지도 않았답니다^^;;;;;
엄훠~ 근데 제게 선물을(>_<)
저얼대 사양않고 신나게 외칩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요 책 읽고 반성과 자성의 시간을 가져야겠어요. ^^

딸기 언니 감사해요(^____________^*)


2007-04-20 1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만델라 자서전 -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넬슨 만델라 지음, 김대중 옮김 / 두레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만델라 할아버지의 자서전을 읽은 지 한달 정도 지났다. 이 책에 대해서, 만델라 할아버지와 남아공이라는 나라, 아프리카라는 지역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정치(精緻)하지 못한 글이 될 것 같은 생각도 든다. 내 마음 속에 정리해놓고 싶은 이야기,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을 힘겨운 투쟁에 바친 한 사람 앞에, 멀리 떨어진 서울이라는 곳에 사는 이 아줌마의 이야기가 그리 길어질 이유가 뭐 있겠느냐 싶기도 하지만, 만델라라는 인물과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델라는 ‘위대하다’는 수식어를 몇 번을 갖다 붙여도 아깝지 않은 인물이다. 시련을 이겨낸 투지와 용기만 해도 ‘위인전’ 거리가 되고도 남지만 만델라를 더 큰 인물로 만드는 것은 집권 이후에 보여준 능력이다. 만델라가 28년간의 수감생활 뒤 감옥에서 나와 남아공의 대통령이 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남아공 사람들이 만델라에게 갖는 존경심은 ‘투쟁-승리’만으로는 해석되지 않는다. 만델라의 ‘능력’에는 집권 뒤 보여준 포용력, 관대함, 결단력, 사심 없음, 애국심, 진지함, 의리 같은 것들이 모두 들어가 있다.

 

만델라,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Long Walk to Freedom.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인(하지만 좀 많이 두꺼운) 이 자서전은 만델라 할아버지의 솔직하고 담담하고 진지한 인생이야기다. 투쟁과 고뇌와 슬픔과 실망과 용기와 동지와 사랑과 승리의 기록.

만델라 인생 첫 부분, 부족사회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아주 예스럽다. 학교 다니면서 공부한 이야기, 요하네스버그에 가서 변호사로 활동하기까지, 첫 결혼, 투쟁에 발을 담그게 된 과정이 ‘아무 일도 아니었던 듯’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실상 원주민 소년이 백인사회에서 변호사가 되기까지의 길은 얼마나 험난했을까. 어린 시절, 젊은 시절, ANC 투쟁을 이끌던 시절, 감옥시절, 그 이후 집권까지 어느 한 시기, 힘들지 않은 시기라고는 없었다. 가족에 대한 부분들도 눈에 띈다. 딸 진드지의 첫 면회, 아들이 죽었을 때 담요 뒤집어쓰고 누운 이야기, 면회실에서 안아보게 된 갓난 손녀... 투쟁하는 사람으로서 가족을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비애.

전략·전술을 둘러싼 논쟁과 고민은 책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또한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재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공산당과 ANC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무장투쟁에 뛰어들 것인가 말 것인가에서부터, 집권 뒤 ‘진실과 화해’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까지. 원칙적이면서 또한 실용적인, 만델라라는 사람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데에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이런 논쟁거리들에 대한 설명들이다. 로벤 섬에 갇혀있던 만델라와 그 동지들은 ‘아프리카에 호랑이가 있었나 없었나’를 놓고서까지 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감옥에서 괴어 썩지 않게 만들고 그들을 더 단련시켰던 기나긴 싸움은 무장투쟁 못지 않게 흥미롭다.


요사이 친해진 샐리라는 친구가 있다. 샐리는 남아공의 항구도시 더반 출신이다. 샐리의 친구는 대학시절 우편물 폭탄에 희생됐다고 한다. 반투 스티브 비코 일생을 담은 책에서도 그런 걸 느꼈지만, 흑백 차별 사회였다고 해도 ‘흑백논리’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책에서 만델라는 백인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대신 백인 ‘동지들’의 투쟁에 대해서도 아낌없는 경의를 표한다. 남아공 백인들에 대한 부분에서는 특히 선입견과 분위기가 많이 다른 부분들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서울에서 만난 남아공 사람들은 모두 백인들이었는데 실제로 그들은 아파르트헤이트의 과오를 인정하는데 인색함이 없었다. “우리(백인들)는 나빴다. 하지만 만델라는 우리를 끌어안았다. 그래서 피로 물든 내전 없이 흑백 정권교체를 이뤄낼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과오로 점철됐던 나라이지만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흑백 관계없이 만델라를 존경한다.”

앞서 이 책은 아태재단에서 출판된 적 있는데 이번에 김대중 번역으로 다시 나왔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김대중이라는 사람의 인생역정이 머리 속에 겹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생략.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다른 부분은 요즘 내 관심사(아프리카)와 연관되어, 만델라의 동지들에 대한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내 조국과 국민들에게 깊고 오랜 상처를 남겼다. 우리 모두는 그 심한 상처를 치유하는 데 여러 세대 또는 적어도 여러 해를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의 억압과 잔인함은 또 다른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바로 억압과 잔인함이 우리 시대에 올리버 탐보, 월터 시술루, 추툴리 추장, 유서프 다두, 브람 피셔, 로버트 소부퀘와 같은 대단한 용기와 지혜와 관용을 지닌, 내가 다시는 알지 못할 그런 사람들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런 고귀한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토록 심한 억압이 필요할는지도 모른다. 나의 조국은 땅 속에 묻혀 있는 광물과 보석이 풍부하나, 나는 항상 우리 나라 최고의 재산은 순수한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훌륭하고 진실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897쪽)

 

이 에피소드를 비롯해 책 곳곳에 등장하는 고반-  월터 시술루 그리고 올리버 탐보와 함께 만델라 할아버지의 빼놓을 수 없는 동지였던 고반 음베키는 현재 남아공 대통령인 타보 음베키의 아버지이다. 만델라는 집권 뒤 백인정권 대통령이었던 데 클레르크(현지 발음으로는 데 클럭이라고 하던데;;)와 동지의 아들 타보 음베키를 나란히 부통령으로 앉혔다.

어떤 부분에서 책은 유머러스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스파이 소설을 읽는 것 같다. 만델라 할아버지가 로벤섬 감옥을 떠나 케이프타운에 갇혀 있으면서 백인 정권과 담판을 벌이는 부분은 진짜 흥미진진했다.

우리는 힘겨운 투쟁, 모진 고초를 겪은 뒤 세상에서 '큰 뜻'을 펼치게 됐을 때 가지가지 방식으로 결국 주변을 실망시키고 마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만델라가 28년의 수감생활 뒤 대통령이 되어 정치에 죽을 쑤고 측근들 부패하고 정책 개판이고 우향우 좌향좌 왔다갔다 했다면, 아마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은 흰소리로 남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기에 그는 위대한 사람이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책의 부록에 상세히 나와 있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에 대한 것이다. 요새는 '과거청산' '진상규명'이 희화화되고 비아냥거리가 된 느낌도 들지만, 남아공처럼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나라에서 그것은 정말로 어려운 과제였을 것이다. 이에 대한 만델라의 생각은 분명했던 것 같다. "밝힐 것은 밝히자. 그러나 과거 때문에 미래를 희생시킬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노벨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한 데스먼드 투투 주교가 이끈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라는 것이다.


피부 색깔이나 가정 배경과 종교 때문에 다른 사람을 증오하도록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들은 증오를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증오를 배운다면 사랑도 배울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 마음에서 사랑은 그 반대보다 훨씬 더 본성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장 견디기 어려운 수감 시절에, 나의 동지들과 내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에, 나는 간수들 한 명 한 명으로부터 인간성을 보곤 했다. 아마도 이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인간성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다시 한번 확신시켜 주고 유지하기에 충분했다. 인간의 착함이란 가려 있으나 결코 꺼지지 않는 불꽃이다. (898쪽)


편집자(옮긴이?)는 "만델라의 용서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의 믿음과 낙관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 말 그대로다. 오랜 수감생활에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은 기적이다. 더우기 감옥에서 그의 낙관적인 인간관이 악화되기보다 더 강화되었다고 한다면. "만델라의 화해와 용서는 이런 도덕적 관점 말고도 정치전략적 측면에서도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가 아프리카너들에게 더 많이 더 멀리 손을 뻗칠수록 백인 세력은 더욱 더 분열되고 더 빨리 무장해제되었다." (938쪽)

그렇게 해서,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전세계 곳곳에서 과거 청산과 국가적 조직범죄 진상규명의 한 모델이 됐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중남미, 동유럽, 아프리카 곳곳에 이런 기구들이 생겨났다. 물론 책 부록에 설명돼있듯 피해자들의 반발도 많다. 죄를 고백하면 용서해준다? 화해는 없고 사면만 있다는 비판도 있다. 끔찍한 죄를 저질러놓고 “내가 그런 짓을 옛날에 했었지” 말만 하면 모두 용서해준다니. 그러나 그것이 만델라의 노선이었다. ‘망각하지 않는 용서(forgive without forgetting)’. 그렇지 않았더라면 남아공은 내전으로 치달았을 수도 있었고, 훗날 ‘모두의 자산’이 될 백인정권의 성과물들이 무위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만델라는 그 함정을 피해갔다. 확신, 권위, 역사의식, 지혜, 책임감처럼 한 사람에게 한번에 구현되기 힘든 여러 덕목들이 만델라를 큰 길로 이끌었다. (다른 나라에서 진실과화해위원회가 실패했다면, 그것은 그 나라들에 만델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지도자가 확고한 신념과 도덕적 권위, 미래를 위한 관대함 대신 형식논리와 정치적 명분과 눈치보기로 일관한다면 진실과의 조우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지난달 중순에 요하네스버그와 케이프타운을 방문했다. 남아공은 아직까지도 ‘두 개의 나라’다. 특히 한국 교민들은 스스로를 백인들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들과 주로 접했던 나로선 더 거부감이 느껴진 측면도 있지만, 참 살고 싶지 않은 나라였다. 넓은 땅, 경치 좋고 날씨 좋고 자원 많고. 그런데 요하네스버그는 흑-백 두 구역으로 나뉘어, 흑인 구역은 강도가 무서워 돌아다닐 수도 없다. 케이프타운의 화려한 상가는 백인들 세상이다. 흑인들 내부에서도 집권세력 기득권층들의 잇속 챙기기가 심한 듯싶고. 2010년 월드컵 때까지 이 나라가 어떤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하지만 만델라의 나라는 언제고 희망을 찾을 것 같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6-10-17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경심이 느껴져요. 저도 존경해요. ^^
역자가 그 김대중이었군요. 호감도 마구 상승인데 이렇게 두꺼운 책이라니...;;;;

딸기 2006-10-17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두님... 그렇게 압박을... 알았다구, 알았다구. ^^ 지금 당장 보낼께.
마노아님, 증말증말 좋은 책인데 사실 좀 너무 두껍긴 해요.

딸기 2006-10-17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엇, 주소가 엄떠... 주소 남겨줘
 
게벨라위의 아이들
나집 마흐푸즈 지음 / 하서출판사 / 1995년 2월
평점 :
절판


 

 

(알라딘에는 왜 그런지 이 책의 표지가 없어, 한번 가보지도 않았던 예스24라는 곳에서 그림을 가져왔다)

소설을 멀리 하게 된 것이 좀 오래된 일이다. 재작년 한차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사 모으면서 다시 한번 소설의 세계로 빠져봐야지 했었지만 이게 또 쉽지 않은 일이어서, 몇 권 읽으며 감동했다가는 정신적 부담에 지레 눌려 포기했다. 소설을 멀리 하게 된 것은 내가 순전히 지식축적용으로, 지극히 목적지향적으로 책을 읽게 된 시기와 일치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결국 난 소설이 주는 그 무게감이 겁이 났던 것 같다. 소설은 픽션이지만 어떤 넌픽션보다도 심각한 무게감을 준다. 차라리 현실의 일들, 내 것이 아니라고 맘편히 여길 수 있는 일들을 보는 게 낫지, 인간의 보편성을 건드리는 소설들은 너무 무섭단 말이다.


‘게벨라위의 아이들’은 처음 읽어본 이집트 소설이다. 국내에는 아마도 별로 팬이 없겠지만 명색이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다. 올해 아흔넷이 된 나지브 마흐푸즈(이집트식으로 읽으면 나기브 마흐푸즈)는 아랍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이고 세계적인 문호이지만 역시나 이 나라에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국내에는 이 책이 두어 가지 버전으로 출간된 것 말고는 단행본이 번역돼 나온 것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1959년에 발표됐다는 이 소설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인지 확실하게는 알 수 없는 사막 주변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게벨라위라는 선조에게서 나온 이 마을은 여러 작은 마을들로 나뉘어있다. 제목에서 보이듯 그의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야기 속의 이야기, 이야기꾼의 이야기 등등이 꼬리를 문다.

첫 번째 ‘아드함’의 이야기를 읽을 때 나는 이것이 장 지오노의 ‘폴란드의 풍차’ 같은 비극인 줄 알았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힘 때문에 증오하고 살해하는 한 가계(家系)의 이야기처럼 보였다. ‘게벨’의 이야기는 영웅과 권력에 대한 이야기로 들렸다. 주어진 행복을 버리고 민중을 구하러 나선 사나이! 세 번째 ‘리파’의 이야기는 수도승 같은 한 사람의 비폭력 투쟁을 그린 또 하나의 영웅담이었다. 그 다음 ‘캇셈’에 이르면 영웅의 무기는 힘(게벨)에서 사랑(리파)으로, 다시 지혜(캇셈)로 변한다. 캇셈은 초인적인 영웅이 아닌, 현실적인 영웅이 되어 줄줄이 이어지는 게벨라위네 마을의 해피 엔딩을 예고할 것만 같았다. 마지막 ‘아라파’에 이르러 결국 작가는 이 순진한 독자의 바람을 무너뜨린다.


마흐푸즈는 이 소설로 198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지만, 정작 신문에 한차례 연재됐던 이 소설은 이집트에서는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못했다. 이슬람권 최고의 종교교육기관인 알 아즈하르 성원(聖院) 측이 이 책에 ‘무함마드를 모욕하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했다고 한다. 이 소설에 대한 ‘지배적인’ 해석은, 세 영웅이 이슬람과 유대교, 기독교 3대 유일신교의 창시자들을 빗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뒷표지에는 '과학기술과 종교의 갈등이라는 형이상학적 문제를 간결한 묘사와 차분한 색조로 다루고 있다'는 다소 황당한 소개글이 붙어 있다)
그런데 그들 세 종교의 신자가 아닌 내 눈에 이 소설은 종교가 아닌 권력의 메타포로 읽혔다. 권위의 근원이 있고, 그 우산을 쓰고 억압하는 통치자가 있다. 통치자 밑에는 속물적인 수장들이 민중을 갈취한다. 억압과 폭력, 아첨과 거짓말, 음모와 배신. 통치자는 교활하고 수장들은 욕심 많고 민중들은 나약하다. 영웅이 주도하는 평등·평화의 시대는 짧고, 고난과 핍박의 시기는 길다. 영웅의 도래와 함께 꿈이 피어오를 만 하면 이내 그 꿈은 반복되는 억압의 역사에 밀려 산산이 쪼개진다.

공화국 출범이래 지금까지 단 세 명의 국가원수만을 갖고 있는 나라 이집트. 독재는 반복된다. 이집트 사람들은 인간성들이 나쁘다. 사기 잘 치고 거짓말 잘 하고 관광객 등쳐먹기나 하고 역사유적조차 관리할 줄 모르고 정부는 썩었고 공무원들은 뇌물을 받고 남자들이 나서서 매춘을 한다. 교활한 독재자와 썩은 관리들, 썩은 세상에 순응해 살고 있는 나약한 국민들. 이 소설이 이런 현실에 대한 질타가 아니고 무엇이랴. 결국 모든 반란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간 채 여전히 빈곤과 억압 속에 죽어지내야 하는 게벨라위 사람들. 책은 오래전에 쓰인 것이지만 이집트 정치상황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처럼 보였다.


몇 달 전에 마흐푸즈가 이 책이 이집트에서 출간될 수 있도록 해달라며 아즈하르 성원 앞에 머리를 숙였다는 외신기사를 읽었다. 이집트의 지식인들은 양심의 보루로 존경받았던 마흐푸즈의 행동에 충격을 받고 비판들을 했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의 책을 자기네 사람들에게 읽히고 싶은 늙은 작가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그러니 소설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권력과 인간성에 대한 마흐푸즈의 통찰력이 어디 이집트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모래바람 날리는 사막 마을의 이야기는 힘과 지혜와 자비를 겸비한 영웅을 원하면서 추종적이고 비겁한 삶을 은근히 바라는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며칠간 손에서 놓지를 못했고, 다 읽고난 지금도 마음이 사막을 붕붕 떠다니는 것 같다. 사막의 모래와 물담배 연기냄새가 코끝을 맴도는 것 같다. 이 책은 내게 또 하나의 ‘무서운 소설’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돌바람 2006-07-21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도적과 개들> 봤어요? 안 봤음, 나중에 바꿔보자. 내가 갖고 있는 책은 벽호에서 나온 <도적과 개들>이구요, 장편 <쉰다섯 개의 거울>도 수록되어 있어요.

딸기 2006-07-22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꿔보면 좋지! 안그래도, 좀 더 읽었으면... 하고 있었는데.
 
유전자, 사람, 그리고 언어
루이기 루카 카발리-스포르차 지음, 이정호 옮김 / 지호 / 200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를 읽을 때 매우 찬탄하면서 그 바탕이 된 윌리엄 맥닐의 책과 카발리-스포르차의 책을 꼭 읽어보고 싶었는데, 그동안 나오지 않았거나 절판됐던 두 사람의 책이 작년에 잇달아 출간됐다. 전자는 ‘전염병의 세계사’이고 후자는 바로 이 책 ‘유전자, 사람, 그리고 언어’다. 말하자면 이 책들은 세트로 묶어서 함께 공부하면 좋은 것들이다. 맥닐의 책은 다이아몬드가 언급했던 ‘주저(主著)’에 해당되고, 카발리-스포르차의 이 책은 주저라기보다는 강연 원고를 정리한 것이다. 1994년 미국에서 출간됐다는 ‘인간 유전자들의 역사와 지리학’을 읽을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그 책은 번역돼 나오지 않았으니 그냥 이 책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주저’가 아니라고 했지만 책은 아주 재미있었다. 페이지마다 노란 색연필로 밑줄 그은 부분이 많았다. 그만큼 찬찬히 정리해가며 공부할 것들이 많았다는 얘기다. 책은 아프리카에서 탄생한 현생 인류의 조상들이 지구상으로 흩어져나간 과정(인류의 ‘팽창’)을 유전적, 언어학적으로 분석한다.

유전자 분석이라는 방법론이 등장한 뒤 필드워크를 통해 특정 생물종을 조사하는 방식의 ‘개미 생물학’(에드워드 윌슨 류)은 분자생물학에 주류 자리를 내준 것 같다. 카발리-스포르차는 ABO식과 RH + - 식 혈액형 같은 기본적인 유전적 대립인자에서부터 지중해빈혈증 같은 종양들까지 포괄하는 좀더 복잡한 단백질 대립인자들을 이용해 인류 조상들의 이동 경로를 살핀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의 초창기 이동 경로를 추측하는 두 가지 축은 유전자와 언어다. 고도의(나로서는 알기 힘든) 수학적 계산을 이용한 ‘유전자 거리’라는 것을 통해 각 대륙 사람들의 유전적 거리와 분기(分岐) 시점을 추정하는데,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은 특성상 ‘가설’일 수밖에 없지만 가설을 수립해나가는 과정이 구체적이고 재미있었다. 동시에 저자는 언어학적인 분석을 통해 유전자 거리를 보완해간다. 고고학에서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의 오차를 나이테 측정법으로 보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점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유전자와 문화의 ‘공진화’를 폭넓게 받아들이고 있다.

눈에 띄었던 것은 인류 팽창 경로를 유전적, 언어학적으로 추적하면서 ‘주성분 분석’이라는 방법론을 도입한 점이다. 예를 들자면 유럽인들의 이동 역사를 살피는 데에는 여러 가지 고려할 요소들이 있다. 가장 먼저 이뤄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것은 중동(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오늘날의 유럽 대륙으로 농업이 전파되고 인류의 대규모 이주가 뒤따랐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첫 번째 주성분’이 된다. 유럽의 북쪽과 남서쪽을 각기 출발점으로 해서 이뤄진 두 번째 팽창은 ‘두번째 주성분’이 되고, 헝가리에 우랄어족을 형성케한 초원 유목지대(흑해 북부)로부터의 팽창은 세 번째 주성분이 되는 식이다. 이렇게 다섯 개의 주성분을 골라 각각 1번부터 5번까지 순서로 가중치를 적용하는 방식이다.

역자 설명을 보니 카발리-스포르차는 특히 수학적 모델을 능숙하게 다루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덕택에 이 책은 역사책이면서 생물학 책이면서 뭔가 멋져 보이는 수학모델들까지 등장하는 알찬 저술이 됐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힌 학제간 연구 방식을 직접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에 소개된 연구가 실천적으로는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기 위한 작업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 점에서도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 일맥상통한다(다이아몬드가 카발리-스포르차의 작업에 워낙 많이 의존하고 있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다).


아마도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한 인종이 생물학적으로 우월하다는 믿음”이라고 말한 것이 인종주의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 적절한 정의일 것이다. 물론 언제나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체로 자신들이 속한 인종이 생물학적으로 우월한 유전자, 염색체, 또는 DNA를 가지고 있어서 다른 인종들에 비해 월등하다는 믿음이 바로 인종주의다. 현재의 미국 상황이 바로 인종주의적이다. 외국에서 미국으로 전화를 걸 때 맨 먼저 국가번호 1을 눌러야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p.20)


저자는 인종주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뭐, 새로울 것은 없다. 뒷부분 미국에 대한 것은 대단히 ‘포괄적인 해석’이며 다분히 시니컬한 풍자의 냄새를 풍기지만 말이다. 저자는 "인종주의를 부추기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자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려는 욕망"(p.22)이라고 지적한다.

적어도 서구에서, 최근에는 인종주의를 드러내놓고 말하는 것이 금기시돼 있다. 문득, 어쩌면 지금은 ‘종교’가 이런 ‘불만 떠넘기기’의 도구로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야 아직까지도 ‘근거 없는 인종주의’가 판을 치고 있지만 근래에는 미국 따라하기가 지나치다 못해 ‘이슬람 미워하기’까지 따라하는 듯하다. 모든 분란의 원인을 특정 종교로 몰아붙이는 행태는 신(新)인종주의 내지는 ‘문명충돌주의’로 명명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구조적인 무지 -대한민국의 서구 추종적 교육에서 유래된-에서 나온 단순한 인종주의도 있지만 말이다.

여담이지만 몇 달 전 아프리카에 다녀오면서 “흑인들은 유전적으로 머리가 나쁘지 않으냐”라는 말을 듣고 기겁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생각나서 하는 얘기다. ‘배울 만큼 배운 분이 왜 이러시나’ 싶었지만 대화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던지라 긴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 말을 했던 분이 우리나라의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을 대표한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 아무튼 그것이 ‘인종에 무지해 인종주의에 넘어가버린’ 대한민국 사람들의 현실의 일단임은 분명하다.


인류는 기나긴 시간 동안 생물학적, 문화적 변이를 거쳐 왔다. 많은 이들이 문화적 변이와 생물학적 변이를 혼동한다. 아프리카의 대학생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해서 미국인들(유전적으로는 참 의미 없는 기준이다)보다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이 딱 그런 태도다. 인종주의의 첫 번째 징표는 '이러한 우세함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다고 믿는 것’(p.21)이다. 카발리-스포르차는 생물학적 변이 중에도 ‘눈에 보이는 변이와 보이지 않는 변이’가 있다고 말한다. 이를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도 여러 가지 함정들이 존재한다. 지구는 둥글다. 유전적 변이는 불연속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세상에는 얼굴이 검은 사람/흰 사람/노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간 정도로 갈색인 사람, 많이 검은 사람, 옅은 갈색인 사람 등등 채도 단계별 색상표처럼 여러 가지 얼굴빛을 한 사람들이 지구를 덮고 있다. 수많은 중간단계들이 이어져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무시하고 단순화의 덫에 걸린다.

더욱이 인종주의의 가장 강력한 기준이 되는 피부색과 몸의 크기는 인간 진화 전체에선 아마도 최근에야 진화한 형질로 보인다(p.25)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기후의 영향으로 변화된 ‘몸 표면’ 만을 본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종적 순수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또한 인간은 이형 접합 즉 서로 다른 유전자들이 만나 섞일 때에 질병 감염 위험도 줄어들고 더 강해진다. 인간이라는 종의 생물학적 복잡성으로 볼 때 ‘인종적 차이들’이라는 ‘몸 표면’의 형질에 관여하는 유전자 수는 상대적으로 아주 적다. 저자의 말마따나, 오늘날 인류는 인공적인 기후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피부색쯤이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외국인 노동자들(요새는 이들을 ‘코시안’이라 부른다고 들었다) 차별을 밥 먹듯 하는 이들이야말로, 골치가 좀 아프겠지만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바스크나 베르베르 등에 대한 내용들도 재미있게 읽었다. 바스크라고 하면 아슬레틱 빌바오나 이천수가 뛰었던 소시에다드 같은 축구팀들, 혹은 EPA 폭탄테러 따위 밖에 모르고 있었다. 유전적, 언어학적으로 유럽인들과 그렇게 많이 갈라지는 줄은 미처 몰랐다.


두어군데 앞뒤 표기가 일치하지 않은 것이 나와 ‘쪼가리 번역’을 의심했는데 번역자가 역자 후기에 “학부생들에게 6장 가운데 4장을 애벌번역을 시켰다”고 설명을 해놓았다. 이탈리아 토리노를 영어식으로 ‘튜린’이라 표기한 것을 빼면 대단히 양심적인 번역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번역자는 유전학자라는데 요사이 언론에서 세포주(Cell Line)라고 하는 것을 ‘세포선’이라고 했다. 유전학자인 저자가 기본적인 용어를 몰랐을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세포주’라는 말이 일본어 내려받은 번역인지도 모르겠다.

용어 사용에서는 제목의 Popoli(people)를 ‘사람’이라 옮기고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는데 타당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카발리-스포르차가 다루는 내용은 대개 민족이라는 개념이 생기기도 전의 인류에 해당되는 것들인지라 ‘민족’으로 옮기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ethnography를 ‘인족(人族)’이라 한 것도 눈에 띄었다. ‘민속지학’ ‘민족지학’ 등으로 하는 것이 매번 어색했는데 ‘인족’이라는 말이 쓰여도 괜찮을 듯 하다. group을 ‘모둠’이라 하고 슬기사람(호모 사피엔스) 곧선사람(호모 에렉투스) 손쓴사람(호모 하빌리스) 등의 한글 표현을 고집한 것도 칭찬해주고 싶다. (이왕 애쓰는 김에 번역자 註를 맨 뒤에 몰아넣지 말고 해당되는 페이지 말미에 넣었으면 더 편했을 것 같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일레스 2006-03-14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리뷰는 항상 좋아요 아잉*-_-* 언젠가 저 세 권을 다 몰아서 사리라 결심해 봅니다. -ㅅ-;

딸기 2006-03-15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세 권을 다 몰아서 사셔서 꼭 읽어보셔요 ^^

로즈마리 2006-04-12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끌리는 군요..나중에 맘 먹고 함 봐야 할 듯..ㅋ

딸기 2006-04-13 0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즈마리님 취향에 맞을 것 같아요. :)
 
마야 - 합본 양장, 소설로 읽는 진화생물학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이용숙 옮김, 최재천 감수 / 현암사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군더더기 겉표지 없는 하드커버에 바랜 듯한 종이, 책 모양이 아주 맘에 든다. 가아더의 전작인 ‘카드의 비밀’을 설명할수 없을 정도로 좋아하는지라, ‘마야’에 대해서도 한껏 기대를 하고 있었다. 책을 사놓은지는 좀 됐는데 이래저래 읽지를 못하다가 며칠 전에야 책을 펼쳤다. 역시, 기대했던 대로! ‘카드의 비밀’ 후속편이라 해도 되겠다. 이번 책에도 조커가 등장하고 트럼프 카드들이 나온다. 하지만 책의 줄거리는 전작과 전혀 상관없으니 그저 기분좋게 추억을 떠올리듯 카드의 비밀을 간간이 떠올려가며 읽었다.

‘소설로 읽는 진화생물학’이라고 되어있고 최재천 교수가 감수자로 이름을 올려놨다. 가아더가 대체 어떤 식으로 진화생물학을 다뤘을까, 하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진화생물학이라는 소재보다는 나는 오히려 얼마전에 읽었던 아서 클라크의 SF 소설에 나오는 절대적인 정신이라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춰서 ‘마야’를 읽었다.


이 책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다. 첫째, 생물학 개념들을 다룬 묘하고 현학적인 표현들, 폼 잔뜩 잡은 멋진 구절들에 몰두하며 읽는 방법. 예를 들면 이런 구절이다.


어떤 것이 무無에서 생겨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느냐고 우리는 묻는다. 혹은 반대로, 어떤 것이 끝없이 항상 존재할 가능성은 어느 정도나 되느냐고 물어본다. 어찌 됐든, ‘우주의 물질이 어느날 아침에 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비며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될 가능성’을 점친다는 게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일까.


두 번째 방법은, 저자가 화두로 던지는 철학적인 주제들이 머리 속에서 윙윙 거리는 것을 느끼면서, 갈피를 못 잡게 붕 뜬 상태로 눈길 가는대로 글자를 따라가보는 것,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잠시 창밖을 쳐다보면서 유한한 삶에 대해 과연 나는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를 반문해보는 것. 나는 내가 영원한 삶을 꿈꾸는 인간이라는 걸 확인해버렸다.


내 삶이 끝난다고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솔직히 말해서 나는 벌써 거의 지쳐 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나를 화나게 하는 건, 내가 일단 죽고 나면 절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이야. 결코 현실로 되돌아올 수 없다는 거지. 꼭 여기로 되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어. 지구가 속해 있는 이 은하계로 말이야. 장소 문제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면, 나는 이곳과는 전혀 다른 은하계에서 내 운명을 시험해보는 것도 생각해... 그러니까 출발이 문제가 아니라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이 문제인 거지.


나는 도롱뇽과 같은 종족에 속해. 내가 이처럼 짧은 시간만 여기 머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내 뇌는 지나치게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는 거야. 삶이 얼마나 짧은지, 내가 얼마나 철저히 내버려져 있는지를 깨달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서글프면서도 화나는 일이야. 그건 정당하지가 않아.


세 번째 방법. 책에 등장하는 기묘한 ‘아방가르드 양서류’ 중 누군가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읽는 방법. 인간이란 실은 얼마나 기묘한 존재들인지! 나는 노르웨이 출신의 썰렁한 생물학자 프랑크에게 동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꽤 긴 시간을 한눈에 조망하려는 시도를 해왔어. 그러다 보니 벌써 호기심 가득한 열두살 때 빅뱅을 알게 되었고 우주의 광대한 거리에 대해서도 줄줄 꿰게 되었지. 점점 이해력이 늘면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오십억 년이나 된 별이고 우주는 그보다 서너 배는 더 늙었다는 사실이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되고 말았던 거야.


네 번째 방법, 연애소설로 읽는 것. 책은 피지의 타우베니라는 작은 섬, 날짜변경선에 위치한 최후의 낙원에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아내와 몇 달 전에 헤어졌지만 마음으로는 아내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생물학자, 한때 잘나가는 플라멩고 댄서였던 아름다운 스페인여성과 그 애인, 애증으로 똘똘 뭉친 속물 아버지와 이상주의적 환경운동가 딸, 아내와 사별한 중늙은이 작가. 진화에서 ‘진보’라는 것은 적절한 표현인가? 지구의 역사에서 어느날 양서류가 뭍으로 올라온 것은 우연한 사건이었나? 혹은 지금 이 순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세계정신이 철저한 계획 아래 이룩한 업적이었나? 이 모든 것에 대한 토론은 결국 ‘사랑’으로 향해 간다.


‘우리는 누구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이제까지 내가 이 세계를 얼마나 일반화하여 이해했고, 지상에서의 내 짧은 삶을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축소시켜 바라보아왔던가를 깨닫게 되었지. 안나와 호세는 내 안에서 잠자고 있던 생각, 그러니까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모험인가를 일깨워준 셈이야.


인도 철학에서 브라마와 대비되는 환영幻影을 가리키는 마야, 고야의 두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 마야, 독특한 역법曆法을 썼던 남미의 제국 마야. 역자의 말대로 ‘꿀벌 마야’를 제외하고, 우리가 선뜻 상상할 수 있는 여러 ‘마야’들이 중의적으로 책 곳곳에 등장한다. 마야는 마야대로 재미있고, 미술사는 미술사대로 재미있고, 등장인물들(그리고 도마뱀 한 마리)의 대화는 대화대로 재미있다.


‘가든 아일랜드’라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최후의 낙원’이라는 말이 참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어. 실제로 그 이름을 쓰는 것이 적합할 거야. 왜냐하면 몇십 년만 지나도 벌써 그 ‘최후의’라는 단어를 ‘잃어버린’으로 바꿔야 할 테니까 말이야. 이 섬을 찾아오는 많은 관광객들은 그 작은 차이를 아마 알아차리지 못할 거야.


‘천부의 권리’라는 개념은 이천 년이 넘는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게 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묻고 싶어. 도대체 우리는 언제 ‘천부의 의무’란 개념을 사용할 만큼 충분히 성숙할 수 있을까?


오늘날 그들은 쉘과 텍사코가 되었지. 이름 없는 네발동물이 순환기 속으로 들어간 거야. 그들은 세계정신의 검은 피야. 너 그런 거 생각해본 적 있어? 자동차가 백악기 시대의 피를 기름 탱크에 채우고 이 근방을 돌아다닌다는 생각 말이야.


최후의 낙원, 천부의 의무. 인류의 오만에 대한 촌철의 비판은 덤으로 얻은 수확이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딧불,, 2006-03-06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슈타인 가아더야 뭐 두 말이 필요없죠.
근데 딸기님, 요사이 책 무지 빨리 읽으시네요.
예전엔 기록을 안하셨던가요??

딸기 2006-03-06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옴마낫 반딧불님 벌써 오셨네요. 접속중이시군요 ^^
요새 책 무지 빨리 읽는게 아니라, 며칠 열심히 읽은 거예요.
근래 거으 못 읽었더랬거든요 ^^

반딧불,, 2006-03-06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기는 책도 한번 불댕겨지면 무섭게 읽히죠.
무엇이나 마찬가지듯이..
저는 아이들 책 리뷰도, 페이퍼도 안써져요ㅠ.ㅠ
아이들 책 읽힌 것 리뷰 쓰러 들어왔다가 또 딴짓만 하다 갑니다..
심란.심란.
이렇게 글이 안써져도 심란해요. 책도 안읽히구요.


...참, 좋은밤~~!!!(눈이 감기네요)

딸기 2006-03-06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요새 실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눈코뜰새 없이 바쁘고 기분드럽고 신세 한심하고 몸은 피곤하고 뭐 그랬답니다. 낄낄

반딧불,, 2006-03-07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낄낄..저도 그렇슴돠^^

해적오리 2006-03-07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마야 라고 해서 사람 이름쯤으로 생각했는데, 그 마야가 그 마야가 아니었군요.^^;;
일단 찜해둡니다. 전 소피의 세계도 아즉 안 읽었어요. 1권만 딸랑 사놓구요...

딸기 2006-03-07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 이름도 맞습니다. ^^
저도 소피의 세계 안 읽었어요, 저 사람 책은 '카드의 비밀' 밖에 안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