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여백서원 기초가 놓이고, 나는 독일에서 여백서원에 사람들이 오면 옷을 걸 큰 못 모양의 걸이를 샀다. 여백서원을 위한 첫 ‘시설물’이었다. 여럿이 오면 옷을 한 곳에 정돈해서 잘 걸 수 있어야 할 테니 그 용도로 만든 공간이 체계적이기도 해야 하고, 처음 옷을 벗어 거는 옷걸이가 좀 남다른 것도 처음 집에 들어선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할 것 같아 오래전부터 생각한 일이었다.

서울의 한 외곽도시에서 자랐고, 지금도 거기서 살고 있다는 그 여학생의 대답이 놀라웠다.
"중학교 때부터 어머니께서 마라톤을 시키셨어요."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딸에게 마라톤이라니?! 내색은 안 했지만 무척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러나 조금 후 그 자문에 대한 답이 스스로 짐작이 되었다.

더구나 어머니는 병이 깊어 누워 계시다고 했다.(아마도 고생이 조금 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그 딸을 만난 얼마 후 돌아가셨다.) 자기처럼 음악을 하겠다는 딸에게, 머지않아 자기처럼 엄마 없이 살아야 할 딸에게, 내가 그 어머니라면 세상에 무얼 해주고 갈 수 있을까. 아무런 힘도 없는 엄마가 무얼 해주고 갈 수 있을까.

나도 누군가에게 내가 거기서 누렸던 그런 한순간을 나누어주고 싶다. 아름다운 글로 더 많은 사람들과 무언가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만큼의 문재文才야 어찌 스스로에게서 바라고 기대하겠는가.

찾아오는 이들과 더불어, 아니 혼자라도, 시를 읽고 벽난로 가에서는 글을 읽겠다. 참으로 힘겹게 살긴 했으나 세상에서 받은 게 많은데 나도 무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얼마 전에 세상 뜬 친구도 그랬다. 좀 아프다 괴롭다 하며, 울기도 하며, 험한 모습을 보여 정을 좀 떼고 갈 일이지······. 끝까지 꼿꼿한 그들의 긴장이 안쓰러우면서도,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는다.

사람들은 어차피 만나고 갖가지 이유로 만나지만, 몸에 배인 정중함, 존댓말이 남기는 인상은 깊고 그렇게 맺어지는 인간관계는 이렇듯 유독 각별한 것 같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 말을 배울 때 나는 아이들에게 무조건 존댓말을 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아이들의 눈높이로까지 나의 키를 낮추어서 말이다. 아이들이 내게 무척이나 귀했던 것도 한 이유이겠지만, 아이들 말은 어차피 아이들과 어울리면 배울 테니 존댓말을 배우는 편이 실리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게다가 아이는 전통 어휘들이 익숙해져버려서, 책을 읽게 되었을 때는 옛날 책까지 잘 읽었다.

훗날 아이가 가진 고전이나 문학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사회의식, 올곧음 같은 것도, 그런 전통문학까지 포괄하는 독서에 크게 힘입은 것이었다. 사회를 헤쳐가는 데도 그 독서와 존댓말, 존댓말에 담긴 사람들에 대한 성의가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남의 나라에 많이 와 있는 내가, 때로는 과분한 대접을 받는 이유도 돌아보니 정중한 말의 힘이 아닌가 싶다. 독일어에 우리 같은 존댓말 어미야 없지만, 정중한 말이 없는 언어가 어디 있겠는가. 남의 형편을 우선 살피고 하는 말이 많고, 일단, 하루 종일 가장 많이 쓰는 어휘는 가만히 돌아보니 "감사합니다"이다. 여기는 그런 사람이 상당히 많아 내가 배운 것 같다.

그러나 아득한 학생 시절에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남모르는 꿈이 있었다. 중학교 3학년 어느 가을날을 아직도 선명히 기억한다. 다니던 학교 교정의 스탠드에 앉아 하늘을 보는데 그 하늘의 연푸른 갈맷빛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그 빛깔에 이끌려 한정 없이 바라보다가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그만 그 반대 결심을 해버렸다. 내가 제 아무리 노력한들 저 빛깔은 결코 그려내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화가의 길을 갔더라도 건너다 보이는 가지 않는 길이 조금 더 수월하고 아름다워 보였을 것이다. 가는 길이 험해 보이는 것은 어쩌면 지금 어딘가로 오르고 있는 중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변의 사방을 따뜻하게 만드는 기도가 티베트 고산에서만 필요한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고 짐작한다. 그것이 물위를 걷는 기적의 기술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라는 말을 해주려 했다고 짐작한다. 그냥 짐작만 한다.

우리 안의 그 어떤 높은 것, 궁극의 것에 가 닿고 그것을 간직하는 것에 겨누어져 있었으리라.

이 낮은 곳에서 조금이나마 주변을 따뜻하게 하며 살라는 당부를 새겨듣는 것으로 친구를 놓친 아쉬움을 달랜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이 미미한 것이라면, 우리의 사랑이 그것을 살리고 키울 것이다. 그럼으로써 미미한 나도, 무엇인가를 소중히 할 줄 아는 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리라. 무언가 큰 것을, 거리를 두거나 실없이 미워하는 대신 사랑한다면, 어쩌면 나도 그만큼 따라서 커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우리를 살리는 길은 저 귀한 것, 저 가엾은 것, 우리 모두 나서서 바꾸어야 할 것, 저 자라나는 것, 저 푸르른 것 하나하나를 눈여겨보는 것이다.

사랑이 우리를 살리고, 사랑으로 우리는 이룬다. 돌아보면, 마음 아팠던 첫사랑을 통해서만도, 그때는 아무리 마음에 멍이 들었어도, 우리는 얼마나 자랐던가. 아마도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닐까?

그 아이가 그렇게 한 그 모든 시간, 내가 그것을 그려보는 이 모든 시간은 사람과 사람이 묶이는 시간이다.

그러더니 어느 때부터인가 전혀 나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글이 독일어로 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구나의 인생에서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산사태를 일으키는 것은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물리적 힘보다도 우레 소리 때문이기 십상이라는 것을 그 일을 겪은 후 알게 되었다. 우레소리에 땅이 흔들리고 나무가 뿌리째 뽑히면서 산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 P8

형상화한 것이 아니었을까. 엄연한 사실과 현상도 은유와 환유로 받아들이고 표현하게 되는 습성은 오랜 세월 문학의 언저리에서 서성거리며 살아온 탓에 길러진 것일 게다. 어쨌거나 내게 문학은 나름 정황과 사물의 이해방식이고 사유의 틀이자 나와 나를 에워싼 세계를 바라보고 인식하는 창(窓)인것이다. - P9

미친 듯 퍼붓던 비가 그친 아침 환한 햇빛 아래 지난밤의광태를 고스란히 드러낸 정경을 망연히 바라보며 나는 이러한 아침풍경을 소설로 쓰고 싶다는, 쓸 수 있을 듯한 흥분과기대로 가슴이 뛰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재난이 50년 전문창과 신입생 시절 첫 강의 시간에 들었던 이른바 ‘충격을느끼는 소재로 다가온 것이다. 문창과 첫 수업시간에 들은강의 내용이, 세상의 모든 것이 글의 소재가 될 수 있지만 그중 각 작가마다 다르게 ‘충격‘을 주는 소재가 있으니 그걸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 P9

그러나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과 이미지나 감각들은 얼마나 쉽게 희미해지고 흔적 없이 사라지고마는지. 글로 써지지 못한 생각들이 얼마나 허망하게 덧없이사라지는지. 부엌 선반과 현관 신발장 위, 화장실과 침대 머리맡 등 도처에 놓인 메모지와 볼펜을 보면 나 자신이 때로구차스럽고 가엾어지기도 한다. - P11

쓰고자 하는 열망과 함께 겪게 되는 우울증은 자기검열의 끔찍함, 글쓰기의두려움을 버텨내기 위한 방어기제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 P13

글을 구상할 때의 나는 알을 품은 암탉처럼 의심이 많아지고 언행이 굼떠진다. 나만의 대단한 비의 혹은 남모를 힘을품고 있는 듯 어깨를 둥글게 구부리고 물동이를 인 처녀처럼발걸음도 조심스러워진다. 글을 쓰는 과정 중에서 가장 행복할 때일 것이다. - P13

긴 글이든 짧은 글이든, 첫 문장에서 마지막 문장에 이르는 동안 나는 기대감에 들뜨고 쉽게 좌절하고 회의에 빠지는가 하면 비대발괄도 서슴지 않고 행운과 우연에 기대어 보는등 한 인간으로서 맛볼 수 있는 모든 감정과 복잡다단한 심리를 다 겪어낸다. 그러기에 작가들은 작품을 하나 끝낼 때마다 인생의 징검돌을 놓았다거나 일단락되었다는 느낌을맛본다고도 말하는가보다. 무엇인가가 내 안의 상처 혹은 무의식과 만나 파장을 일으키면서 쓰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 적확한 표현을 얻기 위해 한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최대치를 끌어내고 조심스레 문장을 가다듬으면서 ‘그때까지 내 영혼이 보지 못했던 경계를 넘어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에는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분명히 있다. 아니 그것이 작가로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의 전부일 것이다. - P14

내게 있어 글쓰기란 엉클린 실꾸리에서 실마리를 찾는 일이고 문 없는 방에서 문고리를 찾는 일이고 대책 없는 혼란과 혼돈 속에서 길을 내는 일이다. - P15

그래도 내게 남겨진 시간들을 생각하며여전히 책을 사고 읽고 읽다가 밀쳐두고 밀쳐두었던 사실을잊는다.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없이 다만 과장도 과잉도 결핍도 없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 P16

잡지 편집자로부터 오래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평생 시인으로 살아왔으나 한동안 발표가 없었던 시인에게청탁을 하니 ‘시 쓰는 법을 잊어버려 쓸 수가 없노라‘는 답변이 돌아와 그럴 수도 있는가 하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인생을 걸고, 목숨을 걸고 해온 일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잊을수 있는 것이다. 말을 잊고 기억을 잊고 평생을 수행해온 일상의 습관과 길들임을 잊고 종내 자신조차도 잊으면서 생의끝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닌가. - P16

그러나 반석이라 여겼던 발밑이 허방이거나 늪이라 한들배반감이나 실망을 느낄 일도 아니잖겠는가. 인생에 비밀,
비의 따위는 애초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들 어떠한가.
없음을 찾아, 잊어버리고 말 것들을 찾아 일생 헤매고 끄달려온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통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 P17

한 줄을 쓰기 위해서 백 권의 고서적을 읽었다, 만일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내 성실성과 완벽성을 설명하기보다 신경증적인 집착을 말하는 것이기 쉽다. - P21

도구에 대해서 말을 했으나, 소설이 자료로 쓰이는 것이아닌 것처럼 도구로 쓰이는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할 필요도없는 사실이다. 종이와 나, 혹은 자판과 나 사이가 바로 소설이다. 그것은 상상력이며, 그 상상력이 품고 있는 진실이다.
그러나 나의 상상력이 진실한 것인지 누가 알 수 있다. 내 상상력이 비천하거나, 조금 무지한 것은 상관없다. 나는내소설이 비천하고 무지한 것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실하지 못한 것은 곤란하다. 곤란한 정도가 아니라 저질러져서는 안 될 잘못이다. - P25

소설은 주인공들의 이야기면서 또한 나의 이야기이므로, 나의 시간이 달라진 것은 어떻게 해도 복구할 수 없는 일이다. - P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혼자만 이런 수렁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오해, 어쩌면 그런 오해를 기반으로 우리는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한 구절을 대할 때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나 내 눈앞을 스쳐가는 삶의 굽이굽이들. 그걸 지나고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무슨 전투를 벌이겠다는 생각이 누가 애초에 있겠는가. 그저 삶의 감당이 그토록 어렵고, 외연이 넓어지면 감당할 것도 그만큼 더 많을 것일 뿐이리라. 그런 전투, 삶의 와중에는 이런 힘 있는 필적을 읽는 기쁨의 순간, 아름다운 사치도 있다.

"힘드시지요? 지금 아주 높은 산에 오르는 중이셔요. 많이 힘드신데 저희가 같이 못 가네요. 하지만 저희도 곧 따라갈 거예요. 산에도 늘 혼자 가셨지요. 지금 올라가시는 산은 아주 높은 산이니 올라가시면 장관일 거예요. 높은 산에서 보신 것은 늘 글로 쓰셔서 들려주셨지요. 지금 가시는 높은 곳 이야기도 저희에게 들려주세요."

그 수업뿐만 아니라 다른 수업에서도 나는 특별한 교재가 없다. 교재 대신 학생들이 학기 말에 ‘나의 책’을 만들어낸다. 그 이유는 학생들 스스로가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서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을 내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때문이다.

또 그들 스스로에게서 우러나오는 것을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게 여기는 때문이다.

온갖 공부를 다 하면서도 탈북자를 돌보고, 독거노인을 돌보고, 고가의 백혈병 치료제로 폭리를 취하는 다국적 제약사들을 조용히 날카롭게 성토하던 의학도 영수는 언젠가 슈바이처 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

토마스 만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제 아무리 멋진 말에도 ‘사랑이 없으면 꽹과리 소리일 뿐’이라는 구절을 그토록 눈여겨 읽었던 갑석이는 좋은 의사 선생님이 되어 있다. 세상에 그런 의사 선생님이 계시다는 생각만으로 즐겁다.

그런데 그 귀하고 빛나는 이들은 내가 알기 때문에 그렇게 귀하고 빛난다.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모를 뿐이지,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다 그렇게 귀하고 빛날 것이다.
젊은이들은 더더욱.

만만치 않은 직업에 공부까지 하느라 시간이 넉넉할 리 없건만, 내가 부끄러울 만큼 엄청나게 많이 책을 사고 읽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대신 다른 물건 같은 건 안 산다고 했다.(그 어느 온갖 명품을 걸친 사람이 이렇게 빛날 수 있겠는가.)

짝짓기에도 부모가 나서고, 애 낳는 데도 부모가 나서고, 애 엄마가 애 젖먹이는 것도 버거워하고, 밥 먹이는 것도 버거워하고, 한글 가르치는 것도 힘들어 한다. 이러다 국민 전체가 단체로 미성년화되는 건 아닌가, 그렇게 아이고 어른이고 다 약해질 수밖에 없으니 국력이 저하되는 게 아닌가 하는 어처구니없는 기우마저 든다. 무엇보다 그런 약해진 사람들이 과도한 경쟁으로 공격성만 커지는 문제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에서는 우리 아이들이 지나치게 귀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방치되거나 심지어 버려지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모두 귀해지는 길이 없을까. 제도 탓으로 돌릴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만들어낼 제도도 없거니와 제도가 다 해결해 줄 일도 아니다.

가끔씩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니나는 유난히도 그런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친구들의 소중함을 좀 더 가르쳐야 할 것 같다. 내가 남을, 사람을 귀하게 여기면 나도 자동으로 귀해지는 이 자명한 이치를 마음에 새겨주어야 할 것 같다. 능률화가 가속화되는 미래에는 인구의 8할 정도는 불필요하다는 진단마저 나오고 있고, 빈부격차의 심화도 심각하게 체감된다. 우리가 파멸로 가는 공룡이 될 수야 없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이후로 편지들이 오갔다. 직접 만난 것은세 번에 불과하지만 참으로 소중한 사람 하나를얻었다고 생각했다. 학문과 시를 한꺼번에 이야기할 수 있는,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한 차례는그 댁을 방문하기도 했다. 화가인 사모님이 정성들여 가꾼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집 안에 있는 사모님의 미술작품들도 둘러보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로 와 있는데마침 손님으로 온 어느 젊은 독일 학자가 그분이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믿기지 않아말 전한 사람 면전에서 이리저리 전화를 해보았다. 사실이었다. 발목을 다쳐 깁스를 하고 있었는데, 집 정원에서 새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은 다리속 혈관에서 혈전이 생겨 그것이 몸을 돌다가하필 폐혈관의 판막에 걸려 혈관을 막았다는 것이었다.

한 손을 놓쳐버린 것만 같았다. 섰다 앉았다 하던 나는, 그의 시집에다 내가 시를 덧써 그에게부칠 때 복사를 떠놓은 것을 가지고 작은 수제본 시집을 만들었다. 맨 앞장에다 그분 이름을쓰고 ‘추모’라고 적었다. 다섯 부를 만들었다.
그래서 한 부는 마냥, 어디든 들고 다녔다. 조금위로가 되는 것 같기도 했다.

"게쉥크템 가울, 지트 만 니히트 인스 마울 Geschenktem Gaul siehtman nicht ins Maul."
각운이 잘 맞아서 울림이 좋은 이 독일 속담은 직역하면 "선물받은 말(馬)은 주둥이를 벌려보지 않는다"이다.

이러쿵저러쿵 해서는 안 된다는 생활의 지혜가배인 속담이다. 선물에 담긴 성의를 감사히 받지 못하는, 모자라고 못난 욕심 많은 사람들에대한 따끔한 일침이기도 하다.

그 아침에 언덕길을 걸어 내려가며 그날 내가받은 선물들을 다시 생각했다. 그동안 받은 너무도 많은 선물들이 눈앞을 오고 갔다. 마침 반가운 친구가 전화를 해서 그 반가움에 생각은더욱 날개가 달린 것 같았다. 오랜만에 전화한친구에게 "소식이 큰 선물이네" 하며 오늘이 내생일이라고 이야기했다. 친구가 놀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기쁨이 네게도 조금 반사되기를 바란다." 내가 무얼 나누어 그런 말을 듣나 싶어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염치없이 큰 기쁨이었다. 정말로 많은 선물을 받은날이었다.

무슨 큰 일, 무슨 큰 선물로 누군가를 기쁘게 하겠는가. 진정한 관심에서, 마음에서 우러나온말로 서로 좀 기운 나게 할 수는 있겠지. 그럼으로써 실은 내 자신이 가장 기쁠 테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내가 내 자신에게 하는 큰 선물이겠구나.

말馬을 선물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선물할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 주둥이를 들여다볼 기회도 물론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건너가고 건너오는 마음의 말은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기회를 한 번이라도 더자신에게 선사하는 지혜야말로 ‘말‘ 선물에 비할 바 없는 큰 기쁨이다.

쿤체 시인의 팔십 회생신을 기지난여름에는념해서, 근처의 오버른첼 성에서 콘서트를 하고, 참석자들은 작은 한옥도 두루 둘러보았다.
쿤체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들을 우리 국악 연주자들이 가서 독일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했다. 유럽 각지 먼 곳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와주었다. 얼마나 좋은 시간이었는지. 다들 기뻐하고 감탄하고, 파사우 시장은 커다란 꽃다발을내게 안겨주기도 했다. 도나우 강 위로는 큰 무지개가 떴었다.

시심을 가진 사람이, 또 그런 사람을 아끼는사람이, 사람 못할 짓 하며 살지는 않을 테니 그렇게 세상이 아주 조금은 살 만한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 생각을 하면 참 기쁘고, 쏟았던노고는 잊힌다.

이 부부는 전 세계에서 나온 괴테의 서사시 《헤르만과 도로테아》의 거의 모든 판본을 망라해서 가지고 있다. 내로라하는 괴테전문가들도 《헤르만과 도로테아》에 관한한 자기들을 찾아온다고 부부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들이 그런 장서가가 된 이유는 아주 소박했다. 남편의 이름이 헤르만이고 아내의 이름은도로테아여서《헤르만과 도로테아》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부부가 만나고 보니 이름이 몽룡과 춘향이어서세상에 있는 《춘향전》 판본 및 관련서를 다 모아버린 셈이다. 초라해 보일 정도로 소박한 그들의 생애가 그 책들로 하여 얼마나 빛났을까.

괴테 하면, 아직 그 글을 깊이 읽어볼 기회가없었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어쩐지 너무 거대한것 같고, 너무 잘난 것 같고, 뭔가 많은 것을 누렸을 것 같아 거부감마저 들기도 한다. 그러나예컨대 그런 힘 있는 구절 하나가 삶을 누리기만 한 사람의 손에서 그저 우연히 나올 수 있겠는가.

나 혼자만 이런 수렁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오해,
어쩌면 그런 오해를 기반으로 우리는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한 구절을 대할 때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나 내 눈앞을 스쳐가는 삶의굽이굽이들. 그걸 지나고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고마울 뿐이다.

무슨 전투를 벌이겠다는 생각이 누가 애초에있겠는가. 그저 삶의 감당이 그토록 어렵고, 외연이 넓어지면 감당할 것도 그만큼 더 많을 것일 뿐이리라. 그런 전투, 삶의 와중에는 이런 힘있는 필적을 읽는 기쁨의 순간, 아름다운 사치도 있다.

시심을 가진 사람이, 또 그런 사람을 아끼는사람이, 사람 못할 짓 하며 살지는 않을 테니 그렇게 세상이 아주 조금은 살 만한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 생각을 하면 참 기쁘고, 쏟았던노고는 잊힌다.

그런데 그 귀하고 빛나는 이들은 내가 알기때문에 그렇게 귀하고 빛난다. 어쩌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우리가 모를 뿐이지,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다 그렇게 귀하고 빛날것이다.
젊은이들은 더더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2-11-19 2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영애 선생님 글 열심히 읽고 계시네요. ^^ 아유 전 이놈의 19세기 여성작가들 좀 벗어나면 다른 책 읽게 될거 같아요. ^^

라로 2022-11-20 15:32   좋아요 0 | URL
굉장히 특별한 분이신 것 같아요, 전영애 샘. 이런 분을 직접 만나뵙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분이랄까요? 겸허해지는 느낌도 들고,, 바람돌이님도 읽으시길 추천합니다!! 19세기 여성작가 책은 대학때 영문학 시간에 좀 읽었는데,,한국어로 읽으면 어떨지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