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쓴 독서록을 타이핑해 올리면서 혼자 붙잡은 물음이다. 많은 사람들이 던져왔던 궁금증이니만큼 많은 생각들이 있고 제가끔의 사람들에게 적절하게 맞아 떨어지는 현답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쓴다는 건 뭘까.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달라지고, 자라기를 기대하면서 이제 갓 열 살이 넘은 아이들에게 읽은 것들에 대한 글쓰기를 시키는 걸까?

 

큰 아이와 둘째 아이가 쓴 글은(글은 글이니까) 놀라울 정도로 결이 다르다. 둘째 아이가 쓴 글을 보면 책 전체의 내용을 아우르거나 풀어나간다든가 하는 식의 종합하는 성향이 전혀 없다. 그렇다고 각개격파인 것도 아닌데, 책을 읽다가 뭔가 본인이 꽂힌 '순간'이나, 어떤 사건에 대한 특정한 캐릭터의 리액션이라든가, 이런 몹시도 사소한 디테일에 완전히 자신을 쏟아부어 감정과잉의 상태로 그게 그래서 이랬거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하고 서두를 열어서, 나라면... 하고 엄청나게 몰입한 흔적이 보인다. 그런데 그게 너무 아이다워서 웃음이 나... 그렇게 본인 감정을 쏟아부어서 쓸 수 있다는 것도 좀 부럽고, 여하간 그래서 이 책의 전반적인 흐름이 뭔지는 한 개도 모르겠지만, 뭐가 이렇게 얘를 미치게 만들었나가 궁금해서 그 책을 들춰보게 하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인가, 몇 줄 안 쓰는데도 얘는 쓰는 걸 너무 힘들어 한다. 감정적으로 탈진할 것 같다는 짐작만 한다. 기껏해야 만 10세가 담아놓고 감당할 수 있는 마음의 크기가 커 봤자 얼마나 클까. 그걸 한껏 들고 있다가 와르르 쏟아붓고 헉헉헉, 힘들어하는거지...

 

반대로 고학년 초딩이는 되게 (본인이 가져갈 수 있는 최대한도로) 쿨해질 수 있는 포지션에서 쓴다. 책 읽기를 아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늘 '거리를 두고' 읽는다. 그러니까 써 오는 글도 남 얘기하듯 걔가 오늘 이러저러해서 요랬더랬지... 하는 느낌이 엄청 강하다. 사춘기를 목전에 두고 있어서 그런가 자신을 겹겹이 포장해서 잘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 게, 원래의 성격에 더해져서 더 단단하고 방어적인 문장만 쓰는 느낌... 그걸 내가 억지로 들어내려고 해서도 안 되고 좀 치워줄래? 요구해서도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가끔은 좀 더 날 것의 감정을 보여 써도 괜찮아, 라고 말해주고 싶기도 하다.

사실, 그건 나도 잘 안 되는 건데.

내 마음이 이렇더라, 그리고 내 생각은 이렇다, 라고 남이 봐도 상관없어라고 생각하면서 펼치는 게 수줍고 무서운 사람도 있는 법이잖아. 라고 쓰고보니 이 아이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어떻게든 말은 한다쳐도 그 다음은 수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런 두려움이 있었다. 우연히 독서모임에 나간지 이 년 가까이 되면서 그런 방어적인 태도가 많이 고쳐졌다. 걱정하던 것과는 달리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이나 품었던 생각들에 마음을 열고 들어주었고 어떤 때는 공감도 해주었다. 어느 때에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받아들여주었는데 그 경험이 흡사 가득 찬 곳간의 빗장을 들어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 시간은 더 걸릴수도 있겠지만, 어떤 글이든 일단 쓰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쓰는 일로 엄마와 의견을 나누고, 대화할 수 있는 또다른 소통채널 하나를 튼 것을 아이가 좋아해 준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보람이 있다.

 

아무나 쓸 수 있는 글, 누가 베껴써도 원래 쓴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는 글, 그런 것이라도 내처 쓰고 쓰고 또 쓰면서 조금씩 내 글을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 시작을 조금 더 빨리 앞당기면, 시행착오의 기간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계산도 좀 있었다. 어릴 때 글쓰기가 너무너무 싫어서 몸살을 앓았던 기억이 난다. 책 읽는 것은 좋았지만 읽은 것을 가지고 뭘 느꼈는지, 뭘 생각했는지 써오라고 하는 게 진저리가 났다. 아무 생각 안 하고, 무감각하게 읽은 나이의 어린애에게 뭘 그렇게 요구하는지 짜증이 겹겹으로 쌓였다가 터지곤 했다. 그때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면서 어떻게 쓰든 아이들에게 이만큼이나 쓴 게 대단하다고 칭찬한다. 어쨌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무엇이든 하면서 걷고 있는 길에 표식을 놓는 편이 유익한 건 확실하니까.

 

아이는 엄마, 오늘 내가 쓴 거 올려줬어? 하고 묻고, 자기 방(이라고 부른다)에 글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는 사실에 굉장히 뿌듯해하며 웃었다. 자기를 숨기고 쓰는 글이든, 내가 낸데... 하고 쓰는 글이든, 쓰는 사람이 즐겁게 쓴 글이 모여서 뭔가를 이룰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개인적으로) 근거는 아직 못 찾은 믿음으로 오늘도 아이들의 글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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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에게 딸이 있다고 가정하여 쓴 소설이다. 주인공은 안나, 트레이시, 벤, 마크라는 오스트레일리아 아이들이다. 어느 날 안나는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 준다. 

 

 히틀러에게는 하이디라는 딸이 있다. 하이디는 얼굴에 크고 빨간 반점이 있었고, 한 쪽 다리가 짧아 절었다. 히틀러는 딸이 전투를 보지 못하게 하려고 시골집에서 살게 하였다. 학교도 보내지 않고 가정교사를 두어 집에서 공부하게 했다.

히틀러가 딸을 시골집으로 보낸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이 가장 우월하다고 주장하며 환자, 장애인 등 몸이 불편한 사람이 게르만 족의 대를 잇눈다는 것에 대해 몹시 못마땅해 하였다. 그래서 장애인, 환자, 집시를 모두 죽였는데 다리를 절고 얼굴에 반점이 있는 자신의 딸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었을 것이다.

안나의 이야기가 다 긑난 후, 눈치가 빠른 마크는 하이디의 손녀가 안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살면서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을 이야기를 가짜처럼 꾸며내 이야기하는 안나를 보고 마크는 미안하다고 한다. 그런 마크를 보고 안나는 어깨를 으쓱한다.

 

 독재자의 딸, 아들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먹고 싶은 것 먹고, 놀고 싶으면 놀고, 아랫사람도 많이 거느리며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커서, 자기 부모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게 된다면, 그렇게 계속 살 수 있을까?

물론 딸, 아들이 부모님께 독재를 멈추라고 요구해도 독재자는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하라고 그만하실 분들이면 처음부터 독재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도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작은 노력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들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가치있고 중요한 일이다.

 

2018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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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들에게 희망을>은 여러가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처음 읽었을 때는 저학년이 읽는 동화책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애벌레, 기둥, 나비, 고치 등등 모든 등장인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를 따져 보면, 이 책이 참 많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노랑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과 달랐다. 다른 애벌레들이 남들을 따라 애벌레 기둥에 오르고 있을 때, 노랑애벌레는 자신의 꿈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 고치의 과정을 거쳐 아름다운 나비로 성장한다.

호랑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들처럼 애벌레 기둥에 오르고 싶어한다. 기둥에 오르던 중, 호랑애벌레는 나비가 된 노랑애벌레를 보게 된다. 둘이 서로 말은 안 통하지만, 호랑애벌레는 생각한다. 자기가 다른 애벌레를 밀치고 올라가는 것보다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아가는 것이 훨씬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기둥은 무의미한 경쟁을 상징한다. 애벌레들은 자기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쓸데없는 경쟁을 하게 된다. 고치는 성장하기 위한 과정을 상징한다. 나비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답게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부분마다 자리잡고 있다.

 

 고치의 과정을 지나 완성된 나비는 진정한 자아를 의미한다. 노랑애벌레는 진짜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멋진 나비로 성장하게 된다.

 

2018년 1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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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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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읽어야겠다, 작정하고 잡은 책보다 전혀 아무런 계획없이 들었던 책들이 때로는 더 오래 머물다 가기도 한다. 사람처럼 책도, 연이 있어서 닿는 책이 있고 그렇지 못한 책이 있는가보다 생각한다. 왜 때문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책이 처음 신간목록에 있을 때부터 '경애하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경애의 마음>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줄만 알았다. 설마 사람 이름이었을 줄이야. 그게 나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는지 <빨간책방>에서 이동진 작가도 같은 이야기를 언급했다. 그러니, 껍데기만 흘깃 쳐다보고 '본 적 있어, 알아' 라고 말하는 건 얼마나 세상 의미없는지... 그렇게 오해한 채 '들어본 적 있어'라고 할 뻔 했던 책을 손에 들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중요한 사건인 화재사고가, 실제 있었던 사고였다는 걸 몰랐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사고가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몰랐다. 같은 해의 씨랜드 사건은 기억하고 있는데, 왜 이건 몰랐을까. 아마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도, <경애의 마음>이 베스트셀러로 오래 머무르는 만큼 이제는 이 사건을 모를래야 모를 수 없게 된 사람들도 많아졌겠지. 어떤 마음으로 작가는 이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를 이렇게 짜게 되었을까를, 경애의 마음에 앞서 작가의 마음을 궁금해했다.

 

경애는 외로움을 몸에 새긴 사람이다. 많은 일들이 경애를 발 딛고 선 현실에서 여러 번 내몰았다. 딱히 경애의 잘못이 없었음에도 그 일들은 경애의 마음에 어떤 흔적을 남겼다. 반복적으로 '어디든 버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결국엔 도로 잘 접어 주머니에 넣고 가게 만드는' 일들로 경애는 자꾸 마음 속 상흔 사이로 방을 내고 그 안에 틀어박혀 많은 생각을 곱씹었을 것이다.  

 

밤새도록 끙끙 앓다가 문득 깨어 등이 땀으로 젖어 있으면 오히려 이상한 안도감이 들면서 친구들의 죽음을 겪었던 날 자신에게 왔던 거대하고 차가운 그것, 슬픔에 안심하던 경애가 있었다. 그리고 때론 그 모든 것을 느끼는 마음 따위는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경애가 있었다. 거기에 경애가 있었고 그리고 2002년 어떻게 길을 통과해야 그 호프집이 있던 골목을 보지 않을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경애가 있었다.

하지만 경애는 결국 어느 길로 가든 그 골목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72쪽

 

이런 고민들로 상처를 기우면서 경애는 버틴다. 외면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종류의 일들은 시간 속에서 삭히면 그럭저럭 견딜만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경애에게는, 말마따나 근근히 버텼던 경애를 담금질이라도 하듯 계속해서 필사적으로 싸워야만 견뎌낼 수 있는 일들만 찾아온다. 너무하기도 하지. E의 죽음 뒤로 경애는 어떻게든 시간을 헤쳐나와 성인이 되었고 연애도 했다. 남자친구였던 산주는, 한때 경애를 지지해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E는 죽었잖아, 죽을 정도로 아팠다는 거잖아. 선배, 나는 그걸 떠올리면 무언가를 용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대체 내가 뭘 용서할 수 없는지는 모르겠어. 나는 뭘 용서해야 하는 거야, 누구에게 화를 내야 하는 거야, 누가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경애를 산주가 안거나 끌어당기면 분명히 따뜻해졌다. 너무 선명하고 가까이 있던, 아주 세세하고 세밀하던, 그러니까 어느 크고 순한 개의 털이나 풀잎의 잔가시들을 만질 때 느껴지는 그 작고 촘촘한 살아 있음. -163쪽

 

이렇게 찰나지만 분명히 손에 잡히는, 확실한 온기가 주는 안정감이 이 외로운 사람에게 얼마나 큰 버팀목이 됐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그런데 산주라는 사람은 아주 간단하게 이 관계를 정리해 버린다. 상호 합의하에 깔끔하게 정리되는 인간관계라는 게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냐마는 이런 식은 안 되는 거 아닌가... 산주는 그냥, 본인 말마따나 우연히 경애의 인생에 걸어들어온 것처럼 가볍게 도로 퇴장해 버린다. 사실 그것도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산주가 정말 나쁜 놈인 건, 퇴장했으면 끝이지 계속 경애의 무대에 허락도 없이 기웃대거나 심지어 난입도 여러 번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무런 양해 없이 본인 기분 내키는대로... 가는 건 니 맘이지만 다시 (오는 것도 아니고) 왔다리 갔다리 하는 건 니 맘대로 하면 안되잖아요.

 

적어도 경애에게 이별을 통보할 때 산주는 경애의 선배이기도 한 그 여자를 선택하면서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어, 라고 정확히 이야기했으니까. 그때 둘은 막 끓기 시작한 전골을 앞에 두고 있었는데 이윽고 경애가 왜, 왜 그런 일이 벌어졌지, 라고 묻자 그렇게 되었어, 좋아하게 되었어, 라고 다시 말했다. 내가 너를 우연히 좋아한 것처럼 그런 일은 그렇게 벌어졌어, 라고.

...

설거지도 빨래도 요리도 하지 않는 일상에서는 오로지 오늘만 있는 것 같았다. 산주가 있었던 어제도 없고 산주가 없는 내일도 없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사이에서 되도록 현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경애의 마음만 있었다.

- 96쪽

 

경애가 얼마나 위태위태하게 외줄타기를 하면서 그 시기를 거쳐왔을지 생각도 안 하는 산주는 계속해서 경애의 인생에 들락댄다. 당신 역할은 끝났는데요. 그만 제 인생에서 나가주세요. 그렇게 말해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그러면 경애가 경애가 아니게 되었을 테지. 그러거나 말거나 아직까지는 어떻게든 그 때론 있는 것 같기도, 없는 것 같기도 한 마음을 붙든 채 하루하루를 뒤로 넘기는 경애에게 또 새로운 시련이 온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경애는 이렇게 생각한다.

 

경애는 노트를 간직하다가, 공공연한 따돌림과 적대 속에 근근이 버티던 겨울, 소각장에 던져넣었다. 아무래도 마음을 잃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날들이라고 생각했다. -30쪽

 

그렇지만 마음을 내다버리고 싶다고 그게 버려지는 거면, 얼마나 세상 살기가 편하겠습니까. 경애는 때로는 방치하고, 외면하고, 속이기도 하지만 그 마음의 본바탕이 되는 그 무엇까지 버릴 생각은 하지 않는다. 경애는 언제 어느때고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다. 그게 자기의 본분이라고 강하게 믿고 있는 것 같다. 주인을 닮아서, 경애의 마음도 갖은 고생과 수모를 겪을지언정 자기의 자리를 요지부동으로 지킨다. 경애뿐만일까, 누구든 마음 한 구석 어딘가는 유난히 질기고 단단한 구석이 있을 것이다.

 

"네, 빗자루라는 물건을 처음 본 사람처럼. 그냥 알아서 쓸라고 하자 위에서 아래로 쓸자니 먼지들이 나한테 오는 것 같고 아래에서 위로 쓸자니 도망가버릴 것 같고 그렇네요, 하고 망설이더군요. 마음이라는 것도 다르지 않으니까, 박주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한번 써본 마음은 남죠. 안 써본 마음이 어렵습니다. 힘들겠지만 거기에 맞는 마음을 알고 있을 겁니다. 공상수 팀장은 그 힘을 믿고 자책하지 말아요." -291쪽

 

아무도 몰라줄 것 같던 경애의 힘든 마음을 조선생은 알고 있다. 알아 준다. 예전에도 그렇게 힘들어봤기 때문에, 지금도 힘들겠지만 잘 견뎌낼 거라는 말을 이렇게 아름답게 할 수 있다니. 물론 일상적인 구어체에서 나오기가 몹시몹시몹시 힘든 종류의 말이지만 누군가가 나를 두고 이렇게 말해준다는 것에서... 또 그 힘듬을 참아낼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조선생은 경애의 마음 바탕에 깔려있는 게 뭔지 알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그게 비록 책 속의 인물이고 현실에 존재할 가능성이 너무너무 낮다고 하더라도. 이 문장이 경애에게 닿지는 않았지만 그건 어쩌면 문장이라는 창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될 준비를 하고 있던 말일지도 모른다. 언젠가 써 본 마음일 것이고, 그래서 또 여기에 맞는 마음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겪어본 적 없는 마음이라면, 어렵더라도 배우면 되는 것이고.

 

좋은 소설, 고마웠습니다.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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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사 놓은 것들 중에서 골라 읽어야 맛이니까. 흠흠... 자꾸자꾸 사 쟁여놔야 책을 읽지. ㅎㅎ

굿즈로 받은 요놈, 굉장히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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