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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수도 아크라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부두부람의 라이베리아 난민촌. 27일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직원들과 함께 부두부람 캠프를 찾아갔다. 아크라 시가지를 벗어나 노점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교외로 나가니 구릉 위에 판잣집들이 세워진 난민촌이 나타났다.

가나 부두부람에 있는 라이베리아 난민촌 입구



귀환사무소에서 상담을 기다리는 사람들

캠프 입구 파란색 컨테이너 모양의 귀환사무소 앞에서는 라이베리아 귀환을 원하는 이들이 고향의 가족들과 연락할 길을 찾기 위해 상담실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부두부람 캠프는 1990년 라이베리아 내전 때 도망쳐온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난민촌이다. 4만2000명이 거주하는 이 곳은 57만㎡(약 17만평) 면적에 병원 1곳과 45개의 학교, 교회가 있고 독립적인 신문도 있다. 자치단체 격인 복지위원회가 치안, 여성-아동, 보건, 영양 등 분야별로 7개 상임위원을 두고 행정을 맡는다.



에이즈 예방 포스터



난민촌의 유일한 의료시설인 성그레고리병원



난민촌 자치단체 격인 복지위원회의 회의

내전을 피해온 주민들에게 난민촌에서의 삶은 또다른 전쟁이었다. 화장실은 12곳 뿐, 먼지 날리는 흙길에서는 배설물 냄새가 났고 맨발의 아이들이 이방인을 기웃거렸다. 물 공급과 하수 처리가 열악해 질병이 많고 영양공급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난민촌 내 성 그레고리 병원 앞에는 프랑스 정부가 기증한 약들이 컨테이너에 쌓여 있었다. 의사는 단 2명 뿐. 약품은 원조에 의존하고 있으며, 병원에서 에어컨이 작동되는 곳은 약품보관실 뿐이다.
복지위원회 측은 아직도 주민 1만명이 식량 배급에 의존하고 있다면서 "지원을 늘려 달라"고 호소했다. 가나 정부는 지난 2000년 모든 자금지원을 끊었다. 난민들은 가나 정부와 구호기관들에 더 많은 도움을 요구하고 있으나 UNHCR 측은 난민들이 `자립'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라이베리아에서는 올초 아프리카 첫 여성 국가원수인 엘렌 존슨-설리프 대통령이 취임했다. 복지위원회 앞 게시판에는 고국행을 권고하는 미 국무부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UNHCR도 난민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가 국가재건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성그레고리 병원 앞에는 `자발적 귀환'을 권유하는 대형 포스터가 걸려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세요, 라이베리아가 살아나고 있습니다(Come Home! LIBERIA Revived!)".





귀환을 권고하는 포스터와 미 국무부 공고문

그러나 정작 난민들은 귀환을 원치 않는 듯했다. 마을 어귀에서 먼지 앉은 화장품 따위를 팔고 있는 비아트리스(23)는 1990년 부두부람에 와 어린 시절을 모두 여기서 보냈다.
"지금은 갈 수가 없어요. 여기서 사는 것도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장사를 하면서 살 수가 있잖아요."
병원에서 만난 크리스티나(32)도 고향에는 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가족들 모두 흩어져서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여기서는 아이들을 학교에나마 보낼 수 있으니 떠나고 싶지 않다." 복지위원회의 툴라 부위원장은 "우리는 아직 돌아갈 준비가 돼있지 않다"고 털어놓으면서 "가나에서 기술교육이나 직업교육을 좀더 받고 고국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귀환 실적은 저조하다. 1997년 라이베리아 상황이 잠시 호전됐을 때 난민 2800명이 돌아갔고 1900명은 유럽이나 미국 등으로 갔다. 시에라리온의 그래프튼과 케네마 등지에도 이와 비슷한 라이베리아 난민촌이 형성돼 4만2000여명이 살고 있다.
난민촌을 나오려는데 주민들이 몰려들어 "이메일 주소를 알려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함께 난민촌을 찾았던 국제이주기구(IOM)의 김철효씨는 "한국에 난민신청을 하려는 라이베리아인들도 많다"고 전했다. 

언제나 운명은 약자에게 더 가혹하다

난민촌에서의 삶은 누구에게나 각박하지만, 특히 고통을 받는 것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부두부람 난민촌에는 교회와 연결된 학교 45곳이 있다. 교사 숫자가 총 500명이고 학생은 대략 1만1000명이다. 4000명 가까운 아이들은 학교 시설부족으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늘어나는 아이들 숫자를 학교 시설이 따라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민촌 안에 있는 성그레고리 병원의 의사 잘랄렘은 "매달 30∼40명의 아이들이 병원에서 태어난다"며 "집에서 태어나는 아이들까지 합치면 아마 그 숫자는 2∼3배로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높은 출산률, 열악한 위생, 영양공급 부족 때문에 질병이 많고 특히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된다. 병원 안팎에는 "학위를 받을 것이냐 아이를 낳을 것이냐"라는 문구가 쓰인 산아제한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학위를 따겠습니까, 아이를 낳겠습니까- 여성들의 선택을 묻는 포스터



얘네들은 뭘 믿고 이렇게 귀여운건지.

특히 난민촌에는 라이베리아 내전에서 남편을 잃거나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이 많다. 난민촌 내부에서도 여성들을 상대로 한 폭력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맞서 여성인권을 확보하려는 여성단체들의 활동도 최근 몇 년 간 비교적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여성 이웃감시단'에 속한 20명의 여성들은 국제기구 등과 협력해 팀을 만들어 주민 자치체인 복지위원회에서 여성 발언권을 높이려 애쓰고 있다. 어린 나이에 출산한 소녀들을 돕기 위한 `10대 엄마 프로그램'은 미 정부 원조금으로 나이어린 엄마들에게 기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은 가나 수도 아크라의 여성인권센터에 난민 여성 30여명을 보내 성폭력 예방운동 등을 가르치고 있다.

가나 내 난민 현황

가나는 내전과 기근에 휩싸인 아프리카 중·서부 지역에서 드물게 안정된 정치상황을 유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주변 지역 난민들은 가나로 몰려든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등 국제기구들은 가나 수도 아크라에 중·서부 아프리카 지역 허브들을 두고서 라이베리아나 토고, 코트디부아르 등지에서 온 난민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고 있다.
가나에 들어와 있는 난민들은 6만2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아크라 근교 부두부람 캠프에는 라이베리아 내전으로 쫓겨난 이들 4만2000명이 거주하고 있고, 아크라에서 300㎞떨어진 서부 크리산 지역의 캠프에도 난민들이 살고 있다. 중부 볼타 호수 지역에는 지난해 이웃나라 토고에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소요사태를 피해온 난민들이 살고 있다. 그 밖에 아크라 등지에 흩어져 있는 `도시형 난민'들의 경우는 정확한 수치조차 파악하기 힘든 형편이다. 가나 정부와 구호기구들은 난민들에게 귀환을 종용하고 있으나 난민들 대부분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더욱 열악한 고향으로 가기보다는 아크라에 정착하기를 바라고 있다. UNHCR는 올해 안에 가나 내 난민 1만명 이상의 귀환을 유도한다는 계획이지만 결과는 예측하기 힘들다. UNHCR 아크라사무소의 리사 콰르시에는 "본국으로의 귀환을 지원하거나 제3국 이주를 알선하는 방안, 가나 내 정착을 돕는 방안 등을 다각적으로 모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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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일로 외국에 간 것이 여섯 번이다. 두 번은 일본, 두 번은 이라크, 두 번은 아프리카. 일본에 갔던 두 번을 빼놓고 나머지 네 번은, 우울해져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여행 아닌 여행이었다. 동료들은 내게 “남들이 쉽게 가볼 수 없는 곳에만 다니니 좋겠다”고들 한다.

솔직한 나의 마음은-- 남들이 다 가는 ‘좋은’ 곳들만 돌아다녔으면, 싶은 것이다. 그냥 홀가분하게, 깨끗한 거리, 이쁘고 멋진 집들, 고풍스런 성채, 환상적인 노을, 바쁘게 일하더라도 이런 걸 보면서 일하고 싶단 말이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아, 좋았다’ 하면서 푹 잠들 수 있는. 그런 출장을 바라는 건 무리일까?

 
 
 
 
시에라리온 수도 프리타운 외곽의 주이 마을에는 노르웨이 구호기구의 지원으로 만든 ‘앰퓨티(Amputee) 마을’이 있다. 내전 기간 소년병들에게 팔다리가 잘려나간 이들을 위한 일종의 정착촌이다. 지난 2일 국제이주기구(IOM) 직원들과 함께 주이마을을 찾았다. 일자리도 없고 정부로부터 변변한 지원도 받지 못하는 내전 피해자들은 대개 낮동안 프리타운으로 구걸을 하러 나가기 때문에 마을은 한산했다. 뭉툭하게 절단된 팔에 목발을 짚고 다니는 이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절단·전쟁피해자협회(AWWPA)의 알 하지 주수 자카(48) 회장은 갈고리가 달린 의수를 들며 취재진을 맞았다. 1999년 반군이 프리타운을 장악하기 위해 공세를 펼쳤을 당시 그는 은행에서 일하면서 시내에 거주하고 있었다. 반군이 당시 14세였던 딸을 납치해가는 것을 막으려다가 붙잡혀 양팔을 잃었다. 사흘간 치료도 못한 채 피를 흘렸다는 그는 “뒤에 의사로부터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소년병들은 ‘손목을 잘라라(Cut Hands)'라고 쓰여진 티셔츠를 입고 만행을 저질렀다”면서 “다만 눈길을 끌기 위해 그런 짓을 한 반군들은 인간이 아니었다”고 몸서리를 쳤다. (진정 의문이다. 대체 그들은 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자카 회장처럼 팔을 잘린 이들은 대부분 반군들에게 삶의 터전을 잃고 정부와 국제적십자사 등이 마련한 구호캠프로 옮겨졌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지금도 이들의 정확한 피해상황에 대해서는 조사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협회 쪽에서는 6000~7000명 정도가 절단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카 회장은 “무장해제된 소년병들에 대해서는 정부와 구호기관들이 지원을 해주는데 정작 피해자인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국제사회의 관심과 도움을 호소했다.

 
이런 사람을 만나는 건 너무 괴롭잖아. 난 사회운동가도 아니고 박애주의자도 아니고 사해동포주의자도 아니지만 그저 한 사람의 지구인으로서, 괴롭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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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세계에서 가장 끔직하고 참혹한 내전을 겪은 나라. 아프리카 서쪽 대서양에 면한 빈국 시에라리온을 찾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가나 수도 아크라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라이베리아의 먼로비아에 들렀다가 시에라리온의 수도 프리타운으로 향했다. 비행기는 프리타운을 지나 세네갈을 거쳐 종착점인 감비아로 가는 ‘완행비행기’였다.




공항에 내려서 이런 헬기를 타고 시내로 들어갔어요.


프리타운 공항에 내린 것은 지난 30일. 시에라리온 내 9개 공항 중 유일하게 포장된 활주로가 있는 곳이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려면 육지를 파고들어온 만(灣)을 건너야 하는데 교량이 없어 군 수송기를 개조한 헬리콥터를 타고 시내로 이동했다. 내전(1991~2002년)이 끝난 지 4년이 지났지만 프리타운 시내에는 그 상흔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아직까지도 국가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나라라고는 볼 수 없는 탓에, 거리는 쓰레기장이었고 무너져가는 집들에 꾀죄죄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내전은 온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 황폐함은 ‘잃어버린 10년’ 따위의 말로는 형용이 되지 않는다. 2001년부터 이곳에서 구호활동을 벌여온 국제이주기구(IOM) 프리타운사무소는 내전 기간 교육시설의 88%가 파괴됐고 문맹률이 85%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10달러, 말 그대로 세계 최빈국이다. 전체 도로 1만km 중 포장도로는 895km 뿐이어서 프리타운을 벗어나면 이동하기가 쉽지 않다. 전력공급, 물 공급이 최대 현안. 전국적인 전력 공급망이 없어 건물마다 발전기 돌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내전 기간 시에라리온에서는 250만명이 집을 떠나 피난을 했다. 전쟁 종류 뒤 20만명 가량이 귀환했지만 아직도 200만명은 유민(流民)이 되어 국내를 떠돌고 있다. 기니와 라이베리아, 감비아 등에서 난민이 된 사람들도 많다. 그나마 존재했던 인프라는 내전 기간 남아나지 못했다. 시에라리온이 자랑하던 다이아몬드 광산은 군벌들 손에 넘어가 파헤쳐졌다. 삼림 남벌과 토양 침식, 물 부족 때문에 ‘환경 재앙’ 우려도 심각하다.








이 사진들을 보고는 누군가가 '난민촌이냐'고 묻더군요. 프리타운 시내 중심부랍니다.


내전의 상처에서 헤어나오기 위한 재건의 몸부림은 몹시 힘겨워보였다. 시에라리온에 있는 닷새 동안 나는 내내 프란츠 파농의 책 제목,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삶이 척박해서일까,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웠고 눈빛은 적대적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도시는 쓰레기장이었고 주민들은 걸인들 같았고 젊은애들은 모두 부랑아같았다. 85% 문맹, 산업도 공공서비스도 없는 곳, 치유될 수 없는 폭력의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


유엔은 지난해 말 시에라리온평화유지임무(UNAMSIL)를 공식 종료하고 평화유지군을 철수시켰다. 현재 국제기구 중에서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과 유엔개발계획(UNDP) 등이 남아 유엔통합사무소(UNIOSIL)를 구성해 활동을 벌이고 있고, IOM 같은 기구들이 재건작업을 돕고 있다. 1996년 집권한 아메드 테잔 카바 대통령은 2002년 대선에서 연임에 성공했다. 국내 유민들의 재정착과 소년병들의 사회통합 작업은 계속 진행중이다. 정부는 빈곤감소전략계획(PRSP)이라는 이름으로 가난퇴치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붐부나 지역에 건설될 예정인 대규모 발전소는 10년째 공사 중이고, 공항과 시내를 잇는 교량은 카바 대통령의 첫 공약이었음에도 착공조차 되지 않고 있다. IOM 프리타운사무소에서 2001년부터 구호활동을 펼쳐온 앤드루 초가 소장은 “사람들이 일하는 법을 잊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IOM에서는 유럽 등지에 나가있는 시에라리온 출신 전문인력을 고국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한시적 귀국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지만 참여는 저조하다. 프리타운 외곽에 소규모 음료 공장과 직물 공장 따위가 있기는 하지만 전국적으로 기업 활동은 거의 없다 해도 될 정도이며 무엇보다 교육받은 인력이 없다는 것이 큰 문제라고 했다. 여전히 외화수입의 90%는 내전의 원인이 됐던 다이아몬드에서 나온다. 최근 광산들이 위치한 코노 지역에서 분리독립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도 정부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것은 내전의 상처였다. 1990년대 중반 다이아몬드 광산을 노린 군벌들은 라이베리아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일으켰다. 마약이 주입된 소년병들은 군벌들이 조종하는대로 민간인들의 사지(四肢)를 자르고 유아들까지 성폭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IOM에서 일하고 있는 카트리나(33)는 반군이 프리타운까지 들어왔던 1999년 만삭의 몸으로 집 안에 숨어지냈던 악몽을 떠올리면서 “아무도 잊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시에라리온 사람들이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자원 덕분이다. 시에라리온은 널리 알려진대로 다이아몬드와 철광, 티타늄광과 보크사이트 등을 수출하는 천연자원 부국이다. 외화수입의 90%는 내전의 원인이 됐던 다이아몬드에서 나온다.

아프리카 외교에 발벗고 나선 중국은 프리타운 대사관에도 직원 20여명을 상주시키고 있고, 식민종주국이었던 영국을 비롯해 유럽국들과 미국에서도 투자자들이 다시금 프리타운행을 저울질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프리타운에서 외국투자자 포럼이 열리기도 했다. 한국은 아직 대사관을 개설하지 않았지만 교민 50여명이 식당 등을 경영하며 살고 있다.

 


프리타운에도 이런 곳은 있지요. 빈투마니라는 바닷가의 호텔인데요,
저기에 중국식당이 있어서 점심을 먹으러 갔었어요.
 

 
높은 건물에서 바라본 시가지 풍경. 멀리서 보니깐 제법 그럴싸해 보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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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6-05-16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한 사람의 지구인으로서, 에 동감해요;;;

딸기 2006-05-18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왜 아뒤에 뿡뿡이 붙었나요 치카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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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05-13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하신 서재공사가 멋지옵니다.

딸기 2006-05-1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
 

오지마을 촌장님을 만나다


바삼바 마을에서 제일 큰 집, 야판타 앙투안(60) 추장의 집을 찾아갔다. 집앞에는 `예침포게이'(도저히 이 발음을 따라서 한글로 적을 수가 없다;;)라고 부르는 액막이 흙무더기가 있었고, 그 위에 하얗게 바랜 소 머리뼈가 걸려 있었다. 마당에서는 한 청년이 진흙으로 범벅이 된 채 음식을 저장하기 위한 커다란 토기를 만들고 있었다.

야판타 추장은 1985년 추장이던 아버지가 숨진 뒤 자리를 이어받아 마을을 대표하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은 아버지의 아버지 대에 지은 것으로, 추장은 이 집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아왔다. 마당에는 햇볕과 모래바람에 시달려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여인들과 아이들이 있었고, 추장은 30도를 웃도는 더위 속에서 두꺼운 점퍼를 나름 멋내어 덧입고 있었다. 야판타 추장은 9명의 아내를 두었는데 2명은 죽고 2명은 집을 나갔으며, 현재 5명의 아내와 살고 있다고 했다. 그들 사이에서 낳은 아이는 15명. 결혼한 맏아들이 며느리와 손주들을 거느리고 이 집에 같이 살고 있다.




액운을 쫓는 소머리뼈.



마당에 진흙을 벌려놓고 그릇을 만들고 있다.



주인공들은 까매서 잘 안 보이고 나만 보이네;;

야판타 추장은 전기도 전화도 없는 이 곳에서 평생을 살았고, 외지로 나가본 일도 없다고 했다. 월드컵 본선에서 첫 경기를 펼치게 될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한국이라는 나라도, 월드컵도 모른다며 웃었다. 대가족을 거느린 그의 주수입원은 목화 농사. 목화를 팔아 1년에 50만 세파(약92만원) 정도를 벌어 온 식구가 먹고 산다. 나이든 추장의 바램은 오직 하나였다. 바삼바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고, 정부에서 자신들을 배려해주는 것. 그는 "아무라도 좋으니 우리에게 전기를 주고 우리도 제대로 살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토고 정부는 1970~80년대 대규모 개발 정책을 펼쳤지만 90년대에 들어와 에야데마 냐싱베 전대통령의 장기집권이 국내외적인 비난을 받으면서 유럽 쪽에서 오던 지원이 끊기고 유럽계 기업들도 떠나버렸다. 정부는 현재 유럽연합 측과 원조 협상을 벌이고 있다. 원조가 다시 재개되지 않으면 이 오지에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은 요원하다. 야판타 추장은 "아이들은 외지로 공부하러 나가면 일자리가 없는 이곳으로는 돌아오지 않는다"며 "한국은 잘 사는 나라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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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06-03-10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딸기님이세요? ㅎㅎ
정말 머나먼 곳을 다녀오셨네요.

딸기 2006-03-10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자이크 할 걸 그랬나요 헤헤
제 얼굴까지 팔았는데, 빨랑 추천해주세요!

urblue 2006-03-10 1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ㅎㅎ

딸기 2006-03-10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히히 땡큐, 유어블루님.

chika 2006-03-10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딸기보다 훨씬 이쁘쟎아요! ;;;

딸기 2006-03-10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옆자리 후배가 그러는데요, 뱃살 겹친거 다 보인대요 -_- 나쁜년

로드무비 2006-03-1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
깔끔한 인상이시네요.^^

paviana 2006-03-11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저도 추천 했어요.ㅎㅎ

딸기 2006-03-1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해주신 분들께 감사를...
근데 로드무비님 제가 원래 깔끔한데요, 실은 저 때에는 무지 드러웠답니다 ㅋㅋ

반딧불,, 2006-03-13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컷트 사진을 본 듯 한데.
그 사진보다 더 살은 있는 듯 한데요.
더 부드러워 보여요^^

딸기 2006-03-13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흑 반딧불님... 살이 마구마구 찌고 있어요. 지금은 더욱~ 부드럽;;답니다.

반딧불,, 2006-03-13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그래봤자 66이 충분하시면서^^
흑흑..제 앞에서 살얘기 하심 미버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