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는 극작가로서 체호프의 능력은 낮게 평가했지만(톨스토이는 그의 희곡들이 정적이고 도덕적 비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자네의 인물들이 자네를 어디로 데려가나?" 그는 체호프에게 따진 적이 있었다. "소파에서 폐물 창고로 데려갔다가 돌아올 뿐이야.") 체호프의 단편은 좋아했다. 더욱이, 아주 간단하게, 그는 이 인간을 사랑했다. 그는 고리키에게 말했다.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한 인간인지. 소녀처럼 겸손하고 조용해. 심지어 걷는 것도 소녀 같아. 그냥 멋있어." 톨스토이는 일기에(당시에는 모두가 일기를 썼다) "기쁘게도 체호프를…… 사랑한다"고 썼다.

"톨스토이는 우리가 모두(인간이나 동물 모두) 하나의 원리(예를 들어 이성 또는 사랑) 속에서 계속 살 것이고 그 본질과 목표는 우리에게 수수께끼라고 가정하고 있다…… 나에게 그런 종류의 불멸은 쓸모없다.

체호프는 톨스토이와 달리 내세를 믿지 않았고 믿은 적도 없었다. 오감 가운데 하나 또는 몇 개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절대 믿지 않았다. 그는 인생이나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관점과 관련하여 누군가에게 자신은 "정치적, 종교적, 철학적 세계관"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을 매달 바꾸기 때문에, 내 주인공들이 사랑하고 결혼하고 애를 낳고 죽는 방식, 또 말하는 방식을 묘사하는 것으로 내 일을 한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늘 그렇듯이 결혼에 이르기까지 밀고 당기는 걸 더 좋아했다.

체호프는 엄청나게 행복했다. 그는 올가를 자신의 "조랑말", 때로는 "개"나 "강아지"로 불렀다. 동시에 "귀여운 칠면조"나 그냥 "내 기쁨"이라고 부르는 것도 좋아했다.

이 닥터 에발트는 자신이 기적을 일으킬 수 없는 것에, 또 체호프가 그렇게 병든 것에 격분했다.

그의 수명은 한 달이 남지 않았다. 이제 체호프는 자신의 상태에 관해 말할 때, 올가에 따르면, "거의 무모할 정도로 무관심했다".

6월 13일, 죽기까지 석 주도 남지 않았을 때 체호프는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서 건강이 회복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편지에서 말했다. "일주일이면 완전히 나을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본인이 의사였고 자신의 상태를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고 그것은 그렇게 간단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호텔방 발코니에 나가 앉아 기차 시간표를 읽었다. 마르세유에서 오데사로 가는 배편 정보를 요청했다. 하지만 그는알았다. 이 단계에서는 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의 맨 마지막에 쓴 편지에서는 누이에게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감을 잃기 시작했어." 그는 올가에게 말했다. "작가로서 끝났다는 느낌이야. 모든 문장이 무가치하고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중단하지 않았다.

닥터 슈뵈러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그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체호프의 끝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맹세한 의사였고 체호프는 비록 박약한 힘이기는 했지만 생명을 놓지 않고 있었다.

닥터 슈뵈러는 피하주사기를 준비하여 심장박동을 빠르게 해준다고 하는 장뇌를 주사했다. 그러나 주사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물론 어떤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의사는 올가에게 산소를 가지러 사람을 보내겠다는 의향을 밝혔다. 갑자기 체호프가 정신을 차리더니 맑은 정신으로 조용히 말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그게 오기 전에 나는 시체가 될 건데."

닥터 슈뵈러는 커다란 콧수염을 잡아당기며 체호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작가의 뺨은 잿빛으로 우묵하게 꺼졌고 안색은 밀랍 같았다. 숨은 거칠었다. 닥터 슈뵈러는 몇 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의사는 아무 말 없이, 올가와 상의하지도 않고 전화기가 달려 있는 벽감으로 갔다. 먼저 전화기 사용법을 읽었다. 어떤 단추를 손가락으로 누른 채 전화기 옆면의 손잡이를 돌려 전화기를 작동시키면 호텔의 아래 구역, 즉 주방과 연락할 수 있었다. 그는 수화기를 들고 귀에 갖다댄 뒤 사용법에서 시킨 대로 했다. 누군가 마침내 전화를 받았을 때 닥터 슈뵈러는 호텔에서 가장 좋은 샴페인을 한 병 주문했다. "잔은 몇 개나?" 그는 질문을 받았다. "셋!" 의사가 송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그리고 서두르쇼, 알아들었소?" 보기 드문 영감의 순간이었다. 너무나도 적절해서 불가피해 보일 정도라 나중에 보면 영감에 따른 행동이었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은 순간.

그는 몇 마디 조의를 전했다. 올가는 고개를 숙였다. "영광이었습니다." 닥터 슈뵈러가 말했다. 그는 가방을 들더니 방을 떠났고, 나아가서 역사를 떠났다.

바로 그 순간 샴페인 병의 코르크가 펑 튀어나갔다. 테이블로 거품이 쏟아져내렸다. 올가는 체호프의 침대로 돌아갔다. 그녀는 발판에 앉아 그의 손을 잡고 가끔 얼굴을 쓰다듬었다. "사람의 목소리, 일상적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기록했다. "오직 아름다움, 평화, 그리고 죽음의 장엄뿐이었다."

그는 여자의 주의를 끌고자 하는 마음에 기침을 했지만 그녀는 그를 보지 않았다. 유명한 외국인 손님들은, 그는 말했다, 원한다면 오늘 아침에는 자기 방에서 아침을 먹을 수도 있다. 젊은이(그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며 아마도 1차대전에서 죽었을 것이다)는 기꺼이 쟁반을 하나 들고 오겠다고 말했다. 쟁반 두 개, 그는 그렇게 덧붙이고는 멈칫대며 다시 침실 쪽을 흘끔거렸다.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그가 아래층으로 내려가 프런트데스크 담당자에게 어디에 가면 도시에서 가장 존경받는 장의사를 찾을 수 있는지 물어보기를 바랐다. 믿을 만한 사람, 자기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않고 태도가 그에 어울리게 신중한 사람. 간단히 말해 위대한 예술가에게 걸맞은 장의사. 여기요, 그녀는 말하고 돈을 그의 손에 대고 눌렀다. 아래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댁에게 특별히 이 일을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하세요. 내 말 듣고 있어요? 내가 지금 하는 말을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한 독자로서 옮긴이가 할 수 있는 말은 카버는 어디에서도 카버다, 라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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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고난 속에서도 인간은 창조적으로 재생한다, 그것이지금 제가 와 있는 문학적 주소이며 ‘군함도』도 그 하나입니다. - P102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문서나 사진이 아니라, 제 체험이었습니다. 저는 일본을 알기 위해 상당히 깊이 가부키를 공부했고, 정식으로 일본의 다도 우라센케(裏千家)를 배웠습니다. - P107

인간은 살기 위해 태어납니다. 그러나 자신이 책임져야 할몫이 아닌 불행과 끊임없는 불평등과 삶 그 자체를 뒤흔드는압제 속에서도 언제까지 살아가야 하는가는 오랜 의문으로남았습니다. 아닙니다. 인간은 그런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도살아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할때 그 싸움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일어나야 하고싸워야 하고 스스로를 지켜야 하고 그 가치를 위해 자신을불사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말하기 위해 저는 이 소설을 썼습니다. - P109

과거사 문제에 있어 중요한 것은 ‘피해자로서의 우리‘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입니다. 피해당사자가 살아 있을 때까지는그 과거사는 살아 있는 현재입니다. 그러나 그분들이 세상을떠나면서 이 현재는 과거로 화석화됩니다. 사람들은 하나씩잊어가고, 지겨우니 ‘이제 좀 그만하라‘고 말하는 집단이 생겨나고, 해결이나 청산에 대한 노력은 힘을 잃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과거에 대한 ‘문화적 기억‘입니다. 그것 - P110

을 여전히 살아 있는 오늘의 문제로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문화적 기억‘이 나서야 합니다. 기념관의 전시물이 아닙니다. 소설이 이야기하고 영화가 환기시켜서 분노를 끓어오르게 하고 연극과 뮤지컬이 슬픔으로 눈물짓게 하고 노래와 춤이 사라지는 이 과거가 화석화하는 것을 막으며 끊임없이 현재의 것으로 되살려놓아야 합니다. 문화적 기억만이 해낼 수있는 일입니다. - P111

게다가, 한국 사람은 이상스럽게도 사고를 당하면 ‘도와주세요‘ 하지 않고 ‘사람 살려라‘ 하고 소리칩니다. 자신을 제3자로 객관화시킵니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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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나는 기억력이 좋다. 내가 읽은 모든 글을 기억할 수 있다. 학교 다닐 때는 이름과 날짜, 또 발명, 전투, 조약, 동맹 등을 외우는 능력 덕분에 상을 탈 만큼 기억력이 뛰어났다.

우리가 함께하는 조용한 시간은 창밖으로 날아갔어. 점차 책임들이 당신을 짓눌렀지. 당신 일은 점점 중요해졌고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은 쥐어짜내야만 했어. 그러다 애들이 집을 떠나면서 우리가 이야기할 시간이 돌아왔지. 우리는 다시 서로를 갖게 됐어. 다만 할 이야기가 점점 줄었지.

나는 분노 대신 공황을 느끼기 시작했다. 복도를 내려다보면서 점점 두려워졌다. 모든 게 전과 같았다?거실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고 라디오는 조용한 음악을 내보냈다.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귀를 기울여보았다. 그녀가 뜨개질하는, 박자를 맞추어 딱딱거리는 위로가 되는 그 소리,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거실 쪽으로 몇 걸음 걷다가?뭐라고 해야 하나??배짱이 사라졌다, 아니 어쩌면 호기심이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 순간살살 문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뒤에는 틀림없이 문이 조용히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나는 문을 열었다. 갑자기?이걸 실제 있었던 그대로 말하는 것 외에 다른 식으로 말할 방법을 모르겠다?

그녀가 말했다. "여자애가 하나 있었어, 봐. 듣고 있어? 이 여자애는 이 남자애를 무척 사랑했어. 자기보다 훨씬 사랑했어. 하지만 남자애는?뭐, 성장을 했지. 남자애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 뭔 일이 있었겠지 뭐. 남자애는 잔인해지려는 의도는 없었는데도 잔인해졌고?"

그녀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고, 그 순간 생각이 떠올랐다.저 여자를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그게 내 마음을 지나간 생각이었고, 그것 때문에 나는 비틀거렸다.

"한 번도 때린 적 없습니다. 결혼생활 내내 단 한 번도. 몇 번 그럴 만한 일이 있었지만 때리지 않았어요. 저 사람이 나를 한 번 때렸죠." 내가 말했다.

"원하는 대로 부르세요," 보안관보가 말했다, "저녁 먹을 시간에 늦었다고 부르는 것만 아니라면.*"

내가 아내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건 픽업의 캡에서 성냥불이 타올랐을 때였다. 나는 그녀가 담배를 물고 목장주가 내미는 불을 받아들이기 위해 몸을 숙이는 것을 보았다. 성냥을 잡은 손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빵"이나 "삐"나 "펑" 같은 단어를 더 자주 사용해야 한다?특히 대학살 이후의 심각한 상황이나 끔찍한 사건이 온 나라의 미래에 먹구름을 드리울 때는. 그게 "빵" 같은 단어가 필요할 때이고 그런 단어는 황동 시대의 황금이다.

아내는 라틴어와 그리스어와 독일어와 화학과 물리학과 역사와 셰익스피어를 비롯해 사립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을 알았다. 찻잔을 제대로 쥐는 법을 알았다. 요리하는 법과 사랑을 나누는 법도 알았다. 대단한 사람이었다.

가령 아내를 얻는 것은 역사를 얻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이제 역사 바깥에 있는 셈이 된다?말과 안개처럼. 또는 내 역사가 나를 떠났다고 말할 수도 있다. 또는 내가역사 없이 계속 가야 한다고. 또는 이제 역사는 나 없이 존재해야 한다고 할 수도 있다?아내가 편지를 더 쓰거나, 가령 일기를 쓰는 친구에게 말을 하지 않는 한. 만일 그렇게 한다면, 세월이 흐른 뒤 누군가 이 시기를 돌아보고 기록에 따라, 그 조각과 장광설에 따라, 그 침묵과 빈정거림에 따라 해석할 수 있다. 그 순간 자서전이 이 가엾은 남자의 역사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그리고 내가 역사에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안녕,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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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신과적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를 마주하면, 자살 위험이 있는지를 꼭 파악해야 한다고 우리 의사들은 배운다. 진료실에서 한숨을 쉬거나 눈물을 보이거나 우울해 보이거나 기운이 없어 보여도, 자살 위험이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고 배운다. 자살에 대한 생각은 넌지시 물어서는 안 되고, 아주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아… 머리가 울렸다. 맞다, 그렇지. 과호흡은 살고 싶어서 하는 거지. 의사가 되고 나서 정말 처음으로 거기에 생각이 미쳤다.

나는 과호흡을 해결하는 좋은 방법을 프리다이빙 자격증을 따면서 배웠다. 프리다이빙은 숨을 참고 물에 들어가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과호흡을 하고 들어가면 뇌가 저산소증에 빠지는 상황을 인지할 수 없어 결국 블랙아웃이라고 하는 저산소증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프리다이빙 전에는 반드시 들숨과 날숨을 1:2 비율로 하도록 준비시킨다. 날숨을 천천히 하여 체내에 이산화탄소를 쌓이게 하고, 그럼으로써 호흡 충동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은 산소를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가 이산화탄소를 뱉고 싶어서 숨을 쉬려고 하기 때문이다.

내 눈동자를 보고, 나와 같은 속도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도록…. 아무 말도 필요가 없다. 눈동자로 전달하는 것이 더 강력하다.

나는 첫 프리다이빙을 끝내고서, 친구에게 부탁했다. 혹시라도 내가 자살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을 땐 프리다이빙에 데려와달라고. 그러면 내가 숨 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맙고 대단한 일인지 다시 깨달을 것 같다고.

신환이 입원하셨다는 병동 간호사의 콜을 받고 나는 응급실 진료기록과 검사 결과부터 찾아보았다. 응급실에서 촬영한 흉부방사선 검사 결과를 보니 폐암이 의심되었다. 입원 수속이 끝나자마자 흉부 CT를 찍었다. 다음 날 낮이 되어야 나오는 영상의학과의 판독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이건 폐암, 상당히 진행된 폐암이다. 그것도 폐암이 상대정맥을 짓누르고 있어서 얼굴이나 팔에서 심장으로 내려가는 피가 정체되어 있는 ‘상대정맥증후군’이었다. 이것은 종양내과의 응급 상황이다.

할머니는 산소를 공급하는 콧줄을 코에 끼고 가쁜 숨을 쉬며 병실 침대에 기대어 계셨다. CT를 확인한 내가 환자를 만나기도 전에 미리 내린 오더였다. 산소를 공급할 것, 기대어 앉으시도록 할 것, 팔에 잡힌 수액 라인을 뺄 것. 나는 얼굴과 상체 쪽으로 가는 피를 최대한 줄여서 할머니를 편하게 해드리려고 했다.

아, 독거노인…! 순간, 독거노인에 따라붙는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돌봐주는 사람 없음. 책임지는 사람 없음. 관심 있는 사람 없음.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음. 그렇지만 뭔가 할머니 신상에 문제라도 생기면, 지금까지 아무 관심도 없던 가족들이 나타나 세상에 없는 효자인 양 행세를 하지. 그래서 의료인들은 환자분이 ‘독거노인’이라고 들으면 난감 일색이다.

폐암 덩어리가 상대정맥이라는 큰 정맥 혈관을 누르고 있어서, 머리로 올라온 피가 심장으로 되돌아가는 길이 좁아져 얼굴이 붓고 숨이 찬 거라고. 이 상황은 폐암으로 인한 응급 상황이라고. 그래서 오늘 밤에라도 당장 큰 대학병원으로 가셔야 하고, 그건 제가 지금 바로 알아봐드리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차분하게 들으시다가 얼핏 눈시울을 적셨고, 나는 엉엉 울면서 설명을 하고 있었다. 마치 나이 든 내 미래를 보는 것 같아서 말하는 동안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폐암이라고 정확히 말씀드리기를 잘했다. 그분의 생명력을 믿기를 잘했다.

나도 저렇게 나이 들어갈 수 있을까? 폐암의 응급 상황이라는 설명을 듣고 오히려 의사를 위로하는 할머니, 의연하고 차분하게 죽음을 준비하던 모습….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어도 절에서 서로를 돌보고 돌봄 받으면서 공동체로 생활해온 분이었다. 그 관계가 있기에 할머니는 암 진단을 받는 상황에서도 의연하실 수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단 하루 환자와 의사 관계로 만난 그 큰스님 할머니께 크게 반하고 또 배운다.

소독을 끝내고 이제 새 기저귀를 반듯하게 깔아서 환자분의 가벼워진 다리를 들고 기저귀를 잘 채워드리려 했는데, 다 채운 듯하여 만지작거리다 보니 앞뒤를 잘못 채운 것 같다. 아이가 없는 나는 아이들의 기저귀도 별로 갈아본 적이 없어, 초보 티가 확 났던 것이다.

나는 기저귀 가는 일이 하찮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천추부의 욕창은 눌리지 않도록 자세 변화를 시켜주는 것과 위생 관리가 핵심이다. 물론 의료인들이 죽은 조직을 적절히 제거해주어야 하지만, 기본은(그리고 앞으로의 예방을 위해서도)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깨끗한 기저귀가 있다.

이날같이 나 이외에 아무도 할 사람이 없는 상황에선, 일이 손에 익지 않아 거꾸로 채우는 실수를 하면서라도 어쨌든 해야 하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그 장소에 그 시간에 있었다면 해야 하는 일. 앞으로도 왕진을 지속한다면,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해오지 않았던, 하지만 환자분의 건강을 위해 정말 중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하나하나 하게 되는 이런 날들이 더해지겠지.

만화 『헬프맨』을 읽으면서 내 생각이 깨졌다. 일본 만화가 쿠사카 리키의 작품인 『헬프맨』은 일본 개호보험(우리나라의 장기요양보험과 비슷한 것)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데, 어떤 것이 존엄한 돌봄이고 무엇이 웰 에이징well-aging인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만화의 주인공, 어리숙하지만 다정한 요양보호사 온다 모모타로는 ‘기저귀를 가는 것이야말로 간호·간병의 꽃’이라고 얘기한다. 한 신입 직원이 돌봄 시설에서 일하고는 싶지만 기저귀는 갈고 싶지 않다고 하자, 모모타로는 "누구도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초보자에게, 그것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어 하지는 않아"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기저귀를 가는 것은 그만한 신뢰, 그만한 익숙함, 그만한 관계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만한 관계, 그만한 친숙함이 아닌데도 그분의 공간으로 너무 훅 들어갔던 게 아닐까.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과 맺고 싶은 관계라는 것이 있는데, 그분도 ‘자신의 담당 주치의’와 맺고 싶었던 관계라는 것이 있는데, 그분이 설정한 그 관계의 선을 내가 너무 순식간에 아무렇지 않게 넘어버렸던 것이 아닐까.

그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선을 넘는 불편함을 드리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선을 타고 넘을 수 있었을까,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게 넘은 선 밖으로 또 새로운 관계가 열릴 수도 있으니까.

수술실보다 병실을 구하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의 수술이 주로 앞당겨지는 것이다. 의료가 모두에게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와중에 엄마의 수술이 당겨지는 것을 본 나는 다행스러운 마음 한편으로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묘한 기분이었다.

교수님과 마취과 선생님들의 배려로 나는 엄마의 수술방 안에 들어가 전신마취 전까지 엄마의 손을 꼭 잡아드릴 수 있었다. 대장암 수술을 앞두고 불안한 와중에도 미래에 의사가 될 딸의 손을 잡고 의식의 저편으로 넘어갈 수 있었던 엄마. 마취된 엄마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자, 교수님은 눈짓으로 나가서 기다리라고 하셨다.

학생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묻어났다. 나는 다시 주저앉을 뻔했다. 이번에는 허탈해서. 아무리 학생은 공부가 중요하고 의대 본과 3학년은 연말고사가 제일 중요하다지만, 교수님, 그러시면 안 되는 거였어요. 제가 저 스페시멘을 보고 대체 뭘 알겠어요? 저는 지옥과 천당을 오갔다고요! 내가 허탈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수술장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십수 명에 달하는 우리 가족들이 모두 울부짖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놀라게 하셨다고요!

엄마는 퇴원할 때까지 계속 1인실에 입원해 계셨다. 가족들이 하지 말라는데도 스스로를 ‘달걀 껍데기 암 환자’라고 부르셨다. "나는 이제 달걀 껍데기처럼 깨지기 쉬운 사람이야. 너희 다섯 남매 낳아서 키우느라 너무 힘들었고 속이 다 상한 것 같아. 이제 장까지 잘려나가서 속이 더 비었어. 속 빈 달걀 껍데기 같아. 다들 그걸 알아줬으면 해." 자칫 우리가 ‘계란 껍데기’라고 잘못 말하면, 항상 ‘달걀 껍데기’라고 정정해주시곤 했다. 그 두 단어가 무슨 차이가 있느냐 물으면 ‘달걀 껍데기’가 발음이 더 예쁘고 더 나약하게 들린다고 하셨다.

1인실 입원료로만 천만 원 정도가 나왔다. 딱 예상했던 보험료만큼. 그 일로 인해 나에게 대학병원 1인실은 정말 비싼 곳, 아주 특별한 곳이라는 이미지가 남았다. 그리고 1인실에 입원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으면 수술 일정이 앞당겨질 수 있다는, 우리 가족에게는 다행이었지만 씁쓸한 자본주의 사회의 단면인 듯도 한 공공연한 병원의 비밀 한 가지도 알게 되었다.

엄마는 독시사이클린을 복용하느라 너무 고생하셨다. 이 항생제는 울렁거리고 소화가 안 되는 부작용을 일으키는데, 나도 인도 배낭여행을 갔을 때 말라리아 예방 목적으로 하루에 한 알씩 먹어본 적이 있다. 처음 며칠은 먹고 나면 울렁거리는 정도였는데, 1주일쯤 지나고 나자 먹기 전부터 슬슬 기분이 나빠졌다. 아직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울렁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다가올 울렁거림이 예상되어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하루에 한 알로도 여행의 설레는 기분을 충분히 망칠 수 있는 약이었는데 엄마는 그 약을 고용량으로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몇 달을 드셔야 했으니, 고충이 심했을 것이다.

몇 달을 꼬박 독시사이클린을 드셨지만 엄마의 암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커지지도 않았다. 엄마는 ‘싸구려 약’을 탓하기 시작하셨다.
"내가 약값이 780원 나왔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어. 희귀한 암이라니 희귀하고 비싼 약, 좋은 약을 먹었어야 했는데, 약이 너무 쌌어. 아무 효과도 없잖아. 다른 집은 항암 치료 한다고 집안 기둥뿌리 뽑힌다는데, 나는 암 환자 대우를 제대로 못 받네. 못 받아도 너무 못 받는 것 같아 서럽기도 해."

비싼 약이 좋은 약이라는 믿음은 환자들에게서 자주 보인다. 플라시보 효과라고 실제 아무런 약리적인 효과가 없어도 환자의 믿음만으로도 약효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진통제나 영양제 같은 종류에서 플라시보 효과가 특히 많이 나타난다. 이럴 때는 약이 비쌀수록 효과가 좋다. 한때의 나는 이 효과를 경시했었다. 믿지도 않았다.

전공의 때 파견 나갔던 지방 의료원에서 수액을 맞던 환자가 ‘이거 말고 좋은 거’를 계속 요구했다. 장염으로 인한 탈수를 교정하기 위해 수액을 맞으시던 참이었다. 대체 어떤 걸 드려야 할지 몰라 담당 과장님께 말씀드렸더니, ‘색깔 있는 비타민을 섞어주라’는 오더를 주셨다. 노란색 비타민이 수액에 섞여 들어가자, 아직 약효가 나타날 시간이 아닌데도 환자의 표정이 평화로워지고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과장님은 젊은 의사의 치기를 이해해주셨다. 그러면서 말씀하셨다. 내 주치의가 나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 나의 불편과 통증을 해결하기 위해 뭔가 알 수 있는(환자에게 직접 보이는) 시도를 해주는 것, 그 관계성의 확인이 환자에게는 필요한 것이라는 얘기였다. 꼭 의학적으로 필요한 치료만이 환자가 필요로 하는 전부는 아니라고. 플라시보 효과라고 우습게 보고 무시할 게 아니라, 그걸 어떻게 환자에게 더 도움이 되게 활용할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이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싸구려 약이라 효과가 없는 게 아니냐며 서운해하셨던 내 엄마에게 필요했던 건 실제로 비싼 약, 희귀한 약이 아니라 천만 원 어치의 위로, 천만 원 어치의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해요, 달걀 껍데기 엄마.

이 별것 없는 날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것은, 2년에 걸친 엄마의 암 투병기로 약간은 스산해져 있었던 가족 분위기가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왔다고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엄마가 대장 수술에 이은 생리적인 부작용을 가족들에게 거리낌 없이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여자들은 병을 앓는 순간에도 ‘여성성’을 잃지 않도록 영화나 소설 속에서 그려졌다. 암 투병이 얼마나 치열한 투쟁의 현장인데, 어떤 암을 앓을지 지정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생명력을 박탈당하고 초상화처럼 박제되었다.

여주인공의 이미지들이 실제 투병 중인 여성들에게 자기 신체 이미지에 대한 훼손으로 작용하고, 생리적인 현상들을 잘 호소하지 못하게 하는 굴레로도 작용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여성은 심지어 아플 때조차 여성스럽게 아파야 한다니!

나는 엄마가 겪고 계셨던 대장 절제의 합병증을, 특히나 배설과 관련한 생리적인 이야기들을 이토록 솔직하고 가감 없이 들을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 그런 얘기를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는 딸과 엄마 사이라서 행운이었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사무치게 그리웠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맨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의사와 환자들. 저렇게 가까이에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신뢰를 나누는 그들. 온 얼굴로 안타까움과 기쁨을 드러낼 수 있었던 시절. 이제 다시는 우리에게 돌아올 수 없겠지?

여러 다양한 과의 업무를 배워야 하는 가정의학과의 특성상 3년차인 치프 연차가 되어서도 매달 다른 과를 돌아다니게 되었다. 달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동료들과 적응하는 것이 힘들다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나는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달은 산부인과로 파견 가는 달이었다.

힘들었다는 얘기를 너무 자주 듣다 보면, 익숙하다 못해 식상해지는 구석이 있는 법이니까.

산모들이 겪는 소화불량, 두통, 우울과 불안, 피로, 입덧 등은 아주 충격적이었다. 엄마가 입덧이 심했다고 하실 때는 으레 그런가 보다 싶었지, 얼굴이 허옇게 질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힘든 거였어? 그리고 기형아나 유산에 대한 불안이 이렇게 큰 거였어? 임신이란, 도저히 어이쿠야, 싶었다.

산부인과 파견이 끝난 후 가끔 가정의학과 직장 동료들의 태아 얼굴 3D 사진을 찍어줄 일이 있었다. 아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또 피곤에 지친 친구의 얼굴을 보다가 나도 문득, "잘 키웠네, 진짜 고생했다" 하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울컥하여 수습하지 못할까 봐 참곤 했지만.

어떤 남자가 부인에게 무통분만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는 분개했다. 그 남자는 자신의 부인이 신께서 내려주신 성스러운 산고도 없이 아이 낳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는 그 절정의, 환희의 순간이 현대 의료 기술로 오염되는 것 같다나 뭐라나. 무통주사가 아이의 탄생이라는 기적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 같다나 뭐라나.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산모가 거부할 수는 있다. 똑같은 이유로 거부하는 산모들도 있다. 그래도 그건 본인이 감내하겠다니까 그러려니 하는 것이지, 감히 남편이 반대할 수는 없는 문제다. 차라리 돈이 없어서 무통분만을 하기 힘들다고 하면 안타깝지만 이해는 간다.

우리는 언니의 입원실에 모여 앉아 그 남편 욕을 했다. 그런 자식은 마취도 안 하고 사랑니를 뽑아버려야 한다고 했다가, 마취 없이 개복 수술을 해야 한다고도 했다. 여성들이 겪어내야 하는 힘든 순간에 대해서만 어찌나 ‘자연화’하려는 시도들이 넘쳐나는지. 임신·출산의 고통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둥, 생리통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둥, 심지어 여자는 자연 미인이 최고라는 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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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의 마지막 집으로 옮겨앉는 각별한 일을, 이 여름에 했다.

나는 겁이 많아서 토끼띠가 그냥 토끼띠가 아니고 겁토끼띠라고 하는데 우리 선생님은 나보고 늘 이러신다. "덜덜 떨면서도 하고 싶은 일은 다하지." 그렇기도 한 것 같다. 꼭 해야겠다는 일은 하는데 그 대신 다른 일은 전혀 못한다. 아마도 해야겠다 싶은 일이, 내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일은 대체로 아니었기 때문에 덜덜 떨면서도 해낸 것 같다.

이번에도 해내기를 바랄 뿐이다. 또 고단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는 바에야, 하나를 얻으면 또 버려야 할 것도 하나 있기 마련 아니겠나 생각하며 즐겁게 오갈 생각이다.

여러 사람을 위한 집을 짓는 것은 오래 생각한 일이다. 아끼는 제자들이 많아서, 그 품은 뜻을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는 그들이 너무 생활에만 부대껴 마모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들이 가끔은 책도 읽고 쉬기도 하며 자신을 추스르고,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뜻도 새롭게 할 작은 터를 일구고 싶다는 생각을 참으로 오래 해왔다. 그래서 일을 벌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세상에서 받은 것이 참 많아서, 나도 세상을 위해 뭔가 작은 일이라도 해서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이제 아주 빈손이 되어버린 나 자신도 아주 불안하지 않을 수는 없고, 무엇보다 내 아이들한테 미안하다. 남들은 자녀 뒷바라지며 혼사 등등에다 많은 힘을 쏟는데······.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제 힘으로 살아가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덜컥 무슨 일인가를 저질러 그 애들을 괴롭히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제아무리 좋은 생각과 뜻이라 하여도 결국은 자기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어미를 그래도 이해하고 격려와 지원을 보내는 내 아이들이 고마울 뿐이다.

그런데 마지막 거처에는 무얼 가지고 가야 하나. 무얼 버리지를 못하는 성격인 데다가, 특히 선물을 받은 것이거나 하면 더더욱 못 버려서 얼마 안 되는 짐 모두에 추억이 잔뜩 묻어 있다.

아이들 생각만 하면 늘 미안한 마음뿐이지만, 그래도 생각해 본다. 그 미안함과 간절함이 아이들과 나를 묶어주지 않았나, 그 마음이 말없이 전해져 아이들이 일찍 철들지 않았나 싶다.

그 옅은 노란빛 꽃은 아주 작은 등불처럼 캄캄한 어둠 속에 켜져 있었다. 큰 별들이 길섶에 쏟아져내린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감동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어둠 속에서 자그마한 꽃등을 켜고 이리 향기롭기까지 하다니.

젊은 날, 늘 눈앞이 캄캄했다. 세상이 온통 어둠이었다.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다림으로 괴로웠다. 그저 괴로웠을 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내가 저 아득한 어둠을 헤쳐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이 소박한 꽃 앞에서 이런 생각이 든다. 젊은 날 그렇듯 세상이 캄캄했던 것은 내가 그 어둠을 헤쳐서 갈 곳이,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만큼 힘껏 살아온 것 아닐까.

하는 일이 다 반듯하게 되기야 했으랴마는, 그나마를 위해서 그야말로 죽을 듯 살아왔다는 느낌이다.

가만가만 날아다니는 반딧불이, 내게 나직이 묻고 있는 것 같다.
"형설의 공 ? 쌓았는가?"

어둠 속에는 저렇듯 어느 하룻밤 동안 달빛 속에 향기로운 꽃이 될 것을 위해 제 몸에 향기를 담아가는 것도 있고, 또 그 꽃에 의지하여 언젠가 하늘로 날아갈 제 몸을 키우는 것도 있다. 그리고 그런 고요히 어울려 있는 삶의 이치들을 이 어두운 들길에서 이제야 내가 조금씩 깨우치고 있다.

다시 생각해 본다. 어둠이 사람에게는 울고 몸부림치라고만 있으랴. 긴 기다림으로, 견딤으로 내 삶에도 조금 향기가 배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향기롭기까지 할 리야 없지만, 내 자신에게 혹시 어떤 양질良質의 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다스려온 긴 기다림, 견뎌온 어둠의 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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