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시절에 나는 일년에 두번 정도 브레턴을 방문했는데, 그곳에 가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 집과 식구들이 특히 내 마음에 들었다. 평화롭고 커다란 방, 잘 정돈된 가구들, 깨끗하고 시원한 창문, 멋지고 고풍스러운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창밖의 발코니, 너무 고요하고 너무나 말끔해서 늘 일요일이나 공휴일 같은 거리. 이런 것들 때문에 그곳에 가면 늘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금상첨화로 어떤 재산보다 더 값진 결함 없는 건강과 건전하고 차분한 정신을 물려받았다.

나는 평화로운 걸 아주 좋아하는데다 자극을 찾는 편도 아니어서, 자극이 될 만한 사건이 일어나자 심란해졌으며 오히려 그런 일이 안 일어났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홈 부인(홈이 그 친구의 이름인 듯했다)은 아주 예쁘지만 경박하고 조신하지 못한 여자여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남편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실의에 빠지게 했다는 것이다.

그중 이름에 ‘드de’가 붙는 귀족도 두어 사람 된다고 했다.

브레턴 부인은 누군가를 귀여워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에 대해서도 다정다감한 태도를 취하는 일이 드물었고 종종 그 반대였다. 그러나 그 낯선 꼬마가 미소를 짓자 부인은 아이에게 입을 맞추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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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있을 때와 달리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자기를 잘 드러내지 못하는 게 지민의 성격이었다.

알든 모르든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는 건 나의 성격이었다.

외삼촌은 티스푼으로 커피를 저었다. 이미 충분히 섞었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건 옆에서 보면 두꺼운 알이 하얗게 보이는 안경을 쓴 외삼촌이, 아직은 사십대였던 외삼촌이, 평생 책만 읽은 가난뱅이 책벌레 외삼촌이, 꼼꼼한 교열자로 유명했으나 인터넷과 검색기가 교열을 대체하면서 20세기와 함께 쓸모가 사라진 외삼촌이 자기 머릿속을 뒤지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군부가 판매금지를 시킬 때는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요. 그게 독재정권이 하는 일입니다.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찾아야 해요. 정권이 싫어하는 게 뭔지를. 그렇게 독재정권하의 사람들은 스스로 내적 검열관을 만들어가는 거예요.

저자인 김원씨는 자신을 농부라고 소개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인 투자자문 회사를 운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쉰 살이 되었을 때 뜻한 바가 있어 회사를 정리하고 연고도 없는 경상도 산골로 낙향했다. 그 뜻한 바란 이번 생에 깨닫고야 말겠다는 결심인데, 사십대에 접어든 뒤 나는 주변에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란 적이 있다. 아마도 삶이 힘들고 이제는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도 어려운 나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런데 막상 낙향하고 보니 시골 생활이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 가져간 좋은 책들을 들춰볼 틈도 없이 삼 년이 지나갔다고 한다.

사람들은 인생이 괴로움의 바다라고 말하지만, 우리 존재의 기본값은 행복이다.

파도는 바다에서 비롯되지만 바다가 아니며, 결국에는 바다를 가린다. 마찬가지로 언어는 현실에서 비롯되지만 현실이 아니며, 결국에는 현실을 가린다.

언어는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그 뜻이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이야기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이야기의 형식은 언어다. 따라서 인간의 정체성 역시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진다. 이렇듯 인간의 정체성은 허상이다. 하지만 이렇게 규정하는 것도 언어이므로 허상은 더욱 강화된다. 말로는 골백번을 더 깨달았어도 우리 인생이 이다지도 괴로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미래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다. 계속 지는 한 다음번에 이길 확률은 거의 100퍼센트에 가까워진다.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그는 결국 돈을 따게 돼 있었다. 다만 판돈이 부족했을 뿐이다.

둘은 가장 좋은 게 가장 나중에 온다고 상상하는 일이 현재를 어떻게 바꿔놓는지 알게 된다. 그러면서 그들에게는 희망이 생긴다. 한번 더 살 수 있기를. 다시 둘이 만났을 때부터 시작해서 원래대로 시간이 흐르기를. 그리하여 시간의 끝에,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르렀을 때 이번에는 가장 좋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기를. 그렇게 시간은 거꾸로 흘러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마지막 순간에 이르고 그들은 그 순간을 한번 더 경험한다. 그리고 놀란다. 이토록 놀랍고 설레며 기쁜 마음으로 우리는 만났던 것인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둘은 오랜 잠에서 번쩍 눈을 뜬 것처럼 서로를 바라본다. 처음 서로를 마주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시간은 다시 원래대로 흐르고, 이제 세번째 삶이 시작된다.

책의 모든 문장은 저자의 생각이 뻗어나갈 수 있는 한계의 한쪽에서만 나오죠. 그래서 모든 책은 저자 자신이에요. 그러니 책 속의 문장이 바뀌려면 저자가 달라져야만 해요."

"그렇다면 제가 달라져야 이런 풍경이 바뀐다는 뜻인가요?"
"그게 내 앞의 세계를 바꾸는 방법이지요. 다른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평소 해보지 않은 걸 시도해도 좋구요. 서핑을 배우거나 봉사활동을 한다거나. 그게 아니라 결심만 해도 좋아요. 아무런 이유 없이 오늘부터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거나.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 눈앞의 풍경이 바뀔 거예요."
진호씨가 말했다. 그건 무척이나 놀라운 말이었다.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오직 이 순간의 현재만 존재하죠. 그럼에도 인간은 지나온 시간에만 의미를 두고 과거에서 현재의 원인을 찾습니다. 시간이 20세기에서 21세기로 흐르든, 19세기로 흐르든 마찬가지예요.

용서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기억할 때 가능해집니다. 그러니 지금 미래를 기억해, 엄마를 불행에 빠뜨린 아버지와 그 가족들을 용서하길 바랍니다."

지금의 세상이 내게는 가장 선명하다고.

대부분의 말은 듣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어떤 말들은 씨앗처럼 우리 마음에 자리잡는다.

서로에게서 떨어지는 순간을 참지 못했기에 그 여름, 우리의 일부는 언제나 맞닿아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가 죽기를 결심했다면 나도 그녀를 따라갔을 것이다.

둘 중 하나를 계속 선택하는 도박에서는 지면 질수록 그다음에 이길 확률이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면서. 그 남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어.

메이저리그 투수가 한 말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이기면 조금 배울 수 있지만 지면 모든 걸 배울 수 있다. 지기만 하는 인생도 나쁘지 않아요. 중간에 선택을 바꾸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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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춤이라서 말세인가? 말장난을 하려는 게 아니다. 소설가로서 나는 예언의 내용보다는 그 형식이 언어여야만 한다는 게 더 흥미롭다.

어떤 예언가가 환상 속에서 미래의 뭔가를 봤다고 해도 그는 그것을 자신의 지식 수준에 맞춰 언어로 표현해야만 한다.

실제로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면 모를까, 그걸 언어로 변환한 이상 그 진의는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게다가 번역까지 된다면 왜곡은 피할 길이 없다. 결국 예언은 그 형식 때문에 빗나갈 가능성이 많은 셈이다.

그와 우리 사이에는 남들 눈에도 보이는 책을 읽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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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아픈 기억들이 올라오고 있군요. 그래서 긴장하고 있고, 긴장하면 소화효소가 적게 분비돼서 점점 소화가 힘들어지죠. 소화가 힘들어지기 시작하니까, 예전의 아팠던 기억이 다시 소환되고, 점점 더 불안해지고. 불안하니까 소화효소 분비가 적어지고, 그러니까 소화가 더 안 되고… 악순환이 시작되려는 거예요."

진짜 소화가 안 되려나?’
당연하다. 그걸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 먹기 전부터 불안했으니 소화가 될 리 없다. 결국 소화가 안 되는 날이 하루 더 쌓이고, 이렇게 쌓인 소화불량 경험은 우리를 더 위축시키고 불안하게 만든다.

소화는 부교감신경의 담당 영역이다. 부교감신경은 그야말로 ‘부’교감신경이다. 교감신경과 경쟁하기 힘들다. 부교감신경은 오직 교감신경의 흥분이 잦아들었을 때에만 자기 역할을 슬며시 해낸다.

에너지를 써서 무언가 해야 할 때 필요한 집중, 긴장, 초조, 분노, 흥분, 불안의 신경중추가 교감신경이라면, 부교감신경은 이완, 소화, 배설의 중추이다. 교감신경이 흥분하면 근육이 긴장하고, 침이 바짝바짝 마르고, 동공이 커진다. 장 운동이 멈추고 소화효소의 분비가 줄어든다. 그야말로 소화 불가! 어렵거나 낯선 사람 앞에서 꾸중을 들어가며 밥을 먹었을 때 체하고 마는 것,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교감신경이 흥분되니 소화 기능이 떨어지는 거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전에, 이거 먹고 또 체하면 어쩌지 걱정이 되면 소화제를 먼저 드세요. 그리고 괜찮다고, 나는 소화제를 먹었으니까 이제 잘 소화를 시킬 거라고 편안하게 생각하세요. 괜찮은 날을 하루라도 더 경험하는 게 좋아요. 오늘이 괜찮고 내일이 괜찮아야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믿을 수 있고, 그래야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어요. 불안이 줄어들면 자연스럽게 소화가 되기 시작할 겁니다."

심장이 멈출 것 같고 숨을 못 쉬어 죽을 것 같은 순간을 겪은 이들은,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그 순간을 다시 또 경험할까 봐 긴장하고 불안해한다. 이것이 예기불안이다. 불안해질까 봐 미리 불안한 것. 그리고 이런 걱정과 불안이 결국 공황을 부른다.

"같은 상황에 놓여 있어도 이번엔 다를 수 있어요. 그러려고 약을 쓰는 것이니까요. 괜찮은 날들이 하루하루 쌓여갈수록,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내 안의 힘도 생겨날 겁니다."

근육은 뭉치면 길이가 짧아지므로 목과 어깨의 근육이 점점 짧아지는데, 이렇게 짧아진 근육이 두피의 근막을 잡아당겨, 안구 근처, 양쪽 관자놀이까지 마치 작은 헬멧이라도 쓴 듯 꽉 조이고 욱신거리는 두통이 나타난다.

엉? 이러면 나도 할 게 없는데, 어쩐다? 할 게 없으면 좀 더 자세히 물어보고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것이 그간 경험에서 터득한 진리다.

특히 다른 의사들이 이미 루틴한 방식대로 진료를 했는데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뭔가 모르는 게 숨어 있다는 뜻이다. 다른 의사 선생님들도 다들 실력이 좋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환자의 얘기를 더 섬세하게 들어야 한다. 무엇 때문이라고 환자가 생각하는지도 들어야 한다.

나는 여기까지 생각한 후 해부학 교과서를 꺼냈다. 목 뒤의 근육과 뼈를 보여주면서, 부딪힌 부위가 여기고, 그 아래에는 어떤 조직이 있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회복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사실 피부 밑에는 꽤 조직이 으스러진 상처가 있었을 테고, 이 조직들이 서로 엉겨 붙으면서 회복되는 바람에 지금 목 근육과 두피의 골막까지 잡아당기고 있을 수 있다고, 이것이 두통의 원인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복강경 수술을 받은 환자들도 때때로 이런 종류의 복통을 호소한다. 배를 크게 가른 것도 아닌데 움직일 때마다 불편하다고 한다. 복강경 수술은 구멍을 뚫어서 카메라나 기구를 집어넣기 때문에 크게 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배를 가르는 외과 수술에서와는 달리 층층이 이어 붙일 수가 없다. 그래서 피부, 피하, 근육, 복막이 모두 한꺼번에 한 땀으로 꿰어진다. 서로 다른 복부의 여러 층들이 한데 엉겨 붙어서 흉터로 남는 것이다. 흉터는 작지만, 마치 배에 수직으로 꽂아놓은 못처럼 작용한다. 복부 각 층들의 움직임을 방해하니 날카롭게 당겨지는, 움직일 때마다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생기는 것이다. 이럴 때는 스테로이드 주사 치료가 도움이 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아픔에 공감을 해주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공감은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통증의 이유를 찾아내 이름 붙이는 건, 그래서 환자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주는 건 오직 의료인만이 할 수 있다. 통증에 단순한 공감을 넘어서는 ‘적절한 진단적 공감’이 필요한 때가 있다.

신생아를 돌보는 산모들이 잘 걸리는, ‘드퀘르벵씨병’이라는 손목건초염이 있다. 아기를 들어 올리면서 손목을 자주 꺾다 보니 손목의 근육과 건초 사이에서 마찰이 생겨 염증으로 이어지는 질환이다. 드퀘르벵씨병에 걸린 아기 엄마들은 손목이 조금만 꺾여도 찌릿한 통증을 심하게 느껴, 손을 잘 쓰지 못하게 된다. 이 병은 여자들에게 잘 생긴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팔 근육이 약한데 아이를 주로 돌보게 되는 여자들에게 특히 잘 생긴다. 그러니까 독박 육아도 이 병의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 응급실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 응급실에 산모가 오면 여러모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일단 산모들은, 증상에 관계없이 자신의 상태를 ‘심각하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어, 중환으로 여겨지기를 바란다. 사실 본인과 태아, 두 몫이니 산모들의 불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생식과 관련된 사망이 줄어들면서 너무 많은 것들이 ‘책임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사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아도 장애아는 태어날 수 있고, 누구도 잘못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아플 수 있다.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사망하는 태아와 산모가 생긴다. 하지만, 이젠 그 모든 것들이 엄마들 혹은 의사들의 책임이 되어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외로워서 위태로운 그녀들과 공명하기 위해 나는 그녀들의 몸에 집중한다. 아기가 아닌 그녀들에게 집중. 아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몸을 만드세요!

재개발과 도시재생이 가장 다른 점은 원래 그 동네에 살던 사람들이 계속 살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일 것 같다.

노인정에 가려 해도 어디인지 잘 모르겠고 모두 똑같이 생긴 아파트 단지 사이에서 길을 잃기도 십상이어서, 결국 집 안에만 계셨다고 한다. 요리도, 장 보는 일도, 청소나 빨래도 굳이 할머니가 직접 할 필요가 없는 아들과 며느리의 집에서, 할머니는 잘 유지해오던 일상적인 기능을 일시에 잃어버렸다. 기억력과 판단력 등 인지 기능도 순간에 놓쳐버렸다.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는 데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고, 그 과정은 굉장한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거나 인지 기능이 떨어진 분들일수록 그런 적응이 힘들 수밖에 없다. 반평생을 살던 정든 동네에서 갑자기 쫓겨났으니, 그 상실감과 당혹감이 얼마나 컸을까. 할머니는 자신이 오래 살아오던 그 집에서 내쫓겨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도 없었다.

나는 치매 어르신과 함께 살기를 준비하는 일본 나고야의 한 마을에 간 적이 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인지 기능 장애가 있어도 충분히 지역사회에서 같이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고, 그런 마을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치매 노인이 많이 사는 지역을 알려 그 지역에서는 차들이 지나갈 때 속도를 줄이고 조심해서 운전을 하도록 캠페인을 진행하고, 길 잃은 치매 노인들을 잘 안내하고 치매의 응급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주민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다. 치매에 대응할 교육을 받은 주민들은 오렌지색 링을 팔찌나 목걸이로 달고 있었다. 이 링을 달고 걷는 사람들이 마을에 많아질수록 점점 더 안전해지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치매는 분명 뇌의 퇴행성 질환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회적으로 정의되는 질환이기도 하다.

나는 비혼이고 자녀가 없다. 치매 할머니가 되었을 때 나 같은 손녀는 내게 없을 것이다. 그러니 미리 준비해야 한다. 사랑하는 우리 동네가 재개발되어 싹 다 갈아엎어지지 않도록, 골목과 가게들을 지켜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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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배가 아파서 너무 오랫동안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그랬어요. 몇 년 동안 그렇게 살다가 정신과 진료 받으면서, 이제 조금씩 먹고 마시고 일상을 누리고 있었죠. 그런데 며칠 전부터 갑자기 배가 아프니까, 무서웠어요. 예전처럼은 아닌데, 비슷한 느낌으로 아프기 시작하니까 점점 더그럴까 봐 불안한 거죠. 점점 소화도 안 되고요."
환자들의 얘기는 가만히 들으면 대부분 진단명이나 해결책을 그 안에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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